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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바쁜 일상 (158/278)

 <<바쁜 일상>>

"이 힘을 쓰는 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 거야?"

놀라운 힘이기에 그런 불안감이 든 것이다.

다음 날 오전에 람비의 발 문신을 새긴 하룬은 숙고 마당을 무대로 몸을 움직여 보았다.

"흐엇!"

"저게 뭐야? 저건 람비의 발이 아닌데."

하룬의 움직임을 구경하던 아카족 전사들은 얼마가 지난후 경악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람비의 그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몸이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거나 연체동물처럼 휘어지는 등 기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 것보다 몇 배는 더 빨라."

"샤타의 눈으로 보는데도 발이 안 보여."

같은 문신을 새긴 전사들 몇이 얼이 빠진 얼굴로 하는 소리였다.

'이거 정말 놀라운걸.'

메신저 패스트 스킬은 빠르기에만 특화된 스킬이다. 즉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지만 도중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동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람비의 문신에 깃든 마수의 힘들 동시에 사용하자 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을 뿐 아니라 마음대로 동작을 바꾸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마치 흩어지는 안개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거나 머리가 발에 닿는 등의 괴이한 영상이었다. 사실 그것은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잔상과 실상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그것 말고도 전사들이 놀라는 것이 또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오래 마수의 힘을 쓸 수 있는 거지?"

"정말 레미의 말대로 카티야의 현신인가?"

그들 중 강한 전사 중 하나인 옥세르의 경우 프로즐리의 힘을 서른 호흡까지 쓸 수 있다. 디온의 경우는 가장 강한 마수 중 하나인 헬타인언의 맹격을 스물여덟의 호흡까지 쓸 수 있지만 그게 한계였다.

그런데 하룬은 벌써 오십 호흡이 훨씬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람비의 발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전사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사들의 수장인 옥세르와 디온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하룬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이 거의 백 호흡을 헤아렸을 때 하룬이 몸을 멈추었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지 세 방향에서 동시에 나타난 하룬이 하나로 합체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끝내준다, 하룬."

"하하하! 고마워, 두르본 이 힘 정말 대단해."

하룬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마치 스스로 바람이 된 것처럼 표홀하게 움직이는 것에 신이 났던 것이다.

"하룬, 우리 마을에 같이 가자."

"데빌 산맥에 있다는 너희 마을에?"

"응."

하룬은 금방 안 된다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두르본이나 막 수건을 가져다주는 레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너무나 간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할 일이 있었다. 

상단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은 현실의 돌풍이나 이곳의 돌풍 용병대릐 든든한 운영 자금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이 가면 좋은 일 많다."

"훗! 무슨 좋은 일이 있는데?"

바로 거절하는 것이 난감했던 차에 두르본이 그렇게 말하니 자연스럽게 물어보게 된다.

"넌 아카족의 모든 문신을 가질 수 있다."

"모든 문신이라고?"

"우리 마을에 라티카가 있다. 그는 모든 마수의 문신을 알고 있다. 레미는 라티카에게 주술을 배우고 있다."

"으음, 나중에 가면 안 되나?"

"안 된다. 라티카 많이 늙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의외의 사실을 들은 하룬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곳에서 할 일을 생각하면 거부를 해야 하는데 욕심이 나는 것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만 그곳은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보름은 족히 가야 하는 먼 곳이고 더구나 마수들 때문에 위험천만한 땅이다.

사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마수야 이들이 놈들을 잡았다는 사실과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별로 두려울 것이 없었지만 이곳에서 하기로 작정했던 일 때문에 고민스러운 것이다.

"라티카의 문신은 최고의 위력만 가지고 있다. 상급 마수들의 힘을 가진 문신들이다."

하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강한 것을 동경하는 하룬에게 이보다 더 큰 유혹은 없었다. 여자도, 돈도, 명예나 권력도 모르는 하룬에게 있어 강력한 힘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하룬은 굳은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라티카라는 주술사를 만나면 자신이 이제까지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는 여정은 당장 자신의 계획에 따라 움직일 사람들을 그 기간 동안 놀게 만들 것이다.

헤니를 비롯한 100명이 훨씬 넘는 인공 수정체들이 이 일을 두고 얼마나 많은 기대를 품고 있는지는 이미 벨과 아리를 통해 들었다. 사실 몇 달 연기할 수도 있지만 조직의 출범과 동시에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 놓고 이렇게 급하게 일정을 바꾸는 것은 믿음의 문제였다.

'그래도 안 돼. 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미래가 더 중요해.'

하룬은 게임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자신이 강해지는 일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선택했다.

"안 될 것 같다. 난 이곳에서 할 일이 있어. 그걸 처리해야 이곳을 떠날 수 있어."

하룬의 말에 두르본을 비롯한 아카족 전사들의 얼굴이 실망으로 가득 찼다.

"라티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미안하다. 나 역시 이제는 아카족의 전사가 되었지만 내 동료들을 위해 꼭 먼저 할 일이 있어."

"에잇, 바보!"

두르본은 성이 나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전사들 역시 실망한 얼굴로 슬그머니 자신들의 방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레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일이라는 게 얼마나 걸리나요?"

"확실하지 않아. 일이 잘 되면 일주일에도 될 수 있고 늦으면 몇 달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어."

안 그래도 상단 때문에 어제도 현실에 나가서 몇 가지 사항을 결정한 하룬이다. 헤니를 비롯한 인공 수정체 형제들중 가까운 곳에서 플레이하던 이들은 5일 정도면 이곳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벨을 시켜 뫼비우스에게 연락을 해서 세류의 연락처를 받아 두었다.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한 끝에 상단을 만드는 일에 세류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는 현실에서 큰 기업을 운영한다고 하니 상단의 일에 전체적으로 귀중한 조언들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앞으로 이곳에서 보름을 더 머무를 수 있어요. 전사들도 이번에 하룬이 구해 준 무기에 적용해야 하니까요. 그 때까지 일이 끝나면 같이 가도록 하지요."

레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내용은 강력한 압박을 주고 있었다. 일부러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기한을 주는것은 물론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룬이 비욘드에 접속해 있는 동안 아리는 사이보그 대원들을 이끌고 지난번 사건으로 망가졌던 지하 통로와 집으로 연결된 자장 엘리베이터를 수리했다. 다행하게도 엘리베이터의 파손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자장 발생기와 조절기만 파괴된 상태였기에 수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하 통로의 수리가 다 끝났다는 아리의 말을 들은 하룬은 뫼비우스를 통해 알게 된 세류의 PCP(개인 비밀 통신기)로 연락을 해서 약속을 잡았다. 잠깐의 음성 통화였지만 그녀는 현실에도 하룬과 돌풍 용병대가 존재한다는 것에 큰 호기심을 느꼈기에 흔쾌히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하룬은 아리를 대동하고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마그네틱 슈퍼 카를 탄 하룬은 이제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리! 이 통로를 통해 연결된 유니온의 거점은 거기밖에 없나?"

"네, 오빠!"

"혹시 나중에라도 암시장과 연결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과 자재 그리고 인력으론 불가능해요. 오빠도 알다시피 이 통로는 지하 500미터 아래에 건설되어 있어요. 다른 방향에 있는 암시장과 연결 하려면 그 방향으로 통로를 새로 뚫는 것은 물론 지상의 암시장까지 수직으로 자장 엘리베이터가 운행할 수 있는 통로를 뚫어야 하는데 그건 지금으로써는 불가능해요."

아쉬웠다. 그게 가능하다면 암시장에도 새로운 거점을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원들의 이동도 무척 편해질 텐데 말이다.

아리는 하룬의 아쉬워하는 표정에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소형이긴 하지만 드릴리언의 기능을 가진 기계를 제작하고 있으니 얼마 후부터는 지난번에 발견된 폐기장까지 길을 뚫을 수 있을 거예요.

일단 폐기장까지 통로를 확보되면 타이탄 워커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어차피 시간이 많이 흘러 그대로 쓸 수는 없을 테지만 타이탄 워커를 만들 수 있는 재료만 손에 넣으면 그 정도 일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렇구나. 우리 아리가 고생이 많다."

"호호! 걱정 말아요. 내가 반드시 타이탄 워커를 만들어 내고 말 테니까요."

"고맙다. 늘 너와 벨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하룬은 옆에 앉은 아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수줍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오빠는!"

아리는 하룬의 진심 어린 감사에 상기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왠지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이 몸과 마음이 붕 뜬 것처럼 이상해졌다. 달콤하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그녀의 얼굴에 따듯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화아! 행복해!'

아직 제대로 된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아리지만 이순간만은 행복감을 최대로 느끼고 있었다. 오래도록 이 감정을 즐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마그네틱 슈퍼 카는 너무 빨랐다.

"혹시 모르니까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어. 난 올라갔다 올테니까."

"같이 가면 안 돼요?"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안았던 하룬의 강한 팔뚝이 남기 아쉬움 때문에 다시 한 번 졸라 보는 아리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아리는 이 통로가 어디까지 뚫려 있는지 확인을 해 줘. 나중에 반드시 쓸 때가 있을 거야."

"칫! 알았어요. 그럼 조심해야 해요."

아리는 입술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곧 걱정이 담뿍 어린 눈길로 그의 안전을 빌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는 완전히 가족이 되어 버린 벨과는 또 다른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만을 쳐다보고 사는 아리였다. 자신을 위해서 많은것을 감내한 그녀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으며 그녀를 챙겼다.

"알았어. 아리도 조심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철수하는것 잊지 마."

하룬은 자신을 따라오고 싶어 하는 아리의 마음에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굳이 그녀를 떼어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해 줄 일이 있었다. 더구나 주민 칩도 없는 그녀를 데려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이제 내가 확실하게 아리를 좋아하는 걸까?'

자신을 남겨 놓고 어둠이 가득한 통로로 사라지는 마그네틱 슈퍼 카의 뒤를 쫓는 하룬의 눈에 묘한 열기가 떠올랐다.

세류는 하룬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이 차이만 있을 뿐 그녀가 알고 있는 비욘드의 하룬과 흡사한 외모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원래 비욘드의 하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잘 풀렸다.

"좋아요. 그럼 하룬 대장에게 현실 시간으로 3일 후에 데모 시티의 그 여관에서 만나자고 전해 주세요."

세류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 주었다. 현실의 기업이나 비욘드에 있는 자신의 상단을 관리하는 것도 힘들 텐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아우터 마을들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까?"

본론에 앞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아우터 마을들과 거래를 통해 자산을 축적했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던 하룬이다. 

지금은 변종 생물들의 위협으로 인해 아우터 마을들이 많이 파괴되어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 밖에는 수많은 아우터 마을들이 오지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그건 왜요?"

"우리 용병대가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주된 의뢰가 아우터 마을들로의 물건 운송이 될 것 같아서요."

"하긴, 변종 생물들의 위협이 날로 가중되고 있으니……."

세류는 아직 돌풍 용병대의 무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지만, 비욘드의 돌풍 용병대로 인해 생긴 선입관 때문인지 배리어 밖의 흉험한 환경을 이기고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호위대는 돌풍 용병대가 유일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리된 자료가 있으니 그걸 넘겨줄게요."

그녀에게는 아버지로부터 전해 받은 극비 자료가 있었다. 아우터 마을들의 위치와 생활상 그리고 인구와 특별한 점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정리된 자료들은 그녀도 아직 다 보지 않았지만 앞으로 돌풍 용병대가 현실에서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안다. 이렇게 선뜻 모아 놓은 자료를 건네주는 것이 얼마나 큰 호의인지를 말이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돌풍 용병대는 세류 씨와 관계된 의뢰를 최우선으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하룬은 문득 또 하나의 구상을 떠올랐다.

'게임 속에서 상단을 만드는 것과 현실이 뭐가 다르겠어 이참에 직접 상단까지 운영해 보자.'

단순히 상단을 호위하는 일이 아니라 직접 상단을 만들어 아우터들과 교역을 하는 것은 그 이익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난다.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기지의 주민을 먹여 살리는 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무력이야!'

"그렇담 저도 고맙지요. 그 호의 거절하지 않을게요."

면전에 사람을 앉혀 놓고 또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던 하룬이 세류의 말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네. 서로 좋은 일이니까요. 곧 현실에서 출범할 돌풍상단도 잘 부탁드립니다."

"돌풍 상단요?"

세류의 눈이 커졌다. 난데없는 상단의 이야기에 조금 놀란것 같았다.

"사람들을 영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금만 마련되면 본격적으로 상단을 만들어 움직일 생각입니다."

"호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혹시 자금이 필요하면 투자를 받는 것을 고려해 보세요. 저 역시 참가할 생각이니까요."

"고려하겠습니다."

상단을 만드는 문제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적어도 현재 전력 대비 서너 배는 되어야 가능할 일인 것이다. 거기에 유니온 안에도 기반이 있어야 하니 차근차근 준비해야만 할 것이다.

'요는 사람이군.'

제대로 일을 아는 경험자들과 성실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해 나갈 사람들이 필요했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해야 하는일인 만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남은 참 유익했어요. 난 회의 시간 때문에 가 봐야겠네요. 나중에 다시 만날 때는 같이 식사라도 해요."

현실과 비욘드를 오가면서 사업을 하는 만큼 정신없이 바쁠 것이 분명한 세류다. 하룬은 자신이 그녀를 너무 오랫동안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네, 그러지요. 도움 감사드립니다."

서로 도움이 되는 결론이 도출된 터라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중을 기약할 수 있었다.

세류와 헤어져 집으로 온 하룬은 바로 지하로 내려갔다. 진수를 보고 갈까 했지만 할 일이 많은 데다가 한창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고 있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나도 진수 형이나 다른 유저들처럼 그렇게 게임을 즐기고 싶었는데…….'

자신에게 비욘드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슈퍼 캡슐로 인해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잃은 것도 있는데, 그게 바로 비욘드의 세상을 게임으로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부활의 이점을 가지고 새로운 게임 속 세상에서 모험을 즐기고 동료들을 만나 파티 플레이도 하는 것은 비욘드의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하룬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마음 편하게 죽는 것에 상관없이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배우고 모험을 하는 게이머들이 정말 부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하로 내려가니 아리가 이미 도착해있었다.

"오빠!"

아리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풍성한 그녀의 몸은 그녀 특유의 향과 함께 그 이성을 녹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하룬이지만 굳이 떼 놓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있는 하룬이다.

"걱정했어?"

"네. 벌써 내려올 때가 넘었는데……."

자신에 못지않은 큰 키를 가진 아리인지라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향긋한 향기가 그의 콧속으로 가득 밀려들어 왔다. 그녀의 큰 눈망울에 담긴 안도의 감정에 하룬은 문득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후훗! 세류를 만나고 바로 오는 길인데."

"그래도……."

이젠 품에서 벗어나도 될 텐데 아리는 여전히 하룬의 목에 팔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곁에 벨이 없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아서일까? 그녀의 행동은 오늘따라 무척 적극적이었다.

"통로 상황은 어때?"

하룬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안으며 물었다.

"A구역과 S구역의 경계까지 뚫려 있었어요. 지상의 위치를 알아보니 방위군 병참기지더라고요. 어쩌면 기지 건설 당시 군부의 요인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나 봐요."

"그래? 하긴 기지에 있는 무기들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호수 중앙의 기지에는 수많은 무기들이 있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쓸 수 없는 것들도 많았지만 그 수량은 엄청났다. 어쩌면 기지를 건설한 과학자들은 군부의 요인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유니온을 건설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자! 할 일이 있어."

가자고 했지만 아리는 하룬의 품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룬 역시 부드럽고 뭉클한 그녀의 몸을 떼어 내기는 싫어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받쳐 안고 슈퍼 카로 향했다.

"어떤 할 일이요?"

"응. 현실에도 상단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싶어서. 물론 대원들의 숫자고 증강되고 그 전력도 높아져야 가능한 일이지만."

"으음, 그건 괜찮은 생각이네요. 직접 상단을 만들어 아우터들과 거래를 하면 막대한 차익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상단 이야기를 들은 아리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난 것 같다.

"일단 집으로 가서 벨과 의논을 해 보자."

"후후! 알았어요. 그런데 좀 천천히 가요. 오랜만에 벨 없이 이렇게 나왔는데."

부끄러운 이야기였을까? 그녀의 얼굴이 보기 좋게 달아올라있었다.

"그... 그럴까?"

하룬 역시 오랜만에 나온 터라 빨리 기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리 좀 걸을까?"

"호호! 좋아요."

아리는 하룬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행복감에 겨운 그녀의 얼굴이 정말 아름다웠다. 하룬은 아리를 안은 채로 흐릿한 불빛 속의 지하 통로를 걸었다. 

혼자라면 무섭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겠지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이곳도 나름 풍치가 있다고 느꼈다.

"무겁지 않아요?"

"응. 무거워."

"칫! 이럴 때는 안 무겁다고 하는 거라고요."

토라진 목소리와 가늘어진 눈매가 귀엽다.

"그런가? 난 지금 느끼는 아리의 무게만큼 내 마을 속에 네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기만 한데."

"훗! 말은 잘해요. 그럼 좀 더 무거워야겠네."

하룬의 말에 짐짓 삐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리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함께 자신의 몸을 흔들었다.

"어어어! 그만해."

"호호호!"

보기보다 풍염한 몸매를 지니고 있는 터라 그녀의 몸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룬과 거의 비슷한 키가 아닌가. 하룬은 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몸을 흔드는 아리때문에 비틀거리면서 균형을 잡기 바빴다.

비록 직접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장난스러운 행동과 그윽한 눈빛을 통해서 좋은 감정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어서 와, 오빠! 어! 수상한데."

벨은 방으로 들어오는 하룬과 아리를 묘한 눈빛으로 맞이했다.

"뭐가?"

"둘 사이에 뭔가 있었나 본데? 왠지 달콤한 냄새가 나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하룬은 벨의 말과 시선에 당황했다. 지하 통로에서 데이트를 통해 자신이 아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하룬이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바짝 붙어 있는 건데? 거기에 손까지 꽉 잡고 말이야."

벨의 말은 들은 하룬과 아리는 이제까지 의식하지 못했던것을 깨닫고 서둘러 잡은 손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지하 통로에서부터 계속 이렇게 손을 잡고 어깨를 붙인 상태로 다녔던 것이다.

"그, 그게……."

"칫! 둘이 나 몰래 데이트를 했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

하룬은 벨의 삐친 얼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곡이 찔린 데 더해 그 증거까지 보이고 말았으니 뭐라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게임을 같이하자고 해 놓고는 약속도 안 지키고. 히잉! 동생에게는 이렇게 과다한 일이나 시키고 자기는 데이트까지! 칫! 오빠, 나빠!"

벨은 정말 화가 많이 났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뜻밖의 상황에 하룬과 아리는 질린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큰일이네. 벨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인데."

"어떡하죠, 오빠?"

"할 수 없지. 일단 아리가 벨을 찾아 좀 달래 줘. 앞으로 나도 신경을 더 쓸 테니까. 착한 녀석이라서 말을 잘하면 괜찮아질 거야. 난 헤니를 좀 만나 볼 테니까."

"알았어요. 벨은 제게 맡기고 오빠는 일 보세요."

하룬이 현재 상단의 일 때문에 마음이 바쁘다는 것을 잘아는 아리는 서둘러 벨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하룬은 긴 한숨을 쉬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지만 벨 때문에 걱정이 된 것이다.

하룬은 조금 어두운 얼굴로 헤니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그녀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대장!"

"어서 와!"

당분간 일에서 손을 떼고 모종의 일을 하겠다던 하룬이 그녀들의 방을 찾아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하룬이 왜 왔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지난번 야밤에 난데없이 나타나 했던 말이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익숙한 솜씨로 차를 타 하룬과 친구들이 앉은 테이블에 세팅한 헤니가 대표로 물었다.

"비욘드의 돌풍 용병대가 드디어 상단의 일을 도와주기로 결정했어."

"그래요?"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녀들은 하룬이 운을 뗀 후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것이다.

"상단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사람을 초빙했어."

"누구에요?"

헤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녀만이 아니라 다들 강렬한 관심을 보였다.

"세류라고, 전에 비욘드의 하룬 대장과 인연이 있던 유저야. 전에는 코탑 길드를 만들었고 지금은 코콤 상단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이야."

"아! 그 언니. 잘 알아요."

헤니는 세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는 고요의 땅에서 한동안 동행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왓! 다행이다!"

미드레가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헤니를 비롯한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자신에게 쏠린 관심을 깨달은 미드레가 헤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코콤 상단은 유명한 대형 상단이야. 파이린 제국은 물론 타 국가들과도 활발하게 거래를 하며 기존 상계가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신흥 상단 중 하나지. 

강점은 현재 적대국 사이를 오가며 상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계에 강력한 인맥을 단시간 내에 쌓은 점과 이방인 마법사들을 대량으로 고용해서 자체적으로 워프 마법진 네트워크를 만들어 변질이 쉬운 신선 식품들을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야."

"그렇게 유명해?"

헤니는 그동안 교육 체계를 잡느라고 게임에는 통 신경을 쓰지 못한 터라 하룬처럼 정세에 무척 어두웠다.

"응, 워프 마법진은 여러모로 초기 비용이 많이 들어가거든. 그런데 코콤 상단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산지와 거점 도시들을 수십 개의 워프 마법진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운송 시간을 현저하게 줄였거든. 

특히 해산물을 비롯한 각종 신선 식품의 경우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어. 그 때문에 이제는 신선 식품뿐 아니라 귀중품의 운송에 이르기까지 취급품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어."

"그 워프 마법진을 설치하려면 돈이 장난 아니게 들어갈 텐데."

"그렇지. 마법진을 그리려면 6서클 마법사가 있어야 하고, 그 재료는 미스릴 가루를 사용하는 데다가 마법진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려면 중급 이상의 마나석 10개와 네 명의 3서클 이상 마법사들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채소와 해산물과 같은 신선 식품으로 이득이 난단 말이야?"

"응. 해산물의 경우 산지와 도시의 가격 차이가 수십 배가 넘거든. 코콤 상단이 출현하기 전에는 살아 있는 해산물을 도시에서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오로지 소금으로 염장을 한 것만 먹을 수 있었거든. 

처음에는 엄청난 적자였겠지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지금에 와서는 공급이 달릴 정도라고 해."

"대단하기 하네."

헤니는 미드레의 말을 들으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그런 방법을 떠올린 이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초기 투자액이 너무 많고 기대되는 이득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를 했을 것이다.

"대단하지. 이제까지 국가적인 용도로만 사용되던 워프마법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파격적인 발상과 단숨에 수백만 골드를 쏟아 부은 과감한 투자로 대형 상단들의 견제를 단숨에 격파하고 독자적인 위치에 오른 코콤 상단의 행보에 다른 상단들도 관심이 무척 많아.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던 다른 상단들도 코콤 상단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하자 그들을 따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정도야."

"상단주가 세류라는 여자야?"

"응. 정치계에도 인맥이 많아서 강력한 로비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헤니는 전에 보았던 세류를 떠올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류가 노블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때 보았을때는 경황이 없던 중이어서 그랬는지 그저 부모 잘 두고 태어나 돈으로 길드를 만들고 게임을 즐기는 유저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코콤 상단의 세류 상단주가 앞장서 도와준다면 경험이 없는 우리가 상단을 만드는 건 아주 쉬울 거예요. 기존 대형상단의 추천이 있으면 상단 허가를 받는 것도 쉽거든요."

"다행이네. 일단 지난번에 이야기한 대로 헤니가 원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데모 시티로 가. 어쩌면 이것과는 별도로 거기 대원들도 그곳으로 갈지도 모르겠어."

이미 기지로 옮겨 온 보급형 캡슐을 쏘우를 위시한 연구조들이 밤낮으로 달라붙어 상급 기능의 캡슐로 개조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알았어요. 근데 그건 무슨 소리예요?"

"상단 일과는 별개로 다른 이유 때문에 소집을 할 모양이야."

대원들을 불러 티노를 위시해서 마나가 부족한 대원들에게 마정석의 효과를 경험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요? 그럼 빨리 비욘드에 접속해 봐야겠네. 이미 교육 체계는 잡혔으니 나머지는 박사님에게 부탁할게요."

비욘드의 돌풍 용병대에 소집이 걸릴 수 있다는 말에 헤니가 다급한 얼굴이 되었다. 비록 현실에서도 돌풍 용병대원이었지만 그 뿌리는 게임 속에 있으니 그녀로서는 그것이 먼저였던 것이다.

"일이 잘 풀리면 적어도 수백 개의 일자리가 생길 테니 이번 기회에 잘 배워야해. 상단 쪽 일은 미드레와 두 사람에게 맡길게."

"알았어요. 맡겨만 줘요."

"걱정 마세요. 우리 형제들의 일자리가 생기는 일이니 최선을 다할게요."

"이제야 할 일이 생겨 다행이에요."

미드레와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이전과는 다른 생동감이 흐르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강력한 생기가 솟아난 것이다. 그것도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 돌풍 기지의 미래를 안정적으로 담보할 상단 일이 아닌가. 세 사람은 주먹을 힘주어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며칠 게임을 했다고 밀린 일이 꽤 많았다.

당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일단 기지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과 무력조의 수련 방식에 대한 것 그리고 생필품의 공급 방안이 그것이었다.

하룬은 대원들이 잘 시간에 회의를 소집할 수는 없었기에 기지 밖으로 나갔다. 기지의 경계는 형식적으로 두 대원이 기지 입구를 감시했지만 사실 아즈만이 사방 10킬로미터를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등장에 놀란 두 대원에게 잠시 밖에서 산책을 하겠다고 말하고 나온 하룬은 생기가 가득한 바깥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다른 이들에게야 오염 물질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룬은 언제든지 배출할 수 있었다.

"아! 좋다!"

호수가 내뿜은 습기로 인해 다른 곳과는 달리 전혀 건조하지 않은 대기가 가득했다. 이 대기는 처음 비욘드에서 맛본 공기와 유사했다. 하룬은 그 속에 가득한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번 달려 볼까!'

메신저 스킬을 펼친 하룬의 몸이 마치 바람처럼 호숫가로 향했다.

'오우! 대단해!'

발바닥을 통해 대지의 생생한 기운이 밀려들어 왔다. 그양은 이제까지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 흡입되는 기세가 얼마나 강한지 단숨에 하단전까지 치고 올라올 정도였다.

곧 몸 안은 발을 통해 들어오는 기로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하룬은 당황했다.

'멈추고 마나 플로, 아니 운기행공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마나가 들어오다가는 풍선처럼 터질 것 같은 긴박감에 불안해진 하룬은 결국 2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강하게 회전하며 마나의 밀도를 높여 한순강에 폭발적으로 마나를 방출하는 패스트 스킬이 그것이었다. 

스킬을 펼치자 대지를 강하게 박찬 그의 몸은 새처럼 포물선을 그리고 규칙적으로 날기 시작했다.

새가 된 것처럼 빠르게 대기를 가르며 날듯이 뛰는 하룬의 몸은 순식간에 호숫가를 몇 번이나 돌고 있었다.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고 활력이 가득했지만 하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2단계를 마스터한 것 같아.'

의지로 발바닥 중앙의 용천혈에 축적된 마나를 강하게 회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깨알처럼 응축시켰다가 바닥을 박차는 순간 폭발력으로 기를 확산시키려는 일련의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의지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어.'

그렇기에 패스트 스킬을 마스터한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점핑 스킬도 해 보자.'

점핑 스킬의 경우 높이 나는 것이었기에 패스트 스킬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기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키는 순간 발가락과 뒤꿈치의 위치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패스트 스킬은 발가락에 강한 힘을 주어 앞쪽으로 그 폭발력을 이끄는 데 그 요체가 있다면, 점핑 스킬은 발바닥이 완벽하게 땅에 닿은 상태에서 기를 폭발시키는 것이 요체였다.

파앙!

수평으로 유지한 발바닥이 땅에 닿는 순간 응축한 기를 폭발시키자 작은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이 수직으로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발바닥에 닿았던 땅은 발목이 빠질 정도 깊이의 구정이가 파여 있었다.

도약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순식간에 20여 미터 상공으로 치솟은 하룬은 도약력이 다하는 순가 양손을 흔들어 균형을 잡았다. 똑바로 섰던 그의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떨어지는 순간 빈 자리를 찾아 아래로 흘러내려온 기를 다시 응축시켜 폭발시켰다.

"어엇!"

너무 폭발력이 강했는지 그의 몸이 다시 3미터 정도 쑤욱 위로 솟았다. 그러더니 다음에는 2미터, 그다음은 1미터 정도를 위로 솟구쳤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기를 폭발시킨 하룬은 마치 엘리베이터가 각 층에 서듯 그렇게 중간에 멈추길 반복하며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아! 패스트 스킬과 점핑 스킬의 요체는 바로 제트 분사구나.'

기를 마치 연료의 분사처럼 이용하는 것이 3단계 스킬의 요체였다. 메신저 3단계 스킬은 새처럼 공중을 나는 것이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고 스킬을 가르친 데브론 경 역시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다.

'할 수 있다! 기의 양만 충분하면 가능해! 아니, 어떤 자세에서든 기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원하는 거리만큼 날아서 갈 수 있어!'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버처리비크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던가? 물론 바람의 정령 위신느와 합체를 해서 얼마 정도 하늘을 날 수 있었지만 그건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

'한번 해 보자!'

그 요체는 알았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하룬은 패스트 스킬을 펼쳐 전방을 향해 약 45도 각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정점에 이르는 순간 점핑 스킬을 펼쳤다.

쑤욱!

그의 몸이 공중에서 수직 방향의 각도로 꺾이며 높이 솟아 올랐다. 정점에 올랐을 때 몸을 굽혀 이번에는 수평 방향으로 점핑 스킬을 펼쳤다. 몸이 앞쪽으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이런 방식으로 하늘을 날며 하룬은 팔을 허우적거려 방향을 잡았다. 너무 빨라 처음에는 전혀 방향을 조종할 수 없었지만 몇 번 반족해서 점핑 스킬을 펼쳐 날아가는 동안 그 요령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만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머리가 아래로 향할 때 점핑 스킬을 펼친 결과 무서운 속도로 땅을 향해 내리꽂히는 식겁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경험해야만 했다. 하마터면 땅속으로 머리통째 박힐 뻔했던 위험한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뭔가 감이 잡히려고 할 때는 여지없이 기가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앉은 자세에서 운기행공을 해서 기를 보충하고 나서야 다시 수련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하니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시간을 의식한 하룬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또 그놈의 집중력이 문제였던 것이다. 한번 빠지면 어지간해서는 잘 헤어 나오지 못하는 집중력으로 인해 밤을 꼬박 새운것이다.

'벨하고 아리에게 잔소리 좀 듣겠군.'

경계를 서던 두 대원으로 인해 자신이 저녁 무렵에 밖에나간 것을 알았으니 지금쯤이면 난리가 났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위성을 통해 자신이 수련하는 것을 알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척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꼴을 본 하룬은 실소를 머금었다. 방어구들을 갖추어 입은 것도 아니고 몸에 딱 달라붙는 실내용 슈트를 입은 자신이다. 슈트는 먼지로 인해 무척이나 더러워졌고 발도 엉망이었다. 더구나 바람 때문에 머리는 산발이 되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가자!'

제대로 행색을 갖추어 입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만 했다. 이미 호숫가에 자욱하게 끼었던 안개가 떠오르는 햇볕에 그 흔적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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