소설리스트

162화.파코추 마탑 지부 (163/278)

《파코추 마탑 지부》

 다음 날 새벽이 되자 하룬과 대원들은 물론 아카족 전사들까지 모두 마당으로 나왔다.

 “괜찮은 거야?”

 하룬의 눈이 레미에게 향했다. 그녀가 전사들의 치료를 전담했으니 확인하는 것이다.

 “네. 이젠 다 나았어요. 포션까지 먹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안색이 조금 창백할 뿐 모두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와 달라진 것은 딜런에게 경의가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수련하러 갑시다.”

 하룬은 사람들과 함께 산속의 공터로 향했다.

 “에구! 삭신이야.”

 “우리는 좀 빼주지.”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투덜거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왔다. 누가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대원들과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두 마법사는 좋은 자리를 골라 명상에 들어갔고 다른 사람들은 가볍게 몸을 푼 다음 각자 수련을 시작했다. 도네이스와 마리도 이 시간에는 궁술이 아니라 기초 체력 훈련과 근력 수련을 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하룬은 성안으로 향했다. 식료품과 약재, 그리고 옷을 사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탑에 들러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통보도 해야 했다.

 그런 그를 두르본과 레미 그리고 옥세르가 뒤따라 다녔다. 전사들의 대표나 다름없는 이들이니 앞일을 생각해서 거래를 직접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동행한 것이다. 나머지는 각자 수련을 하거나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세 전사는 물건을 구입하면서 가격을 흥정하는 하룬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는 한편 중간에 있는 노점에서 갖가지 주전부리를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탄툰 마을만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양을 살 필요가 없었지만 다른 아키족 마을과도 거래를 할 생각에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해야만 했다.

 밀가루가 무려 만 포대에 호밀과 보리 가루까지 수천 포대씩 구입했다. 그들이 주로 섭취하는 암염 대신 새하얀 소금도 천 포대 구입했고, 각정 향신료도 잔뜩 샀다. 각종 약재는 종류별로 열 포대씩 챙겼고 옷 종류는 요즘 유행하는 속옷부터 시작해서 평상복까지 수천 벌을 샀다.

 모두 합해서 7만 골드가 넘게 들어갔지만 하룬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나 바가지를 쓰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상인들은 무려 30퍼센트의 할인율을 적용해서 물건을 팔았던 것이다.

 ‘이게 영웅 포인트의 효과인가?’

 그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레미를 제외한 세 사람의 기세가 워낙 흉악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구입 목록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주문하고 나서 돌아다니며 그 가격을 알아보자 상당히 싸게 구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젠 마탑으로 가자.”

 “마탑엔 왜요?”

 막대 사탕을 입에 문 레미가 귀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주술사라서 그런지 마탑이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살 게 있어.”

 “뭐요?”

 여느 때 같으면 이렇게 꼬치꼬치 묻지 않을 텐데 어째 그곳에는 가기 싫은가 보다.

 “들어가는 것은 나 혼자 들어갈 테니까 너희들은 이 근처에서 뭐 좀 먹고 있어.”

 “알았어요.”

 “하하하! 뭐 사줄 건데?”

 옥세르는 먹을 거란 소리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간이나 양념을 하지 않은 음식만 먹고 살다가 달고 짜고 매운 음식을 먹게 되었으니 회가 동한 것이다.

 “먹고 싶은 거 먹어. 나는 상관없으니까.”

 “호호호! 약속한 거다.”

 “난 종류별로 모두 먹어볼 거다. 그리고 다른 놈들 것도 사가지고 가야지.”

 “그러든지.”

 식탐이 있어도 동료를 챙기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다만 야수처럼 위험해 보이는 이들이 길거리에서 주전부리를 먹는 모습은 별로였지만 하룬이나 그들이나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는 성격이니 상관없었다.

 하룬은 레미에게 30골드를 챙겨 주었다. 그리고 두르본과 옥세르에게 3골드씩을 주었다. 그 정도면 노점에 파는 음식은 얼마든지 사먹고 사가지고 가도 될 것이다.

 그들을 시장에 놔둔 채 하룬은 파코추 마탑으로 향했다. 이곳 데모 시티에도 많은 마탑의 지부들이 있지만 자신과 관계가 있는 유일한 곳이니 그곳으로 향한 것이다.

 파코추 마탑 지부는 마치 거꾸로 세운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부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듯 밖에서 보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조형미가 두드러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십 대 후반의 소녀였다. 마법사 특유의 로브였지만 가슴과 허리, 그리고 둔부 부분은 따로 손을 본 듯 성숙미를 강조한 복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절로 끌고 있었다.

 “찾으시는 마법 물품이 있으신지요?”

 실내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긴 마법 아이템들은 그 가격이 엄청나서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하니 손님이 많을 리가 없다.

 “포션을 사고 싶습니다만.”

 “아, 포션요? 마탑의 포션에 대해서는 잘 아시나요? 신전의 포션과는 달리 외상에만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죠?”

 밝은 것은 좋은데 말이 너무 빨라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부류는 이미 해란 자매를 통해 경험을 해본 하룬이지만 절로 인상이 굳어졌다. 그녀는 하룬의 그런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린 듯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아시니 찾는 거겠지요. 그럼 일단 2층으로 올라가서 직접 물건들을 보시지요.”

 하룬은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공간 확장 마법이 펼쳐진 듯 본격적인 매장이라고 할 수 있는 2층은 밖에서 보는 것에 비해 열 배는 더 넓었다. 2층에는 구역별로 나누어져 인챈트가 된 마법 무기들이나 방어구들은 물론 포션과 스크롤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하룬은 하급 포션 천 병과 중급으로 오백 병을 주문했다. 만약 자신과 돌풍 용병대가 쓸 생각이었으면 상급까지 구입했겠지만 이것들은 아카족 전사들을 위한 것이다.

 스크롤도 공격용과 수비용, 그리고 탈출용 등 그 종류별로 백 장씩 구입했다. 스크롤들은 진작부터 구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워낙 비싸서 살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이참에 구입해 둘 생각인 것이다. 비록 용병대에 5서클 마법사가 두 명이나 있다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용병들의 생활 아닌가.

 “마법 배낭도 봅시다.”

 “아, 네에! 잠시만요!”

 점원은 하룬이 구입하는 수량을 받아 적으며 내내 놀란 눈빛을 하고 있다가 결국은 양해를 구하고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그 엄청난 수량에 대박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마탑에서 파는 물품 중 가장 비싼 것에 들어가는 마법 배낭까지 찾자 자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결국 지보장이 나온 것 같았다. 청수한 얼굴의 중년 마법사가 점원과 함께 내려온 것이다.

 “반갑습니다. 전 이곳 지부장 프라이스입니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잠시 인사를 나눈 후 프라이스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룬을 보며 물었다.

 “마법 배낭을 찾으신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 크기를 원하시는지요?”

 “마차 한 대분이 들어가는 것이 있습니까?”

 “네, 당연히 있지요. 저희 파코추 마탑은 마탑 중 인챈트 계열이 가장 뛰어납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프라이스는 무척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가격이 어느 정도 됩니까?”

 “개당 20만 골드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구입하신 것들이 있고 그 기도가 예사롭지 않은 분이니 14만 골드까지 드리겠습니다.”

 역시 같은 할인율이 적용되는 것을 보니 영웅 포인트의 이점이 맞긴 한 것 같다.

 “용량이 더 큰 것도 있습니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찾는 하룬의 말에 지부장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보아하니 돈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파이린 제국이 건국하면서 신분제도가 무너져 마탑의 주 소비 계층인 귀족들과 기사들이 몰락하는 바람에 한동안 고가의 마법 물품이 전혀 팔리지 않던 차였다.

 ‘이건 정말 대박이다!’

 프라이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대화를 나눌 손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제 집무실로 가서 말씀을 나누실까요?”

 “그럴까요?”

 하룬이야 다른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선선히 그를 따라 3층에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들을 따르던 여점원은 눈치 빠르게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크고 안락한 파우치에 등을 묻은 하룬이 잠시 실내를 구경하는 사이 차가 준비되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궁금하기는 할 것이다. 이렇게 대량으로 마법 물품을 사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작은 용병대를 하나 이끌고 있습니다.”

 “아! 용병대장이시군요.”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차를 마시고 그 맛을 음미하는 하룬의 눈치를 보며 말을 주저하는 프라이스였다.

 “차향이 아주 좋군요.”

 “하하! 대륙 남부 해안가 특산 머로우의 어린잎을 볶아 만든 차입니다. 상큼한 뒷맛이 특징이지요.”

 “과연 그렇군요.”

 잠시 한담을 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사실은 저희 전대 탑주께서 친히 만드신 마차 다섯 대분의 마법 배낭이 세 개 있습니다. 5서클의 마법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보존 마법은 물론 주인 인식 마법과 청결 마법까지 같이 걸려 있는 최상급의 마법 배낭입니다.”

 “아! 후버론 님이 직접 만든 마법 배낭이라면 기대가 되는군요.”

 하룬은 익숙한 이름을 듣자 반가운 얼굴을 했다. 그가 막 후버론의 안부를 물으려는 찰나 프라이스가 얼굴을 하룬에게 가까이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그 가격이 80만 골드입니다.”

 “흐음, 80만 골드라.”

 너무 큰돈이라 감이 오지도 않는다. 특히 현실과 비교를 하면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수명은 얼마나 되지요?”

 “8서클을 바라보는 대마법사가 만든 물품이니 족히 수백 년은 가지 않겠습니까? 사실 수명은 저희도 잘 모릅니다. 다만 기록에서 말하길 7서클 마법사가 만든 마법 배낭이 350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하군요.”

 하룬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그나저나 고민이었다. 80만 골드를 투자해서 마차 다섯 대분의 마법 배낭을 사는 것은 좋은데 그 돈을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의 생각대로 상단을 운영하려면 마법 배낭은 필수였다.

 그가 생각하는 상행은 소수 정예로 움직여, 보통 상인들은 가지 않는 오지 깊숙이 들어갈 생각이었다. 특히 아카족처럼 거래할 물건이 고가인 경우는 제법 많이 남을 것이다.

 물론 보통 상인들이 이 구상을 듣는다면 당장 게거품을 물고 말 것이다. 수십만 골드의 마법 배낭을 이용해서 상행을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한 것이다. 그 돈이 있으면 안전하게 상단을 운영해서 조금만 더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난 아카족이나 드워프 그리고 엘프들이랑 거래를 할 거니까.’

 이왕 생각한 것이니 마음을 굳혔다. 물론 상단을 만드는 일은 이것과 별개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하룬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까.

 “그럼 그것 세 개와 마차 한 대분 분량을 넣을 수 있는 배낭 열 개를 사는 것으로 하지요. 대금은 보석도 가능합니까?”

 “아, 그럼 당연하지요.”

 프라이스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환해졌다.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것이다. 한 번에 이런 거래를 성사시킨 것은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마탑 지부가 하는 역할 중 가장 큰 임무에 속하는 마법 물품 매출에서 데모 시티 지부가 1위를 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었던 것이다.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여점원은 언뜻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고는 입을 떡 벌리고 침을 흘리다가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성격이 시원시원하시군요. 상인들이라면 흥정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요. 그럼 제 권한으로 총 가격에서 40퍼센트 할인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최상급은 개당 48만 골드, 상급은 12만 골드이니 배낭만 264만 골드군요. 거기에 포션과 스크롤 가격이, 어디 보자. 같은 할인율을 적용하니 모두 32만 골드네요. 그럼 총액이 296만 골드가 되는군요.”

 프라이스는 말을 하면서도 연방 입술에 침을 적시고 있었다. 이 액수는 데모 시티 지부가 생긴 이래 최고의 매출액인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1년 매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액수인 것이다.

 하룬은 말없이 아공간에서 각종 보석들을 꺼냈다.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 몰라 대충 꺼낸 것이다.

 “일단 감정부터 부탁합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보석 감정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지부장은 여점원에게 눈짓을 했다.

 “최대한 빨리 데려올게요, 스승님.”

 “그래, 밀렌. 최대한 빨리.”

 알고 보니 단순한 점원이 아니라 마법사였나 보다. 그것도 지부장의 제자였다.

 밀렌이 뛰어나가고 얼마 안 되어 지부장과 비슷한 연배의 여자 마법사가 들어왔다.

 “아, 피레알! 어서 와요. 소개할 분이 있어요.”

 지부장이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아마 밀렌에게 뭔가 듣고 들어온 것 같았다. 눈을 빛내며 하룬을 바라보는 모양이 마치 친인을 맞이한 것 같았다.

 “데모 시티 마탑의 부지부장 피레알이라고 해요. 이분의 평생 반려랍니다. 이런 큰 손님을 맞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룬은 이제야 부지부장이 왜 이렇게 자신을 반기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이 거래로 인해 지부장에게 큰 이득이 있을 거라는 것은 그녀의 태도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데모 시티에 상단의 거점을 마련하게 되면 자주 거래할 마탑이니 제대로 인사는 해야 했다.

 “반갑습니다.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그런데 하, 하룬이라면? 돌풍 용병대!”

 인사를 하던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만이 아니라 지부장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아까 인사를 할 때 하룬의 이름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에! 돌풍 용병대라니. 하룬 대장이라니.”

 망연자실한 얼굴로 혼잣말을 하던 지부장이 아무 말도 없이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의 반응에 의아해진 하룬의 얼굴을 본 피레알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스승님에게 대장이 방문한 것을 알리러 간 거예요. 스승님께서는 대장이 조만간 찾아올 거라고 정중하게 맞이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거든요.”

 “아! 그랬군요.”

 이번에는 의뢰 때문에 온 것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할 계제는 아니었다.

 잠시 후 지부장의 집무실은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꽉 차버렸다. 그중에는 영문을 모르는 보석 감정사도 있었는데 그는 지부의 수뇌부들과 마탑의 전대 탑주의 포스로 인해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하하하! 왔으면 나부터 찾지 않고.”

 후버론은 섭섭한 듯 눈을 흘기며 하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프라이스와 피레알은 하룬이 후버론과 구면이라는 것에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다.

 “오늘은 구입할 것이 있어 들른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사이에 꼭 일이 있어야 얼굴을 볼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한차례 안면이 있는 사이이긴 하지만 이런 반응은 좀 과했다. 때문에 하룬은 좀 당황스러웠지만 후버론은 거침이 없었다.

 “다들 인사하거라. 고요의 땅에서 다크 엘프들을 상대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돌풍 용병대의 영웅 하룬 대장이다.”

 그의 말에 인사를 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법사들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모두 그의 쟁쟁한 위명은 잘 알고 있었기에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반응이 얼마나 열렬한지 하룬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침착성을 잃고 말았다.

 후버론은 당황한 것이 역력한 하룬의 얼굴에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마법사들이 자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네의 그 영웅적인 행위 때문이 아니라, 자네가 지금까지 알려진 정령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정령 마법은 거의 사라진 마법이라 우리에게는 무척 관심이 가는 분야거든.”

 ‘아!’

 하룬은 이들이 자신에게 호감과 호기심을 갖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되자 내심 탄성을 질렀다. 어째 용병에게 과한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간이 되면 우리에게 정령 마법에 대해 강론을 해주지 않겠는가? 우리도 이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거든. 혹시 아는가? 정령 마법으로 인해 이들의 경지가 올라갈지.”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누구에게 강론을 할 만큼 정령 마법에 대해 정통한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익히게 되었을 뿐 그 이론적 토대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안 그래도 부탁할 것이 있었는데…….”

 “흐음. 그런가? 아쉽군. 토론을 하다 보면 서로 얻는 것이 많을 텐데.”

 후버론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나중이라도 어느 정도 정령 마법이 정리되면 반드시 여기 계신 분들과 토론을 하도록 하지요. 저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하하하! 그래 주시게. 약속한 거네?”

 “네. 그러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곳과 거래를 하도록 말했습니다.”

 “정말인가?”

 “네.”

 “하하하! 고맙네, 고마운 일이야. 암, 자네와 아그레시아 황녀 전하의 관계나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래야지.”

 귀족층이 사라지고 아직 그 공백을 메울 새로운 소비 세력이 등장하지 않은 때라 모든 마탑은 심각한 재정 적자를 안고 있는 상황이다. 비록 이방인들이 대거 마법 아이템들을 구매하고는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스크롤과 같은 물품조차 구입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무려 300만 골드에 해당하는 마법 물품을 구입하는 통 큰 하룬은 그야말로 마탑으로서는 귀중한 손님인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귀히 여길 일은 따로 있지만 말이다.

 “지부장, 이번에 하룬 대장이 구입한 물품의 총 대금이 얼마라고 했지?”

 “네, 스승님. 총 296만 골드입니다.”

 “내 재량으로 거기서 20퍼센트를 더 할인하게. 비록 이익은 감소하겠지만 향후를 생각한다면 하룬 대장과의 거래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네.”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저와 안사람 역시 스승님에게 그것을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프라이스의 말에 후버론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그래, 더 필요한 것은 없나?”

 “있습니다.”

 “뭔가?”

 “탑주님이 만드신 마법 배낭이 더 필요합니다.”

 하룬은 이번 참에 마차 다섯 대분의 최상급 배낭을 더 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많은 마법 배낭에 도대체 뭘 채울 생각인가?”

 하룬은 일순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왜, 영업 비밀인가? 알아야 우리도 준비를 할 것이 아닌가?”

 마수의 가죽이나 약초는 몰라도 드워프제 아이템들이나 엘프제 아이템들은 희귀한 물품이라 신생 상단이 자체적으로 처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가의 물품을 오랫동안 판매해 온 마탑은 매력적인 우호 세력이나 중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룬은 생각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이 만든 무구들과 엘프들이 만든 아이템들을 가져올 생각입니다.”

 “헛!”

 후버론을 비롯해서 실내의 모든 마법사들이 기함을 했다.

 “뭐! 정말인가?”

 “네. 돌풍 용병대와 형제처럼 지내는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있습니다.”

 하룬의 말에 후버론은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그 귀한 아이템들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오색 광채로 밝아지는 것 같았다.

 “카하하핫! 그들의 아이템에 우리 마탑의 특기인 마법 인챈트가 가해지면 그야말로 레전드급 무구가 나올 거야! 하하하하!”

 “마, 맞습니다, 스승님. 반드시, 절대로 우리 마탑이 그 물건들의 인챈트 작업을 맡아야 합니다.”

 두 사람은 하룬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인챈트를 언급하며 흥분했다.

 ‘인챈트? 그렇구나! 예술미와 완성도가 높은 아이템에 마법 인챈트 과정이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명품이 탄생할 거야.’

 기껏해야 판매에 도움을 받고자 이야기를 꺼냈는데 뜻하지 않게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그것을 부탁할 생각이었습니다.”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의 입은 귀에 걸렸다.

 “캬하하하! 고맙네, 우리는 정말 최고의 파트너가 될 걸세.”

 후버론이 괴소를 터트리며 하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건 그야말로 대박 중에 대박인 것이다. 드워프들과 엘프들이 만든 아이템들을 독점적으로 인챈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마탑 지부들이 벌어들이는 것의 몇 배는 벌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이 보장되는 것이다.

 마탑 본부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지부에 나와 있는 마법사들은 상행위에 재능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마탑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지부의 마법사들이 본부에서 찍히거나 도태되어 지부로 파견을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각종 마법 실험으로 인해 무한정에 가까운 자금을 필요로 하는 마탑에서는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내는 일 못지않게 돈을 버는 일을 중요시하고 있다. 때문에 어느 마탑이나 재정을 담당하는 일은 부탑주들이 맡고 있고, 그들의 경지가 낮은 경우라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지부에 파견된 마법사들은 마탑에서도 촉망받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는 해당 영주와의 정치나 조율까지 담당하기에 능력이 없는 이들은 아예 지부로 나올 생각도 못 하고 마탑 본부에서 남의 치다꺼리나 해야 하는 것이다.

 “하하하! 아그레시아 전하께서 자네를 각별하게 여기시는 것을 내 노망난 생각으로 혹시 남녀 간의 좋은 감정이기를 바라면서도 이해가 가질 않아 이상했건만 이제야 알겠군. 혜안을 가지신 전하께서는 자네의 능력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거야.”

 “무, 무슨 말씀을…….”

 하룬은 아그레시아 황녀와 남녀 간의 정을 운운하는 후버론의 말에 전신에 후끈한 열기를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식겁한 것이다. 행여 이런 말이 나돌기라도 하면 구 테론 제국은 물론이고 파이린 제국의 인사들까지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할 것이다.

 “하하하! 농이야, 농! 내 어린 시절부터 아그레시아 전하의 혜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네를 챙기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봤던 것이네. 나 역시 자네를 만나고 자네의 넓은 흉금과 초인적인 능력에 감탄했지만 그 정도로 전하가 자네를 귀히 여기는 것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

 “하마터면 탑주님의 농담에 간담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하! 아무튼 우리 파코추 마탑과 돌풍 용병대 간의 정리와 밝은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 죽어도 안심이 되네.”

 탑주직을 내놓고도 마탑의 미래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하룬은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은 저런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 베드론은 어서 이 보석들이나 감정해라. 혹시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당장 내부에 있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보내거라.”

 “네에, 탑주님!”

 보석 감정을 맡은 베드론이 입맛을 다시며 하룬의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마법사들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지부장 부부를 제외하고는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손님! 죄송하지만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아니 무슨 소리요? 아직 해가 창창하거늘.”

 “죄송합니다. 귀한 손님이 방문하셔서 지부의 모든 마법사들이 영접을 해야 합니다. 대신 내일 다시 오시면 20퍼센트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허엄, 뭐 그렇다면야.”

 “이리 오십시오. 방명록을 작성해 주시고 방문 시간을 예약해 주시면 제대로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할인까지 해준다는 데야 인상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얼마 후 파코추 마탑 지부의 문은 단단하게 닫혔다.

 몇 안 되는 손님들이 다 나가자 후버론은 하룬을 데리고 넓은 홀로 나왔다.

 “그래, 그 일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 후버론을 향해 하룬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행히 대원들이 제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그래야지! 이 일은 돌풍 용병대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일일세.”

 “다만 워낙 위험한 지역이니만큼 그 점을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네. 내 재량을 발휘해서 최대한의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지. 이백만 골드에 해당하는 보수를 준비했네.”

 하룬은 그 액수에 만족했다. 이벨린 황녀에게 크게 챙겼으니 파코추 마탑의 보수는 그리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반응에 후버론은 만족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하룬의 돌풍 용병대가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한 이래 후버론은 이 일에 미온적인 다른 마탑의 수뇌부들까지 설득해서 최대한의 대가를 약속했다.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제가 오래전에 받은 의뢰가 하나 있는데 어떤 유물을 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알아보니 황실 마탑이었던 파코추 마탑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게 뭔가?”

 “지혜의 파편이라는 고대 유물입니다.”

 “아! 그거. 알고 있네. 좋아! 우리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물건이니 문제 될 것은 없겠네. 지혜의 파편은 지금 당장 워프를 통해 가져오게 하지. 그리고 나머지들은 이 일에 동행할 아이들이 가지고 올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지혜의 파편을 받는 즉시 돌아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러게. 아무튼 일이 잘 풀려 정말 다행이네.”

 의뢰도 중요했지만 향후 돌풍 용병대와 미래를 약속했다는 점에 후버론은 만족하고 있었다. 서로 간에 신뢰만 유지된다면 파코추 마탑으로서는 돌풍 용병대가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드워프제와 엘프제 아이템에 부가가치를 더 올릴 수 있는 마법을 인챈트해서 안정적인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기분 좋게 한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부탁한 지혜의 파편이 워프를 통해 전해져 왔다.

 드디어 행방이 알려진 지혜의 파편 중 하나를 손에 넣은 하룬은 감회가 새로웠다.

 ‘이 안에 들어있는 지혜는 나를 또 어디까지 성장시켜줄까?’

 설레는 마음으로 지혜의 파편을 소중하게 아공간에 넣은 하룬은 여전히 아쉬워하는 후버론과 지부의 마법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마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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