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타난 미요스의 사자>>
밤새 메신저 검술과 비도술, 그리고 정령술을 수련하고 새벽에야 마나플로를 연거푸 열두 번이나 돌려 피로를 풀고 식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해란 자매가 비욘드로 돌아왔다.
하룬은 해란의 반응이 궁금했다. 혹시 정령을 모두 소환한것을 눈치 채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녀는 경지가 낮은 마법사라서 그런지 정령의 향기를 맡지 못해 네 정령이 소환된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대신 그녀와 세란은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너 생각보다 꽤 깔끔하네. 어떻게 그렇게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어젯밤에 혼자 빨래라도 한 모양이네."
"그런가 봐. 똑같이 가면서도 네 방어구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가 않으니까 비교되잖아."
자신들의 더러운 복장과 비교가 되는 하룬의 방어구에 해란 자매는 감탄했다. 지난 이틀간 하룬은 항상 깨끗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도 씻기는 했지만 하룬은 방어구까지 깨끗한 상태였다.
"사내놈이 그렇게 깔끔을 떨면 물건이 떨어진다는데."
"미친! 깨끗하면 좋지. 난 행색이 불결한 놈들 물건은 다 떼고 싶더라. 그래 가지고 마치 자신이 노련한 유저인 것처럼 으스대는 것을 보면 그냥 아구창을 날리고 싶어."
세란과 해란이 한차례 하룬의 모습을 두고 입씨름을 했다.
'훗!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걸?'
네 정령을 소환한 상태지만 마나량의 소비는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물과 불, 바람과 대지 속성을 가진 네 정령이 하룬의 몸 안에 머무르고 있는 부수적인 효과로 굳이 소환을 하지 않아도 항온 항습은 물론 청결한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하고 이제 출발하자!"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난리야."
"빨리 가면 좋지."
해란 자매는 티격태격하면서도 금방 하룬과 보조를 맞추었다. 이제 확실히 그에 대한 마음을 접어서 그런지 하룬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녀들과의 격이 없는 대화가 좋았다. 배울것들이 정말 많았던 것이다.
오후 늦게 멀리 보이는 산과 연결된 능선에 도착한 하룬일행은 쉬기에 적당한 곳을 찾았다. 해란 자매는 오늘도 어김없이 안전지대를 설정하고 로그아웃을 했다. 고운 빛 가루와 함께 홀연히 사라지는 그녀들의 실루엣을 본 하룬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만월을 이루고 있어 사위는 은은한 달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혼자 저녁을 먹은 후 잠시 휴식을 취한 하룬은 꽤 오랫동안 검술과 비도술 그리고 정령술을 수련했다. 그리고는 연속해서 마나플로를 돌리자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활력이 솟아났다.
'오늘은 달빛이 좋으니 밤새 달려 볼까.'
왠지 흥이 났다. 언젠가 경험한 것처럼 오늘 밤은 고고한 은색 달빛에 물든 세상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룬은 시선을 멀리 돌렸다.
크지 않은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을 뿐 길게 이어진 야트막한 능선은 허벅지까지 오는 풀들이 밀생하고 있었다. 그 능선을 따라 이어진 먼 거리의 산이 보였다.
'저기까지 갔다 오자!'
비록 눈으로도 멀지 않아 보여도 실제로는 상당한 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메신저 스킬을 펼치면 새벽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흥이 다하면 수련 삼아 내처 달릴 생각이었다.
파앗!
바닥을 박찬 하룬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대지에 가득한 마나 중 흡입하는 일정량을 회전으로 응축시켜 도약을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는 찰나 폭발시키자, 그의 몸은 한 걸음에 5미터가 넘게 날아갔다.
1단계인 워킹과 2단계인 패스트 스킬을 혼합한 것이다.
마나 흡수가 뛰어난 워킹 스킬과 빠르기를 강조한 패스트 스킬을 두고 한동안 고민을 했던 하룬은 마나를 지속적으로 흡수하면서 빨리 달릴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낸 것이다.
'좋아! 마나 흡수량도 많고 빠르기도 마음에 들어. 이제 최선의 조합만 찾아내면 돼.'
생각대로 스킬 조합에 성공한 하룬은 몸 전체로 받고 있는 대기를 기분 좋게 음미하며 가장 적합한 조합을 찾으려고 여러 가지로 실험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산기슭까지 오게 되었다. 그나마도 스킬 조합에 팔린 하룬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산이 아니라 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음이었다.
'뭐지?'
하룬은 소음이 난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잠시 후 그의 시야에는 불길이 치솟는 한 마을의 모습과, 정신없이 이리저리 도망을 치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는 한 떼의 산적들이 들어왔따. 산과 인접한 곳에 자리한 마을은 30여 호 크기로 작았는데 그 집들 중 일부가 불타고 있었다.
마을을 보호해 줄 방책 중 일부는 이미 무너져 있었고 그 입구에는 수십 명에 달하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 대부분이 젊은 사내들이었는데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잘린 상태로 잔인하게 죽음을 당했다.
"으으으!"
달빛과 군데군데 치솟은 화광으로 훤하게 보이는 마을의 전경은 그야말로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목책 인근에서는 몇 명의 사내가 대로에서 여자들을 강간 하고 있었고 마을 중앙에 있는 공터에서는 피에 젖은 짐승들이 무릎을 꿇는 노인들의 목을 조르거나 마구 폭행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열 명 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머리를 땅에 박은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이 좋은 달빛 속에서 이런 지옥 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하룬은 숨을 들이마신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럴 때는 이목이 좋아진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어느새 눈이 붉게 변해 가는 하룬의 발이 마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 배신자들! 다 죽어!"
"제발 자비를, 아악!"
"으으으. 살, 살려 주세요!"
"크흐흐! 살려 줄 테니까 제대로 다리를 벌리란 말이야!"
"아아악!"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어린 여자애의 다리를 강제로 벌리고 올라탄 놈이 침을 흘렸다.
"벨아! 아리야!"
갑자기 소녀의 얼굴에 벨과 아리의 얼굴이 투영되었다. 먼지와 흙을 뒤집어쓴 채 원통한 듯 눈도 감지 못하고 몸과 떨어져 비스듬히 누운 마을 사람의 머리에 기지 주민들의 얼굴이 투영되었다.
"크아아아악!"
마치 포탄처럼 달리기 시작한 하룬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지옥 같은 광경에 숨을 죽이고 있었던 대기가 파도처럼 격랑을 일으키며 짐승들의 시선을 끌었다.
"저 새끼, 누구야?"
"크큭! 여기 내 밑에 깔려 있는 계집의 오빠라도 되는가보지."
"캬캬캬! 도망치지 않고 죽여 달라고 기를 쓰고 뛰어오는 것을 보니 용하네."
한창 허리를 바쁘게 놀리던 사내 몇 놈이 혀로 입술을 핣으며 주절거렸다. 밑에서 비명과 함께 반항하던 여자들은 오래전에 기절한 상태라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던 몇 명이 아랫도리를 추스르고는 하드 레더를 대충 걸친 채 하룬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파바밧!
마치 새처럼 방책을 넘어가는 하룬의 손에는 어느새 본 소드가 쥐어져 있었다.
"엇!"
"헉!"
사람이 새처럼 3미터 높이의 방책을 뛰어넘어 오는 것을 본 사내는 눈이 커졌다. 그들은 서둘러 주변에서 자신의 무기를 찾았다.
하룬은 목책을 넘어 두번 도약을 하는 사이 사내들의 지척까지 다가와 본 소드를 휘둘렀다. 본 소드는 하룬의 마나를 받아들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파핫!
"이노……!"
툭! 툭!
터그럭!
비명도 지를 틈도 없이 본 소드의 빠른 궤적에 세 개의 목이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뒤늦게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기괴한 모습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이이익!"
찢겨 걸레처럼 변한 옷자락으로 듬성듬성 살을 가린 채 과도한 힘으로 벌려진 하체는 온통 피범벅이었고 기절을 했는지 죽었는지 미동도 없이 더러운 바닥에 누운 소녀를 보는 순간 하룬의 눈은 완전히 붉게 변했다.
언제 벗겨졌는지 투구는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악마의 그것처럼 굵고 큰 세 개의 뿔이 솟은 하룬의 얼굴은 머리카락으로 대부분 가려졌지만 그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검증의 관 지하에서 선더볼트를 맞고 난 후 모습을 감추었던 흉측한 뿔이 어느새 다시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 뿔 사이에는 시퍼런 뇌전이 흐르고 있었다.
하룬은 이제 천천히 마을 중앙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서는 몇 명의 사내가 노약자들을 무릎 꿇린 채 한 사람씩 끌어내 모욕과 폭행을 가하다가 목을 베고 있었다.
푹! 푹!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실린 하룬의 발은 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내고 있었다.
박살이 난 문 틈으로 여자를 강간하는 사내의 엉덩이가 보이자 하룬의 발이 그곳으로 향했다. 정신없이 허리를 놀리던 흉악한 몰골의 사내가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흐억! 누, 누구야?"
"악마!"
본 소드가 아무 망설임도 없이 사내의 목을 날렸다.
하룬은 악마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런 광경을 보고도 이성을 유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독한 분노와 살의로 인해 과도하게 충혈되었는지 시야가 붉었지만 놓치는 것은 없었다.
"이런 씨발! 아무리 털어도 먼지밖에 안 나오네."
"히힛! 난 누런 동전과 먹을거리를 좀 챙겼지."
"에이, 씨발!"
그 옆집에서는 한차례 강간을 하고 집안을 샅샅이 털어 가지고 나오는 두 사내가 있었다. 그들의 어깨 사이로 입에 피를 흘리며 시퍼런 알몸을 드러낸 채 힘없이 널브러진 늙고 젊은 두 여자가 보였다.
하드 레더를 대충 걸친 채 뭔가 한 보따리 챙겨 나오던 두 사내는 하룬을 보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할 여유는 없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그들을 짓쳐 든 하룬의 본 소드는 아무런 피도 묻히지 않고 그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마을 중앙으로 향하던 하룬의 발은 소리가 들리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마을 곳곳을 뒤지며 물건을 훔치고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진짜 악마들이 거기에 있었다. 본 소드는 요요한 빛을 뿌리며 그 악마들의 머리를 베었다. 실력이 일천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방심한 것인지 그들은 하나씩 둘씩 그렇게 머리를 잃고 힘없이 쓰러져 갔다.
그렇게 서른 호밖에 되지 않는 집을 다 돌아다닌 하룬의 발길이 마을 중앙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십여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다!"
"으악!"
방금 전까지 악마와 같은 참혹하고 무도한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질렀던 놈들이 하룬을 보고 기겁을 했다. 하룬의 머리 위로 솟은 세 개의 뿔과 붉게 변한 광채를 뿜어내는 눈. 그리고 기괴한 문양이 도드라져 올라온 하얀 본 소드의 검첨으로 몇방울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 누구냐?"
하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사내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하룬의 전신으로 마을 곳곳에 널린 시체들로부터 모인 옅은 붉은색 안개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악마가 사체의 피를 흡수하는 것처럼 보여 이제까지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던 자들로 하여금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 그만! 그만 오란 말이야! 안 그럼 이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한 사내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아직도 피가 흐르는 도를 아이들 중 하나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나머지 사내들도 다투어 땅에 고개를 박고 부들거리며 떠는 인질들을 붙잡아 일으킨 후 목에 자신의 무기를 대었다.
그 순간 하룬의 눈을 잠식했던 붉은 기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작은 목소리 하나를 들었다.
-미요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인 가엾은 데르가 간절하게 빌게요. 저와 부모님들과 마을 사람들을 이 악마들에게서 구해 주세요!
겁에 질려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울고 있는 한 소년의 비명과 같은 기도 소리였다. 힘만 있다면 이 악마 같은 자들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을 것이다. 소년의 절망과 두려움이 알알이 전해져 왔다.
문득 예전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미요스의 의지이며 어둠의 주재자인 나 죽음의 사자는 공포와 절망에 질린 작고 가여운 내 종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엾은 내 종들로 하여금 고통과 절망의 심연에 들게 한 벌레 같은 너희 놈들을 두고 볼 수 없다. 미요스의 율법을 어긴 너희들에게 죄를 묻기 위해 어둠 속에서 나왔다."
하룬의 눈에서 강렬한 혈광이 터져 나왔다.
달빛에 비친 옅은 홍무紅霧에 감싸인 하룬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순간 사내들은 인질의 목을 위협했던 무기를 떨어뜨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룬은 그 순간 라이피에게 의지를 보냈다.
-라이피, 저들의 몸을 땅속으로 빨아들이고 소일 스피어를 박아 버려! 되도록 천천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후후후! 그때 했던 것을 반복하는 건가. 그러도록 하지.
하룬은 엄지를 들어 세웠다가 아래로 돌렸다.
"끄아아악!"
"살려 줘!"
"잘못했습니다! 제발 자비를!"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에 목까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몸에 소일 스피어가 박히자 공포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그들의 눈은 고통 속에서도 영원히 땅속 깊은 곳에 있다고 믿는 지옥의 유황불에 타 버릴 거라는 말을 기억하고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들 중 죄를 지은 자들의 입은 닫힐 것이다!"
하룬의 입에서 차가운 저주가 흘러나오자 대지가 그 말을 따르듯 한 번 가볍게 요동을 쳤다. 그러자 그들의 비명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기절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온몸을 꿰뚫은 소일 스피어를 통해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들의 코와 눈에서도 어느새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통 속에서 후회하며 지옥에 떨어질 거라는 공포에 떠는 그들에게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죽지 목해 살아 있는 자들의 원망과 깊은 한이 담기 비명과 기도가 한없이 깊은 지저地底까지 닿아 날 깨웠으니 미요스의 권능으로 말하노니 대지의 자비로움과 생명의 경건함을 더럽힌 너희 짐승들은 지옥의 유황불에 빠지리라. 가벼이 인명을 살상하고 강제로 몸을 취한 죄를 유황불에 끝없이 타는 고통 속에서 속죄하라! 가랏!"
그 말과 함께 대지는 그들의 머리통을 통째로 빨아들였다. 아무런 비명도 없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들은 깊은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여전히 엎드린 상태로 훔쳐보는 마을의 촌로들과 아이들은 두려운 가운데서도 두 손을 모으고 경배를 했다.
"미요스의 사자가 나타나셨다!"
"미요스의 은혜가 강림했다!"
두려움으로 질식되었던 사람들의 눈에 강렬한 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족과 집을 잃어버린 힘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미요스라는 이름이 연호될 때 하룬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더 이상 분노를 터트릴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오오!"
"미요스의 대리자가 산적들을 모두 죽여 주셨다!"
이제야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생생하게 떠올린 하룬이지만 후회는 없었다.
하룬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라이피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죽인 산적들의 시체를 땅속 깊은 곳으로 묻어 버렸다.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서는 붉은 연기가 흘러나와 하룬의 몸으로 향했다.
모든 사체를 처리한 하룬은 지체하지 않고 마을을 떠났다.
패스트 스킬을 펼친 하룬의 몸이 날아가는 모습을 본 생존 자들은 미요스의 사자가 달빛 속으로 빨려 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하룬이 신의 사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날개가 달려 있지 않은 이상 날아 달빛 속으로 사라지지는 못할 것이다.
언덕 위로 날아오른 하룬의 몸은 어느 사이에 사라졌다.
달빛을 받으면서 점핑 스킬로 높이 뛰어올라 나무의 꼭대기들을 밟고 산 위쪽으로 올라가는 하룬의 모습은 붉은 운무가 따르고 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붉은 날개를 가진 새가 달빛속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산적들에게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탄성을 지르며 두 손을 모으고 미요스의 사자를 경배했다.
"미요스신의 사자께서 산적들을 모두 벌하실 거야.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틀림없어!"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그런 놈들은 몬스터보다 더 나쁜 놈들이니 지옥으로 끌고 가실 게다."
아직도 퍼렇게 질려 있는 얼굴의 소년이 하는 소리에 촌로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지금 바라는 유일한 것은 잔인무도한 산적들이 미요스 신의 벌을 받는 것이다. 가족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안식처를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부순 산적들이다. 그런 자들을 하찮은 자들을 보호하는 대지의 신 미요스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제발 그 나쁜 놈들을 모조리 다 지옥으로 끌고 가소서!"
한 노인의 처절한 기도에 살아남은 자들은 소리를 높여 미요스 신을 경배하며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펼쳐 해란 자매가 로그오프를 한 자리로 되돌아온 하룬은 한참 동안 심신을 안정시켜야만 했다.
수많은 생명을 끊은 것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런 놈들은 죽어야 해.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오래도록 살 수 있지.'
현실이건 비욘드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해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힘이 없다 해노 나서야 할 일이다. 자신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힘이 생겼으니 그 힘을 좋은 곳에 쓰고 싶었다.
좀체 흥부과 고민이 가라앉지 않자 할 수 없이 마나 플로에 집중하기로 했다. 마나 플로 역시 집중이 쉬이 되지 않아 자꾸 끊어지는 등 쉽지 않았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는 자신을 잊을 정도로 마나 플로에 푹 빠져드르 수 있었다.
꼬박 밤을 새워 마나 플로를 하고 나자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활력이 가득 찼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감정들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하는거야. 내가 가짜 신의 사자가 되어 죄지을 가능성이 있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되어 주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아!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지?'
이제야 자신에게 생겼던 이상한 일을 떠올리는 하룬이다.
붉은 보석처럼 빛을 발하던 그의 눈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의 시선에 마치 안개처럼 자신을 휘감고 있는 옅은 홍무紅霧가 들어왔다.
'이건 뭐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색이 연해져서 보기 괜찮았지만 마을을 떠날 때만해도 피처럼 새빨간 색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짙기도 했고 말이다.
'호오! 이 문양은?'
그의 시선은 붉은 운무가 서서히 스며들고 있는 자신의 손등에 고정되었다. 그곳은 오래 전 럼프오크들의 의식을 목격했을 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자신을 찾아와 몸으로 들어온 이상한 기운이 남긴 문양이었다. 그 동안은 보이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오늘 다시 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신기하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거지? 도대체 이 붉은 연무는 뭐야?'
한동안 그가 지켜보는 사이에 홍무는 손등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어 사라졌다.
하룬은 의식을 그곳으로 집중해서 뭔가 변화가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마나가 아닌가?'
그가 고민을 하는 사이에 아침이 밝아왔다.
"역시 부지런하네."
"그러게. 항상 우리보다 먼저 접속해 있네. 혹시 네 캡슐, 최상급이냐? 하긴 그 정도로 부자인데 왜 아니겠냐. 부럽다!"
다른 날과 다르게 일찍 비욘드에 접속한 해란 자매는 떠날 준비를 다 마친 말쑥한 하룬을 보고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캡슐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할 말이 있어."
다른 날과는 달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하룬의 말에 해란과 세란도 조금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사실은 허브 시티로 다시 가야겠어. 그쪽에서 이곳 돌풍용병대와 관련이 있는 사람과 만나야 할 일이 생겼거든."
하룬의 말에 해란 자매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황당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와 놓고 다시 되돌아간다니 왜 아니겠는가.
"중요한 일이야. 적어도 보름은 걸릴 것 같고."
"그럼 어떻게 하자고?"
세란이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난 허브 시티로 되돌아가서 볼일을 보고 워프 마법진을 이용해서 데모 시티로 갈 테니까 너희 둘은 그냥 가던 대로 데모 시티로 가. 난 그곳 지리를 모르니 성밖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자."
"그게 말이 되니? 우리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호위하는 사람도 없이 그 먼 곳까지 가라는 거야?"
"얘, 정말 안 되겠네. 우리끼리 가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떡할 거야? 이곳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해란 자매는 펄펄 뛰었다.
"수시로 여행자를 만나게 되는 이 안전한 길에 너희 둘 실력이면 오우거라도 상대할 수 있잖아.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안 될 거 같아. 미안하다."
하룬이 정말 미안한 얼굴로 재차 말을 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무슨 일인 데 그래?"
"그게…… 아이템 처리에 대한 문제인 거 같아."
두 사람을 납득시킬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기에 꺼낸 말이지만 잇속이 밝은 두 자매의 얼굴이 금방 바뀐다.
"그래? 무슨 아이템?"
해란이 콧소리를 내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 가 봐야 알 것 같아."
"아이템 등급과 수량은 얼마나 되는데?"
"넌 어떻게 그 연락을 받은 건데?"
세란은 아이템에 관심을 보였고 해란은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는지 궁금해 했다. 하룬은 세란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이게 이곳 세상에 존재하는 돌풍 용병대와 통신할 수 있는 아이템이야."
"어디? 와아! 이런 통신기도 있었어? 정말 예쁘다. 누가 만들었는지 완전 예술이잖아!"
해란은 바짝 다가와 목걸이의 펜던트를 손에 쥐고 살펴보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거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보석이나 장신구에 관심이 많은 해란이 처음 보는 완벽한 아이템이었다.
"이건 통신기가 아니라 장구로 팔아도 레어급은 충분히 받겠어. 그런데 정말 이곳 돌풍 용병대는 대단한 가 봐? 이런 통신기마저 희귀한 예술품을 이용하다니 말이야."
바싹 다가선 해란 때문에 엉거주춤 서 있던 하룬의 어색한 얼굴 표정을 보던 세란이 해란의 몸을 뒤로 끌었다.
"왜?"
영문을 모르는 해란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하룬이 힘들어하잖아. 들이대는 것도 같이, 포기하는 것도 같이하기로 약속했지?"
"미친! 내가 들이대는 걸로 보이냐? 이 자식은 내가 홀딱 벗고 있어도 눈 한 번 안 줄 녀석이라고."
"그거야 네 몸이 비리비리하니까 그런 거고."
툭하면 말싸움이 다시 시작되려고 했다. 그냥 놔두면 또 시간을 허비할 것 같아 하룬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이만 헤어지자. 그쪽에서 시간이 좀 급한 것 같아."
"그래, 알았어. 그럼 전부 다 받아가지고 와. 아무리 쓸모 없이 보여도 다 가지고 오라고. 그럼 데모 시티에서 만나자."
"알았어. 너희들도 조심해!"
말싸움을 벌이려던 해란 자매는 하룬의 말을 듣더니 그를 놓아주었다. 좀 변하긴 했지만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예전의 그 단호하고 차갑던 그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