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 시티로 가는 길>>
비욘드로 돌아오니 벌써 늦은 밤이었다. 창을 통해 달빛이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현실에 다녀오느라고 저녁을 건너뛰었네.'
시장기가 돈 하룬은 식당으로 가 볼까 생각을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마법 배낭에 있는 방을 꺼내 먹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가 아니면 음식이라는 것을 그저 배를 채우고 영양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치부하는 하룬에게 늦은 밤 식당으로 가서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충 빵과 물로 배를 채운 하운이 잠을 자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우리야!"
해란 자매였다. 보아하니 이제까지 아이템 분류 작업을 한 눈치였다.
"정리는 끝난 거야?"
"응. 마침 구입한 상급 마법 배낭이 2개 있어서 분류해서 넣어 두었어."
그 비싼 상급 마법 배낭까지 마련한 것을 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을 걷기로 한 것 같았다.
"돈은 좀 될 것 같니?"
"내구도가 떨어진 것들이 많아서 어떨지는 모르겠어. 거기에 수량이 너무 많아 가판으로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거 같은데?"
"그럼 경매?"
"응. 빨리 처리하려면 그게 제일 빠르지. 하지만 수익을 극대화 시키려면 공방 하나의 계약을 해서 떨어진 내구도를 올리고 깨끗하게 닦고 광택을 내는 게 최선이야."
하룬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런 일은 잘 모르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너희들에게 맡겼으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 시간이 없으면 강제로 경매로 처리해도 되고."
"후훗! 역시 통이 크네. 하긴 너처럼 금전 감각이 없으면 차라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최선이긴 해."
"돈 욕심도 없는 네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아이템들을 얻었는지 참 불가사의다."
두 사람은 하룬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나 돈 좋아해.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려고. 난 단지 너희들 말대로 금전 감각이 떨어지는 데다가 워낙 없이 살아서 아끼고 안 쓰는 게 습관이 되었을 뿐이야."
하룬의 말에 해란과 세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요즘 미스릴 시세를 혹시 알아?"
"미스릴? 그건 왜? 혹시 미스릴을 가지고 있는 거야?"
미스릴이란 말에 해란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원래 마법사로 게임을 시작한 그녀에게 마법 금속이라는 미스릴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있다고 사실대로 말을 하려던 하룬은 그녀의 눈빞이 부담스러워 표정을 감추었다. 돈이 되는 것에는 눈치가 귀신같은 해란이다.
"미스릴의 시세는 다른 보석들과 마찬가지로 변동이 심해. 마탑들의 수요가 많을 때는 올라가고 수요가 없으면 내려가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황금의 열 배 정도로 생각하면돼. 특히 파이런 제국의 경우는 줄어든 영토 때문에 미스릴 광산이 두 개밖에 없거든."
"1킬로그램짜리 바의 경우는 얼마나 가격이 나가는 거야?"
"바? 바라고? 가루가 아니라 바라니! 있어? 있는 거지?"
깜짝 놀라는 해란을 보니 놀래 주고 싶은 마음이 든 하룬은 이내 고개를 끄덕여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후아! 너 정말 부자였구나."
세란은 부러운 눈으로 하룬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세란은 서브 잡을 상인으로 택한 해란과는 달리 돈이 없는 것 같았다.
"세상에 미스릴을 바 형태로 가지고 있다니. 너도 참 간이 크다. 누가 훔쳐 가거나 강탈해 가면 어쩌려고."
해란은 흥분한 목소리였지만 다른 방에서 들을까 두려운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공간 아이템이 있어서 그럴 걱정은 없어."
"아, 진짜 너에겐 아공간 아이템이 있었지. 하긴 아공간이라면 걱정 없기 하지. 인벤까지 터는 씨프와 소매치기 들도 아공간은 어쩌지 못하니까. 그래도 아이템이니까 조심은 해야 해."
해란은 흥분한 가운데서도 마치 누나처럼 걱정해 주었다.
"대충이라도 가격을 말해 봐."
"좋아. 일단 황금의 경우 현실의 시세와 비슷해. 변종 생물들 때문에 광산까지 오가는 것이 어려워 3.75그램당 시세는 60만 원 정도야. 이곳 시세로는 75골드 정도 되지. 미스릴의 경우는 현실의 플라튬을 비롯한 레어 합금과 비슷해서 황금의 열 배 정도야. 그러니까 미스릴 3.75그램은 750골드 정도가 되는 거지."
현실의 금속과 비교를 해 주니 금방 이해가 갔다. 형상 기억에 항온 항습을 비롯한 여러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는 플라튬과 비슷하다니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니까 미스릴 1킬로그램짜리 바는 1억5천이 약간 넘지. 몇개가 있는데? 수량이 많으면 좀 더 받을 수 있거든."
'와아! 그럼 바가 스무 개니까 대충 30억 정도 되는 건가?'
그 가치를 알게 되니 갑자기 그린 엘프 일족의 로드에게 미안해졌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이런 보물들을 받고도 자신은 식량과 후크란에서 얻은 아이템들로 때웠건 것이다.
'다음에는 공짜로 몇 번 식량을 가져다줘야겠구나.'
아무튼 엘프들과의 교역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 일족과 인연을 맺게 되어서 다행이야. 다크 일족이었으면 별로 도움이 될 것이 없었을걸'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다크 일족의 경우 전투에 특화된 종족이라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돈이 될 만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하룬은 대답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정령석의 시세는 어때? 아, 그리고 마나석의 시세도 알았으면 좋겠어."
마나석과 정령석까지 나오자 해란과 세란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앞에 있는 하룬이 그런 귀한 물건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두 자매는 서로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년! 그러니까 내가 포기하지 말자고 그랬지."
느닷없이 해란이 소리를 질렀다. 세란은 해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화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에이! 찝찝! 누가 이 정도인 줄 알았냐? 거기다가 오빠가 계속 그러면 사업에도 지장이 있으니까 마음 돌리라고 그랬잖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처음 보는 순간 돈 냄새가 좔좔 흘렀단 말이야. 내 감각은 틀려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 번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거라고 할아버지가 얼마나 강조했는데……."
하룬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매를 좁혔다. 도무지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긴 한 거 같은데 알 수가 없다.
"에이, 다시 들이대 봐?"
"미친! 이미 물 건너갔어, 이 사람아! 속옷만 입고 그 난리를 쳐도 동하기는 커녕 정신이상자 쳐다보듯 했는데 이제와서 별수 있을 거 같아?"
혜란과 세란의 대화에 하룬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제야 그녀들의 대화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이!"
잔뜩 입이 나온 해란이 하룬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런저런 이유로 하룬을 어쩌려는 마음을 접었던 모양인데 다시 생각해 보려는 것 같았다.
"난 여자한테 관심 없다. 특히 너희들에게는 더욱더. 너희들은 내 친구야."
하룬의 단호한 말에 해란과 세란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풀어졌다.
"칫! 그렇게 못 박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고. 도대체 내가 뭐가 부족한지 모르겠다. 이 정도 미모에 몸매면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든 하고 싶어 환장을 하는데 말이야. 사귄다고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좋은 감정으로 연애 좀 하자는데 뭘 그렇게 빼냐.
넌 하는 짓이 도대체 요즘 남자들같지가 않아. 느낌이 좋으면 사귀고, 사귀다 보면 같이 자기도 하고, 좀 더 마음에 들면 같이 살아 보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헤어지면 되는데 말이야."
투덜거리는 해란은 보면서 하룬은 자신이 별종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긴, 다들 그렇게 여자와 사귀기는 하지.'
10대 중반이 되면 성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의 풍조이고 보면 성인식을 치른 후에도 아직 여자 경험이 없는 하룬 같은 경우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하룬이 여자를 특별히 싫어해서도, 특별한 가치관을 가져서도 아니다. 그저 그동안은 그 어느 여자애도 관심을 가질 만큼의 외모나 성격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심한 영양 불균형으로 뼈에 가죽을 씌운 것과 비슷하고 키만 컸던 그의 외모를 보고 좋아해 줄 여자는 없었다. 설사 그런 그에게 동정심을 가졌더라도 그동안 하룬이 가지고 있었던 피해의식과 자폐에 가까운 성격은 그런 관심조차 물리쳐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보통 사람이 되었으니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겠지.'
그가 일부러 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통 사람들과 다른 성장 과정을 겪었고 감정 부분에 있어 약했기에 자신이 확신을 가지지 않는 만남은 피할 뿐이다. 다른 대부분의 휴먼들이 그러하듯 그저 외모나 느낌만 보고 사귀거나 호감 정도로 육체관계를 나누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튼 그건 됐고, 이야기나 계속해 봐."
"알았어, 알았다고."
해란은 아직도 분이 덜 풀리는지 세란을 한 번 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마나석은 하급이 300에서 1000골드, 중급은 2,000에서 4,000골드, 상급이 5,000에서 1만 골드, 최상급은 최소 1만골드 이상이야. 특히 최상급 마나석은 이전 테론 제국의 경우 1년에 채 열 개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귀해서 어느 때는 10만 골드 이상이 나갈 때도 있어."
요컨대 그 품질은 물론이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요동친다는 설명이었다.
"정령석은 등급 구분은 없어. 다만 그 크기로 구분하는데 고양이 눈 크기면 10만 골드 이상을 받을 수 있어. 정상적으로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자격을 지닌 귀족들이나 마탑들이 참여하는 특별 경매품으로 분류되어 낙찰 방싱으로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정해진 가격은 없어.
마법사들에게는 무용無用한 물건이지만 워낙 희소한 데다가 몸에 지니고 있으면 미용이나 건강에 좋아 고위 귀족들이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가격이 더 높아."
결론은 경매에 붙여 봐야 그 가격을 알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함부로 남들에게 보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템을 팔려면 이곳은 좀 그래."
"뭐가?"
"허브 시티는 주로 약초 거래에 특화된 곳이라 아이템들을 제대로 팔기가 좀 힘들거든. 차라리 데모 시티로 가면 제대로 된 가격으로 팔 수 있을 거야."
"데모 시티?"
"응. 거긴 기존의 테론 제국 시절부터 유명한 상업 도시였거든. 현재 파이린 제국에서는 가장 상업 활동이 활발한 도시야. 각 지역에서 몰려드는 상인들과 각종 물산은 물론이고 유저들도 가장 몰리는 곳이거든."
"그래?"
마침 이곳에서 특별히 할 일은 더 이상 없다. 캘프란 마을로 돌아가 수련을 해도 좋지만 이왕 온 걸음이다. 어차피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의 촉수를 찾기 위해 황도로 갈 생각을 했으니 그곳으로 가도 될 것이다.
'그런 곳이라면 상단 창설에 대한 것도 보다 더 쉬울 테지. 일단은 거기로 가 보자.'
하룬은 해란 자매와 의논 끝에 행선지를 데모 시티로 정했다.
데모 시티.
기존의 헤빈로스 백작 영지였던 이곳은 파이린 제국의 경제 중심지로 도약하고 있는 곳이다.
약초의 주산지인 허브 시티, 제국 3개 곡창 중 하나인 요른 시티, 제국 최대 호수를 끼고 있어 수산물의 주산지인 워터분 시티, 그리고 제국의 중심지인 황도에서 비슷한 거리에 있는 곳으로 예전에도 그랬지만 통행세가 사라지자 단숨에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다.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자. 어제 보니 이곳에도 워프 센터가 생겼던데."
요즘 파이린 제국의 시티 단위는 거의 워프 센터가 세워지고 있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유저 마법사들 덕분이었다.
마나석과 마법진만 있으면 3서클 마법사 넷이면 워프 게이트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저 마법사들은 스킬북이나 마법 재료를 구하기 위해 워프 센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걸어서 가면 20일 정도 걸리는 여정이기에 그 시간이 아까웠던 하룬이 그렇게 말했지만 해란 자매는 반대였다.
"얘는? 워프 비용이 얼만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지금 그곳으로 가려는 이유도 아이템을 제값 받고 팔려는 거잖아."
특히 잇속이 밝은 해란이 눈을 하얗게 떴다.
"그래. 그곳이라면 1인당 50골드는 될 텐데 그 돈이면 쓸만한 매직 아이템 가격이야. 가는 길에 몬스터들이 걱정이라면 내게 맡겨. 이 누나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세란은 자신의 대도를 툭툭 치며 잇몸을 보이고 웃었다.
"길은 어때?"
치안 상황을 물어보는 것이다.
"길 근방에는 이전에 많았던 몬스터들이나 산적들은 이제 거의 없어. 구 테론 제국의 떨거지들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거든. 아무리 쭉정이만 남았다 해도 명색이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산적들은 그들에게 죽거나 아니면 제국에 자수를 하고 있어."
"그럼 위험하다는 거야?"
"아니,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북부 군단 출신의 군대가 수시로 순찰을 하는 도로 근처는 괜찮아. 다만 큰길을 벗어난 곳들은 아직 토벌이 되지 않은 터라 그들 때문에 치안이 별로 좋지 않지만."
"뭐 그렇다면야."
상황을 보면 그런 무리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나마 그런 무리가 지나는 사람들을 노리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하긴 급할 것은 없지. 그동안 강해지고 의뢰를 처리하느라고 제대로 게임을 즐기지도 못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자.'
하룬은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허브 시티를 떠났다. 비록 셋 다 말을 타지 못하는 관계로 내내 걸어야 했지만 여정은 즐거웠다.
허브 시티에서 데모 시티로 가는 길은 마차가 다닐 만큼 넓고 잘 닦여 있었다. 상인들의 통행량이 워낙 많았고 길 인근에는 타운 단위의 마을들이 많았기에 먹는 것과 쉬는 것이 편했다. 또한 몬스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증가로 인해 다른 곳과는 달리 몬스터들의 위협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룬은 그저 목표만 보고 매진했던 예전과는 달리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감상하며 즐길 수 있었다.
새벽의 어둠을 가르며 떠오르는 태양과 붉게 물들이며 대지속으로 사라지는 석양, 늘 마주치는 거대한 고목, 땀에 젖은 얼굴을 간질이는 한 줄기의 바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현실에서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아룸다움을 느끼며 전보다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격이 되어 버린 하룬은 제대로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도 그에게는 사막의 물처럼 다디단 존재였다. 이제 사심(?)을 포기한 해란과 세란은 하룬이 성장기를 겪으며 배우고 알아야 했던 것들을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주었고, 게이머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하룬은 자신이 얼마나 희한하게 게임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유저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이곳 주민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물론 주민들과 거의 똑같은 삶을 살아온 하룬은 보통의 유저들이 어떻게 게임을 즐기는지 이제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신탁으로 내려진 이방인들에게는 일정 수준에 도달하기전까지는 이곳 주민들과 달리 혜택이 아주 많았다. 전용 사냥터부터 시작해서 마을마다 형성되어 있는 유저 센터에서는 갖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유저 센터에서는 이방인들만을 대상으로 비교적 싼 가격에 아이템을 파는 것은 물론 음식까지 싸게 팔았다. 음식 맛을 모르는 유저들의 경우 일반 주민들이 사용하는 음식점은 비싸기만 한 곳이었던 것이다.
유저 전용 은행이나 물품 보관 창고는 어느 곳이나 약간의 수수료만 지불하면 자신의 아공간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유저 전용 여관까지 있어 청결한 방에서 싸게 쉬고 안전하게 로그아웃도 할 수 있었다.
센터를 통해 유저들은 동료들을 구해 파티 플레이를 할 수도 있었다. 파티 플레이를 통해 이동이나 사냥에서 위험을 분산시키고 협동심과 동료애를 키울 수도 있었다.
폴리스 센터에서는 유저 범죄자의 신고를 받고 포상금을 걸어 수배를 하기도 했다. 같은 유저나 혹은 주민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혹은 상해와 같은 피해를 받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타운이나 시티, 즉 기존의 영지성이면 어김없이 있는 광장도 유저들에게 특별히 개방되어 가판을 벌일 수 있었고, 주민들과는 달리 그 판매금에 세금이 붙지 않았다. 생산 직업의 경우는 영지마다 천차만별인 세금 대신 판매 대금의 5퍼센트만 유저 센터를 관리하는 시티의 관리 부서에 내면 그만이었다.
'후훗! 정말 황당하게 게임을 했군.'
하룬이 그중 이용한 것은 초기에 은행을 들른 것이 고작이었다. 그걸 제외하면 유저가 아니라 주민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게임을 했기에 다른 유저들과는 달리 높은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약간의 운과 함께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넌 레벨이 얼마니?"
해란의 질문에 하룬은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안내음까지 끄고 플레이를 해 왔기에 상태창을 볼 일도 거의 없었다.
"나? 한동안 게임을 안 해서 확인을 안 해 봤는데."
"어휴! 넌 정말 괴물이다. 보통 유저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하는데."
해란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하룬을 보았다.
하룬이라고 자신의 레벨이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레벨로 인해 자신이 남들과 전혀 다른 상태에서 게임을 하기 때문에 레벨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유저라기보다는 이곳 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몇 가지 항목으로 능력을 드러낸다는 것이 맞을 리가 없지.'
슈퍼 캡슐의 능력 때문에도 그렇지만 본래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결코 몇 가지 항목으로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이다. 육체적인 능력도 상황에 따라서 정신력이나 의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성격이나 임기응변과 같은 많은 변수들이 있는 것이다.
하룬이 그동안 자신의 상태창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 유저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이 세계의 주민들 사이에 완전히 적응을 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어느 순간부터 상태창에 나타난 수치를 믿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물론 이제는 그 수치가 왜 틀리는지 알게 되었다. 쏘우와 벼리가 한 말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일반 유저의 경우 힘스탯치가 45라면 그것은 일반 동화율이 적용된 것이다. 즉 최초에 게임을 할 때 넥컴월에서 기준으로 정한 15퍼센트의 동화율이 반영된 것이다.
유저들에게 캡슐의 사양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게임을 안락한 자세로 하거나 자동 영양 공급 장치와 같은 고기능 장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동화율 때문이었다. 상급이나 최상급 캡슐의 경우 동화율이 평균 20퍼센트,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최대 30퍼센트까지 올려 준다.
그렇게 되면 45라는 힘 스텟치의 경우 동화율이 20퍼센트라면 60이 되고, 만약 30퍼센트라면 그 수치가 90이 된다. 즉 상태창에 나타난 수치는 같지만 실제 아바타의 능력은 배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룬은 행운 스텟에 많이 투자했기 때문에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한 상태에서도 이 정도까지 성장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난 양아버지 덕분인지 아니면 GG덕분인지는 몰라도 엄청난 행운을 가진 거지.'
벼리의 말을 들어보니 슈퍼 캡슐의 경우 평균 60퍼센트의 동화율을 구현해 준다고 하니 상태창의 수치가 45라면 그 네배, 즉 180이 실제 스탯치가 된다. 보급형을 사용하는 보통의 유저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길! 나도 혜택을 받고 있지만 이 비욘드라는 게임마저 유니온과 마찬가지로 빈익빈 우익부의 생생한 현장이 아닌가!'
돈이 있는 자들이야 상급 이상의 캡슐로 플레이를 하니, 보급형이나 중급 캡슐을 사용하는 유저들은 같은 노력을 하고도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최상급 캡슐의 경우 플레이 제한 시간까지 없으니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지게 된다.
그런 캡슐로 게임을 했으니 그런 괴물 같은 작자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검술의 경지로 보면 자신보다 한참 윗줄인 벼리를 뛰어넘는 실력자들이 현실은 물론이고 이 비욘드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일반 유저들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기에 돈을 벌면 가장 먼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캡슐의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이다. 불법 개조 이외에는 사업의 경쟁자가 없는 유니온 직영의 임페리얼 컴패니가 돈을 다발로 벌어들이는 이유이기도 있따. 유저수가 증가하지 않아도 부가가치가 높은 상급 이상 캡슐의 수요가 늘어나는 것이다.
'정말 지랄 같은 일이군.'
결국 비욘드로 인한 경제효과 역시 거의 대부분이 임페리얼 컴패니를 통해 유니온을 장악한 노블들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유저들의 경우 그저 희망도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비욘드에서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노블들의 배만 불려 주는 것이다.
넥컴월의 수익이 높아져도 그 수익은 공동 투자자인 유니온으로 향하고 최종적으로는 유니온을 장악한 노블들에게 가는 것이다.
여행 첫날밤, 해란 자매가 보다 편한 수면을 위해 현실로 돌아가자 하룬은 수련에 집중했다. 이동 중에도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메신저 스킬은 이제 상급에 진입했고, 메신저 검술도 딜런의 도움으로 상당한 수준까지 오른 터라 하룬의 진전은 나날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마나 플로 역시 한 번 운행하는 데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고, 축적되는 마나의 양은 엄청나게 많아 졌다. 마나 로드는 넓어지고 단단해졌으며 중요한 몇 곳의 마나 포인트에도 마나들이 조금씩 축적되기 시작했다.
특별한 마나 플로 없이 단지 검술을 수련하는 것만으로 소드마스터에 오른 딜런 경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을 먹은 즉시 마나를 검에 주입시킬 수 있는 그의 경지는 이제 익스퍼트 중급에 달하고 있다.
익스퍼트 경지의 경우 단계마다 모든 능력이 두 배에서 네배까지 올라가는 만큼 상급 경지는 아직도 아득하지만, 동화율을 고려하면 일반 익스퍼트 상급 유저들과도 충분히 겨룰 수 있는 경지였다.
비도술과 정령술도 수련해야만 했다. 앞으로는 정령술에 특히 공을 들일 생각이다.
아직 가설이긴 하지만 에센셜 정령의 능력이 하룬의 생각 대로라면, 싸가지의 오염 물질을 모두 정화하거나 혹은 따로 분리를 할 수 있게 되면 싸가지를 통해 현실에 이들을 데려 갈 수도 있었다.
그거야 단지 희망에 불과하지만 차후 비욘드에 자리를 잡은 GG나 HG 무리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정령들은 그에게 큰 힘을 줄 것이기에 중요했다. 검술 면에서 베타테스터였던 그들에게 현격하게 떨어지는 실력을 메워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정령들의 존재와 비도술이었다.
검술과 비도술 그리고 정령술. 한가지만으로도 평생을 걸쳐야 하는 어려운 길이다. 이렇게 시간을 쪼개 수련을 하고는 있지만 하룬은 답답하기만 했다. 검술이나 비도술이야 같은 무기술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정령술은 분야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허브시티를 출발한 지 이틀째 밤이 되었다.
해란과 세란은 저녁이 되자 어김없이 로그아웃을 했다.
하룬은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지난밤에 이어 오늘밤도 어떻게 하면 자신이 배운 것들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여행을 하면서 자연과 더 가까워져서 그럴까? 갑자기 정령들이 보고 싶었다. 그때 갑자기 하룬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마나야 메신저 스킬로 계속 축적하고 있으니 차라리 평상시에도 정령들을 소환한 채 움직여 볼까?'
문득 든 생각에 하룬은 네 정령을 소환해서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소환에 네 정령은 한동안 수선을 피우며 좋아했다. 특히 나이아와 위신느는 신경전을 벌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가능해요. 어차피 하룬은 그 특이한 수련으로 걸으면서도 마나를 흡수하니까 마나가 달릴 일은 없어요."
하룬의 한 팔을 품에 안은 나이아는 크고 아름다운 눈에 에메랄드빛을 발하며 기뻐했다.
"좋은 생각이야, 친구.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우리 역시 물질계로 소환되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룬의 몸안에 머무르며 정령석의 정령력을 흡수하는 것이니 안 될 것이 없지."
라이피도 생각해 보더니 반색을 했다.
"와! 신난다. 그럼 이젠 이 아름다운 물질계를 하룬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거야?"
"그래. 나도 정말 좋아."
피닉스와 위신느도 불길과 바람으로 하룬의 전신을 휘감아 돌며 기뻐했다.
"빨리 각성해! 곧 어려운 상대를 만나게 될 것 같으니까."
하룬은 이제야 이 방법을 떠올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네 정령들에게 최대한 각성 시기를 당겨 줄 것을 부탁했다.
네 정령은 각기 다르지만 하룬과 본인을 위해 다음 각성을 빨리 이루겠다는 다짐을 하며 우르르 하룬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 각성이 이루어지면 아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 기대해 보자.'
싸가지처럼 아공간을 가지게 되면 소환은 더욱 빨라질 것이고 하룬으로서는 엄청난 여유 공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거기에 싸가지의 경우를 비추어 보면 스스로 수련을 할 수 있게 되니, 소환자인 하룬이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그 능력이 올라갈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배워야 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를 리가 없다. 전혀 관계가 없을것 같은 많은 경험과 지식 들이 모여야 이렇게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창조적인 생각은 수많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독창적인 생각을 해내는 이들은 타고난 천재였다. 하룬은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생각난 김에 싸가지도 소환해 보자. 녀석의 진전이 궁금하네.'
지난번에 헤르쉬의 에션셜 정령인 포니를 봤을 때는 바로 녀석을 소환하고 싶었지만 오염되어 순수성을 잃어버린 녀석의 한계를 생각하곤 그동안 미뤘다.
오랜만에 보는 싸가지는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몸체부터 하룬에 가깝게 성장했고 네 정령이 합쳐진 것 같은 기괴한 형상도 이젠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룬은 그것을 자신이 그 모습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헤헤! 주인, 오랜만이야!
"잘 지냈냐?"
-흐흐! 나야 뼛골 빠지게 고생하고 있지.
"너한테 빠질 뼛골이 어디 있어, 인마?"
-이거 왜 이래? 나도 조금만 더 지나면 주인이랑 똑같은 몸을 가질 수 있다고. 주인이라고 하나밖에 없으면서 만날 구박이야.
외형은 좀 변한 것 같은데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뭔가 큰 진전이 있기를 기대했던 하룬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겨울 오염 물질들을 분리해서 따로 모으고 있다고. 그렇게 되면 나도 완벽한 내 모습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보고 놀라지나 말아.
"그래? 그렇담 다행이다. 이제 널 소환해도 해독약을 먹을 필요가 없는 거지?"
-응. 당연하지. 오염 물질들은 따로 분리해서 봉인할 거니까.
"아무래도 꽤 강한 놈들과 싸워야 할 것 같은데 빨리 서둘러."
-하고 있잖아. 나도 밤낮없이 하고 있다고. 이따위 오염 물질로 내 순수함이 더렵혀지는 것은 나도 싫어.
그렇담 다행이다. 사실 독 때문에 웬만해서는 소환하는 것이 꺼림칙하지만 녀석이 네 정령과 마찬가지로 진전이 있다니 마음이 든든했다. 어쨋든 현재 하룬이 가진 능력 중 가장 강한 힘들 가지고 있는 것은 싸가지였다.
-그렇게 급하면 정령석이나 좀 더 주든디
사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줄 마음이 생기게 사근거리는 것도 아닌지라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버렸다. 하룬은 이제 녀석의 삐딱한 태도나 말에도 어지간해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알았어."
하룬은 아공간에서 정령석을 꺼냈다. 그래도 한 번 되게 혼이 난 후로는 자신의 아공간에 든 물건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 녀석이 대견해서 통 크게 세 개를 한 번에 주었다.
-흐흐흐! 이게 웬일이래. 주인이 연애라도 하나? 왜 이렇게 착해졌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서둘러. 이번에 각성하면 어느정도 능력을 쓸 수 있는 거냐?"
-하도 오래전이고 오염 물질 때문에 잘 생각은 안 나는데 정령왕하고도 붙은 적이 있는 거 같아.
하룬은 싸가지의 말에 녀석이 눈치 채지 못하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라면 공간 이동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각성한 싸가지와 네 정령만 곁에 있으면 현실에서도 누구에게 겁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녀석을 돌려보내고 해독약을 먹으면서도 하룬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