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유니온으로 (143/278)
  • 《유니온으로》

     하룬은 전에 이용했던 통로를 이용해서 유니온 안으로 들어왔다. 암시장으로 바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힘든 상황에서 어려운 운반 건을 처리해 준 덕분인지 아니면 뫼비우스의 지속적인 관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창고와 가게의 여사장은 그들의 출입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대충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창고 밖으로 나온 하룬이 코를 벌렁거리며 익순한 유니온의 냄새를 맡고 있는 쏘우를 보았다.

     “이거 괜찮은 거죠?”

     하룬은 위조된 주민 칩을 인공 피부를 이용해서 붙인 팔뚝을 보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대장. 그래도 내가 한 번 죽은 후에는 그 기술로 한동안 먹고살았으니까 말이오.”

     쏘우의 장담에 하룬은 얼굴에서 찜찜한 기색을 애써 지웠다.

     “그럼 일 보고 바로 이곳으로 돌아오십시오.”

     “알았소, 대장.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쏘우는 하룬을 제외한 대원들을 의기양양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철웅을 비롯한 해무검관 식구들은 그의 시선을 외면했지만 할 일이 있는지라 어떨 수 없었다.

     오래간만에 유니온으로 들어온 터라 검관도 들르고 아는 사람들도 만나 회포를 풀고 싶은 검관 출신 대원들이지만 이번에는 쏘우를 도와야 했기에 싫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있던 은신처에 있는 각종 물품들과 정밀 제작기기들을 이참에 기지로 옮길 예정으로 온 것이다.

     “전 럼과 함께 집에 다녀올 게요.”

     레이스와 럼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양쪽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려면 바끄게 움직여야만 했다.

     하룬은 부러운 눈으로 그들의 뒤를 보았다.

     “저도 형제들을 만나 보고 이곳으로 올 게요.”

     “그래. 당장 거처가 필요한 사람들만 데리고 와요. 나중에 따로 기회를 줄 테니까.

     “고마워요, 대장. 빨리 다녀올 게요.”

     기쁜 얼굴로 먼저 가는 레이스와 럼을 향해 달리는 헤니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하룬은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보고는 박살 대장간으로 향했다.

     “어! 하룬아!”

     대장간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대형 고로 앞에서 바란을 만났다. 마침 박살 대장간의 차례가 되었는지 그가 직접 고로를 조작하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바란은 땀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형!”

     “여긴 웬일이냐?”

     눈을 크게 뜨는 바란의 모습을 보니 하룬의 방문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후후!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형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왔어요.”

     “그래? 그럼 일단 가게에 가 있어라. 해란이와 세란이가 반가워할 거다.”

     “웬일로 게임을 안 하고 가게를 본대요? 이제 철이 들었나?”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그게 아니라 요즘 암시장 상황이 좀 암울하다 보니 내 눈치를 보느라고 나와 있는 거지. 거기다가 요즘 게임 속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워 할 재미가 안 난다나 하더라.”

     하긴 암시장의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긴 한 것 같다. 다른곳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대장간 통로는 일단 오가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제도 암시장에 오르그들이 난입해서 열 명도 넘게 죽고 장을 보러 온 부녀자 넷이 납치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 분위기가 흉흉해! 이러다가는 암시장도 결국 폐쇄되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도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우터들과의 교역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인데…….”

     유니온을 감싸고 있는 30미터 정도의 방벽은 재질이 거의 흙이라 굴을 파고자 하면 어렵지 않다 더구나 오랫동안 아우터들과의 교역 때문에 사람들이 드나들며 만든 굴의 숫자도 상당하니 그걸 다 막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확실히 다른 놈들이야.’

     예전의 오르그들은 방벽의 굴을 이용하거나 파려고 하지는 못했다. 놈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배리어가 약해지는 틈을 타 방벽을 넘어 유니온을 침입했지만 최근 북쪽에서 내려온 놈들은 달랐다. 하르크들처럼 인간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고 지능도 높아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먼저 가 있어! 난 쇳물이 다 용해되는 것만 보고 갈 테니까.”

     고로 한쪽에 연결된 컨트롤 박스에 파란 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하자 바란은 하룬에게 손을 저었다. 이제 고로 상태에 집주애야 할 때인 것 같았다.

     암시장으 ㅣ상황을 말해 주듯 박살 대장간의 작업실은 작업의 흔적이 없었다. 하룬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 비수 한 자루를 손가락으로 돌리고 있다가 하룬을 먼저 본 세란의 눈이 커지며 쇳소리를 냈다.

     “앗! 하룬이다!”

     “하룬이? 정말이네!”

     책상에 앉아 인상을 쓴 채 뭔가 한창 작업을 하던 해란이 하룬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이네. 잘들 있었어?”

     한동안 들이대는 바람에 소원했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두 사람도 반가운 얼굴로 하룬에게 다가왔다. 마치 안길 것 같은 기세였지만 하룬이 먼저 내민 손을 양쪽에서 잡고 흔들었다.

     “뭐 하고 지낸 거야?”

     “너, 방송에 나온 대로 이름을 NPC에게 빌려 준 거 맞아?”

     “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

     두 사람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어떤 감정에서든 자신에게 이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하룬은 한동안 꺼리던 마음을 풀 수 있었다.

     “하나씩 물어라! 나 어디 도망 안 가니까.”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는 하룬을 본 두 자매의 눈빛이 묘해진다.

     “너 뭔가 바뀐 거 같아!”

     “그러게. 예전에는 말도 되게 딱딱하게 하고 태도도 부자연스러웠는데 이젠 아니야.”

     그런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기지에서 대원들과 친해지며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많이 편해진 하룬이다. 묘하게 바뀐 하룬의 태도에 하란과 세란이 도리어 어색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해란이 금방 차를 타 가지고 와 세란과 함께 하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어떻게 지낸 거야?”

     “요즘은 밖에서 지내고 있어.”

     “밖? 유니온 밖에서 말이야?”

     “응!”

     하룬의 말에 해란과 세란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요즘 밖은 오르그들 때문에 난리가 아니라던데. 상단 호위대들은 물론이고 방위군들도 배리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릴 정도로 위험하다는데…….”

     그렇게 말하는 해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우려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아. 더구나 우리 돌풍의 기지는 남서쪽에 있어서 아직까지 오르그들과 그렇게 자주 부딪힐 정도는 아니거든.”

     “돌풍? 돌풍 용병대?”

     하룬은 놀라서 묻는 세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 현실에도 돌풍 용병대가?”

     “있어!”

     해란과 세란은 하룬의 확인에 깜짝 놀란 얼굴로 잠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그럼 얼마 전 청포 상회가 용광로 마을에 물품을 보낼 때 그 책음을 맡았던 것이……?”

     “응, 뫼비우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어. 그 녀석이 비욘드의 하룬 대장과 막역한 친분을 가지고 있어 거절할 수가 없었거든.”

     “맙소사!”

     “세상에!”

     둘이 이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그 일에 대한 것이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당시 그 일을 맡을 때 의뢰자와 뫼비우스에게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함구를 부탁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다.

     “어, 언제 돌풍 용병대가 만들어진 거니?”

     “설마 게임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거야? 비욘드의 하룬이라는 NPC에게 네 이름을 빌려 줄 때?”

     “응, 거의. 하지만 그동안 대원들을 모으고 수련을 하느라 변변하게 활동을 한 것은 아니야. 오르그들은  물론 하르크들을 상대할 수 있어야 본격적으로 의뢰를 받을 생각이었으니까. 대원들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차 받은 의뢰였어.”

     하룬의 말에 해란과 세란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게임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돌풍 용병대가 현실에도 실재實在하고 있다는 것과 그 용병대를 하룬이 이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들을 놀라게 했다.

     “너…… 혹시 특수군 아니었어?”

     “아니면 다크 계열의 조직원인 줄 알았어.”

     그녀들의 말에 하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두고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여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 바란이 작업을 마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길게 연결된 운반공을 통해 공동 고로에서 박살 대장간의 작은 고로로 쇳물을 모두 옮긴 바란은 이제야 더운 듯 땀으로 젖은 가슴 근육을 드러낸 차림이었다.

     “그래 별일은 없었고?”

     “네, 형!” 

     “부탁이라는 게 뭐냐?”

     “그런데 괜히 형을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괜찮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일인데 뭐. 더구나 네가 본 대로 요즘은 할 일이 별로 없어 시간이 많아.”

     여전히 화통한 바란의 대답에 하룬은 가슴이 따듯해졌다. 요즘은 좋은 사람들 때문에 사는 맛이 났다. 사람을 대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던 하룬이지만 대원들과 영흥 마을 사람들을 대하며 자연스럽게 그런 단점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

     “용병대 식구들을 위한 물품들을 구입해야 해요.”

     “용병대?”

     뜬금없는 말에 궁금해 하는 바란을 위해 해란이 빠르게 설명을 해주었다. 바란은 게임 속에서 돌풍 용병대가 얼마나 유명한지를 모르는 상황이라 그 설명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구입할 물품들이 뭔데 내 힘까지 빌리려는 거냐?”

     “좀 많아요. 식료품과 각종 약품 그리고 각종 기기들이 필요해요.”

     하룬은 벨과 아리가 작성해준 물품 리스트를 넘겨주었다.

     “헛!”

     돌풍 용병대라는 이름에도 놀라지 않았던 바란은 리스트를 보더니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도, 도대체 인원이 얼마나 되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냐?”

     “지금은 200이 조금 넘는데 곧 400 정도로 늘 겁니다.”

     바란이 놀라는 것을 보고 리스트를 뺏듯이 본 해란과 세란의 눈이 또다시 한계를 넘을 정도로 커졌다.

     “후와! 뭐가 이렇게 많아!”

     “무슨 대원들이 그렇게 많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늘었어. 대원들 가족들도 있고, 본거지의 시설도 아직 갖추어지지 않아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아직 본격적으로 의뢰를 받을 정도의 실력도 아닌데다가 방어 체계를 비롯한 제반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은 관계로 지출은 모두 하룬이 감당해야만 했다. 누구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들까요?”

     하룬은 외투를 열어 지난번에 바란이 남은 돈이라면서 돌려준 골드비를 보여 주었다.

     “에잉! 그거 가지곤 어림도 없어.”

     “왜요?”

     하룬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유니온 화폐로 환산하면 10억 가까이 되는 엄청난 금액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 구입했던 식료품의 가격을 생각해 보면 리스트에 있는 물품들의 종류와 수량이 많긴 하지만 그 정도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너 물가를 잘 모르는구나.”

     “네?”

     “여기 마지막에 있는 방어 슈트를 봐라. 몇 벌이냐?”

     “20벌요.”

     “어느 정도 사양의 슈트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리어 밖에서 통할 정도라면 한 벌당 적어도 1,000만 원이 넘는다. 사양을 올리면 그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특수군들이 입는 방어 슈트의 경우 벌당 5,000만 원이 넘는단 말이야.”

     “네에?”

     하룬은 믿기지가 않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그 정도로 비쌀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기본적으로 금전 감각이 너무 부족했기에 리스트를 보고도 전체적인 액수를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에고, 해란이 네가 설명 좀 해 줘라. 난 나머지 작업 좀 마무리하고 들어올 테니까.”

     바란은 정말 몰랐다는 순진한 얼굴을 한 하룬을 향해 몇 번 혀를 차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왜?”

     하룬은 궁금함을 해란에게 풀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도대체가 넌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 보였거든.”

     해란은 한심하다는 표정과 안타깝다는 표정을 번갈아 지으면서 하룬에게 유니온의 물가와 그에 따른 암시장의 물가를 설명해 주었다.

     유니온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산업은 식품 산업이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품을 공급하는 것은 직영으로 운영했다. 작물 생산 공장과 가공 공장을 비롯해서 식량과 식품에 대한 것은 그래서 가격이 저렴했다.

     하지만 식량과 똑같이 수요가 많은 의약품은 그 가격이 식료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물론 의약품의 경우 병원과 약국을 포함한 통합 시설을 갖추고 있는 각 구역의 유니온 보건 센터를 통하면 식료품만큼이나 저렴했지만, 암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가격은 전혀 달랐다. 암암리에 빼돌리는 것이기에 그 가격은 열 배에서 심하면 백 배까지 되는 것들도 있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비롯한 기호품들과 여가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 그리고 대부분 수공으로 제작되는 각종 기계류와 무기류, 재료들의 가격도 의약품에 못지않게 높았다.

     그간 벨이 필요로 했던 각종 기계류와 정밀 기기들의 경우 가격이 높긴 했지만 비교적 소형이었고, 재료들 역시 소량이어서 그 비용이 금전 감각이 부족한 하룬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수백 명이 지낼 수 있는 마을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대부분 대용량에 고효율을 가진 기계와 기기들이다. 당연히 그 가격은 하룬이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요컨대 유니온의 물가 체계는 기본적인 삶은 보장을 하되 그 수준을 올리려면 엄청난 수입이 필요해. 예를 들어 F구역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돈이 한 달에 약 40에서 50만 원 정도라면 E구역에 걸맞은 생활을 하려면 그것의 배 이상의 수입이 필요해. 구역이 올라갈수록 기본 생활비는 거의 배로 올라가지. 물론 상위 구역에 거주하면서도 생활 자체는 최소한으로 하고 사는 주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임대료가 비싼 곳에 살면서 그 구역에서 누릴 수 있는 편의 시설이나 각종 혜택을 누리려면 F구역 기준으로 생각하면 눈이 뒤집힐 정도로 엄청난 돈이 필요해.”

     그랬던가? 어려서는 B구역에 거주한 적도 있지만 돈의 가치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기 시작하는 것은 가출을 하고 나서였다.

     “예를 들어 볼게. 우리 주식인 빵의 경우를 보면 F구역의 마트에서 판매하는 것이 하루분에 약 1만 원에서 1만 5천 원 수준이야. 하지만 C구역 주민들이 주로 먹는 데쁘 빵의 경우 약 8만 원에서 12만 원이야. 물론 A구역 주민들이 주로 먹는 나보로 빵의 경우는 약 32만 원에서 50만 원 사이의 가격이고. 물론 빵의 질감이나 맛은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가 있어 한번 길들이면 더 낮은 품질의 빵은 입에서 거부한다고들 해.”

     ‘허걱!’

     하룬은 해란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것을 본 해란과 세란은 그동안 하룬이 정말로 몰랐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각 구역에 있는 식당의 음식 가격도 마찬가지야. 조금 더 고급스러운 재료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요리사가 조리를 한다지만 그 가격은 구역마다 거의 배 정도 차이가 나. 어떤 경우는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질의 요리라도 그렇지. 그것은 각 구역마다 배 가까이 뛰는 임대료 때문이기도 하고, 적어도 한배 반 정도 차이가 나게 책정한 유니온의 최소 판매 가격 때문이기도 해.”

     “C구역 이상의 구역 주민들이 즐기는 조깅과 같은 경우를 보면, 청정 공기와 친환경으로 조성한 인공 환경을 가진 조강장의 회원권 가격이 한 달에 수백만 원이 넘으니까 F나 E구역 주민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지. 그건 한 예에 불과하고 다른 것들도 다 그래.”

     스포츠 시설의 경우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룬은 어릴 때부터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것을 꿈꾸었는데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경우가 아니라 개인ㅈ거으로 이용할 경우 1회 이용하는데 무려 10만 원을 호가하는 것을 보고 절망한 적이 있었다.

     “여가 생활을 전혀 즐기지 않는 주민이라면 몰라도 각 구역에 맞는 수준의 생활을 하고 나면 아무리 대단한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저축을 할 여유는 거의 없어. 부양가정의 경우에는 유니온이 최저가격으로 생필품을 판매하니까 좀 낫긴 하지만 일반 주민들의 경우 벌이에 맞추어 살 수밖에 없어. 결국 유니온은 소비되는 돈의 80퍼센트 이상을 다시 회수하는 구조로 경제를 통제하는 거야. 물론 그 말은 노블들이 부와 재화를 독점하고 있다는 말이고.”

     해란의 설명에 하룬은 조금은 이해가 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노블들이 유니온의 부를 독점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 제도적으로 그런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쉬쉬하지만 이 암시장 사람들이 파악한 걸로는 노블들이 코원 유니온에서 발생하는 부의 8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

     그 소리에 하룬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젠장! 난 이 금괴들을 차고 있으면서 내가 재벌은 아니라도 꽤 돈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호호호! 너 정말 순진하다.”

     “낄낄낄! 정말 웃긴다!”

     해란과 세란은 결국 하룬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 노블들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하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고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우리 코원 유니온의 원로들 가문의 경우 적어도 경 단위를 넘어서는 재산을 가지고 있어.”

     “……경? 1조의 만 배?”

     “그래. 너도 생각을 해 봐. 겉으로야 주택국이 관리하는 유니온 소유지만 실제로는 아홉 가문이 소유한 각 구역의 주거용 빌딩에서 나오는 임대료만 해도 매달 수십조는 될걸.”

     그러고 보니 그랬다. F구역의 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낡은 건물의 원룸만 해도 임대료가 한 달에 10만 원이 넘는다. 유니온에서 자기 집을 가진 비율이 2퍼센트가 안 된다는 말은 언제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 나머지는 아홉 가문을 비롯한 노블들이 나눠 가지고 있으니 그 임대료만 해도 천문학적인 금액일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상원과 하원의 의원 가문들도 최소한 수십 조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까 학생에 불과한 노블 새끼들도 한 달에 수억에서 수십억씩 쓸 수 있는 거야.”

     하룬은 관심이 없었지만 학교를 다닐 때 생각하면 패밀리를 거느린 노블들의 경우 그 패거리들에게 매달 용돈을 주기도 하고 극장이나 게임 센터, 혹은 스포츠 센터들을 다녔다.

     언젠가 급우 하나가 한 노블의 패밀리에 가입을 하고 노블에게 50만 원의 용돈을 받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것이 기억났다. 물론 노블들의 경우 대부분 A와 B구역에 있는 학교들을 다녔기에 그 구역 학생들의 수준도 높았겠지만, 학생들에게 그 정도의 돈은 적은 것이 아니다.

     나중에 거리를 떠돌 때 그 생각을 하며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럼 뭐야? 노블들이 보통 삼십에서 오십 명 정도의 패밀리를 거느렸으니 최소 수천만 원의 용돈을 매달 주었다는 이야기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노블 자제들의 한 달 용돈 정도를 가지고 마치 재벌이라도 된 것처럼 행복해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이곳의 물가 체계와 비욘드의 물가 체계가 비슷할 거야. 그곳도 수요가 줄수록 그 가격 폭이 엄청나게 뛰거든. 누가 만들었는지에 따라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고. 빵의 경우가 대표적이야. 뭐로든 공복도가 채우면 되는 유저들은 관심도 없는 이야기지만 호밀 빵의 경우 열 개에 1실버지만 설탕을 섞어 만든 밀 빵의 경우 열 개에 1골드야.”

     하룬은 해란이 기껏 예를 들어주었지만 눈만 껌벅거렸다. 직접 빵을 산 기억이 없어 현실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몸 안에 들어가면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가격 차이가 크다니.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점에서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진 하룬으로서는 그런 것이 솔직히 이해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란은 하룬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그곳은 비욘드의 메인 컴퓨터가 신의 자격으로 휴먼들의 과학 문명 자체를 막아 버렸기 때문에 더욱더 그래. 매직급 아이템도 옵션에 따라 1,000골드가 넘게 차이가 나기도 하고, 요즘 가끔 경매장에 나오는 유니크 아이템의 경우는 수천에서 수만 골드씩 나가니 말이야. 아마 비욘드의 귀족들과 이곳의 노블 출신들밖에 구입할 수 없지만 수량 자체가적으니 그렇지.”

     해란과 세란이 교대로 물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끔씩 비욘드의 비교를 하거나 각 구역 간의 상품과 가격 차이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었다.

     ‘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룬은 자신이 얼마나 좁은 세상에 자신을 가둬 두고 살았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양한 구역에서 온 손님들을 상대하는 해란과 세란의 경우라서 빨리 터득한 이치일 수도 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살아왔다면 충분히 알 수도 있는 사실을 그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저 강해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산 탓일까?’

     자신을 바보 같다고 생각하기는 싫어서일까? 금방 변명거리가 생각났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자신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자폐 증세를 가지고 세상에서 스스로 도태를 택하고 살아온 것처럼 지난 삶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여전히 자신에게 유니온의 물가 체계에 대한 예를 설명하고 있는 해란과 세란을 보면서 하룬은 지난 삶을 살아왔던 태도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였다. 양부모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더라도 먼저 주려고 시도를 했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사랑의 대상을 친구들로 바꾸든지, 그도 아니라면 뭔가에 집중을 하기라도 했어야 했다.

     ‘어느 모로 보나 난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던 거로군. 휴우! 정말 이런 것도 유전자 조작의 폐해는 아니겠지?’

     착 가라앉은 얼굴과 길게 내쉬는 한숨을 느낀 두 자매는 수다를 떨던 것을 멈추고 하룬의 눈치를 보았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눈치를 보던 해란이 화제를 돌려 하룬의 관심을 끌었다.

     “야, 하룬! 그 골드비만큼은 구입할 거야?”

     하룬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벌리면 왠지 부끄러운 속마음이 드러날 것 같았다.

     “그럼 리스트에 있는 물품들을 꼭 필요한 순서로 다시 정리해 줘. 내가 최대한 싸게 구입해 줄 테니까.”

     “그래, 나도 도와주지. 한동안 네 덕분에 우리 가게가 잘 돌아갔으니까.”

     하룬이 딱해 보였는지 해란과 세란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가만!’

     순간적으로 비욘드에 가지고 있는 돈과 아이템들이 떠올랐다. 한동안 오지로만 돌아다녀 은행이 있거나 아이템을 처분할 수 있는 성이나 도시를 들르지 못해서 아공간과 마법 배낭에 처박아 놓고 그냥 가지고만 있었다.

     그거라면 문제가 없다. 보유하고 있는 현금만 해도 무려 수백만 골드다. 거기에 아이템의 숫자들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얼굴은 겨우 여유를 되찾았다.

     ‘환시세는 많이 내렸겠지? 유저들 숫자가 늘어났고 아이템들도 늘어났을 테니까. 가만. 현시세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1만 원이라면 백만 곱하기 일만이면…… 허걱!’

     갑자기 하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해란과 세란의 궁금해 하는 눈길을 받으면서도 하룬의 입은 자연스럽게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해란아! 지금 환시세가 얼마나 되지?”

     “뭐? 비욘드?”

     “응!”

     “그야 유저들 숫자가 폭발적으로늘었고, 그들이 뿌리는 돈과 아이템이 급격히 많아져서 최근에는 골드당 8천 원 정도 될걸. 왜?”

     ‘제길! 진작 처리를 할 걸.’

     후회가 막심이다. 하룬은 진작 처리했다면 훨씬 더 많이 챙겼을 거리고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초기에는 골드당 몇 만 원을 했던 적도 있었는데, 아니, 그때는 그 정도의 돈은 없었으니 속 쓰릴 일은 아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아무튼 갈수록 환시세는 내려갈 테니 서둘러 처리를 하자.’

     원래 돈에 대해서는 담백할 정도로 욕심이 없고, 돈에 대한 감각도 없는 하룬인지라 쓰렸던 속은 금방 잊었다. 예전의 그라면 지나간 일을 몇 번이고 생각하며 후회하고 되씹고 했을 테지만 비욘드를 하며 진취적으로 바뀐 하룬은 이제 지나간 일에 더 이상 집착을 하지 않았다.

     “너희들 지금 비욘드에선 어디에 있냐?”

     “그건 왜?”

     “일단 말해 봐.”

     “음. 난 엘린 시티에 있고 세란이는 오우거 사냥 때문에 하루 거리에 있는 헌터즈 성에 있어.”

     엘린 시티가 어딘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티라는 이름을 가진 것을 보면 파이런 제국 안에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후크란 산맥을 포함한 지역은 파이런 제국의 영역 내에 있다.

     “엘린 시티면 어디지? 아니, 타우스트 남작성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거야?”

     파이런 제국이 개국하면서 전격적으로 영주제를 폐지하며 그 와중에는 기존의 성이나 영지를 모두 시티 개념으로 바꾸었기에 일부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어 하룬은 엘린 시티가 어디에 있는 곳인지 알지 못했다.

     “흠. 타우스트 남작성이라면 허브 시티로 개칭된 곳이네. 워프도 없는 곳이라 걸어야 하는데. 우리끼리 여행하는 것은 무리고…… 그쪽으로 가는 상행에 끼어 가야 하니까 20일에서 한 달 정도는 걸릴 거 같은데.”

     “오케이! 그럼 그쪽으로 와.”

     “왜? 무슨 일인데?”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

     당장 알려줘도 되지만 다른 방안이 나올 수도 있으니 일단은 속내를 감추었다. 해란은 잔뜩 궁금해 하는 얼굴이지만 단호하게 다물어진 하룬의 입매를 보고 채근하려는 마음을 접었다.

     “좋아. 어차피 게임 속에서 널 한번 보고 싶었어. 거래 스킬을 높이려고 한번 원거리 상행도 나가야 했는데 잘됐네.”

     ‘빙고!’

     안 그래도 마법사보다는 상인이라는 직업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해란이다. 어느 정도 게임을 경험하더니 역시 멋보다는 자신에게 잘 맞는 직업을 선택한 것 같았다. 해란이라면 현실과는 달리 상행위에 별로 제한도 없고, 이방인들 때문에 활성화되고 있는 상업에서 튀는 존재가 될 것이다.

     “분명히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도대체 뭔데 그래? 뭐 대단한 거래라도 있는 거야?”

     해란은 궁금한 모양이지만 하룬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이것으로 식료품과 각종 의약품 중 기본적인 것들, 그리고 재료들을 먼저 챙겨줘. 나머지는 네가 타우스트 남작성, 아니 허브 시티에 오면 구입할 자금을 줄 테니까 그때 구해 줘.”

     해란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기대가 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좋아.”

     하룬은 세란과 함께 해란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원래 바란에게 부탁을 하려 했지만 이런 거래에는 닳고 닳은 여우가 둘이나 있으니 걱정이 없었다. 바란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후후! 그래, 나보다는 저 녀석들이 더 나을 거다. 흥정하는 데 도가 튼 녀석들이니까.”

     “그러게요. 든든하네요.”

     “한 바퀴 돌고 와서 같이 술 한 잔 하자.”

     “네. 오늘은 확실하게 쏠게요. 물건들 구입하고 나서 어딜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조금 늦을 거예요.”

     하룬의 말에 바란이 활짝 웃으며 침을ㅇ 삼킬 때 해란과 세란이 끼어들었다.

     “오빠! 제정신인 거야?”

     “오늘 주문 들어온 물건 만들어야 한다고 안 했어, 오빠?”

     “아! 그렇지!”

     두 자매의 말에 바란이 안타까운 얼굴로 침을 삼켰다.

     ‘이크!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게 시간이 많은 게 아니구나.’

     진수도 만나야 했고 다른 대원들과도 만나 기지로 돌아가야 하는데 술 마실 생각을 하다니 잠시 정신이 나갔나 보다.

     “에이! 집에 가 봐야 마누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도무지 신이 나는 일이 없어서 우리 하룬이랑 기분 좋게 술이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해요, 형. 그때는 제가 제대로 쏠 테니까요.”

     “그러자. 너한테 궁금한 것도 많은데 나중에 들어야겠네. 아, 그리고 방어 슈트는 내가 알아서 최저가로 구해 주마.”

     “고마워요.”

     비록 돈을 주고 사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떤 물건이든 이렇게 쉽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하룬은 바란이 무척 고마웠다.

     둘이 몇 마디 하는 사이에 분위기를 깨 놓은 해란과 세란의 모습은 벌써 꽤 멀리 간 상태였다. 뭔가 속닥이면서 걷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다녀올게요.”

     “그래. 중간에 애들 맛있는 것도 좀 사 먹이고. 가게 때문에 제대로 남자도 사귀어 보지 못한 순진한 애들이니까 잘해줘라.”

     “후후! 알았어요.”

     나이 차이가 꽤 나서 그런지 바란은 해란과 세란을 딸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아무리 하룬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그녀들이 남자 한 번 못 사귀어 본 순진한 부류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녀석들은 좋은 오빠를 가진 것을 알까?’

     바란의 그 마음을 탓하거나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형제간의 따듯한 정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푸근해졌다. 예전이라면 마냥 부럽기만 했을 텐데 이제 자신에게도 벨과 대원들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은 여유로워진 느낌이다.

     구입해야 할 물건들의 종류도 많고 그 수량을 있는 자금 한도 안에서 맞추어야 하기에 암시장을 몇 바퀴나 돌고 나서야 겨우 쇼핑을 마쳤다. 졸지에 짐꾼이 되어 두 여자 뒤를 따라다니던 하룬은 저녁 식사 직전까지 이어진 쇼핑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게다가 장 보는 사이사이 군것질은 얼마나 많이 하던지 점심 식사는 아예 걸러야만 했다. 그렇게 많이 먹고도 그 몸매를 유지하는 해란이 정말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호호! 이 꼬치 정말 맛있다.”

     “이 샤베트야말로 최고지.”

     암시장 곳곳은 먹을 것 천지였다. 기존보다 사람들의 내왕이 확 줄었다고는 하지만 이 일 이외에는 마땅히 할 일을 찾을 수 없는 상인들은 꽤 많았다.

     “아저씨, 내가 아니었으면 이 손님 다른 데로 갔을 거예요. 나에게 빋진 거 잊으면 안 돼요!”

     “알았다. 전이라면 몰라도 요즘 같으면 한 달 매상을 네가 올려줬으니 내 알아서 보답하지.”

     “호호호! 나중에 들를게요.”

     해란과 세란은 번갈아가며 대형 거래를 한 상주들에 하룬 모르게 훗날 리베이트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뛰어난 감각을 가지게 된 하룬에게 다 들렸지만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손해를 봐도 좋으니 되도록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해란이나 세란이가 알아서 가격을 후려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그 정도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휴우!”

     도대체 하루에 얼마나 많이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흥정이란 것은 정말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의례적인 인사에 이은 튕김과 당김의 묘미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광경이라고 해란이 잘 챙겨서 보라고 했지만, 비욘드를 통해 겨우 정상적인 대인 관계를 시작한 하룬에게 그 광경을 통해 뭔가를 배우고 느낀다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그렇게 암시장을 몇 바퀴나 돌며 구입한 것들은 모두 청포 상회의 창고로 배달을 시켰다.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던 것이다. 나중에 일행과 함께 가져갈 것이다. 다행히 그녀들이 도와준 덕분에 몇 개의 비싼 물품을 제외하고는 수량을 줄여서라도 모두 구입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손님이 줄어들어서 꽤 싸게 살 수 있었어.”

     “그래. 너 우리에게 단단히 대접해야 돼. 다른 때 같았으면 같은 돈으로 절반도 구입하지 못했을 거야. 너 혼자 왔다면 그 절반도 안 됐을 것이고.”

     도와준 것은 고마운데 자꾸 티를 내니 나중에는 화가 나려고 했다.

     “알았다! 내가 꼭 이 은혜를 갚도록 하지. 뭐든지 말만 해!”

     “흐읏! 정말?”

     “그래, 말만 해. 나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사람이니까. 물론 내 능력 범위 안에 있는 부탁이라야 해.”

     “끼앗! 오케이!”

     하룬의 말에 해란과 세란은 눈빛을 교환하며 기뻐했다.

     ‘그래 봐야 그 비싸다는 식당에 가자는 이야기겠지.’

     바란이 이미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둘이 그곳엘 꼭 가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곳이라지만 이 정도로 도와주었으니 못 데리고 갈 것도 없었다.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맛 따위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얼마나 끝내주는 시설을 가진 곳인지는 조금 궁금했다.

     암시장을 나와 구역 사이에 있는 게이트를 통과할 때는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팔에 이식한 주민 칩이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상황이다. 정상적으로 처리가 되었다면 그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되었을 테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하룬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범죄자가 된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게이트에 늘어선 방위군들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달려올 것 같은 긴박함과 위협감을 느꼈던 것이다.

     ‘제길! 이 짓도 할 게 못 되는군. 뭐, 걸리면 튀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자 비로소 몸과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자신의 메신저 스킬이라면 무거운 슈트를 입은 방위군들은 절대로 따라오지 못한다. 더구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쏘우가 알려준 언더 시티로 가는 길도 숙지해 놓은 상태였다.

     “통과!”

     그 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쏘우 형님 실력 괜찮은데.’

     하룬은 위조된 주민 칩이 살짝 붙어 있는 인공 피부를 한번 보고는 진수의 집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이미 저녁 시간이 된 터라 하늘의 자장 도로는 바쁘게 움직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들도 하나둘씩 불을 밝히고 있었다.

     “형!”

     “하하! 우리 대장, 정말 안 걸리고 여기까지 왔네. 어서 와!”

     미리 통화를 했던 터라 진수는 집 밖 멀리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직접 목소리를 듣고서도 안심을 하지 못하고 마중을 나온 진수의 마음에 하룬은 그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잘 지냈지요?”

     “그럼. 나야 잘 지냈지.”

     하룬은 진수와 함게 그의 집으로 가는 동안 화재가 난 후에 일어난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소방 호스가 여섯 개나 동원됐어. 전소가 된 데다 너를 포함해 몇 구의 사체와 주민 칩이 나와 몇 번이나 경찰국을 비롯한 여러 기관들이 다녀갔어. 나를 포함해서 이웃들도 소환되거나 인터뷰를 해야만 했지.”

     “형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네요.”

     “아니야. 그깟 게 무슨 고생이라고. 제대로 건진 것도 없이 배리어 밖으로 쫓기듯 나간 대장이 더 고생이었겠지. 아무튼 다들 아는 것이 없다고 진술했고, 그렇게 사건이 종결되었나 봐. 저기 봐라. 벌써 단층이지만 임대료를 받아 처먹으려고 주택국에서 집까지 지었잖아.”

     그러고 보니 화재가 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단층의 투박한 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제대로 기초공사도 하지 않은 허술한 모습이다.

     ‘잘됐네!’

     단층인 데다 기초공사를 부실하게 했으면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존재와 지하 도로의 존재가 노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존재가 노출되었다면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마그네틱 슈퍼 카로 이동할 수 있는 지하 도로를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화재로 인해 메워졌던 곳을 뚫고 새로 자장 발생 장치를 설치해서 예전에 쓰던 엘리베이터와 지하 도로를 사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화재가 난 집이고 보기에도 허술한 터라 아직 임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집도 오랫동안 미계약 상태로 있었던 곳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형! 당장 저 집 임대해요. 형 친구 중 아무나 계약하면 되잖아요.”

     “그거야 문제가 아니지. 근데 왜?”

     “저 집 지하에 유니온 밖으로 통하는 지하 도로가 있거든요. 나중에라도 이용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그래? 이름 빌려 계약하는 거야 어려울 게 없지. 당장 내일 그렇게 할게.”

     이 집은 예전에 의도했던 대로 대원들의 유니온 아지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유니온 자체가 방사형으로 건설되었으니 S구역까지 지하 도로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지 않고 게임 속에서 보거나 화상 통화를 통해도 되지만 직접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왔더니 그 와중에 정말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지하 도로를 활용하면 가장 신경 쓰이는 방위군을 피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제는 아예 유니온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오르그들의 이목도 피할 수 있으니 앞으로 돌풍 용병대가 주로 하려는 물건 운송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진수의 집으로 들어간 하룬은 진수가 정성을 들여 만든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그동안 서로 지냈던 일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진수는 현실에도 돌풍 용병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기지의 존재를 들은 진수는 당장이라도 친구들과 함께 이주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하룬이 말렸다.

     “형과 친구들은 유니온 안에서의 일을 맡아줘야 해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이곳에서 할 일이 많을 거예요.”

     “그래. 어차피 나와 내 친구들은 전투 같은 일은 소용이 없을 테니까 이곳에서 대장을 돕는 게 낫겠지.”

     진수는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선선히 하룬의 말을 따랐다.

     진수는 친구들과 여전히 스카이루프 산맥에 있었다. 그동안 던전도 두 개나 찾아내서 다들 레벨이 100이 넘는 개가를 이루었고 지금은 원래 목표로 했던 잊힌 왕국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다고 했다.

     “녀석들이 비욘드에 푹 빠져 있어.”

     그러고 보니 진수의 친구들은 이 시간에도 게임에 접속해 있는 것 같았다.

     “쉬엄쉬엄 즐기면서 해요, 형.”

     “후후! 그러고 있어. 그나저나 나도 이 게임에 이렇게 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찌나 사실적인지 이제는 현실이 마치 게임처럼 어색하다니까. 이게 다 우리 하룬 대장 덕분이야.”

     “무슨 소리에요?”

     “대장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넓고 쾌적한 환경에서 최상급 캡슐로 돈 걱정 안 하고 게임을 즐길 수 있겠어?”

     “그거야 형이 모욕을 당하며 고생하며 번 거잖아요.”

     “아니야. 내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악을 쓰고 노력해도 이 세상은 노블로 태어나지 않으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허망하게 스러지게 되더라. 버는 만큼 쓰게 만들어진 사회구조라 이런 생활을 계속 유지하려면 그만큼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는데 대장 덕분에 한 방에 거금을 챙겨 이런 생활이 가능하잖아.

     “그거야 형이 욕심이 없어서죠. 마음껏 쓰면 그 돈 가지고도 얼마 버틸 수 없는 세상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1억이라도 하루에 다 쓸 수 없는 세상인데 뭐. 너나 나나 워낙 먹고 입고 즐기는 것에 관심이 없는 특이한 보더러라 다른 데 돈이 들어가질 않으니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지.”

     진수는 하룬이 오늘에서야 깨달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거금을 가지고 있으면서 쓰지 않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을 매혹시키는 술이나 마약이나 육신을 쾌락의 노예로 만드는 여자에게 가진 돈을 펑펑 쓰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가진 것을 모두 소비하도록 만드는 사회구조에 길들여진 까닭이다. 저축을 한다고 생활이 나아진다는 희망 같은 것은 없다는 현실을 일찌감치 알게 되니 저축 따위는 할 일이 없었다.

     하룬은 한동안 진수와 밀린 이야기를 나눈 후에 밖으로 나왔다.

     “일단 형은 하던 일을 마저 해요. 돌풍 용병대는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아직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으니까요.”

     “알았어, 대장. 내가 대박 하나 제대로 터트릴 테니 수련이나 하면서 기다려.”

     “하하하! 알았어요. 형만 믿고 있을게요.”

     “믿으라고. 감이 온단 말이야. 엄청난 것이 곧 내 눈에 뜨일 거란 확실한 감이니까 기대해도 돼.”

     “하하하! 듣기만 해도 좋네요.”

     하룬은 진수의 감 이야기에 크게 웃으며 작별을 했다. 이제 암시장으로돌아갈 시간이었다. 대원들도 지금쯤이면 창고 근처로 도착했을 것이다.

     ‘헤니가 백사회 회원들을 얼마나 데리고 올까?’

     뭐, 나중이라면 몰라도 오늘 당장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허접스러운 현실이라도 막상 버리려면 미련이 남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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