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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데모 시티 (154/278)
  •  <<데모 시티>>

    하룬은 허브 시티를 출발한 지 열아흐레가 되는 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약속 장소인 성문 밖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은 이미 시간이 늦어 닫힌 상태였기에 노숙을 해야만 했지만 상거래가 활발한 도시라서 그런지 성문 밖에도 여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룬은 그 중 가장 외따로 떨어져 있는 낡은 여관에 방을 얻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상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늦은 시간에 식사를 주문했지만 먹을 만한 음식이 나왔다.

    '휴우! 피곤하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운 하룬은 지난 보름여 동안 행적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동안 하룬은 정말 잠도 한 번 잔 적이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살인자들을 찾고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너무 많은 생명을 죽였어.'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리 백해무익한 살인자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정신적으로 심한 피로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산적들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거야.'

    이제야 안슴을 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된 많은 백성들을 생각하자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큰 무리들은 다 없앤 것 같았다. 남은 것은 소수의 무리인데 그들은 감히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수 많은 생명을 죽이긴 했지만 그 몇 수십 배가 넘는 생명을 구한 의미 있는 행위였으니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하룬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지난 보름동안 그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정령들을 소환하는 의식 없이 그들의 힘을 마음대로 썼던 것이다. 그 기간 중에는 이성은 있었지만 뭔가 붕 뜬 기분으로 지냈기에 정령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룬은 일단 정령들을 소환했다.

    반가워하며 모습을 보인 정령들은 한눈에도 그 변화가 보일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생동감이나 느껴지는 얼굴과 표정 변화는 물론이고 품에 안기는 나이아와 위신느의 몸에서는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온열감까지 느꼈다.

    "라이피, 소환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어떻게 한 거야?"

    -나도 모르겠어, 친구. 내 능력이 무척 높아지긴 했는데 그 순간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힘을 발휘했거든. 이상한 것은 그러면서도 내 의지로 이렇게 하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거야.

    "그래? 피닉스는 어땟어?"

    -나도 라이피의 경우와 같았어요. 다만 내 경우에는 하룬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충일감과 강한 만족감을 느꼈다는 거예요. 하룬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강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피닉스의 말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그 순간에는 라이피와 내가 동일한 상태, 즉 합일을 이루었다는 말이네. 정령과 일체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의문으로 잠시 침묵했던 하룬은 다른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어느 정도나 발전한 거야?"

    하룬의 시선은 제일 먼저 나이아에게 향했다. 제일 먼저 인연을 맺었기에 누구보다 각별했던 것이다. 그 생각을 익은 걸까, 나이아가 수줍지만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일반적인 기준으로 말하면 소환되기 전이라도 소환자에게 먼저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상급 정령 정도의 능력을 얻은 것 같아요.

    "다행이다!"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존재는 엘프가 유일하다. 달리 정령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하룬으로서는 그 수준이 어떤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뿌듯한 얼굴을 하는 나이아를 보며 만족스러웠다.

    "원소석을 더 흡수할 거야?"

    하룬의 그 말에 네 정령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럼 지금 남은 것을 마저 다 흡수하고 얘기해. 이젠 너희들이 먼저 나에게 의사를 전할 수도 있으니까."

    네 정령은 기뻐하며 다시 하룬의 몸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자신의 몸 안에 최상급 정령 넷이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든든했다.

    하룬은 이제야 마음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 숙소를 나선 하룬은 성문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후에야 해란 자매를 만날 수 있었다.

    "호호! 역시 약속은 칼이구나."

    "역시 사귈 만한 친구라니까."

    어제 오후에 이곳에 도착해서 현실로 나갔다가 바란 오빠를 도와 일을 한 때문에 이제야 비욘드로 들어온 해란과 세란은 미안함을 수다로 감추며 그를 반겼다.

    "어때? 일은 잘 된 거니?"

    대뜸 그렇게 묻는 해란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이템을 얼마나 가지고 왔을지 궁금한 모양이다.

    '쳇! 난 죽을 뻔 했는데 늦게 와서, 그것도 만나자마자 아이템 타령이냐! 어지간히 좀 밝혀라.'

    속으로 불평을 하던 하룬은 자연스럽게 지난 보름 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위험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놈들에 대한 정보는 얻기가 어려웠다. 제국군을 피해 깊은 산속이나 오지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신느의 능력이 높아지면서 정보 수집이 용이해졌다. 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능력으로 방대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고 싸가지를 비롯한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그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위험한 순간들도 있었지.'

    애초에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은 고요의 땅으로 향했거나 혹은 파이린 제국의 개국에 맞추어 일찍 국경를 넘었지만, 남은 자들 중에서도 익스퍼트 최상급들이나 고서클 마법사들이 섞여 있었다.

    일주일 전에는 예전에 한 번 그랬듯 마비독이 통하지 않는 익스퍼트 최상급 기사에게 일격을 당하는 위험천만한 순간도 맞았다. 파빈 시티 인근의 한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고 본거지로 돌아가던 무리의 한 기사에게 죽을 뻔했던 것이다.

    '정령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서늘하다. 소드오러가 되기 일보 직전인 듯 수 미터 길이의 검기 다발을 날리던 그 기사의 일격을 하룬의 능력으로는 피할 수가 없었다.

    위기의 순간 위신느와 나이아가 만든 워터실드와 윈드실드가 아니었다면 그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 공격을 막아 내느라 강제로 역소환되고 말았다. 몇번 메신저 검술로 위력적인 공격을 해보았지만 딜런의 실력과 비슷한 그 기사의 검력에 당해 낼 수가 없어 죽기 바로 일보 직전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나마 전격의 비수로 그에게 충격을 주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싸가지가 나타나 그 기사를 처리했다. 아직 각성을 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의사로 자유로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싸가지는 마비독이 통하지 않자 분노해서 여태 모은 독의 정화를 날려 그 기사의 몸을 비롯해 주변을 통째로 녹여 버렸다.

    덕분에 그 독으로 인해 그 주변 땅은 물로 모든 생명체가 몰살을 당했고 그곳에서는 무고한 이를 구하지도 못했다. 뒤늦게 싸가지로 하여금 독을 흡수하게 했지만 반경 수 백 미터의 땅이 완전히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저 말고도 두 번의 위기가 더 있었다.

    메신저 스킬로 은밀하게 접근하는 자신의 기척을 알아챈 6서클의 마법사들로 인해 도리어 습격까지 받았던 것이다. 정령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을 친 하룬은 그들의 뒤를 하루 동안 따라가면서 비수와 강탄성궁을 이용해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하나씩 처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다 발휘해서야 죽음의 사자에 걸맞은 성과를 겨우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또 죽음의 사자가 되나 바라.'

    아주 치가 떨렸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리를 하다 보니 몇 번은 무고한지 여부도 판단하지 못하고 상대를 죽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배우고 얻은 것은 있어.'

    배운 것은 많았다. 동료가 없을 때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어떤 조합으로 어떻게 상대를 처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정령들을 이용한 효과적인 전투 방법들도 배웠다. 비도술과 정령술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깨우쳤다.

    죽음의 사자를 사칭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자신의 다양한 능력에 대해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물론, 그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전투를 치를 수록 그에게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게 해 주었다.

    두 번째로 얻은 것은 정령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정령들과 일체화되어 그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정령이 내가 되고 내가 정령이 되는 경험은 이제까지 단순히 정령을 부리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정령술을 만드렁 내게 해 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잠시 그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던 하룬은 해란에게 등짝을 맞고야 정신을 차렸다.

    "으응, 아니야!"

    "일단 성안으로 들어가자. 피곤해 죽겠다."

    "그래. 빨리 숙소 잡고 나가야겠어. 목욕이라도 해야지 몸이 찌뿌듯하네. 아, 참! 오빠가 캡슐 다 구해 놓았다고 가져가라고 하더라."

    "알았어. 연락할게."

    해란 자매는 피로도가 꽤 심한 듯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외성을 들어선 순간 얼굴이 확 변했다.

    "와아! 멋지다!"

    "황실에서 이곳을 제국 3개 빅 시티의 하나로 발전시킨다고 공포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네."

    해란의 말대로 데모 시티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고 있었다. 기존의 도시에 더해 멀리 바깥쪽에 또 다른 성곽이 축조 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 세이프 월이라고 명명된 성곽이 완성되면 데모 시티의 상주인구는 현재의 30만에서 100만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이미 이곳은 파이린 제국에서 플레이 하는 유저들에게도 중요한 거점 도시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상인이나 각종 생산 직업을 선택하는 유저들에게 이곳은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졌네."

    "그러게. 이전에는 밭이었던 땅에 올라가는 건물들 좀 봐."

    세 사람의 시선은 2미터가 넘는 높이로 올라가고 있는 폭 1미터 정도의 벽돌 성벽과 아직도 재배하는 작물들이 곳곳에 보이는 땅에 구획별로 지어지고 있는 건물들로 향했다.

    해란과 세란은 이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도 상업으로 유명한 영지였지만 헤빈로스 백작은 아주 탐욕스러운 영주여서 통행세는 물론 거래세까지 다른 영지의 두세 배를 받았기에 이 정도로 상거래가 활발한 곳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 돼지, 고요의 땅에서 죽었다지?"

    "응. 처음에 4강으로 분류되었던 2황자의 측근으로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을 몽땅 데리고 갔지. 돈만 밝혔지 자신을 지킬 재주는 없었던 터라 기사들의 호위에도 불구하고 엘프들의 철시 공격에 죽었다고 하더라."

    "그걸 보면 피노세 황제가 잘나기는 잘난 인물이야. 그렇게 절묘한 빈집 털이를 성공시키다니 말이야. 거기에 언제 양성한 것인지 모르지만 수천이 넘는 행정관들과 수십만의 점령군을 바람처럼 출동시켜 귀족들을 내쫓고 제국 전체의 행정권과 치안을 확보한 것을 보면 아주 대단해."

    "예전 골든 배틀에서도 모후의 병이 아니었다면 선대 황제를 거치고 황위를 차지했을 거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잖아. 선황의 신임을 받으며 그 긴 세월을 속으로 칼을 갈았으니 그 정도야 할 수 있었겠지. 아무튼 제국 전체의 귀족들과 기사들을 대상으로 대단한 책략을 구사한 것은 인정을 받을 만해."

    내성까지 가는 동안 하룬은 해란 자매들로부터 피노세 황제와 파이란 제국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들은 변혁의 시기에 황도에 있었고 해란이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저간의 사정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세인들에게 알려진 대로라면 피노세 황제는 무섭고도 뛰어난 인물이다. 야망을 가졌으되 자신을 신임하는 선대 황제를 배신하지 않고 오랫동안 인재를 양성해 왔다. 그러면서도 외부로 그런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 역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존에 영주와 그 가신들이 주먹구구식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영지의 업무를 시장과 부시장, 각급 부서장으로 이어지는 행정조직으로 바꾸어 이전보다 효율성을 높였으며 시민들에게 가까운 각종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혼란을 일시에 진정시켰다.

    영주의 가신들인 기사들과 영지병을 단숨에 제압한 제국군의 존재도 놀라웠다. 기마병이 대거 포함되어 기동성이 높은 재국군은 북부군과 대공의 사병들이 주축이었다. 그들은 암암리에 양성한 행정관들을 보좌하여 대부분의 주인과 기사들이 골든 배틀로 고요의 땅으로 향한 사이 그 넓은 영지들을 장악한 것이다.

    백작가 이하의 중소 영지는 그야말로 단숨에 장악되었고, 후작가들과 공작가들은 유혈이 낭자한 전투를 벌이기는 했지만 피노세 대공이 새로운 제국의 탄생을 선포한 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던 딥블루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엘프 정령사들도 가세하니 귀족가에 속한 마법사 전력들은 추수기에 낫에 베여 넘어가는 밀짚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 일로 인해 딥블루 마탑은 파이린 제국의 황실 마탑이 되었으며 기존 황실 마탑에 거주하던 마법사들은 이합집산을 한 끝에 대부분 흩어지고 말았다. 그중 절반 정도는 중립 성향으로 유명한 파코추 마탑의 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이런저런 이유로 행정조직 안에 자리를 잡거나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1황녀가 파코추 마탑에 칩거하고 있다고 했지. 그녀가 황실 마탑에 있었다면 지혜의 파편을 쉽게 얻을 수 있을 템데 아쉽구나.'

    검증의 관에서 마법사들이 한 행동을 보면 그리 중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따. 자신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 이미 일정 분야에 높은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는 물건이니 1황녀와 인연을 잘 이용하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벼리가 한 말을 통해 GG와 HG의 은밀한 행사를 알아내고 어떻게든 이 비욘드에서 그들을 처리하려는 목표 외에 지혜의 파편 두 개를 더 얻고 휴먼들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마법서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하룬이 비욘드로 들어온 이유였다.

    세 사람은 데모 시티를 들어서 먼저 묵을 곳부터 찾았다.

    해란과 세란은 유저 타운으로 들어가기를 바랐기에 그저 그 뒤를 따른 하룬은 살풍경한 여관의 모습에 실망하고 말았다. 먼저 여관과 붙은 식당부터 들렀는데 메뉴에 있는 음식은 빵과 영양음료가 다였다. 이방인들로서는 공복만 해결하면 되기에 맛이나 질감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곳 여관은 심지어 샤워나 목욕 시설도 없었다. 물론 나이아를 소환하고 있는 하룬에게는 필요가 없는 시설이었지만 안전한 로그아웃 장소만이 필요한 이방인인지라 아무 시설도 없는 텅 빈 좁은 방의 살풍경한 모습에 질리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방값은 식사 세 끼를 합쳐 겨우 3실버에 불과 했다. 그것도 막 게임을 시작하는 유저들에게 부담이 되어 일정 레벨이 되기 전까지 유저들은 광장을 많이 이용했다.

    그곳은 비가 올때라도 거대한 차양으로 최소한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여기에 묵어라. 난 주민들이 많은 곳으로 갈 테니까."

    차라리 혼자 묵더라도 주민들이 이용하는 여관으로 갈 생각 이었다. 해란 자매와는 달리 자신은 이곳에서 정상적으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왜?"

    "용병 길드도 들러야 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해."

    "NPC들?"

    "응."

    해란 자매는 하룬이 따로 할 일이 있다고 말한 것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비밀이 많은 친구였던 것이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직접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자신들이 굳이 알려 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경매장을 시작으로 시세를 확인하고 공방도 알아보러 갈 참인데 같이 갈 거지?"

    해란의 말에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것에 관심이 있었으면 굳이 해란 자매에게 아이템 판매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며칠 걸릴 테니까 네 일 보고 시간 날 때 이곳에 메시지로 여관 위치나 알려 줘. 우리가 찾아갈 테니까."

    해란 자매는 아이템의 시세가 궁한지 서둘러 유저 센터에 있는 경매장으로 향했다.

    유저 전용 여관을 나온 하룬은 유저 타운이 있는 광장을 벗어나 숙박 시설이 모여 있는 숙박가로 향했다. 워낙 상업의 중심지가 되다 보니 숙박업소들은 한 거리가 아니라 여러 거리에 걸쳐 숙박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룬은 번잡한 것을 피해 후미진 곳에 위치한 여관을 찾았다. 다른 여관들과 마찬가지로 식당을 겸한 곳이지만 후원에 따로 숙소가 있는 곳이었다. 가격이 좀 비싸기는 하지만 중소 상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았다.

    공동 목욕탕이지만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하고 나니 여독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몸이야 정령들로 인해 청결한 상태를 유지했지만 그간 작심하고 벌린 엄청난 짓 때문에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식당으로 나가 그럴듯한 메뉴로 저녁을 먹은 하룬은 숙소로 돌아와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어제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피로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일찍 잠이나 자자!'

    그동안 마나 플로를 돌리는 것으로 잠을 대신했던 때문일까? 하룬은 아주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깨어나 보니 벌써 늦은 아침이었다. 반나절을 훨씬 넘게 자고 만 것이다. 그래도 푹 자서 그런지 어제까지 그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들은 많이 옅어져 있었다.

    "일단 사람 구경이나 해 볼까?"

    방어구를 벗고 주민들이 많이 입는 평상 외출복인 제국식 튜닉으로 갈아입은 하룬은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여관을 나온 하룬은 특별히 뭘 해야겠다는 목적의식 없이 그냥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도시는 각처에서 온 상인들과 유저들로 인해 활기에 차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으로 가득해 그들과 섞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하룬의 발길이 내성 안을 한 바퀴 돌아 닿은 곳은 광장이었다. 그곳은 다른 장소와 마찬 가지로 동서로 분리되어 서쪽은 주민들의 여가와 휴식을 위한 곳으로, 동쪽은 유저들을 위한 유저 타운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룬은 유저 타운에 들러 해란 자매를 찾았지만 일을 보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묵는 여관에 대한 메모를 남기고 금방 나왔다.

    광장 입구로 되돌아온 하룬은 잠시 그 사이에 서서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자신이야 유저이니 당연히 동쪽으로 가야 했지만 한눈에도 번잡해 보였기에 망설이는 것이다.

    '하긴 저길 가도 거래는 불가능하니.'

    물물 거래라면 모르겠지만 경매나 물건을 파는 것은 주민칩도 없고 사망처리가 되어 현실의 은행 계정이 없는 하룬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현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더욱 그랬다.

    "이봐! 좀 비키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에 잠시 서 있었던 것이 누군가에게 방해가 되었나 보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특이한 하드 레더를 걸친 일단의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덩치들은 정말 좋군.'

    그들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룬보다 더 큰 키와 장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꽤 먼 곳에서 온 모양이군.'

    먼지로 지저분해진 추레한 행색을 한 사람들은 엄청난 부피의 짐들을 등에 지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세개의 뿔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눈 주위와 이마 전체를 덮은 기묘한 문신을 새긴 여자가 그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특이한 여자군. 용병인가, 아니면 오지 출신의 전사인가?'

    이들의 얼굴에는 예외 없이 이상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입은 하드 레더는 말라붙은 피와 먼지로 제 색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전투를 치른 흔적이 선연하게 보였다. 그런 그들의 전신에서는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 할 수 없는 살벌한 기운이 나오고 있었다.

    "미안하오."

    하룬은 무뚝뚝하게 사과를 하며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록 자신이 서 있던 곳이 광장의 입구이긴 하지만 마차 세 대가 왕복으로 지날 정도의 대로라서 조금만 옆으로 비켜 가면 문제가 없기에 크게 미안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강단이 있는 자군."

    길을 비켜 주었음에도 여자는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하룬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봐, 얼굴 좀 보자."

    늘 그렇듯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하룬의 얼굴이 궁금했나 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하룬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자신보다 별로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 여자가 초면부터 하대를 하는 것은 물로 자신을 수하 부리듯 함부로 대하는 것에 하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원하는 대로 길을 비켜 주었으니 가라!"

    기분이 그러니 당연히 나오는 말도 차가울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여자와 그 일행은 하룬을 향해 강렬한 살기를 발산했다.

    "뭐, 뭐야?"

    "끼약!"

    순간적으로 하룬의 근처에 있던 주민들과 이방인들이 그들이 방사한 흉포한 살기에 놀라 메뚜기처럼 흩어졌다. 마치 오우거의 그것처럼 심혼을 옥죄고 솜털까지 곤두서게 만드는 기운을 순간적으로 방사하는 것을 보니 보통 작자들이 아니다.

    하룬은 무심한 눈길로 그들을 쓸어 보며 전신을 긴장시켰다. 그들이 일으킨 살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기에 그 역시 분노의 힘을 빌려 살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힘이 없다면 말도 안 되는 이런 황당한 경우에 참는 도리 밖에 없지만 이제는 최강은 아니라도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을 가진 상태다. 이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는 무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도 버릇을 고쳐 줄 필요가 있다고 정당화를 시키며 자신의 기운을 방사시켰다.

    고오오오!

    20여 명이 방사한 살기에 대항해 하룬이 투기를 끌어올리자 그들을 둘러싼 대기가 난폭하게 날뛰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풍 전의 고요처럼 가라앉는다. 비록 그들의 기세가 살벌하다고 하지만 고요의 땅에서 수만의 적들이 내뿜는 살기를 경험한 하룬에게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싸움이다!"

    "어디! 누구야?"

    "몰라. 한쪽은 행색과 얼굴의 문신으로 보아서는 데빌 산맥 근처의 원주민 같은데 저 남자는 정체를 모르겠어."

    "용병이야. 저 팔목에 찬 팔찌는 최소 용병대장들이 차는 거야."

    구경거리에 눈을 빛내며 둥글게 자리를 만든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상인들이 많은 터라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이가 있었다.

    '데빌 산맥?'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이름이다. 흉험하기론 후크란 산맥보다 더하다는 곳이다. 후크란 산맥 남쪽을 휘감아 도는 센 강을 건너면 제국에서도 포기한 금지들이 연속해서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몬스터 랜드와 데빌 산맥이다. 크게 보면 후크란 산맥과 'L'자를 이루는 곳이다.

    "후후! 역시."

    하룬에게 살벌한 눈길을 고정시켰던 여자가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며 살짝 웃는 순간 그들의 기세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대신 그들의 눈에서는 희미한 호감이 흘러나왔다. 상대가 기세를 거두자 하룬도 거 이상 투기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역시라고? 혹시 날 아는 자인가?'

    자세히 보니 먼지와 문신으로 가려졌던 미모가 드러났다.

    여자의 나이를 정확하게 추측할 정도의 안목은 없지만 미모는 알아볼 수 있었다. 높은 콧날과 두터운 입술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그녀는 큰 키와 장대한 체격을 가지기는 했지만 분명 흔치 않는 미인이었다.

    20개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적금발 여인의 야성미는 그가 이제까지 현실이나 비욘드에서 만난 미인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히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우웃! 묘한 매력이 있군!'

    여자가 하룬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눈초리가 대번에 안쪽으로 들어오며 눈을 반달 형태로 만들었다. 반짝이는 눈빛은 강렬했지만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묘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난 두르본이야. 반갑다."

    두르본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검붉은 색의 건틀릿이 끼워져 있었다. 건틀릿의 손등 부위에는 날카로운 스파이크들이 변색된 상태로 꽂혀 있었다.

    하룬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완전히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그녀에게서 불쾌함보다는 뭔가 자유로운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악수를 신청하면서 건틀릿도 벗지 않고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니 거침없는 성격인 것 같다.

    "하룬이다. 난 안 반갑다."

    용병으로 살아서일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공공장소에서 상대가 도발하자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투기를 끌어올려 사람들의 관심을 끈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하룬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이거야 원. 최근에 너무 피를 많이 봐서 그런가, 내가 왜 이렇게 됐지?'

    하룬은 쓴웃음과 함께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두르본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바로 뒤에 선 세 명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강하다!"

    "우리와 같은 전사다."

    "역시 친숙한 냄새야."

    세 사람의 말에 두르본이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레미 말대로 저 자를 따라간다. 놓치면 안 돼."

    그 말과 함께 두르본은 어느덧 사라진 하룬의 뒤를 쫓아 빠르게 이동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험악한 기운이 앞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마치 마수의 피어나 눈빛이 그러하듯 심장이 오그라드는 섬뜩한 기운을 느낀 사람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기에 그녀의 앞길은 빠르게 갈라지고 있었다.

    이상한 자들에게 보인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던 하룬은 금방 기분을 풀어 버렸다. 실수를 저지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신중하게 행동하자.'

    기분을 푼 하룬은 여관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상인도 아니고 특별히 구입할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 도시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뭐야, 이거?'

    하룬은 금방 자신에게 꼬리가 달렸음을 감지했다. 선더볼트에 맞은 후부터 예민해지 그의 기감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무리들을 알아채고 있었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자신과 실랑이를 벌였던 무리였다.

    '설마?'

    자신에게 안 좋은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닌지 잠시 의심을 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막 도시로 들어온 것 같은 저런 자들과 자신이 얽힐 일은 없어 보였다.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은 숙박 시설들이 밀집한 곳이니 아마도 저들은 숙소가 필요할 것이다.

    숙소에 도착한 하룬은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제길, 수련하기도 애매하고.'

    마나 플로라도 운용하려던 하룬은 내키지가 않았다. 이상한 무리 때문에 투기를 일으켰다가 강제로 가라앉혀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했다. 수련을 포기하자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비욘드를 한 이래 이렇게 느긋했던 적이 없었다. 늘 떠밀리듯이 바삐 살았던 것이다.

    '제길,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무료할 줄이야. 이럴줄 알았으면 경매장에나 가서 아이템들이나 구경할 걸 그랬네.'

    성장기 동안 마음속에 늘 분노와 상실감 그리고 외로움이 가득 차 있었다. 집을 나온 후로는 먹고사는 문제만으로도 힘겨웠따. 그러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날 때 즐길 수 있는 여유와 오락에 대해서는 무지한 하룬이다.

    하다못해 침대에 누워 상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그가 상상했던 것들은 어지간히 작은 것들이라 그 대부분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더 큰 꿈을 꾸어야 상상도 가능한데, 이미 그것들을 이룬 상태이니 골치 아픈 현실의 문제가 대신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상대를 물었지만 문밖에선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숫기 없는 녀석이던가?'

    식당이 아니라 후원 숙소의 심부름을 담당하는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깨알처럼 박힌 주근꺄와 비리비리한 몸을 가진 그 소년은 천성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듯 자신을 객실로 안내하면서도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참다못해 문을 열었다.

    "어?"

    "후후후! 반갑다!"

    놀랍게도 노크한 상대는 두르본이라는 야성미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분명히 호의가 가득했기에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다가 황급히 풀어 버렸다.

    "뭐지?"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

    황당하다. 언제 봤다고 도움을 요청하는지. 뭘 믿고 이러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돈이 필요하다. 대신 좋은 물건을 주겠다."

    황당한 나머지 하룬은 아무 말도 못하고 시선을 그녀의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옆에 지배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손님들이 손님과 잘 안다고 해서……."

    호되게 당하기라도 했는지 하룬을 바라보는 지배인의 마른 몸이 후들거렸다. 자세히 보니 목덜미가 벌건 것이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하룬은 모르는 사이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이렇게 귀찮게 얽히는 것은 딱 질색인 것이다. 그때 우연히 자신이 결코 거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두르본의 눈빛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예전의 그였다면 어떤 사태가 나더라도 사실대로 모른 척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싹 트기 시작한 인성人性은 그런 행동을 막았다.

    '말투가 딱딱한 것을 보니 이런 도시는 처음이거나 경험이 없군. 하드 레더들 역시 장인들의 손길을 거친 것들이 아니야. 분명 오지에서 왔겠군.'

    자신 역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엘저를 못 만났다면, 그녀의 호의를 받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간혹 하던 하룬이었다.

    "지배인, 뭐가 필요합니까?"

    "손님이 이분들의 숙박비를 낼 거라고 했습니다."

    지배인은 후들거리면서도 하룬의 말에 반색을 했다. 만약 하룬이 거절을 한다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늘 세련된 상인들이나 술을 마시기 전에는 그래도 행패를 부리지 않는 용병들을 상대해 왔던 그로서는 당최 감당이 되지 않는 인사들인 것이다.

    한눈에도 사고를 일으킬 소지가 보이는 이들을 맞아들인 지매인은 2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내줄 방이 없다며 막던 자신과 종업원 셋의 목 줄기를 한 손으로 쥐고 통째로 비어 있는 건물을 찾아내고는 독사의 그것처럼 쏘아보던 살기 어린 눈길이 떠오르자 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미친놈들은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야.'

    방이 없다는 말에 자신들의 목 줄기를 쥔 채로 객실 순례를 한 것은 그렇다고 치자. 지저분하고 냄새가 폴폴 풍기는 행색에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니까. 하지만 선금을 달라고 하자 대신 줄 사람이 있다며 이번에는 전 객실을 다 두드려 안에 손님을 확인하게 만든 이 작자들의 행사에 지배인은 학을 떼었다.

    그 과정 중에 욕설을 하며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용병 여섯은 이자들에 의해 팔다리가 꺾인 채 기절을 했고, 대낮부터 흐뭇한(?) 일을 하던 손님들에게는 욕설을 바가질호 얻어먹었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면 이 도시에서는 영업을 못할지도 모른다.

    "얼마요?"

    "4인실 다섯 개에 2인실 하나가 있는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면 식사를 포함한 하루 숙박비가 2골드 45실버입니다. 목욕탕 사용료는……."

    지배인은 차갑게 변하는 하룬의 시선에 침을 삼키고 말을 바꾸었다. 목욕탕 사용료라는 것은 못 들었던 것이다.

    "목욕탕 사용료는 바,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렇게 살벌한 자들과 함께 목욕할 손님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저들이 목욕탕을 독점할 것이고 지저분한 상태라면 물을 데우는 데 필요한 장작 값만 해도 10 실버 이상은 나오겠지만 눈앞에 있는 자들의 기세가 무서워서 그것까지는 요구하지는 못했다.

    "얼마나 있을 건데?"

    "응. 잘 몰라. 한 열흘 정도."

    대답이 사뭇 뻔뻔하다. 이방인들로 인해 이곳 세상의 물가도 인플레가 심한 판인데 무려 열흘이나 되는 숙박료를 내게 만들다니.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야성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갈아입을 옷은 있나?"

    두르본이 고개를 저었다.

    "지배인. 이 사람들이 갈아입을 옷도 좀 사다 주시오. 튀지 않는 것으로요. 아, 그리고 신발과 속옷도 좀 챙겨 주고."

    하룬은 지배인에게 40골드를 주었다. 그래도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이나 옷의 가격은 비교적 싸서 다행이다.

    뭐, 그렇기에 많은 유저들이 편안하게 게임을 즐기는 것이지만.

    "그럼 숙박은 열흘 치, 나머지는 옷값으로 알겠습니다."

    지배인은 돈을 받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예상했던 골치 아픈 일 없이 큰돈을 받은 것에 무척 만족한 얼굴이었다.

    "고맙다. 할 말이 있다."

    당연히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이다. 큰돈이긴 하지만 40골드 정도로 굳이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지만 할 일도 없으니 그녀를 따라나서는 하룬이다.

    그녀는 하룬의 방이 있는 건물의 옆 건물로 그를 안내했다. 그녀는 2인실이 아니라 4인실 방으로 들어갔고 그녀를 따라 바로 뒤에 서 있던 셋이 들어왔다. 아마도 그들의 방인듯 했다. 이미 지배인을 겁박해 짐을 풀어놓아 방 한쪽은 거대한 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4인실은 침대가 없었기에 실내는 그래도 꽤 넓어 한쪽을 차지하는 짐이 있었지만 다섯 명이 함께 앉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고맙다."

    "별말을."

    그 말이라면 아까 해도 되는데 왜 이곳까지 끌고 왔는지 모르겠다.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이 방의 주인인 세 사람을 소개했다.

    "디온이다. 우리 마을 최고의 마수 사냥꾼이다."

    한눈에도 그래 보였다. 잘 단련된 육체는 날렵하게 보였고 눈빛은 무척이나 심유했다. 입을 벌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쾌감을 주지는 않는 것을 보면 과묵하기는 하되 성정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옥세르다. 우리 마을 최고의 용사다."

    "나 옥세르, 그대와 싸우고 싶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신청하면서 싸우고 싶다고 말하는 장년인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투기를 발산했다. 마주 잡은 손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힘을 가하는 그의 눈빛은 생사의 적을 눈앞에 둔 맹수의 그것처럼 살벌했지만 하룬은 오히려 기꺼운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나면 한번 붙어 봅시다."

    "약속했다. 끅끅!"

    기이한 웃음을 흘리면 손을 푸는 그의 눈에선 투기 대신 강한 기대와 셀렘이 어려 있었다. 역시 생각대로 순수한 성정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술사 레미다. 최고다."

    주저 없이 최고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니 뛰어난 주술력을 가진 것 같아 자세히 그의 모습을 살폈다.

    '이런! 여자잖아.'

    키와 덩치가 다른 이들에 비해 좀 작긴 했지만 다른 자들과 다름없는 추레하고 더러운 행색을 하고 있었기에 몰라봤는데, 얼굴의 상당 부분을 가렸던 투구를 벗자 푸른빛이 일렁이는 금발과 깊고 맑은 눈 그리고 유난히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무심코 디온과 옥세르처럼 장년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러난 얼굴을 보니 두르본과 비슷하거나 이제 갓 처녀가 된 것처럼 어려 보인다. 하지만 평범하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한 그녀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과 함께 신비한 기세가 흐르고 있었다.

    "반가워요. 난 레미라고 해요. 정령의 향기를 맡고 쫓아왔어요. 우리는 이런 큰 도시는 처음이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레미라는 여자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제국 공통어를 세련되게 구사했다.

    "반갑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한눈에 하룬이 정령사임을 알아보고 두르본으로 하여금 그에게 접근을 하게 만든 것이리라.

    "인간 정령사는 처음이에요. 엘프들 중에도 당신처럼 진한 정령의 향기를 풍기는 자들은 없었거든요."

    정령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정령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룬은 옥세르에 이어 이 여자에게도 호감을 느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이들은 분명히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뒤쫓은 것이다.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 있기는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만큼 남을 돕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옥세르와 레미에게 느낀 호감은 어느 정도는 도와줄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린 데빌 산맥에 있는 탄툰 마을에 산다. 우린 위대한 아카족의 전사로 마수를 사냥하며 산다. 이곳에는 거래를 하러 왔다. 무슨 일인지 이젠 상인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두르본의 말은 투박하고 어눌했지만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았다.

    "그래서?"

    "우린 거래를 모른다. 예전에도 찾아오는 상인들이 주는 대로 받았다. 레미가 너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네가 우리 대신 거래를 한다. 너는 우리가 필요한 물건을 준다."

    역시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대답이다. 그녀의 짧은 말을 통해 그녀와 그녀 마을 사람들이 처한 당면 문제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상단을 창설하려는 시점인데 우연처럼 찾아든 이들은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이 행운 스탯을 열심히 올린 덕분일까? 이전과 마찬가지로 동화율이 높으니 다른 유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행운 스탯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잘 선택하긴 했는데.'

    해란이라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상거래를 전혀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라면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이익에 민감한 상인이 아니다. 물론 돈 버는 일이니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것이야 꽤나 신경을 쓰지만 말이다.

    "팔고자 하는 물건이 뭐요?"

    옥세르가 방 한쪽에 세워 둔 키 높은 배낭을 가져왔다. 그 배낭은 사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포대였는데 그 크기가 마치 침낭처럼 컸다.

    "마수의 가죽이다."

    옥세르는 맨 위의 가죽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마수라고?'

    하룬은 마수와 맹수 그리고 몬스터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지만 한눈에도 가죽의 두께가 두껍고 털이 잘 손질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털이 있다는 것을 빼면 럼프 오크의 가죽과 비견할 정도로 질기고 두꺼운 가죽으로 보였다.

    '히유!'

    두르본을 뺀 나머지 마을 전사들이 비슷한 크기의 짐을 들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 숫자는 제법 될 것이다.

    "마정석도 있다."

    두르본은 품에서 세 개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둥이를 열고 그 내용물들을 쏟아 내자 방 안은 휘황한 빛과 함께 진한 마나의 향기가 그득해졌다.

    '마정석? 마나석의 한 종류인가?'

    대기에 접촉하는 순간 마정석들은 진하고 순수한 마나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마나석의 경우는 특별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이렇게 많은 마나를 발산하지 않아 금방 구별할 수 있었다. 마정석들은 크기와 색채별로 분류를 해 놓았다.

    빛을 받은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광채를 뿌리는 마정석들 중 가장 큰 것들은 그 크기가 고양이 눈알만큼이나 컸고 가장 작은 것들은 손톱 크기였다.

    '마법사들이 좋아할까?'

    마나석이라면 환장을 하는 마법사들이니 그보다 더 순수하고 많은 마나를 품고 있는 마정석이라면 좋은 거래 품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거래를 잘 모르는 하룬이지만 그 정도의 지식은 있다.

    "약초도 많이 있다."

    "보자!"

    그래도 자신이 잘 아는 약초 이야기가 나오자 하룬이 반가워했다.

    디온이 자신의 짐을 가져와 주둥이를 열었다. 그 안에는 짐승의 위장으로 만든 가죽 주머니가 들어 있었는데 디온은 그중 하나를 개봉했다.

    "헉! 솔박이잖아."

    비록 바짝 말린 상태지만 하룬은 한눈에 그 약초를 알아보았다. 특별히 부인병 계통에 특효약이 없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계통에 다양한 효능을 보이는 귀한 약초였던 것이다. 

    가츠 노인이 저술한 약초학 책에도 몇 페이지에 걸쳐 이 약초의 외양과 효능 그리고 그것을 주재료로 한 각종 약재의 제약 방법이 나와 있었다.

    외상과는 달리 몸 안의 병은 오직 마법사들의 치유마법과 신관의 치유 기도에 의존하는 이 비욘드에서 솔박의 가치는 같은 무게의 금과 비슷할 정도로 비쌌다.

    두르본 일행은 하룬이 약초를 알아보는 눈치이자 다른 약초들까지 개봉했다. 디온의 배낭은 모두 약초였던 것이다.

    탁월한 지혈과 소독 효능을 가지고 있는 마키니아 뿌리와 귀족들에게 자양 강정제로 인기가 높은 베로니카 꽃잎과 진통 효과와 함께 마약의 재료인 퀴니의 진액을 비롯한 귀중한 약초들이 열 가지가 넘었다.

    "필요한 건 뭐야?"

    이 정도면 주민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오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몇 십 년 동안 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식료품들과 생활용품들을 구해 줄 수 있을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곡물과 소금, 향신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 옷들과 무기를 원한다."

    그 정도라면 문제가 없었다. 전문적인 상인이 아닌 하룬이라도 충분히 구해 줄 수 있었다.

    "상인이 얼마나 오래 안왔는데?"

    두르본은 주저하지 않고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2년?"

    2년이나 기본 생필품의 보급을 받지 못했다면 아마도 생활이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은 상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다가 2년이나 오지 않자 결국 자신들에게는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는 도시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다른 마을도 있었을 텐데."

    "눈빛이 더러운 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런 자들과는 거래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이들은 동물적인 감각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상인이 안 간 거지?"

    자신이 생각해도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거래였다. 마수 가죽의 가치는 잘 모르겠지만, 때마다 찾아갔을 상인이 받는 물품의 양은 이보다는 훨씬 더 적을 테지만 그래도 솔박이나 마정석의 가치만 생각해도 대박을 치는 거래였다.

    그 물음에는 주술사인 레미가 대신 대답을 했다.

    "죽음의 평원으로 나오는 길에 죽은 상인들과 용병들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최근 몇 년 동안 마수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고 출몰해 우리 야카 족 마을 몇 개동 사라졌는데 그들 역시 놈들에게 당한 것 같아요."

    레미는 공용어를 아주 정확하게 구사했기에 하룬은 나머지 궁금한 점들을 그녀에게 물었다.

    "상인들은 어느 정도 주기로 찾아왔습니까?"

    "상인들은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왔어요."

    "어느 상단이 왔으면 상행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되었습니까?"

    규모를 알면 필요량을 대충 알 수 있다.

    "우리 마을과 거래를 하는 상단은 치툰 상단이에요. 그들과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거래를 해 왔어요. 상단의 규모는 말 100필 정도였어요."

    마차가 아니라 말의 마릿수로 규모를 언급하는 것을 보니 그들이 사는 곳이 오지는 오지인 모양이다. 길이 제대로 없는 오지나 산속 깊은 곳에 개척된 마을의 경우 말을 이용해 교역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말 100필이라고요?"

    믿기가 힘들었다. 말 100필이라면 얼른 생각해도 4톤에서 5톤의 물건을 나를 수 있다. 그 정도라면 마을 주민의 숫자가 얼추 수천이 넘는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다행하게도 레미는 하룬이 어떤 것에 놀라는지 알고 있었다.

    "그게 다 우리 마을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 마을을 위한 것은 말 20필분이에요. 나머지 다른 마을을 위한 것이지요. 우리 마을은 데빌 산맥의 가장 깊은 곳에 있지만 산맥 기슭에는 마을들이 꽤 많거든요. 

    그들은 이곳에서 죽음의 평원의 가장자리로 들어와 옛날 어떤 귀족의 정벌대가 만든 큰길을 지나 우리 마을로 들어왔다가 다른 길로 나가면서 그 마을들과도 거래를 하거든요."

    사정은 알았지만 놀람은 가시지 않았다. 악마의 땅으로 악명이 자자한 후크란 산맥에 못지않게 악명을 떨치는 곳이 바로 데빌 산맥이었던 것이다. 그런 곳에서 그렇게 많은 마을이 있다는 것이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 물건들과 말 100필분의 생필품과 무기를 교환했다는 말에 하룬은 상단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정치적인 입지나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돈만을 원한다면 굳이 대형 상단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강력한 무력만 갖추면 이런 오지들을 찾아만 다녀도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시간이 되면 일단 이들과 한번 동행을 해 봐야겠다. 나머지 마을들도 사정은 비슷할 테니까.'

    마수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몰라도 마정석과 솥박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해 주겠나?"

    두르본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세 사람 역시 부담스러운 눈으로 하룬을 주시했다.

    "알았다!"

    사실 거부할 이유가 없다. 거기까지 운송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팔아서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해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필요하면 해란 자매에게 적당한 수고비를 주고 시켜도 되는 것이다.

    "그럼 난 이 물건들을 팔 곳을 알아보러 나갔다 오겠다."

    "호호호! 넌 좋은 놈이다."

    듣기에 더없이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두르본이 하룬을 확 끌어안았다. 앉은 자세였고 키가 큰 하룬이었기에 그녀가 마치 그의 폼으로 뛰어 안긴 꼴이 되었다.

    "이, 이게 무슨……."

    느닷없이 그녀의 행동에 하룬은 당황스러웠다. 비록 머리와 몸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여자가 아닌가. 비록 상체만 맞닿은 상태지만 성숙한 여체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윽!'

    하룬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듯 붉어졌다.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가 문제가 아니다. 지독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여자로 느껴져서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신체 반응 때문이었다.

    '커졌다!'

    비록 성인을 넘긴 하룬이지만 이렇게 여자라는 존재 때문에 육체적으로 심하게 자극을 받고 격렬하게 반응한 적은 없었다. 있다면 이전의 벨을 대상으로 가볍게 느낀 것이 전부였다. 최근 자고 일어나면 단단해진 그것 때문에 곤혹스러웠지만 그건 건강한 남자라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사실을 유니넷으로 확인하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

    '그런 살육을 벌인 것 때문에 내 성정이 바뀐 걸까? 아니면 그 이상한 붉은 연무 때문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반응한 적이 드물었던 것이다. 그것도 마음이 없는 상황에서 단지 육체적인 접촉으로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여자를 대상으로 이렇게 즉각적이고 격렬하게 육체가 반응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품이 넉넉한 튜닉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운 반응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왜 그래?"

    "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묻는 두르본이기에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 넌 이제 우리 아카 족 전사와 친구가 되었다."

    디온이 하룬을 꽉 끌어안고 가슴을 세 번 강하게 부딪혔다. 아마 이것이 이들 마을 전사들의 풍습인 듯 옥세르 역시 그와 포옹을 하고 가슴을 맞대었다.

    곤란한 것은 바로 레미였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비록 검게 그을린 데다가 먼지로 더러워진 상태지만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에잇! 빨리하고 끝내자.'

    하룬은 자신의 손을 마주잡고 엉거주춤 서 있는 레미를 끌어안았다. 전사들만큼이나 큰 키를 가진 그녀였지만 하룬이 당기는 힘에 그녀의 동체가 힘없이 끌려왔다.

    "하악!"

    그녀의 입이 벌어지면 뜨겁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묘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서는 두르본과 두 전사와는 달리 역한 냄새가 나질 않았다. 오히려 한 번도 맡아 본 적은 없지만 강렬하면서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가슴을 세 번 부딪히려고 했지만 그녀의 큰 가슴 때문에 비비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 감촉이라는 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그녀가 입은 두꺼운 방어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풍만하고 탄력이 있는 유방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우욱!'

    '흑! 어쩌면 좋아.'

    두 사람은 붉어진 얼굴로 떨어지면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탄성을 지르며 떨리는 몸을 주체하는 데 안간힘을 썼다.

    '뭐였지? 그런 곳에 무기를 숨겼나? 두꺼운 비수 자루 같은데.'

    레미의 시선이 잠시 하룬의 전면에 머물렀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하복부를 자극했던것의 정체를 안 것이다. 경험은 없지만 나이가 찬 그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일, 일단 씻어라! 내가 목욕할 준비와 음식을 준비시키겠다."

    하룬은 서둘러 방을 나왔는데 몸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땀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도대체 이 몹쓸 반응은 대체 뭐야?'

    하룬은 갑자기 눈앞에 활짝 웃고 있는 두르반과 수줍게 웃고 있는 레미의 얼굴이 떠오르자 놀라 주변을 둘러보고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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