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광로 마을로》
“돌풍 용병대라고요?”
약속한 창고에서 만난 물주物主는 어리게 보이는 하룬을 보며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아직 해무검관 식구들이 도착하지 않아 미리 연락을 취해 은밀히 유니온에 잠입한 태가사남매만 대동하고 나온 것이 좀 불안했나 보다.
“그렇습니다.”
“설마 이분들이 다는 아니겠지요?”
“네. 다른 대원들은 곧 올 겁니다. 유니온 밖에도 또 다른 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대답을 하는 하룬의 눈은, 눈초리가 위로 약간 치솟아 매서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사십대 초반의 여자 물주 뒤에 서 있는 뫼비우스에게 향해 있었다.
“아, 누님! 좀 어려 보이지만 비밀스러운 일만 하던 친구입니다. 이런 허접스러운 일을 할 레벨이 아닌데 누님 사정이 하도 딱해서 내가 일부러 부탁을 한 거란 말입니다.”
뫼비우스는 그녀의 등 뒤에서 얼굴 쪽으로 부드럽게 입김을 보내며 그녀의 허리를 슬쩍 매만졌다. 물주는 잘록한 허리로 뫼비우스의 손길이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마치 오줌을 싸고 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난 동생 말이라면 다 믿어.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피곤하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뜨거운 눈으로 보는 물주의 파르르 떠는 눈꺼풀을 보며 뫼비우스가 찡끗 윙크를 했다. 시비를 자신이 해결했으니 나머지 일을 맡긴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럼 가게로 가죠. 내 안마를 한번 받고 나면 피곤이 확 날아가버릴 겁니다. 이쪽은 전문가에게 맡기죠.”
“그래. 그래야 되겠어. 그래도 자기 때문에 이렇게 물건을 보낼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한지 몰라. 잘못했으면 계약 위반으로 암시장 쪽 가게와 물건들이 날아갈 판이었다니까. 날 챙기는 건 자기밖에 없어.”
하룬은 이젠 뫼비우스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콧소리까지 내는 여인에게서 화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단한 놈!’
또래도 모자라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여인까지 녹을 정도라니. 정말 저 잘난 얼굴과 화려한 언변은 너무 부러웠다. 실상 쓸 일도 없는데 말이다.
부러운 것도 잠시, 하룬은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레이스의 집에서 이틀을 불안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룬 대장이 미리 이야기한 대로 20킬로그램 단위로 짐을 포장해 놓았습니다. 여기 계약급입니다.”
두툼한 현금을 챙긴 하룬은 물주에게 물었다.
“물표는 누구에게 받으면 됩니까?”
“물표는 필요 없습니다. 용광로 마을의 원로 중 한 명이나 메탈 상점에 가져다주면 그쪽에서 알아서 무선으로 확인 통신을 보내올 겁니다.”
역시 물표도 없는 것을 보면 유니온의 허가 없이 이루어지는 밀거래가 맞았다.
“대장!”
“우리 왔어요.”
짐을 체크하는데 들리는 소리가 있어 눈을 들어 보니 레이스 일행이었다. 암살조를 해치우고 얻은 새로운 메탈 슈트에 편한 외투를 걸친 그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특히 럼은 눈까지 충혈되어 있어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앗! 당신은 해무검관의 총사범님?”
뫼비우스와 딱 붙어 있던 물주가 철웅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신지?”
“아! 일전에 한번 본 적이 있어요.”
얼른 말을 돌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밝은 얼굴이 되었다. 적어도 그가 나타난 것으로 인해 우려하던 하룬의 신분에 대해서는 안심을 한 것 같았다.
“자, 물건부터 챙깁시다. 배리어 밖까지는 일꾼들이 짐을 나를 테니 나머지는 여기 목록과 물건들을 나누어 체크합시다.”
“네, 대장!”
여섯 명이 함께 시작하자 물목을 체크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뫼비우스는 철웅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물주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님, 아는 사람이오?”
“아! 응. 철웅 사범이라고 굉장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는 분이야. 해무검관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분이기도 하고. 우리 아이…… 사범이었어.”
아이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뫼비우스는 그녀가 당황하지 않게 담담하게 받았다.
“그렇군요.”
“근데 저런 실력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 정도 실력잡니까?”
“응. 나도 아는 사람에게 소개받아서 아이를 가르칠까 했던 건데, 그 사람 말이 주민으로 등록만 되어 있으면 특수군 교관을 해도 될 실력이라더군. 아무튼 다행이네. 자기 말은 믿었지만 그래도 대장이라는 사람의 얼굴이 앳되어 걱정했더니, 저 정도 실력자가 대원이라면 믿어도 되겠어.”
물주의 만족한 얼굴을 본 뫼비우스의 얼굴은 잠시 굳었다.
‘도대체 이놈의 돌풍은 뭐야? 특수군의 교관을 해도 되는 실력자가 일개 대원이라고? 그럼 하룬이라는 친구 실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
도대체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게임에서건 현실에서건 돌풍 용병대와 하룬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돌풍 용병대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물주와 뫼비우스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가게로 향할 때 쏘우가 들어왔다.
“여어! 일찍 나왔군.”
그 작은 키에 맞게 메탈 슈트를 용케 개조했다 싶었는데 주렁주렁 몸에 매단 무기들을 보니 인사조차 나오지 않았다. 크고 작은 건Gun이 무려 여섯 개에 허리춤에는 전에 사용한적이 있는 종류 미상의 수류탄들이 즐비하게 매달려 있었다.
“바이크?”
압권인 것은 바이크였다. 뒤에 가죽 덮개로 덮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수레까지 매달려있는 바이크는 방위군이 타는 바이크에 달린 것보다 두 배나 큰 괴물 같은 타이어를 뽐내고 있었다.
연료 문제가 있긴 하지만 외형적으로 본 바이크의 모습은 사막과 황무지가 지천인 배리어 밖에서도 꽤 유용할 것 같았다.
‘참 불가사의한 인물이군.’
어디 살기에 저런 물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끌고 오는지 몰라도, 수레에 실린 물건들도 무기 종류 같은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합류가 끝까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쩌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 대장, 아직 출발하지 마세요.”
물주와 사무실로 갔던 뫼비우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 막 출발하려는 하룬을 말렸다.
“바낙운 사람들이 올 겁니다.”
“반가운 사람들?”
“네. 게임 속 돌풍 용병대원도 있고 거기의 하룬 대장과 오랜 인연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하룬은 순간적으로 겨루를 떠올렸다. 특수군 출신이니 이런 일에 잘 어울릴 대원이었던 것이다.
‘아니지! 그는 하반신 마비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그랬다. 그렇다고 뒤늦게 용병대에 합류한 마리나 방커는 뫼비우스와 한두 번 얼굴을 본 사이에 불과했고 그들 사이엔 그다지 큰 접점도 없었다.
‘헤니인가?’
막 헤니를 떠올리는 순간 창고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머! 정말 거의 똑같네!”
한눈에도 헤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외모 보정을 거의 하지 않은 헤니가 그를 향해 놀란 눈빛을 던졌다.
‘안경을 썼던가?’
안경은 쓴 모습은 보지 못했다. 수수한 외모지만 맑고 빛나는 눈빛 때문에 이지적으로 보이는 헤니가 안경을 쓴 모습은 묘하게도 현실감을 주는 동시에 이질감을 주었다.
“안녕하세요. 전 헤니라고 비욘드의 돌풍 용병대원이에요. 혹시 저에 대해 아시나요?”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장에게 제 얘기를 들었군요. 설마 제 흉을 보지 않았겠죠?”
“똑똑하고 영리한 아가씨라고 하더군요.”
“히잉! 이것 봐. 우리 대장도 나 예쁘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아. 아이, 속상해.”
하룬의 말에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헤니를 보니 기분이 좀 요상했다. 게임 속의 헤니와 비교하면 두 배는 더 활달하고 밝은 느낌이었다.
“전 아레스라고 합니다. 정말 게임 속 하룬 대장과 많이 닮았네요.”
아레스가 악수를 청해 왔다. 게임 속과는 달리 꽤 몸집이 있었는데 카메라만 세 개를 목에 걸고 있어 기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룬입니다. 들은 것과는 달리 몸이 조금 있군요.”
“하하하! 외모 보정을 좀 했습니다. 아무튼 하룬 대장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좀 이상하군요. 반갑습니다.”
악수를 나눈 후 보니 헤니의 뒤에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반백의 머리칼에 깡마른 얼굴을 가진 꽤 나이가 있는 남자는 깊고 온화한 눈빛으로 하룬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어머! 황 박사님. 그렇게 빤하게 쳐다보시면 실례잖아요. 하룬 대장님, 이분은 제 대학 시절 은사이신 황 박사님이세요. 주 전공은 인류학이지만 관심 분야는 수십 개가 넘는 분이세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니 좀 불쾌하시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하룬은 황 박사의 눈빛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호기심 이외의 악의는 느낄 수 없었다.
“허허! 황이라고 하네. 넥컴월에서 근무하다가 비욘드 게임의 무대가 가상현실이 아니라 지구 공동에 있는 세계이거나 타 차원의 세계라는 연구 결과를 제출했다가 잘렸다네. 그나저나 꽤 젊어 보이는군, 자네?”
나이 정도야 어차피 큰 비밀도 아니지만 이런 사람에게 일일이 대답했다가는 밑천이 다 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큰 인연이 없으니 애초에 무례하더라도 그 호기심의 싹을 잘라야 했다.
“비밀이 많아야 안전이 유지되는 신분이라 호기심을 충족시켜 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황 박사님.”
하룬은 일단 점잖게 그의 호기심을 경계했다. 그런 부류는 게임 속 마법사들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한번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면 끝없이 달라붙는 타입이다. 더구나 이들은 아직 모르는 사람들인 것이다.
“뭐, 일단은 이렇게 본 걸로 만족하네. 나머지는 차차 알아 나가면 되겠지. 신비에 가려진 인물답지 않게 눈빛이 정말 좋군. 강한 의지와 강렬한 힘이 있어서 자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 힘을 나눠줄 것 같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모두 좋은 사람들로 보이지만 게임과 현실 간의 괴리도 있었기에 감정 정리가 필요했다. 헤니와 아레스의 경우 게임 속 이미지와 현실의 실제 모습이 좀 차이가 나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더 즐거운 자리일 것 같은데 하필이면 할 일이 있어 그만 떠나야겠습니다.”
레이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흥미롭게 그 광경을 보았지만 서둘러야만 했다. 유니온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가시나무 숲 앞에서 영흥 마을 전사들과 만나기로 했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야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갈 수 있다.
“저도 갈게요.”
하룬은 헤니의 말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맞게 들었는지 확인을 하고는 물었다.
“왜요?”
“전 이미 돌풍 용병대원이에요.”
그녀의 태도는 너무 당당해서 하룬도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여긴 비욘드가 아닙니다만.”
“난 돌풍 용병대원이라니까요.”
말도 되지 않는 이유지만 묘하게도 설득력이 느껴졌다. 이들은 모르겠지만 하룬은 비욘드의 돌풍 용병대와 이곳 현실의 돌풍 용병대가 동일한 존재라고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만든 단체이며 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전 돌풍 요병대 전담 기자입니다. 저도 가야 됩니다. 배리어 밖은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거든요. 요즘 바깥 세상이 무척 위험하다니 생생하게 취재해야죠.”
헤니의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레스가 은근슬쩍 끼어든다. 게임 속 이미지와는 다르지만 기자 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단춧구멍처럼 작은 눈에서 강렬한 열정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데려가면 큰 이득이 있을 걸세. 내가 유니온 주변으로 반경 100킬로미터 지형 지질은 꿰고 있는 사람이니까. 더구나 주변 마을의 아우터들 중에 친교를 맺고 있는 이들이 꽤 되네.”
황 박사까지 대열에 끼어들었다.
‘참 난감하군. 왜 갑자기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거야?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데.’
하지만 바깥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황 박사나 헤니의 복장은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화 필터가 부착된 마스크와 보안경은 물론 긴 천으로 노출 부위가 없도록 감은 것이나 핵 전지가 내장된 전기 충격봉과 파동건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외부 경험이 꽤 많은 것 같았다.
다만 아레스만이 준비가 좀 부실했다. 조언을 들었는지 그런대로 복장은 갖추었지만 허술했던 것이다.
“대장!”
돌아보니 철웅이 자신의 시계를 가리킨다. 빨리 출발을 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좋습니다. 보아하니 두 분은 배리어 밖 경험이 있는 것 같으니 같이 갑시다. 아레스 씨라고 했나요? 당신은 안 됩니다. 지금 배리어 밖은 호기심으로 뛰어들 그런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물론 촬영을 할 정신도 없을 거고요. 뫼비우스 씨!”
“네.”
“이분은 못 갑니다. 본인이야 어떤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초보 한 명이 끼어 있으면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전력이 날아갑니다.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뫼비우스는 절대로 자신도 가야한다고 난리를 치는 아레스를 강제로 끌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초보가 얼마나 성가신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초보와 함께하면 100% 깨지는 것은 헌팅이나 마찬가지겠지. 제대로 여자들 마음도 알지 못하고 버벅대는 초보랑 같이 있으면 여자를 자연스럽게 침대로 데려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니가.’
뫼비우슨느 미끈한 외모도 외모지만 제법 힘도 셌기 때문에 몸집만 컸지 물러 터진 아레스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끌려 나갔지만 자신의 본분만은 절대 잊지 않았다. 잠시 뒤에 다시 돌아온 뫼비우스가 헤니에게 내미는 손에는 이마에 차는 헤드 캠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헤니와 황 박사가 큰 도움이 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헤니는 자신과 인연이 많았고, 황 박사는 스스로 한 말대로 주변 지형이나 지질을 잘 알고 있다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행을 허락한 것이다.
“자, 짐부터 옮깁시다!”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괴력의 소유자인 태력이 20킬로그램짜리 짐을 양손에 네 개씩 잡고 성큼성큼 통로로 향하자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용광로 마을은 남서쪽의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종말 시대에는 엄청난 규모의 제철소가 있었고, 전쟁 동안에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각종 합금과 철판을 생산했기 때문에 강력한 방어 무기들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때 설치되었던 무기들은 비록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며 폐기되거나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노후화되었지만 유니온 초기 노블 형성기에 그런 분위기에 반발한 한 과학자 집단이 그곳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무기들로 단단히 방어막을 형성한 안전지대 중 하나였다.
일행은 라나두에 짐을 싣고 이동을 했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자기 폭풍과 강렬한 햇빛을 피해 하루에 열 시간 정도만 이동이 가능했지만, 길을 잘 아는 영흥 마을 전사들과 지형지물에 익숙한 황 박사의 지식 덕택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하룬은 로수에게 이동하는 대열을 맡기고 멀리 앞으로 나가 정찰을 담당했다. 게임 속이라면 티노가 이 역할을 할 테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영흥 마을 전사들도 정찰이라는 개념은 아직 확립되어있지 않았다.
굳이 그가 정찰을 자청한 이유 중에는 최근 급속도로 진전을 보이고 있는 메신저 스킬을 익히려는 것도 있었다. 탈출을 하느라고 여유가 없어 게임 안에서도 유일하게 수련한 메신저 스킬의 진경이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자각했던 것이다.
‘선더볼트 때문에 각성을 한 이후에 내 능력의 발전 속도가 눈에 뜨게 빨라지고 있어.’
각성을 겪은 뒤 시간을 두고 수련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것은 메신저 스킬을 통해 흡수되는 기의 양이 각성 전에 비해 대여섯 배에 이를 정도로 늘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현재는 마스크나 헬멧으로 피부나 얼굴을 가리지 않더라도 강렬한 햇빛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있었다. 또한 마나 플로를 운용하여 깊고 긴 호흡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오염 물질들을 자연스럽게 정기적으로 배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서 형식적으로 마스크는 쓰고 있었다.
출발한 지 사흘이 흘렀다.
하룬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한차례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찰을 위한 이동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메신저 스킬을 수련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정찰은 아즈만이 제일 먼저 만들어 낸 정찰 사이보그가 맡고 있었다.
하룬은 고글을 통해 정찰 사이보그인 호크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었다. 사방 10킬로미터에 이르는 정찰 반경으로 인해 그는 자연스럽게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배리어 밖에는 수많은 오르그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하나도 만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서 방향을 틉니다. 황 박사님, 이쪽 지형은 어떻습니까?”
“흠, 이쪽은 구릉지이긴 하지만 위험 요소는 별로 없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자기폭풍이 별로 없는 곳이네. 그런데 또 방향을 바꾸는군. 뭔가 아는 정보라도 있는 겐가?”
하룬은 구태여 그런 사실까지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진정한 동료가 아닌 이상 굳이 그런 것까지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흐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르그들을 귀신처럼 피했으니 대장이 뭔가 아주 확실한 실시간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네. 아무튼 피해가 없으면 좋은 거지. 가만있자, 이 앞쪽이면 작은 산이 하나 있던가? 그리고 폐허가 된 작은 마을 하나가 지나는 길에 있고 지형은 완만해서 이동하기는 괜찮을 걸세.”
일행은 황 박사의 말에 수긍하면서 묵묵히 방향을 틀었다. 나인과 열 명의 전사들은 궁금하다 못해 신기한 눈치였다. 여기까지 오는 사흘 동안 오르그들이라고는 멀리서 본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는 거지?”
과묵한 로수마저도 궁금한 모양인지 나인에게 속삭였다.
“달리 돌풍 용병대겠어요.”
사실 나인도 그 내막을 알 길이 없기에 그렇게 말할 뿐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그동안 게임에서 회자된 돌풍 용병대의 유명세를 잘 알고 있는 전사들은 쉽게 이해를 했다.
‘게임 속의 돌풍 용병대만큼 신비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그렇다고 특별한 기계를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위험 요소를 정확하게 알아내어 피하는 것을 보니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일을 한다면 별다른 위험 없이 임무를 빠른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헤니 역시 많이 놀라고 있었다.
‘게임 속의 하룬 대장이 보여 준 정찰 능력과 비슷해. 도대체 어떻게 정찰을 하는 거지? 유니온 정부나 거대 기업들의 은밀한 일을 비밀리에 한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하긴 이 정도의 능력이라면 나라도 쓰겠다.’
현실의 하룬은 비욘드의 하룬 대장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과묵하고 진중한 무게감을 풍기는 것은 비슷했지만 현실의 하룬은 게임의 그보다 주의력이 뛰어나고 신중했다.
‘지휘력은 뛰어나. 카리스마도 상당하고.’
한참이나 연배가 위인 황 박사도 하룬을 쉽게 대하지 못했다. 나이와는 관계없는 무게감이나 풍기는 기세는 또래인 헤니와 견줄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남을 이끌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위압감과 정확한 판단력은 짧은 시간 내에 동행한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도 럼을 친구로 여기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였다.
“자, 좀 쉬었다 갑시다.”
나무 몇 그루가 만들어 낸 그늘이 보이자 기다리던 지시가 떨어졌다. 벌써 세 사긴 동안 휴식 없이 걸었던 터라 다들 지쳤던 것이다.
하룬은 쉬는 일행과는 달리 다시 메신저 스킬을 수련하기 위해 전방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진하고 풍부한 자연의 순수한 기를 마음껏 흡수할 생각을 하니 절로 신이 났다.
그렇게 한창 메신저 스킬을 펼치며 체내에 흡수된 기를 의지를 부여해 하단전으로 보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하룬은 갑자기 아주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오빠!
“응?”
갑자기 들리는 오빠 소리에 한창 달리던 하룬의 몸이 급작스럽게 멈추었다.
‘뭐지? 내가 너무 벨이 보고 싶어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하지만 환청은 아니었다. 다시 그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오빠!
분명히 벨의 목소리였다. 그 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투명한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방이 거친 황무지. 말라붙은 누런 풀포기들이 드문드문 있을 뿐 기대한 벨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벨!”
답답한 마음에 크게 소리 내어 벨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황량한 황무지도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잦아들고 말았다.
“벨, 어디 있는 거야?”
바로 옆에서 부르는 것 같은 생각에 벨이 더 간절하게 생각나 그녀의 목소리가 절로 간절해졌다.
-칫!
또다시 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혀를 차는 소리였지만 다양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다.
“벨! 벨! 벨!”
다시 크게 소리쳐 벨을 부르는 하룬의 머릿속에 다시 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바보 오빠! 난 집에 있다고.
“집에?”
마치 바보처럼 눈을 크게 뜬 하룬이 물었다.
-칫! 내가 깨어났는데 옆에도 없고, 대체 뭐야?
불만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알알이 느껴지는 벨의 목소리는 분명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귀를 통해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하룬은 혹시 하는 생각에 귀고리를 만졌다. 아즈만이 기지와의 연락을 위해 준 극소형 통신기였다.
“벨! 깨어난 거야?”
-그래, 이 바보 오빠야. 어떻게 내가 다시 세상에 나왔는데 옆에 없을 수 있냐고? 칫! 치잇! 미워, 미워 죽겠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일이 너무 급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챙기지를 못했다.
출발한 날이 벨이 깨어나기로 예정된 날이었지만 그날 아즈만과 연락을 했을 때는 하루 이틀 정도 늦을 거란 말을 들었던 것이다.
유니온을 나오고 나서는 메신저 스킬 때문에 또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우리 벨이 정말 깨어났어! 하하하!”
하룬은 이렇게도 벨의 목소리가 반가울 줄은 몰랐다. 그녀 특유의 찰랑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 둔 것 같았던 것이 사라지며 가슴이 울컥하는 감정으로 뜨거워졌다.
“언제 깨어난 거야? 아즈만에게 부탁하긴 했는데 아직 못 들은 모양이구나. 미안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밖에 나왔어.”
-그 이야기는 아즈만에게 들었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다시 태어나는 날 오빠가 옆에 없으면 어떡해? 내가 지금 얼마나 섭섭한 줄 알아?
그녀의 목소리는 영락없이 삐쳐 있는 티가 팍팍 나고 있었다. 자신이 연구하던 바이오체, 아니 완벽한 휴먼체로 다시 태어난 덕분일까. 하룬이 그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지 목소리에 불과하지만 다양하고 생생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안해, 벨. 오빠도 꼭 널 보려고 했는데 딸린 사람들도 있고 상황이 이상하게 진행되어 기지에 들를 시간이 없었어.”
-칫! 사정은 나도 안다고. 하지만 너무했잖아.
“미안해, 벨. 마음 풀어라. 오빠가 뭐든지 다 해 줄테니까.”
-흥. 쳇!
벨은 정말 단단히 삐친 듯 몇 번이나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너무하기는 했지.’
자신도 이런 상황을 원하진 않았지만 의문의 습격자들 때문에 지하 도로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기지로 갈 수가 없었다. 의뢰를 제시간 안에 맞추려면 벨과의 해후를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얘가 좀 변한 것 같네.’
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모종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사실 벨이 이렇게 삐친 것은 처음 본다. 또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좋아! 정말 중요한 일인지 설명해 봐.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줘.
“응,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말이야.”
하룬은 벨의 지적 능력을 알기에 되도록 자세하게 그간 벌어진 일을 설명해 주었다. 비록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야기 중간 중간에 말을 받아주는 벨 때문에 어색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오빠는 SS10이라고 불리는 실험체고, 나 역시 오빠와 같은 코드를 지닌 특수 캡슐이란 소리인데.
하룬의 말에 벨 또한 강한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하룬은 혹시 하는 생각에 벨에게 각인에 대해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그런 것은 없는데. 만약 각인이라고 한다면 오빠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며 가족이라는 사실밖에 없는데.
“그럼 혹시 가이아라는 존재를 아니?”
-아니. 가이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역시 다시 태어난 벨은 가이아의 각인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즈만의 판단대로 각인이 사라진 것은 확실했다.
“네가 내게 처음 왔을 때는 어머니 가이아가 너에게 태초의 약속이라고 불리는 각인을 심었다고 했어.”
-정말? “응!”
-정말 이상하네. 조사를 좀 해봐야겠어. 만약 사실이라면 이전에 소멸된 내가 나 스스로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했을 거야.
화제가 달라진 덕분에 벨은 자신이 삐친 것을 잊어버렸다. 이런 소녀의 행동을 처음 경험한 하룬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이나 식은땀을 흘렸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언급한 임페리얼 컴퍼니와 실험 그리고 가이아에 대해서 조사를 해 볼게, 오빠. 뭔가 모르는 음모가 오빠 주위에서 진행되고 있다니 너무 끔찍해. 내가 오빠를 지켜줄게. 오빠는 돈 많이 벌어다 줘. 나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가지고 싶은 것들도 많고.
“걱정하지 마, 벨. 오빤 옛날의 정민이 아니야. 이젠 능력이 있다고.”
-칫, 안다고. 그래서 나도 오빠가 자랑스러워. 그나저나 용병대를 만든 것은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난 듣는 순간 어마어마한 돈 냄새를 맡았다고. 나도 정찰 호크에 더해 위성으로 오빠를 도울 테니까.
“근데 너 지금도 위성과 접촉할 수 있는 거니?”
-응, 가능해. 예전처럼 몸으로 직접 접속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뛰어난 머리가 있잖아. 아즈만이 도와주면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아.
다행이었다. 사실 녀석이 그동안 완벽한 휴먼체 안드로이드에 관심을 쏟고 있어서 그렇지, 일단 그 관심이 다른 데로 쏠리면 그 분야는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은 자신의 주변에서 이런 음모가 있는지 몰랐으니 상관없었지만 이제 직접적으로 위해를 당하고 보니 가슴이 서늘했다. 언제 어느 때 누구에게 암습을 당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실험체가 될 것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일단 오빠를 목표로 위성 하나를 배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다. 오빠는 너만 믿을게.”
-호호호! 당연하지. 오빠는 내가 지킬 거야.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할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일해, 오빠.
벨이 깨어나니 당장에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는 주변의 음모도 그렇고 여정도 이제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의 의지가 될 줄은 몰랐다.
‘혼자일 때는 몰랐지. 휴면이라면 서로 마음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말이지.’
믿을 수 없는 것이 휴먼 마음이라지만 벨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벨은 이제 유일한 자신의 가족이 된 것이다. 서로 의지하고마음을 나눌 수 있는.
하룬은 다시 깨어난 벨을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기분 좋게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별다른 일 없이 용광로 마을을 반나절 정도 앞둔 한 산기슭에 도착했을 때 척후를 나갔던 하룬이 멀리서 달려오며 급하게 소리쳤다.
“전투준비!”
사람들은 쉴 생각에 방만하게 서 있다가 급하게 소리치는 하룬의 말에 놀라 무기부터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많은 나인과 로수가 재빠르게 행동했다.
“라나두의 머리를 안쪽으로 해서 원진을 구성해!”
전사들은 라나두들이 흥분하지 않게 몰아 기민하게 원진을 구성했다. 황 박사와 헤니 그리고 쏘우는 나인, 레이스와 함께 원진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밖으로 나왔다.
꽤 먼 거리였지만 원진이 완성되자 하룬이 도착했다.
“하르크가 우리를 쫓아옵니다.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으니 맞서 싸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전사들과 검사들은 모두 놈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원진 안에서 우리를 엄호해야만 합니다.”
하르크가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는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강한 긴장감이 흘렀다.
“너무 과도한 긴장은 오히려 전투에 좋지 않습니다. 영흥 마을 전사들은 이미 하르크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으니 1선을 맡고, 해무검관 식구들과 우리 대원들은 2선을 맡아 유기적으로 선을 바꾸어 가며 놈의 힘을 뺀다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알았네, 대장. 맡겨 주시게.”
로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전사들은 서둘러 무기를 조립해라.”
로수의 명령에 영흥 마을 전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 2미터에 달하는 금속 봉에 끼웠다. 아예 그렇게 조립할 수 있도록 제작된 무기들이어서 조립이 끝나자 3미터에서 4미터에 이르는 대형 무기들로 바뀌었다.
“나인과 레이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개방해.”
상기된 얼굴의 나인과 창백하게 질린 레이스의 얼굴은 대조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크게 대답을 했다.
“쏘우와 태범은 대기하고 있다가 만약의 경우 부상자가 위험해지면 파동탄을 집중적으로 날려야 해요.”
“알았네.”
“알겠습니다, 대장.”
그렇게 하르크를 상대할 준비가 끝났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하르크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긴 먼지바람을 망토처럼 두르고 일행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5미터가 넘는 거구의 하르크를 처음 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반질거리는 머리통은 잘 발달한 근육을 가진 철웅의 상체만큼이나 컸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근육은 강한 위압감을 주었으며, 가늘고 짧은 털이 나있는 피부는 강철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우워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휴먼들이 가소롭다는 듯 포효를 지르는 하르크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심장을 옥죄는 고통을 느꼈다.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일종의 피어였던 것이다.
“이놈!”
로수가 벽력처럼 소리를 지르며 놈을 향해 달려들자 전사들 역시 정신을 차리고 놈의 주변을 포위했다.
크워어!
하르크는 마치 화염을 토해 내듯 강렬한 안광을 쏘아 내며 휴먼들을 향해 들고 있던 통나무를 휘둘렀다.
부웅!
강력한 풍압과 함께 대기를 뒤흔든 통나무지만 그 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사들은 맞받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빠르게 피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로수는 민첩하게 몸을 굴려 통나무의 궤적 아래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피했던 전사들이 일제히 긴 무기를 휘두르며 전진했다. 하르크는 귀찮은 듯 긴 손톱으로 자신의 가슴이며 어깨까지 노리는 무기들을 쳐 냈지만 다리 사이로 빠르게 굴러가는 로수의 검이 순간적으로 파랗게 물드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끄윽! 후아아악!”
순간적으로 기가 주입된 로수의 대검이 두 발목 부위를 베고 지나가자 하르크는 세상이 떠나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신경질적으로 통나무를 휘둘렀다. 그 서슬에 놀란 전사들이 서둘러 피했지만 분노가 서린 공격에 두 전사가 무기를 놓치고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한 번 더!”
로수가 날아가는 전사들을 보며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전사들은 있는 힘을 다해 무기를 하르크를 향해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무기는 여전히 하르크의 상체를 노리고 있었다.
쿠워어어!
하르크는 피가 질질 흐르는 발목의 상처를 돌볼 시간이 없이 공격을 당하자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의 피어를 지르며 전사들의무기를 향해 통나무를 휘둘렀다. 하지만 녀석은 이번에도 뒤에서 바닥을 구르듯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며 휘두르는 로수의 대검을 막지 못했다.
파앗!
파동탄이나 화약 무기로는 거의 상처를 낼 수 없는 놈의 질긴 가죽이 이번에도 썰리듯 찢어지며 뼈를 드러냈다. 삽시간에 녀석의 발 주위는 피로 흥건하게 젖었고 놈은 발작적으로 통나무를 빠르게 휘둘렀다.
꽈앙! 꽝!
통나무와 강철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가공할 정도의 충격량이 가해진 것이다.
“아악!”
“커억! 끄윽!”
이번에는 놈의 통나무를 무기로 받아 낸 네 전사가 무기를 놓친 것은 물론 피를 토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최선을 다해 두 번이나 공격을 성공시킨 로수의 얼굴도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교대!”
하룬의 지시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해무검관의 세 사범과 럼 그리고 태가사남매가 전권에 뛰어들었다.
“놈!”
태력이 녀석을 향해 도약을 하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직경 15센티미터에 길이가 3미터에 달하는 이 몽둥이는 이곳에 오는 동안 자신이 공을 들여 만든 무기였다. 힘이라면 절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역사力士 다운 정공법이었다.
빠악!
두 나무가 부딪치는 순간 태력의 몽둥이가 힘없이 부러지며 태력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파악!
퍽! 퍽!
하지만 태력은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해냈다. 놈의 예봉을 맞받아친 덕분에 하르크는 나머지 사람들의 공격을 그대로 감수해야만 했다. 놈의 아름드리나무 줄기 같은 허벅지며 종아리에 다른 이들의 무기가 작렬했던 것이다.
쿠워억!
하르크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종아리 부위를 깊이 베인 것이다. 다른 이들의 무기는 그 무지막지한 방호력을 가진 가죽으로 막아냈지만 전력을 다한 까닭에 검에 기를 주입한 철웅의 검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2선의 공격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연거푸 검에 심하게 베인 하르크가 분노에 차 휘두르는 통나무는 마치 풍차처럼 돌아갔고, 그 끝에 걸리는 순간 여지없이 비명과 함께 날아가고 만 것이다.
하르크의 공격을 맞받는 대신 빠르게 움직이며 피하는 데 주력했던 1선과는 달리 하르크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는 2선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놈의 통나무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고 거기에 실린 힘은 도저히 받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철웅 총사범 역시 같은 발목 부위를 노렸어야 했는데.’
한 번 날아갔다가 오뚝이처럼 일어나 합세한 태력의 무식한 맞받아치기는 전보다는 더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뒤로 물러나게 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막 하룬이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끼요옷!”
태연이 기성을 지르며 반쯤 허리를 굽힌 태룡의 등을 밟고 날아올랐다. 그녀의 몸은 한순간에 하르크의 얼굴까지 날아올랐고 오느새 양손에 쥔 쇠꼬챙이는 놈의 목덜미에 깊이 박혔다.
꾸웍!
비명과 함께 통나무까지 놓은 하르크가 그 두터운 손으로 태연의 몸을 멀리 쳐 버렸다. 태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5미터가 넘게 날아갔지만 다행히 태룡은 그녀의 몸을 받을 수 있었다.
파앗!
신경질적으로 목의 양쪽에 깊이 박힌 쇠꼬챙이를 빼는 순간 그 구멍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를 갈며 쇠꼬챙이를 우그러뜨리는 하르크의 눈에는 어느새 눈동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르크가 잠시 몸을 떠는 순간 놈의 손톱은 거의 20센티미터가 넘게 튀어나왔다. 평소에는 5~10센티미터 정도지만 이렇게 미쳐 버리면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런 사실은 영흥 마을 전사들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놈의 시선은 쓰러진 사람들이 아니라 원진을 곧바로 향하고 있었다. 놈의 분노에 찬 백열광白熱光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혼이 오르라들고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피어보다 더 두려운 살기가 그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흐으윽!”
“허억!”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들 그 살기에 부들거리며 떨고 있을 때 나인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하룬이 검신이 푸른빛으로 빛나는 검을 들고 하르크의 뒤로 소리 없이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찡긋!
나인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유달리 정신력이 강한 그녀였기에 무시무시한 하르크의 살기도 빨리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뭐라고 하는 거지?’
하룬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들리지가 않는다.
‘뭐예요, 오빠! 뭘 말하는 거냐고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은 나인은 하르크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는 동시에 하룬의 몸도 바닥을 박차는 것을 보았다.
‘그거야!’
나인은 예전에 하르크를 상대했을 때가 생각났다. 자신이 하르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을 때 하룬이 놈을 공격했었다.
하룬은 자신과 함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멈춰어엇!”
나인의 외침에 시간이 멈추었다. 난파선처럼 흔들리던 사람들의 공포에 찬 눈도, 막 들어 올리던 하르크의 발도 멈추었다. 대기는 폭풍처럼 흔들린 채로 멈추었고 사람들의 심혼을 옥죄던 살기 또한 한자리에 머물렀다.
나인을 제외한 사람들은 그녀의 외침에 따라 일순간 동작을 멈추었지만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한 명 있었다. 나인보다 더 강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라면 그 힘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룬이었다.
‘오빠!’
메두사의 수많은 머리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공중을 향해 뻗은 나인의 머리칼이 막 힘을 잃고 제자리로 가라앉으려는 찰나, 하룬의 박살이 하르크의 뒤통수를 제대로 꿰뚫었다. 피와 함께 이마로 빠져나온 박살의 푸른 검신이 햇빛을 받아 나인의 눈에 선연하게 들어왔다.
검신이 마치 환상인 것처럼 빠르게 회전을 하다가 사라진 순간 하르크의 발이 기계적으로 앞으로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거대한 동체는 이미 비틀거리고 있었다.
끄르륵! 크으윽!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하르크가 힘없이 머리통을 바닥에 박았다.
꾸웅!
그 소리와 함께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몸이 빠르게 녹았다.
‘잘했어, 나인아!’
하룬이 들어 올린 엄지손가락을 보는 나인의 얼굴에 희열의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이은 두 번째 합공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지난번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성공했을 공격이지만 오늘은 순수하게 자신과 맞춘 합공이었고, 그 결과가 하르크의 죽음이었기에 나인은 더욱더 기뻤다.
나인은 비로소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자, 빨리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태력, 움직일 수 있으면 부상자들을 옮겨.”
“네, 대장.”
비록 태력에게 한 말이지만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저 멀리 보냈던 정신을 찾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나두로 만든 원진을 해제하고 그 자리에 막사를 친 후 부상자들을 그곳으로 옮겼다. 헤니와 태범은 전문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치료법을 알고 있었고, 약재는 미리 충분히 준비했기에 빠르게 부상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부상자들은 대개 탈골이 되거나 뼈가 부러진 정도여서 큰 부상자는 없었다. 문제는 강한 충격으로 인해 내장이 흔들리거나 기혈이 터지는 내상을 당한 사람들이지만 영흥 마을 전사들은 이런 내상을 잘 다스리는 약을 가지고 있었다.
“나인아,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으니 먹을 것을 좀 준비해 줘. 럼, 너와 레이스가 좀 거들어.”
“그럴게.”
실력이 달리는 럼이라서 전장에는 끼어들지도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떨던 럼이지만 할 일이 생기자 막사에 들어간 레이스를 끌고 나와 불을 피우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다.
“황 박사님!”
“말만 하게.”
“쏘우 씨와함께 라나두를 좀 봐 주십시오. 녀석들이 쉴 수 있게요.”
“그러겠네.”
황 박사는 재빠르게 사후 지시를 내리는 하룬에게 혀를 내두르며 그의 말을 즉시 이행했다.
그렇게 부상자들의 처리와 다른 일들이 대충 정리될 때 하룬은 외투에서 비수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하르크의 시체였다. 피로 범벅이 된 놈의 사체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놈의 머리통을 베어내고 가죽을 벗기는 일이다. 하르크는 영역을 가지고 있는 놈이고 용광로 마을은 여기서 15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어쩌면 마을 주민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놈의 가죽 역시 두고 갈 수 없다. 채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쏜 파동탄을 견뎌 낸 방호력을 가진 외투를 생각하면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이 점에 있어서는 현실이나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룬의 비수는 기가 주입되는 순간 푸른빛에 휩싸였고 이내 그 끝부분으로 실처럼 가는 푸른색 실이 튀어나왔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르크를 헤치우고 그 자리에서 푹 쉰 하룬 일행은 용광로 마을까지는 별다른 일 없이 갈 수 있었다.
1선의 로수와 영흥 마을 전사들은 합세해서 하르크의 힘을 받아냈기에 그 부상 정도가 약했고, 2선의 해무검관 식구들은 이리디윰 메탈 슈트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태가사남매 역시 기본적으로 휴먼을 훨씬 능가하는 회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발생한 부상자들 대부분은 충돌 시의 충격으로 팔이 부러지거나 금이 가는 등 경미했고, 내상을 입은 부상자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영흥 마을의 비전 내상 약을 복용했기에 금방 이동이 가능했다.
이 근처는 반경 30킬로미터에 달하는 하르크의 영역이었기에 오르그들이나 맹수들은 더 이상 없었다. 다음 날은 하늘도 잔뜩 먹구름이 껴 버리는 바람에 강렬한 햇빛을 피할 수 있어 하룬 일행에게는 더없이 좋았다.
아침 늦게 출발한 하룬 일행은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 돼서야 겨우 용광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용광로 마을은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의 연안에 건설되어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을 이중으로 세워 내벽 안에는 마을과 용광로를 비롯한 시설을, 그리고 외벽 안에는 농사를 짓는 땅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그 규모는 무척이나 컸다.
각각의 벽 위에는 수십 미터 간격으로 파동포와 입자포가 자리하고 있어 침투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디서 오는 누구입니까?”
하룬 일행이 문 가까이 접근하자 5미터가 넘는 높이의 견고한 콘크리트 벽 위에 선 경계자가 물었다.
“청포 상회에서 보낸 물품을 가지고 오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번 의뢰를 맡은 돌풍 용병대입니다.”
“오! 드디어 왔군요.”
메탈 슈트를 입은 경계자가 반갑게 소리치며 버튼을 눌렀다.
지잉! 지잉!
폭이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강철 문이 열리고 누렇게 익어가는 밀과 여러 농작물들이 자라는 넓은 경작지가 자리한 안쪽 세상을 드러냈다. 거대한 벽 안쪽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풍성한 경작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을 크게 뜨고 안쪽 전경을 구경했다.
그사이 네 명의 경계병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와 그들을 맞이했다.
“난 바리라고 합니다. 오늘 경계를 담당하고 있지만 실은 캡슐 기술자지요.”
바리는 대뜸 철웅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룬 일행 중 외관상으로나 분위기상으로나 철웅의 기도가 가장 튀었기에 물어볼 것도 없이 그를 수장으로 생각한 것이다. 로수 역시 비범한 기도를 가졌지만 바리는 그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난 철웅이라고 합니다. 임시 돌풍 용병대원이죠. 이쪽이 우리 대장입니다.”
“아! 실례했군요. 미안합니다.”
바리는 자신의 실책에 얼굴을 붉히며 하룬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바리라고 합니다. 상회로부터 출발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요즘 유니온 주변으로 몰려든 오르그들 때문에 운송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로분들이 내내 걱정을 했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참, 일행 중 부상자들이 있는데…….”
하룬의 말에 바리가 놀란 눈으로 부상자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곧 안쪽에서 안내자들이 나올 겁니다. 약품은 부족하지만 실력이 있는 의사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쪽으로부터 바이크들이 굉음과 함께 달려오기 시작했다. 자장 카를 연상시키는 큰 바이크의 옆구리에는 물건을 싣거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된 보조 장치가 달려 있었다.
“돌풍 용병대요?”
한눈에도 불같은 성미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한 장년인이 가장 먼저 도착해서 뛰다시피 하룬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난 마을의 총무를 맡고 있는 원로 이가섭이라고 하오. 수고가 많았소. 어제가 도착 예정이라 행여나 오르그들에게 당한 것은 아닌지 마음을 졸이고 있었소.”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잠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하룬의 말에 함박웃음을 짓던 이 원로가 대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이런! 부상자가 있군. 오르그들과 붙은 거요? 아니, 이건? 하르크의 머리통이 아니오?”
쏘우의 수레에 실린 하르크의 머리통을 본 이 원로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죽은 머리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공포를 느끼는 것을 하룬을 제외한 일행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어느 정도는 누그러졌지만 우연히 수레에 실린 하르크의 머리통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벌벌 떨리는 것이다.
“그대들이 잡은 거요?”
“운이 좋았습니다.”
“허, 이런 일이! 저놈은 우리 마을의 원수인 캐악이 아닌가?”
이 원로의 말에 바리까지 하르크의 머리통이 실린 수레 앞으로 주춤거리면서도 가까이 왔다.
“이 눈 옆에 찢어진 상처와 왼쪽 귀에 있는 이 흉터를 보니 확실히 우리 마을을 영역으로 하는 캐악이 맞군. 이 찢어죽일 놈이 이런 꼴이 되다니.”
“맞습니다, 원로님! 이 주리를 틀어 죽일 놈이 바로 캐악입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백 명 이상 해친 그놈이 맞습니다.”
바리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채 주먹으로 캐악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르크의 머리통을 치고 있었다. 다른 경비병들 역시 바리와 같이 복수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선 이 원로는 무슨 생각을 떠올리는지 상기된 얼굴로 몇 번이나 크게 호흡을 하더니 울먹이는 얼굴이 되었다.
하룬과 그 일행은 그동안 이 하르크가 용광로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피곤하고 힘든 몸이지만 정숙을 유지하고 있엇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후, 이 원로와 경계병들이 정신을 차렸다.
“돌풍 용병대라고 했소?”
“네.”
“이런 때가 아니면 이런 하찮은 일을 맡을 사람들이 아니란 소리는 통신을 통해 듣긴 했소. 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기에 그런 평가를 받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한편 그런 존재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둔한 날 용서하시오.”
원로의 말에하룬은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담담하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놈은 내 사랑스러운 딸과 사위를 잡아먹은 놈이오. 내 파동포를 사용해서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워낙 빠르고 영악한 놈이라 잡아 죽이지 못하고 평생 그 한을 안고 살았는데 이제야 원수를 갚았구려. 고맙소!”
이 원로는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이런 종류의 인사는 종말 시대 몇몇 지역에서만 있던 예절로 최상의 인사법이라고 알고 있는 하룬은 서둘러 그의 앞에 같은 자세를 취했다.
“아닙니다. 운이 좋아 처리를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흐흐흐! 고맙소! 고마워!”
이 원로는 그 자세로 잠시 울기까지 했다. 하룬은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방도가 없어 그저 그와 같은 자세로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을 헤쳤구나. 정말 잘한 일이야!’
일전에 영흥 마을 전사들을 해친 하르크를 상대한 기억 때문에 혹시나 싶어 가지고 온 머리통이 이렇게 가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캐악이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이 하르크는 이 철옹성 같은 용광로 마을 사람들까지 수백이나 해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인간을 고급 음식으로 인식하는 하르크 때문에 죽어간 아우터들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내 언젠가 이 하르크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말겠어. 놈들의 가죽으로 돌풍 용병대원들의 방호복을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 원로가 울음을 그쳤다. 한 마을의 원로나 되는 사람인지라 금방 진정했던 것이다.
“고맙소!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리다. 부상자들도 있는데 내가 너무 주책을 부렸구려.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겨우 일어나니 이 원로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나온 용광로 마을 사람들이 경계를 서던 이들과 합세해 하르크 머리통을 향해 주먹을 날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룬 대장이 참 좋은 일을 한 걸세. 아무튼 부상자도 많았지만 대장 덕분에 용광로 마을에선 귀빈 대접을 받을 수 있겠군.”
어느 틈에 곁에 온 황 박사의 말에 이 원로의 눈빛이 강해졌다.
“혹시 황 박사님이십니까?”
“하하! 오랜만일세.”
황 박사는 이 원로와 구면인 듯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이 원로의 얼굴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적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이 원로의 대응에 황 박사는 조금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평정을 회복했다.
“나? 요즘 돌풍 용병대에서 여기 하룬 대장의 일을 도와주며 지내고 있네.”
“그, 그렇습니까?”
이 원로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지만 황 박사가 예상한 다른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원로는 노골적으로 보기가 싫다는 듯 황 박사의 얼굴을 피하며 같이 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자, 복수 의식은 그만하고 부상자들부터 옮겨라. 귀한 분들이니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선 안 된다.”
곧 부상자들은 바이크에 매달린 보조 카에 실렸고 먼저 출발했다.
“자, 이제 우리도 갑시다!”
“네, 그러지요.”
하룬은 이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마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비록 황 박사와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저 인간의 지식이나 실력만큼은 인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