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란 자매》
“정말?”
“진심이야?”
공중 부양술이라도 익혔는지 앉은 채로 침대 위로 뛰어오르는 해란과 세란에게 하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니온의 촉수를 피해야 하니까 너무 큰 덩어리로 취급하면 안 돼.”
“호호! 그거야 기본이지. 그런 일은 내가 전문가거든.”
의기양양한 태도만 보면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지만 하룬은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해란의 거래 실력을 믿었다.
“어디! 아이템부터 꺼내 봐.”
아이템이라는 소리에 눈이 벌겋게 변한 세란이다. 세란은 아이템 욕심이 많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나. 쓰지도 않을 거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고 두고두고 감상하는 것이 취미란다.
하룬은 인벤토리부터 시작해서 아공간에 있는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뭐야? 아공간까지 가지고 있었어?”
해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지만 이내 줄줄이 나오는 아이템들에 눈빛이 바뀌고 만다.
후크란 산맥에서 얻은 자잘한 아이템들은 대부분 고요의 땅에서 엘프들에게 넘겼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얻게 된 아이템드른 만핬다. 심지어는 요른 성 인근에서 이성을 잃고 상폭행범들을 학살했을 때 얻은 것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템들이 이내 침대를 제외한 바닥에 설 공간이 없을 정도로 꽉 차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아이템을 팔지도 않고 그냥 가지고 다닌 거야?”
“그럴 새가 없었어. 아이템을 팔 경황도 없었고.”
한동안 정신없이 움직인 탓에 이 아이템들을 팔 수 있는 규모의 성을 두 번 정도 들르긴 했지만 그때는 고요의 땅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고요의 땅을 나와서는 아예 그런 곳을 피해 다녔으니 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거 레어 아이템이야! 이것도! 어머머! 이게 웬일이니.”
해란이 미리 이야기한 대로 세란은 그야말로 환장을 해서 아에팀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경매를 하든지 가판을 하든지 파는 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 너희들 몫은 얼마나 주면 되겠니?”
몫이라는 말이 나오자 바삐 아이템들을 살피던 해란과 세란의 몸이 멈칫했다.
“이걸 판 대금은 다시 내가 준 목록에 있는 물품들을 구입하는 데 사용해. 아! 그리고 보급형 캡슐 200개를 좀 구해줘.”
“200개나?”
해란 자매가 그 수량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것들은 쏘우가 시간이 되는대로 개조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과도한 물량이지만 다른 것에 앞서 먼저 구입해두고 싶었다.
“그리고 혹시 남으면 저번처럼 골드바로 전해주면 돼. 이것만 생각해. 난 너희들을 믿고 있고 이것이 마지막 거래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물론 확인할 생각이다. 그녀들만큼은 아니지만 뫼비우스도 이런 거래에는 을한 녀석이니 좀 귀찮더라도 녀석을 수배해서 처리하면 될 것이다. 그런 자신감이 눈을 통해 드러난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을 믿는다는 말에 감동을 받은 것일까?
“알았어. 10퍼센트만 받지. 수수료율은 낮지만 총액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돈이 될 테니까. 거기에 내 거래 스킬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말이야.”
그 정도만 해도 이익은 충분했다. 하룬의 말대로 한두 번에 그칠 거래가 아니고 아이템의 숫자로 보아 그 정도라도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오케이! 믿도록 하지.”
한번 믿기로 했으니 믿어야 한다. 설사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힐지라도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어야 한다. 그간 경험한 인간관계에서 배운 교훈이다. 단지 무조건 믿기보다는 중간에 자신도 모르게 과욕을 부리지 않도록 관리는 해야 했다. 처음부터 속이려는 경우보다는 점검이 전혀 없을 때 물욕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으니 말이다.
해란과 세란의 바로 옆방을 얻은 하룬은 아이템을 등급별로 분류하느라 정신이 없는 자매를 남겨두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가만있자. 이제 남은 아이템들이 얼마나 되는 거지?’
하룬은 나머지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엘프족이 준 상자 하나와 여러 가지 의뢰를 통해 얻은 정령석들, 원소석들과 마나석들이 그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각종 포션류는 물론이고 언젠가 위급한 순간에 써야 할 엘프족의 보물 ‘천사의 눈물’ 다섯 병도 있었다.
볼카웜을 잡고 얻은 방어구 세트와 비수 세트 그리고 화륜의 구슬과 볼카웜 이빨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후크란에서 얻은 독 구슬과 황자 연합으로부터 받은 세 아이템, 즉 마법 팔찌와 서칭 파인더 그리고 티톡시게이션 마블(해독 구슬) 역시 쉽게 처리할 것은 아니었다.
‘제일 귀한 것은 바로 이거지.’
하룬의 눈이 향한 아이템은 허벌 길드가 준 테론 제국 상세 지도책이었다. 이것이 있기에 돌풍 용병대의 명성을 떨칠 수 있었고 많은 돈도 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어쩌면 싸가지가 복덩이일지도 모른다. 녀석 때문에 가츠와 인연을 맺었으니 말이다.
강탄성궁도 남겨 두었다. 총 20개와 철시 수천 발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해란에게 넘기지 않은 것이다. 도네이스와 마리가 궁사이니 나중에라도 그들이 쓰거나 새로운 대원에게 선물할 수도 있었다.
‘현금도 엄청나군.’
100골드짜리 미스릴화인 골덴은 물론이고 누런 골드화가 몇 상자가 되었다. 지출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고요의 땅을 통해 현금과 보석으로 지급받은 어마어마한 대금을 챙겼다.
검증의 관에 관련해서 총 195만 골드, 분지를 벗어날 때 황자 연합과 베론에게 챙긴 150만 골드, 마지막으로 고요의 땅을 벗어날 때 귀족들과 마탑들에게서 180만 골드를 챙겼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보석들도 있었다. 지출이 있다지만 기껏해야 100만에서 150만 골드 사이였으니 그야말로 떼돈을 번 것이다.
워낙 큰돈이라 금전 감각이 별로 없는 하룬이 그 가치를 실감하지 못해서 그렇지, 해란이 이 방에 있었다면 아마 벌써 몇 번은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언뜻 추산해도 천만 골드는 되지 싶었다.
‘천만 골드? 거기에 8,000을 곱하면 얼마지? 헉! 800억?’
구체적으로 숫자를 떠올리는 순간 하룬의 입이 딱 벌어져 한동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물론 미스릴바나 정령석 종류까지 현금화하면 그 두 배는 족히 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많이 번 거야? 맞나?’
몇 번을 계산해 보아도 맞았다. 하룬은 그제야 자신이 엄청난 재산가가 되었따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유니온에서는 노블 축에도 끼지 못하는데, 뭐.’
해란이 말로는 하위 노블들의 경우 수천억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견줄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단기간에 자신처럼 부유해진 사람은 없을 것 같아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돈이 많아도 쓸 줄을 모르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제대로 된 유흥이나 오락은 물론 자신을 꾸미거나 꼭 가지고 싶은 것도 딱히 없는 하룬인지라 그런 거금을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은 범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동안 기지의 운영 자금은 문제가 없겠군. 우리 벨이랑 아리가 좋아흐는 것들을 구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네.’
그러다가 언제까지 이런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지가 생각나자 하룬의 얼굴은 다시 심각해졌다.
‘고요의 땅처럼 그런 큰 건들이 과연 생길까?’
물론 신생국가들 간에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니 이 혼란한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엄청난 거금을 벌얻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들이라면 몰라도 NPC들이나 같은 유저들을 죽여 가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걸리는 것이 더 있었다.
‘사실 그간 의뢰를 해결하는 데는 나와 대원들 그리고 다른 용병들의 능력과 수고로움이 있기는 했지만 행운이 따른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 언제까지 행운이 따를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 보자.’
하룬은 당장 로그오프를 했다. 전이라면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의논할 대상이 없었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닌 것이다.
“무슨 일이야, 오빠?”
“마스터! 오빠!”
캡슐을 열고 나오자 벨과 아리가 조도를 줄이 방에서 홀로그램 스크린을 허공에 띄워 놓은 채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한동안 하룬을 못 만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가 하룬이 나와서 그런지 그의 목에 매달리며 좋아했다.
“아리, 이제는 그냥 오빠라고 불러. 헷갈리게 하지 말고.”
“훗! 알았어요, 오빠. 하룬 오빠! 헤헤!”
아리는 그 말에 그렇게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잠깐 나왔어.”
하룬의 말에 벨과 아리가 테이블 주위로 모였다. 하룬의 고민을 들은 벨과 아리는 고심에 빠졌다. 비록 뛰어난 지적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그녀들이지만 이런 현실적인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접해보질 않은 터라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다. 혹시 안 자고 있는 대원들이 있을까?”
하룬의 말에 벨이 홀로그램 창 하나를 띄웠다. 영상에는 기지의 각 방이 그려진 평면도가 축소되어 보였고 어느 곳은 붉은색 불이 들어와 있었고, 어느 곳은 꺼져 있었다.
“헤니 언니 방에 불이 켜져 있네. 홀로그램 화상으로 통화해볼래, 오빠?”
“그래. 준비 좀 해줘.”
헤니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의 지적 능력이야 대원들 중에 단연 발군이지 않은가. 벨과 아리는 간만에 나온 하룬을 위해 간단히 먹을 거라도 준비하겠다고 자리를 비워 편하게 화상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어머! 대장이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화면에 나온 헤니는 간편한 차림이었다. 그 뒤로 룸메이트들이 얼굴을 카메라에 가까이 댔다. 그녀는 유니온에서 돌아오며 동행한 백사회 회원인 보라를 비롯해 세 친구와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다행히 모두 깨어 있는 상태라 덜 미안했다.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지 몰랐네. 조언을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 깨어있는 대원이 있나 확인해 봤더니 시간이 늦어 다들 자고 있네.”
“벨과 아리 참모가 우리에게 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일을 맡겨서 그 방안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다들 고생들이 많네.”
“에이, 고생은요. 할 일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데요. 거기에 교육은 보람 있는 일이잖아요.”
파래라고 소개를 받은 키가 크고 깡마른 인공 수정체 출신 아가씨의 대답에 하룬은 자신이 이 기지를 그들에게 개방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유니온 안이라면 별 의미도 없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아갔을 테지만 이곳에서는 밤늦은 시간까지 교육에 대한 사안을 구상하고 검토하느라 정열을 불태우고 있으니 뭔가를 이룬 것 같은 뿌듯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무슨 문제인데요?”
“아, 그래. 늦었으니 빨리 이야기하고 나가야지. 사실은 뭔가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나 싶어서 말이야.”
“이곳에서요?”
“아니. 비욘드에서. 이미 유저 수가 천만이 넘었고 그 경제적인 파급력이 현실에까지 미치는 상황이라고 지난번에 헤니가 내게 말해주었잖아.”
지난번 유니온에 갈 때 헤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비욘드에서도 돌풍 용병대인 헤니는 그런 점을 깨닫고 위험한 현실 세계에서 고생을 하느니 비욘드로 진출을 하면 어떠냐고 의사를 물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용병대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다른 수익원을 만들고 싶다는 거죠?”
헤니 대신 이야기에 끼어든 아가씨는 평범한 얼굴에 조용한 인상이었다.
“미안해요. 이름이?”
웬만하면 이름을 까먹지는 않는 하룬이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훗! 전 미드레라고 해요.”
“미드레…… 아! 새침데기!”
생각이 났다. 어딘지 도도하면서도 깍쟁이 기질을 가지고 있던 아가씨가 하나 있었다. 면담을 할 때 불안한 표정에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연방 자신과 기존 대원들을 곁눈질하던 새침한 인상의 그녀가 바로 이 아가씨일 줄이야. 너무 인상이 달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하룬의 말에 그녀의 큰 눈이 더욱 커져 얼굴의 반을 차지했다.
“아, 아닙니다. 새침한 인상이 귀여워서 그 이름을 기억해 두었거든요.”
“호호호! 우리 대장님 사람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닌데요. 맞아요. 얘가 얼마나 새침데기인데요. 물론 아주 귀여운 새침데기이지만요.”
헤니와 두 여자가 깔깔대며 웃었다. 미드레는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혔지만 그 눈빛은 결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 오히려 기쁜 것 같은 부드러운 눈길로 하룬을 보았다.
“혹시 자산이 얼마나 되나요, 대장님?”
“흠.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일단 백만 골드는 넘습니다.”
혹시 모르니 일단 그 액수에 맞는 대답을 시험 삼아 들어볼 참이다.
“백만 골드라면 좀 애매하네요. 자산이 삼백만 골드 정도만 되어도 대형 상단을 꾸려 틈새시장을 파고들면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데요.”
하룬은 미드레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백만 골드가 비욘드에서는 엄청나게 큰돈이긴 하지만 기존 상단들도 있을뿐더러 유저들도 현실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상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정도 규모로는 크게 사업을 벌일 수가 없어요.”
잠시 말을 끊고 하룬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한 미드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비욘드에서 지금 사업을 시작하면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어요. 아직 게임 초기인 데다가 원래 상인은 혼란 상황에서 큰돈을 버는 법이거든요. 더구나 지금과 같은 준전시 상황에서는 잘만 궁리하면 수익성이 큰 사업을 벌일 수 있지요. 위험도는 크지만 제가 헤니에게 들은 대로 그곳의 돌풍 용병대와 우리가 긴밀한 관계가 있다면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요.”
하룬은 침을 삼키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최소 몇백만 골드의 자금과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인력이 갖추어진다면 한창 유저들로 인해 상업에 눈을 뜨기 시작한 비욘드에서 빠른 시간 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어요.”
“그럼 자금은 최소 오백만 골드 정도라고 잡기로 하고. 그럼 필요 인력은 어느 정도요?”
“그거야 어떤 사업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그 말을 들은 순간 하룬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자신은 장인 종족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는 드워프들과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들과 친한 사이다. 물론 손재주에 있어선 엘프들이 드워프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숲의 일족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약초들을 가공해서 뛰어난 약재를 만들어내며 인챈트 계열의 마법은 거의 독보적이어서 그들이 인챈트한 무구는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된다.
‘어차피 스카이 루프 산맥으로 들어간 드워프들과 엘프들은 거래가 필요해. 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공급하고 그들이 만든 물건들을 가져오면 된다.’
비록 험한 산맥 속으로 들어가는 상행이 되겠지만 워프 게이트를 최대한 이용하고 돌풍 용병대의 무력을 이용한다면 기존에 없는 귀한 드워프들과 엘프들의 물품을 공급할 수 있다.
‘허벌 길드도 있어.’
그랬다. 물론 약초 시장이 있긴 하지만 허벌 길드를 통하면 안정적으로 귀한 약초를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길드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줄 수는 없겠지만 가츠 노인이라면 자신의 편리는 어느 정도 챙겨줄 것이다.
뭐, 부끄럽기는 하지만 자신이 잡은 아이언 스네이크를 재료로 만든 해독약으로 많은 약초꾼들이 독의 위협에서 생명을 구했다지 않은가.
“미드레 말대로 그런 상단을 우리 용병대가 만들면 정말 좋겠어요. 대원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주민들은 비욘드에서 상단 일을 하며 돈을 벌면 될 테니까.”
헤니의 말에 하룬의 눈이 빛을 냈다. 어쩌면 이 일로 많은 것들이 해결될지 모른다. 그만큼 비욘드라는 게임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이 늘어난 것이다.
물론 결국에는 현실에 눈을 떠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아무리 재미있고 현실적이라도 비욘드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그때 자신이 겨우 단초를 잡고 있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하는데, 비욘드가 그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미드레, 좋은 의견을 말해주어서 고마워요.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만약 상단을 창설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전 그 일을 꼭 해보고 싶어요. 그래도 비욘드에서는 꽤 레벨이 높은 상인이었거든요. 거래 몇 건만 더 성사시키면 3급 상단 창설이 가능한 레벨까지 올렸어요. 나름 노력해서 맺은 인맥을 그냥 헛되이 하려니 안타까워서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상인 직업을 선택한 유저들의 경우 상단을 창설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레벨에 도달해야 하는 룰이 있는 것 같았다.
하룬은 거듭 조언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 통화를 마쳤다.
“오빠! 언니랑 생각을 해봤는데 상단 같은 걸 직접 운영하면 어떨까? 돌풍 용병대의 전력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네. 지난번에 오빠가 말해주신 대로라면 돌풍 용병대의 전력은 기사단에 못지않아요. 다른 상단의 호위를 맡을 거라면 차라리 직접 상행을 하는 편이 수익이 높을 거예요.”
“하하하!”
하룬은 자신이 힘들게 돌아다니며 찾아낸 것을 둘이 생각해 낸 것이 무척 기분이 좋았다.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 둘을 만나게 되었을까?’
“왜, 오빠?”
“왜요?”
벨과 아리는 갑자기 하룬이 파안대소를 터트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그녀들은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는 존재들인지 알기나 한 걸까? 하룬은 갑자기 그녀들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리 와!”
하룬은 벨과 아리를 와락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단단한 그의 가슴에 얼굴이 짓눌린 벨과 아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며 등을 두 손으로 단단히 감았다.
“벨, 아리! 정말 고마워. 내 곁에 있어 주어서.”
하룬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몰라도 벨은 벨대로, 아리는 아리대로 푸근함과 설렘을 느끼며 하룬의 품이 주는 느낌을 즐겼다. 그 어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안온함과 행복감이 그들의 얼굴에 떠올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하룬의 품이 주는 편안함과 아늑함을 한참 즐긴 벨과 아리는 부끄러운 얼굴이지만 그 품을 봇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우리말이야, 오빠에게 칭찬받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뭔데?”
하룬의 질문에 아리가 생글거리며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타이탄 워커의 설계도를 찾았어!”
“타이탄 워커?”
하룬이 아리의 말에 깜짝 놀라 둘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하지만 벨과 아리는 하룬의 몸을 감은 손을 끝내 풀지 않았다.
타이탄 워커!
종말 시대 말기에 탄생된 타이탄 워커는 체고 8에서 10미터에 무게 2톤의 당당한 체격을 가진 거인형 로봇의 일종이다. 원래는 타행성의 지하자원을 캐고 각종 작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무인형 로봇으로 만들기 시작했지만 차츰 다양한 목적에 사용되었다.
각종 대형 시설물의 건설이나 위험한 작업에 투입이 되었고 심지어는 전쟁에도 이용되었다. 또한 그 외형 역시 목적에 맞게 변형이 되어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암흑기에 완전히 사라졌던 타이탄 워커는 휴먼 시대를 열게 해준 세 에인션트 컴퓨터에 의해 재탄생되었다. 오염된 환경이나 강렬한 자외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의 존재 덕분에 유니온의 건설이 가능해진 것이다.
유니온 건설 초기, 타이탄 워커들은 휴먼들을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타워 크레이너와 드릴 리안은 도시와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타워 크레이너는 고층 빌딩을 건설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했으며 드릴 리안은 유니온들의 지하를 잇는 지하 도로의 건설에서 큰 역할을 했다.
다이아몬드를 재료로 만들어진 대형 드릴로 흙과 바위에 구멍을 뚫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고열을 이용하여 흙이나 바위 가루를 녹여 외벽을 형성하는 드릴 리안은 별도의 갱목이나 버팀목 없이도 지하 도로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타워 크레이너와 드릴 리안을 비롯한 타이탄 워커는 이제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전 세계적으로 수만 기가 넘었던 타이탄 워커들은 수정을 그 동력으로 하는 발전기를 자체 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기간에 걸친 대규모 수정의 소비로 인해 광맥이 마르고 새로운 광산을 찾지 못해 운용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생활 여건이 개선되고 인구가 급격하게 늘면서 유니온들은 효율적인 타이탄 워커의 사용을 자제하고 그 대신에 남아도는 인력을 투입했다. 어떻게든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수정의 고갈로 인해 타이탄 워커들은 적어도 유니온 안에서는 더 이상 활용 가치가 없어졌던 것이다.
효용 가치가 사라진 타이탄 워커들은 한동안 가동이 멈춘 상태로 사이보그들과 함께 창고에 박혀 있다가 결국 일부 휴먼들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타이탄 워커들의 외장과 내장 부품들은 강력한 합금과 강철 재질이었기 때문에 자원이 부족한 유니온들은 다투어 그것들을 해체해서 새로운 용도로 활용했던 것이다.
휴먼 시대를 연 주역이지만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지구상에서 타이탄 워커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만 해도 변종 생물들의 위협은 그리 강력하지 않았기에 어느 유니온도 타이탄 워커에게 한 짓을 후회하거나 그 기술을 보전 유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사이보그와 타이탄 워커에 대한 기술과 지식을 보유한 에인션트 컴퓨터들이 유니온 간의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받게 되면서 그에 대한 지식과 기술은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하룬 역시 이런 사실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릴 때 타이탄 워커에 대한 만화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육체적 힘과 능력을 가진 변종 생물들로 인해 피해가 가중되자 사람들은 타이탄 워커에 상상력을 부여해서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나 소설 그리고 영화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마이 솔저’라는 소설이었다.
변종 생물에게 부모를 잃은 한 고아 소년이 모험을 통해 얻게 된 타이탄 솔저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탑승을 할 수 있는 종류의 타이탄이었다. 탑승자와 일체화가 되어 강력한 힘을 가진 타이탄 솔저를 통해 휴먼들을 괴롭히는 변종 생물들을 온몸을 이용해서 물리치는 내용을 담은 ‘마이 솔저’는 휴먼력 70년경에 발표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대중의 관심은 높아졌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력원은 뭐야?”
하룬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기존에 타이탄 워커들이 폐기 처분의 운명을 받아들인 이유가 바로 동력원의 고갈이었던 것이다.
“수정이에요.”
“수정? 수정은 이제 지구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광석으로 알고 있는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계획을 입안하고 혼자 수행한 아리는 하룬의 의아한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인공으로 수정을 만드는 기술을 복원할 수 있었어요.”
“하하하! 대단해! 우리 아리가 정말 수고했어.”
하룬은 진정으로 기뻐 아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타이탄 워커는 그에게 아주 중요했다. 자신이 주도해서 새로운 영역을 건설하려는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력이었다. 영흥 마을 주민들이 다 와도 200명도 안 되는 상황에서 타이탄 워커의 작업 능력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전부터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 셋과 사이보그들의 힘으로 우리의 집을 지키거나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타이탄 워커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랬구나. 잘했어, 아리!”
사실 이제는 그 기술과 지식이 완전히 사장된 사이보그 제작에 성공한 것도 대단한데 타이탄 워커의 설계도까지 찾아내다니!
정말 대단했다.
하룬은 벨이 보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아리를 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이 부족한 이 현실에 타이탄 워커는 천군마마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오빠.”
벨이 생글거리며 하룬을 쳐다보았다.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또 뭐가 있지?”
하룬은 기대감에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물었다.
“부족한 금속 자원을 얻을 방안을 찾아냈어!”
“정말?”
벨은 하룬 대신 기지에 있는 모든 관리를 지휘하고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 지하에 건설된 새 기지에는 이곳을 건설한 과학자 집단에 의해 수집된 수많은 자원들과 그것들을 활용할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종 금속들은 물론 희귀한 재료들과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수많은 기기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이보그의 경우에는 생체형이라 아즈만의 정밀한 설계와 정교한 로봇 손들 그리고 튜브와 같은 생명 유지 장치들만이 들어갔지만 새로운 기계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원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자원들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다. 지속적인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작업형 사이보그들이 필요했지만 현 상황 때문에 전투형으로만 제작한 터라 지원 수급을 걱정하고 있었다.
“응. 이곳을 건설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코원 유니온의 B구역 지하 1,750미터 부근에서 휴먼 시대 초기에 금속 폐기물들이 매립된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그 기록이 사실이라면, 내 생각이지만 그곳에 폐기된 타이탄 워커가 있을지도 몰라.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우리가 부족한 금속 자원들은 물론 언니가 말한 타이탄 워커를 빠른 시간 내에 복원할 수 있을 거야.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지만 현재 우리가 보유한 기술이라면 충분히 재활용할 수 있을 거야.”
벨의 말에 하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려하던 가장 큰 일이 해결된 것이다. 안 그래도 이곳을 돌풍 용병대의 근거지로 건설하려면 수많은 자원이 필요했는데 강성해진 오르그들 때문에 필요한 자원 수급이 걱정이었던 것이다.
“수고했어, 벨!”
하룬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벨을 끌어안았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일을 벨이 해결한 것이니 기쁜 마음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저는요?”
“하하하! 당연히 아리도 수고했지. 아리와 벨! 내가 두 사람 때문에 산다!”
하룬은 살짝 질투심을 드러내는 아리의 눈빛을 보면서 그녀에게 한 팔을 벌렸다.
“마스터!”
아리가 기다렸다는 듯 하룬의 팔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아리는 수줍은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서도 허리를 감은 하룬의 단단한 팔뚝에 손을 얹었다.
“후훗! 여기는 우리 집이야. 오빠가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
벨은 하룬의 허리에 팔을 감고 전해지는 따듯한 체온과 함께 이전의 분체였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정을 느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