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림 공방>>
혼란스러운 상황을 벗어난 하룬은 그들이 부탁한 물건을 떠올리며 먼저 해란 자매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직접 알아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란 자매에게 맡겨도 되지만 자신이라고 굳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돌풍 기지의 일 정도는 아니겠지?'
배우지 못해 서류 처리를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 보니 골이 빠개질 것 같기는 했지만 배우는 것도 많고 기지 전반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귀찮아서 혹은 몰라서 못 한다는 것은 예전의 나처럼 실패자 혹은 보더러의 변명에 불과해!'
다른 할 일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마냥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신에 대해 숱하게 환멸을 느꼈던 하룬은 뭔가 열중하고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 그 일이 중요한 것이든 아니든 열정을 가지고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 한번 해 보자.'
하룬은 마음을 정하고 다시 전사들의 방으로 가 가죽을 챙겼다.
하룬은 여관을 나오며 샘플로 쓸 마수의 가죽들이 종유별로 든 배낭의 무게를 느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이것들을 제대로 팔기 위해서는 생각을 좀 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무작정 시장으로 갔겠지만 이제 하룬도 게임을 통해 어느 정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보!'
마수가 흔한 것이 아니니 그 가죽이 흔한 것일 리가 없다. 마수의 가죽을 필요로 하는 상인이나 장인을 찾아봐야 한다.
'오! 타림 공방!'
생각이 났다. 타림은 그 아들들과 함께 럼프 오크의 가죽으로 돌풍 용병대 전용 방어구를 만든 장인이다. 허브 시티에 들렀을 때 그의 가게를 찾았던 하룬은 그가 아들들의 권유로 이곳으로 이주해 큰 공방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가죽들로 방어구를 만들까?'
대원들이 늘었다. 전용 방어구가 없어 일부는 지급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떠오르자 욕심이 났다. 사실 허브 시티로 가는 길에 방어구 때문에 럼프 오크를 찾아 후크란 산맥을 다녀올까도 생각했던 하룬이다.
'그런데 왠지 꺼림칙했단 말이지.'
이상한 감정이었다. 럼프 오크를 잡아 가죽을 벗겨 와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하룬은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럼프 오크를 죽인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렸다. 그들이 측은하고 슬펐다. 예전 무능력하기만 했던 시절 자신에 대해 수시로 느꼈던 환멸감이 다시 찾아왔다.
'왜 그런 느낌이 든 거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일반적인 오크들과는 달리 높은 수준의 지성을 가져서일까? 왜 악마 오크라고 불리는 럼프 오크들에 대해 가까운 이들에게 느끼는 친근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타림 공방을 찾아보자.'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옳은 판단이라고 확신했다. 긴 털의 존재와 가죽의 두께가 럼프 오크의 그것보다 훨씬 더 두꺼워 장인들이 가공하기는 어떨지 모르지만, 럼프오크의 가죽보다 마수의 가죽이 방어구로서는 더 뛰어날 것이 분명하니 이것들로 돌풍 용병대의 새로운 방어구를 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하룬은 여관을 나오기 전에 지배인에게 공방 거리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시티 상업 지구의 외곽에 위치한 공방 거리는 총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수공예품, 피혁 제품, 보석 제품, 그리고 금속 제품을 제조, 가공, 판매하는 네 공방 구역에는 상점들과 아이템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혼잡했다.
대장간이 딸린 금속 제품 상점들이 밀집한 구역이 가장 붐볐고 보석류를 거래하는 구역이 가장 한산했다. 피혁 상점들은 각종 생활용품이나 상행에 필요한 물품들 그리고 방어구들을 팔고 있어 이방인들 뿐 아니라 주민들도 꽤 많았다.
하룬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상점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대단하네. 이 많은 상점들이 다 장사가 된단 말이지?'
언뜻 보아도 거리 양쪽에 줄지어 늘어선 상점들의 숫자는 꽤 많았다. 상점들은 물건을 전시하고 파는 거리 쪽 공간과 함께 그 안쪽으로 수많은 장인들이 분업 체계를 갖추어 작업을 하는 공방을 갖추고 있었다.
타림의 공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예전 허브 시티의 공방은 상호 명이 적힌 간판도 없었지만 이제는 '타림 공방'이라고 새겨진 간판까지 가지고 있었다. 상점들은 대부분 거리 쪽 벽을 허물었기 때문에 실내에 전시된 물품들을 볼 수 있었지만 몇 개는 그렇지 않았는데 타림의 상점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간 하룬은 밝고 쾌활한 인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소년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는데 뭉툭하고 큰 코를 보니 타림을 여지없이 닮았다.
"뭘 찾으세요?"
잠시 소년의 얼굴을 쓸어보던 하룬의 시선이 상점 내부로 향했다.
'어라?'
뜻밖에도 상점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상담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와 의자들이 전부였다. 일반적인 상점의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하룬의 머리가 옆으로 살짝 기우는 것을 본 소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공방은 주문 제품만 취급을 하는데요, 손님."
풍기는 시세가 심상치 않은 손님이다. 귀족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을 짓누르는 위엄과 강함 무게감에 타림의 손자 피롤이 긴장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하룬의 말에 피롤의 눈이 커졌다. 예사로운 손님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짜고짜 할아버지를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들의 의견을 좇아 이곳으로 이주를 해 온 이래 피롤의 할아버지인 타림은 상담실에 나오는 법이 거의 없었다.
"할,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피롤의 모습에 하룬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봐야 긴 머리카락 때문에 살짝 비틀린 입매만 제대로 보였지만 무표정할 때와는 사뭇 그 기세가 달라졌다.
"허브 시티에 있을때 물건을 주문한 적이 있었다."
"아!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할아버지도 반가워하실 거예요."
피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안쪽의 공방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잘하면 어려운 공방 살림에 도움이 되는 주문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니기에 주문이 거의 없어 무척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어린 피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피롤의 할아버지인 타림은 이곳으로 이주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장인이란 그 솜씨를 뽐내서가 아니라 만든 물건을 통해 다른 이들이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타림의 지론이었다. 이 거리에 입주한 다른 많은 상점들처럼 그저 많이 팔기 위해 대충 물건을 만들어 이득을 취하는 것을 그는 무척이나 혐오했다. 그것 때문에 아들들과 수차례 싸운 타림이지만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가족들은 물론 할아버지를 따르는 도제들까지 모두 이곳으로 이주를 하고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다가 상점을 열었지만, 주문제를 고집하는 타림 때문에 그의 가족은 생활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주문제를 고집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안쪽에서 타림이 나왔는데 그의 뒤로 세 아들도 보였다. 꼭 싸운 것처럼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호기심을 포함한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누구신지?"
타림과 세 아들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하룬을 훑었다. 비록 일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고, 피롤이 뭐라고 전했는지 몰라도 그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긴장되어 있었다.
"기억을 못 하시군요."
부드러운 말에 타림과 그 아들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흘렀지만 눈은 여전히 의혹의 빛이 어려 있었다. 말하는 것을 보니 구면인 것 같은데 이런 기도를 가진 사람은 기억에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 허브 시티에 계실 때 럼프 오크의 가죽을 가져다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 젊은 용병 친구!"
타림의 굳은 얼굴이 따듯한 스프처럼 풀어졌다.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달려들듯 다가와 하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머리카락 좀 치우고 다니게. 난 또 어디서 내가 만든 방어구 때문에 기사가 쳐들어왔는지 알았네. 그 눈을 보니 이제 알겠군. 가츠의 소개로 왔었지."
"네. 오랜만입니다. 얼마 전 일이 있어 그곳에 들렀더니 이리로 이주를 했다고 하더군요."
"반갑네. 일단 앉지."
타림뿐 아니라 그 아들들 역시 하룬을 기억하고 인사를 해왔다. 럼프 오크의 뿔과 함께 가죽을 20장이나 가져온 하룬은 그들에게는 무척 인상이 깊은 손님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곳은 어떤가?"
대뜸 묻는 것이 허브 시티인 것을 보니 타림은 아들들과는 달리 그곳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야 뜨내기이니 그곳 소식을 제대로 알 리가 없지요. 다만 거리는 여전히 활기차게 노는 꼬맹이들과 장을 보러 다니는 부녀자들로 가득하고, 공방들은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장인들로 활기차더군요. 가츠 노인의 카랑카랑한 고함 소리도 여전하고요. 참, 나미레는 이제 제법 잘 걷고 뛰더군요."
"하하하! 그럴 거야. 다른 곳은 몰라도 고약한 가죽냄새와 약 냄새가 나는 그 뒷거리는 변함없이 그래야 하지. 암. 나미레가 그렇게 힘들어 하더니 드디어 제대로 걷게 되었구나. 아주 잘된 일이야."
향수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별것도 없는 이야기에 반색을 하며 좋아하는 타림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자신에게, 그의 아들들에게는 별 가치가 없는 그 지저분하고 시끄럽기만 한 거리지만 타림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공방이 있던 자리는 빵 가게와 옷 가게가 들어왔더군요."
하룬은 관심도 없었기에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머리를 쥐어짜 떠오른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랬군. 이곳처럼 그곳도 변화가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거야. 대로변은 이방인들을 상대하는 상점들이 속속 입점해서 기존에 그곳에 있던 상점들이 뒷골목으로 이전하고 있는 거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렇게 변하는건지……. 나 같은 늙은이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바뀌고 있으니……."
세상이 아니라 이제는 나이가 들어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타림이다. 그의 어조가 침울해지자 맏이가 그를 위로했다.
"아버지, 그래도 이제 우리 같은 장인들도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되었잖아요. 가죽장이라고 천시하는 귀족들도, 돈도 주지 않고 수시로 세금을 걷어 가거나 강제로 일을 시키는 영주도 없는 세상이니 좋잖아요."
"그, 그래. 너희들은 나와 다른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지. 세금만 제대로 바치면 얼마를 만들든지 얼마에 팔든지 모든 것이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신 피노세 황제 폐하의 은혜가 정말 크구나."
아들의 말에 좋은 면을 떠올리며 침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타림이다. 그 틈을 타 다른 이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고객들에게 비싸기만 한 주문제를 고집하지 말고 다른 상점들처럼 대량생산에 박리다매로 바꾸어야 한다고요. 이제는 그게 대세입니다, 아버지."
"둘째 형 말이 맞아요, 아버지.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이 제국에는 비싼 물건들을 구입할 귀족들과 기사들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렇게 자존심을 내세우며 주문제를 고집하다가는 이번 달 세금도 빚을 얻어서 내야 합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내가 땅속으로 들어간 후에나 그렇게 하려무나. 난 장인이지 상인이 아니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허접스러운 물건을 만들수도 없고 내 자식들이 그렇게 하는 꼴도 절대로 볼 수 없다!"
"아버지!"
"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와 같은 장인들도 돈만 많으면 예전의 귀족들과 마찬가지의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단 말입니다. 불량품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저급품을 양산하는 것이니 양심에 걸릴 것도 없잖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님을 따르는 도제들도 다 그만둘 판입니다."
"그만해!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장인이다. 장인은 자신이 만든 물건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내 마음에 차지 않는 물건 따위를 만드는 것은 장인이 아니다."
타림과 세 아들의 눈앞의 하룬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런 논쟁은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에 이주해서 매일 이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룬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타림과 세 아들 간의 문제를 알 수 있었다. 아들들은 변화에 순응해서 질은 좀 떨어지더라도 많이 생산해서 적은 이문을 남기고 파는 방식으로 바꾸자는 것이고, 평생 장인의 길을 걸어온 타림은 세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인가?'
변화는 있어야 한다. 유니온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유니온의 주민들의 욕구를 가상현실 게임에서 풀게끔 유도하고 교육의 질도 현저하게 낮추어 버렸다. 변화에 대한 갈망을 오락으로 돌려 버린 유니온 지배층들 때문에 갈수록 신분제는 고착되고 부의 편중 현상은 더 심해진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많은 것들을 잃게 만든다. 특히 돈이 세상의 새로운 가치로 등장하게 된 이 비욘드의 세계는 예전의 정을 근간으로 한 관계를 급격하게 상싱하고 있었다.
비록 왜곡되고 썩어 버린 신분 사회였지만 이런 급격한 변화는 그동안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기존의 도덕과 정의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피노세 황제여! 그대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 배후에 숨어 있는 휴먼 가드여! 그대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려는 것인가?'
신분제를 혁파했다기에 기대를 했다. 영주제를 폐지했다기에 기대를 했다. 하지만 이반인들의 급격한 유입과 맞물린 파이린 제국은 아직 새로운 법전의 반포나 새로운 정의나 가치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자신의 문제에만 연연하던 하룬이 비로소 넓은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룬은 타림에게 일을 주고 싶었다. 그의 실력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혹시 마수의 가죽을 다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수라고? 당연히 다……뤄 봤네."
대답이 어째 어정쩡하다. 타림의 세 아들 역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지, 내가 도제 생활을 할 때 스승과 함께 다뤄 본 것이 전부라 아주 오래전 일일세. 하지만 그 과정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지."
조금 겸연쩍은 표정이지만 곧 자신만만해지는 타림의 태도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시세는 어떻게 합니까?"
"시세라? 제너, 네가 재료 구입을 담당하니 알겠구나. 어서 대답해 보거라."
타림도 마수 가죽의 시세는 모르는지 시선을 둘째인 제너에게 향했다. 시류에 순응하고자 말하던 이였다. 알고 보니 재료 구입을 담당하느라 시장 상황에 가장 민감했던 것 같다.
"어떤 마수의 가죽이냐에 따라 가죽 값이 많이 차이가 납니다. 물로 어떻게 말렸는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고, 상처부위와 크기에 따라서도 차이가 나지요.
어찌 되었건 마수의 가죽은 워낙 희귀한 물품이니 그나마 가장 많은 수량이 나오는 람비만 해도 장당 500골드가 넘습니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워낙 잡히는 것이 적어 시장에 나오는 물량도 거의 없습니다."
제너는 시선을 하룬에게 둔 채로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마수의 가죽이 언급되는 순간부터 타림 사부자의 눈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생애 최초로 마수의 가죽을 다룰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인의 피가 철철 흐르는 사부자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람비라면……?"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검은색 털을 가진 마수입니다. 외모는 꼭 흑표범하고 닮았는데 덩치는 그 두 배에 달하고 그 빠르긴 힘은 맹수들이 감히 상대하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비록 마수들 중에서는 가장 하급에 속하고 그 숫자도 많아 가끔 사냥꾼들에게 잡히는 놈이지만, 정상적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들이 아니라면 감히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놈이지요."
하룬은 마법 배낭에 종류별로 넣어 두었던 가죽들을 생각 하고 있었다.
'있다!'
옥세르의 배낭에 있던 것만 챙겨 왔기에 그들 전사들이 가져온 전체 수량은 어느 정도가 되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었다. 그것도 맨 위에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마법 배낭을 열어 람비의 가죽을 꺼냈다.
"이겁니까?"
"헛!"
"컥!"
타림 부자의 입에서 약속한 듯이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마, 맞소! 그게 람비의 가죽이오."
이미 죽어 가죽과 털이 통째로 벗겨졌음에도 불구하고 털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것이 절로 손길을 유혹하는 람비의 가죽에, 타림 부자가 홀린 듯 하룬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오!"
가죽 장인에게 최상의 재료 중 하나인 마수의 가죽과 털을 만지는 순간 타림 부자의 눈빛이 일제히 뜨거워졌다. 네 사람은 털을 뽑아 보거나 작은 칼을 이용해서 가죽의 두께와 구조를 파악하는 등 정신없이 손길을 놀렸다.
"방어구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럼프 오크의 가죽과는 달리 길고 윤기가 흐르는 털이 붙은 상태였기에 묻는 것이다.
"최상이 될 거요. 마수의 털은 가죽 못지않는 방호력을 지녔고 쉽게 때가 타지 않을뿐더러 세척이 용이하고 보온력이 있어, 생전에 품고 있었던 마정석의 영향으로 마법 방어력까지 갖추고 있는 가죽에 마법진을 새기면 최소한 레어급 이상의 방어구가 될 거요."
람비의 털과 가죽을 살펴보던 타림의 목소리가 떨렸다.
"게다가 이 정도라면 외투형으로 만들어도 충분하니 방어력은 더욱 올라가게 될 겁니다."
"다른 가죽들도 있으니 일단 살펴보세요."
하룬은 마법 배낭에 담아 온 마수들의 가죽을 모두 꺼냈다.
"흐압!"
배낭에서 줄줄이 나오는 마수의 가죽에 사부자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긴 탁자 위에 그것들을 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프로즐리까지 있다니."
마수에 대해 잘 아는 둘째는 가죽들을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는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에게 가죽의 주인과 이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죽의 주인인 마수는 총 일곱 종이었다.
곰과 비슷한 외형의 프로즐리의 가죽이 가장 컸고, 표범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마수인 슬로크와 벡셋 그리고 람비의 털의 색깔과 크기만 다를 뿐이었다. 날개 달린 뱀과 여우의 외형을 한 팔스콘과 비얀은 털이 없는 매끄러운 가죽을 가졌고 거대 늑대의 외형을 가진 브롤프도 있었다.
타림 부자는 가죽과 털을 살펴보고 연신 탄성을 질렀다. 마수의 가죽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그 성질을 파악하면서 흥분이 배가되었다. 마수의 가죽은 일반적인 가죽과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지녔던 것이다.
맏아들이 다이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최고의 재료입니다. 도대체 이런 마수들의 가죽을 어디서 구한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지. 우, 우리에게 이걸 가공할 기회를 주십시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재료를 다루어 본 적이 없으니 묻는 말이다. 하룬의 물음에 타림 사부자의 눈에 뜨거운 불길이 솟았다.
"다뤄 본 적은 없지만 우리 사부자의 기술은 최고요. 맡겨만 주시오."
그렇게 말을 하는 타림의 얼굴은 몇 십 년은 젊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열정이 가득했다. 최상의 재료를 사용해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장인의 열망이 전신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좋습니다. 믿겠습니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있는 타림의 세 아들이라면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피혁 상점들처럼 대충 물건을 만들어 팔 생각을 하지 않고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공임………."
'이런 가죽이 얼마나 되려나?'
종류별로 몇 장이나 되는지 모르니 공임 이야기를 꺼내기가 난감했다.
"공임은 걱정 마시오. 주는 대로 받을 테니. 우리도 최상의 재료를 다뤄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돈 따위는 상관없소."
타림은 당장이라도 작업에 들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아닙니다. 최고의 물건이 될 텐데 공임 역시 최고가 되어야지요. 말씀하십시오."
타림은 이미 돈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대신 말을 꺼낸 것은 둘째 제너였다.
"먼저 이런 기회를 우리에게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마수의 가죽은 마나를 함유하고 있는 재료라서 특별한 약품으로 가공해야 하기에 살 물건들이 좀 됩니다. 거기에 마법진을 새길 전문 마법사를 고용한다면 큰돈이 들어갑니다.
사실 우리가 풍족하다면 처음 다루는 재료이고 워낙 희귀한 재료이니 실패하거나 망칠 것을 생각해서 저 역시 공임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곳으로 이주하고 아버님이 주문제를 고집하면서 저희 공방 살림이 좀 쪼들려서 최소한으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제너는 말을 하면서도 미안한 얼굴이었다.
"마수의 가죽을 재료로 방어구를 만들면 최소 레어급이 나올 겁니다. 레어급 하드 레더의 경우 재료가 오우거 가죽 정도면 그 가격이 2,000골드가 넘어가니, 평균 3할인 공임을 생각하면 최소한으로 생각해도 600골드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서 완성된 방어구 벌 수로 계산해서 벌당 300골드씩만 주십시오. 다행이 가죽들이며 털까지 잘 손질되어 있으니 망치거나 실패할 확률이 낮을 겁니다."
방어구 한 벌에 300골드의 공임이면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너의 말을 들어 보니 무척 싼 것 같았다. 아니, 싸지 않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공임이 문제가 아니라 제품의 질이 문제가 아닌가.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하룬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현금을 정리할때 주머니별로 일정한 액수로 담아 둔 것들 중 하나였다.
"이건 선금입니다."
타림과 두 형제가 마수의 가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돈주머니를 받아 그 안에 살펴 본 제너의 눈이 커졌다.
"골……덴!"
순금과 미스릴이 섞인 골덴화 30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모두 3,000골드였다. 아이템 가격이라면 모르지만 공임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제너의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럼?"
"가죽이 더 있으니 일단 이것으로 작업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세요."
마수의 가죽이 더 있다는 말에 타림 사부자의 입이 다물어 지질 않는다.
"타림 씨, 얼마나 걸릴까요?"
하룬의 물음에 타림이 가죽에서 시선을 떼었다.
"이 가죽들이라면 일주일 정도면 될 거요. 다른 주문이 없는 상태이고 우리 사부자는 물론이고 우리 공방의 도제들이 모두 달라붙을 테니까."
이 물량이 일주일이라면 다른 가죽들까지 가져오면 그 시일은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뭐, 급할 거야 없겠지. 어차피 상단을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움직일 생각이었으니까.'
"좋습니다. 가죽이 더 있으니 마저 가져오도록 하지요."
"허허허!"
가죽이 더 있다는 말에 타림과 세 아들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하룬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는 가죽들을 공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버지! 전 가서 중화제와 연화제를 사 오겠습니다."
"그래라. 오는 길에 마탑에 들러 마나 보호제와 고착액도 사 오고, 마법진을 새길 것까지 생각해서 마법사도 초빙해라."
"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너는 하룬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작업복 차림으로 말이다.
하룬은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 나머지 가죽들까지 몽땅 가져올 생각을 했다. 어차피 팔 생각이었으니 자신에게 전부 필요가 없더라도 모두 방어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