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원들》
오랜만에 보는 기지 주변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이제 막 붉게 물들어 가는 산의 나뭇잎들과 누렇게 말라가는 들판의 풀들은 너른 호수의 잔잔한 파랑의 속삭임을 들으며 번성했던 여름날의 추억에 빠져 있었다.
“와아! 완전 예술이네.”
“풍광 한번 끝내주는군.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기분이야. 유니온 밖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호수의 물은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몰라. 아마 보면 감탄할 거야.”
사람들은 멀리 보이는 기지 주변의 풍광에 감탄하며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다 데리고 가는 건지 몰라?’
걱정스러운 눈으로 대원들을 둘러보는 하룬의 머릿속에 이 일의 발단이 된 하루 전 일이 떠올랐다.
사이언스 마을을 떠난 하룬은 원래와는 달리 영흥 마을에 들르지 못하고 기지로 향했다. 원래는 유니온으로 가서 사람들을 떨어뜨리고 기지로 향하려고 했는데, 나인이 한 번 보았던 기지에 대해 무심코 헤니에게 흘리는 바람에 일이 이 모양이 되었다.
나인에게 그 말을 들은 헤니가 하룬에게 말했던 것이다. 일행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이다.
“대장, 나 현실의 돌풍 용병대 근거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요.”
헤니의 말에 놀란 하룬이 본능적으로 나인을 쳐다봤다.
“미안, 오빠. 어쩌다 보니 말을 하게 됐어요.”
나인은 울상을 지으며 사과를 했다.
‘에고! 비밀은 없는 법인데.’
어차피 오래갈 비밀은 아니지만 아직 이들과의 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난 어차피 돌풍 용병대원이니 갈 이유가 있잖아요.”
헤니는 당당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를 하자고요, 총사범님.”
사용과 보련이 어쩔 줄 모르는 철웅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과묵한 철웅이 드물게 불편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철웅이 한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장, 이렇게 움직이다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말이 나왔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지. 우리를 대원으로 받아주게. 최선을 다해 맡은 임무를 완수하겠네.”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난 처음 대장을 본 순간부터 대장을 따르고 싶었다고요.”
“대장, 나도 너와 함께하고 싶어.”
보련과 사용 그리고 럼까지 한쪽 무릎을 꿇고 입대를 간절하게 요청했다.
‘철웅 총사범은 조금만 더 체계적으로 수련하고 호흡법만 익히면 안정적으로 검기를 발현할 수 있다. 보련과 사용은 아직 덜 다듬어졌지만 몸이 날래고 기본기가 뛰어난 데다 검사에게 필수적인 요소인 투기와 집중력이 뛰어나니 장차 크게 발전할 거야. 다만 보련은 성정이 너무 차갑고 사용은 너무 가벼운 데가 있어 그것만 철웅 총사범이 잡아주면 될 거야.’
이미 같이 여행을 하며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후였다.
“좋습니다. 형제로 받아들이죠.”
하룬의 말에 네 사람은 펄쩍 뛰며 좋아했다.
“하하하!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요.”
“껄껄! 이제 우리도 드디어 안정적인 집이 생겼구나.”
철웅은 그동안 힘겨웠던 가장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 제일 좋았다. 주민으로 등록도 되어 있지 않은 불안한 신분으로 갖은 고생을 하며 검관을 냈지만 그래도 먹고사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던 것이다.
보련과 사용 그리고 럼은 이제 제대로 된 조직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물론, 하룬이 오르그와 하르크를 상대할 때 보여준 그 놀랍고 강력한 검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날아갈 것 같았다.
“대장, 나는요?”
레이스도 한자리 끼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달려왔지만 기회를 놓친 그녀였다.
“그렇게 해요. 어차피 나도 레이스의 그 이능력에 감탄했으니까.”
“꺄악! 나 취직했어. 럼과 같이 돌풍 용병대원이 됐다고.”
하룬의 말에 레이스가 좋아라 하며 가까이 있던 럼의 품에 안겼다.
“누나는 학교를 더 다녀야 하잖아?”
“헤헤! 학교는 상관없어. 사내 커플까지 되는 평생직장을 얻었는데 학교야 뭘. 우리 부모님도 뭐라 하지 않으실걸.”
“하긴.”
어차피 이능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레이스 역시 제대로 된 판정을 받기란 요원했다. 제대로 된 배경 없이 특출 난 실력을 가지지 못하면 결국 레이스 정도의 이능력자는 특수군에서 유니온을 위해 임무 수행을 하다가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것이 뻔한 미래였다.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인과 로수가 전사들을 끌고다가왔다.
“오빠, 나도 돌풍 용병대에 들고 싶어요.”
“그래. 너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이미 오누이와 같은 정을 느끼는 나인이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그녀가 가진 능력은 현재 하룬과 잘 조합되는 최상의 보조 능력이었다.
“나 로수 이하 서른 명의 전사들 역시 돌풍 용병대에 들겠……소.”
로수와 전사들은 아까 해무검관 사범들이 한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지식한 성격의 로수는 평소에 말을 놓다가 이제 관계가 달라질 거란 생각에 끝말을 흐렸다.
“로수 형님!”
로수는 하룬이 자신을 부르자 눈을 크게 뜨고 뜨거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형님이란 호칭이 영 불편한 눈치였다.
“그 이야기를 언제 하나 기다렸습니다.”
빙그레 웃는 하룬의 말에 로수와 열 명의 전사들은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사실 거절을 할까 봐 적지 않게 긴장을 했던 것이다.
“허허허! 부러운 광경이군. 마음이 통하는 이들이 하나로 뭉쳤으니 그 미래는 실로 밝을 거야. 하룬 대장, 웬만하면 이 늙은이도 받아주시게나. 비록 몸은 노쇠하지만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라면 도움이 될 걸세.”
황 박사의 말은 사실 너무 뜻밖이었다. 그간 여정에서 헤니에게 황 박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하룬이지만 그가 넥컴월에서 근무를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험한 일을 하는 용병대에 들어오겠다고 하는 것은 의외였던 것이다.
“그게…….”
하룬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답을 주저했따. 그러자 황 박사가 재차 부탁을 했다.
“내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나 또한 젊어지는 것 같고 사는 맛이 나서 그러네. 온통 젊은이들밖에 없으니 나 같은 사람이 중심을 잡아주면 좋을 것도 같고, 또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좋은 데 쓰였으면 해서 하는 부탁이라네.”
“가족은 어떡하시고요?”
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가족이나 직장 혹은 유니온에서 여러 가지로 이루어 놓은 일이 많을 텐데 그것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하룬의 의도를 노회한 황 박사가 모를 리가 없었다.
“허헛! 내가 헛살아서 여태 결혼을 못 했다네. 또 나머지 인연들이야 필요할 때 보면 되는 것들이고, 넥컴월에서 퇴사를 한 이후로는 당장 살 곳도 막막해서 백사회 사무실에서 기숙을 하고 있었다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안되어 보여서가 아니라 그 지식이나 능력을 이미 높이 인정하고 있었기에 부담감이 사라진 것이다.
“쳇! 그 정도 지식과 기술이라면 내가 더 쓸 만할 걸세. 황 박사 대신 차라리 더 젊은 나를 써 주게. 나야 대장이 아는 대로 이제 유니온에서는 지낼 곳도 없고 살인자들에게 쫓기는 입장이니 내가 더 불쌍한 신세네. 내가 가진 지식과 기술로 돌풍 용병대를 무적의 용병대로 만드는 데 일조하겠네.”
황 박사도 그렇지만 쏘우 역시 예상하지 못했는데 용병대에 들어오겠다고 했다.
‘확실히 쏘우의 말은 일리가 있어. 더구나 두 사람의 지식과 기술에 벨과 아리 그리고 아즈만의 능력을 더하면 향후 돌풍 용병대의 힘은 엄청나게 커질 거야.’
감히 청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본인들이 알아서 들어온다고 하니 거부하거나 뜸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좋습니다. 두 분 말씀대로 두 분이 가진 지식과 경륜 그리고 기술이면 우리 돌풍 용병대는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환영합니다.”
“허허허! 고맙네. 늘그막에 이제야 함께할 가족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 앞으로 열심히 쓸모 있는 대원이 되도록 노력하겠네.”
황 박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비록 노블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니온에서 나름 인정을 받던 그이지만 이제 늙고 허약해지니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헤니의 부탁으로 백사회의 일을 잠시 거들기는 했지만 그곳에서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조직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조직에서 일을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하겠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도형님으로 불러 주게, 대장. 사실 내가 외모가 이렇게 좀 추레해서 그렇지 저기 있는 철웅이나 로수보다 몇 살 더 먹지 않았네. 그런데 로수는 형님이고 나는 황 박사처럼 노인네 취급을 하는 건 영 불만이야.”
사실 하룬은 이제까지 쏘우를 사십 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 보았다. 그러니 삼십 대 초반으로 알고 있는 로수처럼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이제 겨우 서른여섯이야.”
“에엣?”
하룬은 믿기지가 않았지만 황 박사가 기꺼이 증인이 되었다. 그는 하룬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맞네, 대장. 워낙 어릴 때부터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실험실에 처박혀 연구만 하던 친구라 몸이 좀 왜소하고 말랐지. 더구나 그 집안이 원래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혈통이라네.”
“호오, 믿기가 힘들지만 박사님이 그렇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요.”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쏘우를 향해 몇 번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하다가 결국 그를 형님으로 호칭했다.
“쏘우 형님, 돌풍 용병대원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흐흐흐! 잘 부탁하네, 대장. 뭐, 이제까지 하는 것으로 봐서는 경어를 바라는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 굳이 높여 부르지는 않겠지만 대장으로 잘 모시겠네.”
“잘 부탁합니다, 형님.”
“흐흐흐! 그 형님 소리 참 듣기 좋군.”
쏘우는 의외로 형님이란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추레한 얼굴에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나름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티노 생각이 나서 정겹기까지 했다.
“대장!”
쏘우의 행동을 지켜보던 철웅이 그를 불렀다.
“네, 총사범님. 말씀하세요.”
“나 역시 하룬 대장에게 형님으로 불리고 싶네. 이제 해무검관도 없어질 판인데 그런 호칭은 의미도 없거니와 이제 서른셋밖에 되지 않았는데 쏘우…… 형님보다 더 나이 든 사람 취급은 받고 싶지 않다네.”
하룬은 내심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때문에 벌어지는 이런 일이 나름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게임 속에서 나이가들어 보이려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편인데, 이 사람들은 될수록 어린 제 나이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철웅 형님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하룬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철웅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럼 내가 나이로 보면 서열이 네 번째군. 저는 올해 딱 스물아홉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철웅 형님, 쏘우 형님.”
로수는 이제까지 서로 존대를 하던 사람들이 한 식구가 되어 흉금을 터놓는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나인 대신 마을의 촌장 후계자가 되어 어깨가 무거웠던 로수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웃어른들이 생긴 것이 좋았다.
“로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철웅이도.”
쏘우와 철웅 그리고 로수가 자연스럽게 서열을 정하고 이야기를 나누자 나머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의식할 수 있었다.
“저희는요?”
그러고 보니 아직 남은 사람이 셋이나 되었다. 바로 사이언스 마을에서 붙여 준 세 혹이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들 중 해서가 나서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백영과 비호 역시 같은 자세를 취하며 뜨거운 눈으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아직 정식 대원은 아니야. 연봉도 절반이다.”
이미 사이언스 마을에서 이들을 데리고 오는 순간 하룬은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사실이든 아니든 양부는 벨을 보내면서 그들을 맡아 달라고 했다. 사이언스 마을의 심복지환이던 하르크 일가를 해치웠기에 굳이 그 부탁까지는 들어줄 생각이 없지만, 막상 대해보니 기본기도 탄탄하고 성정도 바른 것 같아 마음에 든 것이다.
“감사합니다.”
“빨리 정식 대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세 청년은 하룬의 마음과는 달리 내침을 받을까 봐 마음고생을 했는지 살짝 눈물까지 맺힌 얼굴을 보여주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가 이제 한 식구가 되었군. 바로 전까지는 그저 일행에 불과했는데 말이지. 이런 것을 보면 세상은 참 살아볼 만한 것 같아. 가문에서도 버림받고 사회에서도 매장당한 내가 이렇게 많은 가족들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허허! 나도 그러네. 늘그막에 가족이 생겨 정말 좋다네.”
쏘우와 황 박사는 무척 감동한 얼굴로 기쁨을 드러냈다.
그렇게 모두가 한 식구임을 확인하고는 곧장 기지로 향한 것이다.
먼 거리에서 기지를 보았을 때는 마냥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가까이 가자 영 살풍경한 광경이 사람들의 눈을 자극했다.
“뭐지?”
집이 있던 자리가 새까맣게 탄 것을 본 나인이 놀라 달려갔다.
“허억! 벼락이 쳤나 봐.”
바위로 위장한 발전기들은 물론 기지 인근은 온통 새까맣게 탄 자국뿐이었다.
‘생각보다 잘 위장했네. 그래서 놈들이 안을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고 철수를 한 거군.’
이미 벨로부터 그 보고는 들은 바가 있었다. 골로리 가이아의 조직원들로 추정되는 무리는 하루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나름 조사를 했지만 1층과 지하 1층은 완전히 타 버렸고, 그 잔해 중에는 캡슐로 추정되는 것과 각종 기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떠났다고 한다.
벨은 벌레 형상의 초소형 사이보그를 만들어그들의 짐 속에 잠입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하는 대화는 물론 그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의 본거지나 집결지를 알아냈을 것이다.
“이게 다 뭡니까, 대장?”
사용이 흥분해서 소리를 쳤다.
“얼마 전에 벼락을 맞아서 그래. 일단 라나두들은 이곳에 매어 두고 짐을 내려. 난 안을 좀 살피고올 테니까.”
하룬은 나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휴우! 끔찍하군. 이건 완전히 다 타고 녹아버렸잖아.’
안락한 생활공간이던 1층은 완전히 새까맣게 타거나 녹아내린 잔해로 가득했다. 상황은 지하 1층도 마찬가지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계들과 금속들이 녹은 잔해들이 시꺼멓게 탄 벽이나 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룬은 그 잔해를 헤치고 뭔가를 찾았다. 원래 있던 계단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여닫는 문 자체가 완전히 녹아 붙었던 것이다. 그쪽에는 침입자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보였다.
찍히고 부서진 금속 문을 보아하니 아래쪽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강제로 부수려 했던 것 같은데 완전히 열린 상태는 아니었다.
가까이 가 본 하룬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서진 문 틈 사이로 역시 새까맣게 타 버린 계단이 보였던 것이다. 아마 침입자들은 제대로 된 공구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새까맣게 타 버린 계단을 보고는 1층과 지하 1층의 상황과 다름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철수한 것으로 보였다.
지하 1층의 한쪽 벽면에는 안 보이던 것이 캡슐 형태의 금속관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것은 벽을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로 누가 보아도 슈퍼컴퓨터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후후후! 벨이 아주 머리를 잘 썼군. 이 정도면 정밀 기기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누구라도 속아 넘어갔을 거야.’
하룬은 귀고리를 만졌다. 미리 통신을 할 생각이었는데 한 식구가 되어 버린 사람들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탓에 벨에게 사정을 알리지 못했던 것이다.
“벨!”
-오빠!
반갑게 부르는 벨의 목소리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진하게 담겨 있었던 것이다. 걱정과 우려 그리고 반가움과 설렘이 복합적으로 섞인 벨의 목소리를 듣자 진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지금 어디야?”
-섬에 있는 주 기지예요.
“어떻게 가면 되는데?”
-비밀 문을 만들어 두었어요. 기존 계단의 반대쪽을 보면 캡슐 모양의 관이 녹은 것이 보일 거예요. 그 관을 들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와요. 그쪽이 비상계단이 있는 곳이에요.
“오케이! 잠시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말을 좀 하고 갈게.”
-알았어요, 오빠!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요.
이전의 벨이라면 어떤 사람들이며 왜 이곳까지 동행을 했는지 잠시 물어볼 만도 한데, 그런 기색도 없이 빨리 오라고 성화인 것을 보면 정말 완벽한 휴먼체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허가 된 기지는 소리 없이 가동이 되고 있었다. 주인인 하룬이 돌아왔기에 더 이상 파괴된 것처럼 위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지하를 통해 연결된 호수의 섬에 있는 주 기지의 태양광 발전소와 수소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이 공급되자 하룬에게 제일 필요한 엘리베이터부터 가동이 되었다.
마그네틱 카로 이제까지 가 보지 않았던 호수 중앙의 주 기지에 도착한 것은 금방이었다.
-귀환을 환영합니다, 마스터.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순간 하룬은 아즈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
-벨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적절하게 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기까지 한 것을 보면 아즈만 역시 단순한 컴퓨터로만 볼 수는 없었다.
“아리는 어때?”
-이틀 정도면 분화가 끝납니다. 원래는 이미 다 끝났어야 하는데 아리의 의지대로 분화 과정을 변경하느라 늦어졌습니다.
“그래?”
하룬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실은 그 내용을 잘 몰랐다. 사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벨을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아즈만, 아니 아리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성에 대한 것이지만, 벨은 그에게 있어 피를 나눈 가족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주 기지는 총 몇 층이야?”
-총 102층입니다. 발전 시설과 방어 시설은 바위로 위장한 지상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하에 건설되었습니다. 지하 1층부터 10층까지는 햇빛을 인위적으로 끌어들여 농작물 재배가 가능하도록 시설되었고, 남은 92층은 저에 관련된 두 개 층과 주거 시설 열 개 층 그리고 나머지는 각종 연구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호오! 정말 이곳이야말로 기지라는 이름이 어울리네.”
-제 가동률이 높아지면서 입수한 이곳 자료를 보니 유니온의 기존 세력에 반발한 과학자 집단이 의도적으로 두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일단 유니온의 눈을 속이기 위해 호수 연안 기지를 대충 건설하고 나머지 자재와 기기들은 이 섬의 기지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때문에 유니온 쪽에는 연안의 기지만이 보고되었을 뿐 이 기지에 대한 자료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기지가 폐쇄된 거지?”
-이 기지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이들이 유니온에 반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기득권층이 파악하고 소환했으나 응하지 않자 암살자를 보내 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을 건설한 과학자들은 유니온의 전진기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유니온 한 해 예산에 해당하는 막대한 각종 기자재들과 희귀한 재료들 그리고 고가의 각종 첨단 장치들을 요구했지만, 암행 경찰 결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호수 연안의 기지만 드러났기 때문에 유니온은 이들이 타 유니온에 그 물건들을 빼돌렸다고 의심했고, 때마침 이들의 반역을 증명하는 증거가 나왔기에 암살단을 파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나에게는 잘된 일이군. 이제 수상한 무리가 올 일은 없는 거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곳을 다녀간 글로리 가이아의 조직은 이곳이 폐허로 변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상부에 올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즈만의 보고를 받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지하 1층까지 올라왔다.
문이 열리자 너무나 보고 싶던 얼굴이 그의 시선을 자극했다.
“오빠!”
와락 그의 품으로 달려드는 벨이었다. 그 서슬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안쪽으로 밀려난 하룬은 힘을 주어 벨을 안고서야 겨우 문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녀석, 몸무게가 많이 늘었네.’
깃털처럼 가벼운 벨이었는데 이젠 무게를 느낄 정도여서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제 와!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하하! 그래도 벨이 보고 싶어서 빨리 온 건데.”
“칫!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옆에 있어 주었어야지.”
“그건 미안해!”
말을 하다가 보니 가슴 어름이 축축했다.
‘이 녀석이 눈물을?’
정말 완벽한 휴먼체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하룬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그녀를 떼려 했지만 벨은 도리질을 치며 목에 감은 팔을 쉽게 풀지 않았다. 그저 엄마 품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아기처럼 그의 품에서 그의 체취와 온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룬은 이제야 지하 1층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오! 넓다!’
호수 연안의 기지에 비해 일단 다른 점은 실내가 엄청나게 넓다는 점이었다. 천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커다란 유리창이 나 있어 햇빛을 들이고 있었는데, 그 밝은 빛 속에 드러난 실내는 환상 그 자체였다.
‘수영장도 있어!’
실내에는 자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은 물론 수영장과 연무장 그리고 게임을 할 수 있는 공간들까지 벽 없이 이어져 있었다. 답답한 벽으로 격리되지 않은 공간들이 나름의 용도를 가지고 배치된 것이 무척 이채로웠다.
그리고 바닥에는 천장과 마찬가지로 크고 두꺼운 유리창이 일정한 간격으로 깔려 있어 아까 아즈만에게 들은 작물 재배실로 햇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넓고 큰 창을 통해 호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기지의 지하 1층이긴 하지만 호수 수면을 기준으로 보면 꽤 높은 위치에 있기는 했다.
‘이런 곳이라면 정말 살 만하겠다.’
하룬은 벨을 품에 안은 채 실내 공간을 구경했다.
벨이 하룬의 품에서 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오빠!”
그새 아즈만에게 부탁해서 새로운 옷을 만들었는지 벨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 마치 제복과도 같은 옷이었는데 한창 성장기라서 그런지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 입던 교복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성숙기 소녀 특유의 매력이 한껏 발산되는 옷차림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전보다 더 성숙한 얼굴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생경함과 함께 생동감이 흘러나왔다.
벨은 마치 새 옷을 입고 품평을 기다리는 것처럼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하룬을 보았다.
“하하하! 우리 벨, 정말 예쁜데.”
하룬의 칭찬에 그 큰 눈에 기쁨의 감정이 금세 차오른다.
“정말?”
“그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다.”
“히힛!”
이제야 얼굴의 긴장이 풀린 벨이 상기된 얼굴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 녀석도 이제 여자가 되어가는 걸까?’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려 벨을 안으며 하룬은 어쩐지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그 어리고 귀엽기만 한 벨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제 벨은 그의 유일한 가족이다.
‘이제 벨은 내 진짜 동생이야.’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하룬은 벅찬 감동에 휩싸였다.
아즈만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가 이해하는 것은 사고 이전에 벨이 그의 유전자를 자신의 줄기 세포에 융합했으며 그로 인해 그와 동일한 유전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벨, 이렇게 오빠에게 돌아와 주어서 고마워!”
“헤헷! 나도 오빠가 이렇게 기다려 줄지 알았어.”
비록 성숙해졌다지만 아직 예전의 그 모습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는 벨이기에 섭섭했던 마음은 금방 사라지고 따듯한 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몸 상태는 어때?”
“최고로 좋아!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투명해!”
“이전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는 거지?”
혹시 몰라 확인하는 하룬에게 벨은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꿈을 꾸는 동안 수백 수천 번이나 오빠와 같이 지낸 일들을 떠올린걸.”
다행이었다. 물론 이렇게 벨이 돌아온 것도 기쁘지만 같이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뭔가 머릿속이 시원해진 기분이야, 오빠!”
“시원해져? 자세히 말해 봐.”
혹시 안 좋은 부분이 있나 싶어 걱정스러운 하룬이다.
“전에는 오빠를 볼 때면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것이 없어졌어.”
“해야 할 일?”
“응. 난 싫은데 오빠에 대한 정보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속이 상했거든.”
하룬은 벨의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각인의 영향인가?’
자신에게 전혀 해로운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깊이 파고들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벨과 아즈만, 아니 아리에게 미지의 존재가 새긴 각인이었다.
“혹시 ‘가이아’라는 말 들어봤어?”
“응. 오빠가 전에도 물어봤지? 종말 시대의 유산으로 휴먼 시대를 열게 해준 에인션트 컴퓨터 중 하나잖아. 지금은 파손 정도가 심해 전지구위원회 본부에 있다는.”
벨의 말에 하룬의 굳었던 얼굴이 다시 풀렸다.
‘확실히 사라졌다. 가이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럼 예전의 기억은 어떨까?’
“그럼 혹시 예전의 널 누가 제작했는지는 기억나?”
“응. 벼락에 모두 타 버린 내 분체는 오빠의 양부인 청일 님이 제작했어.”
그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네 생명은?”
“그거야 당연히 오빠가 준 거잖아. 오빠가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본체의 마스터로 지정되어 첫 가동을 시켰잖아.”
당연한 것을 확인한다는 듯 샐쭉한 표정을 짓는 벨이 너무 귀엽다. 새침하면서도 샐쭉한 표정이 생소하면서도 벨이 이제 와전히 휴먼이 된 것 같아 너무 기뻤다.
“하하하! 하나도 잊지 않았구나.”
하룬은 공연히 크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튼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벼락으로 인해 전화위복이 된 건가?’
혹시 가이아라는 존재가 벨을 통해 자신을 특정한 미래나 방향으로 사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던 하룬은 벨의 말을 통해 그 찜찜한 마음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오빠, 나 배고파!”
“알았어. 오빠가 금방 먹을 거 만들어 줄게.”
이전이라면 해달라는 대신 냉큼 쪼르르 달려가 자신이 먹을거리를 마련했을 텐데 이젠 시키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하룬은 이 편이 훨씬 더 반가웠다. 정말 완벽한 휴먼체로 태어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서였다.
하룬은 혹시 몰라 간단한 유동식을 데우고 같이 식사를 하며 둘 사이에 있었던 얼마 안 되는 일들과 대화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다행하게도 벨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들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하룬은 사이언스 마을에서 입수한 아버지 청일의 다이어리가 담긴 태블릿 PC를 벨에게 주었다.
“종말 시대에 있었다는 태블릿 PC네.”
역시 벨은 금방 알아보았다.
“거기에 아버지가 남긴 연구일지가 있어. 연구에 대한 의견이나 과정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일기까지 포함된 터라 그 양도 엄청나. 이걸 발견하고 앞부분만 조금 봤는데 이 속에 아무래도 내가 전에 이야기한 단체에 대한 단서들이 있을 거 같아. 실제로 일부분은 내가 확인했고. 네가 한번 살펴봐 주렴.”
“그래? 알았어, 오빠. 나도 이전의 나에 대해서 궁금했어. 그리고 청일 님의 연구일지도 나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아.”
“부탁한다.”
“후훗! 내게 맡겨 줘.”
벨에게 맡겼으니 이제 이 문제는 일단 제쳐놓아도 된다. 하룬은 그만큼 벨의 능력을 믿었다.
“벨, 그리고 현재 에인션트 컴퓨터의 상황에 대해서 네가 알아볼 수 있겠니?”
“왜, 오빠?”
“뭔가 나하고 연관이 있는 것 같아 궁금해서 그래.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이전의 너처럼 인공지능을 가진 캡슐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해 볼게. 하지만 캡슐 건은 조금 어려울 거 같은데.”
캡슐이야 각 유니온 직영 회사들이 있으니 접근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꼭 알아봐야만 했다. 어쩌면 각 유니온의 캡슐회사들이 글로리 가이아라는 조직의 하수인들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넥컴월과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전지구위원회도.”
“알았어, 재미있겠다. 생체 사이보그 제작은 아즈만, 아니 아리 언니가 깨어나야 완전하게 진행할 수 있으니 그사이에 알아볼게.”
이제 예전과는 달리 거의 완벽한 휴먼체라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자신에 비하면 지식수준이나 과학 기술 수준이 엄청나게 높은 벨이니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이다.
“참, 지난번에 외부 기지를 방문했던 자들의 정체는 파악했니?”
“응. 로취(바퀴벌레) 사이보그들을 그들 집에 침투시켜 대화를 감청한 결과 알아낼 수 있었어. 그들은 ‘글로리 워리어’라는 조직의 일원이었어.”
“글로리 워리어?”
“응. 그들끼리 하는 이야기로 파악하건데 엄청난 조직이야. 단과 대 그리고 조로 나뉜 조직 체계로, 한 개 조가 열 명으로 구성된 것을 보면 최소 수백에서 수천이 넘을 것 같아.”
하룬은 글로리 워리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자신을 둘러싼 비밀의 실체에 한발 더 다가간 기분이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글로리 가이아라는 큰 단체의 하부 조직, 그것도 전투 조직이 틀림없었다.
“현재 그들의 위치는?”
“아직 배리어 밖이야. 현재 여기 있는 좌표에 몇 시간째 머무르고 있는데 아무래도 여기처럼 기지 같아. 로취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으니 추가 정보가 계속 들어올 거야.”
좌표를 보니 배리어와 몇 시간 정도 거리였다. 어쩌면 이들은 배리어 밖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들의 정체에 대해 생각에 잠긴 하룬은 벨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오빠, 그런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뭐야?”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둘 다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응. 돌풍 용병대원들.”
“돌풍 용병대라면 오빠가 게임에서 만든 용병대 아니야?”
그녀는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응. 이곳 현실에서도 돌풍 용병대를 만들려고.”
“괜찮은 생각이네, 오빠. 지속적으로 의뢰를 받아 수행하면 돈도 벌 수 있고 기지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어.”
역시 벨은 금방 하룬의 의도를 파악했다.
“아, 그럼 저 사람들 이 기지로 데리고 올 거야?”
“글쎄다.”
그것까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자신도 오늘에서야 이곳을 처음 구경하니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단 외부 기지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사실 나와 아즈만이 하고 있는 작업들 중에는 비밀로 유지해야 할 것들이 많거든.”
벨의 말에 하룬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 외부 기지야 토대가 파괴된 것은 아니니까 수리를 하면 주거하는 데 별 불편은 없을 거야.”
“응, 오빠. 사실 벽이나 바닥은 물론이고 각종 잔해들을 치우기만 하면 깨끗한 면이 나올 거야. 나중에 치울 경우가 생길까 봐 나랑 아즈만이 신경을 써서 작업을 했거든.”
“후후후! 그랬어? 우리 벨 정말 똑똑하네.”
“헤헤!”
하룬의 칭찬에 금방 자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비록 몇 살 정도 더 성장한 모습이긴 했지만 이전과 다름없는 벨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단 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고, 이 기지를 방어할 수단을 생각해야 해, 오빠.”
“방어?”
“응. 지난번처럼 수상한 무리가 침입을 할 수도 있고 북쪽에서 대규모로 남하하고 있는 오르그들도 생각을 해야 해. 우린 유니온처럼 배리어도 없으니 자체적으로 방어를 해야 한다고.”
그 말을 들은 하룬은 골치가 아팠다.
‘나인이 나머지 전사들을 다 데려오고 벨이 생산한 사이보그를 모두 합해도 채 육십도 되지 않는데 무슨 수로 이 기지 주변을 방어하지?’
하룬의 고심 어린 표정을 본 벨이 좋은 의견을 냈다.
“오빠, 이곳은 천혜의 요지야. 물 풍부하고, 햇볕 좋고. 호수 근처의 땅들은 비옥해서 농작물을 생산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야. 게다가 북쪽의 넓고 깊은 아름드리 숲과 서쪽의 바위산은 자연적인 방벽이잖아. 동쪽의 습지와 남쪽의 평야지대만 막을 수 있다면 엄청난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어.”
“그럼 범위가너무 커지는 거 아닐까?”
벨의 의견대로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는 것은 좋은데 그럼 동서로 적어도 15킬로미터, 남북으로는 18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땅이 되어버린다. 물론 그 중앙에는 직경 4킬로미터의 호수가 있지만 그래도 방어하기에는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단 생각해 볼 여지는 있어. 비록 이 주 기지가 호수로 인해 은폐되어 있지만 그 정도 영역은 확보해야만 이곳도 더 안전해질 수 있어.”
녀석은 언제 생각한 것인지 하룬은 꿈도 꾸지 못한 넓은 영역을 틀어막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 영흥 마을이 이주한다고 했으니 그럼 이곳으로 부를까?’
생각해 보니 기회가 좋았다. 그리고 벨의 말처럼 남쪽을 제외하고는 자연적인 방어 지형이니 조금만 인구가 불어 방책을 세우거나 벽돌로 벽을 쌓는다면 용광로 마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단단한 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생각난 김에 움직여야 했다.
“벨, 일단 오빠는 밖으로 나가 볼게. 저들과 의논을 해 봐야겠어. 나인이의 영흥 마을 주민들이 이주를 한다고 했거든. 이쪽으로 불러야겠어. 어차피 마을의 전사들이 돌풍 용병대원이 되었으니 그들 역시 이곳이 편하고 안전할 거야.”
“알았어, 오빠. 그럼 난 아즈만과 함께 어떻게 이곳 주변의 지형을 이용해 요새화를 시킬지 알아볼게.”
하룬이 기지 밖으로 나오자 웅성거리던 대원들이 그를 에워쌌다.
“어! 안에서 나오네.”
사용이 놀란 눈으로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볼일이 있다고 기지 안으로 들어간 하룬이 몇 시간째 보이질 않자 걱정이 된 대원들이 기지 안을 이 잡듯이 찾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하 4층에 있었는데.”
하룬은 손상이 되지 않은 지하 4층에 여장을 풀 작정으로 말을 꺼냈다.
“여긴 지하 1층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긴 했는데 다 엉망으로 망가졌던데.”
그래도 한 번 와 본 나인이라 의문을 드러냈다.
“아니야. 실은 지하 4층에 만약을 위한 주거 시설이 있어. 난 그곳으로 내려가는 비밀 계단을 수리하느라고 그곳에 있었는걸.”
“이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대장이 사라진 줄 알고 걱정했잖아.”
럼이 다행이라는 얼굴로 하룬의 팔을 잡았다.
“하하하! 그래서 대장이 폐허로 변한 집을 보고도 태연했구나.”
쏘우는 감탄했다는 얼굴로 하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하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하룬은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은 벨 때문에 그런지 감정이 무척 예민해진 것 같다.
“다들 안으로 들어갑시다. 내가 집을 구경시켜 줄게요.”
사람들은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짐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시꺼멓게 타 버린 바닥 한 곳을 건드리자 스르르 열리는 문 아래로 내려가는 긴 계단을 본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보였다.
용병대 본거지에 와서도 막사를 치고 자야 하는 것을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지하 2층과 3층은 벨이 흙으로 다 메워 버리고 고압 전류를 흘러 시꺼멓게 태워 버렸다. 혹시 모를 조사를 우려해 그렇게 한 것이다.
지하 4층의 주거 시설은 예전 지하 1층에 비해 손색이 있었지만 나름 넓고 공간 배치가 잘되어 있었다. 작업용 자이언트 기계를 조종하던 기술자들이 숙소로 사용했기 때문에 방도 많았고 방마다 욕실이 붙어 있었기에 더욱 좋았다.
이미 벨이 사이보그로 정리와 청소를 해 놓은 상태이기에 실내는 먼지 하나 없는 청결한 상태였다.
“와아! 끝내주는데.”
실내를 구경한 사용이 탄성을 질렀다. 남자들은 대부분 크고 넓은 거실과 각종 운동기구 그리고 무선 영상 장치들을 보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어머! 깨끗하다.”
레이스를 비롯한 여자들은 각방마다 놓인 침대와 깨끗한 시트에 놀라고 잘 정리된 가구와 정결한 욕실에 감탄했다.
나인은 마치 안주인처럼 실내를 구경하더니 방을 배정했다.
“방이 총 여덟 개인데 큰 게 세 개, 작은 게 다섯 개네요. 큰 방은 침대가 여섯 개니까 일단 전사 출신 대원들이 두 개를 쓰고, 태가 삼형제와 철웅 아저씨와 사용 그리고 럼이 하나를 쓰세요. 그리고 나를 포함한 여자들은 둘씩 한 방을 쓰고 황 박사님과 쏘우 아저씨가 하나를, 그리고 대장이 하나를 쓰면 되겠네요. 하나 남는 것은 꼭 혼자 방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대원이 쓰면 되겠어요.”
이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대원들은 일제히 흩어져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 여장을 풀고 몸을 씻기에 바빴지만 로수와 나인은 하룬에게 잡혀 있었다.
“형님 그리고 나인아! 할 이야기가 있어.”
두 사람은 심각한 하룬의 얼굴에 조바심을 냈다.
“무슨 일인데, 대장?”
“말해 봐, 오빠!”
“사실 이 호수 근처에 우리 용병대의 근거지를 정한 이유가 있어.”
그러면서 하룬은 가져온 종이에 근처 지형을 그렸다.
“나중에 우리 돌풍 용병대의 규모가 커지면 이곳에 큰 마을을 세우려고 했어. 자, 여길 보면 북쪽은 깊은 숲이고 동쪽은 늪지 그리고 서쪽은 바위산이야. 물론 우리가 온 길은 여기 동쪽의 습지대 옆이고. 남쪽만 제대로 틀어막고 나머지 방향에 지형을 이용해서 방책을 쌓거나 벽을 세우면 적어도 수천 명이 자급자족해서 살 수 있는 큰 땅이 나와.”
하룬의 설명을 들은 나인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럼 오빠, 우리 마을 주민들이 이리로 이주해도 돼?”
역시 지혜로운 나인이었다. 하룬이 의도하는 바를 그대로 짚어낸 것이다.
“응. 아무래도 마을 전사들이 모두 돌풍 용병대원이 되었으니 주민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 대원들도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마을 주민들도 안심이 될 테니까.”
“훗! 오빠 때문에 우리 차기 촌장 오빠의 고민이 한 방에 해결됐네.”
나인의 말에 로수를 바라보니 웬만해서는 별로 표정 변화가 없던 로수의 얼굴이 활짝 피어 있었다.
“하핫! 나인이 말대로야. 사실 이주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촌장님이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어디로든 이주를 해야 할 상황이라 척추 산맥 쪽으로 갈까 아니면 용광로 마을과 같은 큰 마을에 이주를 신청할까 고민하고 있었어. 대장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고민할 것도 없이 이리로 오면 될 거야.”
설마 거절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미 정해진 곳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던 하룬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근데 기존 대원들은 얼마나 되는 거야?”
아마 대원들은 그것에 대해서도 무척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응. 서른 명이야.”
비록 지금은 주 기지에 있는 사이보그 10기가 전부지만 앞으로 전투형 사이보그는 계속 만들 예정이다. 벨과 아즈만의 지식과 기술로 만들어진 사이보그들은 태가사남매처럼 휴먼과 섞여 있어도 거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흠, 그 대원들 실력은?”
그것도 궁금했을 것이다.
“태가사남매와 비슷해. 물론 저마다 특화된 분야는 따로 있지만 기본적인 무력 수준은 그 정도야.”
하룬의 말을 들은 나인과 로수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비록 하룬처럼 검기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태범의 검술 실력은 로수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고, 태력의 힘은 당해 낼 자가 없을 정도였다. 태연의 날렵하고 빠른 몸놀림과 은밀한 움직임은 게임의 어쌔신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이고, 태범의 치료술은 전문가는 아니지만 꽤나 훌륭한 수준이다. 게다가 아직 본 적은 없지만 파동건을 주 무기로 쓰는 것으로 보아 총기술에 일가견이 있을 것 같았다.
‘대단하잖아!’
생각보다 더한 전력이었다. 객관적으로 붙는다면 태가사남매를 감당할 수 있는 대원은 로수와 철웅 정도밖에 없는데 그런 대원들이 무려 서른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엇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푹 쉬고 내일 일찍 마을로 가서 주민들을 이주해 오도록 해요, 형님. 다른 대원들이 좀 지치긴 했지만 이주 문제가 급하니 서둘러야 합니다.”
“알았어. 그런데 대장도 같이 갈 건가?”
로수는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근처를 정찰 중인 대원의 보고를 입수했는데 그쪽 근처에는 별 위험 요소가 없다고 하네요. 그러니 전 굳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우리와 주민들이 먹을 식량 확보라든가 여러 가지 다른 할 일이 있거든요. 형님이 나머지 대원들을 대동하고 다녀오세요.”
“그렇게 하지.”
로수는 한순간 불안해했던 자신의 마음을 탓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룬처럼 하르크를 상대할 능력까지는 없지만 최소한 오르그들에게 당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더구나 막강한 실력을 가진 동료 대원들까지 있으니 걱정할 일이 없었다.
하룬은 혹시 몰라 나인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고글을 내밀었다.
“뭐야, 오빠?”
“나인아, 이 고글은 우리 용병대가 쓰는 정찰 사이보그인 호크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고 명령을 내릴 수 있어.”
“정말? 아! 그래서 오빠의 정찰 범위가 그렇게 넓었던 거구나.”
나인은 물론 로수도 이제야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하룬은 호크 사이보그를 조종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주기적으로 부는 자장 폭풍이나 간헐적으로 부는 자장 돌풍만 피하면 돼. 그 전조를 호크가 알려 줄 테니 들어오는 정보를 잘 파악하기만 하면 돼.”
나인은 정찰 호크에 관련된 내용을 금방 이해했다.
“복잡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오빠. 그런데 사이보그가 아직도 남아 있어? 사이보그 제작 기술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하던데.”
“제작 기술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보그가 남아 있는 거야. 우리 용병대가 힘들게 구한 거야.”
“후훗! 알았어. 아무튼 정찰 사이보그까지 있고. 우리 돌풍 용병대 전력이 정말 대단하네.”
나인은 정찰 사이보그의 존재만으로도 자긍심을 느끼는 눈치였다. 더 깊은 이야기까지 하면 아마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언젠가 이야기할 날이 있겠지.’
못 믿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모든 것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