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사자>>
해란 자매와 헤어진 하룬은 잠시 허브 시티 쪽으로 되돌아가다가 그녀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는 어제 찾았던 마을을 향해 패스트 스킬을 펼쳤다. 다시 미요스신의 대리인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분명히 이 근처에 산적들의 소굴이 있어!'
말도 없이 마을을 습격한 것을 보면 걸어서 하루 이내에 닿을 거리에 은신처가 있을 것이다.
놈들은 예사 산적이 아니다. 비록 주의력이 풀려 그가 쉽게 상대했지만 그들의 무기 상태나 얼핏 보인 대응 자세를 보면 틀림없이 제대로 싸움을 해 본 놈들이었다. 더구나 놈들은 마을을 완전히 파괴할 심산이었다.
세상 물정이 어두운 하룬이지만 예전에 마적들을 상대할때 용병들이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보통 산적들은 영주의 학정에 못 견딘 평민이나 노예 들이 탈출해서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서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들과 연관된 많은 사람들은 영지에 거주하면서 그들에게 토벌대의 정보를 주거나 연락책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보통의 산적들에게 있어 마을의 존재는 최소한의 생필품 공급 기지이자 정보 제공지였다. 산적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주와 관련된 인물들이나 오가는 상인들이지 자신들이 나고 자란 영지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마을을 초토화 시키거나 잔혹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세란이 말했던 구 테론 제국의 귀족들이나 그들을 따르던 기사와 병사 들이 미처 파이린 제국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산속으로 도망쳐 만든 무리일지도 모른다.
신생 파이런 제국은 행정관 위주의 관리 체계를 가지고 있어 혈연이나 지연, 혹은 뇌물이 오가는 거래를 통해 무수하게 양산되어 평민들과 노예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살던 세금 징수원들이나 영주의 수행 집사들이 체포 대상이 되자 산으로 들어와 산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왕 시작했으니 뿌리를 뽑고야 말겠다!'
하룬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얼마 전에 본 그 끔찍한 광경이 떠오르자 다시 머리에 뿔이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눈이 다시 붉게 변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아침이지만 그 안개로 인해 하룬의 모습은 더욱 신비하게 보였다.
일단 어제 그 마을 근처까지 이동한 하룬은 무작정 근처산을 올랐지만 산적의 소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로 나무 꼭대기를 밟고 이동할 수 있는 메신저 스킬 때문이었다.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둔 깊은 골짜기에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 자리 잡은 것이 날카롭게 번득이는 하룬의 눈에 들어왔다.
휘리리릭!
하룬은 여전히 나무 꼭대기를 밟으며 그곳을 향해 이동 했다.
하룬이 도착한 곳은 골짜기 중앙에 있는 산채였다. 통나무로 지은 수십 채의 집들이 중앙의 유달리 큰 집을 감싸고 있는 구조였다. 언뜻 보아도 수십 년 이상 되어 보였기에 의아해졌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그가 생각하는 흉적들은 파이린 제국이 개국하고 나서부터 발생했을 것인데, 이곳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하나 둘씩 만들어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럼 일단 내부 상황부터 파악하자.'
아침이라서 그런지 마을 안에는 많은 기척들이 느껴졌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룬의 몸은 비조처럼 날아 목책을 넘어 산채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제법 군기가 있는 듯 통나무로 세워진 앞뒤의 방책 주변으로는 두 명의 산적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하룬이 움직인 곳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측면이었기에 경계의 대상이 되는 곳은 아니었다.
'일단 저곳으로 가자!'
하룬은 처마가 긴 통나무집들이 만들어 낸 흐릿한 그늘 사이로 소리없이 움직여 중앙에 있는 거대한 목조 건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다른 집들과 달리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휘익!
하룬의 몸이 새처럼 날아 목조 건물의 위로 내려앉았다.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돌아다녔지만 통나무를 절반으로 잘라 이어 붙이고 그 사이를 송진 같은 것으로 도포한 지붕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옳지!'
그때 보인 것이 바로 환기를 위해 벽 상단에 만들어 둔 작은 창이었다.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작았지만 안을 살펴보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였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이곳을 주의 깊게 본다면 작은 창틀에 매달린 하룬을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룬은 긴 통나무 처마 끝에 매달려 몸을 약간 흔든 다음 반동을 이용해 그 작은 창틀에 매달려 얼굴을 창 안으로 들이 밀었다. 비록 불편하고 힘든 자세였지만 지금의 하룬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호오! 제대로 찾았군.'
실내 구조는 단순했다. 사방의 벽에는 각종 무기들이 걸려 있었고 중앙에는 수십명이 한 번에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었다. 다른 물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 건물의 용도는 회의실로 쓰이는 것 같았다.
그 안에는 현재 스물 정도의 사람이 모여 있는데 아침 식사를 겸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복장은 산적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하룬은 사람들의 의복과 외모에 집중했다.
'내 예상이 틀리지는 않았군.'
상석으로 짐작되는 곳에는 긴 소매와 넉넉한 품을 가진 슈페리얼 튜닉을 걸친 초로의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슈페리얼 튜닉은 귀한 실크가 소재여서 귀족들이 즐겨 입는 옷이었다.
막 술이 담긴 주석 잔에 입을 대는 사내는 오랫동안 사람을 부려왔던 생활로 인해 자연스럽게 좌중을 압도하는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편으로 배석한 이들은 틀림없이 기사들과 마법사들이었다. 기사들의 경우 비록 풀 플레이트를 착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기도는 예사 산적들이 풍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법이군.'
이제 높아진 능력 때문인지 그들 중 상당수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급 귀족으로 보이는 몇 사람만이 극히 평범한 기도를 보이고 있을 뿐 나름 수련을 한 마법사와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도 보였다.
하룬이 시간을 잘 맞춘 듯 실내의 아침 식사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 한 사람씩 포크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초로의 사내에게 주의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술을 조금씩 음미하며 마시던 초로의 귀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에 앉은 위맹스럽게 생긴 사내에게 향했다.
"드레밀스 경, 어제 밖에 나간 조는 얼마나 되는가?"
"모두 네 조입니다."
"별일은 없겠지?"
"하하! 걱정 마십시오, 백작 각하! 그 씹어 먹을 파이린 제국군은 이곳까지 출동할 여력이 없습니다."
눈과 코 주위를 제외하고는 무성한 털로 휩싸인 거구의 중년 기사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난 경과 기사들을 믿고 있네. 이왕 작정했으니 이곳 인근을 아예 초토화시키게. 그래야 국경 쪽에 배치된 파이린 제국군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릴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약탈하고 죽이는 것에 망설이던 병사들도 이제는 재미를 알았는지 알아서 잘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과 공조를 해서 이렇게 제국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모두 다 우리가 안전하게 국경을 빠져나가기 위해서이니까요."
"그래. 잘 알고 있군. 잔인하고 혹독하게 친한 배신자들을 처리해야 하네.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게. 나중에 우리의 적이 될 수도 있으니 어린 새끼들까지 몽땅 죽여 버려!"
"걱정 마십시오. 요즘은 병사들도 산적질에 재미를 들여 서로 출동하려고 합니다."
드레밀스의 말에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백작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흐흐! 계집질은 물론이고 마음껏 버러지와 같은 배신자들을 학살할 수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나도 언제 따라가서 한번 즐겨 보고 싶군."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이곳에서 말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제법 큰 마을에 반반한 여자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으니 한 번 가시지요."
백작의 말에 드레밀스라는 기사는 음탕한 얼굴로 은근하게 말했다.
"그럴까? 이곳은 보는 눈도 많고 계집이라 봐야 다 천하고 닳고 닳은 것들뿐이니."
백작이라는 작자는 희가 동하는지 엉덩이까지 들썩거리고 있었다.
'개새끼들!'
그들의 대화를 듣던 하룬이 속으로 욕설을 했다. 보아하니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귀족 같은데 그 속은 그야말로 쓰레기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상전의 말에 떫은 표정을 짓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모두 똑같은 놈들이군.'
파이린 제국에서 이들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도 자신들의 영지에서 온갖 패악을 부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한마디로 쓰레기 같은 놈들이다.
본거지인 영지를 빼앗기고 제국 밖으로 탈출을 하려다가 국경이 봉쇄되자 산적들을 죽이고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다 쉽게 월결越境하기 위해 국경에 배치된 병력의 관심을 돌리려고 인근 마을을 초토화시키려는것이고.
'자신들의 의지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힘없는 백성들을 배신자라니. 귀족이라는 놈이 하는 생각이 저렇게 밖에 안 되나?'
하긴 일면 당연할 수도 있다. 현실의 노블들이 일반 주민들을 어떨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는 하룬은 이 세계의 귀족들도 그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그들에게 있어 주민이나 평민 들은 자신들의 배를 불려 주고 마음대로 희롱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브람스 경, 실론 백작 쪽과 정기 통신을 했나?"
"네, 백작 각하! 그쪽도 우그다스 산 인근의 초토화 작전에 들어갔다고 알려왔습니다."
"제먼 자작은?"
"그쪽도 파빈 성 인근에 기사들과 병사들을 풀었다고 합니다."
브람스는 백작의 오른쪽 첫 번째에 앉은 비쩍 마른 중년사내였다. 보아하니 마법사인 모양이다. 다만 하룬의 주의를 크게 끌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은연중에 기세를 드러내지도 못할 4서클 이하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저희가 몰살시킨 근처 마을은 총 열두 개입니다. 하지만 파이린 제국군은 아직 별다른 동향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곳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를 상대할 병력을 따로 파견할 이유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 이곳에서 대규모로 일이 벌어지면 국경 쪽에 밀집한 병력 중 상당수가 이쪽으로 이동을 할 겁니다."
"좋아! 그럼 내일부터는 모든 전력을 기울여서 이곳에서 말로 이틀 거리 안에 있는 모든 마을을 초토화 시킨다. 자경대 규모가 큰 곳들도 있으니 마법사들도 같이 움직이도록. 이 인근에 사는 놈들은 모두가 간적 피노세에게 빌붙은 배신자들이니 어떤 짓이든 마음대로 해도 좋다!"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옆으로 이동해 한 무릎을 꿇고 명을 받았다.
"이참에 자네들도 좀 즐겨 보도록 해."
"네, 백작 각하!"
다시 일어서는 그들의 얼굴은 이제야 몸을 풀 수 있다는 기대로 인해 환해졌다.
더 들을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놈들은 모두가 죽어도 마땅한 놈들이다. 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맹렬한 살의가 들끓었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다 태워 버리고 말겠다.'
의지가 곧게 서자 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그의 분노가 향하는 모든 돗이 갑자기 화염을 뿜으며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안에 있던 자들도 상황을 몰랐지만 매캐한 연기와 나무가 타는 냄새를 맡고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뭐냐?"
백작이 호통을 쳤다.
"그게……."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서로 눈을 보면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급하게 문쪽으로 향했지만 그때는 이미 두꺼운 문짝이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불이닷! 불이야!"
"중앙이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 건물이 통째로 화염에 휩싸이고 몇이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르자 다른 집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하룬은 극도로 분노한 상태라서 벽에 붙은 화염이 자신에게까지 닿은 것도 처음에는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았다. 금방 몸을 날려 건물과 좀 떨어진 곳에 안착한 하룬의 붉에 변한 눈은 한 줄기 의혹을 담고 있었다.
'전혀 뜨겁지가 않아! 내몸에도 아무 영향이 없고.'
하다못해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라도 오그라들거나 타야 정상인데 그의 몸은 엄청난 고열을 뿜어내고 있는 화염과 지척에 있으면서도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피닉스가 내 몸 안에 있기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 있었다. 하룬은 더러운 자들이 모여 있는 이 건물을 태워 버리겠다고 마음만 먹었을 뿐이지 피닉스를 소환해서 부탁을 한 것이 아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사람들이 화염에 휩싸인 목조 건물 옆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기겁을 해서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누구냐?"
"흐억! 악마다!"
붉은 화염에 휩싸인 목조 건물 옆에 서 있는 하룬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악마의 그것이었다. 머리에 솟은 큰 세개의 뿔과 혈광을 뿜어내는 눈은 물론이고 뿔 사이를 잇는 시퍼런 뇌전의 모습은 전설로 전하는 마계의 악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불이라는 소리에 밖으로 뛰어나온 수백 명은 경악한 얼굴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 순간에는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인해 불길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꽈앙!
"아악!"
"크아악!"
돌연 화염에 휩싸였던 건물의 문이 부서지며 안에 있던 자들이 뛰어나왔다. 옷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와 바닥에 몸을 굴려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그래도 주군이라고 백작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홀랑 탄 낭패한 꼴이긴 했지만 옷에 불이 붙지는 않았다. 기사들이 그를 에워싸고 문을 부순 덕분이었다. 대신 마법사들은 마법도 펼치지 못할 정도로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다. 단시간에 확 피어오른 화염 때문에 주문을 외울 정신도 없이 연기를 들이 마신 탓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백작과 기사들은 그제야 하룬의 존재를 볼 수 있었다.
"너, 넌 누, 누구냐?"
하룬은 수백 명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과 여차하면 그들 모두가 자신을 처치하기 위해 달려들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느긋한 마음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이들 정도로는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란 확신과 함께 한 놈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신성한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무리여! 너희들에게 죽어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원한과 한 서린 기원이 대지의 여신이며 죽음을 관장하는 미요스의 사자인 날 깨웠구나."
고저장단이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지만 은은한 마나가 깃들어 있어 멀리 퍼지는 하룬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작년 요른 성 인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모두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평민들이나 노예들이 신성시하는 대지의 신 미요스는 사자를 보내 평민이나 노예 출신의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여 성 노리개로 팔거나 이방인들의 사주를 받아 관음의 대상으로 파렴치한 짓을 벌인 자들을 벌한 적이 있다.
그 일로 인해 한동안 여자들이나 소년들을 납치해서 홍등가에 팔아넘기거나 그들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던 포주들이 대거 자취를 감춘 일이 있었다.
그 일은 테론 제국의 하층민들의 의식을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죽음의 사자가 출현한 일로 인해 자신들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신의 존재를 굳게 믿게 된 평민들과 노예들이 자신들의 존재 의의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고, 부당한 짓을 하는 귀족들이나 있는 자들에게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계기가 되도 했다.
백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들을 포함한 병사들이 모두 겁에 질려 덜덜 떨고있었다.
'신의 징벌이라니! 말도 안 돼! 버러지 같은 자들을 몇 죽였다고 징벌을 받아야 한다니. 더구나 미요스는 신들 중에서도 가장 아래 서열이야. 내가 모시는 광휘의 신이 이걸 용납 할 리가 없다.'
백작은 덜덜 떨리는 심신을 이를 악물고 추슬렸다. 정말 신의 사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저자를 없애지 못한다면 공포에 물든 병사들은 더 이상 자신이 시키는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도망을 치고 말 것이다.
백작은 항상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단검을 빼 들고 소리쳤다.
"아, 아니다! 저자는 신의 사자가 아니야! 놈은 그저 마계에서 뛰쳐나온 악마의 수하일 뿐이다. 당장 저자를 공격하라!"
백작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기사들이었다. 그들 역시 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라서 미요스 신보다는 주신의 바로 아래인 광휘의 신전과 가까운 자들이다. 평민이나 노예 따위들이 믿는 미요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이다.
차앙! 창!
기사들은 서둘러 자신의 무기들을 빼 들었다.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무기는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자들이다. 기사들이 강렬한 적의를 끌어 올리자 동요하던 병사들 중 일부가 역시 무기를 들고 합류하기 시작했다.
"크크크! 너희들은 지은 죄악의 대가로 영원히 지옥의 유황불에서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미요스의 의지로 말하건대 쓰러져랏!"
하룬은 이번에도 싸가지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마비독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단단하게 발했다. 워낙 분노한 상황이라 싸가지를 소환 대기해 의사를 전하는 것도 잊을 정도였던 것이다.
"헉!"
"훗!"
탁! 툭!
경호성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치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 처럼 말이다. 그들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지만 그 상태로 몸이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악마, 악마다!"
"으으으, 신이시여!"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뻣뻣하게 몸이 굳은 채로 쓰러지는 것을 힘겹게 눈알을 굴려 본 사람들 중 몇 명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마비독을 어느 정도 이겨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들은 이제야 신의 사자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자고로 힘이 있는 자들의 정의는 힘없고 가엾은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고 동정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창조한 주신의 의지이며 모든 신들의 공통된 의지이기도 하다. 너희들은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아무 죄 없음에도 불구 하고 강간과 폭행, 살인을 재미 삼아 저질렀다.
너희들로 인해 미요스 신이 관장하는 죽음의 세계는 그들의 한 서린 원망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이 세상은 인간의 껍질을 쓴 너희 같은 악마들이 활개 치고 돌아다닐 곳이 아니다. 엄연히 신의 의지가 존재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곳이란 것을 거짓된 믿음으로 자신을 감싼 어희들은 모르고 있었구나.
이제 모두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며 영원히 반성하라!"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마을 전체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르르릉!
대지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을 치며 쓰러진 자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사자시여! 이 모든 것은 저 다르다튼 백작이 내린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우린 그저 그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살려 줘! 제발!"
비명과 자비를 구하는 자들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영원히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고통을 겪을 생각을 하자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 소란도 잠시에 불과했다. 무참하게 살해된 망령들의 분노로 울고 있는 대지는 절규하던 수백의 몸을 결국 다 빨아들이고 있었다. 건물들도 모조리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 와중에 소일 스피어로 확실하게 고통을 느끼도록 만든탓인지 그 땅으로부터 정혈이 깃든 붉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올라와 하룬에게 향해 몰려 들었다.
그들은 이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50여 명이었다. 백작가의 식구들도 있을 것이고 원래 이곳에 터를 잡았던 산적들의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하룬의 무시무시한 적안赤眼이 그들을 향하자 그들은 눈을 파르르 떨며 간절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에 지옥까지 끌고 가진 안겠다. 미요스 신의 의지로 말하건대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취하는 자들은 내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싸가지! 저들의 중독을 풀어 줘.
소환을 위한 어떤 행동이나 소환 대기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싸가지는 하룬의 의지를 바로 전해 받고 움직였다.
-흐업! 아, 알았어, 주인.
하룬의 몸에서 한 줄기 바람이 새어 나와 몇 군데 모여 있던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의 몸을 한 바퀴 휘감고 다시 돌아왔다. 몸의 마비가 풀렸음에도 지독한 공포에 질려 있던 그들은 그런 사실도 의식할 수 없었다.
하룬은 몸 안에 깃든 위신느에게 심령으로 의사를 전했다.
-위신느, 나와 함께 날아 줘!
-알았어요.
위신느는 하룬의 몸을 천천히 허공으로 띄웠다. 그러고는 안개를 뚫고 막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높이 솟구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그 모습이 사라졌다. 흐릿한 안개와 옅은 햇빛을 받은 하룬의 모습은 피처럼 붉은 연무에 휩싸여 마치 핏빛 날개를 펄럭여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살아남은 자들은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모으고 경배했다.
"시, 신의 징벌이 내렸다!"
"오오! 미요스 신이시여!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우리의 경배를 받으소서!"
몇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하룬이 사라진 곳을 쫓으며 여전히 극도의 불안감에 떨고 있었고 나머지는 언제까지라고 할 기세로 정성을 다해 신의 사자를 경배했다.
"미요스 신의 사자가 다시 출현했대!"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검버섯이 굵은 주름살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 거죽 위에 점점이 피어난 촌로가 속삭이는 말에 같은 연배로 보이는 촌로의 눈이 희열로 가득 차며 크게 벌어졌다.
"어디에서 그 소리를 들었나, 응? 그리고 어디에 모습을 보이셨다던가?"
"어제 도라스 성에 들렀다가 주점에서 들었네. 베리 산과 우그다스 산 그리고 파빈 시티 근처에 나타나셨다네."
"그럼 그 산적, 아니 뼈와 살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영주 놈들과 그 놈들을 따르는 죽일 놈들을 심판하신 건가?"
"그렇다네. 자신들이 다스리던 영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근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 주민들을 모두 죽이던 그 파렴치한 놈들을 모두 땅속 깊숙이 끌고 가셨다네."
"세상에! 오! 미요스시여! 이 하찮은 종의 경배를 받으시길."
"우리의 미요스 신은 위를 버리지 않으셨네."
두 촌로는 대지에 입을 맞추며 한동안 미요스에게 경배와 감사 기도를 올렸다.
이와 같은 모습이 데모 시티와 허브 시티 사이의 방대한 지역에서 하루에도 수천 번이나 일어나고 있었다.
그 소문은 살아남은 자들과 특히 그 광경을 목격한 이방인들에 의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미요스 신의 사자는 전설에서 전하는 그대로 뇌전이 흐르는 세 개의 거대한 뿔과 붉은 눈 그리고 붉은 연무를 망토처럼 두르고 나타났다.
죽음의 사자는 그동안 수탈을 일삼다가 파이린 제국을 피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 힘없는 민초들을 몰살시키고 마을을 불태우는 엽기적일 짓을 저지르던 수많은 귀족들과 그를 따르는 짐승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지옥이 있는 지하 깊숙한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보름여에 걸친 시간 동안 죽음의 사자는 그간 민초들을 괴롭혀 왔던 인면수심의 짐승들을 단죄했다. 반경 100킬로미터가 넘는 광대한 지역에 수시로 나타난 죽음의 사자는 민초들에게는 희망의 빛이었고, 파이린 제국에 쫒겨 온갖 패악을 부리던 무리에게는 공포의 어둠이었다.
죽음의 사자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인근 지역은 물론 제국 전역으로 그 소문이 퍼져 나갔고 민초들은 환호했다.
"이건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선정을 베푸는 피노세 황제폐하와 파이린 제국을 축하하기 위해 나타나신 거야!"
"예끼, 이 사람아! 그런 게 어디 있어. 미요스 신의 사자는 단지 힘이 없어 온갖 수모와 학대를 받는 우리 같은 이들이 당신을 믿고 제대로 살라는 계시를 내리신 거야."
워낙 목격자가 많았기에 그 누구도 그걸 허황된 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미요스 신의 사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누구는 희망을, 누구는 공포를 느꼈다.
죄를 지은 자들은 서둘러 자신의 죄악을 멈추었고, 상당수는 신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에게 피해를 당한 자들에게 사과와 위로를 하며 회개했다.
각 신전과 마탑 들 그리고 황실은 다투어 조사단을 파견했다.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조사단들은 미요스 신의 사자가 신의 징벌을 내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또 마을을 불태우고 힘없는 백성들을 모조리 죽인 살인자들이 지하 깊숙한 곳으로 끌려 들어갔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목격자들이 지적한 땅을 아무리 깊게 파 보았지만 살인자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조사단들은 실제로 미요스 신의 사자가 출현했다고 굳게 믿었다.
신분제를 폐지한 파이린 제국의 출현과 함께 없는 자들이 경배하는 미요스 신의 사자가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던 평민들과 노예 출신들이 두 번이나 현신한 신의 증험을 믿으며 자신들에 대한 자의식을 급속 하게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