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다시 비욘드로 (138/278)

《다시 비욘드로》

 다음 날 아침, 여독이 덜 풀린 몸으로 대원들은 다시 영흥 마을로 떠났다.

 이제 한 식구가 된 동료들의 가족들에게 당면한 문제이니 불만을 가질 대원은 없었다. 오히려 혼자 남을 하룬을 걱정하며 떠났던 것이다.

 대원들을 떠나보내고 주 기지로 옮겨 온 하룬은 벨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빠, 이제 비욘드는 자주 안 할 거야?”

 벨의 물음에 하룬은 잠시 생각을 했다.

 ‘비욘드를 더 해야 하나? 그곳에서 이룰 것은 대충 다 이룬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하룬은 조만간 비욘드를 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실의 중요성이 증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게임을 접으려고 하니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아직 돌풍 용병대도 자리를 못 잡았는데.’

 자신 대신 티노가 대장이 되어 제대로된 용병으로 살아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어차피 딜런은 귀족이니 제자리로 갈 것이고, 타니엘라와 그 사제 역시 마법서 때문에 대원이 된 것이니 언젠가는 마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도 당당한 용병대로서 제국, 아니 대륙을 제 집안처럼 활보하는 멋진 용병대로 남길 바랐다. 오랫동안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해서 그렇지 티노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비록 나이가 있어 더 이상 발전하기는 지난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훌륭한 용병대장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욘드는 나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곳이네.’

 오랫동안 정을 붙이고 한 곳에 살지 않아도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으면 그곳이 바로 고향이라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비욘드만 생각해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성으로는 이제 그만 그 세계의 단절을 결심해놓고 말이다.

 현실과 다른 것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리얼리티를 가진 그곳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혔다. 현실에선 맺을 수 없는 인연들을 통해 연정도 느껴 보았고, 부정父情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또한 자신 있게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힘과 능력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이따금 현실이 너무 무료하거나 힘들 때 하자!’

 결국 이성과 감성이 타협을 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비욘드를 접겠다고 생각하고 난 후부터 생긴 어떤 강박관념이 사라진 것이다.

 “오빠!”

 하룬은 빨리 대답을 하지 않자 높아진 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비욘드 계속할 거냐니까?”

 “응. 해야지. 그곳에서 내 능력들 대부분을 얻었는데. 물론 그게 다 네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럼 나도 할래.”

 벨은 이제 완벽한 휴먼체를 가졌다고 생각하자 늘 떠올리고 있었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안 돼! 조금 더 있다가. 넌 아직 불안정한 상태잖아.”

 사실 그게 걱정이었다.

 “흥! 아니거든요. 아즈만이 몇 번을 검사하고 이제 완벽한 상태라고 판정을 내려줬단 말이야.”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너와 같이 게임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래. 오빠가 대충 일을 마무리하면 같이 하면 되잖아.”

 “칫! 언제까지 기다리라고?”

 “조만간. 조금만 기다려.”

 하룬의 말이 먹혔는지 벨은 한발 물러섰지만 비욘드에 대한 갈망은 여전했다.

 “빨리 할 수 있으면 좋겠어. 난 마법을 익힐 거야. 그래서 그곳의 마법을 현실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볼 거야.”

 벨의 말에 하룬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를 벨이 꺼낸 것이다.

 ‘난 다른 유저들과는 달리 벨이라는 특수한 캡슐 때문에 그곳의 능력을 이곳 현실에서 쓸 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에서 말하는 마나와 우리 세상의 기는 굉장히 유사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 그렇다면 마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종말 시대 이전의 문명 자료를 보면 주술이라든가 마법이라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있고, 지금만 해도 나와 같은 초능력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벨의 말을 무조건 무시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육체는 이제 완전한 휴먼체가 되었다고는 해도 벨은 기본적으로 슈퍼컴 이상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곳 세상에서도 천재들만이 익힐 수 있다는 마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마나 친화력이 있어야 하지만 말이야.’

 “그곳의 마법을 이곳 현실에서 적용해 볼래.”

 녀석은 조막만 한 주먹을 힘주어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이제 열서너 살 정도의 사춘기 소녀에 불과하지만 지적 능력은 슈퍼컴을 능가하는 녀석이니 몸으로 움직이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마법처럼 머리를 쓰는 거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가만! 그 룬어라는 거. 벨이라면 쉽고 빠르게 익히지 않을까?’

 룬도 고대 룬, ‘라’ 룬(라 제국 때 사용하던 룬 문자), 그리고 현세의 룬어로 나뉘어 있지만 벨의 지적 능력이라면 타니엘라 사형제보다 훨씬 더 빠르게 룬어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룬어에 대한 강론이 들어 있는 지혜의 파편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일은 보다 더 쉬워질 것이다. 아무리 다양한 의미를 가진 룬어라도 슈퍼컴의 지능을 지닌 벨이라면 훨씬 해석이 빨라질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법을 이깋는 것과 마법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다를 테니까.’

 “그렇게도 게임이 하고 싶어?”

 “응! 오빠가 하는 걸 보면서 너무 궁금했거든. 처음에는 표정 변화도 거의 없고 감정 폭도 극히 좁았던 오빠가 비욘드를 하면서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감정 폭도 커지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지는 것을 오빠의 뇌파를 통해 같이 경험하면서, 나도 오빠와 함께 비욘드를 플레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서도 휴먼체가 아니었기에 할 엄두는 내지 못했는데 이젠 오빠 유전자를 바탕으로 완벽한 휴먼체가 되었으니 해보고 싶어.”

 하룬은 벨의 말을 들으며 그녀의 생각이 단시간에 떠오른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꿈꾸어 온 것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끄덕끄덕!

 결국 하룬의 승낙이 떨어지자 벨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빠, 최고!”

 쪼옥!

 오랜만에 뺨에 뽀뽀까지 해주는 벨을 보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에게 뽀뽀를 받아 본 지도 오래됐네.’

 다시 태어난 이후론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예전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가슴이나 엉덩이의 융기가 현격히 높아진 상태에서 튜브에서 나온 후론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인지 자신이 남자로 보이는 것인지는 몰라도 전처럼 거리낌 없이 달라붙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서운하기는 하지만 지금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아.’

 이제 성숙기로 가는 도중에 있는 벨이 보이는 말과 행동도 여자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던 하룬으로서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풍성한 유니온 특유의 평상 옷 때문에 쉽게 드러나는 어깨의 브래지어 끈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랬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이나 하룬의 벗은 몸을 보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들이 그러했다.

 “대신 지금은 안 되고 오빠가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서 하자.”

 “호호호! 알았어, 오빠. 어차피 적당한 캡슐을 구해서 내게 맞게 개조를 해야 하거든.”

 벨은 콧노래를 부르며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녀석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꼭 나비의 날갯짓처럼 자유롭고 가벼웠다.

 접속을 하고 보니 용병대 건물이 지척이다.

 ‘오랜만이네. 다들 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건물로 걸어가던 하룬은 전에는 없었던 집 두 채가 건물 뒤편에 있는 것을 보았다. 단층의 통나무집 두 채가 나란히 있었는데 마치 의좋은 오누이처럼 잘 어울렸다.

 ‘그새 완성한 건가?’

 티노와 도네이스의 집일 것이다. 건축 자재가 있을 리가 만무하니 산에서 자른 통나무로 지은 집이지만 캘프란의 다른 집들처럼 아늑하고 따듯해 보이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돌로 쌓은 담장이며 돌담을 따라 피어난 야생화는 그림 같았고, 문이 없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당에는 작은 채마밭과 닭들이 뛰놀고 있어 마음이 뭉클했다. 자연과 잘 조화되어 있으면서도 따듯한 인간의 정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하룬이라면 절대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몸을 편안하게 눕힐 곳만 있어도 충분히 만족했고, 이런 것까지 꿈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제 내게도 소중한 존재들이 많이 생겼어.’

 전에는 사랑할 대상도, 사랑을 준 이도 없었지만 지금은 벨과 아리를 비롯해 게임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잠시 멍하니 집의 전경을 구경하던 하룬은 티노가 보고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티노! 도네이스!”

 몇 번을 불러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어딜 간 건가?’

 아무래도 집을 비운 것 같았다.

 “아!”

 생각해 보니 점심시간이다. 식사는 알프네 가게에서 대 놓고 먹기로 했으니 아마 거기로 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당장 그곳으로 가려던 하룬은 혹시 몰라 용병대 건물을 들렀다. 티노의 평소 성격이라면 그곳에는 다른 대원들이 있을 것이다.

 건물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접객실에는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티노가 이곳에 자주 머무는 것 같았다.

 잠시 건물을 둘러보는 사이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경각심을 끌어 올릴 새도 없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미루스였다. 눈 밑이 거뭇해지고 주름살이 더 깊게 드러난 것을 보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미루스 님!”

 “껄껄! 생각보다 일찍 왔군. 알람 마법이 작동을 해서 혹시 다른 때ㅓ럼 짐승이라도 내려온 줄 알았네.”

 숲과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가끔 산짐승이 내려오는가 보다. 하룬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것을 본 미루스가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

 “한 번 근처를 토벌했기 때문에 위험한 놈들은 아니고, 산이 추워지다 보니 먹을 것을 찾아 멧돼지나 사슴들이 가끔 내려온다네.”

 “왜 식사하러 안 가시고요?”

 “껄껄! 그렇게 됐네. 사형이 궁금해할 테니 내려가서 이야기하세.”

 미루스는 하룬을 끌고 자신들의 거처인 지하실로 향했다.

 마법서 연구에 푹 빠져 있던 타니엘라는 하룬이 지하실로 들어서자 반색을 하며 반겼다. 얼마나 열중하고 있었는지 그들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끼니는 제대로 챙기고 연구를 하지 그러셨습니까?”

 두 사람은 하룬의 걱정 어린 책망에 살짝 민망한 표정을 하면서도 그를 잡아끌었다.

 “허허! 식사보다 더 중한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네.”

 “그보다 이것 좀 보게.”

 지하실 안에는 열 명은 족히 앉아 회의를 할 수 있는 긴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종이로 가득했다. 미루스가 손에 잡은 것은 그중 가장 위쪽에 놓였던 종이였다.

 “설마 벌써 다 해석한 겁니까?”

 하룬의 놀란 얼굴에 두 사람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그렇게 됐네.”

 “우리도 공동 연구는 처음이지만 사형의 룬어 실력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 생각보다 빨리 해석을 할 수 있었네. 각 마법서의 서문은 3분의 2 정도 해석된 상태이고.”

 “그래 어떤 내용입니까?”

 평소 큰 표정 변화가 없던 하룬이 흥분한 기색을 드러내자 기분이 더욱 고무된 미루스가 손에 든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대장이 직접 보게.”

 급한 마음에 마치 뺏듯 종이를 잡아 든 하룬이었다.

 “이건?”

 아쉽게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읽을 수는 있는데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해석한 문자 역시 룬어였던 것이다.

 “고대 라 제국의 룬어는 지금 우리가 쓰는 룬어와 다르네. 현대의 룬어가 글자당 세 개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고대 룬어는 열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음성의 고저와 강약 그리고 장단에 따른 것이지.”

 타니엘라의 말을 들은 하룬은 이 두 사람이 얼마나 힘들게 연구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실에서도 음의 높낮이에 따라 뜻이 전혀 상방되는 말이 없지 않았기에 그들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고위급 마법사이면서 고대 룬어를 잘 아는 마법진에 특화되었기에 가능한 해석 속도였던 것이다.

 “내가 설명을 해주겠네. 한 권은 제목이 ‘영능 마법 기초’이네. 나도 이런 종류의 마법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내용은 정신력으로 외계 사물을 지배하는 것이네. 서문에 의하면 고대 ‘라’ 제국의 마법사들 중 한 갈래던 ‘현자’라는 그룹이 사용한 힘이라고 하는데 그 범위가 마법 못지않게 무척 다양하고 깊다고 하네.”

 ‘이건 이능력에 대한 책이구나!’

 등골을 타고 찌릿한 쾌감이 흘러내렸다. 자신도 해당이 있지만 나인과 레이스와 같은 이능력자를 위한 책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룬은 흥분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어떤 마법에 관한 겁니까?”

 “흐흐흐!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걸세. 제목은 ‘원소 마법 기초’라고 하고 그 내용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마법들 중 불, 물, 바람, 대지, 빛, 암흑, 금속 속성을 모두 망라하는 마법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네.”

 “이 마법서의 서문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라’ 제국 당시의 마법은 현재는 배척을 받는 암흑 속성의 마법이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빛과 금속 등의 다양한 속성을 가진 마법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네. 비록 기초 마법서라지만 제대로 해석해서 재구성하면 마법의 신기원을 이룩할 수도 있는 귀중한 마법서라고 사료된다네.”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아직 서문이 다 해석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휴우! 하나는 제대로 건졌는데 진짜가 없구나.’

 이방인들이 원하는 내용은 아니어서 실망이 컸다.

 ‘아니지. 그래도 영능 마법서를 얻은 것이 어디야.’

 하룬은 남은 네 권의 마법서를 떠올리며 실망감을 지웠다. 이 두 권에 없으면 네 권에는 반드시 찾는 것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자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하니 대장은 이 두 권 중 ‘원소 마법 기초’란 마법서를 필사해 오면 될 것이네.”

 “껄껄껄! 사형, 재미있지 않소? 이젠 한계에 묶여 마탑의 뒤치다꺼리나 하던 우리 둘이 하룬 대장 덕분에 이런 보물을 연구할 기회를 잡다니 말이오. 마탑의 늙은이들은 우리가 고대 마법서를 해석하는 영광된 기회를 가졌다는 것을 알면 질투심에 가슴이 터져 죽고 말게요.”

 미루스의 말에는 그동안 마탑에서 당한 설움과 긴 시간 동안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한계 때문에 겪은 심고心苦가 절절히 묻어 나왔다.

 “미루스, 마법서를 통해 7서클의 벽을 깨서 그들에게 우리 사형제의 실력을 반드시 보여주자.”

 “암요. 스승께서 마법 실험 와중에 마탑에 중대한 손해를 끼치고 세상에 떠나신 탓에 우리 둘은 제대로 된 상위 마법서나 마법 주문을 전수받지 못하고 내내 마탑에 봉사했지만, 이젠 그들이 우리에게허리를 숙이는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하룬은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그들 사형제의 상황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마탑들도 꽤나 고지식한 단체인가 보군.’

 스승이 마법 실험으로 마탑에 손해를 끼쳤다고 제자들을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기회도 주지 않고 부려만 먹었다는 것을 보니 그들이 속했던 마탑 역시 좋은 집단으로 여겨지지가 않았다.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대장. 대장 덕분에 이런 보물을 남들보다 먼저 구경할 수 있으니 우리가 감사할 일이지.”

 “사형 말이 맞네. 스승과 사형을 만난 후 내 인생에 더 이상 정을 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내 생각이 틀렸네. 이제 관 속에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하룬 대장과 같은 귀인을 만났으니 내 인생도 헛된 것은 아니라네.”

 미루스의 노안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 사형제는 외모나 언행 면에서 상당히 비슷했다. 하지만 미루스는 타니엘라보다 좀 더 감정 폭이 컸고, 열정적인 편이었다.

 “지금 당장은 곤란하고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이 오는 편에 필사한 것을 가져오라고 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하룬은 두 사람을 생각해 빨리 내용을 전해 주려다가 혹시 몰라 뒤로 미뤘다. 이 두 사람은 일단 어떤 일에 빠지면 다른 일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을 것 같으니 용병대를 위해 두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것은 먼저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시게. 사실 마음이야 당장이라도 원본의 내용을 연구하고 싶지만 욕심 낼 일은 아니지. 서문이야 문맥을 짐작할 수 있어 해석이 쉬웠지만 마법 수식이나 주문으로 들어가면 결코 쉽지 않을 거야. 적어도 우리가 눈을 감을 때까지 연구를 해야 할 테니 말이야.”

 “껄껄! 내 무슨 복이 있어 말년에 그렇게 소원하던 고대 마법서를 연구하다 죽을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이게 다 대장 덕분이라네.”

 하룬의 손을 양쪽에서 잡는 노마법사들의 앙상한 손길에 따듯한 온기와 힘이 넘쳐났다.

 티노와 도네이스 부부는 타니엘라가 미리 이야기한 대로 어둠이 내려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대장!”

 “하하! 잘 지냈습니까, 부대장?”

 티노의 얼굴은 말쑥했다. 비록 왜소한 체형과 얼굴은 마찬가지지만 전에는 느낄 수 없던 위엄도 풍기는 것이 그동안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도네이스가 많이 신경을 썼나 보네요. 얼굴도 좋아지고 표정도 밝아진 것 같네요.”

 “호호호! 우리 그이야 당연히 제가 신경을 써야지요.”

 도네이스는 하룬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티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그녀의 몸짓에 티노는 조금 얼굴을 붉혔지만 부러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동안 부부간의 애정이 꽤 돈독해진 것 같아 하룬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요?”

 “산 건너에 숙영지를 마련한 타카린 용병단 파견대와 함께 산과 들을 누비고 있습니다. 도네이스는 근처에서 마리와 함께 궁술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타니엘라에게 이미 들은 대로 티노는 장인의 부탁을 받아 다카린 용병단원들 중 선발된 노련한 단원들을 상대로 스카우트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력이 느껴졌다.

 “호호! 이이가 생각보다 훌륭한 교관이래요.”

 도네이스의 말에 티노는 얼굴을 붉혔지만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아마 티노로서는 처음일 것이다. 때문에 자긍심이 고양되었고 도네이스와 애정이 돈독해지면서 중후한 분위기까지 풍기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비스 용병대는 안 보이네요.”

 “네, 대장. 사실은 이번 고요의 땅을 통해 어비스 용병대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황도의 임시 거점으로 입대하고자 하는 용병들과 의뢰주들이 몰려 바쁘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 달 정도 후에는 이곳에 도착할 거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신생 용병대지만 그 정도라니 하룬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어비스가 자리 잡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집이 아주 아담하고 좋군요.”

 “그렇죠?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몰라요. 다들 달려들어 한 달만에 지은 거예요.”

 “그랬습니까?”

 “네. 대장이 후크란으로 떠나신 후 남은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근처 몬스터들과 맹수들의 서식지를 소탕했거든요. 덕분에이제 몬스터를 보려면 하루 이틀은 걸어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 보답을 해야겠다고 이 집을 짓는 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도와주었어요.”

 “고마운 일이군요.”

 사실 몬스터 퇴치는 용병대 입장에서는 귀찮음을 피하고자 한 일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늘 몬스터와 맹수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던 산골 마을 주민들은 당장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가까운 곳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뻤던 것이다.

 그렇게 티노 부부와 즐거운 해후의 시간을 보낸 하룬은 티노에게 들은 대로 딜런의 거처를 찾아갔다.

 딜런은 산속 깊은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길게 기른 수염과 머리카락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형형하기만 했다. 분명히 새로운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일부러 발소리를 냈기에 한창 명상에 빠져 있던 딜런은 하룬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장!”

 “좋은 곳이네요.”

 적당한 높이의 절벽에는 작은 폭포가 있었고, 삼면은 멀리 마을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시원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수련도 수련이지만 정신 수양에 좋을 것 같았다.

 “언제 온 건가?”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본거지를 좀 둘러보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그랬군.”

 그는 빙긋 미소를 지은 후 담담한 표정이 되었다.

 “수련은 좀 어떻습니까?”

 “성과가 좀 있긴 하네만 아직 바라던 경지는 도달하지 못했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라 적잖게 안심이 되었다. 자신 역시 익스퍼트를 앞두고 조바심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익스퍼트도 아니고 소드 마스터의 벽이니 어지간히 단단했을 것이다.

 “보겠나?”

 딜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검을 쥐고 마나를 주입시켰다.

 츠츠즈증!

 그의 검에서 오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이내 검신과 똑같은 새로운 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검신과는 달리 푸른빛이 선연한 오러 블레이드였다. 팔 길이까지 늘어난 오러 블레이드는 아직 아지랑이와 같은 오러를 흘리고 있어 완벽한 소드 마스터의 경지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벽을 깬 것은 맞았다.

 “타앗!”

 홀린 듯 자신의 오러 블레이드를 쳐다보던 딜런이 기합성과 함께 전면의 바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싸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람 키의 큰 바위가 단숨에 갈라졌다. 정확한 동체 시력을 가진 하룬은 검이 가르고 지나간 깨끗한 면을 볼 수 있었다.

 “하압!”

 자신이 만들어낸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을 한번 시험해 본 딜런은 이제 자신만의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근 1미터가 훨씬 넘는 검신은 빠르고 정확한 검로를 따라 물 흐르듯 부드럽게 대기를 베거나 찔러 갔다.

 강하고 빠른 검격이 특기였던 딜런이었다. 지금의 검술은 이전에 비해 좀 더 부드러워지고 느려졌지만 그 위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더 길어진 검신은 강력한 검풍과 검압을 형성해서 검이 뻗어가는 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가 이런 것이구나.’

 하룬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강력한 검세를 일으키는 딜런의 검술에 경탄했다. 자신이 저 속에 갇힌다면 절대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비록 메신저 스킬이 있지만 맞받아치는 것은 고사하고 몸을 빼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경탄할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익스퍼트에 완전하게 진입하고 보니 위대한 검사의 검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발의 움직임과 검의 궤적은 적절히 조화가 되었고,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도 넓은 공간을 제어하는 묘리 역시 눈에 들어왔다.

 강한 하체의 힘과 허리의 힘을 끌어내어 검에 싣는 딜런의 움직임은 크지 않으면서도 강한 힘이 있었고, 손목과 팔 근육 그리고 어깨 근육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베고 찌르는 움직임은 간결하면서도 최단 거리를 추구하고 있었다.

 하룬은 소드 마스터의 연무에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을 고정했다.

 “후우욱!”

 한차례 검술을 시연한 딜런은 검을 거둠과 동시에 몸을 작게 진동시켜 혹사당한 근육을 적절하게 이완시켰다. 어느새 그의 검에서는 오러 블레이드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대단합니다, 딜런 경!”

 “허헛! 아닐세. 아직 완벽하지 않아. 마나를 좀 더 세밀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다루고 사용할 수 있어야 완벽하게 바라던 경지에 오를 수 있네. 그 점에서 보면 나는 아직도 익스퍼트 최상급에 머물고 있을 뿐이네.”

 겸손을 부리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딜런의 눈에는 진한 아쉬움이 피어올랐던 것이다.

 “혼자만의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얻었네. 내 가전 검술은 본래 실전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 이제부터는 또다시 실전을 겪어야 할 듯하네.”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하룬은 진정으로 그의 성취를 축하했다. 단순히 대원이 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서가 아니라 같은 길을 걷는 후배로서 선배의 노력과 그 성과를 축하한 것이다. 그의 진정이 전해진 듯 딜런은 한층 진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대장. 이 모든 것이 대장이 배려해 준 덕분이오. 나 혼자만의 노력과 수고만 있었다면 이런 경지는 요원했을 것이오.”

 그는 진정을 담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하룬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닙니다.”

 “허허헛! 진짜요. 비록 내가 운이 좋아 이런 경지에 올랐지만 앞으로도 갈 길이 머오. 대장이 많이 도와주시오. 내가 성심껏 대장을 보좌하겠소.”

 소드 마스터에 오르면 용병대를 떠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하룬이었기에 딜런의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말이?”

 사실 딜런은 소드 마스터가 된 것 말고도 변화가 더 있었다. 이제까지는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아랫사람 대하듯 편안하게 말했는데 갑자기 존중하는 말투로 변했던 것이다.

 딜런이 그답지 않게 부끄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하하! 사실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나이와 그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대장에게 실례를 하고 말았소. 내가 그 어떤 경지에 올랐든 하룬 대장은 내 대장이오. 그러니 남들이 보든 보지 않든 대장에게 예우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소.”

 비록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그동안의 말투에 대한 사과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 나왔다. 때문에 하룬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닙니다. 저는 전처럼 대하시는 것이 더 편합니다.”

 “아니오. 내 이번에 벽을 깨면서 깨달은 것들이 소소하게 좀 있었소. 그중에는 인간관계에 대한 깨달음도 있었소. 그동안 무례를 탓하지 않고 받아주어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하오체로 자신을 존중하는 딜런의 태도에 하룬은 당황했지만 그의 얼굴은 완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룬은 할 수 없이 그의 태도 변화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쭉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감사하오. 이런 계기를 만들어 주어서. 앞으로도 열심히 용병대원으로서 노력하겠소.”

 결국 두 사람은 미소 지으며 서로의 마음을 느꼈다.

 하룬은 그날부터 딜런과 함께 검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따로 수련을 하지만 딜런은 수시로 하룬에게 검술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 어느 위치에서든 마음먹은 대로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검이 내 육체의 연장이라는 사고와 함께 평소 정확한 검로를 그리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오.”

 “…….”

 “대장은 빠른 발을 가졌으니 상대와의 거리에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만 하는데, 지금은 몸의 빠르기와 검의 빠르기가 조화되지 않고 있소. 이래서는 몸과 검이 따로 놀아 가진바 실력도 다 펼칠 수가 없소.”

 “…….”

 “상위 검술을 마음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기본이 되는 검술을 완전히 마스터해야만 하니 욕심을 버리시오.”

 “…….”

 “상대의 검이 아니라 눈을 보시오. 검은 육신의 연장이며 결국에는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법이니 결국 마음에 검을 세우시오. 그리하면 언제 어느 때라도 나만의 검을 수련할 수 있소.”

 “…….”

 “호흡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지만 애써 호흡을 조율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 가장 편안한 길이를 찾으시오. 대장은 몰입을 했을 때와 안 했을 때 호흡의 차이가 크니 꾸준한 심상 수련을 통해 가장 편안한 호흡으로 검술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오.”

 “…….”

 “익스퍼트라도 순수한 마나를 가지고 자신의 검술을 마스터한다면 오러 블레이드를 가진 자를 능히 벨 수 있소. 나 역시 그러지 못했지만 대장은 가능성이 있소. 대장의 마나는 굉장히 순수하고 응집력이 뛰어나니 가능할 것이오. 게다가 대장의 그 빠른 몸놀림은 심하면 두 단계 이상의 검사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뛰어난 점이니 조화와 균형을 잊지 마시오.”

 딜런의 조언은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 하룬에게는 그야말로 골든 룰(금과옥조)이었다. 비록 검술 그 자체를 지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조언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수련하는 하룬의 경지는 며칠 사이에 딜런이 놀랄 정도의 빠른 진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름 정도의 짧은 수련이 끝나갈 때는 딜런과 직접 검을 섞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감히 소드 마스터를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은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이 시대의 대표적인 중검의 전형을 보이는 딜런의 검세를 직접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하룬의 실전 감각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딜런 역시 중급 5단계에 이른 메신저 스킬을 펼친 하룬의 빠른 공세를 경험하며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치 서너 명의 검수를 상대하는 듯 현란하고 빠른 하룬의 검술을 상대하는 것은 딜런에게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언제까지라도 계속되었으면 했던 수련도 결국 끝이 나고 말았다. 헤르쉬가 도착했다는 전언을 마리가 가져온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6개월 정도 있다가 오라고 할 걸 그랬네.’

 한창 실력이 쑥쑥 붙는 것이 느껴지는 시점에, 그것도 예정보다 20여 일 일찍 제국 정보 길드의 헤르쉬가 방문했다는 전언을 들은 하룬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헤르쉬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다가 하룬을 보고 일어났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타혼이 있었다. 그는 하룬과 함께 들어오는 딜런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늑한 곳이네요.”

 “좋은 곳이오.”

 “황자 전하들이 그리도 좋아하던 오미차가 알고 보니 이곳 특산물이더군요.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았어요.”

 아마도 얼마 후면 하룬이 촌장을 통해 구해 놓을 것을 제외하면 새로 오미차를 구할 수 없으리라.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빛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정보다 훨씬 일찍 들른 것을 보니 일은 잘된 것 같군요.”

 “네. 덕분에요.”

 과연 저력이 있는 제국 정보 길드다. 2개월이 조금 넘는 짧은 기간에 새롭게 조직을 정비했음을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딜런 경!”

 하룬은 타혼과 흡사 눈싸움을 하는 것 같은 딜런을 불렀다.

 “네, 대장.”

 “타혼이라는 분을 대접해 주시겠습니까? 전 자작 부인과 따로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룬은 그 말을 하면서 헤르쉬를 쳐다보았다. 헤르쉬 역시 호승심에 불타는 타혼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딜런은 외부인 앞이라 되도록 정중하게 하룬에게 대답을 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무표정한 가운데서도 강렬한 투기를 발산하는 타혼이 따랐다.

 “좋은 숭부가 될 거요.”

 “지난번부터 타혼 역시 벼르고 있었어요. 부디 불상사가 없기를 바라요.”

 그거야 하룬이 자신할 수 없었다. 검사란 모든 것을 검으로 말하는 자. 이제 그들은 검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사실 불안하기로는 하룬이더 심했다. 타혼은 이미 소드 마스터이지만 딜런은 이제 갓 그 경지에 발을 디딘 상태가 아닌가.

 “그래, 제국은 어떻소?”

 “어떨 거 같아요?”

 뜻밖에도 헤르쉬는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자신의 아버지가 하룬에게 얼마나 큰 수모를 당했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런 태도라니. 하룬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일단 말은 받아줘야 했다. 정보에 목이 마른 것은 자신 쪽이다. 물론 그 사실은 숨겨야겠지만.

 “지난 3개월 동안 딜런 경 때문에 여기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있었소.”

 “그래도 대장이시라면 다른 정보 라인을 가동하고 계실 테니 그간의 정황으로 보아 추측은 하고 있을 것 아닌가요?”

 뭐, 사실과는 다르지만 그녀의 시각을 보면 당연한 일이다.

 “황제나 왕으로 자신을 칭하는 황자가 몇 명이나 나왔소?”

 직설적인 하룬의 물음에 헤르쉬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조금 삐쭉였다.

 “총 다섯이에요.”

 “흐음, 좀 많군. 둘이나 셋이 될 때까지는 정신없이 치고 받겠군.”

 “잘 아시네요. 1황자가 개국한 테론 제국과 7황자의 미노스 제국은 그런대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어요. 남서부의 라인트 공작가와 남동부의 미노스 후작가의 워낙 영지가 넓고 상업이 잘 발달되어 있는 데다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위치이니 말이에요.”

 제국 3대 곡창 중 하나인 테르 평야를 끼고 있는 라인트 공작령은 물산이 풍부하고 제국 10대 상단 중 두 개나 있는 곳이다. 또한 남부의 세 개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이라 남부군 이십만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당연히 한 나라를 일으키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이며 강력한 카리스마와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1황자는 안정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을 것이다.

 남동부는 마수의 숲을 비롯하여 깊고 높은 산과 수심이 깊고 폭이 넓은 강으로 삼면이 막힌 곳이다. 그래서 미노스 후작가는 이곳을 거점으로 이미 수백 년 이상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려왔으니 새로운 제국을 건국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룬이 경험한 것에 따르더라도 1황자와 7황자는 분명 강력한 황권을 빠르게 확립할 자질과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11황자는 동부의 아이크 영지를 바탕으로 아스톤 왕국을 세웠고, 13황자는 서부의 바란트 영지를 기반으로 바란트 왕국을 개국했어요. 비록 영토는 작지만 각기 천혜의 조건을 가진 곳이라 세 제국도 이곳을 도모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역시 1황녀는 은인자중을 택한 건가?”

 하룬의 혼잣말에 헤르쉬의 눈이 반짝거렸다.

 “대장은 혹시 뭐 아는 게 없어요? 1황녀가 파코추 마탑에 웅크리고 있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아요.”

 알 리가 없었다. 다만 하룬이 대한 1황녀는 황권에 대한 욕심이 보이지 않았었다. 대신 그녀는 지식과 지혜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민심은어떻소?”

 “물어만 보고 궁금증은 안 풀어줄 건가요?”

 헤르쉬는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긴 했지만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정도의 큰 소식은 가까운 파로스 남작성에만 나가도 다 들을 수 있는 것이었고, 물어보는 하룬이나 자신도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을 정도의 정보였다.

 “그게 이상해요. 피노세 황제가 의외로 빠르게 민심을 얻고 있어요. 황도 역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평민들과 농노들은 노예 해방과 신분의 무한 세습을 금지하는 조칙 때문에 새로운 제국과 황제를 적극 지지하고 있어요.”

 “흠, 신분제의 개혁 혹은 폐지로 민심을 얻는다. 뒤에 누군가 있군.”

 하룬은 피노세 황제 뒤에 이방인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요. 신분제에 길들여진 황족이 과연 농노들을 위해 그런 파격적인 생각을 했을 리가 없어요. 누군가 뒤에서 황제를 부추기거나 조종하는 거겠죠.”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피노세 황제는 황자였던 만큼 신분에 대해서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역대 황제들 중에는 세금을 위해 귀족 영지의 농노들을 대거 평민으로 바꾸려고 시도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도들은 귀족들의 방해와 암살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 어느 황제도 신분제만은 제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처음에 그것이 알려졌을 때는 그야말로 제국이 난리가 났어요. 모든 영지의 농노들이 피노세 대공의 신생 파이론 제국으로 가기 위해 영지를 나섰거든요. 물론 해당 영주들은 군사를 동원해 이런 움직임을 봉쇄하려고 했지만, 그런 영주들이 오히려 성난 농노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영지성을 빼앗기는 일이 일어났어요. 막 건국한 네 나라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이런 혼란을 수습해야 했고, 그 때문에 새로 개국한 네 나라 모두 줄을 이어 농노제도를 폐지하고 상층으로 출세하기 쉽도록 신분법을 만든 상태예요.”

 역시 이 일의 이면에는 이방인들의 손길이 관여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전에도 없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이방인들의 출현으로 인해 정신문화적인 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아온 제국민들은 이제 그저 피로 세습되는 신분제를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개화가 되었던 것이다.

 이 비욘드의 시간으로 채 1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벌어진 일로서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지만, 골든 배틀과 피노세 대공의 새 제국 선포로 세상이 뒤집힌 상황이라 누구도 그 이면에 이방인들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이방인들이 가져온 변화는 정말 커요. 이방인들에게 무구를 제작해서 파는 대장장이들과 상인들은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고 그들은 영주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대항해 길드를 만듦으로써 공동으로 대처를 하고 있어요. 광산을 소유하고 있던 영주들 역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사병을 키우고 있어요. 이런 변화로 인해 오로지 농사만 짓고 살았던 평민들은 장사에 눈을 떴고 이전처럼 한 영지에 평생 머무르려고 하지 않아요. 이방인들 중 일부는 이런 평민들과 힘을 합쳐 악덕 영주들에게 대항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어, 향후 다섯 국가가 어떻게 이런 사태에 대처할지 궁금해요.”

 “정보 길드로서는 호재겠군요.”

 하룬의 말이 비아냥거림처럼 들렸는지 헤르쉬의 눈썹이 잠시 날갯짓을 했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거야 돌풍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긴 그렇소. 하지만 우리가 어디 제국 정보 길드와 견줄 정도나 되어야지 말이오.”

 “어머! 겸손도 하셔라.”

 헤르쉬가 돌풍의 실체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파헤치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아는 하룬은 다시 주제를 돌렸다.

 “그래, 대금은 제대로 챙겨 왔소?”

 “그래요. 신용이야 확실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헤르쉬의 모습에서는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들어 봅시다.”

 하룬은 세 가지 정보를 원했다.

 “지혜의 파편은 알려진 것이 총 두 개예요. 하나는 이제는 파이론 제국의 황궁이 된 곳의 황실 도서관 지하에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황실 마탑에서 소유하고 있어요.”

 “얻을 방법은?”

 “그거야 하룬 대장이 알아서 해야죠. 왜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네요. 검증의 관에도 있었지만 지금과는 다른 지식들, 그것도 기초에 해당하는 내용들만 영상으로 저장되어 있어 별로 그렇게 귀중한 물건은 아니라고 알려졌는데.”

 사실 지혜의 파편이 전하는 지식은 그렇게 귀중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대의 유물이긴 하지만 현대와는 다른 체계를 가진 각 분야의 기초 지식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검증의 관에서도 사람들이 잠시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포기했던 것이다. 그것보다는 마법서가 훨씬 더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스승이 없는 하룬에게는 방대한 기초 지식과 깊이 있는 가르침이 담긴 것이기에 소중한 것이었다.

 “의뢰 때문이오.”

 그 말에 헤르쉬는 이해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래도 고대의 유물이라 구하고자 하는 이는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황실에서 소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존재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이제는 찾는 이마저 없어졌지만 말이다.

 “실력이 뛰어난 이방인을 찾는 일은 조금 어려웠어요. 그들이 이방인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죠. 하지만 의심이 가는 명단은 작성할 수 있었어요. 모두 124명이에요.”

 “고맙소.”

 이건 당시에는 혹시나 싶어 의뢰한 정보지만 지금으로써는 상당히 중요한 정보였다. 자신을 둘러싼 음모에 베타테스터들이 관계가 있거나 혹은 자신처럼 그들 역시 실험체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건 이방인들과 연관이 있는 의뢰겠군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편하다. 사실 화장실도 없는 고요의 땅에서 용병들이나 다른 사내들과 물건을 내놓고 볼일을 본 일 때문에 하룬은 제국 정보 길드에서도 이제 이방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아예 버린 상태였다.

 ‘하긴. 엘프들과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으니 이방인들 쪽도 분명 정보망이 있겠지. 이방인 조직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쪽 세계에 이 사람에게 이름을 빌려 준 이방인이 돌풍 용병대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헤르쉬는 이미 이방인들 중 상당수를 포섭하여 제국 정보 길드의 정보용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로부터 최근 돌풍 용병대가 그들 세계에도 존재할지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자신들은 이제야 생각한 것을 이 하룬 대장은 벌써부터 하고 있다고 생각한 베론과 헤르쉬는 하룬을 적으로 삼기를 포기했다. 그의 숨은 힘이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보를 다루는 자들의 싸움은 귀한 정보를 얼마나 빠르게 입수하는가에 달려 있다. 좀 더 효율적인 정보망을 가동할 수 있는 조직이 승리하는 법이다. 어차피 고급 정보만을 취급하는 돌풍은 우리처럼 일상적인 정보까지 취급하는 거대 조직은 아니다. 따라서 부딪칠 일은 별로 없어. 차라리 그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헤르쉬의 귓가에는 베론 자작의 당부가 아직도 생생했다. 사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하룬만 보면 간담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닌 것이다.

 “세 번째로 요구한 정보는 직접 보여 드리지요.”

 헤르쉬는 잠시 한적한 곳으로 갈 것을 부탁했다. 나쁜 의도를 가진 것 같지 않아 하룬은 그녀를 이끌고 한적하고 넓은 산속의 한 구릉으로 안내했다. 개간을 하려다가 짐승들 때문에 포기를 한 곳이라 제법 넓고 평평한 땅에는 풀들만 지천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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