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컴패니》
글로리 가이아와의 재회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당장 그날 밤 벨과 아리가 다시 찾아왔던 것이다. 로우취가 파토 조라는 이름의 GG 하부 조직원 중 한 명의 짐에 숨어 그들의 대화 내용을 보냈는데 그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세미롱이라고?”
하룬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맞아요. 분명히 세미롱의 우너료라고 했어요.”
“빌어먹을! 완전히 개자식들이잖아.”
특히 돈도 희망도 없는 E, F구역의 많은 주민들을 폐인으로 만들고 안 그래도 희망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는 주민들을 절망으로 이끄는 그 몹쓸 마약의 공급처가 바로 글로리 가이아라는 사실에 하룬은 이를 갈았다.
단순히 마약 판매 조직인 줄 알았더니 마약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아리가 좀 더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유니온에서 정남쪽으로 약 이틀 거리에 다양한 세미롱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고 했어요. 저들은 그곳을 헤븐 컴패니라고 부른 거지요. 헤븐 컴패니는 마약 반제품이나 완제품을 유니온에 들여와 유통시키고 있는 거지요.”
이제까지 로우취 사이보그의 움직임과 로우취가 보고 들은 영상과 음성을 시간별로 모니터링하고 있던 아리였다. 그녀가 잘못 판단할 리가 없다.
‘날 실험체로 쓰려던 것도 모자라 그 죄 없는 아이들까지 엉망으로 만든 너희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F구역 곳곳에 널려 있는 트레쉬 스트리트의 어린 창녀들과 거지들을 떠올린 하룬의 눈에 붉은 기운이 점점 더 강해졌다. 예전에는 무심코 넘기거나 아예 관심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인성人性을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삶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휴먼에 대해 깊은 동정심이 생긴 하룬이다.
“벨이 위성으로 그 주변을 정찰해 보았지만 의심이 가는 장소는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런 사실을 보건대 그 마약을 생산하는 공장은 우리 기지처럼 전자파 굴절이나 교란을 시킬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거나 아니면 지하 1킬로미터 이상의 깊은 곳에 건설되어 있는 것 같아요.”
“맞을 거야. 그런 시설을 쉽게 노출시킬 조직이 아니야.”
인공수정체의 탄생을 가져온 전지구위원회의 행사에 관여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니 그렇게 허술하게 처리할 리가 없다는 것이 하룬의 판단이었다.
“숫자는 얼마나 되는데?”
“그들 간의 대화로 추정하건대 여러 곳에서 총 다섯 개 조가 헤븐 컴패니로 출동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것이 전부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오르그들에 대한 우려 섞인 대화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면 그 인원이 전부 같지는 않아요.”
그럴 것이다. 유니온에서 자신을 습격했던 인원을 생각해보면 한 조는 보통 열 명으로 구성되는 것 같다. 그렇게 다섯 개 조면 오십 명인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 정도로는 오르그들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패트롤 호크는 몇 마리지?”
“현재 네 마리가 있어요.”
“모두 그곳으로 출동시켜. 내가 직접 갈 거야.”
“위험해요!”
아리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하룬을 보았다.
“아직 저들의 전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어요.”
“장비는 별것 없었잖아.”
로우취 다섯 마리는 그들의 기지 구석구석을 살핀 터였다. 물론 몇 군데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그들이 보내온 정보로 보자면 특별히 위험한 무기는 없었다.
방어용으로 쓰일 것이 분명한 입자포들을 빼면 저들의 무기는 개량한 파동 건과 순간적으로 고압 전류를 흘리는 썬더 스피어, 그리고 도검류에 불과했다. 물론 자신을 습격했던 조에 있던 특수 능력자들이 있다면 좀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하룬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약 생산 공장 역시 그 정도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위험해요.”
“괜찮아. 일단 이번에는 상황 파악과 정찰이 주목적이니까.”
“알았어요.”
그제야 안도하는 아리였다.
‘하긴 지금 부딪히는 건 무리지. 무력조까지 대동할 필요는 없어.’
대원들이 한창 수련에 매진하고 있지만 아직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 로수와 철웅을 제외하면 실력이 고만고만한 터라 같은 숫자의 오르그라면 모르겠지만, 잘 무장되고 전투 경험이 풍부할 것으로 예상되는 글로리 가이아의 무력 집단과 부딪히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패트롤 호크들을 날릴게요.”
호크들은 하룬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 필요한 정보를 영상으로 전해 줄 것이다.
‘일단 이번에는 저들의 전력을 파악하는 데 만족하자.’
힘이 충분하다면 유니온 주민들을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마약의 공급지까지 파괴하고 싶었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더구나 힘도 너무 부족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하룬은 비록 밤이 늦긴 했지만 우암 소장을 찾아갔다.
“무슨 일입니까?”
나이가 든 탓인지 우암 소장은 연방 하품을 하며 물었다. 그동안은 나이를 잊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활동을 했기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해서 보는 하룬이 미안할 정도였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어딜 좀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한밤에 대장이 밖으로 나간다고 하니 소장의 졸음에 겨워 자꾸 처지던 눈이 활짝 떠졌다.
“개인적으로 증오하는 자들의 종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추적해왔던 자들인데 드디어 꼬리를 발견했기에 그들의 뒤를 쫓아 볼 생각입니다.”
하룬의 말이 워낙 두루뭉술했는지 우암 소장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들의 종적을 파악하는 것이니 염려하실 일은 없습니다.”
소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정신인 겁니까?”
“네에?”
“아니, 이 많은 식구들을 거느린 지도자가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움직일 수가 있는 겁니까? 대장은 우리 돌풍 가족의 가장입니다. 자고로 지도자란 차가운 이성으로 무겁게 움직여야 하는 법입니다.”
이제까지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꼬장꼬장한 표정으로 압박하며 말을 하는 우암 소장의 태도에 하룬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이 순간의 소장은 그야말로 언젠가 한 번 학교로 찾아왔던 한 노블가의 집사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제 개인의 일입니다.”
“이미 대장은 개인의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다른 대원들의 일에도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관여하지 않을 겁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다들 정시없이 바쁘잖습니까? 어렵거나 위험한 일도 아니니 잠시 다녀오려는 겁니다.”
“안 됩니다!”
우암 소장은 무서운 얼굴로 잘라 말했다.
‘헛!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걸.’
하룬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우암 소장의 무서운 면에 어찌할 바를몰랐다. 하지만 그 기백에 굴복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요했다.
“꼭 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암 소장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룬의 의지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그럼 무력조를 다 끌고 가십시오. 그래야 주민들이 안심을 할 수 있습니다.”
“아리를 남겨 제 상황을 매 시간 보고하도록 하지요. 호위대와 벨을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다들 제 몸 하나 뺄 정도의 재간은 가지고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흐음. 그럼 할 수 없지요. 나인이가 모두에게 한순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함께 다녀오십시오. 당장 나인이에게 준비하고 집무실로 가도록 전하겠습니다. 대장에게 수백에 달하는 주민들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십시오.”
우암 소장은 처음의 태도와는 달리 하룬의 강력한 의지를 보이자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만 하룬은 왠지 소장에게 말려들어 간 느낌이었다. 나인을 찾아 먼저 밖으로 나가는 소장의 입 꼬리가 실룩거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혹시 나인이를 나와? 에이, 아니겠지.’
로수를 통해 우암 소장이 나인이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나인이의 아버지가 죽은 후로는 소장이 나인이를 보살펴 주었다는 이야기는 그녀로부터 직접 들었다.
‘아무튼 내가 순간적으로 눌렸을 정도의 기세를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 기대가 되는걸.’
하룬은 나이를 핑계로 임시 소장 자리에서 곧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는 우암 소장을 당분간 풀어줄 생각을 버렸다. 그의 소심한 복수였다.
결국 하룬과 벨, 나인 그리고 태가사남매는 한밤중에 기지를 나왔다. 남겨진 아리는 입이 퉁퉁 불었짐나 지금 그녀가 쏘우와 함께하고 있는 작업들이 중요했기에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우려 어린 눈길을 뒤로하고 기지를 나선 일행은 빠른 속도로 움직여 이틀이 되던 날 오후 늦게 파토 조라는 이름의 GG 조직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룬 일행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들을 확인하고는 그들과 약 4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관목 숲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숲은 제법 높은 구릉지 위에 있었고, 숲을 나서면 그들이 쉬는 곳까지는 엄폐물이전혀 없기 때문에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아래쪽으로 시야가 탁 트여 그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태가사남매가 임시 숙영지를 만드는 동안 벨은 쓰고 있던 고글을 조작했다.
“아리 언니와 통신이 연결되었어.”
우암 소장 때문에 이렇게 휴식을 할 때마다 통신을 해서 상황을 기지 본부에 보고를 해야만 했다. 뭐, 그래도 휴식 시간마다 아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 위성으로 파악한 상황은 어떻대?”
추적하던 자들과 조우하게 된 것은 위성으로 확인했을 터였다.
“그게 아주 재미있게 되었어. 먼저 아리 언니가 위성으로 정찰한 것을 한 영상으로 편집해서 보냈으니 한번 봐.”
하룬은 벨이 넘겨준 고글을 받아 쓴 후에 아리가 보내온 영상을 보았다. 하단의 기록을 보니 3시간 전부터 촬영한 영상이었다.
“어?”
“후훗! 오르그들이 이들을 노리고 있어.”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는 휴먼의 무리가 다섯 개나 되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오르그 무리도 근처에 있었다.
벨의 말대로 정찰대로 보이는 소규모의 오르그 다섯 무리가 휴먼들과 지근거리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미행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룬에게는 둘 다 적이니 재미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인간들 중 일부는 바이크를 타고 있었다. 지름이 약 2미터에 달하는 타이어를 매달고 있는 괴물과 같은 바이크는 웬만한 지형이라면 무리 없이 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는데, 이것은 큰 공간을 가진 사이드카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송용으로 보였다.
‘다행이네. 바이크를 최고속력으로 몰았다면 우리가 쫓지 못했을 텐데.’
바이크의 숫자는 총 5기였다. 바이크 옆에 붙은 사이드카 역시 거대한 바퀴를 달고 있었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다.
하룬은 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하루 정도가 지나 높은 구릉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저 멀리 먼지를 일으키며 움직이는 글로리 가이아 조직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룬은 통신을 열었다. 기지에 있는 아리와 실시간으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위성이 보내는 정보를 합해 전체적인 상황을 알려줄 것이다.
-오빠! 수백의 대규모 오르그 본대가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래?
아리의 말과 함께 고글의 글라스 위에 위성을 통해 수신한 영상이 떴다. 처음에는 점과 같았지만 줌을 당긴 것처럼 점차 영상이 확대되었다. 영상에는 조잡하게 생긴 많은 막사들과 수백을 헤아리는 오르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굉장하네! 적어도 수백은 넘겠어. 대단한 놈들이 노리고 있네.
GG 조직원들도 정찰조를 운용하기는 했지만 10킬로미터 밖에 있는 오르그 본대는 물론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는 오르그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어쩌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건지도 몰라요.
-오르그들이 꽤 조직적으로 보이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지…….
하룬은 많이 놀라고 있었다. 최근의 경험을 통해 오르그들이 단순한 변종 생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조직적인 행동을 보니 얼떨떨한 것이다.
영상 속에 보이는 오르그들은 자루가 긴 도끼나 칼 그리고 검은 물론이고 일부는 휴먼들이 많이 사용하는 파동 건까지 다양한 무기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사방으로 정찰을 나가고 들어오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장, 적들이 움직입니다.”
태룡의 말에 영상 수신을 차단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벌써 글로리 가이아 조직원들이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속도를 높이고 있어.”
“가요!”
호크 네 마리와 아리가 정찰을 맡고 있으니 종적을 놓칠 일은 없지만 근접해서 뒤따르고 있는 오르그들로 인해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어떤 상황이든 돌풍 용병대로선 해가 될 것이 없었지만.
파토 조는 해가 떨어질 때가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옛날에 채석장으로 사용이 되었는지 산의 전면이 돌로 덮인 채 심한 경사로 깎인 상태였는데, 그 앞에는 다른 방향에서 온 듯한 다른 일행들이 이미 숙영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약 생산 공장은 저 절벽 같은 곳에 있는 것 같아요. 지하 50미터에 생명 신호가 활발하게 잡히고 있어요.
아리의 통신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 거대한 돌산의 입구에 있는 거대한 돌문 안으로 놈들 중 일부가 들어간 것이다. 문의 입구 양쪽에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로 위장된 진지가 있었고 각각의 진지에는 다섯 명 정도의 인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룬 일행은 그곳과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어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망원경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산속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오빠, 과연 오르그들이 공격을 할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나름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벨이었다. 이제까지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고 쫓은 것이 이곳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그렇겠지. 그런데 오르그들이 왜 이놈들을 쫓았을까?”
그게 궁금했다. 특별히 가지고 있는 물건들도 없을뿐더러 최근 휴먼들을 공격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여성도없는데 말이다.
“마우스를 보내볼까?”
“응? 마우스?”
“응. 로우취의 활약에 혹시 소용이 될까 싶어 종류별로 만들어 둔 것들을 가지고 왔거든. 마우스는 두 마리를 가지고 왔어.”
“잘했어! 그런데 오르그들의 말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나?”
“그건 잘 모르곘어. 하지만 최근 남하한 오르그 종족들은 체형이나 외모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공용어를 구사한다는 정보가 있으니까 가능성은 충분해, 오빠.”
“좋아! 그럼 빨리 보내봐.”
이미 오르그들은 돌산에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포위를 하듯 돌산 주변을 넓게 감싸고 있는 오르그들의 숫자는 얼추 오백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작정을 하고 놈들을 뒤쫓은 것이리라.
벨이 마우스들을 조종하는 사이 하룬은 아리와 통신을 해서 입구 쪽 진지 상황을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패트롤 호크들은 하늘 높이 떠서 아래 상황을 상세하게 정찰하고 있었다.
-출입문 옆 진지에는 휴먼 시대 초기에 제작된 소형 입자포 두 문씩이 있어요. 제원은 유효사거리 1킬로미터에 부과하지만 두께 100밀리미터의 강철판을 뚫을 수 있고, 강력 콘크리트 건물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지요.
-굉장하군.
-거기에 파동 건으로 추측되는 무기들을 소지하고 있어요. 보급형이 아니라 개량형이라서 위력은 모르겠고요. 거기에 플레임 방사기도 각각 하나씩 갖추고 있네요.
“내부 구조를 파알할 수 있겠어?”
-아니요. 유니온처럼 전파 교란 및 방어 장치가 가종되고 있어 안쪽 구조는 파악할 수가 없어요.
‘흠! 어지간히 신경을 쓰고 있군.’
역시 단순한 마약 조직이 아니었다. 그 정도면 유니온의 특수군에 필적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여차하면 특수군과 맞대응을 하려고 작정한 것으로 보였다. 그 내부의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유니온 역시 대외적으로는 하층 주민들을 병들게 만드는 마약 조직을 색출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당연한 대응이다.
“대장! 막사 안으로 들어가세요. 저녁을 준비할게요.”
태가사남매는 어느새 바위를 이용해서 막사를 쳤다. 하룬은 태연의 말에 벨, 나인과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벨이 마우스가 오르그들의 숙영지로 제대로 침투했음을 알렸다.
“됐어요. 마우스 두 마리 모두 오르그 진영으로 들어갔어요. 이제 수뇌부가 있는 막사로 찾아갈 거예요.”
“잘했다.”
잠시 기다리자 벨이 마우스의 눈과 귀를 통해 전해 온 영상을 허공에 띄웠다.
이미 어둠이 깔렸지만 오르그들의 숙영지는 모닥불 하나 없었다. 하지만 오르그들은 서로 부딪히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휴먼들과는 달리 밤에도 어렵지 않게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거군.’
알면 알수론 대단한 놈들이다. 야행성도 아닌데 이렇게 밤눈이 좋다니 말이다. 휴먼들에 비해서는 정말 신체적인 능력이 우월했다.
마우스 한 마리가 작은 삼각 형태의 막사 안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철제 봉 두 개를 바닥에 꽂고 그 위에 짐승 가죽을 씌워 네 방향에서 고정시켜 만든 단순한 형태지만 안은 꽤 넓어서 오르그 다섯이 나란히 누울 정도였다.
막사 안에는 오르그 넷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하룬 일행은 놈들이 육식을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르그들이 먹는 것은 구근류이면서도 아우터들의 주식인 세얌이였다. 세얌은 감자나 고구마처럼 뿌리를 먹는 작물이지만 평균 온도가 45도가 넘고 오염된 토양에서도 잘 자라 오염된 토지 때문에 벼나 밀과 같은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아우터들이 애용하는 식량이다.
세얌은 종말 전쟁 이후에 출현한 변종 신물로 감자가 고구마가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생각되는 구황작물이다. 계절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이런 곳에서는 사시사철 수확을 할 수 있으며 다년생으로 생육 조건을 크게 가리지 않는 데다 강장剛腸 효과까지 있어 아우터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오르그들이 세얌을 먹는 것을 본 마우스가 막 작은 머리를 돌리려던 차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오르그들이 공용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워 먹으면 좋겠다.”
“대장이 불을 피우면 안 된다고 했다.”
“쓰다. 맛없다.”
“내일 인간들의 집을 뺏으면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참아야 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오르그들이 공용어를 쓰다니! 비록 어색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휴먼들이 쓰는 공용어가 분명했다. 거기에 생식이 아니라 불까지 사용한다는 말에 새삼 더 놀랐다. 공용어를 쓸 정도의 지능이라면 당연한 일인데도 놀라게된다.
‘오르그들이 유사 인류라는 게 사실이구나.’
일전에 아리가 한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커졌다. 그 탄생 과정이야 모르겠지만 인간의 유전자를 모태로 탄생한 것은 틀림없다. 언어를 구사할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휴먼과 많은 차이가 없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다만 어휘 구사력이 낮은 수준이고 고저장단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지능 면에서는 아직 낮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짐승과 다름없던 오르그들이다. 그 진화 속도를 보면 휴먼들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까지 진화를 일으킬지 모르지만 현재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휴먼의 90퍼센트까지는 따라온 것 같았다.
정찰 마우스는 한참 동안 막사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지휘 막사는 쉽게 찾지 못했다. 아무스의 몸집이 너무 작아 그 시야 역시 무척이나 좁은 것을 감안하지 못하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 참!”
두 마리를 동시에 조종하는 벨의 얼굴이 연방 찡그려지는 것을 보니 안쓰러웠다. 하룬은 벨의 콧등에 작은 주름이 진 모습이 무척 귀여워 웃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벨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여동생을 가진 오빠들은 다 나처럼 이럴까?’
그건 아닌 것 같다. 학교를 다닐 때니까 꽤 지난 기억이지만 여동생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녀석들도 있었던 것 같았다.
“앗싸!”
제대로 찾았는지 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이내 마우스로부터 전해지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바쿠! 지금 쳐들어갑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바쿠! 휴먼들은 밤눈이 어두우니 지금 공격하면 다 죽일 수 있다.”
굵고 거친 음성들이다. 입을 크게 벌린 건지 아니면 숨을 거칠게 쉬어서 그런지 공용어는 뭔가 바람이 새는 것처럼 들렸다.
‘바쿠?’
아마도 이름이든지 아니면 계급을 나타내는 말 같았다.
“아니다!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들어간 놈들이 나오면 두 패로 갈라져서 공격한다. 탱그리가 물건을 잘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둘 다 깡그리 죽여야 한다. 휴먼들이 가진 무기들 중에는 무서운 것들이 있으니 조심조심해야 한다.”
바쿠로 추정되는 오르그의 말에 거친 숨소리만 날 뿐 다른 말은 한동안 들려오질 않았다.
“온, 나머지는 쉬게 하고 세바가 돌아가며 인간들이 들어간 입구를 감시한다.”
“알았다, 바쿠. 임무 수행하러 가겠다.”
이제까지 들리지 않던 새로운 목소리가 대답을했다.
이제 막사 안으로 잠입한 마우스의 눈을 통해 막사의 가죽 천을 제치고 밖으로 나가는 오르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릎까지 내려오지만 허리까지 터진 옆구리로 움직이는 전혀 불편이 없어 보이는 복장을 한 그 오르그의 등에는 등판의 절반을 가릴 정도의 거대한 칼이 매여 있었다.
그리고 두 오르그의 옆모습이 영상에 떴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오르그들은 의외로 흉측하지는 않았다. 일전에 영흥 마을 전사들을 도와 상대했던 오르크들과는 또 다르게 근육질의 강인해 보이는 몸과는 달리 얼굴은 심하게 눌린 코와 옆으로 많이 짖어져 매서운 눈을 제외하고는 휴먼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반들거리는 민머리와 몸 이곳저곳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붉은 기가 도는 눈빛은 오르그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희들도 쉬고 있어라!”
“알았다, 바쿠.”
“너도 쉬어라, 바쿠.”
바쿠로 불리는 오르그는 앉은 상태에서도 두 오르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특이하게 이마에는 노란 문신을 새기고 있었는데 문양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놈은 상체에 가죽을 두르고 있었고, 특이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놈이 대장이군.’
포스가 달랐다. 뭐랄까, 두 부하가 나가고 혼자 있는데도 막사가 꽉 차는 느낌을 주는 강인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바쿠는 뭔가 생각에 잠겼다. 가끔 허공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그리며 구상을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