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센셜 정령>
한적한 곳으로 간 헤르쉬는 풀 위에 앉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하룬은 말없이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헤르쉬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관자 놀이에 대었다. 그녀는 그상태에서 이내 가는 눈썹을 꿈틀 거렸는데 하룬은 그녀에게서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뭐지? 이건 꼭 실 같은데.'
그녀의 이마 한가운데를 통해 실과 같은 가늘고 긴 어떤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허공의 한곳을 향해 요동을 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기운이 일으킨 파동이 대기를 통해 상공으로 퍼져 나갔다.
'이능력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이능력을 쓰는 이를 게임에서 본 적도 없거니와 현실에서도 이런 현상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휴우!"
원하던 그 어떤 행위를 하고 난 헤르쉬는 한숨을 쉬며 눈을 줬는데 꽤 심력이 소모되어쓴지 그사이 눈 밑 부위가 살짝 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정령을 부른 거예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헤르쉬가 말을 했다.
"정말 정령을 소환한 겁니까?"
믿기가 힘들었다. 바로 자신이 정령사가 아닌가, 내적으로 진행된 과정이야 알 리가 없지만 정령의 소환 의식으로 보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힘이 들어 보였다
"제 정령은 정령계에 머무는 그런 정령이 아니랍니다. 좀 생소하겠지만 물질계에 존재하는 정령이지요."
헤르쉬의 말에 언뜩 머릿속을 스쳐가는 단어들이 몇 개있었다. 어느새 하룬의 커진 눈에서는 강렬한 안광이 번뜩였다.
반정령, 요정 그리고 에센셜 정령!
"흐음, 물질계에 존재하는 정령이라?"
"아마 정령사인 대장도 잘 모를 거예요. 아득한 신화시대
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인간에게 금지된 곳들은 꽤 많아요.후크란이나 마물의 숲, 혹은 순수의 대지가 바로 그런 곳이죠. 그중에는 태고부터 자연적으로 순수한 마나가 모여드는 특별한 곳이 있어요. 수천, 수만 아니 수억 년이 흐르며 한곳에 모여든 마나는 어떤 일을 기회로 마치 생명체처럼 자아와 육체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해요. 물론 그 육체라는 것은 우리 개념대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형상을 말하는 거지만요. 현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신화시대나 더 멀리까지 올라가 신계와 마계가 이곳 물질계와 연결되었다는 신마 시대까지 올라가면 가끔 이런 존재들에 대한 신화가 있어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정령이라? 정말 놀랍군요."
"호호! 그렇지요. 아빠와 타혼을 제외하고는 대장이 포니의 정체를 처음 아는 거예요."
헤르쉬는 대단한 비밀을 특별히 알려 준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이 녀석도 싸가지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하룬의 머리속에는 싸가지가 떠올랐다. 제대로 된 이름 따위는 지어 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태도가 불손한 녀석이지만 그 정체나 능력은 자신도 아직 다 모른다.
'뭐, 독을 포함한 오염 물질의 위력도 어지간하고 하급 정령까지 부를 수 있는 능려깅 있으니 대단하긴 하지.'
다른 것은 몰라도 소환자로 하여금 하급 정령을 부리게 만드는 것은 특기할 능력이긴 했다.
하룬이 막 싸가지를 떠올리고 있을 떄 하늘에서 뭔가 친근한 기척이 느껴졌다. 올려다보니 버처리비크 한 쌍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파동이 녀석들을 부른 것이다.
녀석들은 하룬과 헤르쉬를 향해 마치 공격이라도 하는 것처럼 쏜살같이 내려왔다.
"하하하! 오랜만이구나."
바람의 정령 위시느를 연상하게 만드는 버처리비크가 바닥에 큰바람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지근거리에 내려앉았는데 그자태가 무척이나 도도하다. 녀석들은 하룬을 보더니 친근하게 껑충거리며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부리로 툭툭 치거나 부비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쳇! 나쁜 녀석들, 제 주인은 우습게 알면서 ......."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쓴 헤르쉬가 버처리비크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현신!"
헤르쉬의 말에 버처리비크의 몸에서 뭔가 연기처럼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그 연기와 같은 것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모였는데 그것은 빛을 투과시키는 반투명한 물체였다.
"이건?"
하룬의 눈에 비친물체는 손바닥 크기의 정령이었다. 마치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를 연상시키듯 작은 동체에 오밀조밀한 얼굴을 가진 정령은 특유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헤르쉬는 하룬의 반응을 살펴보고는 놀란 얼굴이 되어 물었다
"역시 정령사군요, 보이나 보네요?"
"네, 꼭 운디네처럼 생겼는데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는 다르네요. 아주 귀엽고 생동감이 있어요."
운디네는 표정이 없었다. 그저 소환에 응해 물질계에 현신해서 소환자의 부탁을 수행할 뿐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는다.
"포니라고 해요, 아주 귀여운 정령이죠."
헤르쉬가 그 정령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외모를 하고 있는 그 정령은 헤르쉬의 손짓이 좋은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포니라는 이름의 정령은 버처리비크와는 달리 그녀에게 친근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얻은 겁니까?"
"전 비록 포니의 주인이긴 하지만 정령사는 아니에요. 정령 친화력이 약간은 있지만 정령계의 정령들은 전혀 소환할 수 없을 정도지요. 10년 전 길드원들과 함께 귀한 약초를 찾아 순수의 땅을 탐험할 때 태고의 호숫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헤르쉬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분명히 정령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을뿐더러 이런 정령은 어느 책에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요."
"정말입니까?"
하룬은 헤르쉬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방대하고 정확한 정보를 취급하는 단체의 실세였던 것이다. 알려고 하면 못 알아낼 정보가 없다는 정보 길드의 힘으로도 그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니,
"다만 제가 아는 것은 이 정령이 다른 물체와 합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부예요."
"합체요?"
"네, 대상물에 합체를 해서 대상물을 조종하거나 대상물이 보고 들은 것들을 저와 공유하는 거지요."
"대단하군요."
언뜻 들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이다. 이 정령을 제대로 활용하면 마법사들이 활용하는 패밀리어 마법을 대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정령은 확실합니까?"
"네, 그것도 대표적인 네 원소력을 전부 사용할 수 있어요."
원소력이라면 물과 불, 대지와 바람이다. 정령계의 정령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전 얘를 만나고 뛸 듯이 기뻐 바로 계약은 했지만 정령친화력이 아주 낮은 수준이라 이 정령석의 힘으로 소환하거나 일을 시키지요."
헤르쉬가 이마에 차고 있던 헤어밴드 안에 있던 정령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정말 싸가지와 비슷한 구석이 많네, 혹시 이 정령도 에센셜 정령이 아닐까?'
문득 든 생각이지만 싸가지의 경우와 비추어 보니 얼추 맞는 것 같았다. 싸가지 역시 무생물인 비수에 합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다른 경우는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다른 물체에 합체해서 그 대상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정령에게는 없는 싸가지 고유의 것이었다.
"그럼 버처리비크를 이 정령이 조종한 겁니까?"
"네, 조종이라기보다는 이 정령을 매개로 제가 녀석들에게 부탁을 하는 거지요. 그리고 역시 이정령을 매개로 제가 정찰 결과를 알 수 있고요."
"정말 대단한 정령입니다. 부럽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조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합체된 대상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정말 대단한 건데, 왜 그동안 난 싸가지를 생물체에 합체할 생각을 못 했지?'
싸가지의 경우 오염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녀석을 소환할 경우 자신도 중독이 되기에 그런 생각은 아예 할 수가 없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자 하룬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빨리 헤르쉬와 헤어져 싸가지의 능력을 재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알아내기까지는 무척이나 오래 걸렸어요. 계약을 한 당시에는 저나 이 정령의 능력이 너무 바닥이라 그저 소환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대로 활용할 방법 역시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몇 년에 걸쳐 정령에 대한 정보를 두루 수집했지요."
"대단하군요."
"아네이요. 중급 정령까지 부리는 대장이 더 대단하지요 제가 아는 한 인간 중급 정령사는 현시대에 거의 없거든요. 더구나 제정령의 능력은 일반 정령들의 등급으로는 하급밖에는 되지 않는걸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정령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고 있었다. 포니는 까르르 웃으며 그녀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에센셜, 본질(本質), 혹은 정수라.'
확인할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무생물과 합체를 시켜 본 적이 있습니까?"
"네, 처음에는 다양한 시도를 했었죠. 하지만 포니 자체의 능력이 미약해서 그런지 아니면 제 친화력에 문제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조종할 수가 없었어요. 단지 들어 올리거나 짧은 거리를 이동시키는 것만 가능하더군요. 물론 그 정도의 능력만으로도 사람들은 무척이나 두려워했지만 말이에요. 날 마법사와는 다른 마녀로 보는 이들도 있더군요."
헤르쉬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그녀가 이 정령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썻는지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전혀 정보를 모르는 상황에서 이 정도 활용하기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쳤을 것이 분명하기에 여태까지와는 다른 호감이 생겨났다.
헤르쉬는 언제나 무표정 하던 하룬이 상기된 얼굴로 강렬한 흥미를 가지고 자신을 대하자 기분이 좋았다. 중급 정령사가 자신의 정령에 대하여 가지는 호기심이 기껍기도 했고 그런 정령을 가진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한번 만져 보시겠어요? 원래 포니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가지 않지만 대장이라면 정령사이니 가능할 거 같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부탁을 하고 싶었다. 싸가지와 어떻게 다른지, 또 뭐가 같은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요."
헤르쉬는 손바닥 위에 자리한 포니를 하룬에게 건네주었다.
"포니, 이분에게 가봐."
-아잉, 싫은데 무섭단 말이야.
포니가 앙탈을 부렸지만 헤르쉬는 그 의지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정령을 하룬에게 넘겼다. 내심 자신을 닮아 까탈스러운 포니를 하룬이 어떻게 다룰지도 궁금했고, 포니에 대한 하룬의 평가도 듣고 싶었다.
-안녕, 난 하룬이라고 해.
포니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린 하룬의 싸가지와 소환 대기 상태에서 의지로 소통을 하듯 인사를 전하자 포니가 깜짝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네가 나에게 말을 한 거야, 인간?"
-그래, 포니
-어떻게? 내 주인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포니는 눈을 크게 뜨고 하룬을 보았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을 처음 본 것이다. 놀란 포니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난 그게 가능해, 정령사거든.
-말도 안 돼! 상급 정령사라는 귀 큰 인간들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단 말이야.
귀가 큰 인간이라면 엘프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포니는 그들과 조우한 적이 있단 말인데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하지만 그런 의문보다는 먼저 확인할 것이 있었다.
-넌 에센셜 정령이니?
-흐흡!
포니는 너무 놀랐는지 반투명한 몸을 몇 번이나 수축하거나 팽창시켰다. 그 모습에 헤르쉬가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던 것이다.
'역시 중급 정령사라서 나하곤 다르구나, 부럽다!'
헤르쉬는 자신과 함께 있을 때완 달리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하는 포니의 모습에 한숨을 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에센셜 정령이라는 걸.
-예전에 너와 같은 존재를 본 적이 있어, 싸가지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지.
하룬은 혹시 포니가 놀랄까 싶어 싸가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정말?
-응.
-그럼 정말 다른 에센셜 정령이 있구나, 난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
포니의 말에 하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싸가지 이외의 에센셜 정령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놀랐어! 내 정체를 알아본 존재는 아무도 없었거든
놀란 가운데에서도 처연한 표정을 짓는 포니의 눈에는 눈물마저 고이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동안 심심했겠다.
-응, 정령계에 머무는 정령들은 내가 나타나면 다들 도망가거나 피해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상대가 없었어, 오래전에는 오래된 나무나 자연물에서 태어난 다른 친구들도 곧잘 만났는데, 이제는 나와 같은 존재들은 다 사라졌는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
'휴, 그러고 보니까 싸가지랑 다른 정령을 한꺼번에 소환 해본 적이 없네.'
두 정령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그렇게 포니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일정시간 이상 쳐다보니 자연습럽게 심안을 통해 포니의 정보가 보였다.
<<에센셜 정령>>
등급 : 미스터리
내용 : 순수한 마나가 오랫동안 깃든 곳에서 태어난 물질계의 정령이다. 정령계의 정령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와 외부환경에 반응하여 성장하고 진화하는 존재이며 모든 영역의 정령술 구사가 가능하다. 진화 정도에 따라 정령계의 정령 소환을 매개할 수 있다. 또 아공간을 생성할 수 있으며 소환자와의 친밀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소환이 가능하다.
능력: 기본적으로 모든 물체와 합체가 가능하며 진화 정도에 따라 그 대상물을 지배 혹은 조종할 수 있다. 정령왕의 수준까지 진화하면 정령왕들의 권능을 사용하며 다른 차원이나 계의 통로를 열어 현신하거나 스스로 그 통로가 될 수도 있다.
'호오! 이런일이.'
전에 싸가지를 얻었을 때와는 달리 에센셜 정령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본 하룬의 눈이 묘하게 일렁었다.
싸가지에는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왜 진작 몰랐는지 아쉽기만 했다.
'어쩌면 녀석은 오염이 되었기에 이런 기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대상물과 합체하는 능력 역시 오염되었기 때문에 무생물, 그것도 금속에 한정되었을 수도 있어.'
확실한 것은 아직 모르겠지만 여태껏 독을 포함한 오염 물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가장 먼저 얻었으면서도 거의 방치한 싸가지의 진가가 이제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혹시 뭐 알아내신 거라도 있나요?"
한동안 말없이 포니를 쳐다보면서 수시로 눈빛과 표정이 변하는 하룬의 모습이 이상했던지 결국 헤르쉬가 물어 왔다.
"아닙니다. 제가 부리는 정령들과 너무 달라 살펴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저도 나름 정보를 찾아봤는데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너무 달랐어요."
-저 바보, 나 같은 뛰어난 정령이랑 계약을 해 놓고도 내 말도 못 알아듣는 바보 같은 주인이야. 날 예뻐해주는 것은 좋지만 너무 답답해, 쳇!
포니가 투덜거렸지만 헤르쉬는 알아듣지 못했다.
-네 주인, 아니 계약자와 잘 지내, 나중에 다시 만나자. 어쩌면 나중에 볼 때는 또 다른 에센셜 정령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
포니는 하룬의 말에 폴짝거리면서 좋아했다
-정말? 하긴 내 말을 알아듣는 유잉한 존재이니 나와 같은 존재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 좋아, 기대할게.
-그래, 나중에 보자.
하룬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포니가 손을 흔들었다.
"어머! 포니가 손을 흔드네, 설마 대장하고는 말이 통하는 건가요?"
포니를 막 건네 받으려던 헤르쉬가 놀란 눈으로 포니와 하룬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요. 아마 내가 정령사라서 정령의 향기 때문에 친밀감을 느꼈나 보지요."
하룬의 변명에 포니의 소환을 해제하던 헤르쉬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정령력이 미약한 그녀로서는 포니의 다양한 표정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 하룬이 너무 부러웠다.
"아무튼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하룬이 진심을 담아 인사를 했다. 한때 원수지간이었지만 이런 존재까지 보여 주니 더 이상 나쁜 마음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이다.
"호호! 이제야 대장이 저와 제국 정보 길드에 대한 미움을 걷어 낸 것 같네요. 사실 굳이 숨길 것도 아니었어요, 어차피 다른 이들에게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하긴 그렇다, 정령의 존재도 거의 전설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령계의 정령도 아닌 물질계의 정령이라 믿을 수 업슨ㄴ 존재일 가능성이 컸다.
"역시 길드장의 말씀이 맞군요."
뜬금없는 베론 자작 이야기에 하룬이 관심을 보였다.
"대장과 같은 성격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아야만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릴 때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런 성향을 가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보고도 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오픈해서 대하라고 하셨어요."
헤르쉬의 말에 하룬은 쓴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다. 그는 베론의 말 그대로 어린 시절 말뿐인 가식적인 사랑에 수없이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의 거짓말이나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말을 싫어하게 되었던 것이다.
'뭐, 그 정도 사람에 대한 안목이 있으니 그 엄청난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겠지.'
하룬은 헤르쉬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돌아왔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힘을 가졌으면서도 늘 어둠 속에 머물러야 하는 신세인 데다가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는 처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벼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그녀를 보니 안됐다는 생각과 함께 남아 있던 미움도 어느덧 사라져 가고 있었다.
"어, 벌써 다 왔네요. 아쉬워라."
하룬은 별 관심도 없는 조직의 뒷이야기와 사람 이야기에 푹 빠졌던 그녀는 어느덧 용병대 건물이 보이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 생각이나 의도 없이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니, 거의 처음 같아요."
"그랬습니까?"
"네, 즐거웠어요. 어린 나이에 단체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이후로 늘 어떤 의도를 마음속에 담고 재면서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라는 존재는 제 인생에 없었지요. 아마 포니가 없었으면 미쳤을지도 몰라요. 대화는 불가능해도 이 아이가 늘 내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처연해 보이는 그녀의 말을 두고 마땅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어슬픈 위로의 말보다는 그저 침묵이 더 나을 것 같아싿.
"우리,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가끔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외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못해도 이십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그녀인 데다 이제 그런 말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지만 예전 어느 땐가 자신이 짓고 있었을 그런 표정에 하룬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마워요, 하룬 대장은 제 두 번째 친구가 되었어요."
"두 번째요?"
"네, 첫 번째 친구는 바로 포니거든요. 비록 대화를 나누지는 못해도 제 마음을 늘 들어주는 고마운 친구거든요."
문득 그녀의 나이가 궁금했다. 자작 부인이라는 칭호로 보아서는 결혼을 한 것 같은데 오늘 그가 본 모습은 소녀의 감성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가씨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용병대 건물 뒤로부터 딜런과 타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타났던 것이다.
"딜런 경!"
"타혼!"
하룬과 헤르쉬는 기합을 하며 딜런과 타혼에게 뛰어갔다.
두 사람의 꼴은 정말 엉망이었다. 옷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는 산발로 풀어헤친 채로 온몸이 피범벅이었던 것이다.
자상만이 아니었다. 딜런은 왼팔이 부러져 덜렁거리고 있었고, 타혼은 허벅지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으으! 난 괜찮으니 만지지 마시오."
두 사람은 달려드는 하룬과 헤르쉬의 손길을 마다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보는 눈길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투기와 함께 미묘한 정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룬과 헤르쉬는 급하게 품에서 포션을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네 주었다.
헤르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하룬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에센셜 정령! 그 이름처럼 이 세계의 정수, 혹은 본질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때문에 그 능력이 올라가면 단순히 물질뿐 아니라 다른 공간과도 매개체 역하을 할 수 있고.'
헤르쉬가 아는 거라고는 에센셜 정령이 정령계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매개체가 되며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체건 간에 합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정도였다.
사실 싸가지가 비수와 합체해서 비수를 조종하는 것은 자신의 경우에도 가능했다. 그동안은 녀석이 가진 오염 물질들 때문에 거부감이 심해 더 이상 그 활용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녀석이 장담한 대로 오염 물질들을 제거하거나 분리시킬수 있다면 녀석의 순수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그런데 문제는 녀석의 순수한 능력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떤 방법으로 녀석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하다
뭔가 굉장한 능력이 될 것 같은데 머릿속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비록 앞으로 현실에 주로 치중할 생각이지만 가끔 비욘드에 접속하더라도 강한 힘을 가지논 쪽이 없는 것보다는 좋다. 더욱이 그것이 정령에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더 좋았다.
'혹시 지혜의 파편에는 정령에 대한 지식들이 있지 않을까?"
지혜의 파편을 떠올린 순간 하룬은 전율감을 느꼈다. 무심코 한 생각이지만 마치 확신처럼 들어차는 것이 있었다.
'지혜의 파편은 고대 세계의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비록 그 깊이에 있어서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나처럼 배움이 부족한 경우에는 큰 힘이 될 수 있을 거야.'
이제까지도 그랬다.
그가 특별히 지혜의 파편을 통해 알게 된 지식들을 직접 활용한 경우는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그가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실의 기에 대한 이론을 혼자서 정립한 것이나 정령의 활용법을 홀로 익힌 배경에는 다양한 지식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정령에 대한 내용이 있을 거야.'
이제까지 그가 얻은 지혜의 파편은 두 개.
하나는 몸에 대한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나에 대한 강론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잇달아 벌어진 의뢰 때문에 차분히 그 내용을 음미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시간이 없었지만 그 겉을 맛본 것만으로도 상당히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헤르쉬가 알려준 지혜의 파편 두 개에 들어 있을 내용을 추측해 보았다.
'하나는 분명 검술을 비롯한 각종 무기술과 관련이 있을거이고, 다른 하나는 마법에 대한 내용일 거야.'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경우를 비추어 보면 지혜의 파편은 스스로 그 내용을 달리할 수 있는 자체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다.
'분명 지혜의 파편을 접하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그 내용이 발전하고 있어. 처음에는 공히 몸에 대한 이론으로 시작해 마나에 대한것,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마나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거야.'
그렇게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현실도 이곳 비욘드의 세상처럼 에너지가 풍부한 곳이야. 때문에 이곳의 마나에 해당하는 기를 사용할 수 있고, 검술 역시 가능해. 그렇다면 마법 또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룬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도대체 누가 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 거지?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인가? 아니면 그 조직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문의 조직? 아니면 정말 우연인가?'
이건 마치 미지의 존재가 더이상 살아 나갈 힘과 능력을 잃은 휴먼들로 하여금 새로운 힘의 존재와 그 활용법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 이 세계와 연결시켜 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도대체 넥컴월의 정체는 뭐지? 우리 휴먼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인 거야, 아니면 해가 되는 존재인 거야?'
참을 수 없는 궁금함이 엄습하자 하룬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추론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그 상태로 한참 고민을 하던 하룬은 마침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래!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자. 가다 보면 알 수 있겠지. 누가 무슨 목적으로 휴먼들을 조종하고 있는지.'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하룬이 돌아오니 모두들 본부에 모여 있었다. 딜런이 소드마스터인 타혼과 겨룬 것을 아는 대원들은 그가 부상을 치료하고 나오자마자 그러 둘러쌌다.
"딜런 경, 괜찮으세요?"
마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직 딜런의 얼굴은 창백했던 것이다.
"괜찬하, 소드마스터랑 붙어서 이 정도 부상을 입었으면 양호한 거겠지, 외상은 포션으로 다 치료했어, 마나 로드가 흔들리고 마나 포인트가 막히거나 뒤틀린 곳이 몇 군데 있지만 며칠 지나면 괜찮을 거야."
딜런은 걱정 어린 눈길로 자신을 주시하는 대원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붙이도 아니면서 자신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대원들의 마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가족들 말고는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들이군.'
하룬을 비롯한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는 딜런의 얼굴에서 보기 드문 진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믿음과 애정이 듬뿍 묻어 나오는 미소였다.
"에궁! 그 게슴츠레한 시선 좀 어떻게 하게. 같은 사내에게 그런 시선을 받으려니 이거 영 남세스러워서."
타니엘라는 딜런의 시선을 대하고 생긴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공연히 그를 타박했지만 비슷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바라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는 확실히 오른 것인가?"
용병대에 들어오기 전이라면 이렇게 편하게 묻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자신 역시 수십 년 동안 마의 6서클에 갇혀 있어 편협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하룬이 고대 마법서를 가져오고 그것을 연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앞을 막고 있던 단단한 벽을 깰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생겼기에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물어볼 수 있는 것이다.
"아직은."
"왜요? 소드마스터는 도급이라야 상대할 수 있는거 아닙니까?"
티노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게 상식 이니까, 하지만 딜런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면서, 혼자 은거해서 수련했기에 검의 길을 보는 내 시각이 너무 좁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내가 최근에 깨달은 것은 소드 유저니 익스퍼트니 하는 경지는 정확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야. 예를 들어 소드 오러(검기)를 쓴다고 다 익스퍼트가 아니며 오러 소드(검강)를 쓴다고 해서 모두 소드마스터는 아니라는 거지. 진정한 검사의 능력은 밖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수한 마나를 체내에 쌓는가와 그 마나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네."
검을 쓰는 하룬과 티노는 물론이고 두 마법사를 포함한 사람들은 숨도 쉬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선구자의 경험과 판단은 그 영역이 어느 것이든 보다 더 높은 곳으로 발전 하려는 자들에게는 황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익스퍼트 중급이 상급을 이길 도리는 없지. 보유 마나 양은 물론이고 검기의 길이와 두께도 다르니 같은 검술이라면 상대가 되질 않네. 하지만 검술은 다양해. 그 검술이 가진 오의와 수련의 깊이에 따라 집적되는 마나의 질이나 양이 다르네, 또한 마나 로드의 넓이나 그 경로의 길이, 마나를 움직이는 의지력의 강약에 따라 검기나 검강의 위력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네. 그걸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자신의 검술을 수련했는지와 그 숨겨진 오의를 깨달았는지에 달렸지.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타가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오러 소드를 만들어 내는 소드마스터와도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거지."
뭔가 알 것도 같았다. 본인이 생각하는 실력과 실제 실력간의 차이를 그는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스승인 데브론 경이 바로 그랬다. 그 스스로는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익스퍼트 최상급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메신저 검술이 뛰어나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뿌듯해졌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수준이 일천해서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노력하면 다른 검술을 익힌 자들보다 더 강한 무력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 내 경지는 정확히 말하면 익스퍼트와 소드마스터의 중간이네, 최근 깨달은 것이 있어 마나 양이 폭증하고 있지만 그 마나 로드와 마나 포인트에 대한 이해도나 오러 소드의 숙련도는 아직 많이 부족한 상황이야. 물론 타혼 정도의 소드마스터 초급은 상대할 수 있네. 하지만 제대로 된 소드마스터를 만나면 얼마버티지 못할 거야."
평생을 걸쳐 각고의 수련 끝에 이룬 경지지만 딜런은 자신의 부족한 점들 때문에 스스로 소드마스터라고 자부하지 못했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집요한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타혼과 겨뤄 본 후 아직 자신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대장,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 있겠소?"
미리 이야기한 대로 다른 대원들이 합류하면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딜런은 검술 실력으로 돌풍 용병대에서 최강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귀족 출신이라 인지도가 높아, 사실 용병대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다.
그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타혼과의 대련으로 인해 얻은 깨달음을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시간을 더 달라는 딜런의 요구는 활동을 함으로써 돈을 벌어야 하는 용병대와 같은 조직의 입장에서는 무리한 요청인 것이다.
"대신 내 보수는 포기할 테니 내게 석 달 정도의 시간을 주시오."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은 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조직원으로서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다. 다만 이때가 아니면 깨달음을 놓칠 것 같아 무리하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하룬은 말없이 티노를 쳐다보았다.
"스카우트 양성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부대장?"
"다카린 용병단에서 파견한 단원들은 대충 조련이 되었습니다만........"
어비스가 문제다. 자신들도 본부를 이곳으로 정하겠다고 했던 어비스는 고요의 땅에서의 의뢰로 인해 급작스럽게 부상한 인지도와 그 구성원들의 실력과 명성 때문에 연일 밀려드는 가입 희망자들로 아직 황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굳이 이곳을 노출시키거나 번잡하게 만들 의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황도에서 영입 건을 마무리할 생각이기에 아직 이곳을 향해 떠나지도 못한 것이다.
하룬의 시선은 티노에 이어 타니엘라와 미루스를 향했다.
"두 분은 어떻습니까?"
"이제 대충 마무리가 되어 가오."
처음이 어렵지, 어느 정도 해석을 하자 그 시간이 갈수록 단축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하룬이 마법서를 가져올지 조급해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다.
하룬은 두 사람의 간절한 눈빛을 피해 마리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도네이스와의 수련의 성과가 있었는지 구릿빛으로 탄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마리는 어때?"
"저요? 언니의 발뒤꿈치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마리의 겸양에 도네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후훗! 네가 그런 겸양을 다 하고 웬일이니? 어제는 마나 궁술 중급에 입문했다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더니."
"언니는 ........"
마리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한찬 수련에 재미를 붙인 것은 확실하다.
"참, 겨루와 방커는 연락이 있었나요. 티노 부대장?"
"네, 그제 통신을 했습니다. 지금 파이린 제국의 모처에 있는데 하고 있는 일이 아직 다 안 끝났다고 합니다. 용병대에 들어오기 전 약속했던 일이라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시간을 더 달라고 하더군요. 대장이 오라고 하면 당장에 오겠지만 그곳 사정이 몸을 빼기가 껄끄러운 모양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백배 사죄하며 제발 자르지만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두 대원이 얼마나 매달렸는지 그 말을 하는 티노의 얼굴에는 괘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룬은 두 사람이 돌풍 용병대원이라는 신분에 얼마나 만족해 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상황이기에 몸을 못 빼는 거지?'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큰일이 벌어지는 게 확실하다. 그리고 그 일은 유니온의 군부, 혹은 노블들과 관련이 있어보였다.
'조만간 두 대원과 통신을 해 봐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티노 부부를 향했다. 티노에게 찰싹 붙어 있는 도네이스는 정감이 듬뿍 어린 눈길을 간간이 보내며 행복해 하고 있었다. 하긴 어릴때부터 용병으로 자라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현재가 행복할 것이다.
모든 사정을 들은 하룬은 잠시 고민을 했다.
현실에서 할 일이 많았다. 이주해 올 영흥 마을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아리도 만나야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게다가 이곳에서 당장 일을 시작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룬은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군요. 나 역시 개인적으로 처리할 것들이 더 있으니 이참에 하도록 하지요. 대원들의 실력이 높아지면 우리 용병대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의뢰 수행 능력이 올라가는 것이니 더 길게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다만 그 기간은 내가 의뢰를 받기 전까지로 하지요. 얼추 한 달 이상은 여유가 있습니다."
"호호호! 멋져요.대장!"
"고맙소, 대장."
하룬의 결정에 대원들은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그에게 감사를 했다. 특히 딜런은 표가 날 정도로 좋아했다. 자신이 부담 가지 않도록 다른 대원들의 상항을 들어 보는 등 사정을 고려해 준 하룬의 배려를 느낀 것이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딜런경."
"말씀하시오, 대장."
수련에 매진할 시간을 가지게 될 딜런은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드러냈다.
"티노 부대장의 검술을 좀 다듬어 주십시오."
명색이 부대장이면서도 검술 실력이 약한 티노를 배려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데브론을 시종하면서 그에게 몇 가지 스킬을 익히긴 했지만 하룬처럼 비전을 모두 배운 것은 아니었고, 데브론을 시종하느라 수련 시간이 별로 없어 2급 용병에 머무르고 있는 티노였다.
"아, 아니, 대장님!"
티노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하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사실 용병대의 부대장이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천한 신분과 부족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카우트 분야에 더욱 치중했던 것이다.
처가에 해당하는 다카린 용병들을 지도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은 그는 자신이 좀 더 능력이 높아져 진정한 용병대 부대장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처음으로 인정해 준 하룬에게 보답하는 것이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ㅅ랑해 준 도네이스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았고, 지도해 줄 스승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속에 품은 꿈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정석대로 수련을 한 딜런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실감한 하룬이다. 새로운 검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더라도 실력을 올리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된다. 운이 좋다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행하는 잘못을 지적받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경지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당황한 가운데에서도 기대와 설렘으로 빛나는 티노의 눈빛을 읽은 딜런이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어려울 것은 없소, 대장, 부대장 역시 대장처럼 발이 빠르고 몸이 날래니 내게도 좋은 대련 상대가 될 것이오."
이제는 손가락 길이의 검기를 10분 이상 사용할 수 있으며 딜런 자신의 비해 몇배는 더빠른 움직임의 소유자인 하룬이라면 몰라도 티노가 대련상대가 될 리는 없지만, 그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겁니다. 부대장, 딜런경이 소드마스터가 되면 우리 같은 하수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테니 이 기회의 부대장의 검술을 제대로 정립하세요."
".......대장님! 딜런 경! 고, 고맙습니다."
티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누가 있어 노예 출신인 자신을 이렇게 챙겨 준단 말인가? 평생의 주군으로 생각 했던 데브론도 자신을 배려하긴 했지만 하룬만큼은 아니었다. 하룬을 쳐다보는 그의 눈은 격정에 차 있었다.
"정말 감사해요. 흐윽!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을게요."
남편의 꿈을 짐작하는 도네이스 역시 눈물을 보였다. 딜런과 같은 검사가 적어도 한 달 이상을 지도해 준다면 티노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 역시 뛰어난 검술을 유산으로 받을 수 있다. 평민들에게 도적 취급당하기가 일쑤인 용병이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서는 당당하게 가슴을 열고 살 수 있는 것이다.
"하하하! 그럼 그 은혜를 당장 갚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지. 당장 저녁 좀 챙겨 주게, 오랜만에 땅 위로 올라왔더니 자네가 조리한 따듯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 그리고 고기가 그립네."
타니엘라가 짐짓 배가 고픈 시늉을 하면서 티노부부로 인해 숙연해진 분위기를 날려 보냈다.
"치잇! 알았어요, 당장 준비할게요. 같이 가자, 마리. 이 프란 언니가 벌써 저녁을 다 만들어 놨을 거야."
"네, 언니."
도네이스와 마리에 티노까지 밖으로 나갔다. 평소처럼 마을 안으로 들어가 먹는 것이 아니라서 음식들을 이곳으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가자 타니엘라가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급하게 물었다.
"대장, 마법서는 언제 가져올 거요?"
역시 편집광적인 성격을 가진 마법사가 아닐랄까 봐 마법서를 채근하는 타니엘라였다. 그 옆에 있던 미루스 역시 타니엘라와 마찬가지로 주름 가득한 노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초롱초롱한 눈길을 하룬에게 보냈다.
"내일 타우스트 성으로 갈 생각입니다. 한 일주일 정도면 원하는 마법서의 필사본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마법서를 원하십니까? 그 '원소 마법 기초' 입니까?"
"그렇소"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고대 마법서들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그건 무슨 소리요? 다른 마법서를 구할 도리가 있단 말이오?"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마법도 쓰지 않은 채 순간 이동을 하듯 하룬의 양옆에 달라붙었다. 고대 마법서에 대해서는 타니엘라로 부터 들어 알고 있는 딜런의 눈도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전에도 검증의 관에 들었던 이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나갔다 온 것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였스빈다."
"그래서, 대장?"
"내가 확인을 해 보니 엘프 일족들 몇이 정말로 검증의 관을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엘프들과 하룬의 친교를 익히 알고있는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어딜 갔다 왔나 했더니 엘프들을 만나고 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법서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리라.
"또 제국 정보 길드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정체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그곳에서 마법서를 얻어 나온 경우도 있다더군요."
"그럼 어, 얻을 수 있는 거요, 대장?"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하룬의 옷깃을 붙잡고 그의 입술을 주시했다.
"스카이루프 산맥으로 들어가 새 거주지를 건설하고 있는 엘프들과는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과 교환하기로 했고, 그 정보를 알려 준 제국 정보 길드와는 그동안 번 돈으로 구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두 분이 어떤 종류의 마법서를 필요로 하는지 몰라 이번처럼 전문부터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현실의 일이 대충 마무리되면 진수 때문이라도 스카이루프 산막에 갈 생각이다. 그곳에 가면 당연히 엘플들을 만날 것이니 그들 핑계를 댄 것이다.
"오오! 이럴 수가!"
"내 평생에 고대 마법서를 이렇게 많이 대할 수 있게 되다니. 대장! 나 미루스, 대장을 정말 사랑하오!"
미루스는 감동을 한 나머지 여자에게나 할 법한 낯 뜨거운 소리를 하며 하룬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나 타니엘라 역시 마찬가지요. 내 평생 대장을 주근으로 섬기겠소, 마나를 걸고 맹세하리다."
타니엘라는 미루스와 마찬가지로 노안에 굵은 눈물을 흘리며 하룬을 끌어안았다.
"허어, 참!"
하룬은 두 사람의 과격하고 뜨거운 반응에 놀라 어쩔 바를 몰랐다.
평생을 마법을 연구해 왔고 6서클에 묶여 수십 년을 보내온 두 사람에게 고대 마법서가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하하하! 나역시 벌써 대장에게 감복했지만 이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군. 소드마스터가 되면 이처럼 감정이 풍부해지는 걸까? 왜 자꾸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네."
딜런은 자신이 오매불망 바라던 소드마스터의 경지나 저둘이 7서클에 목을 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고대 마법서가 저 둘에게는 7서클로 가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한동안 고생은 하겠지만 그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저 둘도 자신처럼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비록 걸어온 길은 전혀 다르지만 걸어오며 느꼈던 숱한 좌절과 슬픔을 공유하기에, 딜런은 지금 그들의 심정을 알알이 같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저들을 위해 마법서를 구해 온 하룬의 행동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딜런은 그경지에 걸맞지 않게 눈시울을 붉히며 따뜻한 눈길로 두 노망난 마법사들에게 안겨 어쩔 줄 모르는 하룬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돌풍 용병대는 단순히 용병대가 아니라 가족이야! 서로 정을 주고받으며 같이 살아가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