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사이언스 마을과 양부의 비밀 (136/278)

《사이언스 마을과 양부의 비밀》

 다시 찾은 사이언스 마을의 외관은 그때와 똑같았다.

 “어서 오게!”

 연락도 없이 왔지만 알영 촌장은 하룬과 그 일행을 반겨주었다. 아리와 바리 역시 촌장과 함께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건강하셨지요?”

 “허허허! 나야 무슨 일이 있을 턱이 없지 않나. 그래도 요즘 들어 하르크 놈들이 다른 먹잇감이라도 찾았는지 잠잠해서 회춘할 것 같네.”

 인자한 웃음과 함께 농을 던지는 촌장은 일행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럼 촌장님은 곧 회춘하시겠네요.”

 헤니의 말에 촌장은 물론 아리와 바리까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맹랑하게 대화에 끼어든 아가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룬을 향해 의구심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촌장님의 회춘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하룬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전사들이 큼지막한 네 개의 보따리를 촌장의 앞에 가지고 왔다.

 “이게 뭔가?”

 “열어 보십시오.”

 하룬의 말에 바리가 눈짓을 보내자 마을 전사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매듭을 풀었다.

 “헉!”

 “하, 하르크!”

 “캐알 일가다!”

 매듭이 풀리고 하룬 일행이 잡은 하르크 일가 네 마리의 머리통이 드러나자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놀라 펄쩍 뛰며 경호성을 질렀다.

 “이, 이건……?”

 “이제야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룬의 담담한 말에 촌장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 하고 하르크 일가의 머리통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다른 마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바로 눈앞에 마을 주민들의 원수인 캐알 일가의 머리통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이놈!”

 촌장이 순간 소리를 지르면서 캐알의 머리통을 향해 주름이 가득한 주먹을 날렸다.

 퍼억! 퍼억!

 “이놈! 네놈이 내 아들을 잡아먹었지. 잘 죽었다! 잘 죽었어!”

 소리를 지르며 캐알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치는 촌장의 노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아리와 바리는 물론 따라 나온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하르크들의 머리통으로 달려들어 주먹과 발을 날리기 시작했다.

 “흐윽! 흑! 흑! 흑!”

 “벼리 아버지!”

 “홍아야!”

 사람들은 흐느끼거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 깊숙이 쌓아 두고만 있었던 한을 주먹과 발을 내지르며 풀고 있었다. 얼마나 한이 깊었는지 금세 단단한 하르크의 얼굴 가죽과 뼈로 인해 주먹과 발이 멍이 들어 심지어 금이 갈 정도가 되었지만 그 행동은 그치질 않았다.

 “그만! 그만해!”

 그들의 한풀이는 한참이 지나 촌장이 버럭 소리를 지른 후에야 그쳤다.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었지만 그 눈빛만은 아직도 서슬이 퍼랬다.

 “자네가 이놈들을 죽인 건가?”

 “네. 제 대원들과 함께 힘을 합쳐 잡았습니다.”

 “대원들?”

 “돌풍 용병대라는 단체입니다.”

 용병대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대충 하는 일을 감을 잡은 것인지 촌장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장한 일을 했네. 우리 마을의 숙원을 자네가 풀어주었네.”

 “양아버지의 부탁을 이제라도 완수해서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

 “고맙네.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게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네.”

 마을 주민들이야 뭔가 새로운 물건을 가져온 상행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하르크의 머리통을 잘라 가지고 온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난리가 날 것이다.

 촌장은 하룬 일행과 일일이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며 진심으로 반기는 모습을 보인 후에야 그들을 마을의 광장으로 사용하는 지하 7층의 대광장으로 안내했다.

 “저번에 왔던 그 이너야!”

 “청일 박사의 아들이잖아.”

 가장 앞서 촌장의 뒤를 따르는 하룬을 알아보는 주민들은 많았다. 청일 박사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기대하는 것이 컸던 영행이었다.

 하룬 일행은 곧 회의실로 안내되었고, 하르크들의 머리통 역시 광장 중앙으로 옮겨졌다.

 “아악! 하르크다!”

 “저놈은 캐알? 캐알의 목이야!”

 “흐흐흐! 원수 놈의 머리통이다.”

 하르크들의 머리통을 공개하는 순간 회의실은 난리가 났다.

 “그만! 그만해!”

 촌장이 소리를 지르고 몇 명이 질서를 잡으려고 애를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래저래 한 다리 건너 같은 피를 가진 주민들 중 가족과 친지를 캐알이라는 하르크 일가에게 잃지 않은 이는 없었던 것이다.

 곧 하르크들의 머리통은 사람들의 손과 발에 의해 엉망이 되어버렸다.

 촌장도 한을 푸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방치를 하고 말았다. 비록 자신들의 주먹과 발에 멍이 들고 뼈에 금이 가더라도 실제 행동으로 원수의 머리통을 치는 행위를 통해 가슴속에 쌓였던 원한이 풀리는 것을 그 역시 경험했던 것이다.

 “이젠 아버지의 유지를 모두 이룬 것 같아 기분이 홀가분합니다.”

 하룬의 말에 알영 촌장을 비롯한 사이언스 마을의 원로들도 청일을 추모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고맙네. 잊지 않고 우리 마을의 숙원을 풀어 준 점은 모든 이의 귀감이 될 거네.”

 “암. 말을 내뱉기만 하고 지키지 않는 휴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하르크 일가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혼자의 힘으로 잡은 것도 아니니 이어질 칭찬을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머물던 곳을 좀 둘러봤으면 좋겠습니다.”

 “알았네. 양아버지라고 들었는데 효심이 정말 지극하군. 아마 좋은 추억이 있었던 거겠지?”

 하룬은 말도 안 되는 알영 촌장의 말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추억이라니!

 청일과 그가 공요한 추억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신 양모의 구박과 잔소리 그리고 술에 취해 주절거리는 욕설을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양부인 청일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늘 지하 실험실에 머물렀다는 것과 가끔 나타났을 때의 그 꼬질꼬질하고 추잡한 몰골뿐이었다.

 “대장, 나도 가면 안 될까?”

 “나도 가고 싶네. 대단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그 흔적이라도 구경하고 싶네.”

 곁에 있던 쏘우와 황 박사가 동행을 요청했다. 그들 역시 청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기에 눈을 반짝거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세요.”

 하룬은 순순히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사실 안 될 것이 없었다. 자신은 실험실에 어떤 기자재가 남아 있다고 해도 알아볼 눈도 없거니와 그 가치도 모른다.

 ‘이들이라면 뭔가 남아있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몰라.’

 하룬이 굳이 청일의 사후에 폐쇄된 실험실을 가보려는 것은 벨의 제작 과정 중에 어떤 힘이 개입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나 흔적이 그곳에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황 박사나 쏘우와 같은 사람들도 인정할 정도의 대단한 캡슐 기술자였다면 누군가에게 순순히 이용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뭔가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으니 뭔가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이다.

 “안내를 해주지. 바리, 자네는 나머지 대원들이 쉴 수 있도록 안내해 주게나.”

 알영 촌장이 직접 하룬을 안내했다. 사이언스 마을 지하의 가장 깊고 외진 곳에 양부 청일의 실험실이 있었다.

 끼익!

 단단한 빗장을 풀고 문을 열자 먼지가 내려앉은 실험실 안이 눈에 들어왔다. 환기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은지 먼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약 50제곱미터의 넓이를 가진 실험실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각종 기계들과 전자 기기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호오! 이건 역장力場 발생 장치인데.”

 쏘우가 뭔가 발견하고 감탄을 했다.

 “흠, 맞아. 옆에 있는 것은 역장 제어 장치로 보이는군. 혹시 대장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광선검을 개발하려고 했던 걸까?”

 황 박사 역시 쏘우의 시선이 닿은 장치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청일 박사가 사망한 후 다른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기계와 전자기기 몇 개를 반출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놔두었네. 그가 연구하던 것이 특수 캡슐이었던 탓에 다른 마을 주민들의 연구와는 연관되는 것이 별로 없었거든. 그럼 난 먼저 돌아갈 테니 천천히 구경하게나. 문은 그냥 닫아두면 나중에 내가 사람을 시켜 잠그도록 하지.”

 촌장은 잠시 먼지가 내려앉은 실험실을 둘러보고는 관심이 없는지 서둘러 돌아갔다.

 하룬은 실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기계들과 장치들을 보면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막막하군. 이런 데서 뭘 찾겠다고 온 건지, 원.’

 하룬은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실내를 돌아다니는 두 사람과 달리 먼지가 적게 내려앉을 곳을 찾았다. 두 사람이 가자고 할 때까지 있을 생각이었다. 그동안 뭘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인 것이고 아무것도 못 찾아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몇 번이나 실내를 왔다 갔다 하던 하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작은 평판 앞이었다. 약 5×4인치의 크기를 가진 평판의 두께는 채 1센티미터도 되지 않아 한 손에 들어올 정도였다. 먼지를 닦아내니 평판 대부분을 차지하는 액정에서 묘한 광택이 흘렀다.

 “흠, 그건 종말 시대에 유행했던 태블릿 PC라는 놈일세. 홀로그램 영상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액정으로 된 화면이 필요했지. 입력이나 명령은 주로 전자 펜으로 했지만 필요할 경우 키보드를 연결해서 쓰기도 했다고 하네. 편의성과 이동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각종 영상을 보거나 사무를 처리하는 데 사용했다고 하네. 나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야.”

 홀린 듯 액정을 보고 있던 하룬에게 관심을 가진 쏘우가 다가와 설명을 해주었다.

 ‘그럼 종말 시대의 유산이라는 건가?’

 설명을 마친 쏘우는 여러 개의 캡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금방 잊었지만, 하룬의 생각대로 이 물건의 가치는 그냥 스칠 정도는 아니었다.

 ‘될까?’

 하룬은 평판의 옆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고는 액정 화면의 아래와 위쪽도 살폈다.

 ‘이거군.’

 강조하기 위한 것인 듯 조금 튀어나온 붉은색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버튼을 누르자 하룬의 얼굴을 반사하고 있던 액정에 처음 보는 화면이 빠르게 나타났다.

 ‘흠, 이건 대체 용도가 뭐였을까?’

 하룬은 살짝 기대를 하면서 화면을 유심히 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는 명령어가 떴던 것이다.

 “제길!”

 뭔가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했던 하룬이 실망해서 내지른 나직한 욕설에 쏘우와 황 박사가 다가왔다.

 “대장의 아버지가 쓰던 것인가?”

 쏘우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그의 눈에서 강렬한 호기심이 일렁였다.

 “흠, 어디 보자. 종말 시대에 쓰던 물건이니 옆에 있는 이 전자펜으로 직접 쓰면 되겠군. 혹시 이 안에 있는 내용을 보고 싶은 건가?”

 하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캡슐 제조 기술이라도 들어 있으면 정말 대박인데. 여기 있는 시제품들 수준이 임페리얼 컴퍼니의 것보다 한참이나 더 뛰어난 것을 보면 청일 박사의 캡슐 제조 기술은 아마 지구 최고 수준일 거야.”

 다양하고 깊은 지식수준과 기술을 가진 쏘우는 몇 번에 걸친 캡슐의 불법 개조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캡슐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일 박사의 기술 수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지만 워낙 불법적인 일이 능해 보이는 범죄자 스타일이기에 큰 기대 없이 물어본 하룬은 쏘우의 고개가 자신 있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내심 크게 기뻤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네. 아니, 조건이 아니라 부탁이 하나 있네.”

 “뭡니까?”

 “저기 있는 역장 발생 장치를 가지고 싶네. 내 손으로 보다 더 강력한 광선검을 만들어 보고 싶네. 또 이 안에 캡슐 제조 기술이 들어 있으면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게.”

 하룬은 잠시 생각을 했지만 촌장이 허락만 하면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촌장이 허락하면 그렇게 하지요.”

 “좋아.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

 쏘우는 입고 있던 옷의 소매를 위로 걷었다. 그러자 팔뚝 전체를 감고 있는 흑갈색 물체가 보였는데 그는 그것을 팔뚝에서 풀어내었다. 그러자 휘어졌던 물체가 펴지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나!”

 쏘우의 명령에 흑갈색 물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작은 인형으로 변했다.

 “안녕, 타로.”

 “마스터를 대합니다.”

 흑갈색 인형은 그사이 옷까지 갖추어 입고 있어 마치 게임 속의 정령 모습과 흡사했다.

 “타로, 이 녀석을 장악해야 해.”

 흑갈색 작은 인형의 반짝이는 눈이 하룬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로 향했다.

 “유물이군요. 종말 시대에 제작된 물건이네요.”

 귀여운 목소리지만 그 내용은 타로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대상물을 대충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래. 네가 장악할 수 있겠어?”

 “당연히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부탁할게, 타로.”

 쏘우의 말에 타로라는 흑갈색 인형의 작은 손가락 끝에서 아지랑이처럼 가는 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헉! BSIC!”

 가만히 쏘우가 하는 짓을 두고 보던 황 박사가 놀라 소리쳤다. 그가 말한 것이 무언인지 몰라도 반응으로 보아서는 대단한 물건인 듯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뭐야? BSIC라면 지능형 컴퓨터 생물체가 아닌가. 모든 전자 기기에 침투하여 자신의 영향하에 둔다는 최고의 물품을 어떻게 자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 전 세계에 몇 대 남아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황 박사가 흥분해서 물었지만 쏘우는 아무 대답도 없이 타로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하룬은 하룬대로 타로가 아즈만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컴퓨터였지만 살아있는 휴먼처럼 모습이 변환되는 것이 그랬다.

 다른 점은 아즈만은 본체가 따로 있었지만 이 타로는 그 자신이 본체이다. 아니, 그 점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 곳에 본체가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타로의 손가락에서 나온 실이 점차 많아져 마치 전선처럼 굵어지더니 곧장 하룬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의 잭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동해서 연결되었다.

 음성으로 명령을 내리는 기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포괄적인 명령어를 실행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공지능을 탑재했다는 증거였다.

 “흐음. 접속하는군. 좋아, 타로. 이번에는 장악해라.”

 쏘우는 무수한 숫자들의 나열밖에 보이지 않는 태블릿 PC의 화면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볼 수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했다.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황 박사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맙소사! 이 정도라니.”

 영문을 모르는 하룬은 오히려 담담했지만 황 박사의 얼굴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역시 타로의 능력은 엄청나군. 다 되었네. 기기를 완전히 장악했으니 대장이 새로운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게.”

 쏘우의 말에 하룬은 약간 멍한 상태로 곁에 있던 펜을 들어 아이디 난과 패스워드 난을 채웠다. 그러자 확인이 되었다는 사인과 함께 아이콘 몇 개가 있는 화면으로 바뀌었다.

 하룬의 눈이 각 아이콘들을 향했다.

 “과연 있군. 이놈을 사용한 보람이 있어.”

 어깨 너머로 아이콘의 하단에 있는 이름을 본 쏘우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눈이 향한 아이콘은 ‘특수 캡슐 제조 기술’과 ‘지능형 캡슐 제조’ 그리고 ‘초자아체 캡슐 개발 일지’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룬의 눈이 향한 곳은 그것이 아니라 다이어리 모양의 아이콘이었다.

 “아까 약속한 것을 잊지 말게. 아마 일지나 일기인 모양이니 자리를 피해주지.”

 “감사합니다.”

 “타로, 원래대로 환원해!”

 “네, 마스터.”

 쏘우의 새로운 명령어에 두 기기를 연결하고 있던 검은색 선 다발이 다시 실처럼 풀어졌고 금방 타로의 손가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타로의 모습 역시 아까 팔뚝에 차고 있었던 것처럼 변환되었다.

 ‘신기하군. BSIC라. 황 박사의 반응으로 봐서는 대단한 물건인 것 같은데. 언제 시간이 되면 물어봐야겠어.’

 기계치에 가까운 하룬은 이내 관심을 다이어리 모양의 아이콘으로 돌렸다. 신기한 물건이긴 했지만 벨의 능력이나 새로 태어날 아리의 능력도 그에 못지않아 별로 부럽거나 욕심이 나지는 않았다.

 하룬은 황 박사가 쏘우를 강제로 끌고 멀리 가는 것을 보고 아이콘을 클릭했다.

 ‘이건 일기이자 연구 일지로군.’

 처음 두 날짜에 해당하는 내용을 읽은 하룬은 일기의 내용이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연구하고 있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활에 대한 것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실로 방대해서 휴먼력 101년부터 시작하는 일기는 120년 4월까지 이어졌다.

 하룬은 천천히 앞에서부터 일지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세계에서 살던 양부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가 살았던 생활환경은 하룬이 겪은 것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뭐가 이렇게 어려운 용어들이 많아?’

 다이어리에는 일기뿐 아니라 하루 동안 이루어진 연구에 대한 내용들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그걸 읽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는 단어가 나올 때까지 빠르게 넘기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기다!’

 드디어 자신과 관계가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휴먼력 105년 1월 14일.

 유니온 과학부의 한 인물에게 비밀스러운 의뢰를 받았다. 현 WGC가 비밀리에 시행하고 있는 ‘신인류’ 프로젝트에 대한 자료를 제공할 테니 공격할 부분을 찾아보라는 의뢰였다. 대가는 내가 원하는 임페리얼 컴퍼니의 입사 보장이었다.

 무서운 일이다.

 ‘신인류’ 프로젝트에 대한 유니온의 자료들을 보고 난 후 난 전율과 충격에 빠졌다. 이런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실험이 전 휴먼들의 생명과 미래를 책임져야 할 WGC 집행부에 의해 저질러지다니.

 신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부모의 동의도 받지 않고 정자와 난자를 수집하는 불법적인 행위는 물론, 향후 수십 년 이상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감시와 관찰이 따라붙을 것이다. 더구나 친부모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태어나 제대로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라날 아이들이 걱정이다.

 어쩌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계획의 이면에는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 비록 내가 받은 자료에는 그 비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조각들만이 흩어져 있을 뿐이지만 따로 은밀하게 연관된 다른 자료들까지 수집한 나는 지금 확신하고 있다.

 내가 맞춘 퍼즐이 사실이라면 그 내용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다.

 각기 격리된 유니온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노블들이 실은 두 편으로 갈라져 있다는 것과 그 양측이 무려 100년 이상을 보이지 않게 싸워 왔다는 것을 안 순간, 난 신의 비밀을 안 것처럼 충격에 빠져 한동안 연구도 놓고 넋이 나가 일기도 쓰지 못했다.

 GG와 HG!

 약호밖에 파악하지 못한 이 두 단체는 마치 격리된 것처럼 보이는 유니온들을 그물망 같은 조직을 통해 지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들의 손과 발은 거의 모든 빅 유니온에 뻗쳐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조직이 지향하는 바가 무섭다. 전 유니온을 아우르는 거대한 조직의 실체야 알 길도 없고 알아낼 힘도 없지만, 뭔가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내가 추측하는 그들의 목표는 인위적으로 휴먼들의 미래를 조절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GG는 ‘신인류’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한 탓에 그들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GG라는 조직에서는 수정 과정에 비밀리에 관여하여 의도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물론 향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질 장기 프로젝트를 위해 세계적인 캡슐 기술자들과 해당 분야의 과학자들을 납치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HG의 정체와 의도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그들이 GG라는 조직에서 적대시하는 조직이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정녕 무서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단체들이 존재하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았을까? 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체를 감출 수 있는 그들의 힘과 권력이 두렵다. 도대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는 뭘까?》

 ‘GG?’

 처음 듣는 단체의 이름. 하지만 낯설지가 않다.

 ‘글로리 가이아?’

 하룬은 양부가 GG라고 알고 있는 단체의 이름이 글로리 가이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실재하는 단체구나.’

 뭔가 엄청난 비밀의 실체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때문에 그의 몸과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긴장이 되었고, 심지어 몸이 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럼 내가 그 단체의 실험체라는 말은 맞는구나. 빌어먹을!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 온갖 구박과 고초를 겪게 만든 것도 모자라 날 대상으로 실험을 해? 으드득!’

 하룬은 차오르는 분노로 인해 더 이상 일기를 읽을 수가 없었다. 전신의 털이 모두 곤두서고 귀로 열기가 새어나올 정도로 화가 났던 것이다.

 ‘왜 내 삶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거야? 왜?’

 하룬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또한 믿어지지 않게도 그의 머리통에 게임 속 그의 모습처럼 세 개의 뿔이 솟아나고 있었다. 전신의 근육이 무서운 기세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전신을 통해 끔찍한 살기와 기세를 방출하는 하룬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악마의 그것과 똑같이 변해 있었다.

 그때 저 구석에서 쏘우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이나 커서 먼지까지 들썩이게 만들 정도의 화가 난 목소리였다.

 “아! 그만합시다. 그래, 맞소. 내가 소우성이오. 됐소?”

 거친 쏘우의 말에 황 박사는 물어볼 때보다 더 놀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 때문에 하룬의 폭주를 우연히 막았다는 것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군. 하지만 자네는 이미 사고로 죽었잖아. 장례식 때 나도 갔다고.”

 황 박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5년 전에 이미 사망한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다니는 것을 보는 느낌이라니.

 “그 잘난 가문에서 날 죽였소. 공식적으로는 말이오.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소? 가문의 비밀을 파헤친 것도 모자라 상대 세력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었다고 난리를 치는데 후계자 따위의 신분은 아무런 보장도 될 수 없었단 말이오.”

 쏘우는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 일이 도대체 뭔가? 코원 유니온 최고의 천재 과학도이자 과학국의 실세인 소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가장 큰 영화를 누리던 노블 중의 노블인 자네를 이 꼴로 만든 일이 도대체 뭐냐고?”

 황 박사의 말에 쏘우는 이글거리는 안광을 텅 빈 공간으로 쏘아 보내기만 했다.

 “말할 수 없소. 비록 집안에서는 쫓겨나고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지만 그건 나와 우리 가문의 비밀이오.”

 쏘우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다가 힙겹게 말을 내뱉었다.

 “박사도 내 비밀을 지키시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우리 가문은 물론 적들과 유니온 정부에서도 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자들을 철저히 색출해서 안 좋은 꼴을 당하게 만들 테니 말이오.”

 “그러니까 그 비밀이 뭐냐고?”

 황 박사는 미련은 버릴 수 없는지 몇 번이나 쏘우를 채근했지만 그의 태도는 완강했다.

 “대체 뭐야? 뭐기에 위대한 천재가 그 꼴을 하고 이렇게 사는 거냐고?”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마시오.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안온하게 살고 싶으면 말이오. 난 그저 이렇게 사는 게 예전보다 훨씬 더 편하고 자유로우니 쓸데없는 관심이나 걱정은 사절이오.”

 “이런!”

 황 박사는 결국 쏘우의 비밀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에 차 있던 상태를 벗어나 버렸다. 그도 몰랐던 신체의 변화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는 모종의 가설이 떠올랐다.

 ‘양부의 일기에 의하면 유니온 상층부를 형성하는 노블들마저 지배하는 두 개의 세계적인 세력이 있다고 했어. 어쩌면 쏘우는 그중 한 단체의 비밀을 캐다가 그것이 알려져 거짓 죽음으로목숨을 겨우 건진 것이 아닐까?’

 그건 거의 확신에 가까웠지만 함부러 발설할 내용은 아니었다.

 ‘만약 쏘우가 황 박사의 말대로 그렇게 천재라면, 그리고 그를 이 모양으로 만든 단체가 글로리 가이아라면 날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룬의 생각이 맞는다면 자신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조력자를 우연히 동료로 받아들인 것이다. 적어도 쏘우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 있다면 그는 하룬의 훌륭한 동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룬 대장, 볼일 다 봤으면 나가세나!”

 생각에 잠겨 있던 하룬은 황 박사의 화가 난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죠.”

 일기는 기지에 가서 시간을 두고 읽을 생각이다. 아니, 벨에게 맡겨 글로리 가이아라는 단체와 자신에 대한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볼 생각이다.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일기 곳곳에 보이는 전문용어들이 그의 의지를 확 꺾어 놓았던 것이다.

 “자, 나가죠.”

 하룬은 문을 향해 걸으면서 이곳에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양부의 일기를 찾은 것은 정말 다행이야. 이제 단서를 찾았으니 내 출생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고 날 실험체로 이용한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어!’

 바닥의 먼지를 이끌고 문밖으로 나가는 하룬의 가슴은 뜨거운 열망과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광장으로 올라가니 대원들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 의식에 무척이나 고무된 얼굴이었다. 촌장부터 시작해 마을 주민 전체가 음식과 술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춤을 추며 마을의 원수인 하르크를 죽인 기념 축제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용광로 마을보다는 좀 낫군.’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기질을 많이 가진 용광로 마을 주민에 비해 사이언스 마을 주민들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후예답게 조금 얌전하고 점잖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서 오시오. 같이 즐깁시다!”

 먼저 올라간 알영 촌장은 벌써 거나하게 취해 하룬과 두 사람의 손을 잡고 한창 주민들이 춤을 추고 있는 곳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곤란하네.’

 먹고 노는 것이야 싫어하지 않지만 너무 충격적인 내용을 알게 된 이후라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던 하룬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쏘우와 황 박사 역시 그럴 기분이 아닌 듯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촌장의 손길에 버티고 있었다.

 “촌장님!”

 “어, 아리 장로! 어디 갔었나? 나랑 한잔하세.”

 촌장이 하룬과 두 사람의 손을 놓고 아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잖아요. 우리야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되지만 돌풍 용병대는 하르크와 격렬하게 싸운 후라 부상자들도 많고 쉬어야 한다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촌장님이 이러시면 어떡해요?”

 “으음, 흠! 쩌업!”

 아리의 고성에 촌장은 가뜩이나 붉어진 얼굴을 더 붉혔다.

 “그,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럼 자네가 손님들을 좀 안내하게.”

 촌장은 골치 아픈 일을 아리에게 맡기고 어느 틈에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미친다니까. 에잉!”

 아리는 화가 나는지 몇 번 발을 구르다가 이성을 찾고는 하룬을 보았다.

 “미안해요. 우리가 귀한 손님들에게 너무 예의 없는 모습을 보였어요. 너무 좋아서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하룬 대장이 좀 양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해합니다.”

 촌장마저도 아들 부부를 캐알이라는 하르크 일가에게 잃었다고 하니 오늘만큼은 원 없이 취하고 싶을 것이다. 평생 가슴속에 품고 있던 한이 녹으려면 어림도 없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래야 할 것이다.

 아리는 하룬 일행을 지하 8층의 접객실로 안내했다. 이곳이라면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묵은 적이 있어 잘 알고 있다.

 “자, 태범과 헤니는 부상자들의 상처를 다시 한 번 봐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로수 형님이 알아서 방을 배정해서 쉬도록 해주세요.”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안 그래도 쉬고 싶었던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하룬이 슬쩍 황 박사와 쏘우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딱 붙어서 태범과 헤니가 부상자들의 상처를 살피는 것을 돕고 있었다.

 “우린 좀 나갔다가 올게요, 대장.”

 레이스가 럼의 손을 잡고 하룬에게 다가왔다.

 “어딜 가려고요?”

 “축제를 즐기고 싶어서요.”

 부상자들을 생각하면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지만 다들 정신이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최근에는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던 럼도 가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제대로 연애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오래는 있지 마세요. 내일 떠날 거니까 일찍 쉬어야 합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대장.”

 “갔다 올게, 하룬 대장.”

 럼은 언제부터인가 이름 끝에 다른 사람들처럼 대장 소리를 달았다. 그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나름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 그대로 놔두었다.

 “대장, 우리도 가면 안 될까요?”

 럼과 레이스가 나가는 것을 본 사용과 몇몇 전사들도 축제를 즐기고 싶어 했다. 아직 오후이니 무료하기는 할 것이다. 어쩌면 저들이 없는 편이 부상자들이 쉬는 데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세요. 다만 사고가 생기지 않게 조심해요.”

 “알겠습니다, 대장.”

 사용과 전사들은 좋아라 하며 레이스와 럼의 뒤를 쫓았다.

 ‘확실히 내가 이상한 편이지? 왜 같은 청춘이면서 난 저런 자리가 별로일까? 양부의 일지에 나온 대로 난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되었기에 감정 면에 있어 다른 이들과 다른 걸까?’

 하룬은 잠시 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휴식을 취한 하룬과 그 일행은 떠날 준비를 끝마치고 지하 7층으로 향했다. 이제 아침 식사를 마치면 떠날 것이다.

 “흐흐흐! 이런 날만 있으면 아무리 오르그들이 득실거려도 돌아다닐 맛이 나겠다.”

 “자식! 아주 맛이 갔군.”

 “그럼. 용광로 마을이나 이 마을 아가씨들 모두 우릴 쳐다보는 눈길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숙소를 나가기만 하면 완전 끝내준다니까.”

 “하긴 나도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아 본다.”

 어제 축제에 참가했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온 영흥 마을 전사들은 식사를 하면서 옆의 동료와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제 피곤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상자들은 사이언스 마을 특유의 약품과 영양식 그리고 편한 휴식을 통해 상태가 급속도로 좋아졌고, 축제에 참석했던 이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래, 앞으로 일정은 어떤가?”

 촌장은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영흥 마을을 거쳐 유니온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조금 바뀌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르그들의 사태가 심각해 바로 유니온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룬의 대답에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던 바리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런데 내 부탁이 하나 있네만…….”

 촌장의 옆에 앉았던 바리는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하룬 역시 막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말씀하십시오.”

 “마을 청년 셋을 좀 맡아 주게.”

 “네에?”

 전혀 뜬금없는 소리에 막 물을 마시려던 하룬이 컵을 내려놓았다.

 “장차 마을을 지킬 전사로 키우는 아이들 중 셋이 자네 일행을 따라가고 싶다고 하네.”

 하룬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어디건 갇혀 사는 상태라면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 젊은이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광장 한쪽에서 긴장한 태도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세 마을 청년에게 향했다.

 바리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얼굴로 역시 그 세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녀석들이네. 힘이 좋고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혀 실력도 제법 된다네. 거기에 청일 박사가 제작한 특수 캡슐을 사용해서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각자 검술을 익혔으니 오르그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는 되네.”

 지난번에 하룬이 하르크를 상대할 때 조력자로 쓸 마을의 인재 셋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뭔가를 배우기 위해 캡슐에 들어가 가상현실 게임을 한다고 했었다.

 하룬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대꾸를 하지 않아서인지 바리는 잠시 어색한 얼굴로 하룬을 보더니 결국 본론을 꺼내고 말았다.

 “사실 우리는 그 녀석들을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수호 전사로 키우고 싶네. 그래서 자네 아버지에게 부탁해 현실에는 없는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힐 수 있게 가상현실 게임을 하게까지 했지. 장차 하르크를 상대할 자네에게 한 힘을 보탤 수 있게 해주려고 한 건데 상황이 이렇게 끝났으니…….”

 잠시 말을 멈춘 바리는 식사를 끝내고 주의 깊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촌장에게 살짝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촌장이 바리의 말을 받아 본론을 꺼냈다.

 “커험, 우리는 녀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네. 앞으로 우리 마을을 제대로 수호할 수 있는 경륜과 실력을 고루 갖춘 전사로 키워주게.”

 “전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룬은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 자신이 돌풍 용병대를 창설하고 새로운 각오로 현실 세계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지만 지금은 막 첫발을 내디딘 상태였다. 누구를 챙길 그런 상황도 아니었고, 챙길 실력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능력은 충분하죠. 하르크를 잡아 죽일 정도의 실력이 부족하다면 말이 안 되지 않을까요?”

 아리는 하룬이 그러리라 예상했다는 듯 지원사격을 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와 돌풍 용병대의 생존만으로도 힘듭니다. 누구를 키우고 보호해 줄 그런 여력은 없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급박한 위기 상황이 벌어지면 게임 속 능력이라면 모르되 현실에서는 그 역시 누구를 도울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하룬이 거절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지 바리와 촌장의 얼굴은 조금 다급해 보였다.

 사실 식사에 앞서 한 시간 정도 하룬과 이야기를 나눌 때 앞으로 마을의 의뢰는 돌풍에 맡기기로 한 만큼 하룬이 그들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좋네. 부탁의 내용을 정정하지. 내가 잘못 말했네. 최선을 다해 보호만 해주게. 키워주지 않아도 좋네. 그냥 용병대원으로 막 부려주게. 만약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죽는다 해도 대장을 원망하지 않겠네. 우리 마을의 향후 의뢰를 돌풍에 몰아주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

 바리는 처음에 비해서는 좀 간절해진 표정으로 재차 부탁을 했다.

 어느새 식탁 주위는 조용해졌다.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룬은 은근한 바리의 압력에 기분이 상했다. 하르크를 잡아왔을 때와는 또 다른 태도에 적지 않게 실망도 되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했다. 자연히 얼굴이 차가워졌다.

 “말은 그렇게 하셔도 막상 누군가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그 원망과 책임은 제가 지게 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아니면 심리적인 원망 같은 것이든 말이죠. 휴먼들이라면 안 그럴 수가 없지요. 더구나 그 대상이 사이언스 마을의 미래와 같은 인재들이라면 더할 겁니다. 그건 바리 님께서 자신하실 일이 못 됩니다. 더구나 우리 용병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상행 호위와 같은 가벼운 일보다는 주로 더 어렵고 힘든 일들을 수시로 맡아서 합니다. 희생이 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때문에 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설사 이 일로 인해 마을에서 우리 용병대에 한 약속이 파기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하룬은 단호하게 부탁을 거절했다.

 누군가의 생명을 책임지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럴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거니와 설사 있더라도 그런 막중한 일을 이해관계 때문에 떠밀려 맡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이전의 하룬이라면 이렇게 단호한 말과 행동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허어!”

 “쯧! 쯧!”

 촌장과 바리는 하룬의 태도가 너무 강경하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룬은 그들의 얼굴에서 난처함과 함께 강한 불만의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이게 더 좋을지도.’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영흥 마을 전사들이나 해무검관 사범들도 마을의 세 청년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렇다면 밖에 얼마나 흉험한지 과장을 해서라도 알려주어 마음가짐을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러고는 이내 박살을 꺼내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몽둥이처럼 생긴 박살에 집중되었다.

 “지금부터 보여드릴 것은 검기라는 겁니다. 바로 하르크를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힘입니다.”

 하룬은 그 말과 함께 진기를 검으로 주입했다.

 치지지짓!

 거짓말처럼 박살의 뭉툭한 검신에서 푸른빛이 선연한 검기의 날이 생성되었다. 그러자 몽둥이처럼 보이던 박살은 이제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도는 완전한 검으로 변해 버렸다.

 “오오! 검기다!”

 사용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마다 차이는 좀 있었지만 검기를 본 순간 반응은 비슷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된 검기를 본 검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잘게 떨며 열망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고, 검술에 문외한인 사람들 역시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떡 벌렸다.

 하룬은 광장 한쪽 벽에 걸린 오르그의 두개골을 목표로 박살을 휘둘렀다.

 싸악!

 툭! 툭!

 그 단단하던 오르그의 두개골이 단번에 두 쪽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망치로 쳐도 여간해서는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강한 오르그의 두개골이 반쪽이 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말을 잊었다.

 “이런 검기를 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가진 대원이라야 우리 돌풍이 주로 맡는 흉험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검기를 쓸 수 없다고 해도 다른 능력으로 이 정도 위력을 보일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요. 어쨌든 이 정도 실력이 되어야만 어떤 임무에서도 자신의 생존을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가 안 된다면 절대로 용병대원이 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 차이는 있어도 결국은 죽게 될 테니까요.”

 하룬의 말이 끝났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정신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럼 난 먼저 가서 준비를 하겠습니다. 태룡, 준비해!”

 “네, 대장!”

 명령은 태룡에게 내렸지만 태연과 태력 그리고 태범까지 태룡을 따라 광장으로 떠나 지상으로 올라갔다.

 하룬이 나간 광장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휴우! 정말 무시무시한 검기였어. 그 선연한 푸른색 검기라니.”

 그렇게 말하는 사용의 눈에는 뜨거운 열정과 하룬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나, 끝내주지 않아? 난 완전히 반했어.”

 사용이 보련의 팔뚝을 쳤다. 그녀 역시 몽롱한 눈빛으로 하룬이 사라진 뒤를 좇고 있었다.

 “우리가 하룬 대장을 따른다면 언젠가는 저런 검기를 쓸 수 있을까?”

 왠지 뜨거운 열망이 담긴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철웅은 작은 그녀의 말을 들었다.

 철웅은 아주 짧은 순간만 검기를 쓸 수 있는 경지이기에 하룬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발을 내디딘 경지이기에 그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컸다. 그동안은 사제들의 미래 때문에 나름 재고 있었는데 이제는 마음의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럴 거다. 지난 며칠 동안 태가사남매는 대장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잖아.”

 철웅의 말에 해무검관 식구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당장은 그런 실력이 못 되지만 먼저 길을 가 본 하룬이 지도해 준다면 자신들도 언젠가는 그 길을 같이 걸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가요, 총사범님. 대장 혼자 일을 시키는 건 우리와 같은 졸자들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요.”

 보련이 먼저 빠르게 광장을 벗어났다. 그 뒤로 철웅과 사용이 뛰어나갔다.

 “우리도 가야지. 아무렴 우리와 더 오랜 인연을 맺었는데 저치들보다는 유리하겠지.”

 “그래요. 하룬 대장의 성정이라면 노력하는데 도움을 외면할 리가 없어요. 일단 한 가족이 되고 나면 절대 우리 전사들을 무시하지 않을 거예요. 그 전에 저들보다 행동이 굼뜨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돼요.”

 로수와 나인의 말에 전사들이 일시에 광장을 빠져나갔다. 황 박사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허어, 참!”

 “어떻게 그런 걸 쓸 수 있는 거지?”

 모두가 빠져나간 대광장의 긴 식탁에는 촌장과 바리 그리고 아리만이 남아 있었다. 세 사람은 검기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런 강력한 무기를 아무런 도구 없이 펼칠 수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검기劍氣라고? 도대체 어떤 종류의 힘인 거야?”

 “나도 잘 모르니 내게 묻지 마십시오, 촌장님. 아무튼 저 정도 되니까 하르크를 잡아 죽였겠죠. 아무튼 대단한 능력을 가진 친구로군.”

 바리의 눈에는 아직도 푸른빛이 선연한 검이 그 단단한 오르그의 두개골을 그림처럼 반으로 가르는 장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이렇게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서 스스로를 가두지 않아도 될 거란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런 실력자가 한 명만 있어도 오르그들은 걱정하지 않으련만.”

 촌장의 한탄 섞인 말에 바리의 눈빛이 강해졌다.

 “보냅시다, 촌장님.”

 “무슨 수로. 대장의 태도로 봐서는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떼를 쓰든 억지를 부리든 우리 애들을 보내야 한다고요.”

 “그럼 자네가 하든지. 난 자신 없네.”

 촌장의 대답에 바리는 잔뜩 인상을 썼지만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가 평가한 하룬의 성격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었다. 그런 유형은 한번 결정을 내리면 여간해서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두 사람에게 다가온 세 청년 중 하나가 말했다.

 “뭐라고?”

 “두 분의 부탁하는 내용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눈빛이 유달리 맑고 강렬한 청년의 말에 바리의 얼굴색이 변했다.

 “누가 어렵고 험한 일을 하는데 보호해야 할 혹을 데리고 다니려고 하겠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

 촌장도 생각을 해보더니 수긍을 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우리 마을의 미래야.”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가 열망하는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숱한 위험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점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호 속에 안주하다보면 발전은 없습니다.”

 “그래도…….”

 바리 역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말인즉 너무 명백했기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저희 셋은 가상현실 게임에서 검술을 배운 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또한 지금까지 오르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세 청년의 얼굴과 목에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보였다. 그 흉터들을 본 촌장과 바리는 그의 말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렇게 위험과 맞닥뜨릴 용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변종 생물들을 감당할 수 있는 힘. 아까 하룬 대장이 보여준 검기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죽을힘을 다해 수련하는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피붙이가 아닌 이상 보호를 해주면서 능력을 키워줄 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마을은 이미 모든 외부 의뢰를 돌풍에 주기로 했다. 그 정도라면 너희들을 보호할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리는 여전히 불만인 듯했다.

 “아닙니다. 그건 원로님이나 마을 어르신들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또 다른 청년의 말에 촌장과 바리는 화가 나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촌장이 좀 더 나이가 많아 청년들이 쓸데없이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곤 애써 안색을 풀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백영의 말대로입니다. 어르신들은 현재 밖의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 오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란 말입니다. 조금 힘들다가 좋아질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촌장과 바리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을 더 말을 이어갔다.

 “다른 마을들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이미 아실 겁니다. 지금은 오르그들 때문에 어차피 다른 호위대가 오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파악한 대로라면 이것은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 이후로도 쭉 이어질 상황이죠. 즉 우리가 그들에게 의뢰를 하는 것이 돌풍 용병대에 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돌풍은 우리가 의뢰를 하든 하지 않든 별 상관이 없습니다. 아쉬운 쪽은 우리란 말입니다.”

 “그, 그것이…….”

 처음 나선 청년의 말에 촌장과 바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 역시 오르그들이 대거 남진한 일 때문에 많은 아우터 마을들이 초토화되고 깊은 산이나 보다 더 방어가 용이한 큰 마을로 이주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축제에 참가한 영흥 마을 출신의 한 전사와 대화를 나누어 봤습니다. 그들 역시 정식 대원이 아니었습니다. 이곳까지 온 경과를 들어보니 한 상회가 용광로 마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열 배의 위약금을 물 상황이 되자 인맥을 통해 하룬 대장과 각별한 이너에게 부탁해서 돌풍 용병대가 어렵게 호위와 운송을 맡았다고 하더군요. 우리 마을에 온 것은 순수하게 하룬 대장의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고요.”

 “…….”

 “그들 중 돌풍 용병대원은 대장과 네 대원이 전부고 나머지는 영흥 마을 전사 출신과 검을 수련하는 자들로, 향후 돌풍 용병대원이 될 수 있을지 능력을 검증받기 위해 이번 일에 동행했다고 합니다. 즉 돌풍 용병대원의 일은 이런 시시한 상행이나 호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르크를 잡을 실력이 있는데 왜 굳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든 상행이나 상단 호위를 하겠습니까? 더 벌이가 좋은 일들이 얼마든지 많은데요. 뭐, 예상으로는 유니온 정부나 대기업에서 의뢰한 특수한 일들이나 자체적인 일들을 수행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돈 따위에는 구애를 받지 않고요.”

 “그 말이 정말이냐, 해서야?”

 “네, 촌장님. 틀림없습니다.”

 촌장은 해서라는 청년의 말을 다 듣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실수한 것 같군. 애원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마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재미가 없을 거란 투로 이야기를꺼냈으니. 허허허! 이거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구나.”

 바리 역시 촌장과 마찬가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거 큰일이군요. 아이들을 부탁하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돌풍이 우리 마을의 의뢰를 거절한다면 마을이 완전히 고립되고 말 텐데.”

 “그러게 왜 대장의 심기는 건드렸어요? 나 같아도 열 받아서 다 때려치우고 말겠다. 쳇! 원로씩이나 되는 양반이 제대로 사태 파악도 못 하고.”

 세 번째 청년의 말에 바리의 굵은 눈썹이 순가적으로 꿈틀거렸다.

 “야, 비호 이놈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런 정보를 알았으면 진작 촌장님이나 내게 말을 해야지, 왜 안 해서 이런 사단을 만드는 거야?”

 “쳇! 작은아버지는 그게 틀렸다고요. 척 보면 모르겠어요? 이미 죽은 아버지, 그것도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양아버지의 부탁을 위해 일부러 하르크 일가족을 잡아온 실력을 가진 하룬 대장이라면 여느 호위대와는 격이 다르다는 걸 진작 알아챘어야지요. 그리고 주변의 상황은 두 분이 제일 많이 알고 있었잖아요?”

 “제길! 으드득!”

 바리는 조카 비호의 말에 한마디도 대응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비호도 생각하는 것을 원로씩이나 되는 자신이 간과한 것은 어떤 말을 해도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진작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저희가 직접 대장을 만나 뵙고 허락을 구하겠습니다. 대장 말대로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다면 한 치 앞으로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셋 다 죽을 수도 있겠지만 행여 운이 좋아 하나라도 살아남는다면 우리 마을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될 겁니다. 어차피 마을에서 보유한 무기들도 최소 10년에서 최대 20년이면 폐기처분될 상황인데 이대로 주저앉아 그날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해서의 말에 촌장과 바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젊은 패기에서 나온 말이라면 말리고 싶겠지만 마을의 미래를 위한 마음이 구구절절하게 느껴지니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해서의 말대로 이대로라면 마을의 미래는 없다.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를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반드시 셋 중 하나는 살아 돌아와 마을을 지키겠습니다.”

 절절하게 마음을 후비는 해서의 말이 아니더라도 뭔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통신들의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백만 이상의 오르그들이 유니온 북쪽까지 내려왔다니 이곳까지 내려오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그걸 여느 때와 똑같이 간과했으니.

 백년대계까지야 아니더라도 최소한 10년 후는 내다보고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그동안 너무 안일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찾아왔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 돌풍 용병대가 인원을 충원하려는 것 같으니 우리의 진심을 보이면 동행 정도는 허락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동행만 허락받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장의 지도를 받아 검기를 발현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겠습니다.”

 “해서의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두 청년의 읍소에 촌장과 두 원로의 마음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살아남을 기약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일이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현재 마을의 청년 중 그나마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것이 이 셋이기에 그들을 잃으면 마을의 미래는 더 암울해질 것이 분명했다.

 “아, 생각은 좀 적당히 하라니까요. 나이 먹으면 왜 생각이 많아지는지 몰라. 일단 해보고 생각하면 되지 무슨 고민은. 제기랄, 내가 몸을 바쳐서라도 꼭 검기를 발현시킬 비기를 배워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요.”

 “푸악!”

 “헛!”

 고민스러운 자리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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