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전사들의 시티 나들이 (157/278)

 <<전사들의 시티 나들이>>

 비욘드로 돌아온 하룬은 두르본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그녀와 레미가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어떠냐?"

두르본은 처음 입어 보는 제국식 튜닉이 편한지 한 바퀴 돌아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튜닉은 원래 몸에 착 달라붙는 옷으로 속옷과 겉옷을 겸한 옷인데 저국식 튜닉은 활동성을 강화하기 위해 허리와 허벅지 그리고 어깨와 같은 부위는 피부에 달라붙게 만들고 나머지 부위는 품을 늘렸다.

전사로서 살아온 두르본의 몸매는 마치 암표범처럼 잘 빠져 제국식 튜닉이 제대로 어울렸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긴 머리칼과 햇볕에 그을린 얼굴 그리고 강렬한 눈매가 야성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룬은 엄지를 들어 그녀의 미모를 칭찬해 주었다.

"이런 건 처음 입어 본다. 간지러운 느낌도 나지만 살에 달라붙는 느낌이 좋아. 흐흣!"

그녀는 속옷은 물론 튜닉도 처음 입어 보는 터라 피부에 닿은 테라 실크의 감촉을 즐기며 배부른 고양이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방인들의 영향으로 최근 여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여성 속옷인 브라와 팬티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녀와 달리 레미는 마치 소녀처럼 보였다. 단련되지 않은 육체로 인해 그녀의 몸은 가녀리게 보였고 먼지가 사라진 흰 얼굴은 청순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강렬한 야성미를 가진 두르본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녀 역시 강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부끄럼을 타는지 하룬의 눈치를 보는 레미의 눈길에 하룬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려 주었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얼굴이 붉게 변하는 레미도 옷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자신의 몸을 둘러보고 있었다.

"차라도 한 잔 마시자."

하룬은 외견상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두르본과 레미에게는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이들이 한 건물을 다 사용하는 판이니 객실 손님들끼리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숙소에 딸린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해도 될 것이다.

세 사람이 티룸으로 이동하는 사이 열린 문틈으로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들은 처음 입어 보는 튜닉을 주제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쑥스럽거나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반짝이는 눈들을 보니 이 옷차림을 진정으로 싫어하는 이들은 없어 보였다.

그중에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디온과 옥세르도 있었는데 하룬을 보더니 바로 따라 나왔다.

숙소 중앙에 있는 티룸에는 마른 찻잎을 넣고 끓인 찻주전자와 찻잔이 마련되어 있었다. 조금 식긴 했지만 나름 향은 괜찮았기에 하룬은 사람들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우욱! 맛이 이상하다!"

호기심에 차를 한 번 마신 두르본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다른 세 사람 역시 익숙하지 않은 향과 떫은 맛에 인상을 썼지만 하룬은 떫은 맛에 숨은 개운한 맛을 찾아 즐겼다.

"마수의 가죽은 얼마나 더 있어?"

하룬의 질문에 인상을 쓴 채로 두르본이 대답했다.

"람비가 가장 많고 프로즐리 가죽이 제일 적다."

종류별 수량이 아니라 많고 적음으로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수체계가 밝은 것 같지 않다. 혹시 하는 생각에 레미에게 시선을 맞추자 역시 그녀가 상세하게 대답을 했다.

"람비가 스물여섯 장, 슬로크 스물두 장, 벡셋 스무 장, 브롤프 스물네 장, 팔스콘 열여섯 장, 비얀 열다섯 장, 프로즐리 가죽이 열한 장이에요."

역시 생각한 대로 수량이 꽤 많았다. 특히 프로즐리의 경우 다른 마수의 두 배 이상의 덩치를 가지고 있어 가죽이 무척이나 컸다.

"흠. 그럼 가죽들과 약초들을 다 가지고 와."

하룬의 말에 디온과 옥세르가 지체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더니 전사들과 함께 키 높이의 배낭을 가지고 왔다. 순식간에 티룸이 짐으로 가득 찼다.

"곧 식사가 준비될 거야. 오늘은 식사를 하고 푹 쉰 다음 내일 마음에 드는 무기를 사러 대장간으로 가자."

식료품과 같은 생필품은 몰라도 무기류는 직접 고르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 그들보고 마음에 드는 무기를 고르라면 상인의 농간과 합해져 그 가격이 한정없이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러기로 했다.

"그래도 돼?"

아마 그녀의 마을과 거래를 하던 상인들은 미리 정련된 무기류를 가져다주는 데 그친 터라 마음에 드는 무기를 직접 고를 수 있다는 말에 두르본은 물론이고 전사들 모두가 흥분한 얼굴이 되었다.

'뭐,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가져온 물건이라면 그 정도 가치는 충분하니까.'

현금이라면 자신에게도 충분하다. 하룬은 마수의 몸에서 나온 마정석을 팔 생각이 없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떻게 쓸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마나석과 같은 종류라면 고위급 마법사 두명을 거느린 자신과 돌풍 용병대에게 무척 유용할 것이다.

마침 종업원이 아래층 식당에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알렸다.

"빨리 가자."

두르본과 전사들은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목욕까지 한 터라 무척 배가 고팠는지 하룬이 마수의 가죽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신경도 쓰지 않고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갔다.

'풋!'

하룬은 그들의 모습에서 어린아이에게서나 볼 수 있는 천진함을 발견하고 괜히 기분이 좋았다. 좋은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기분까지 좋아진다.

하룬은 마수의 가죽과 약초가 들은 배낭들을 아공간에 넣고 뒤늦게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양고기 스튜였다. 양도 무척 푸짐했고 향신료도 아끼지 않고 썼는지 맛있는 냄새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라 식당 안에는 탄툰 마을의 전사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맛은 있나?"

"우응, 정말 맛있다! 너도 먹어라!"

"아니, 난 이따가 먹을 거야."

말을 하면서도 양고기를 씹느라고 우적거리는 두르본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놀란 얼굴로 연신 스튜의 국물과 고기를 먹어 대는 전사들의 얼굴들 역시 진솔한 행복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이들이 어쩌면 진정한 행복을 즐기며 사는 이들은 아닌지, 하룬은 순수한 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다 먹고 나면 오늘은 푹 쉬어라."

"고맙다. 너 하룬, 진정한 친구다. 나 이런 음식 처음 먹는다."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들이라면 이런 음식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하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순수한 두르본이다. 하룬은 음식에 정신이 팔린 그들을 두고 식당을 나왔다.

"세상에!"

한창 무두질을 하던 타림 사부자는 하룬이 꺼낸 마수의 가죽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물량이 나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제너가 입에 거품을 물고 가죽들을 만져 댔다.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구한 거요?"

"이게 다 얼마야?"

다이너와 마이트도 경악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타림은 놀란 가운데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룬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수량의 마수를 잡으려면 황실 기사단이라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아시잖습니까? 용병입니다."

"맞아, 용병이라고 했지. 이름이 하…… 뭐라고 했지?"

"하룬입니다."

하룬의 대답에 타림과 세 아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타림이 뭔가를 떠올린 듯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하룬? 설, 설마 돌풍 용병대의 그 하룬 말인가?"

"네. 미흡하지만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타림과 세 아들은 하룬의 대답에 마치 석고상이 된 것처럼 굳은 채로 하룬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야 타림이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서, 설마 자네가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의 대장 하룬인지는 몰랐네. 하긴 그러니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고 악마 오크들을 그렇게 쉽게 잡았겠지. 실력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가츠와 친분이 있다기에 그냥 사냥에 능한 용병인줄 알았네."

타림 사부자는 하룬의 이름을 흘려들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새삼 놀라는 모습에 하룬은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자신과 돌풍 용병대의 이름을 공방에만 처박혀 사는 장인들이 안다면 그 유명세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이 갔던 것이다.

'제길, 잘못하면 큰일이 나겠는데.'

이곳은 엄연한 파이린 제국이다. 그는 고요의 땅에서 파이린 제국의 음모를 앞장서 깨부순 이력이 있는 몸이니 제국입장에서는 그를 좋게 볼 리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알려진다면 당장 이 도시의 기사단이 출동할 수도 있었다.

사실 그것이 걸려 황도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용병대장의 팔찌를 보여 주는 것만으로 출입이 가능한 이곳과는 달리 황도의 검문은 엄격할 테니 말이다.

"세상에! 돌풍 용병대의 그 하룬 대장이 바로 내 눈 앞에 있다니!"

역시 연륜이 있는 타림이 경악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는 신기한 눈길로 하룬의 이모조모를 살피더니 대뜸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나 한번 하세. 자네가 제국에 이름을 떨치는 영웅인지 몰라본 것을 사과하지. 자네같이 대단한 친구가 내가 만든 방어구를 입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네."

하룬의 손을 힘주어 잡는 타림의 손은 마치 거친 바위처럼 울퉁불퉁하고 단단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니야. 내 용병으로 자네만큼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은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네. 

바람의 계곡에 공중 다리를 가설해 주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의 단축은 물론 죽음의 위협에서 구해 준 것과 티넌 호수의 괴물을 잡아 그 근처의 어부들 목숨을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 준 영웅적인 행동은 이 제국뿐 아니라 대륙에도 널리 알려져 있네.

더구나 비록 파이린 제국에는 불경한 일이지만 다크 엘프들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자네의 그 뛰어난 기지와 지도력은 우리 제국민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일세."

하룬은 놀라서 굳게 잡은 타림의 손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런 일이 알려졌을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공중 다리를 놓은 일이야 목격자들이 많으니 그렇다고 치지만 티넌 호수의 괴물을 잡은 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지나가는 말로 대원들에게 이야기한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영광입니다."

"아버니, 저도 악수 좀 하게 손 좀 놔주세요."

"하하하! 이제 우리 공방의 이름이 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군요. 돌풍 용병대의 영웅 하룬 대장이 우리 공방에서 만든 방어구를 입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 공방은 그야말로 대박을 맞는 겁니다."

타림의 세 아들 역시 존경심이 가득한 눈길로 하룬을 바라 보고는 황송하다는 듯 하룬과 악수를 나누었다.

"방어구는 걱정하지 마시게. 우리가 있는 힘과 기량을 다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 테니까. 인챈트 계열의 6서클 마법사도 초청해서 마수의 가죽이 가지고 있는 마력을 최대한로 발휘하게 만들 것이니 우리만 믿게."

"고맙습니다. 그런데 방어구에 우리 돌풍 용병대를 대표 할 수 있는 문양을 새기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이 세계의 귀족 가문이라면 모두 고유한 문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드들은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문양을 무기에 새기거나 옷에 새기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드러냈다.

"당연히 가능하네. 그런데 그 문양 옆에 우리 공방의 문양과 우리 사부자의 이름을 넣어도 되는가?"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하하!"

타림과 세 아들은 하룬의 말에 일제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룬은 돌풍 용병대의 문양으로 강한 회오리바람을 형상화 시킨 이미지를 말해 주었고, 타림 사부자는 전문가답게 한눈에도 돌풍이 부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문양을 만들어 주었다.

"자네가 영웅은 영웅일세. 이곳으로 이주는 했지만 주문이 없어 곧 공방을 접고 은퇴를 하려던 내게 이런 기회를 주다니 말이야. 고맙네, 고마워!"

타림의 고집스러운 입매는 어느새 그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덩달아 세 아들의 얼굴에 드리워 있던 진한 그늘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마수의 가죽으로 최상의 방어구를 만들기만 하면 공방과 자신들의 이름은 하룬과 돌풍 용병대의 이름과 함께 사람들에게 회자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들과 아버지는 영웅이 이끄는 동풍 용병대원들이 입는 방어구를 만든 장인으로 널리 알려지는 것이다.

타림 사부자에게 비친 하룬은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면서 신분을 밝혀 함부로 겁박하거나 장인아라고 무시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그런 영웅이 이끄는 돌풍 용병대가 자신들이 제작한 방어구를 입는다는 것도 영광이지만, 그 방어구가 제대로 그 역할을 해 주면 자신들의 이름도 하룬과 덩달아 올라갈 것이다.

안 그래도 대장장이들 사이에는 그가 쓰는 하얀 검의 존재와 그 검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큰 화제였다. 어떤 대장장이는 하룬 정도의 영웅이 쓰는 무기라면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누구도 자신이 그 검을 만들었노라고 나서지 않자 이제는 그 검을 드워프들이 만들었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드워프들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엄청난 위력의 활과 화살을 사람들에게 보인 바가 있었다. 수많은 이방인들의 영향으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유행 때문에 이제는 유니크급의 무기 정도가 아니라 레어급의 무기도 제대로 만들어 내는 장인도 많이 없는 현실이라 장인들의 관심은 하룬이 쓰는 무기로 쏠려 있었다.

이제 돈은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타림이나 세 아들 모두 돈에 큰 욕심이 없는 태생적인 장인들이다. 돈이야 먹고살며 만들고 싶은 물품의 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미래를 생각하는 타림의 세 아들들의 눈이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돌풍 용병대의 방어구를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자신들은 제국 최고의 장인들로 새롭게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떠날까 망설였던 도제들은 마음을 잡을것이고 새로운 도제들도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다른 장인들은 자신들의 기법을 배우기 위해 허리를 숙이게 될 것이고 피혁 공방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등극하게 될 것이다.

"그럼 선금을 얼마나 더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전에 3,000골드를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5,000골드만 더 주시게. 마법사도 불러야 하고 제대로 하자면 우리끼리 하는 게 최선이지만 그래도 허드렛일까지 하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도제들을 고용해야 할 것 같네."

"그러십시오."

하룬은 5,000골드를 더 꺼내 타림에게 주었다.

"일단 아까 드린 가죽으로 최대한 빨리 방어구를 만들어 주십시오. 지난번처럼 마법 처리를 해서 체구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먼저 만들 방어구들은 탄툰 마을의 전사들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마수들과 삶을 공유하는 그들이니 조금이라도 강한 방어력이 필요할 것이다. 상단 문제로 고민을 하던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준 그들에게 그렇게라도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는 기본 옵션이니까. 아무튼 나를 잊지 않고 다시 찾아 주어서 정말 감사하네. 죽기 전에 마수의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들 기회가 올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네."

역시 타고난 장인인 타림은 그 많은 수량의 방어구로 인해 벌어들일 돈보다는 새로운 재료로 필생의 역작을 만들 기회를 가진 것에 더욱 기뻐하고 있었다.

"돈이 충분하니 기본적인 일은 근처 공방에게 도급을 주어 제작 기일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네. 일주일이면 되니 그 때 찾아와 주게."

하룬은 타림과 세 아들의 뜨거운 배웅을 받으며 공방을 나왔다.

'크험, 기분이 이상하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이 생각하는 영웅은 아니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몸에 맞지 않는 화려한 옷을 걸친 기분이었다.

'에효! 이게 다 HP(영웅 포인트) 때문이겠지?'

어떻게 생각하면 그가 아는 영웅들 역시 고결한 뜻과 이상을 가지고 영웅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 행적을 놓고 마음대로 해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영웅들도 많을 터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마음먹은 대로 일이 진행되어 기분만은 가뿐했다.

"저자들은 도대체 누구야?"

저녁 무렵 그가 남긴 메모를 보고 여관으로 찾아온 해란 자매는 하룬과 한 테이블에서 술을 즐기는 탄툰 마을의 전사들을 보고 물었다.

"내 친구들이야. 인사시켜 줄까?"

전사들은 아까의 식사에 이어 술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 숙소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도시는 신기함이 가득한 곳이고 이런 맛있는 음식이 있는 식당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그녀들은 친구라는 말에 잠시 호기심을 보였지만 그들의 문신으로 얼룩진 얼굴과 거친 기세를 엿본 후엔 고개를 저었다. 레미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강하고 위험한 기운이 풍겼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어?"

하룬은 그녀들과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직접 파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아."

들어 보니 이곳은 상인들과 이방인들이 많아 경매가 그리 좋은 수단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본시 돈이 많은 귀족들과 기사 또는 이방인 길드가 참가해야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데 상업 도시인 이곳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럼 좀 걸리겠네?"

"최소 일주일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싶어. 일단 실력있는 장인에게 수리를 맡긴 다음 정보 길드로부터 아이템 인증서를 받아 가판을 하게 되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어차피 하룬에게도 그 정도 시간은 필요했다.

"그 정도면 상관없어. 그런데 너희들 혹시 마정석에 대해서 뭐 좀 아는 것이 있니?"

"마정석이라고?"

메인 직업이 마법사인 해란이 당장 반응을 보였다. 이름을 들은 것치고는 과하게 격렬한 반응이었다.

"혹시 마정석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래?"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하룬은 그녀의 지나친 반응에 놀라 대충 얼버무렸다. 욕심이 많은 그녀가 알면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냄새가 났던 것이다.

"에이, 김 빠져."

"왜? 그거 귀중한 거니?"

심안을 통해 마정석에 대한 정보를 읽었지만 마나석과 그렇게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하룬이다.

"아주 희귀하지. 마나석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거야. 마나석은 마나를 담고 있는 보석류로 일정하게 마나를 발산하는 성질과 다 소비되어도 시간이 흐르면 채워지는 성질 때문에 각종 마법진에 쓰이는 것을 알지?"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상식이다.

"하지만 마정석은 한 번 마나를 소비하면 다신 채워지지 않아. 그야말로 쓸모없는 돌덩어리가 되는 거지."

그 설명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나가 다시 채워지는 마나석이 한 번 쓰고 나면 소용이 없는 마정석에 비해 더 귀할 것 같았던 것이다.

"문제는 마정석에 담긴 마나의 성질이야. 마나석에 담긴 마나가 아무런 활성을 가지지 못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특수한 매개체나 유도체, 즉 마법진의 영향으로 마나를 발산하는 것에 비해 마정석은 강하게 활성화된 마나를 가지고 있어. 그 말은 마정석에 있는 마나를 임의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야."

"그래? 내가 알기로는 각 원소의 순수한 마나를 담고 있는 마나석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원소석이라고 불러.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마나석의 한 종류야. 보통 마나석에 깃든 마나는 일정한 성질을 가진 마나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마나처럼 온갖 성질의 마나가 혼재된 마나지."

아직은 그 차이가 그렇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하룬의 얼굴로 본 해란이 보충 설명을 했다.

"마나석의 경우 마법사는 마법진을 이용해 사용할 수가 있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마나를 자신의 몸 안에 축적하지는 못해. 하지만 마수의 몸석에서 자라난 마정석은 마법사의 의지대로 몸 안에 축적할 수 있어. 그래서 마정석의 가격이 마나석의 몇 배나 되는 거야."

이제 확실히 그 차이를 알게 된 하룬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마정석에 축적된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단 말이지.'

마정석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자 마정석을 세 주머니나 자신에게 맡긴 탄툰 마을의 전사들이 예뻐 보이는 하룬이다. 상거래에 대해 잘 모르는 하룬이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잡은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런 물품을 정기적으로 받고도 생필품과 무기 같은 것으로 때웠단 말이지. 정말 상인들이란 무섭군.'

물론 마수가 출몰하는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위험수당을 고려해야겠지만 그래도 이런 폭리는 없었다. 어쩌면 마정석 몇 개의 가격으로 데빌 산맥의 오지에 자리한 마을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전부 구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손톱만 한 마정석이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해란은 하룬의 질문이 왠지 구체성을 띠고 있다는 것에 의심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해 주었다.

"그 정도 크기면 하급이야. 하급 마나석이 보통 300에서 1,000골드 가량 하니까 마정석은 3,000골드에서 1만 골드 정도 하겠지. 그 위 등급의 가격은 나도 몰라. 시중에서 전혀 거래가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마수가 서식하는 지역이 별로 없는 데다가 마수를 잡는 것이 워낙 위험하기 때문에, 마정석은 하급이 대부분이지만 한 해에도 100개도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어. 가격은 불문하고 사들이는 마탑들 때문에 경매장이 아니면 구경도 못 한다고 하더라고. 나도 실제로는 보지 못한걸."

해란으로부터 그 가격대를 들은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거야말로 뒷걸음치다가 던전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뭐야? 뭔가 있는 거지?"

감을 잡은 해란이 물었지만 하룬은 다시 표정 관리를 했다. 해란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배가 아파 난리를 치며 한몫 끼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오버하지 말라고."

"쳇! 뭔가 수상한데."

"피곤할 텐데 빨리 먹고 돌아가서 쉬어. 난 친구들과 이야기나 좀 더 하다가 올라갈 테니까."

하룬은 해란이 붙잡기 전에 두르본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어때, 마실 만해?"

"끝내준다!"

두르본은 자신의 머리통만 한 나무 잔에 든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기분 좋게 인상을 썼다.

"레미는?"

"맛있어요. 우리 마을에서 담은 과실주는 너무 독하고 향도 강한데 이 술은 부드럽고 약해서 기분이 좋아져요."

레미 역시 부드럽고 풍미 있는 맥주의 맛에 반한 것 같았다. 하지만 디온과 옥세르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난 그저 그렇다. 너무 약해!"

"술은 우리 것이 가장 좋다."

자연 발효를 시켜 만든 독한 술에 길들어진 두 사람에게 맥주는 너무 약한 것 같았다.

하룬은 종업원을 불러 증류주인 쓰로파이어를 시켰다. 자신에게도 맥주가 알맞지만 두 사람에게는 도수가 50을 넘나드는 쓰로파이어가 제격인 것 같았다.

"이건 또 뭐야? 왜 이렇게 작아?"

옥세르가 쓰로파이어 병을 보더니 투덜거렸다. 게다가 잔마저 그의 손가락 두께이니 맘에 들 리가 없었다. 하룬은 두 사람의 앞에 쓰로파이어를 적당히 채운 작은 잔을 건네 주었다.

"일단 마셔 봐. 한 번에 넘겨야 돼."

"헤엥. 이 정도야."

디온과 옥세르는 단숨에 작은 잔에 든 쓰로파이어를 마셨다.

"후아아~!"

"우우~!"

쓰로파이어를 원샷으로 마신 두 사람의 얼굴은 금방 붉게 달아올랐고 입에서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두 사람은 고개를 흔들며 눈을 껌벅였다.

"어때, 좋지?"

두 사람은 목이 타는 감각 때문에 말을 못 하고 엄지손가락만 들어 올리며 빈 잔을 내밀었다. 마치 화염이 목구멍을 통과해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머리로 올라간 후 귀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최고다!"

"죽인다!"

디온과 옥세르는 하룬이 잔을 다 채운 후에야 탄성을 지르며 손가락만 한 잔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건 전사의 술이야. 한순간에 목구멍을 태워 버릴 정도로 화끈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쓰로파이어는 용병들이 즐기는 술이었다. 물론 그 가격대가 비싸기 때문에 매번 먹을 수 있는 술이 아니다. 병당 20골드나 하는 가격 때문에 씀씀이가 헤픈 용병들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감히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으으윽!"

그새 쓰로파이어를 조금 따라 마셨던 두르본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밖으로 꺼냈다.

"큭! 큭!"

"낄낄낄!"

"하하하!"

세 남자는 두르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마치 자살이라도 할 것처럼 자신의 목을 조르며 시뻘건 얼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전사의 명예를 위하여!"

"마수들을 위하여!"

"탄툰의 평화를 위하여!"

세 남자의 건배에 맞추어 두르본과 레미도 머리통만 한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그 후로 다섯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는 한동안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즐거운 대화가 자리했다.

다음 날 일찍 아침 식사를 마친 하룬은 탄툰 마을 전사들을 데리고 대장간으로 향했다.

"정말 사 줄 거냐?"

두르본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지만 하룬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넌 정말 좋은 놈이다. 우리랑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레미의 말이 맞았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란히 걷고 있는 디온과 옥세르도 하룬에게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그래도 새 발의 피다.'

마수 가죽과 약초를 제외하고 이들이 준 마정석은 상급이 12개, 중급이 17개, 하급이 34개나 되었다. 최소한으로 잡는다고 해도 가볍게 10만 골드가 넘었다.

마정석의 가치를 알고 나니 그들이 원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사 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돈이 있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마정석이 아닌가? 그걸 이용하면 마나 부족으로 인해 고생하는 대원들의 경지를 한순간에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튜닉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목 그리고 팔뚝에 그려진 문신들과 몸에 배인 투기로 인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는 20여 명의 전사들이 거리를 지나자 사람들의 물결이 출렁이며 길을 열었다.

'기분 괜찮은걸'

물론 모두가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칫 시비로 이어질까 염려돼 피하는 것이지만 전사들을 이끌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걷는 것은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눈길의 의미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걸릴 뿐이지만 자신의 수하들도 아니니 상관없는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방 거리의 대장간 구역에 도착한 하룬은 어제 타림이 말해 준 대장간을 찾았다.

'저기 있구나!'

'오로파 대장간' 이라는 낡은 상호가 새겨진, 거대한 도끼 두 자루가 교차해서 세워진 대장간의 외양은 후줄근했다. 거리 쪽으로 물품을 진열하고 파는 상점을 배치하고 뒤쪽에 공방을 설치한 다른 대장간들과는 달리 오로파 대장간은 진열공간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오지에 살던 전사들이라도 보는 눈은 있어 오로파를 향하는 하룬을 향해 이상한 시선을 주었지만 하룬은 타림의 안목을 믿었다. 그가 말하길 이 오로파에서 만드는 무기가 가장 단단하고 쓸 만하다고 했던 것이다.

"뉘슈?"

대장간을 들어서자 전사들에 못지않게 엄청난 거구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중년 사내가 제대로 눈도 맞추지 않고 물었다. 그의 주위로 열 명 정도의 도제들이 각기 맡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들 웃통을 벗고 있는 상태였다.

"무기를 구하러 왔습니다."

하룬의 말에 그 중년 사내가 비로소 제대로 눈을 들어 하룬과 전사들을 훑어보았는데 그 시선이 얼마나 날카롭던지 디온을 비롯한 전사들이 본능적으로 무기를 잡으려고 했다.

"흐음, 좋은 몸들이군."

칭찬인지 빈정거림인지 분간이 안 가는 소리와 함께 하룬에게 눈을 맞추는 중년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귀찮아서 인지 머리를 박박 민 것에 더해 눈썹도 거의 없는 얼굴은 화상을 입었는지 무척이나 흉측하게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찾아왔나?"

귀찮다는 듯 사나운 눈빛으로 하룬을 쏘아보는 사내의 말이다.

"타림의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 고집 센 늙은이가 소개를? 호오! 신기한 일이군."

타림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의 시선에 미약한 호기심과 호의의 감정이 어렸다.

"자세히 보니 자네도 보통 인물이 아니군. 희미하지만 위엄이 깃든 기세를 뿜어내는 것을 보니 한가락 하는 인물인가보네. 좋아! 뭐, 그 정도라면 내가 만든 무기를 제대로 써 주겠지. 난 빌키먼이라고 하네. 이리 들어오게."

굵고 거친 목소리와 거침없는 말투는 아마 상대가 귀족이라 해도 별 변화가 없을 것 같았다. 비록 대장장이지만 그 기세만은 어지간한 기사들도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

"들어갑시다."

뒤로 돌아보니 디온과 옥세르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빌키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빌키먼의 기세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빌키먼은 그들이 따라오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고, 대장간에서 각기 제 일을 하는 나머지 대장장이들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꽤 하겠는걸?'

익스퍼트에 오른 영향인지 아니면 선더볼트를 맞은 영향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사람을 보면 대충 그 경지가 보였는데, 일하는 대장장이들이 단순한 장인들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골고루 잘 발달된 근육들을 보니 단지 단순노동을 반복해서 생기는 근육들이 아닌 것이다.

빌키먼은 대장간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를 따라 지하로 내려간 하룬 일행은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후아! 멋지구나!"

단 하나만 있는 창을 통해 햇빛이 가득 들어와 상당히 밝은 지하는 위층의 넓이만큼 넓었고 사면의 벽과 중앙에 있는 거치대에는 각종 무기들이 널려 있었다.

전사들은 날카오룬 예기를 흘리는 무기들을 보고는 홀린듯 거치대로 흩어졌다. 타고난 전사들이니 뛰어난 무기들에 넋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어린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무기를 살피는 전사들의 행동에 빌키먼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골라 보게!"

빌키먼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지만 그는 하룬 일행이 놀라는 것을 즐기는 눈치였다. 살짝 비틀린 입매가 그의 만족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들 마음에 드는 무기들을 골라!"

가격대를 지정하는 것은 애초에 포기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과 지속적으로 거래를 할 생각을 굳힌 하룬은 이번에 좀 손해를 보더라도 이들이 각자 원하는 무기를 사 줄 생각을 했다.

'설마 10만 골드 이상 나오려고.'

막대한 현금을 쥐고 있으니 배포가 두둑해지는 하룬이다.

하룬의 말에 두르본을 위시한 전사들은 물론이고 레미까지 무기를 고르는데 정신이 팔렸다.

"댁은 안 고르나?"

"아! 전 쓰는 무기가 따로 있습니다. 인사가 늦었군요. 하룬이라고 합니다."

빌키먼은 전사들과는 달리 무심한 얼굴의 하룬에게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더니 이름을 듣고 얼굴 근육을 꿈틀거렸다.

"하룬? 혹시 돌풍 용병대의?"

"네."

"호오! 역시 내 눈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더니."

하룬의 이름을 듣고 난 빌키먼의 눈매는 부드럽게 풀렸지만 눈빛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반갑네. 난 어디 오지에 사는 무식한 자들이 찾아온 줄 알았는데 돌풍 용병대원들이었군. 하긴 저 정도로 단련된 몸과 투기라면 웬만한 기사들은 오줌을 지릴 정도이니. 좀 사납고 위험한 기질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몸만은 멋지군."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 스스로도 탄툰 마을의 전사들 정도라면 대원으로 영입하고 싶으니 말이다.

"혹시 무기를 좀 보여 줄 수 있는가?"

그의 말에 잠시 의아했던 하룬이지만 이내 본 소드를 꺼내 건네주었다. 대장장이가 무기를 보자는 것은 그 품질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도가 없을 터였다.

"호오! 보기 드문 본 소드로군. 재료가 뭔가?"

"아이언 스네이크의 뼈로 만들었습니다."

아이언 스네이크라는 말에 빌키먼은 작은 탄성과 함께 본소드를 자세하게 관찰했다. 체구나 외양과는 달리 무척이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행동과 태도는 제대로 숙련된 장인의 그것을 보여 주는 터라 하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뛰어난 검일세. 족히 수천 년은 산 놈의 뼈로 만들었군. 내구도와 강도는 강철 검에 비견할 수 있고 마나 전도율도 뛰어나군. 다만 예술적인 면에서 좀 부족하고 예기가 좀 무디기는 하지만 별문제는 없군."

예술성이야 원체 거리가 멀었고 예기야 마나를 주입하면 자연히 날카로워지기에 별 불만은 없었다.

"아무리 익스퍼트라고 할지라도 마나를 한정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가능하면 무기 자체의 위력이 극대화된 놈으로 하나 골라 보게. 이곳은 5대에 걸쳐 우리 오로파 대장간의 장인들이 만든 무기들이 있는 곳이네.

내가 워낙 귀찮은 것을 싫어해서 이곳에 있는 무기들도 등급별로 정리가 안되어 있네. 좋은 놈들이 막 섞여 있지. 제대로 된 물건을 찾으면 내 원가로 주지."

맞는 말이다. 초급 익스퍼트 시절 손가락 길이의 검기를 몇 분밖에 유지할 수 없던 하룬으로서는 공감이 가는 말일 수 밖에 없었다.

"정말입니까?"

"나 빌키먼은 허언을 싫어하네."

자존심이 강한 장인이 주는 호의를 거절할 생각은 애초에 없는 하룬이다. 하룬은 본 소드를 다시 갈무리하고는 무기 거치대로 향했다.

가장 먼저 비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비수들과 단검들이 휘황한 빛을 뿌리며 그의 눈을 유혹했지만 하룬은 눈을 돌렸다. 비수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전투 도끼나 창을 비롯한 무기들도 볼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 손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 가볍고 뛰어난 검이다. 그의 장점인 빠른 몸놀림과 발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그런 검을 원했다.

이 비욘드에서 주로 쓰는 검은 기사들이 선호하는 양손 검이었다. 때문에 검이 진열된 거치대에도 양손 검들이 가장 많았다. 다음은 탄툰 마을의 전사들과 빌키먼 정도의 덩치들이 사용하는 대검이었고, 가장 숫자가 적은 것이 바로 미끈하게 빠진 가벼운 한 손 검이었다.

한 손 검들의 숫자가 가장 적다고는 해도 그 숫자가 무려 100자루 이상이니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 모두가 뛰어나 보였던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검을 찾아낼 방법은 있다. 심안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정시간 이상 한 물체를 보고 있으면 심안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그 물체의 정보가 보이는 것이다.

'아니야. 시간이 부족해.'

100자루가 넘는 검들을 일일이 그렇게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미 상당수의 전사들이 마음에 드는 무기를 찾아 휘둘러 보고 있었다.

'제길! 이건 좋은 기회인데.'

마은이 급하니 더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몇 자루만 있었다면 상세하게 살피겠는데 비슷한 예기와 형태를 가진 것들이 무더기로 있으니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기가 더 힘들었다.

-주인, 저걸 골라!

갑자기 심령을 통해 들려온 말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한창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싸가지였던 것이다.

-어떤 거?

-저기 아래 골드 드래곤이 음각된 자루가 보이지? 그게 제일 좋은 거야.

하룬은 싸가지의 말대로 거치대에 걸린 것이 아니라 그 아래쪽에 무더기로 쌓인 검들 중에서 하나를 꺼냈다.

'특이하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다른 검들과는 달리 검신의 색깔이 검은색에 가까운 진청색이었고 재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광택도 없었다. 길이는 본 소드보다 조금 더 길었고 혈조가 두 줄로 나 있는 검은 날을 세우다가 만 것처럼 무딘 날을 가진 것에 더해 무척 가벼웠다.

검을 고르는 자라면 당연히 피할 테지만 하룬은 이미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검인 박살을 소유하고 있다. 박살의 날은 이것보다 훨씬 더 무뎠지만 마나만 주입하면 엄청나게 날카로운 날을 만든다.

'어디!'

하룬은 마나를 끌어올려 주입을 해 보았다. 그러자 마나는 놀라운 속도로 검신으로 들어갔고 무딘 날 부분이 옅은 마나광과 함께 눈에 보이지도 감지되지도 않는 예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놀라운 마나 전도율이었다. 본 소드의 날에 주입하는 양의 절반도 주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우웅!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기이한 소리가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자신을 선택한 것을 반기는 것 같았다.

'어! 이거 물건이다!'

뭐랄까? 검이 자신에게 착 달라붙는다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잃었던 자신의 것을 되찾은 듯 반가움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검이 마나를 받아들이며 우는 소리가 꼭 자신을 반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룬은 검을 쥐고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아이언 본 소드에 비해 조금 가볍고 길어 쾌검류에 속하는 메신저 검술을 펼치기는 아주 알맞았다. 이 무게라면 근력만으로도 이전보다 한배 반은 더 빨리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린 듯 검을 쳐다보자 정보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 히든 티쓰

등급 : 유니크

내용 : 검의 장인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시릴가의 마지막 후예가 만든 검으로 운석에 미스릴과 마나석을 섞어 만들었다. 그는 검의 자비로움을 강조한 가문의 가르침대로 마나를 주입해야만 날이 생성되는 검을 만들었다.

내구력 : 2,400/2,280

옵션 : 민첩 +10, 체력 +10, 지혜 +10

'유니크다! 그래, 넌 이제 박살이다, 박살.'

하룬이 히든 티쓰라는 이름대신 박살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순간 귓가에 빌키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하필 그 검인가?"

제대로 좋다는 표정도 짓지 못한 하룬이 고개를 돌리자 빌키먼이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보니 잘못 골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건 우리 대장간에서 만든 검이 아니네. 제작 기법도 다르고 내 4대조께서 여행 중에 얻으신 검이네. 몇 번이나 날을 세우려고 했지만 재료가 뭔지는 몰라도 끝내 할 수가 없었네. 더구나 너무 가벼워 기사들은 물로 용병들도 쓰기를 꺼리는 형편없는 검일세."

빌키먼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기에 검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아마 그 무게나 무딘 날 때문에 마나를 사용하는 검사들은 마나를 주입해서 검을 시험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내 다른 것을 골라 주지."

"괜찮습니다. 전 이걸로 하겠습니다."

빌키먼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하룬의 눈빛에서 진심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 어쨌든 우리 가문에서 다루지 못하는 재료로 이 정도까지 제작한 것만 해도 뭔가 있어 보이는 검이니까 그냥 가지게."

호의이긴 하지만 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말에서는 안 그래도 버리려고 했는데 잘됐다는 느낌이 폴폴 풍기고 있었다.

"날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으니 검집도 필요 없겠지?"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룬이 마음에 드는 검을 얻은 사이 탄툰 마을의 전사들도 마음에 드는 무기들을 하나씩 골랐다. 그들이 고른 무기들을 본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체구에 어울리는 중병기들을 골랐던 것이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순수한 성정을 가진 전사들의 얼굴에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에, 보자! 그래도 잘 정련된 것들을 골랐군. 뭐, 덩치하고는 안 어울리지만 내구도도 강하고 무게중심이 잘 잡힌 것들이네. 모두 합해서 2만 골드만 내게."

"2만 골드요?"

따로 무기를 사 본 적이 없는 하룬이기에 조금은 놀랐다. 개당 평균 1,000골드라면 적정한 것인지 어떤지 모르겠다.

'가만! 이건 레어급이다.'

전사들의 무기를 살피던 하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중 몇 개는 레어급으로 보였던 것이다. 비록 정보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하룬이다.

'레어가 섞여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레어급 무기는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무기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이득인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 쉽게 돈을 쓰는 이방인들로 인해 식료품을 제외한 물가가 전반적으로 많이 올랐다니 그럴 수도 있었다. 자신이 얻은 히든 티쓰만 하더라도 결코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왜, 비싸다고 생각하나? 난 꽤 싸게 주는 건데."

"아, 아닙니다."

하룬은 주저하지 않고 2만 골드를 골덴화로 지불했다. 싸다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와 전사들이 만족하면 될 일이다. 더 이상 가격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태도에 빌키먼이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하! 시원스러워서 좋군."

"이들의 검집과 도갑을 좀 만들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말게. 올라가서 금방 만들어 주겠네."

최근 들어 늘어난 이방인들 때문에 그의 공방 역시 전과는 달리 밀고 당기는 상술을 발휘해야 할 때가 많았다. 깎을 것을 생각하고 가격을 높여 불렀는데 이렇게 단번에 받을 줄은 몰랐기에 기분이 좋아진 빌키먼은 사람들을 이끌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모든 작업을 맞추고 여관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들의 흥분상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 생긴 무기를 들고 숙소 뒤편의 마당에 나와 무기를 시험하고 몸에 적응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룬 역시 그들과 함께 마당으로 나와 나무 아래에 앉아 그들이 하는 짓을 구경했다.

'훗! 저렇게 좋은가?'

자신의 경우 퀘스트를 깬 후에 얻은 무기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써 왔다. 굳이 더 좋은 무기를 가지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그들의 기분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탄툰 마을의 전사들은 체구가 장대해서 그런지, 그들이 휘두른 무기들은 바람을 일으키며 대기를 가르고 찢어발겼다. 비록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그들의 괴력은 그것을 대신하고도 남았다.

제대로 된 검술이나 무기술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나름대로 자신의 무기를 휘두르는 방식을 갖추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새로 얻은 무기를 소중하게 챙기고는 예전에 쓰건 무기를 꺼내 휘두르며 그 차이를 확인하는 전사들도 있었다.

한 시간 정도가 흐르자 옥세르가 자신의 대검을 거두고 하룬이 앉은 곳으로 다가왔다. 전사들은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듯 수련을 멈추고 하룬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언제 왔는지 방 안에서 나오지 않던 레미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고맙다, 친구!"

체구만큼이나 엄청나게 큰 대검을 고른 옥세르는 검집까지 생긴 것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거렸다. 아니, 옥세르뿐 아니라 다른 전사들도 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좋은 무기를 가져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고맙긴."

마정석의 가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로 찾아오던 상인들이 그들에게 지불한 것에 비하면 하룬의 그것은 그야말로 횡재로 생각될 만큼 컸던 것이다.

"레미! 우리 아카족 전사의 힘들 이 친구가 받을 수 있을까?"

"그건……."

레미는 옥세르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도 옥세르의 마음을 알지만 그건 우리 부족의 전사들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힘이잖아."

결국 나온 말에 하룬을 둘러싼 전사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진하게 풍겼다.

'좋은 녀석들!'

자신들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받았다는 것에 감복해서 그들 부족 전사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것까지 주려고 하다니.

하룬은 그 힘이 뭔지는 몰라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뿌듯한 마음이었지만 약간의 호기심이 들었다. 

"너희들의 마음만 받을게. 정말 고맙다! 그런데 전사의 힘이라는게 뭐야?"

"이거다!"

두르본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이마와 눈 주변까지 포함하는 문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타투?"

"이건 '샤타의 눈' 문신이지요. 이 문신을 새기고 정신을 이곳에 집중하면 빠르게 움직이는 대상물을 제대로 볼 수 있어요."

공용어에 능숙한 레미가 설명을 해 주었다.

예컨대 동체 시력을 강화시켜 준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묘하게 문신의 모양이 똑같았다. 세 개의 동심원이 서로 겹쳐 있었고 그 안에는 벼락을 형상화 시킨 것으로 보이는 문양들이 알 수 없는 기호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저건 '프로즐리의 팔' 문신이에요. 프로즐리의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해 주는 문신이지요."

레미가 가리킨 것은 두르본의 양쪽 어깨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하룬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로 향하자 두르본은 흰 이를 드러내며 튜닉을 벗었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속옷 차림으로 변했지만 그녀나 다른 전사들 누구도 신경을 쓰는 기색은 없었다.

비록 체구가 크기는 했지만 그녀의 몸매는 환상적이었다. 예전 아리의 몸이 그랬듯 완벽한 팔등신인 데다 자잘한 근육들로 인해 굉장히 육감적이었지만 뽀얀 속살이 보이는 부위는 별로 없었다. 

다만 보기 싫은 흉터들로 인해 여성미를 느끼기는 좀 그랬다. 아무튼 그녀의 온몸은 그야말로 문신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건 '아카의 심장' 이고 이건 '비얀의 날개'  그리고 이건 '람비의 발' 이다."

두르본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에 새겨진 문신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발과 허벅지 그리고 등까지 새긴 문신의 종류는 모두 여섯 가지나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모두가 마수의 이름과 특정 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마수가 가진 힘을 문신을 통해 발휘하는 건가?"

"후훗! 맞아요. 오래전부터 데빌 산맥에서 살아온 우리 아카 부족은 이렇게 문신으로 마수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써왔어요."

하룬은 멍한 눈으로 두르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바라보았다. 믿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보여 준다."

두르본은 하룬의 의심에 찬 시선을 느끼고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잠시 눈매를 좁히더니 자신의 내부에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다리와 발 부위에 크게 새겨진 문신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만족한 얼굴로 눈을 완전히 뜬 두르본이 넓은 공간을 뛰기 시작했다.

휘익! 휘익!

그녀의 몸은 한 번의 도약에 무려 사오 미터씩 뚜며 마치 날듯 빠르게 움직였다. 잔영이 남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에 하룬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이 정도면 메신저 패스트스킬을 전력으로 펼쳤을 때와 비견될 정도였던 것이다.

"하하하! 어때?"

어느새 후원을 몇 바퀴나 움직이고 가까이 다가온 두르본이 놀란 하룬의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단해!"

지금까지 하룬은 자신보다 더 빠른 움직임을 가진 이를 만나거나 본 적이 없었다. 문신에 깃든 힘으로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우리 아카족의 숨겨진 힘이야."

좀 떨어진 곳에서는 문신이 옷처럼 보여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바로 곁으로 오니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놀란 가운데서도 얼굴이 달아오른 하룬은 시선을 레미에게 주었다.

"이게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가능한 거야?"

이게 가능하다면 굳이 몸 안에 마나를 축적하는 과정을 수련하지 않아도 된다. 문신만 새기면 마수의 능력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이다.

"가능해요. 다만 그 힘을 쓰려면 몸이 자격이 있어야 하고 제한이 있어요."

"자격?"

"네. 마수의 힘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마수들 역시 마력을 몸에 축적해 그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니 마정석의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해요."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조상으로부터 전해 받은 마수의 문양을 몸에 새기고 피가 솟아나온 자리에 마정석 가루를 뿌린 다음 주술의 힘으로 마수의 힘을 주입시키는 거예요. 몸이 마정석 가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마수의 힘은 쓸 수가 없어요.

아주 오랜 옛날 우리와 동맹을 맺었던 럼프족을 제외하고는 외부인이 이 힘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어요."

하룬은 문신의 힘에 무척 고무되어 있었기에 레미의 말에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호기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럼 제한은 뭐지?"

"마수의 힘을 쓰려면 영혼이 강해야 해요. 문신과 함께 육체에 각인된 마수의 마나는 대상자를 지배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눌러 자신의 지배하에 두어야 해요. 그러면 그 부위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마수의 힘을 쓸 수 있어요. 하지만 그 힘은 아주 짧은 시간밖에 쓸 수 없어요. 

데빌 산맥의 모든 마수들이 두려워했다는 우리 아카 부족의 전설적인 영웅 카티야는 한 시간까지도 쓸 수 있었다고 전하지만, 우리 마을의 전사들 중 가장 강한 옥세르도 서른 호흡밖에는 쓸 수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마수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타고난 육체에 정신이 강건해야만 그 힘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신이 저렇게 커야만 하는 거야?"

두르본의 육체는 보기가 좀 그랬다. 비록 전사라고는 하지만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전신에 빼곡하게 자리를 잡은 문신은 섬뜩하고 날카로운 기운까지 발산하고 있어 두르본의 여성미를 심하게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원래 저렇게 커요. 하지만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문신의 크기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카티야처럼 몸 안으로 스며들어 보통 때는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요."

하룬은 자신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는 전사들의 이마들을 살펴보았다. 과연 레미의 말대로 가장 연장자에 기도가 뛰어난 디온과 옥세르의 이마에 새겨진 문신은 그 윤곽도 흐릿하거니와 그 크기도 양 눈과 미간 주위에 그칠 정도로 작았다.

노출된 부위는 각양각색의 문신으로 가득 한 두르본이나 다른 전사들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럼 프로즐리의 힘을 한번 볼 수 있을까?"

하룬은 문신의 힘에 크게 매료되었다. 람비의 발이야 메신저 스킬을 익힌 자신에게 크게 필요는 없었지만 강력한 근력은 달랐다. 지금이야 좀 살이 붙어 사람 꼴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마른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옥세르, 프로즐리의 힘을 보여 줘요."

"카하핫! 보여 주지."

레미의 요청에 옥세르는 두르본이 그랬건 것처럼 눈을 반개하고 뭔가에 집중했다. 그러자 튜닉으로 감싼 그의 상체 부위가 빛에 휩싸이더니 이내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튜닉을 입고 있어서 그의 허리를 기점으로 상체 전체의 근육이 요동을 치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화아! 정말 대단하네.'

안 그래도 장대한 체구를 가진 옥세르인데 마수의 힘을 개방한 후 그의 상체는 터질 것처럼 근육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힘을 시험할 요랑인지 후원 한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 앞으로 간 옥세르가 기합성과 함께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하압!"

평소처럼 건틀릿을 착용한 상태도 아닌데 사람 키만 한 거대한 바위를 향해 아무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에 하룬의 몸이 절로 반응했다.

꽈앙!

이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체와 바위가 부딪히는소리가 아니었다. 바위끼리 부딪힌 것처럼 굉장한 소리와 함께 옥세르의 주먹은 거대한 바위를 뚫고 팔뚝까지 깊이 박혀 버렸다.

'대단하다!'

하룬의 눈이 커졌다. 옥세르의 주먹이 박힌 바위는 여러 방향으로 금이 가 있었다. 차라리 바위를 부쉈다면 덜 놀랐을 것이다.

이건 빠르기와 힘이 제대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런 강력한 권력이라면 마나를 사용하는 익스퍼트급의 검사라도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짝! 짝! 짝!

하룬은 자신도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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