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헤르쉬 (159/278)

 <<헤르쉬>>

아침 식사를 겸한 장시간의 회의를 통해 산적한 기지의 업무를 대충 처리한 하룬은 편한 마음으로 비욘드로 돌아왔다.

그가 로그인했을 때는 이미 해가 꽤 높이 올라왔다. 항상 몸 안에 소환된 상태로 있는 나이아와 위신느가 그의 몸과 옷을 청결하게 유지시켜 주었기에 씻을 필요는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카족 전사들이 짝을 지어 대련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실전을 치르듯 사뭇 위험한 광경이 연출되었지만 용케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늦게 일어났네요."

전사들과는 달리 방에 머무르고 있었던 레미가 그를 발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응, 레미. 밤새 고민할 것이 많아서."

"하룬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전사들은 하룬과 눈을 마주치자 나름대로 눈이나 표정으로 인사를 해 왔는데 다행하게도 레미의 말이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었는지 어제와 같이 심각한 얼굴은 아니었다.

'정말 진짜 전사들이야.'

하룬은 비록 오지에 사는 사람들이기는 해도 전사라는 이름에 알맞게 한번 수련을 시작하면 멈추는 법이 없어 매진하는 그들에게 감탄했다.

전사들의 수련을 지켜보던 하룬은 할 일을 생각하고 숙소를 벗어나 번화가로 향했다. 제국 정보 길드의 지부를 찾아가는 길이다. 헤르쉬를 통해 최근 제국의 상황을 파악할 셈이다. 상단 일을 하려면 정세에 정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국 정보 길드의 지부는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 지역에 있었다. 몇 개의 정보 길드 지부와 용병 길드 그리고 이 도시가 발전하면서 급격하게 외형과 세력을 키운 이곳 용병단 본부들이 한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딸랑! 딸랑!

문을 밀고 들어가니 문 안쪽에 걸려 있던 방울이 청아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안쪽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네.'

예전에 고요의 땅으로 갈 때 테베 백작성의 정보 길드 지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뭔가 음습하고 위험한 냄새가 풍기던 그곳과 달리 이곳은 비록 용병 길드 지부처럼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룬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문을 뒤로하고 잠시 실내를 둘러보았다.

사무실 한쪽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실내를 반 정도롤 나눈 기다란 대가 있었고 한쪽은 출입구인 듯 개방이 되어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개별 상담을 위한 작은 테이블들 십여 개가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실내를 반으로 가른 대 위에는 두 개의 창구가 있었고 각각 두 명씩의 길드원들이 접수를 받으며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인상은 테베 성 지부와는 달리 밝고 친절해 보였다.

정보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 마치 은행과 같은 인상을 받은 하룬은 두 사람이 서 있는 한쪽 창구에 줄을 섰다.

"다스란 1톤을 가진 상단의 정보를 원하신다고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길드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의뢰서에 내용을 기재했다. 의뢰자인 중년 사내는 불안한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네. 원래 약조를 한 상단이 기일을 어겨 우리 상단의 입장이 딱하게 되었습니다.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세 배의 위약금을 내야 하는데…… 최지급으로 알아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행키 상단은 저희 길드의 2급 고객으로 20퍼센트 할인을 하더라도 최지급이라면 80골드를 주셔야 합니다."

"지불하겠소."

사정이 어지간히 급한 듯 행키 상단에서 나온 중년인은 당장 주머니를 꺼내 돈을 지불했다.

"최지금은 두 시간 이내 정보 입수가 가능한지 확인될 겁니다. 가서 볼일을 보고 오셔도 되고 이곳 2층에 간단한 차와 음식을 파는 대기실이 있으니 그곳에서 대기를 하셔도 됩니다."

"대기하겠소."

창구의 대화를 들은 하룬은 내심 많이 놀랐다. 예전 테베성 지부만을 생각한 하룬으로서는 너무나 다른 정보 길드의 모습에 무척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곳은 정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부가적으로 차와 음식까지 팔면서 이익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의 바로 앞에 있던 중년 여자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가족인 듯 애틋한 목소리로 신상 명세를 설명한 여자에게 창구의 길드원은 각 등급의 요금을 말해 주었고, 의뢰자는 형편이 그리 좋지 않은 듯 보통으로 신청했다.

"제국 내에 존재한다면 일주일 안에 그 결과가 나올 겁니다. 물론 신분 패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찾는 기간이 더 길어질 겁니다. 일주일 안에 결과가 없는 경우는 착수금만 받고 나중에 그 결과를 찾게 되면 나머지 잔금을 주시면 됩니다. 아주머니의 경우 착수금은 3골드입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에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라도 알면 좋을 것을 …….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중년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손때가 탄 작은 주머니를 꺼내 실버화로 착수금을 지불하고는 가슴에 품은 기대와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는 듯 창구 길드원에게 거듭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길드장과 통신을 좀 하고 싶은 데요."

하룬의 말에 창구 길드원은 이해를 하지 못한 듯 잠시 대답을 못했다.

"길드장이라면 지금 이곳 길드 사무실에 계십니다만…… 무슨 일로?"

그는 하룬이 면담을 통신이라고 잘못 말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걸 증명하듯 그는 하룬을 향해 약간의 비웃음을 담은 눈길을 보냈다.

"난 길드장인 베론 자작과 통신을 하고 싶습니다."

"네에?"

창구의 길드원이 눈을 크게 뜨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 누구십니까?"

그는 이제야 하룬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굴에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하룬의 용모는 확일할 수 없었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구레나룻과 무성한 수염밖에 없었다.

그가 영상기억마법으로 머리에 새겨 놓은 유력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이 이상해졌다. 감히 길드를 대상으로 장난을 치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 있어 하늘과 같은 길드장과의 통신을 원하는 것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그의 경험상 100퍼센트 정보 길드의 무서움을 모르고 장난으로 하는 짓이지만, 그는 눈앞의 사내가 풍기고 있는 기세와 분위기에 그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눌리는 이런 위압감은 길드의 지부장에게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더구나 무심한 가운데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의 뒤로는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후광이 몸으로 느껴졌다.

정보를 다루며 온갖 인간 군상을 접해 본 그의 경험은 이 사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그가 살면서 운이 좋아 근거리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벨트란 공작과 길드장의 호위장인 소드마스터 타혼을 만났을 때만 느꼈던 것이다.

하룬은 대답 대신 차고 있던 팔찌를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용병? 3급 이상이군."

팔찌로 그 신분을 증명하는 것은 용병밖에 없다. 귀족이나 마법사 그리고 기사는 반지 형태의 인장印章으로, 상인이나 장인은 특별한 마법 처리를 한 금속 신분 패로, 그리고 평민들은 마법에 친화성이 강해 위조가 거의 불가능한 오간주 나무로 만든 신분 패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한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테론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새로이 나타난 파이린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팔찌의 안쪽에 새겨진 내용을 읽었다.

그의 눈이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커지더니 마침내는 눈초리가 찢어질 듯 벌어졌다.

"돌……."

비명처럼 날카롭게 시작했던 그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소리를 낮추었다.

"돌풍 용병대의 그 하룬 대장입니까?"

"그렇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만수르라고 합니다. 2급 요원으로 한때 헤르쉬 자작 부인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반갑군요. 그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네. 안전한 곳에서 잘 계십니다. 길드를 변혁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덕분에 우리 길드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숨겨 왔던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베론 자작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그녀가 평소 꿈꾸던 모습으로 길드를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길드장이나 헤르쉬와 통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지부장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만수르 씨를 보니 정보 길드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눈에 실감했군요."

하룬의 말에 만수르는 기쁘고 들뜬 표정을 지으며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누구지?'

창구와 상담 테이블에서 의뢰자들을 상대하고 있던 길드원들은 부지장인 만수르가 저렇게 공손하게 예의를 지키며 지부장 사무실이 있는 안쪽으로 안내하는 모습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하룬! 언제 나온 거예요?"

헤르쉬는 무척이나 흥분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하룬이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연이어 물었다.

"혹시 의뢰 때문에 나왔어요?"

의뢰를 받고 나왔냐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볼일이 있어 혼자 나왔어요."

"캬악! 그럼 거기 있어요. 내가 직접 갈 테니까요."

괴성을 지르는 헤르쉬. 아무래도 뭔가 크게 흥분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진정해요."

이거야 원, 완전히 상대가 바뀐 것 같았다. 정보를 물어보려던 하룬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 지부장 있어요?"

하룬은 기괴한 얼굴이 된 막베로토 지부장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헤르쉬의 말을 들었기에 하룬이 자리를 비켜 주자 그 자리에 앉아 수정구를 보고 앉아 하룬이 건네 준 통신구를 착용했다.

"데모 시티 지부장 막베로토입니다."

"막베로토! 하룬 대장 잘 모셔요. 지금 바로 거기로 워프를 할 거니까 마법사들에게 통보해 줘요. 그동안 대접이 소홀하면 안 돼요. 만약의 경우가 생기면 알아서 생각하세요."

헤르쉬의 말에 막베로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잘 모르겠지만 헤르쉬의 평소 손속이 혹독했는지 차를 한 잔 마시기위해 방을 나서고 있는 하룬에게 시선이 고정되고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넵! 맡겨 주십시오."

막베로토는 마법사에게 통신을 끊으라는 말도 할 새도 없이 막 문을 열고 나가는 하룬을 향해 비대한 몸을 날렸다. 등뒤에서 옷깃이 날리는 소음과 공기의 파동을 느낀 하룬의 몸이 빠르게 움직여 작은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꽈앙!

얼굴로 문을 박은 막베로토의 두 콧구멍에서 진하고 뜨거운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문에 코피를 묻히며 바닥으로 얼굴을 처박은 그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운 대장,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요."

그래도 눈치가 빠른 마법사가 통신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문 앞에 쓰러진 지부장을 깨우는 대신 2층으로 올라가는 하룬을 확인했다.

"에고! 서브 마스터가 어지간히 무서웠나 보네."

마법사는 자신이 반쯤 마신 물 잔을 들어 지부장의 얼굴에 뿌렸다. 하지만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어느새 코가 두 배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코뼈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막베로토를 똑바로 눕히고 얼굴의 피를 대충 그의 소맷자락으로 닦고 난 후 힐 마법을 펼치는 마법사의 눈은 하얗게 웃고 있었다.

'정말 완전히 돼지 같구나.'

지부장이 서서히 깨어나는 눈치가 보이자 그 마법사는 지하에 그려진 워프 마법진을 담당하는 마법사들에게 준비를 하라고 이르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일이 잘못되면 자신까지 서브 마스터의 진노를 살 판이니 알아서 기어야 한다.

하룬은 2층에 있는 접객실 창가에 서서 진한 허브 차를 마시며 거리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이제는 늦봄이다. 물론 계절의 변화가 거의 없는 현실과는 달리 이곳은 그래도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이가 20도 정도 되는 터라 옷차림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아슬아슬하군.'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 전사 중 한 명은 몬스터의 가죽으로 방어구를 하고 있는데 한쪽 어깨와 한쪽 ㅓ벅지가 중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릴 정도로 노출이 되어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남자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즐기는 듯 당당하고 도도하게 걷고 있는 여전사의 걸음이 무척이나 섹시하고 도발적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조금 심한 수위일 뿐 상당히 많은 여자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고, 그 대상은 주민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았다.

작년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곳 여자들의 옷차림이 많이 화려해지고 노출이 심해졌다. 어쩌면 이방인들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이방인들은 거의 항온 상태의 현실에 살면서 배리어를 두드리는 엄청난 빗줄기를 통해 우기와 건기 정도는 인식하지만 계절에 따른 온도 변화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온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여자들의 경우 그곳에서 하지 못했던 옷을 통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기도 했다.

"에효! 이방인들이 세상을 완전히 망쳐 놓고 있어요. 저 옷 꼴이 뭐요, 도대체가! 요즘은 가슴도 안 나온 계집애들도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니. 세상이 망하려고 그러나. 안 그렇소?"

언제 다가왔는지 나이가 지긋한 상인 차림의 남자 하나가 열변을 토하며 하룬의 의견까지 물었다. 접객실 안은 그들 둘밖에 없었다.

'언제 다가온 거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레벨과 함께 본신의 능력이 올라가면서 하룬의 주의력은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져서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도 이 건물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기척을 알 수도 있을 정도였는데 전혀 감지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넋을 넣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사이에도 다른 이들의 이야기나 기척은 여전히 느끼고 있었던 하룬이다.

"젊은 친구가 무슨 머리를 그렇게 길러 얼굴을 가렸소? 흉터라도 있나?"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을 쏘아보자 그 상인은 조금 무안한지 화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나요? 에헴. 난 팔콘 상단이라는 작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에밀 준이오. 그러는 청년은 이름이 어떻게 되나?"

하룬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현실에서는 머리도 묶어 넘기고 수염도 정리를 해서 젊어 보이지만, 이곳은 다르다. 용병 아카데미에서 허약했던 체질을 강건하게 바꾸고 나서는 한 번도 제 나이를 알아 본 이가 없을 정도로 노안이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으로도 나이를 속일 수 없단 말이지. 이 양반 위험한 사람이군.'

분명 의도적인 접근이다. 불과 얼마 전의, 아니 정령을 소환하지 않은 상태라면 말소리와 그 분위기를 통해 의도를 추측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 정령을 상시 소환한 상태라서 그들의 능력을 일부나마 가진 현재 상태에선 자신이 무서울 정도로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을 읽어 낼 수 있게 되었다.

하룬이 대답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노인은 화가 치미는 듯 얼굴을 붉히며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막 목청을 통해 공기가 말이 되어 나오기 전에 하룬이 빙긋 웃었다.

"날 아는 분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 늙은이가 언제 당신을 봤다고……."

분명 자연스러운 얼굴 표정이지만 눈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룬은 이제 그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게 할 의뢰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면 내 동정을 감시하고 싶은 겁니까?"

하룬은 희미하게 웃으며 단정적으로 말하자 에밀 준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아무리 부인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휴우! 소문보다 더하군. 어떻게 알았소?"

노인은 혀를 내둘렀다. 단호한 하룬의 눈빛에 굴복한 듯 더 이상 강변하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제 밑천입니다. 어느 쪽에서 오셨습니까?"

"이거 참."

그는 황당하다는 듯 하룬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그레시아 전하께서 너무 칭찬이 과하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짧았군. 파코추 마탑의 후버론이라고 하네."

"아!"

하룬은 탄성과 함께 태도를 바로 했다. 제국의 고위급 인사를 꿰뚫고 있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7서클의 마법사로 마탑에서 30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아 항간에는 8서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떠들어 대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며 그 나이가 무려 100살이 넘는다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어떻게 마탑주께서 이런 곳엘……?"

"허허허! 그런 대장은 왜 이런 곳엘 왔소?"

"저야 탑주 어르신과는 달리 자유로운 신분이질 않습니까."

"나도 지금은 그렇소. 그리고 마탑주 자리는 이미 사제에게 넘겼으니 나도 이제는 자연인이라오."

아까 말로 놀린 것이 분한지 후버론은 하룬의 말에 꼬박꼬박 반론을 하며 하룬을 압박했다.

"하하! 제가 졌습니다. 사실은 요즘 데빌 산맥 근방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해서 정보를 확인하려고 들렸습니다."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기에 아카족의 상황을 떠올린 하룬이다.

"그랬군. 역시 소문대로 돌풍의 정보력은 뛰어나군. 나 역시 그것 때문에 전하의 부탁을 받고 자네를 만나러 왔네."

하룬의 눈이 빛났다. 설마 무심코 한 말에 파코추 마탑의 전대 마탑주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곳에 뭔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지금 상황이 바로 그랬다.

"전하께서 그 일 때문에 대장을 만나고 싶어 하오."

"1황녀 전하께서는 잘 계시지요?"

"무탈하시네. 아마 평생 마탑에서 나오지 않으실 걸세."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러게 말일세. 전하께서는 현재 파이린 제국이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고 있기에 더 이상 세상에 나올 뜻이 없다고 하셨네."

'1황녀도 신분제를 타파할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뜻밖의 방해꾼이 나타났다.

"하룬 대장!"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접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헤르쉬!"

"호호호!"

헤르쉬는 하룬을 향해 환한 웃음을 보이며 걸어오다가 그와 마주 앉은 이의 얼굴을 보고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후버론 탑주님이 어떻게 여길……?"

"허허! 역시 알아보는군. 나 역시 마탑 인명영상기록으로 보는 순간 알아봤지만 서브 마스터도 날 아는가 보는군. 역시 정보 길드의 수장답네."

후버론은 헤르쉬를 금방 알아보았다. 비록 마탑에서 나오지 않고 손님도 거의 접대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실세들에 대해서는 영상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르쉬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 역시 반갑네. 하룬 대장을 만나러 왔다가 귀한 분까지 만나게 되는군."

후버론은 마치 이웃의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헤르쉬에게 편한 인상을 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미 후버론 대마법사가 하룬을 찾아왔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었소. 잠시 조용한 곳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접객실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약간 느껴졌다. 헤르쉬와 지부장인 막베로토가 흥분해서 2층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이목이 쏠린 것 같았다.

"지부장!"

"네, 서브 마스터."

막베로토가 비대한 몸으로 그녀의 부름에 기립 자세를 취했다.

"안내해 줘요."

"네.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지부장은 연신 땀을 닦으며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자 천장과 벽의 상당 부분이 넓은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나왔는데 안에는 갖가지 식물들과 꽃들이 있었고, 작지만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는 시내도 있었다.

"멋진 곳이군요."

하룬의 감탄에 막베로토가 땀을 닦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 유일한 취미가 원예와 조경이어서 공을 들여 가꾼 곳입니다. 저쪽에 앉을 곳이 있으니 그리로 가지요."

그의 뒤를 따라 하트 모양의 특이한 잎이 무성하게 난 나무들이 만들어 낸 통로를 지나자 시내가 만들어 낸 작은 연못과 곁에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티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호오! 정말 정성이 듬뿍 담긴 곳이군. 우리 마탑에도 이런 곳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법사란 족속들이란 정말 살풍경하기도 하지."

후버론 마탑주의 말에 막베로토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전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마침 난방에서 좋은 허브 차가 들어왔습니다."

그가 뒤로 물러나자 헤르쉬가 안주인이 되어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잠시 정원을 두고 한담이 이어졌다.

"잠시 헤르쉬가 아닌 줄 알았어요."

전에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왜요?"

헤르쉬는 예전과는 그 외양이 무척이나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전에는 최고급의 화려한 옷에 진한 화장과 각종 장식으로 화려한 미모를 드러냈지만, 지금은 편하지만 맵시가 나는 옷차림에 가벼운 화장으로 청순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었다.

'이 여자, 좀 변했군.'

남에게, 특히 여자의 변화에 둔감한 하룬도 느낄 정도로 그녀의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아마 길드 사무실의 변화된 모습도 그녀의 변화에 기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쉬는 많이 예뻐졌군."

"정말요? 푸훗!"

헤르쉬는 하룬의 칭찬에 기쁜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응. 길드 사무실의 모습만큼이나 아주 밝고 좋아요."

이제는 그래도 여자 보는 눈이 제법 생긴 하룬이다. 헤르쉬는 자신이 아는 모든 여자들 중 가장 예쁜 편에 속했다. 단순한 미모로만 보면 벨이나 아리도 그녀를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고려한다면 우리 아리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말이지.'

깊고 맑은 큰 눈과 적당하게 솟은 예쁜 코, 붉고 작은 입술은 작은 얼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었고 손으로 만지면 묻어나올 것 같은 깨끗한 피부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청초하면서도 깊고 그윽한 눈빛 그리고 작은 행동에 담긴 타고난 교태로 인해 소녀의 청순미와 숙녀의 성숙미가 뒤섞인 그녀의 모습은 이미 100세를 넘긴 탑주까지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 말 진정이라고 믿을게요."

아름답다는 말을 숱하게 들은 헤르쉬다. 10대 후반에 정략적으로 결혼을 한 후 제국의 사교계를 좌지우지했던 그녀이니 그런 소리야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예쁘다는 말은 아버지인 베론 자작을 제외하고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하룬의 칭찬에 가슴이 뛰었다. 그와 어떻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면서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누군가의 칭찬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기는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자신의 대화롸 반응을 기묘한 눈빛으로 주시하는 후버론 마탑주만 없었다면 하룬과 뭔가 다른 분위기를 끌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왠지 많이 아쉬웠다.

헤르쉬는 사심에 빠진 자신을 느끼고 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대로 더 이 분위기가 지속되었으면 좋겠지만 일은 일인 것이다. 작정을 한 헤르쉬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하룬?"

"데빌 산맥에서 마수들이 준동하고 상인들이 죽는 등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어 그걸 확인하느라고 당신에게 요청하러 온 거요. 탑주님은 당신을 기다리다가 이곳에서 뵙게 된 것이고."

헤르쉬는 하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이야 후버론의 반응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돌풍용병대는 뛰어난 정보 라인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곳에 대한 동향은 자신도 얼마 전에야 겨우 입수할 수 있었던 극비 정보였다.

그와 말을 더 나누려던 헤르쉬는 생각이 난 듯 후버론 탑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록 말로는 할 수 없었지만 용건을 털어놓으라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막베로토가 워프 마법진을 통해 날아온 자신에게 하룬에 대한 내용 말고는 탑주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탑 중 가장 권위가 있는 파코추 마탑의 전대 탑주이며 항간에는 죽었다거나 혹은 8서클에 올라 은거했다는 신비로운 인물이 하룬과 같이 있다는 것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허허! 이 늙은이는 하룬 대장을 만나려고 용병 길드에 있다가 대장을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너무 책망하지 말구려."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제가 그런 마음을 먹겠어요. 다만 탑주 같으신 분이 손수 하룬 대장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에요."

"껄껄! 역시 제국 정보 길드의 서브 마스터답군."

사근사근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털어놓으라고 압력을 가하는 헤르쉬에게 탑주는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마탑과 거래를 할 때는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인가? 어린아이가 정말 뛰어나군.'

"하룬 대장이 대충 이야기를 꺼냈으니 나도 굳이 숨기지는 않겠네. 사실은 1황녀 전하의 부탁을 받아 하룬 대장을 찾고 있었네. 통신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겸사겸사 세상에 나왔네. 용병대가 있다는 캘프란 마을이라는 곳으로 가려다가 내 볼일 때문에 잠시 이곳에 들렀네."

헤르쉬는 후버론의 말에 뭔가를 떠올린 듯 탄성을 질렀다.

"아! 여기 데모 시티의 파코추 마탑 지부장으로 온 프라이스 마법사가 탑주님의 제자였지요?"

"허허허! 서브 마스터가 잘 알고 있었군. 늘그막에 제자로 받긴 했지만 제대로 가르친 것도 없어 스승으로 불리는 것도 미안한 제자라네."

"아니에요. 프라이스 마법사야 나이 서른둘에 5서클, 마흔넷에 6서클에 오른 천재잖아요."

"허허허!"

이젠 세상사에 달관했을 대마법사지만 제자의 칭찬에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낸다.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사랑이 느껴져 하룬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탑주님 정도 되시는 분이 하룬 대장을 직접 찾는다는 것은 좀 이해가 가질 않네요."

헤르쉬는 집요했다. 다른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후버론은 미소와 함께 본심을 털어놓았다.

"껄껄, 누가 보면 서브 마스터와 하룬 대장이 사귀는 줄 알겠소."

그의 농담에 헤르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왠지 부끄러우면서도 달콤한 기분이 된 헤르쉬는 순간적으로 하룬을 훔쳐보았다.

하룬은 진짜인가 생각하는 듯 눈을 치켜 올렸지만 기분이 상하거나 다른 마음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헤르쉬는 부끄러운 마은에 마탑주에게 도끼눈을 떴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껄껄껄! 농담이었소. 사실은 하룬 대장에게 직접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 세상으로 나왔지. 무겁기만 하던 자리를 넘기고 나니 죽기 전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1황녀 전하께서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오게 된 거라네."

"제게 직접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요?"

하룬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마탑과 자신은 접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던 것이다.

"저기 차가 나오고 있으니 우리 용건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이런 멋진 정원을 가꾼 이가 준비한 차를 마셔 봅시다."

아무래도 헤르쉬가 있는 자리에서는 이야기를 꺼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다시는 묻지 않았다. 세 사람은 차의 향을 콧속 한 가득 들이마신 다음 적당하게 끓인 찻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호오, 향이 아주 뛰어나군."

"그러네요. 달착지근하면서도 넘어가는 맛이 순하네요."

후버론과 헤르쉬가 차를 맛보고 감탄했다.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막베로토의 등과 가슴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말린 마로이 꽃잎과 볶은 벨풀의 어린잎으로 만든 차군요. 정신을 맑게 해 주고 기력을 돋우어 주는 좋은 차입니다. 더구나 적기에 따서 적당한 조건에서 말리고 볶은 덕분에 향과 맛이 살아 있군요. 가히 명장으로 불릴 장인의 솜씨입니다."

하룬의 말에 막베로토는 물론이고 후버론과 헤르쉬도 깜짝 놀랐다. 본래 차를 즐기는 그들이지만 향과 맛을 보고 그 재료를 알아내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긴, 대장은 오미차라고 불리는 새로운 차를 황자 전하들에게 소개한 이력이 있군요."

헤르쉬가 오미차를 언급하며 하룬이 차에 대해 감평하는 것을 수긍하자 후버론 역시 1황녀로 인해 자신도 마셔 본 적이 있는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차를 하룬이 선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차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화제가 하룬에게 향했다.

"그럼 이곳에는 그 정보 때문에 온 거예요?"

그런 일이라면 대장인 하룬이 직접 이곳에 움직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 질문이다.

"더불어 개인적인 일도 있지요."

"개인적인 일이라면?"

개인적인 일이니만큼 묻는 것조차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요하게 묻는 그녀의 태도에 이상한 것을 느낀 하룬은 순순히 말을 해 주었다.

"지인이 작은 상단 하나를 만들기를 원해 겸사겸사 도와 주러 온 겁니다."

"지인이요?"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이왕 털어놓은 것이니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나와 이름이 같은 이방인이오."

"아!"

이제 이해가 간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정보를 다루는 이답게 후버론의 존재를 생각하곤 더 이상은 파고들지 않았다.

"전 사실 대장이 제국의 의뢰를 받은 줄 알았어요."

잠시 말을 멈추고 하룬의 반응을 살핀 헤르쉬는 말을 이었다.

"사실은 대장이 말한 지역인 데빌 산맥 근처에서 이상한 일이 생겨 제국 황실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대장이 그 일 때문에 황실로부터 의뢰를 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고요의 땅에서 제국의 행사를 그렇게 방해하고 겁 없이 이런 곳으로 올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헤르쉬의 말을 듣는 순간 하룬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제길!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구나.'

파이린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아무리 계약에 의해 적아敵我를 오가는 용병이라고 해도 회심의 포위망을 뚫는 데 큰 역할을 한 그와 돌풍용병대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공방들은 물론이고 제국 정보길드까지 찾았으니 제국의 정보 조직에게 그의 행적이 노출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룬은 자신의 생각 없는 행동을 자책했다. 이제 세상일에 대해 꽤 많이 알고 나름 성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모르는 것투서이였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했어도 알 수 있었는데. 아무튼 빨리 움직여야겠다.'

"그래도 나와 같은 용병에게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눈치가 이상하면 사라져 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당황한 것을 보이기 싫어 그렇게 말했지만 헤르쉬는 진지하게 들은 모양이다.

"하긴, 대장의 능력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헤르쉬는 버처리비크와 같이 하늘을 비행하던 하룬을 떠올리며 선선히 하룬의 말을 수긍했다. 그 정도 능력이면 암습이 아니면 황제의 친위대가 통째로 와도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어쩌면 며칠 안에 파이린 황실에서 의뢰가 올 수 있겠네요. 대장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걸 그 배신자 놈이 수장으로 있는 정보국에서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요."

"의뢰요?"

"네. 비록 황제의 의도를 깨부순 덕분에 생긴 명성이긴 하지만 대장과 둘풍 용병대의 능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아마 틀림없이 대장에게 의롸가 갈 거예요."

아까부터 자꾸 말하는 의뢰라는 말에 호기심이 솟았다. 실력이 있어도 연줄이나 인맥이 없어 평민 기사들과 병사들의 도피처가 되었던 북부 군단이 주축이 된 막강한 파이린 제국의 군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무얼까?

"내용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죠. 지금이야 몇 사람만 알고 있지만 곧 제국 전역으로 소문이 퍼질 테니까요. 무려 수만에 달하는 실종자들에 대한 문제니까요."

"듣지요."

하룬이 관심을 보이자 헤르쉬가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가 입을 열었다.

"발단은 수개월 전부터 시작되었어요. 신분제 폐지가 널리 알려진 후 각처의 노예 출신들이 제국으로 몰려들고 그들을 위해 기존의 귀족들에게 몰수한 땅을 나눠 주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거지요."

"이상한 일이라고요?"

"네. 파이린 제국은 각처에서 몰려드는 노예 출신들, 특히 신 테론 제국 지역에서 넘어온 자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수백년 동안 방치되었던 드넓은 마츠 평원을 개발하기로 했어요."

마츠 평원은 후크란 산맥과 데빌 산맥이 만든 거대한 'L'자형의 안쪽에 해당하는 평원으로 마수들의 위협으로 인해 방치되어 있던 평원을 말한다. 하룬은 과거 후크란으로 향할때 후크란 상맥을 빙 돌아 흐르는 센 강의 한 지류가 그 평원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마츠 평원을 개발하기 위해 이동한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거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그것 때문에 지금 파이린 왕실은 난리가 났어요.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세 차례나 조사대가 파견되었지만 그들의 행방마저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으니 황실이 뒤집혀 버린 거지요."

"도대체 누가……?"

"그게 수수께끼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묘한 표정을 짓는 헤르쉬였다.

"의심이 가는 데라도 있소, 서브 마스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후버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피노세 황제가 거사를 일으켰을 때 일단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그들에 대항해 황도에서 큰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은 아시죠?"

"아네. 테론 제국의 황실에서 숨겨 놓은 비밀스러운 힘이었다지?"

후버론 역시 그 정보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피노세 황제의 친위 세력, 즉 대공 친위기사단, 퓨어 기사단, 트러스트 기사단 그리고 해롯 마법병단은 이미 수뇌부는 물론 그 하부 조직까지 반 이상 포섭된 황궁 근위대와 수도 경비단의 협조를 받아 하룻밤 사이에 전격적으로 황도와 황궁을 장악했다.

하지만 저항하는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피노세 대공파가 황궁을 점거한 날 밤에 수천에 달하는 정체불명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황궁을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황궁과 황도를 장악한 피노세 황제의 세력은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즉시 두 세력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일어났다. 양 세력의 무력은 비등했지만 피노세 황제파가 빠르게 장악한 황궁 근위대와 수도 경비단의 기사단과 마법병단이 가세하자 그들은 빠르게 후퇴하고 말았다.

이 일을 아는 사람들은 피노세 대공파를 공격했던 자들이 테론 제국의 황실에서 오랫동안 음지에서 양성해 온 시크릿 파워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들은 테론 제국의 시크릿 파워가 아니었어요."

"아니라고? 그럼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후버론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너무 많이 달랐던 것이다.

"탑주님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구 테론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즉위 초부터 누군가 자신을 살해할 거라는 피해망상에 시달렸어요. 

황실에 절대 충성을 했어야 할 시크릿 파워들이 골든 배틀에 관여한 사실 관련자는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신상에 위협을 느낀 황제에 의해 메신저 기사단, 새도우 기사단, 히든 메이지 병단 등 시크릿 파워들이 줄줄이 해체되거나 비밀리에 처단되었어요."

하룬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메신저 기사단의 이름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대대로 테론 황실의 가장 큰 힘이었던 시크릿 파워가 존재했다면 파이린 제국의 출현은 절대로 없었을 거예요. 그들의 힘도 힘이지만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황실 근위대와 황도 경비단의 전력이 3분의 1로 줄어 버렸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군."

후버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마탑은 피노세대공 측과 교전을 벌인 세력이 시크릿 파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크릿 파워가 아니라면 누군가?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무척이나 뛰어났다고 하던데."

"그건 우리도 알지 못해요. 다만 그들이 가기아의 광신도라는 것만을 알아냈을 뿐이에요."

"가이아? 그런 신도 있었던가?"

"저희도 알아보았지만 현세에 가이아 신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를 뒤져 보아도 그런 신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요."

헤르쉬의 말을 듣던 하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강렬해졌다가 씻은 듯 사라졌다.

하룬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굳이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메신저 기사단의 비극적인 최후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헤르쉬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일면 가이아 팔로워, 혹은 다크니스라고 부르는 그들이 데빌 산맥의 중심부에 있는 어둠의 숲 쪽으로 움직인 정황을 포착했어요. 그리고 그 대규모 실종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원흉인가?"

"어쩌면요."

이제까지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함을 잃지 않았던 후버론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위험해!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어! 이건 단순히 마탑과 연관된 일이 아니야. 보다 거대한 움직임이야. 1황녀의 혜안이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어.'

시크릿 파워로 오인을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무리가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납치하거나 살해했다. 오랫동안 마탑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혜안이 그 사건이 단순히 파이린 제국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방금 전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다크 엘프 정령사들 중 일부 역시 어둠의 숲으로 이동했다고 해요."

"다크 엘프까지 말인가?"

헤르쉬의 말에 후버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정령사들의 존재를 듣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실종된 이들을 대상으로 뭔가 하려는 건가?"

"아마도요. 저희 길드에서는 검증의 관에서 유출된 마법서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판단하고 있어요."

"으음!"

그녀의 말에 후버론과 하룬은 둘 다 무거운 침음성을 토했다.

"사안이 위중하군. 내가 자네를 만나기 위해 오길 잘했네. 난 잠시 마탑에 연락을 해야겠네."

후버론은 어지간히 급한 듯 통신을 위해 정원 구석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

"제국의 동향은 어떻소? 황제의 배후에 있는 자들이 움직였을 텐데……."

"잘 아시는군요. 파이린 제국에서도 이번 사안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그동안 전혀 노출이 되지 않았던 이벨린이라는 존재를 노출하고 말았어요."

"이벨린이라고요? 어떤 존재입니까?"

"얼마 전에야 들어온 정보라 아직 자세한 사항은 수집되지 않았어요. 다만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몇 년 전에 대공성의 집사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 대공령으로 평민 출신의 아카데미 졸업생이 대거 몰려들었고, 대공의 북부 군단 시찰에도 동행했어요.

하지만 그녀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특기할 점은 그녀를 따르는 자들 중 이방인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방인들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어요."

하룬은 헤르쉬의 말을 듣는 순간 이벨린이 이방인, 그것도 휴먼 가드에 속하는 인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벼리가 했던 말과 헤르쉬가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그 결론이 도출되었다.

화룬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실종 사건이 일어난 곳이 마츠 평원이라고요?"

"네. 대장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마츠 평원은 과거에는 제국 4대 곡창지대로 불렸던 곳으로 400년 전 오츠왈드 후작이 고대 시대의 던전을 찾기 위해 파견한 대규모의 원정대로 인해 산맥에서 솓아져 나온 마수들로 폐허로 변한 곳이에요."

하룬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자세히 그것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이야기의 맥을 끊기가 싫어 입을 다물었다.

"그 일로 오츠왈드 후작가는 완전히 명맥이 끊겨 버렸어요. 그들의 영지가 바로 마츠 평원이었거든요. 이후 제국에서는 다시 그곳을 곡창지대로 개발하기 위해 직할령으로 정하고 여러 차례 정착촌을 건설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실패를 하고 말았어요. 

평원으로 쏟아져 나왔던 마수들은 이내 데빌산맥으로 돌아갔지만 람비나 프로즐리와 같은 수많은 마수들이 정기적으로 산맥을 나와 정착촌을 습격했어요."

"마수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의 맥을 끊기는 싫었지만 이번 참에 대충 알고 있었던 마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다. 세상에서 헤르쉬만큼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도 없을 테니 말이다. 헤르쉬는 의문에 찬 눈으로 잠시 하룬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금방 맥을 짚어 내네요. 의뢰가 마수와 연관이 있다는 것 알아채고는 미리 확실한 정보를 얻겠다 이거죠?"

어딘지 새침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하룬이 쓴웃음을 지었다.

"꼭 그런 거 아니오. 다만 조금이라도 많이 알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누구보다 많은 것들을 깊이 알고 있는 헤르쉬에게 묻는 겁니다."

"호호호! 생각보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네요."

헤르쉬는 자신에 대한 칭찬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듯 금방 새침했던 얼굴을 풀었다. 세상의 정보를 혼자 주무르는 여자치고는 자신에게 보이는 반응이 좀 평범해 보였지만, 하룬은 헤르쉬가 자신에게나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다.

"마수는 과거 신마 시대를 연원으로 하는 마계 생물이라고 전해져요. 비록 외형은 짐승처럼 보이지만 높은 지능과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체내에 어둠의 마나를 축적하기 때문에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마수들은 몬스터와는 달리 기본적인 항마력이라고 부르는 마법 저항력과 강력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어 인간들이 상대하기가 무척 힘들어요. 그중 가장 일반적인 하급 마수인 람비는 외형은 흑표범과 비슷하지만 그 덩치가 들소만큼이나 크지요. 두 놈이면 오우거도 사냥할 정도이고 익스퍼트가 아니면 상대할 수도 없다고 해요."

하룬은 헤르쉬의 설명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낱 흑표범이 익스퍼트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니 믿기기 힘들었다.

"프로즐리는 곰과 비슷한 외형의 마수로 네 발은 물론 두 발로도 자유롭게 행동하는데 오우거와 비슷한 크기로 손바닥 길이의 손톱과 발톱은 마나가 깃든 검을 상대할 수 있고, 강력한 괴력을 지녀 익스퍼트 중급 이상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고 하지요.

아이콘라드는 아인종이나 몬스터로 분류되는 하피처럼 인간과 유사하지만 날카로운 이빨이 난 입은 새의 주둥이처럼 튀어나와 있고 코는 그 위에 구멍만이 뚫려 있는 기이한 외모를 가지고 했어요. 거기에다 등에 큰 날개를 가진 마수로 스턴 현상을 일으키는 마성魔聲과 무엇이든 갈기갈기 찢어 먹는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데, 암컷만 태어나는 특징이 있어요.

번식 방법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인간 남자의 정혈을 빨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 프로즐리와 같은 중급 마수들은 하급 마수들과는 달리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어 자신들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집단 생활을 하지요. 산맥 깊숙한 곳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간형 마수들도 있다는데 그건 확인이 되지 않았어요."

"휴우! 대단한 놈들이군."

"그렇지요? 만약 데빌 산맥에 거주하는 마수들 중 가장 약한 마수들이라도 한꺼번에 이 세상에 나온다면 우리 인간들은 지금과 같이 살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럼 상급 마수들도 있소?"

"네, 아마도. 실제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헤로나라는 이름의 마수와 알페르노라는 상급 마수가 있어요. 인간형 마수들도 있다고 하고요. 어떤 외형과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데빌 산맥의 가장 안쪽에 산다고만 알려졌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런데 마수들은 그곳 인근에만 출몰하는 거요?"

"네, 그래요.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해요. 놈들은 마츠 평원까지만 출몰할 뿐 그 범위 밖으로 나오질 않아요. 우리 인간들에게는 다행한 일이지요."

"그럼 마수와 몬스터의 차이는 뭐요?"

"그건 마정석을 몸에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붙인 이름이에요. 마정석은 마나석과는 달리 마수가 생전에 축적한 마나로 그것을 소유한 존재의 정신과 육체에 큰 영향을 주지요. 단순히 마나를 담고 있는 돌인 마나석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데빌 산맥은 전설에 의하면 마계의 마기가 물질계로 조금씩 빠져나오는 곳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곳의 마수들은 몸 안에 어둡고 잔혹한 성질의 마정석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아무튼 그곳에 사는 것들은 이 마정석의 능력을 이용하기에 하급 마수라도 익스퍼트급이 아니면 감히 상대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요컨대 마정석을 몸 안에 지닌 마수들의 경우 마정석의 영향으로 강력해졌다는 말이다.

'대단하네. 하긴 그런 미지의 힘을 가졌으니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 마수들을 사냥하며 오랫동안 살아왔겠지.'

"그럼 마수들은 모두 마나의 힘을 쓸 수 있다는 말이오?"

"알려진 바로는 그래요. 데빌 산맥은 후크란 산맥과 폭은 비슷하지만 대신 길기 때문에 그것의 두세 배에 해당할 정도로 넓은데,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마수들이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 때문에 제국이 가장 강성할 때조차 그곳을 토벌할 생각을 하지 않은 거지요."

헤르쉬에게 마수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 들으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익스퍼트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들이라니.

"그럼 오츠왈드 후작가의 원정은 어떻게 된 거요?"

"오츠왈드 후작가는 마법 부문에 있어서는 특이한 가문이었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특이하게 한 핏줄을 가진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오츠왈드 마탑이 14대 황제의 후견인으로 골든 배틀에 큰 공을 세운 후 후작의 작위와 마츠 평야를 영지로 받았어요."

특이한 가문이라는 말이 실감이 갔다. 원래 마법사들은 수만 명 중 한 명의 비율이다. 그만큼 마나 친화력이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뛰어난 마법사가 나타난 가문이라고 해도 그 후대 모두가 마법사가 될 수는 없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들은 제국의 타 마탑과는 달리 흑마법 계열의 고대 마법서를 연원으로 해서 마법을 독자적으로 익혔고, 그들의 피에는 마수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했어요."

"그게 가능한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죠. 다만 그들이 데빌 산맥의 깊은 곳에서 고대 시대의 마법서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당시 마탑들이 그렇게 주장했으니까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고 봐요."

하룬은 헤르쉬의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어 후버론 쪽을 쳐다보았다. 하룬의 그 반응이 추가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 헤르쉬가 말을 이었다.

"그들 가문 사람들의 성정은 거의 예외 없이 어두우면서도 무겁고 즉흥적이었다고 해요. 그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그들 가문의 기사들은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강력한 마나 검술을 가졌는데 극히 잔혹하고 폐도적이어서 감히 상대할 기사들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니까요.

그러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대규모의 원정단을 꾸려 데빌 산맥으로 들어갔지요. 당시 오츠왈드 후작가의 정예는 마법사건 기사들이건 모두 참가한 이 원정을 두고 사람들은 데빌 산맥의 깊숙한 곳에 그들 가문이 얻은 마법서가 봉인된 던전이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무려 2만에 달하는 원정대는 몰살하고 말았어요. 아니, 몰살한 것도 확인할 수 없었지요. 데빌 산맥에서 나온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 잔뜩 흉성이 폭발한 마수들이었으니까요. 풍년이 들면 제국의 반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풍요로운 마츠 평원은 마수들로 인해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폐허로 변했어요.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은 이미 산맥으로 다 들어간 상태였으니까요. 인근 영지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출동을 했지만 대규모로 출현한 마수들의 발톱에 갈가리 찢긴 상태로 처참하게 죽어 갔지요. 그때 마수들의 능력이 세상에 완전히 알려지게 된 거예요."

"으음."

하룬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하룬은 진정를 담아 헤르쉬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만남의 시초야 어쨌든 지금은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니 자신도 뭔가 그녀를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의 진정을 눈빛으로 읽은 헤르쉬는 이곳까지 워프해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말해요!"

웬만하면 들어줄 생각이다. 제국 정보 길드와 완전히 화해를 했다는 신호로 말이다.

"대장의 행방에 대한 의뢰가 몇 건 들어왔어요. 아마도 의뢰 때문으로 생각되네요."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다. 그의 행방을 알려도 되겠냐는 말이다.

"의뢰자는요?"

"미안하지만 그건 밝힐 수 없어요. 다만 타 국가들도 있어요."

그 정도야 이해할 수 있다. 정보 길드의 생명은 신용이니 말이다.

"혹시 예상되는 의뢰도 알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정보를 원하는 자들이 모두 엄청난 정보료를 걸었어요."

"그렇게 하세요. 그들을 만난다고 의뢰를 다 수락할 것도 아니니까요."

"고마워요. 또 한 가지가 있어요."

"뭡니까?"

헤르쉬는 조금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제 예상처럼 파이린 황실이 의뢰를 해 올 때는 가능하면 우리의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방법이야 대장이 알아서 해 주시면 되고요. 예컨대 우리 길드가 먼저 의뢰를 했다고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게 하는 식으로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룬은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이유나 듣고 수락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조직의 3분의 1을 빼 가서 파이린 제국의 정보국을 맡은 배신자 때문에 껄끄럽긴 하지만, 이 파이린 제국이 가장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 있고 현재 눈부시게 발전을 하고 있으니 언제까지 척을 지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전 다시 파이린 황실과 끈을 만들고 싶어요. 그들도 지금쯤이면 대장이 데모 시티에 나타난 것을 알아챘고 틀림없이 대장에게 의뢰를 할거에요. 우습겠지만 대장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우리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키고 싶어요. 그렇게만 해 주면 대가는 뭐든 다 받아들일 용의가 있어요."

영악한 여인이다. 자신의 존재를 이용해서 척을 졌던 황실과 끈을 이으려고 하다니 말이다. 아마 이런 태도가 제국정보 길드의 수백 년에 걸친 역사와 강력한 영향력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용할 것은 사소한 정보라도 잘 가공해서 수요자에게 크게 어필하는 것이 바로 이들이 가진 진짜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풋! 그래도 보기 싫지는 않네.'

사실 파이린 제국과 자신은 아무런 접점이 없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는 이방인이고 제국의 황실에 속하는 그 어느 누구와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적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것이다.

그에 반해 헤르쉬는 현재 많이 위축되고 축소된 제국 정보길드를 이끌고 있지만 자신과는 악연으로 시작해 지금은 친구로 변한 사이다. 향후 용병대의 미래를 생각하면 황실도 중요하지만 무대가 반드시 이곳일 필요는 없는 데 반해 제국 정보 길드는 효용가치가 높다.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인지한 하룬이다.

"좋습니다. 상단 일이 마무리 되는 대로 떠날 생각이지만 그 전에 황실에서 의뢰가 온다면 그렇게 하지요."

"정말요? 캬악!"

헤르쉬는 하룬이 그렇게 선뜻 승낙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활짝 웃으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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