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욘드로》
무력조의 수련은 주로 기지의 연무장에서 진행되었다. 사실 밖에서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만 그러기에는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다. 계절의 차이가 별로 없는 기후에 방사능에 오염된 대기와 엄청난 자외선이 포함된 강렬한 햇빛 그리고 그늘에서도 40도를 넘는 찌는 열기를 견디며 수련할 수 있는 대원은 아직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난 괴물인가?’
이젠 피부를 장시간 노출해도 별 이상이 없다. 벨과 아리가 면밀하게 몸 상태를 조사하고 내린 결론이니 확실한 것이다. 하룬은 그것이 메신저 스킬 때문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마음 같아서는 대원들에게 전수를 하고 싶지만 자신이 마스터를 하지 못한 상황이고 비인부전으로 전하는 비기라서 망설이고 있다.
‘뭐, 어쨌거나 내겐 좋은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헬멧이나 여과 장치, 혹은 천이 없어도 마음껏 호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남들에 비해 월등한 조건을 갖춘 것이다.
기지로 귀환한 지 사흘째가 되던 날 연구조의 조장인 쏘우가 단독 면담을 신청했다.
“무슨 일입니까, 쏘우 조장.”
공적인 자리이니 다소 딱딱하지만 예의를 차렸다. 우암 소장이 엄격하게 예를 강조한 탓에 대원들의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쏘우도 평상시처럼 자유분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캡슐을 개조하고 싶습니다.”
“캡슐을요?”
캡슐이라면 기지 내에 꽤 있었다. 영흥 마을 전사들이 사용하던 것들을 지난번에 가져왔던 것이다.
죽음을 가장하고 집안에서 축출된 이후 불법 캡슐 개조로 큰돈을 벌었던 만큼 쏘우의 개조 기술은 신용할 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기지의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제작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상황이었다. 연일 주민들이 필요한 물건들의 목록이 소장으로부터 전해지는 시점이었다.
“네. 그동안 아리 참모가 넘겨준 청일 님의 연구 자료를 연구해 보았습니다.”
“뭐 특별한 것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요.”
하룬의 말에 쏘우는 잠시 뭔가를 떠올리더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 그 양반이 캡슐 분야에는 천재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정도로 뛰어난 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술을 개발해냈는지.”
하룬은 황 박사와의 대화를 통해 유니온에서 한동안 천재로 각광을 받았던 쏘우가 양아버지에게 감탄하는 것을 보며 왠지 기분이 뿌듯해졌다.
“청일 박사의 캡슐에 대한 지식과 기술은 저는 물론이고 임페리얼 컴패니의 그것보다 적어도 몇 단계는 진화된 신기술입니다. 특히 전자파로 두뇌는 물론 전신의 신경조직과 연결하여 게임을 하는 동안 게이머가 게임에서 받는 자극을 일정 수준까지 현실의 육체에 동화시킬 수 있는 기술은 압권입니다.”
“그것은 현재 시판되는 최상급 캡슐의 기능이 아니었던가요?”
대당 가격이 수천만 원이 넘는 최상급 캡슐을 사용하면 게임을 하는 동안 게이머의 육체 역시 일정 비율로 자극을 받는다. 게임을 하는 동안 식사를 하면 캡슐 안의 육체 역시 자동으로 영양을 공급받고 수면을 취하면 마찬가지 행동을 하게 된다.
“청일 박사님의 캡슐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비록 캡슐의 크기가 커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게이머의 육체는 게임의 아바타와 전자파로 연결된 상태에서 자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똑같은 움직임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하룬은 쏘우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최상급 캡슐에 비해 어떤 점에서 더 뛰어난 건지 잘 모르겠다.
“자극은 자극에 그칩니다. 자극에 따라 자연스럽게 근육이 움직이고 육체는 활성화되어 실제로 움직이는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근육이 그 행동에 맞게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즉 실제 운동량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지요.”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근육은 굳지 않으니 장시간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게임 속에서 배운 스킬은 두뇌와 신경세포가 기억을 하니 현실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수련을 하면 단지 뇌파로 아바타의 행동을 조종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그게 최상급 캡슐과 그 이하 캡슐들 간의 차이점이다. 최상급 캡슐을 전자파로 전신의 신경조직과 연결해서 게임 속 아바타가 받는 자극과 하는 행동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일 박사의 캡슐 기술을 활용하면 아바타의 행동을 현실의 육체에 일정 비율로 동일하게 구현할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의미의 동화율에 따라 아바타의 행동을 현실의 육체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동화율이라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화율은 이렇습니다. 아바타가 하는 어떤 동작이 100의 수치를 가지고 있다면 현실의 육체가 그 자극의 15퍼센트를 받아들인다면 동화율 15퍼센트라고 정의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뇌를 통해 받아들인 자극의 수치가 15퍼센트이지 육체가 받는 자극은 그보다 현저하게 낮은 수치이기 때문이지요.”
이해가 간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고렙들이 현실에서는 평범한 것이다. 게임 속에서는 지존일지라도 현실로 나오면 특별할 것도 없는 경우가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아바타와 현실의 육체 간에 전혀 영향이 없지는 않다. 대부분의 가상 현실 게임들이 현실의 능력을 기준으로 아바타의 초기 스탯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관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방위군이라고 해서 직접 전투를 치르는 게임에서 쉽게 고렙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반응 속도가 빠르고 두뇌가 뛰어난 경우에 고렙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이것이 가상현실 게임과 현실과의 괴리인 것이다.
“하지만 청일 박사의 기술을 적용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동화율만큼 현실의 육체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검술을 익힌다고 할 때, 동화율 30퍼센트라면 같은 시간을 수련한다고 할 때 시간 비율이 1 대 3이니 최대 90퍼센트까지 현실의 육체가 수련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지요. 즉 게이머는 게임을 즐기면서 현실에서 수련을 하는 것과 비슷한 수련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흠. 매력적인 말이군요.”
하룬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왜 자신이 다른 게이머와는 달리 현실에서도 단시간 내에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벨이었어. 양아버지가 만든 특수한 캡슐이었기에 게임에서 한 행동들이 현실의 육체에도 그 영향을 강력하게 미쳤던 거야.’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기술들을 다 구현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공간 확장이나 초자아체 컴퓨터 생물체에 대한 것은 아예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휴먼 시대 초기에 에인션트 컴퓨터가 전한 이론적 토대가 있어야 하는데 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쏘우는 활활 불타는 눈빛을 통해 연구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동화율까지 구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해 봐야 알겠지만 최대 30퍼센트까지는 구현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상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게임에서 받는 데미지 역시 같은 비율로 현실의 육체에게 영향을 주니 그 수치 이상은 위험합니다.”
대원들에게 가장 뛰어난 스승은 현실이 아니라 비욘드에 있었다. 비욘드에만 존재하는 전사의 전당에서는 해당자의 적성에 알맞은 무술을 지도한다.
하룬은 모든 대원들이 동일한 무술을 익히는 것보다는 본인에게 잘 맞는 무술을 익히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그는 대원들의 성격이나 육체적 특성을 파악할 정도의 눈은 없다. 그것은 철웅과 로수 역시 마찬가지다.
캡슐을 통해 수련을 하는 것의 이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페널티가 있긴 하지만 그곳이라면 죽을 걱정을 하지 않고 다양한 몬스터들과 실전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죽음에 대한 이미지도 무척 커질 테지만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것이 어딘가.
게임 속에서 대원들을 소집해서 자신이 직접 검술을 지도할까도 고민하는 하룬이다. 하지만 아직 대원들의 경지를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지도할 수 있는 눈은 없다.
‘내가 메신저 검술을 대성하고 나면 그런 눈이 생길까?’
그거야 아직 모르는 이야기다. 자신이 직접 대원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겠지만 게임 속에서 뛰어난 스승에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는데 굳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무리한 짓을 할 필요는 없다.
“좋습니다. 벨과 아리에게 조장님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무제한 공급하라고 지시할 테니 무리는 하지 마시고 개조를 해보십시오. 부족한 캡슐은 암시장에서 추후에 사오도록 하지요.”
당장 자금은 없지만 만들 방도는 있었다.
시원스러운 승낙이 떨어지자 쏘우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돈도 명예도 여자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원과 시설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하하! 고맙소, 대장! 내 대원들의 수련에 도움이 되는 뛰어난 캡슐로 꼭 개조하겠소.”
“그렇다고 절대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건강 삼아 어릴 때부터 익힌 가문의 무술이 있으니 아직 짱짱합니다.”
하긴 쏘우는 왜소한 몸집이지만 지구력이나 체력은 일반 대원들에 버금갈 정도였다. 유니온의 과학국을 장악해 온 가문이니 아무래도 허약할 수밖에 없는 육체를 단련할 특별한 비기를 가지고 있었나 보다.
하룬은 세 조장을 불러 쏘우가 말한 내용을 전해 주었다.
“허, 이런! 그런 캡슐이 있다니!”
“끝내주는군. 게임을 즐기면서 수련을 겸할 수 있다니.”
가상현실 게임 비욘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대산만 눈을 껌벅거릴 뿐 이미 비욘드를 경험해 본 두 조장은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비록 깨끗하고 시설이 좋은 기지의 연무장이지만 비욘드의 환경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장! 그럼 개조한 캡슐을 사용하는 경우 30퍼센트의 동화율로 그곳에서 하루 12시간 수련을 하면 이곳에서 동일한 12시간 동안 수련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단 말씀이오?”
그것까지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이론상으로는 맞다.
그렇게 생각하니 엄청나다. 현실의 하루는 그곳의 3일, 그곳에서의 하루 12시간 수련을 하면 3일이면 36시간이다. 동화율 30퍼센트를 생각하면 12시간이 된다.
비록 같은 시간이지만 수련 환경을 생각하면 그곳이 더 효과적이다.
하룬은 왜 자신이나 벼리와 같은 슈퍼캡슐 사용자들의 실력이 급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동화율이 60퍼센트면 현실에서 수련하는 것의 두 배를 수련하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노력에 성과는 두 배가 되는 것이니 일반 유저들 입장에서 보면 사기나 다름없었다.
“그게 다 뭐요, 형님. 적어도 하루에 열댓 시간은 수련해야지. 그래야 특수 캡슐을 사용해서 수련하는 효과가 날 거 아니오.”
“하긴!”
두 사람의 말대로 종일 수련을 한다면 현실보다 수련 시간이 더 많아진다. 아직 잘 모르는 현실과 게임과의 괴리를 감안하더라도 무척 효과적인 수련 방법이 될 것이다.
“대산 조장과 기존 대원들이 비욘드와 같은 가상현실 게임에 접해 보지 못했으니 두 조장께서 잘 알려주세요. 로수 조장은 전사의 전당을 통해 대원들이 자신에게 알맞은 무술을 익힐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시고요. 쏘우 조장의 말로는 하루에 하나 정도는 개조가 가능하다고 하니 순번을 미리 정해서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로수와 철웅은 흐뭇한 얼굴로 대산을 데리고 나갔다. 그곳이라면 자신들도 지도에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의 수련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수시로 몬스터와 실전을 벌일 수도 있으니 조장이 된 후 대원들의 지도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 온 두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하룬은 기지로 귀환하고 벼리와 면담을 한 후 고심을 거듭했다.
‘마약으로 인해 놈들의 하부 조직이 흔들릴 거야. 이럴 때 그 조직을 괴멸시켜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야! 아직 내겐 그런 힘은 없어. 어쩌면 호시탐탐 상대를 노리고 있는 휴먼 가드가 그 일을 해줄지도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벼리가 한 말에 의하면 비욘드에 지금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파이런 제국의 실세로 자리한 휴먼 가드나 뭔가 음모를 꾸미는 글로리 가이아의 수뇌부를 비롯한 많은 조직원들이 한곳에 모이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몰라. 어차피 코원 유니온에서 암약하는 GG를 해치운다고 해도 다른 유니온들은 어떻게 할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비욘드에 접속해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곳이라면 현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싸가지를 비롯한 정령들은 물론이고 제국 정보 길드나 황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마음만 먹고 계획을 잘 세우면 그가 이용할 수 있는 힘들이 많았다.
‘그래, 가자! 가서 끝장을 보자!’
어쩌면 비욘드와 이곳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건 최선을 다해 이제까지 걸어온 대로 움직이면 된다. 성패는 누구 말대로 하늘에 달린 것이다.
이제 기지가 자신이 없더라도 원활하게 돌아갈 여건이 만들어진 것을 느낀 하룬은 수뇌부에게 한동안 수련에 들어가겠다고 통고를 했다.
“말리지 마십시오. 조직의 우두머리가 가장 높은 실력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이번에 밖에 나가서 느낀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귀환 보고를 할 때 언급했다시피 새로 북쪽에서 내려온 오르그들은 이전의 종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또한 그 오르그들과 전투를 벌였던 휴먼들 역시 저보다 더 높은 경지의 검사들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 용병대에서 검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여러분들이 든든하게 제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지금 이 시점이 실력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하룬의 말에 대원들 대부분은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같은 휴먼들을 상대하는 것이야 쏘우가 개량하고 있는 각종 무기들로 충분하지만 오르그를 상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북쪽에서 내려온 오르그들의 숫자가 백만을 헤아리는 것을 감안하면 하룬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래도 새로운 수련 방법이 나왔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대원들 중에도 실력자들이 나오게 될 것 아닙니까?”
우암 소장은 하룬의 부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제동을 걸었지만, 그 역시 젊은 시절에는 전사였던 만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제가 강해지면 누구보다 대원들에게 좋을 겁니다. 지금의 전 누굴 지도할 실력이 되질 않지만 이번에 마음먹은 경지를 이룬다면 대원들에게도 제 깨달음을 전할 수 있을 정도는 될 테니까요.”
은근히 하룬의 지도를 원하던 무력조들은 화색을 띠며 그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인공수정체 출신 이너들의 이주와 같은 현안들이 문제가 되었지만, 이미 결정을 한 만큼 그것들은 참모들의 능력이나 수뇌부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결국 하룬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고 벨과 아리만이 아는 극비의 장소, 즉 호수 중심의 기지로 캡슐과 함께 돌아왔다.
“조심해야 해, 오빠!”
“하하! 벨, 걱정하지 마. 다음에는 벨과 아리도 같이 접속해서 같이 접속해서 같이 비욘드의 세상을 구경해 보자.”
“기대할게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날 떼 놓고 멀리 가는 건…….”
아리의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 지난번에는 정말 많이 서운했던가 보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캡슐로 들어가기 전 하룬은 벨과 아리를 한꺼번에 안았다. 이제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들이 많이 생겨 기뻤지만 그중에서도 이 둘의 의미는 정말 각별했다. 한 명은 같은 유전자를 가진 여동생이며, 다른 한 명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기질과 모습까지 바꾼 헌신적인 존재이다.
이번에 마음먹은 대로 일을 해결하고 나면 아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녀가 이미 마음속에 많이 들어와 있음을 느끼면서도 예전의 그 모습에 꺼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비욘드에 접속한 하룬은 잠시 대원들과 짧은 해후를 나누고는 타니엘라와 미루스에게 자신이 얻은 네 권의 마법서 전문을 넘겼다.
“흐흐흐! 드디어 이것들이 내 손에 들어왔어.”
“사형! 같이 좀 봅시다.”
두 마법사는 감격에 겨워 전문을 옮겨 적은 네 장의 종이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대장이 고생이 많소. 이 부족한 늙은이들이 뭐라고.”
감성이 풍부한 타니엘라의 노안에 금방 습기가 찼다.
“별소리를 다 하십니다. 구할 수 없다면 모르되 구할 수 있다면 그게 다 우리 용병대 재산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아. 대장 말이 맞소이다. 우리가 용병대 재산으로 만들 거요. 그 어느 용병단들도 따라오지 못할 수준의 마법서를 만들어 놓겠소.”
미루스 역시 감동한 듯 눈알이 붉어졌다.
“일단 다른 마법서의 행방을 알아볼 겸 파이린 제국에 다녀올 참입니다. 언제까지 해석이 되겠습니까?”
“뭐, 그동안 우리 해석 실력도 올라갔으니 한 달 정도면 될 거요.”
“그럼 티노를 통해 제게 통신을 하십시오.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구해 보겠습니다.”
“흐흐흐! 늘그막에 대장과 같은 귀인을 만나 이런 복을 누리다니.”
“그러게요, 사형. 그게 다 사형과 내가 다른 마법사들하고 다르게 후학들에게 인정을 베풀어서 그럴 거요.”
“어서 내려가세. 궁금해서 미치겠네.”
“그래요. 대장! 잘 다녀오시오. 해석이 완료되면 바로 통신하겠소.”
두 마법사는 전문을 받자 인사도 대충 하고는 지하의 연구실로 내려가 버렸다.
“하하하!”
그들의 뒤로 하룬의 웃음이 따라갔다.
타우스트 성에 도착한 것은 캘프란 마을에서 출발한 지 사흘이 지난 오후였다.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전력으로 펼친 하룬은 노련한 약초들이 열흘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거의 이틀 만에 주파한 것이다.
오후의 골목 풍경은 여전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대로와는 달리 한산한 골목에는 노을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그 웃음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는 하룬이 기억하는 한 소녀의 모습도 있었다. 아직 다리는 좀 절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처럼 걷고 노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하룬이 잠시 흐뭇한 시선으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 소녀가 그를 발견했다. 소녀는 눈에 반가움을 가득 담고는 놀이도 멈추고 그를 향해 달려왔다.
가츠 노인의 손녀인 나미레였다.
“아저씨!”
“하하! 잊었는지 알았는데.”
워낙 그의 인상이 특이했는지 아니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는지 그를 알아보고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에 왠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후아! 후아!”
또래에 비해 조그맣고 가녀린 몸을 가진 소녀는 그의 바로 앞까지 뛰어와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동안 잘 있었어, 나미레?”
“그럼요. 아저씨 덕분에 이젠 다 나았어요. 할아버지가 앞으로 열심히 놀고 많이 먹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나미레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럴 것 같구나.”
“우리 집에 온 거 맞죠?”
“응. 할아버지는 가게에 계시니?”
그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나미레는 하룬의 대답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네. 제가 가서 아저씨 온 걸 알려 드릴게요.”
나미레는 신이 났는지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가게를 향해 달려갔다.
“넘어져! 조심해!”
하룬은 균형이 맞지 않는 다리 때문에 불안하게 달리는 소녀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따뜻하고 행복한 미소가 짙게 떠올라 있었다.
약초 가게는 여전했다. 다양한 향을 가진 약초들이 말린 상태로, 혹은 분말이 된 상태로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가게 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또 뒤에 있는 지하실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빨리 와요!”
“알았다, 이 녀석아. 뛰지 마렴.”
뒤꼍으로 향하는 작은 문으로 나미레의 작은 몸이 보이는가 싶더니 험상궂은 가츠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껄껄껄! 반가운 손님이 왔군. 어째 어제 꿈이 좋더니만.”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겨주는 가츠의 얼굴에는 이제 더 이상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전 엄마에게 차를 부탁할게요.”
“그러렴. 우리 나미레는 정말 착하단 말이야.”
할아버지의 칭찬을 받은 나미레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빛나고 있었다. 예전의 병색은 다 없어지고 건강한 낯빛이어서 그녀를 보는 하룬과 가츠의 눈이 따듯했다.
“이리 앉게.”
“네, 어르신.”
가츠가 권하는 의자에 앉은 하룬의 시선은 아직도 아이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걸 본 가츠의 눈에 고마움과 기꺼움이 넘쳐났다.
“이제 몇 년 동안만 잘 먹고 활발하게 움직이면 정상적으로 걷고 뛸 걸세. 다 자네 덕분이야.”
“하하하! 아닙니다. 아이가 이렇게 쾌활해지니 그것만으로도 어르신의 감사 인사를 대신 받은 것 같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도와준 적은 있었지만 그 도움으로 좋은 방향으로 변모한 모습을 보니 다른 보답이나 감사 인사가 필요 없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이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래. 여긴 어떻게 들렀나? 바쁜 사람 같더니만.”
“제가 속한 용병대가 캘프란 마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가츠는 익숙한 지명이 나오자 반색을 했다.
“호오! 그런가? 거기는 지척인데. 나도 잘 아는 곳이고.”
“촌장님이 어르신을 잘 아시더군요.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껄껄! 다 늙은 내 이름이 도움이 될 리가 있을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아닙니다. 거기에 정착하는 일도 그렇고 고요의 땅에 다녀올 때도 무척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 거기에선 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다크 엘프들에게 죽었다지?”
가츠도 귀가 있으니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하룬은 대충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군. 그런데 따로 의뢰라도 받았나 보이?”
다른 일행이 보이지 않는 것이 궁금했나 보다.
“네. 이번에 개인적인 일로 황도에 가는 길에 어르신이 생각나서 문안이나 드릴까 싶어 들렀습니다.”
“잘 왔네. 온 김에 며칠 쉬면서 이 늙은이와 약초에 대해서 이야기나 하다가 가게. 내 자네에게 줄 물건들을 만들고 있는데 그 정도면 다 완성이 될 게야.”
“물건이라면?”
“그동안 해독약에만 매달렸더니 그 와중에 다양한 효능의 약들을 발견하게 되었네. 자네처럼 험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필요한 것들도 있어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있는 중이네.”
가츠는 자신이 지금 만들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했다.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은 모양이다.
“아닙니다. 귀한 해독약까지 만들어 주셨는데 또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아니야. 자네 때문에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네. 아이언 스네이크를 원료로 만든 해독약의 효능이 워낙 뛰어나 나와 다른 늙은이들이 요즘 여기저기에서 감사 인사를 받는다네.”
가츠 노인은 그때 만든 해독약을 길드를 통해 약초꾼들에게 나누어 준 모양이다.
“아이언 스네이크를 원료로 만든 해독약은 다른 일반적인 해독약과는 달리 미리 복용하는 것으로 독을 막을 수 있어 우리 약초꾼들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네. 사실 일반적인 독이야 중독이 되어도 해독을 하거나 시간을 늦출 수 있지만, 호흡기를 통해 중독되는 독들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해독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용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 아무 소용이 없었거든.”
“그랬습니까?”
약초에 대해서는 용병 아카데미 시절 배웠고 가츠의 저술도 읽었지만 독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하룬으로서는 그 차이를 잘 몰랐다.
“그럼 다른 해독약은 일단 중독이 되어야만 효과가 있는 거였습니까?”
“허허허! 그걸 몰랐었나? 황당하군. 그건 기본 중에 기본일세. 미리 먹어서 독을 막거나 해독하는 약은 거의 없네. 있다 해도 본래 효능의 1할이나 발휘할까? 전부 중독된 것에 맞추어 해독하는 것일세.”
“아!”
하룬은 새로운 사실을 알고는 탄성을 질렀다.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어리석군. 이게 다 교류가 부족한 탓이야.’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남들은 다 아는 것을 뒤늦게 배우거나 아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 폐쇄적으로 세상을 산 탓이다.
그러고 보면 해독약을 미리 복용하고 싸가지를 소환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통해서 망정이지 일반적인 해독약이었다면 아주 위험한 짓이자 소용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아이언 스네이크를 재료로 써서 만든 해독제를 최고로 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약력을 몸과 핏속에 일정 시간 머물게 해서 독의 침투를 막거나 중독된 것을 해독하기 때문일세. 물론 그 강력한 해독력이나 다양한 범위 그리고 해독되는 시간이 극히 짧은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말이야.”
하룬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가츠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 약초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독은 닿거나 침투하는 즉시 정신을 잃게 만드는 종류의 독들이네. 주로 후크란 산맥 인근이나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금지禁地들에 그런 독을 가진 동물이나 식물이 많네. 그런 경우에는 해독약을 상비하고 있어도 소용이 없지. 하지만 아이언 스네이크를 주재료로 사용해서 만든 해독약은 미리 복용하면 적어도 하루는 그 약효가 지속되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최상의 해독약일 수밖에 없지.”
“그렇군요.”
“경험이 풍부한 약초꾼들도 까딱하면 죽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인데 지난번에 만든 해독약 때문에 희생자가 현격하게 줄었네. 덕분에 자생하고 있는 곳을 알면서도 독 때문에 어쩌지 못했던 희귀한 약초도 꽤 많이 채취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야. 아쉬운 것은 그 수량이 워낙 적어 이제는 더 이상 그 해독약이 없다는 것이지.”
가츠는 진짜 아쉬운 얼굴이었다.
“그 해독약만 있으면 우리 약초꾼들이 더 이상 독에 의해 죽어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고, 희귀한 약초로 단박에 부자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해서 유감이네. 그렇다고 그 힘든 일을 해낸 자네에게 또다시 부탁을 할 수도 없고 말이야.”
가츠 노인은 은근히 하룬이 후크란에 들어가 또다시 아이언 스네이크를 잡아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얼굴을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야. 너무 위험해!”
잠시 욕심이 생겼지만 다시 바라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단념을 하는 가츠였다.
하룬은 싸가지의 아공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체를 떠올렸다. 어차피 이곳에 해란 자매가 도착하면 그녀들을 통해 아고안에 쌓아 두고 있는 아이템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제게 아이언 스네이크의 사체가 있습니다.”
“뭐라고? 정말인가?”
가츠 노인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사실은 그때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당장 보세!”
가츠가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상기된 얼굴의 나미레가 엄마에 앞서 찻잔 두 개를 받친 쟁반을 들고 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저씨. 차 드세요. 엄마의 비전으로 끓인 약차예요.”
나미레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가츠와 하룬을 쳐다보았다.
“끄응!”
가츠는 몸이 달았지만 기쁜 얼굴로 차를 가져온 손녀를 보고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앉고 말았다.
“은인을 뵙네요. 아이의 엄마 넬린입니다. 그때는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요.”
아이의 뒤에서 따라오던 중년 여인이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인사는 이렇게 건강해진 나미레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유! 아니에요. 설마 바로 가실 건 아니지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뭔가 준비를 하려는 것 같다. 해란 자매와의 약속 때문에 바로 가려고 했던 하룬이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왔으니 어르신에게 한 수 배워 가야죠. 내일 떠날 생각입니다. 혹시 제가 잘 곳은 있겠죠?”
“그럼요. 호호호!”
“헤헤! 아저씨, 그럼 나 잠깐 장에 좀 다녀올게요.”
나미레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절룩거리면서도 쏜살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다.
“가게 문 닫자. 귀한 손님이 왔는데 방해받기 싫다.”
가츠 노인은 공연히 하룬 핑계를 대며 늘어놓은 약재를 거두러 밖으로 나갔다. 그 속이야 당장이라도 아이언 스네이크의 사체를 보고 싶겠지만 말이다.
아침 일찍 가츠 노인의 가게를 나온 하룬은 광장으로 향했다. 암시장에 들렀을 때 한 달 후에 보자고 해 놓고 시간이 많이 지체된 터라 메시지 센터에 들른 하룬은 이미 일주일 전에 해란 자매가 이곳에
《나다, 해란. 아직 이곳에 오지 못한 거니? 네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 우릴 바람맞히다니. 너 생각보다 겁대가리가 없는 것 같구나. 이 누나들은 광장 근처에 있는 달빛호수 여관에 있으니까 이 메시지 보는 즉시 방울 소리 날리게 튀어 와라. 안 그럼 죽는다!》
피식!
하룬은 자신에 대한 기대를 접었는지 이제는 마치 엘저처럼 사내와 같은 행동을 보이는 해란이 떠올라 웃으며 달빛호수 여관을 찾아 광장으로 향했다.
전날 가츠 노인의 집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린 하룬은 미소를 지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은 그 정성만큼이나 그의 미각을 한층 높여 주었다. 음식을 먹고 이런 음식들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음식 욕심까지 알게 된 것을 보면 이제 정상인에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가츠 노인이라면 좋은 일에 쓸 거야.’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아이언 스네이크의 사체지만 수시로 독물을 접하는 약초꾼들에게는 최상의 해독제로 바뀌어 돌아갈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도 충분했고 이제는 싸가지를 거의 소환하지 않을 하룬에게 더 이상의 해독약은 필요하지 않았다.
귀족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허벌 길드 차원에서 약초꾼들에게만 염가로 판매하고, 그 수익은 약초를 캐다가 그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되거나 편부모 슬하에서 어렵게 사는 아이들을 위해 쓰일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하룬은 아공간에 넣어 둔 약들을 떠올리니 헤니가 생각났다. 그녀가 있었다면 거의 모든 종류의 병증에 대한 약을 보고 넋을 잃었으리라. 가츠 노인은 사양하는 하룬에게 자신과 친구들의 연구를 거듭해서 만든 모든 약재를 챙겨주었던 것이다.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도는 용병에게 가장 서글픈 것이 무엇이겠어? 바로 아플 때겠지. 지금은 귀찮더라도 다 가지고 가. 자네가 안 쓰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쓰면 될 터. 그래도 사람을 구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네.”
이런 것이 사는 맛일 것이다. 바라는 것 없이 정을 주고받는 것. 하룬은 정말 이 비욘드를 통해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운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에서는 폐인에 성격 이상자였던 자신을 이나마 사람답게 만들어 준 것이 비욘드라고 생각하니 지금 이 시간이 진정으로 소중했다.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은 사람들로 몹시 붐비고 있었다. 파이린 제국에서 허브 시티로 개칭할 정도로 뛰어난 약초 시장이 자리한 만큼 수많은 약초 상인들이 거래를 위해 이곳을 찾았고, 강한 몬스터들이 즐비한 후크란 산맥 인근에 위치하고 있기에 유저들도 무척 많았던 것이다.
그중 유저들은 광장 근처에 많았다. 유저들을 위한 뱅크를 포함한 여러 편의 시설들은 물론 광장 한쪽은 가판을 차릴 수 있는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해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걸으며 친구들, 혹은 가족들과 이국의 정취와 게임의 묘미를 즐기는 유저들을 구경했다. 전에는 그저 혼자밖에는 몰라 주변 상황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지만 어느새 이런 여유가 생겨난 것이다.
갖가지 아이템을 내놓고 호객을 하는 유저들의 큰 소리와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 던전에 대한 정보를 나누거나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까지 예민한 그의 감각에 들어왔지만 그 하나하나를 즐기며 감상하는 하룬은 그 어느 때보다 정상적으로 게임 속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글로리 가이아가 그에게 반드시 나쁜 짓을 한 것만은 아니다. 이런 세상을 경험하게 해준 것은 물론, 이런 여유를 가질 정도로 그를 성장시켜 준 공로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 동안 하룬이 감당해야 했던 것들은 무척이나 힘들고 고되었지만 말이다.
“이 자식이 어디서 사기를 치고 지랄이야!”
“뭐, 사기? 내가 어제 사기를 쳤다고 생떼야, 생떼가!”
“왜 사용 횟수에 대한 설명을 빼먹는데? 열 번 중에 이제 두 번밖에 안 남았잖아. 이런 것을 매직 상급이라고 100골드나 달라고 하는 것이 사기가 아니면 뭐가 사기야!”
“그, 그건…….”
문득 들려온 실랑이에 하룬의 시선이 돌아갔다. 사람들로 인해 보이지는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는데 정황상 아이템 판매의 와중에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빨리 가지고 가, 이 싸가지야! 내 신고하려다가 나이도 어린 것 같아서 이 누나가 참는다. 거래 센터에 불량 거래자로 등록되면 일정 기간 동안은 아이템 사고파는 것이 정지되는 거 너도 알지?”
“미……안해요. 사용 횟수 제한이 있는 아이템인 줄은 나도 몰랐어요. 근데 이거 싸게라도 사 주면 안 될까요? 빨리 빵 사 먹어야 해요. 공복도가 10퍼센트 밑으로 내려갔단 말이에요.”
말하는 것이 어리바리한 것을 보니 정말로 사용 횟수를 몰랐던 것 같다.
“10골드!”
“네?”
“10골드 받을 거면 놓고 가고 아니면 마.”
“아니, 열 번 중에 두 번 남았으면 20골드는 주셔야지요, 누님.”
“썩을! 너 같으면 두 번 쓰고 버릴 매직급 아이템을 20골드나 주고 사겠냐? 알아서 해!”
“아, 알았어요. 그거라도 주세요.”
결국 어리바리한 유저는 10골드를 받고 아이템을 팔았다. 비록 목소리만 들렸지만 하룬은 모든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자신의 급한 사정을 미리 까발렸으니 끌려갈 수밖에 없지.’
쓴웃음을 지으며 예전의 자신이 얼마나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는지 떠올리는 사이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어! 해란아!”
방금 전 어리바리한 유저를 상대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상인은 바로 해란이었다. 외모 보정을 했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는 있었던 것이다.
“어이, 하룬! 왜 이제 와!”
‘각종 아이템 비싸게 삼’이라고 쓰인 천을 바닥에 놓은 해란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미안해. 처리할 일이 좀 있었어. 그래도 너랑 약속을 했기에 빨리 온다고 온 거야.”
“에구! 그래도 숙녀랑 약속을 했으면 사내자식이 먼저 와서 기다려야지. 내가 심심해서 꼭 이렇게 가판까지 벌려야 하겠냐?”
“세란이는?”
“그년은 심심하다고 경매장에 갔어. 돈도 없으면서 침만 흘릴 걸 뭘 하겠다고 입장료 10실버까지 내고 매일 시간을 죽이고 있어.”
한동안 들이대더니 하룬이 전혀 반응이 없을뿐더러 피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제는 포기한 듯 편하게 평상시의 말투와 행동을 드러내는 해란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엘저를 연상시켜 마음이 푸근해졌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가판 신청하지 말걸. 이 자릿세가 하루에 50실버인데. 야,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투덜거리던 해란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잠시 돌아다니더니 아이템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유저 한 명을 그 자리로 끌고 와 앉혔다.
“여긴 특급 자리에요. 봐요! 목이 여기처럼 좋은 곳은 거의 없어요. 내가 약속 때문에 급해서 양보하는 것이니 여기서 그 아이템들 잘 팔아봐요.”
“아, 알았어요.”
한눈에도 뭔가 어수룩해 보이는 유저였다. 막 전직을 하러 온 듯 방어구 곳곳에 여행 동안 묻힌 몬스터들의 피와 흙먼지가 묻어 있는 유저는 피로한 얼굴이지만 목 좋은 자리라는 말에 인벤토리에서 70실버를 꺼내 주었다.
“당신 오늘 운 좋은 거예요. 여기 하루에 1골드짜리 자리인데 이 돈으로 확보했으니까요. 많이 팔아요. 나중에 만나면 술 한 잔 사시고요.”
“고마워요.”
방금 전 성문 안으로 들어온 불쌍한 유저는 해란의 말에 밝게 웃으면서 이곳에 오는 동안 얻은 아이템들을 주섬주섬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자!”
“그래.”
하룬은 너무 당당하게 행동하는 해란의 뒤를 쫓이면서 고개를 몇 번이나 흔들었다.
‘하긴 이러니 오히려 내가 더 안심이지.’
하룬은 그녀를 통해 자신이 그동안 모아 둔 아이템 대부분을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현금 또한 그녀를 통해 세탁할 생각인데 방금 본 그 광경으로 보아 상대는 제대로 고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