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아리와의 재회 (140/278)

《아리와의 재회》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현실로 나온 하룬은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 아리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네. 마스터, 정말 보고 싶었어요.”

 아리는 예전의 그 아리가 아니었다. 외모는 예전과 별로 바뀌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같은 용모면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잇는지 그야말로 불가사의했다.

 옷이 바뀌어서일까? 아니면 그 분빛과 태도 그리고 표정이 달라져서일까? 8등신의 섹시한 몸매는 길고 풍성한 흰옷으로 바뀌어 더 이상 드러나지 않았다. 같은 눈과 코, 입 이면서도 어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예전의 그 화려하고 강렬한 미모가 아니라 청초하면서도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아리의 모습에 하룬은 가슴이 뛰었다.

 첫사랑으로 생각하는 홀의 모습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것이다.

 “많이 달라진 거 같아.”

 “그런가요?”

 “……으응.”

 이전의 폭발적인 여기가 흐르는 짙은 웃음이 아니라 작은 미소 한 조각을 떠올린 아리의 수줍은 모습에 강한 이끌림을 느끼고 당황하는 하룬이다.

 “맘에는 드시나요?”

 “……응. 아주 좋아 보여.”

 “고마워요. 사실 깨어날 때까지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당황하면서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하룬을 보며 이젠 정말 안심이 되는지 아리는 배시시 웃었다.

 ‘헉!’

 순간적으로 심장 박동이 커졌다. 거칠게 뛰는 방동이 귀에 들릴 정도였다. 가슴이 진탕된다는 말이 어떤 경우를 묘사한 것인지 처음으로 알 수 있엇다.

 “후훗! 언니,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벨의 말에 아리는 얼굴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눈을 반달로 만들었다. 뭔가 둘 사이에 나누었던 말들이 있었나 보다.

 “험! 그래. 아르만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많은 것을 배우려고 했다고?”

 “네. 제 본체, 아니 아즈만에게 부탁해서 마스터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뇌파 전달 방식으로 배웠어요.”

 “고마워!”

 감사의 말에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아리의 태도를 통해 그녀가 다시 깨어나기까지 얼마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언니가 오빠를 위해 각종 전투 기술들은 물론이고 요리와 미용, 꽃꽃이까지 배웠대.”

 “그, 그래?”

 당황스럽다. 벨이 뭔가를 노리고 자꾸 아리를 내세우는것 같은데 그 속셈을 잘 모르겠다. 아리는 자신이 쳐다보는 시선이 뜨거운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부끄러운 듯 옷매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후! 덥다!’

 분위기를 바꾸어야 했다.

 “아, 참! 대원들은 어디까지 왔어?”

 그 말에 아리가 즉각 탁자 위에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약 12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왔어요.”

 위성과 연결된 홀로그램 스크린을 확인하며 조신하게 대답하는 아리를 보며 하룬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어색한 것이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전 모습보다는 낫긴 해.’

 어쩌면 아리는 자신이 비욘드를 통해 변모한 여성상에 마추어 새로운 모습으로 스스로를 세팅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욘드를 하기 전에는 유니온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렇듯 화려한 미모에 굴곡이 뚜렷한 여인이 이상형이었지만, 여러 명의 여자들을 만나고 홀과의 풋사랑을 경험한 하룬의 이상형은 바뀌었다.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청순미와 함께 조용하면서도 내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여자에게 끌렸다. 또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진취적인 기질을 가진 그런 여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잇다.

 홀에 그랬고 헤니가 그랬다. 물론 헤니와는 그런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지만 말이다. 그녀들은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목표로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하룬은 그런 모습에 끌렸던 것이다. 그걸 아리는 감지했는지 이전의 화려한 모습 대신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벨, 준비는 어때?”

 하룬의 시선은 또 다른 홀로그램 창을 띄우고 뭔가를 확인하는 벨에게 향했다.

  

 “호수 연안의 기지 지하 12층까지는 이미 깨끗하게 치우고 대폭적으로 시설을 바꾸었어. 내일까지는 오빠가 말한대로 용도별로 필요한 물건들을 들여놓을 수 있을 거야. 아리 언니, 침대를 비롯한 각종 생활용품 제작은 어때?”

 “내일까지는 네가 원하는 수량은 맞출 수 있을 거야. 새로 태어난 형제들이 나의 지휘를 받아 한창 만들고 있어. 이 일 때문에 네 명은 전투형에 더해 과학적 지식과 기술, 그리고 작업 감각을 심어 주느라고 이 언니가 추가 작업을 했단다.”

 하룬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벨과 아리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녀들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고 있엇다.

 한창 새로 합류할 식구들을 위해 기존의 기지를 재정비하는 중이다. 일부러 파괴했던 층들도 있지만 원래 골조 이외의 크게 중요한 시설들은 없던 곳들이라 작업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기지 내부를 어떻게 개조한 거야?”

 “낙뢰로 파괴되었던 발전 시설들은 이미 수리가 끝나 가동에 들어갔고, 지상과 지하 1층은 작풀 재배 시설을, 지하 2층은 오빠의 집무실과 우리 둘의 집무실을 비롯해 대회의실과 소회의실로 꾸몄어. 3층은 대원들의 숙소와 연무장, 4층은 각종 연구실과 기지 통제실과 위성을 연결하는 통신 센터로 만들었어. 그리고 5층은 식당, 지하 6층부터 10층까지는 주거시설로 꾸며 최대 1,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개조헀고, 11층은 각종 물품 제작 시설, 12층은 창고 시설들로 만들었어.”

 “정말 수고가 많았다.”

 다행이다. 그가 비욘드에서 딜런과 함께 수련을 하는 동안 벨과 아리가 무척 고생이 많았다. 비록 아즈만이 만들어 낸 사이보그 20기가 제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하룬이 마음 쓸 일이 없도록 말끔하게 이 큰일을 해낸 벨과 아리가 자랑스러웠다.

 “오빠. 그럼 내일 오전까지는 도착하겠지?”

 “그래. 오늘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좀 늦긴 했지.”

 현실은 벌써 늦은 오후이니 밤을 도와 이곳까지 오진 않을 것이다. 대원들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노인들과 아이들이 섞인 영흥 마을 주민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조금 서둘러야겠네?”

 “그래 줄래? 영흥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주거지에 불안한 상태라서 될 수 있으면 도착했을 때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할 거 같아.”

 “알았어, 오빠. 새로 태어난 대원들이 완전히 적응한 것 같으니까 가능할 거야. 특히 대산이 이런 일에 아주 능해서 큰 도움이 되고 있어.”

 벨이 말한 대산은 새로 태어난 20명의 사이보그 중 한 명으로 탄생 과정에서 이미 많은 것들을 학습해서 리더로 지정된 대원 중 한 명이다. 미리 아즈만에게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엇다. 다섯에 하나는 각 분야 리더로서의 소양과 지식을 미리 학습시켰던 것이다.

 “잘했어. 도착하면 피곤하기도 할 테니까 철저하게 준비해.”

 “알았어, 오빠.”

 벨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꼼꼼하게 다시 체크하기 시작했다.

 “근런데 오빠!”

 “뭐?”

 “식량이 많이 필요해. 이곳과 구기지의 작물 재배실의 규모로 최대 천 명까지는 감당할 수 잇지만 당장 몇 달 동안은 부족하거든 만약을 위해 각종 약품도 필요하고.”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그저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인원수가 많아지니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일단 필요한 것들을 리스트로 정리해 봐. 시간이 되는 대로 유니온에 다녀와야겠다.”

 “알았어.”

 벨과 아리는 아즈만과의 공조를 통해 필요한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휴먼으로 재탄생 했지만 그녀들은 아즈만과는 뇌파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거나 지식을 전해 받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든 작업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 이 기지는 사용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어차피 호수 연안의 구기지에 마련한 각종 시설만으로도 지내기에는 충분해.”

 벨의 의견에 두 사람도 동의했다.

 “난 찬성. 아즈만이 그곳까지 통제할 수 있으니 이쪽은 드러내지 않앗으면 좋겠어.”

 “나도. 사실 이 정도 시설과 기능을 가진 기지의 존재를 안다면 우리 정체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더구나 아직 다 믿을 수 잇는 사이도 아니니 조심하는 편이 낫겠지? 당분간 이곳은 우리 세 사람의 비밀로 하자.”

 이곳은 하룬이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믿음이 생긴 다음 이 기지의 능력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긴 여정으로 인해 사람들은 물론 짐을 잔뜩 등에 진 라나두들도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엇다. 누구 할 것 없이 짐을 바리바리 진 사람들은 마치 피난민을 연상케 만들었다. 뭐, 피난은 피난이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하룬은 사이보그 대원들과 함께 1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대원들과 영흥 마을 주민들을 마중 나갔다. 하룬의 얼굴을 본 사람들의 피로한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제야 편히 쉴 곳에 온 것이다.

 “고맙습니다. 난 촌장을 맡고 잇는 우암이라고 합니다.”

 턱에 흰 수염이 드문드문 난 우암은 전사 출신으로 50대 후반의 나이완 달리 강렬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강직한 인상의 촌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온 터라 눈빛이 무척 복잡해 보였다.

 ‘과연 전사 마을의 촌장답구나.’

 용광로 마을이나 사이언스 마을과는 달리 영흥 마을 주민들은 장기간의 이동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얼굴을 두른 천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대산! 대원들과 함께 짐을 나눠 들어.”

 하룬의 말에 같이 온 십여 명의 대원들은 노약자들이 든 짐을 받아 들었다. 다들 기본적으로 전투형 사이보그로 설계되었던 탓에 괴력에 가까운 근력을 가진 터라 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짐을 졌지만 힘들지 않게 걸었다.

 대원들에게 무거운 짐을 넘긴 여자들과 아이들은 설렘과 기대 가득한 눈길로 호수를 쳐다보앗다.

 하룬도 꽤 무거운 짐을 나눠 들고 기지로 향했다.  그런 그의 곁으로 황 박사가 다가왔다. 긴 천으로 노출된 곳을 두른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양손에 짐을 든 상태였다.

 “수고하셧습니다, 박사님.”

 “아니오, 대장. 정찰용 매 덕분에 오르그들을 피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위험은 없었소.”

 “그게 아니라 촌장님을 설득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우암 촌장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고집이 세고 완고해 보였다.

 “하하하! 그래서 힘없는 이 늙은이를 일부러 그곳에 보낸거군.”

 차기 촌장인 로수와 아직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인이 설득했겠지만 믿음을 주는 황 박사를 그래서 동행시긴 것이다. 박사 역시 그런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어려울 건 없었소. 단지 아주 시기가 너무 급박해서 문제였을 뿐. 마을에 가 보니 그 환경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더이다. 해안을 타고 북쪽에서 내려온 오르그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상황에서 마을을 둘러싼 목책들은 여기저기 부서져이써 황패한 식물들도 오르그들과 야생동물 때문에 엉망이 된 터라 반드시 이주해야 할 상황이었소.”

 “혹시 전투라도 있었던 겁니까?”

 “우리가 가기 전에 소수의 오르그 무리들이 두 번 쳐들어 왔다고 했소. 마을 주민들이 전사 출신이 많고 그 기질이 강인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힘을 합쳐 막아 내긴 했지만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에는 우리가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소.”

 “어떻게 됐습니까?”

 하룬은 걱정이 되어 아까 대충 보앗던 대원들의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태범 대원의 귀신과 같은 사격 솜씨와 쏘우가 만들어 낸 폭탄, 그리고 우리 대원들이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100마리에 이르는 오르그 놈들을 몰아냈소.”

 어찌 대원들과 마을 주민들 간에 어색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 같이 생사를 걸고 힘을 합쳐 오르그들과 싸웠으니 없던 동지애까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 바람에 오래 설득할 일도 없이 당장 짐을 싸기 시작해서 올 수 있었던 거요. 그나마 무거운 기계류를 모두 버리고 왔기에 이 정도로 왔지, 아니었으면 두 배는 더 걸렸을 게요.”

 “아무튼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대장. 내 비록 나이는 먹었어도 명색이 돌풍 용병대원인데. 나 아직 짱짱하오, 저기 허여멀건 한 낯빛을 한 쏘우와는 다르단 말이오.”

 “하하하! 알겠습니다.”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엄청난 짐을 실은 바이크를 몰아 가까이 온 쏘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거참, 대장 앞에서 내 욕을 한 거요?”

 “그래, 했다.”

 “에이, 씨!”

 “허, 어른 앞에서 그게 무슨 버릇없는 행동이야!”

 “제길, 알았소. 욕을 하든지 흉을 보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쏘우는 성질을 부리려다가 꾹 참고 앞서 나갔다. 성격이 만만치 않은 사람인데 이렇게 꼬리를 마는 것을 보니 그동안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다. 

 황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기지에 도착했다. 벨과 아리가 다른 대원들을 끌고 나와 일행을 반겼다.

 영흥 마을 주민들은 물론 대원들도 난데없이 나타난 벨과 아리에게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이 아이는 벨로 내 동생입니다. 이제까지 용병대 살림을 맡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가씨는 용병대의 제정과 의로를 맡아 왔습니다. 아리 역시 우리 남매와 오래 같이한 사이로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직 호수 중심의 기지는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만약을 위해 미리 그 직무를 이야기해 두었다. 다들 기존에 돌풍 용병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알고 있으니 자신들이 굴러온 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나이가 어린 두 사람을 존중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벨이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아리입니다.”

 하룬의 소개에 벨과 아리가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지금은 길게 인사를 나눌 데가 아니었다. 비록 피곤한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미모를 가진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큰 관심을 표했다.

 “일단 안드로 들어가지요.”

 자외선이 가장 강력해지는 정오였던 것이다. 하룬은 일단 사람들을 지하 2층의 대회의실로 안내했다.

 “와아!”

 “굉장히 넓다!”

 지하 2층에 만든 대회의실은 무척이나 넓었다. 하짐나 짐과 함께 들어온 사람들로 인해 금방 꽉 차 버렸다. 사람들은 짐을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벨과 아리는 가족 단위로 파악을 해서 머물 곳을 좀 안내해 줘. 나인이가 마을 사정을 잘 알 테니 좀 도와주고. 아, 그리고 태연과 헤니도 같이 좀 거들면 좋겠어.”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나인과 헤니는 흔쾌히 하룬의 말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벨과 아리를 바라보는 나인과 헤니의 눈길에 호기심과 함께 강한 호감이 깃들었다.

 태연을 비롯한 태가사 남매는 새로 태어난 후배 대원들을 보며 하얀 이빨을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보니 이번 여행을 통해 태가사남매가 어느 정도 휴면체로서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태산을 비롯한 기존 대원들은 벨과 아리의 지시를 받아 사람들을 거주할 곳으로 안내해 드려.“

 태산을 비롯한 20명의 사이보그 대원들이 큰 소리로 대답을 하며 벨과 아리 옆으로 나왔다.

 곧 벨과 아리가 가족 단위로 지정해 준 층과 호수를 안내받은 사람들은 대산을 비롯한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지내게 될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부푼 기대와 설렘을 안고 하나둘씩 대회의실을 빠져나가니 어느새 대원들만 남게 되었다.

 “벨, 대원들 방도 지정해 주어야지.”

 “응, 오빠. 이미 생각해 두었어. 혹시 언니 오빠 들 중에서 혼자 방을 쓰고 싶은 분 있나요? 1인실과 2인실 그리고 4인실이 있는데 제가 구성한 거로는 2인 1실을 기본으로 했거든요.”

 “껄껄!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씨도 예쁘군. 내가 이렇게 귀엽고 예쁜 숙녀에게 오빠라고 불릴 날이 있을 줄은 몰랐네.”

 황 박사가 농담을 하며 나섰다.

 “이 늙은 오빠는 혼자 방을 썼으면 하는데. 한번 책을 잡거나 연구를 시작하면 주변이 무척 신경 쓰여서 말이야.”

 “네 박사님. 우리 대원들은 3층이 숙소예요. 303호를 쓰시면 돼요.”

 “고마워, 벨. 그럼 난 좀 씻어 볼까.”

 황 박사는 기분 좋은 얼굴로 아래층으로 향했다.

 “벨, 난 쏘우라고 하는데…….”

 “아! 오빠 알아요.”

 활짝 웃으며 알은체를 하는 벨의 태도가 뜻밖이었는지 쏘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과학자이며 발명가시라죠. 캡슐 개조도 가능한. 오빠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처음 봤지만 귀여운 소녀가 자신을 금방 알아보고 반기는 태도와 하룬이 자신을 좋게 말했다는 말에 쏘우의 입이 귀까지 걸린다.

 “그래? 후후! 뭐, 닥치는 대로 좀 하긴 하지. 나중에라도 말해. 필요한 물건이 잇으면 다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런데 나도 혼자 지내던 버릇이 있어서 말이야.”

 “호호! 알았어요. 304호를 쓰세요.”

 “벨이라고 했지? 정말 귀엽고 예쁘다. 대장이랑은 하나도 안 닮앗는데.”

 쏘우가 휘파람을 불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나머지는 모두 2인실이 배정되었다. 3층의 방은 모두 스무 개로 1인실이 일곱 개에 2인실이 열 개, 그리고 4인실이 세 개여서 별 문제는 없었다.

 “자, 피곤할 텐데 일단 씻고 다시 이곳에서 봅시다.”

 여행을 다녀온 대원들은 우르르 몰려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5층의 식당으로 가서 준비하자.”

 여행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피로를 푸는 데는 맛있는 음식과 안락한 잠자리가 최고다. 다른 사람들이 쉬는 동안 남은 대원들은 식당에서 요리를 해야만 헀다.

 “와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801호실로 들어선 쿠미의 입에선 탄성이 흘러나왔다. 화장실이 딸린 큰 거실과 방 두 개에 화장실이 따로 잇는 집은 전에 살던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록 재생품을 이용해서 급조한 것이지만 옷장과 서랍장은 물론 침대까지 갖추어진 방은 무척 컸다. 더구나 쾌적한 실내 환경을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홈컴 시스템은 물론 전기히터를 이용한 조리실과 푹신한 소파로 꾸며진 거실은 쿠미에게는 꿈에서도 꾸어 보지 못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어머, 세상에!”

 뒤따라 들어온 엄마는 안방과 조리실 그리고 한쪽에 마련된 세탁실을 둘러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시설들은 물론 평생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예쁜 조리기구와 그릇들에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이게 홈컴이군.”

 오른팔을 일고 마을 구석구석을 손보는 일을 했던 쿠미의 아빠는 예전에는 전사로 유니온을 자주 드나들며 각종 기기들을 구경해 보았기에 대번에 홈컴을 알아 보았다.

 이제 열네 살의 쿠미는 짙게 탄 얼굴에 그 또래의 소녀치고는 단단한 근육을 가진 꿈 많은 소녀다. 호위 전사로 상행을 따라나섰다가 오르그들의 습격을 받아 팔 하나를 잃은 아버지와 살인적인 뙤약볕에도 긴 수건으로 드러난 살을 가리고 한 시간에 20분 휴식의 위험한 농사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억척스러운 엄마 그리고 이번에 용병대원이 된 열아홉 살의 오빠가 있엇다.

 “엄마! 내, 내 침대도 있어!”

 쿠미는 침대에 올라가 방방 뜨며 신이 나 외쳤다. 너무나 좋아하는 쿠미의 웃는 소리에 달려온 엄마는 딸만큼이나 좋았지만 자신의 기분을 감추고 소리를 질렀다.

 “침대 내려앉겠다. 빨리 내려와!”

 침대가 생긴 것은 자신도 신이 났다. 아마 남편이 없었다면 자신도 쿠미처럼 탄성을 지르며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한 시간 후에 다시 모이라고 했으니 어서 씻도록 합시다. 집안 구경은 나중에 찬찬히 하도록하고.”

 그렇게 말하고 먼저 욕실로 향하는 남편의 딱딱한 얼굴에도 좀체 보기 힘든 미소 한 자락이 떠올라 있었다.

 정들었던 마을을 떠나 도착한 유니온 냄새가 풀풀 풍기는 기지 안의 집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네 식구가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이주를 한다고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생활용품 상당수는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쿠미의 엄마가 처음 보는 새왈 기기들을 하니씩 시험하고 있을 때, 쿠미는 밖으로 나갔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인지 확인도 해야했고, 친구들과 이 벅찬 기쁨을 수다로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도대체 불이 나오는 곳이 어디야?”

 쿠미의 엄마는 조리실에서 이것저것을 찾았지만 가장 중요한 불은 찾지 못했다. 그런 걸 써 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생김새로도 그녀가 평상시 쓰던 화덕을 닮은 기구는 하나도 없엇던 것이다.

 “혹시 조리 시설은 미처 못 만들었나?”

 “껄껄껄!”

 그녀가 당황해서 혼잣말을 하는데 뒤에서 남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상을 입기 전과 아들이 마을의 전사로 선발되었을 때 듣고 못 들었던 밝은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왠지 그녀의 기분을 자극했다. 상황이 그래서엿다.

 “뭐예요?”

 날이 선 아내의 물음에 크고 깨끗한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으며 다가온 쿠미의 아빠가 표정을 감추었다.

 “저기 사각형으로 된 곳이 보이지?”

 “그런데요?”

 “그 밑에 버튼이 있잖아. 첫 버튼은 불을 끄는 거고 나머지 세 개는 불을 켜는 거야. 물론 순서대로 열기의 세기가 올라가지. 불은 아니지만 전기로 열을 내는 장치야. 유니온에서는 다들 이걸로 요리해. 당신도 써 보면 금방 손에 익을거야. 불길이 치솟지 않아 화상을 입을 일도 없고, 조리하던 음식이 끓어 넘치면 자동으로 꺼지니까 안전해.”

 그 역시도 젊은 날 유니온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기기르를 처음으로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쳇! 별것도 아니구먼.”

 드물게 자상한 남편의 설명에 그녀는 미처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시험 삼아 버튼을 눌렀다. 남편의 말대로 진짜로 열기가 올라오는지 그 위에 손바닥을 가까이 대는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 갔다.

 “정말 편하네.”

 “하하! 떠날 떄는 싫다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더니 여기에 온 지 30분도 안 되어 웄는군.”

 “칫! 누가 이런 곳인지 알았어요. 알았다면 당장에 보따리를 쌌겠지.”

 아내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 쿠미의 아빠가 살포시 그녀를 안았다. 비록 자신이 마련한 곳은 아니엇지만 이제 아내가 고생할 일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엄마! 아빠!”

 잠시 밖에 나갔던 쿠미가 달려 들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분위기를 잡으려던 부부는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조심해! 넘어지겠다.”

 아니나 다를까 발이 휘청하더니 고꾸라지려는 쿠미가 간신히 몸을 세웠다.

 “좀 조심하지. 수련할 때도 그러더니.”

 “아빠! 엄마! 다른 집들에 가 봤는데 다들 끝내줘.”

 “그래?”

 안 그래도 다른 집들은 어떤지 궁금하던 참이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순례를 하며 서로의 집을 구경하게 될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우리 집이 제일 좋아.”

 “그래?”

 쿠미의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그 사실을 확인했다. 별다를 것이 없는 살림살이겠지만 그래도 다른 집들보다 좋다는 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미리네 집은 방도 두 개밖에 없고 우리 집보다 더 좁아.”

 “그야 그 집은 식구가 둘이니까 그렇지.”

 “몰라. 그래선지 아니면 다른 애들 말대로 오빠가 대원이라서 그런지, 내가 가 본 집들 중에서 우리 집이 가장 넗고 갖추어진 가구들이나 시설이 가장 좋은 것 같아.”

 “호호! 그러니? 네 오빠가 대원인데 그거야 당연하지.”

 영흥 마을은 다른 아우터 마을처럼 공동체 생활을 근간으로 하기에 다른 집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경제활동을 하는 가족 수나 마을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차별은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차이가 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적이 잇는 가정과 없는 가정에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그 미묘한 차이는 나름대로 자신이나 가족에 대한 자긍심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이들에게 자극을 주기도 한다. 그런 차이가 없다면 그건 휴먼이 아닐 것이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당신과 쿠미도 어서 씻어. 식당으로 오라고 했으니 음식이 준비되어 있을 거야. 우리 아들 덕분에 어디 포식 한번 해 보자고.”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춘 집을 제공했으니 음식의 질 또한 유니온에서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마을에서야 그저 배를 채우면 만족했지만 이곳이라면 다를 것이다.

 “호호! 그래요. 우리 아들 덕 좀 한번 볼까요.”

 쿠미 엄마는 집 안에서조차 계속 통통거리며 뛰고 있는 쿠미를 잡고 욕실로 향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미리 안내를 한 대로 사람들이 5층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몸을 말끔하게 씻고 새 옷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은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하룬은 힘들게 이곳까지 온 영흥 마을 주민들과 수고한 대원들을 위해 술과 먹을거리를 준비했다. 새로 태어난 사이보그들이 긴 탁자 위에 늘어놓은 음식들을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피로의 빛이 사라져 있었다.

 “와아! 술이다!”

 “하하! 맥주도 있어.”

 “어디? 정말이네.”

 젊은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술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배리어 밖에서 제대로 된 술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니온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생필품이 아니라 기호품으로 간주되면그 가격은 엄청났던 것이다. 간접세가 9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많이 붙는 터라 D구역 이하 주민들은 술을 먹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아이들은 과자류와 사탕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평소에는 거의 먹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기에 다투어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엇다. 유니온에서 구해 온 식료품 중에 그것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많이 드십시오.”

 하룬은 마을의 원로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비록 콩류로 가공해서 만든 인공 육류지만 씹는 질감이나 맛은 거의 같았기에 접시 위에 수북하게 쌓아 놓은 불고기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목울대를 움직엿다, 빵 대신 예전 식으로 준비한 밥을 보는 원로들의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

 “허허허! 밥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쌀은 귀한 음식이었다. 쌀은 강렬한 일사량과 오염된 환경, 그리고 시시각각 부는 자장풍으로 인해 자연 재배를 할 수 없는 작물이기에 배리어 밖의 환경에서는 영흥 마을 사람들도 1년에 몇 번 먹을까 말까 한 것이었다.

 김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료인 배추를 비롯한 각종 양념들 역시 자연 상태에서 재배가 거의 불가능했기에 쌀과 마찬가지로 유니온에서도 귀한 식품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상행을 따라다니느라 검게 탄 원로들의 노안에 감격이 어렸다.

 불고기와 밥 그리고 김치와 같은 다양한 음식들은 벨과 아리가 준비했다. 새로 태어난 대원들이 전부 도와야 할 정도로 많은 양이기에 진종일 해야만 했다. 

 “고맙소!”

 “허허! 우리에게 이렇게 안전한 거주지를 마련해 준 것도 고마운데 이런 귀한 음식들까지.”

 원로들은 어린아이들이나 젊은이들처럼 쉽게 음식에 손을 대지 못했다. 지금의 전사들이 자랄 때까지 마을의 생활을 전담해 온 그들에게 있어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많이 드시고 편안하게 쉬십시오.”

 하룬은 원로들에게 옥수수 술을 한 잔씩 따라 주었다. 40도가 넘는 옥수수 술이 목을 통과하자 목이 타는 듯 뜨거웠지만 이내 속이 후끈거리며 열기가 올라왔다.

 “크읏! 으, 좋다!”

 단번에 술을 삼킨 촌장은 부러 과장되게 행동을 하며 기분이 좋음을 드러냈다. 마을의 가장 어른이 먼저 분위기를 띄우자 이내 긴 탁자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음식과 술이 들어가자 마음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변종생물들의 위협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마을의 차기 촌장인 로수와 나인이 장담을 해서 따라는 왔지만 오는 내내 마을 주민들은 말을 잊었다. 변종 생물들이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이 과연 있기는 할지 믿을 수 없엇던 것이다.

 “정말 좋은 밤이오.”

 촌장은 하룬을 향해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내는 병으로, 자식 둘은 호위대 일로 먼저 저세상에 보내고 혼자 남은 그는 일찍 몸을 씻고 앞으로 마을 주민들이 새로운 신분으로 살게 될 기지를 구경했다.

 거대한 바위로 위장된 지하 기지의 한 층 한 층은 넓엇다. 1층과 지하 1층은 인공 작물 재배 시설까지 있었고, 창고 층은 각종 물건들과 함께 식량이 그득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시설들도 있었고, 분에 넘칠 정도로 잘 꾸며진 주거 시설들이 다섯 개 층이나 되었다.

 젊어서는 전사장으로 많은 마을들과 유니온까지 수시로 드나들던 그조차 알지 못하는 첨단 기기들과 시설들이 가득한 이곳은 조상들의 땀과 피가 어린 마을보다는 편하지 않았지만, 모든 주민들이 다 함께 와서 그런지 앞으로 좋아질 것 같았다.

 ‘허허! 이제는 정말 로수와 나인 세대에게 짐을 다 맡기고 느긋하게 살아도 되겠어.’

 목숨의 위협과 차기 촌장인 로수와 나인. 그리고 비슷한 연배의 황 박사의 설득으로 인해 이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촌장은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마음이 불안했다. 사실 대원들도 이렇게 수리되고 새로 꾸며진 기지를 모르고 있엇기에 이곳으로 오면 기존의 마을에 비해 뭐가 더 좋은지를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곳은 촌장이 평생 일구고 싶었던 그런 장소였다.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는 안전한 장소에서 최소한 굶주림 없이 살수 있는 곳. 미래를 꿈꾸고 자신의 소질과 재능을 활짝 펼 수 있는 그런 마을로 만들고 싶었지만, 상황은 수많은 마을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고 병신이 되어서야 겨우 그저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엇다.

 촌장은 평생 그를 짓눌러 왔던 무게감을 이제야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죽어서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엄청난 무게감이었지만 이제 이 젊은 기지의 주인이자 이제는 자신들의 지도자가 된 이를 보니 더 이상 무겁지 않았던 것이다.

 ‘나인이 복덩이지, 암!’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는 손녀와 같은 나인이지만 몇 번 보여 주지 않던 환한 미소를 계속 지으며 음식을 나르고 또래의 처녀들과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본 촌장의 노안이 따듯했다.

 하룬과 어떻게 인연을 맺엇는지는 나인에게 대충 들었다. 제 아비를 잃고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던 이능력을 가진 나인이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촌장은 보지도 않았지만 하룬의 능력을 인정했다.

 거기에 자존심 강하기로는 하늘을 찌르지만 매사에 신중한 로수가 인정할 정도의 능력을 가졌으니 자신을 포함한 마을 주민들의 미래를 맡겨 보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불안하게 살지 않아도 되려나 보네, 촌장.”

 “그러게. 앞으로도 대대로 전사로서의 삶이야 이어지겠지만 이제는 마음고생만 하면 될 듯하네.”

 사촌이며 오랜 친우의 말에 촌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였던 마음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힘겨운 삶이지만 이렇게 핏줄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흥 마을 사람들은 충분히 행복했다.

 “하하하! 오늘 기분 최고다!”

 누군가 벌써 술이 오르는지 앞으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오래된 기타를 들고 나와 연주를 했고, 누구는 가족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마주 쳐 박자를 맞추엇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여자들의 수다 소리, 과거의 빚났던 시절을 추억하는 노인들의 과장된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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