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오르그의 침입 (129/278)

《오르그의 침입》

 ‘이 구역은 아직도 마찬가지네.’

 강렬한 햇빛과 먼지바람이 잦아드는 저녁 시간의 F-4구역은 낮 시간의 황량함과는 달리 음습한 활력이 감돌았다. 먼지 바람이 심한 낮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낡고 황량한 고층 빌딩들 사이의 작은 골목길에 나타났다.

 집마다 돌리는 환풍기에서 나오는 먼지와 낮 동안 건물에 축적되었던 열기가 이제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열기는 묘하게도 F구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막장 인생 보더러들에게 기운을 주고 있었다.

 E구역으로 넘어가는 게이트를 향해 걷다가 무심코 트래시 스트리트에 들어섰다. F구역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삶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일견 번화가처럼 노점들이 즐비한 거리지만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거리 이곳저곳에는 한낮의 살인적인 열기와 먼지바람을 견디다가 나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예전의 하룬 자신처럼 가출해서 노숙하는 막장 인생들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교적 밝은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거리의 구석에 쌓인 쓰레기 더미 속에서 뭔가를 뒤지고 있었다.

 ‘기분이 더럽네!’

 오래전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거리를 떠도는 생활은 일면 자유스러운 구석도 있었지만 제정신을 가지고 할 짓은 아니었다.

 먹을 것을 찾아 구걸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건 물론이고 골목이나 상점 뒤에서 자다가 같은 노숙자 어른들에게 강간이나 강도를 당하는 것은 비일비재하고, 심지어는 아무 이유도 없이 죽기도 했다. 정신 나간 살인자들이 밤거리를 떠도는 무서운 곳이다.

 “돈 좀 주세요!”

 지저분한 옷차림의 소년 하나가 구걸을 했다. 하룬은 그 소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묵묵히 그 곁을 지나갔다.

 “씨발! 돈 좀 달라고, 씹새끼야!”

 대뜸 욕설이 날아왔지만 무심하게 지나쳤다. 저런 녀석에게 행여 동전 하나라도 주거나 대거리를 했다가는 어두운 골목 속에서 호시탐탐 호구를 기다리는 악바리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그를 비롯한 F구역 토박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밤의 F구역은 지옥이지.’

 가출하고 거리를 떠돌았을 때 저런 무리들에 걸려 앵벌이를 할 뻔했던 하룬은 어떻게든 시비를 걸려는 작은 악마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구역 주민들은 그가 하듯 무심하게 행동했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문득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거리를 지나며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확실히 감정의 폭이 커진 건가? 아니면 내가 조금은 인간적이 된 건가?’

 보육원이 싫어 뛰쳐나온 녀석들이거나 암흑 조직이 펼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창녀들이 낳아 출생 등록도 되지 않은 상태로 어릴 때부터 앵벌이가 된 녀석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잘생긴 오빠, 놀다 가!”

 다음 골목을 지날 때는 갑자기 나타난 어린 창녀가 대뜸 그의 팔짱을 꼈다. 얼마나 그 동작이 빠르던지 마치 블링크 마법을 펼친 것 같아서 하룬도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

 심하게 노출한 옷차림에 싸구려 화장품을 덕지덕지 바른 창녀는 열두 살 정도로 보였는데 오른쪽 광대뼈부터 눈까지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큰 멍이 들어 있었다.

 “귀찮다!”

 차가운 하룬의 말에 멈칫했던 창녀였지만 팔을 잡은 손아귀에는 힘이 더해졌다. 그녀가 나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두운 골목을 살짝 돌아본 그녀의 눈에는 잠시 하얀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나 좀 데리고 아무데로나 가 줘요, 아저씨. 나 죽을 것 같아요.”

 속삭이는 창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간절함이 가득했다.

 “포주가 강제로 몸을 팔게 해요. 제발 저 좀 구해 주세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이었지만 하룬은 그 비장해 보이는 눈동자 속에서 요악한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 파로 스트리트에 사니까 수작 부리지 말고 떨어져라. 세미탑 좀 그만 피우고. 그러다가 뼈 녹는다.”

 하룬의 차가운 말에 어린 창녀가 금세 떨어져 나갔다.

 “에이 쌍! 잘못하면 오늘도 공치게 생겼네. 깨끗한 새 옷을 입어서 다른 구역에서 온 철새인 줄 알았더니 같은 우리에 사는 헛방이었네.”

 어린 창녀는 골목을 향해 두 팔을 교차시켜 X 자를 만들어주고는 다른 대상을 찾아 움직였다.

 ‘나중에 커서 게임할 때 어쌔신 하면 딱이겠군.’

 구걸하는 앵벌이 소년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이 저런 어린 창녀들이다. 그녀들은 창녀 짓은 물론 기회만 생기면 강도짓이나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약이 떨어지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악귀들이지.’

 폭력 조직도 되지 못하는 밑바닥의 범죄자들이 보육원과 결탁해서 어린 소녀들을 빼내 세미탑이라는 마약 담배를 피우게 하거나 혹은 세미정이라고 부르는 저질의 마약을 복용시켜 창녀로 키우는 것이다.

 때문에 열다섯 살이 넘기 전 이 어린 창녀들은 대부분 마약중독의 후유증으로 뼈가 삭고 근육이 괴사하여 죽어 가지만 일단 세미정에 중독되면 벗어나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 어린 창녀들은 거래가 이루어지면 골목으로 들어가 즉석으로 몸을 팔거나 돈이 많은 것으로 확인되면 포주와 조직원들에게 신호해서 강도까지 서슴지 않는다.

 -씨발! 배리어 때문에 별에 접근할 수가 있어야지.

 거리를 떠돌 때 죽어가던 창녀로부터 들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평생 유니온을 벗어날 수 없는 막장 인생의 한이 서린 마지막 한탄이었다.

 ‘그래도 난 행복한 편이지.’

 하룬은 주민증이라도 있지만 저들은 주민으로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되었었다 해도 말소되었을 것이다. 즉, 유니온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자들이었다.

 그래도 같은 막장 인생들이라고 같은 구역의 주민은 웬만해서는 건드리지 않는다. 사실 건드려 봐야 나올 것이 없기에 쓸데없이 기운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몇 달 동안 이 구역을 떠나 있었다고 알 수 없는 그리움 비슷한 감정 때문에 F구역과 연결된 통로로 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이런 시궁창 같은 곳에도 희망이 있을까?’

 갈 데까지 간 막장 인생들이자 유니온에서도 거의 버림받은 보더러들이기에 이 구역에 거주하는 휴먼들은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물론 그건 하룬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시각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진수 형처럼 희망을 가지고 사는 휴먼들도 있겠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휴먼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우울해졌다. 바란으로부터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던 것도 잠시였다. 몇 년 동안 지냈던 이 구역의 음습하고 진저리쳐지는 공기를 흡입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이 거리를 통과하며 확실해진 것도 있었다. 그저 수동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유니온의 현실에 대해 극렬한 분노와 행동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내게 좀 더 힘이 생긴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꾸어 놓겠어!”

 어차피 무리 생활을 하다 보면 뒤처지고 바닥에 깔리는 인생들은 생겨나게 마련이지만 최소한 자신의 의지로 미래가 결정될 때까지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룬은 처음으로 감정에서가 아니라 뜨거운 이성으로 새로운 미래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현재의 유니온과 같은 극심한 빈부 격차와 권력의 독점과 근거 없는 세습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자기 힘으로 만들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강해지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하룬의 정신세계가 한층 성숙하고 있었다.

 E구역으로 넘어가는 게이트로 향하던 하룬은 F-4구역에서 가장 번화가인 코머 스트리트 입구에 도착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각종 상점들과 편의 시설이 밀집한 코머 스트리트의 입구에는 수많은 노천 식당들이 있었다. 모두가 해가 진 후에야 생겨나는 식당들이었다.

 ‘몇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트래시 스트리트와 이곳은 완전히 지옥과 천국이네.’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대조적인 두 거리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아 잠시 거리 구경을 하던 하룬은 한 노천 식당을 찾았다.

 카운터에서 맥주 한 병을 산 하룬은 거리에 내놓은 한 의자에 앉았다. 맥주의 주원료인 맥주보리는 유니온 내에 있는 농산물 공장에서도 재배가 쉽지 않은 터라 비싸기 때문에 맥주의 가격 또한 상당했다. 때문에 맥주 한 병을 산 하룬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는 것에 뭐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와 익숙한 먼지바람이 부랑자처럼 떠도는 거리에는 데이트하기 위해 나온 청춘들과 퇴근길에 이곳을 찾은 직장인들이 꽤 많았다.

 현실 속에서 각자 바쁘게 걷거나 상대에게 열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왠지 이질적인 감정이 떠올랐다.

 그동안 게임에 너무 몰입을 했었는지 아니면 이곳을 평소부터 싫어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스칠 듯 가까이 지나가는 휴먼들 속에 앉아 있는데도 한참이나 동떨어진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휴우, 비욘드가 그립군.’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이런 분위기가 싫었다. 비록 오염되어 위험하고 인적은 드물지만 배리어 밖이 훨씬 편했다.

 같은 휴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방황하는 자신의 영혼이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나는 낙오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고개를 들어 달빛을 투과시키는 배리어를 별 의미 없이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던 하룬의 얼굴이 굳었다. 비욘드를 하고난 후 꽤 많은 것들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본성은 여전히 이 도시와 저 많은 휴먼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집, 높은 연봉이 보장되는 좋은 직업,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되는 각종 편의 시설, 멋지고 매력적인 상대와의 연애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섹스.

 하룬은 짧은 게임 생활을 통해 이미 유니온 주민들이 바라는 것들 대다수를 가졌거나 마음만 먹으면 가질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 확신할 수 없지만 하룬이 만족감이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올리는 것과, 사람의 정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에 목말랐던 하룬은 순간적으로 욕구를 만족시키는 말초적인 쾌락보다는 은근하고 오래 지속되는 정을 원했다.

 ‘어쩌면 난 비욘드를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라.’

 비욘드에서 만난 사람들. 처음으로 사귄 친구 ‘엘저’, 지금은 아물었지만 배신의 아픔을 준 ‘재수 4인방’. 가슴 시린 첫사랑의 대상 ‘홀’. 아버지처럼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 준 ‘데브론’. 끝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온 ‘티노’, 비록 거래로 엮인 인연이지만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아레스’와 ‘매그럼’ 그리고 ‘초른’. 뒤늦게 만났지만 밝고 똑똑한 ‘헤니’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곳 비욘드에 있었다.

 “후후후.”

 비욘드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 하룬의 입에서 한 줄기 웃음이 흘러나왔다. 습기 하나 없이 건조된 이곳 유니온에서 살았던 그 오랜 시간보다 그곳에서 지냈던 짧은 시간 동안 새롭게 배운 것들이 더 많았다.

 이제 비욘드를 접을 생각을 해서 그런지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시야에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누구지?’

 “자네, 혹시 여유가 되면 맥주 한 병만 사 주지 않겠나?”

 그에게 말을 붙인 이는 추레한 옷차림의 사십 대 중년 사내였다. 먼지가 가득 낀 동그란 안경을 쓴 사내는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왜소한 체격이었고 목소리는 잠겨 있어 쉰 소리가 나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테지만 하룬은 선선히 돈을 꺼내 주었다.

 “허엇! 정말 사 주는 건가? 하하하!”

 그저 해본 소리였는지 사내의 마른 입술이 건조한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행여 마음이 변할까 싶었는지 지폐를 잡아채는 손놀림이 마치 먹이를 채는 새의 발톱처럼 빨랐다.

 ‘내가 외로움을 타는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현실에서는 비욘드에서처럼 마음을 나누고 정을 줄 대상이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가족 같은 정을 나누던 벨이 없기에 더욱 마음이 헛헛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라서 마음이 너그러워졌을지도 모른다.

 “뭐 하는 친군가?”

 어느새 맥주 한 병을 사 온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병마개를 돌려 따며 물었다.

 하룬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직업이 없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날 한번 죽이는군.오늘도 만월이라 어쩌면 하르크나 오르그들이 또 침입할지도 모르니 빨리마시고 가게. 자네 옷차림도 그렇고 손이 큰 것을 보니 상위 구역 주민인 것 같은데 이곳은 자네가 즐기기에는 위험한 구역이라네.”

 하룬은 대답 대신 그를 응시했다. 그의 말이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만월과 변종 생물의 침입이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건가?’

 “최근 배리어가 주기적으로 약해지는 것은 자네도 알지? 다른 아는 놈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 주기가 바로 달과 관계가 있네. 보름달이 뜨는 날을 전후해 약 열흘 정도는 변종 생물들이 아주 극성을 부리더군.”

 사내의 말에 하룬의 눈빛이 강해졌다. 최근 변종 생물들이 종종 난입해 암시장까지 피해를 보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인지도 몰랐다. 하룬은 아직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알아낸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룬이 그에게 정체를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지지지잉!

 갑자기 강한 진동음이 들렸다.

 “배, 배리어가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의 고함에 눈을 돌려 보니 저 멀리 보이는 빌딩의 너머까지 뿌리 내리고 있던 배리어의 한쪽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 코머 스트리트로 이어지는 대로의 끝자락에 위치한 배리어가 마치 뭔가에 뚫린 듯 희미해졌다.

 “피햇!”

 “도망쳐!”

 거리 전체가 불이 난 것처럼 난리가 났다.

 곧 거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경계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배리어가 약해진 곳과 대로가 연결되었으니 잘못하면 큰일이 나게 생겼다.

 상황은 심각했다. 비록 낡고 더러운 곳이었지만 F구역도 계획 구역이었기에 코머 스트리트를 포함한 대로는 A구역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단단한 벽과 게이트가 있지만 말이다.

 “젠장! 재수도 더럽게 없네. 오늘은 이곳인가? 피해가 많겠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내가 맥주를 마시는 손길은 급한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빨리 가게. 오르그라면 그래도 덜하지만 하르크라도 난입하면 방위군 녀석들도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거야. 호기심 때문에 죽을 수도 있어!”

 하룬은 대답 대신 맥주 한 모금을 더 마시고는 흥미로운 눈으로 배리어가 급격하게 약해진 곳을 주시했다. 그사이 대로 주변은 불빛이 빠르게 꺼지고 있었다. 주거용 빌딩은 물론이고 이곳 코머 스트리트에 이르는 대로 주변 건물들은 예외 없이 소등되었다.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자 수십 층의 자장 로드 역시 난리가 났다. 수십 층에 달하는 자장 로드를 운행하던 수많은 차들이 정류 빌딩으로 피했고, 건물들마다 많인 이들이 창을 통해 아래를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늘 위험 속에 사는 F구역 주민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곳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인지, 코머 스트리트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한차례 난리가 난 이후로도 적지 않은 상점들은 여전히 영업을 했고, 확연하게 적어지긴 했지만 피하지 않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대로 끝을 주시했다.

 “젠장! 드디어 오는군!”

 느긋했던 사내의 태도가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따.

 “오르그들이다!”

 “우악! 엄청나닷!”

 약해진 배리어를 힘으로 뚫고 들어온 오르그들의 숫자는 일견 수백을 헤아렸다. 이미 몇 번 침입한 경험이 있는 놈들인지 오르그들은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대로를 타고 불빛으로 환해진 코머 스트리트 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구경을 하겠다고 남아있던 휴먼들이 겁에 질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오르그들의 손에는 칼과 몽둥이를 비롯한 흉흉한 무기가 들려 있고, 번들거리는 노란 눈알에서는 흉광이 돌았다.

 “아무래도 끔찍한 밤이 되겠군.”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하룬은 기이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분명 두려워하는 목소리였음에도 그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는 벌써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건물 혹은 상점 안으로 미친 듯이 뛰어 들어갔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네도 마저 구경하려나?”

 하룬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설마 나처럼 삶이 고통스러워 운명이라는 빌어먹을 놈에게 생사를 맡긴 건가? 뭐, 이 바닥 인생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보통은 살기를 원하는데 자네도 나처럼 별종이군.”

 하룬은 실소를 흘렸다.

 ‘설마 죽고 사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이 F구역에 사는 주민들치고 자살을 떠올려 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살기가 너무 힘든 탓이기도 했지만 희망을 발견할 수 없어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은 종종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만 유니온은 거기에 하등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하룬은 사내에게 관심을 끊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짧은 시간 내에 노천 식당 대부분이 텅 비었다. 테이블이나 의자 혹은 음식 재료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는 탓에 주인이건 손님이건 모두 도망친 것이다.

 “엇! 방위군이다!”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던 휴먼의 목소리에 눈을 돌려 보니 패트롤 바이크를 타고 출동한 방위군 수십이 하룬의 앞쪽 70여 미터 떨어진 대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다. 하룬의 눈은 방위군의 그 움직임보다는 패트롤 바이크를 향하고 있었다.

 ‘한때는 저게 그렇게도 타고 싶었는데…….’

 지상에서는 방위군의 패트롤 바이크를 제외한 그 어떤 교통수단도 운행할 수 없기에 어린 시절에는 그것에 환상을 품었다. 각종 무기를 장착한 메탈 슈트를 입은 방위군이 순찰을 위해 패트롤 바이크를 타고 지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였다.

 잠시 거리에 눕혀진 패트롤 바이크를 구경하며 어린 시절의 심상을 떠올리는 순간 방위군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쯔쯔! 구식 파동건으로는 어림도 없는데.”

 중년 사내의 말에 방위군을 보니 임시로 설치한 바리케이드 뒤에 몸을 은폐하고 팔뚝 길이의 파동건으로 앞쪽을 겨눈 것이 보였다.

 “입자 분산 및 축적에 이은 초가속 기능이 없는 전자 파동건으로는 둔기로 치는 정도의 충격밖에는 줄 수 없는데도 아직 저걸 고집하는걸 보면 사 원로도 이젠 다된 모양이야. 오르그에게는 광선검이 더 효과적인데…….”

 중년 사내의 말에 하룬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무기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것은 물론 군부의 실세인 사진용 원로까지 언급했다.

 그가 알기로 사진용 원로는 공식적으로는 은퇴한 상태였다. 하지만 대리인의 뒤에서 여전히 막강한 실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룬은 그 사실을 겨루를 통해 들었지만 유니온 내에서는 아는 이가 드문 고급 정보였다.

 ‘대체 정체가 뭐야?’

 적어도 외관처럼 보잘것없는 사내가 아는 것은 확실하다.

 그사이 수 킬로미터를 빠르게 달려온 오르그들과 방위군은 전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발사!”

 슈욱! 슉! 슉!

 방위군이 발사한 푸른 파동탄들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오르그들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갔다.

 퍽! 퍽! 퍽!

 선두에서 달려오던 오르그들이 파동탄의 충격으로 뒷걸음질 치거나 걸음을 멈추었다. 만약 휴먼이었다면 그 파동탄에 몸통이 날아갔을 테지만 역시나 오르그는 가죽이 튼튼했다. 죽은 놈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달려오던 기세는 확실히 죽었다.

 그것도 잠시, 멈춰 섰던 무리 속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방패 들엇! 돌격!”

 “뚜러엇!”

 뒤에서부터 선두로 방패가 전해졌고 그걸 손에 쥔 오르그들이 다시 앞을 향해 달렸다. 방패라기보다는 문짝이었지만 그 재질이 강철로 보여 방패의 역할은 확실하게 할 것 같았다. 비록 파동건이 뚫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2차로 오르그까지 충격을 주기는 힘들 테니 효과적인 방패인 셈이다.

 “역시 새로운 오르그들이 출현했군. 공용어까지 할 줄 아는 것을 보면 뛰어난 지능까지 갖춘 놈들이야. 진화야 아니면 돌연변이인 거야? 휴우. 이래서는 유니온도 얼마 견디기 힘든데. 원로원에서도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사내의 말에 하룬도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이 말대로 이들은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야. 각종 무기술과 지략을 갖춘 유사 휴먼이 틀림없어.’

 그 전에 있던 오르그들은 새롭게 출현한 오르그들에게 죽거나 멀리 쫓겨났을 것이다. 높은 지능을 가진 오르그들은 휴먼뿐 아니라 같은 동족들도 무자비하게 죽이는 포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이제는 전쟁이군!’

 하룬은 입맛이 썼다. 이제까지 노블들의 횡포가 어땠든 배리어로 인해 적어도 생은 보장받던 시대가 어느덧 끝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것이다.

 배리어를 유지할 발전 기술을 상실한, 아니 새로운 고출력 발전 시설을 새로이 만들 기술력이 없는 휴먼들은 아무리 늦추어도 30~40년 안에 오르그들과 생존을 두고 전쟁을 해야만 한다. 아니, 설사 배리어를 유지할 기술력이 있다고 해도 저런 지능을 가진 오르그들이라면 어떻게든 무력화시킬 방도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제길! 잘못하면 뚫리겠는데.”

 사내의 말에 전투가 이루어지는 곳을 보니 십여 개의 강철 문짝을 방패로 삼은 오르그들이 파동건을 막으며 조금씩 전진했고, 그 뒤로 몸을 낮춘 오르그들이 따르고 있었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모래주머니로 쌓아 만든 바리케이드는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자네는 거기 계속 있을 텐가? 난 여기 2층으로 올라가야겠네.”

 중년 사내는 질린 표정으로 하룬을 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훗! 그래도 사지가 찢어져 죽기는 싫은가 보군.’

 오르그들은 굳이 먹지 않더라도 사체를 얌전하게 두는 법이 없었다. 천성인지는 몰라도 잔인하게 찢어버리는 것이다. 중년 사내가 막 식당에 붙은 건물 계단으로 사라졌을 때 기어코 바리케이드가 뚫렸다. 쉴 새 없이 쏘아지는 파동탄도 이번에는 소용이 없었다. 바리케이드 몇 미터 앞까지 전진한 선두의 뒤쪽에 있던 오르그들 두 놈이 깍지를 끼고 뒤에서 달려오는 놈을 앞으로 날린 것이다.

 도움닫기를 한 오르그들은 순식간에 바리케이드를 넘어 날아왔다. 당황한 방위군이 파동건을 날렸지만 그 숫자가 열이 넘어가자 방어 진형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퍽! 퍼억!

 워낙 가까운 거리라 제대로 파동탄에 맞은 놈들은 몇 미터나 뒤로 날아갔지만 빠른 몸놀림을 가진 오르그들은 파동탄이 아니라 파동건의 방향을 보면서 미리 움직여 무기를 휘둘렀다.

 캬아아악!

 기어코 첫 희생자가 났다. 한 오르그의 거대한 도끼에 가슴이 찍힌 방위군의 메탈 슈트가 힘없이 벌어지며 뜨겁고 붉은 피를 내보냈다. 한 방에 심장이 갈라진 듯 힘없이 바닥으로 쓰려졌다.

 난전이 벌어지자 파동건 외에 특별히 위력적인 무기가 없는 방위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몇 덩어리로 뭉쳐서 후퇴하는 바람에 피해가 적은 것이 다행이었다. 후퇴하면서 연방 주위를 둘러보는 폼이 뭔가 기다리는 것 같았다.

 ‘USSA라도 기다리는 것인가?’

 변종 생물과의 전투에 특화된 특수군이 출동한다면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을 텐데, 특수군은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긴박한 가운데서 하룬은 은밀하게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오르그 대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은 우리가 상대할 테니 절반은 흩어져 암컷들을 잡아라!”

 ‘빌어먹을! 여자들을 노리는 건가?’

 놈들이 유니온에 침입한 이유를 알게 된 하룬은 외투의 상체 단추를 채우고는 후드와 붙은 얼굴 가리개의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어깨 뒤로 올려 박살을 꺼냈다.

 꾸욱!

 일체형의 검 자루를 잡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차피 피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나설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방금 전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들어간 건물 3층에서 뭔가가 오르그들에게 날아갔다. 눈을 돌려 보니 건물과 건물 사이의 연결구 위에서 그 중년 사내가 연방 뭔가를 던지고 있었다.

 파앗! 파앗!

 폭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라 강력한 살상력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폭탄은 아니었다. 파동탄도 죽이지 못하는 오로그들에게 폭탄도 위력적인 무기는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퍼져 나가는 연기는 더 위력적이었다.

 당장 오르그들의 행동이 느려졌다.

 ‘수면탄인가?’

 수면이나 신경 차단 효과를 지닌 화학탄의 일종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개를 헤치고 얼추 백을 헤아리는 오르그들이 한쪽 손으로 코를 붙잡고 빠르게 코머 스트리트의 입구를 향해 달려왔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는 여전히 파동탄의 발사음이 들렸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기가 사라지기 전에는 오르그들의 행동이 어느 정도 제어될 것이다. 이제 연기 밖으로 나온 오르그들만 처리하면 된다.

 하룬은 박살을 힘차게 쥐었다.

 ‘어엇!’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는 속으로 기함했다. 한 건물 안에서 몇 사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누구지?’

 그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빠르게 움직여, 스트리트 입구로 거의 접근한 오르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낡은 메탈 슈트를 입은 휴먼들의 손에는 검이나 도가 들려 있었는데 그 움직임이 무척 가벼웠다. 특수군은 대개 휴대용 핵전지 발전을 이용한 광선검을 사용한다는 걸 알기에 확실히 그들은 아니었다.

 ‘호! 제법!’

 여자 둘에 남자 셋으로 이루어진 의문의 휴먼들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마주 쳐오는 무기를 피하거나 사선으로 받아 내고는 빠르게 무기를 날렸다. 잘 벼린 그들의 무기는 파동탄도 뚫지 못한 오르그의 가죽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

 크아아악!

 쿠와앙!

 상처 입은 오르그들은 흉성이 터졌는지 노랗던 눈알이 붉게 변하며 괴성을 질렀다. 비록 지능은 가졌지만 흉성이 폭발하면 본능에 충실해지듯 사방으로 흩어지려던 오르그들이 일거에 다섯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섯 명은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오르그들을 상대했다. 처음에는 제법 넓은 범위를 장악했지만 합공을 당한 탓에 오르그들의 괴력에 밀려 서서히 서로를 향해 좁혀 들었다.

 ‘바보들!’

 하룬은 가볍게 혀를 찼다. 개개인이 오르그 한 마리 이상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과 잘 정련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습격의 묘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건물 안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놈들을 습격하거나 계단을 통해 올라오는 녀석들을 위에서 상대했다면 적어도 두셋은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공공연하게 무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긴! 그랬다면 저 오르그들이 흩어져 이 거리가 완전히 난리가 났겠지.’

 어쨌든 그들이 오르그들의 이목을 끌었기에 당장은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들로서도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특수군이 출동했거나 방위군이 오르그들을 효과적으로 막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계속 숨어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처음의 호기로운 기세와는 달리백에 가까운 오르그들의 힘과 기세에 밀려 이내 한 상점의 벽으로 물러났다. 그중 한 명은 상당히 뛰어난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일행과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막 움직이려던 하룬은 강한 기합 소리를 들었다.

 “폭爆!”

 그와 함께 다섯 명에게 쇄도하던 오르그들이 한순간 뒤로 몇 미터나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이능력이다!’

 나인이 가진 능력과는 다르지만 이능력이 틀림없었다. 네 사람이 뒤로 날아간 오르그들을 향해 몸을 날리자 풀썩 제자리에 무너지듯 비틀거리며 앉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진동파 종류인가?’

 그런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는데 육중한 체구의 오르그 전사들이 수 미터나 뒤로 날아갔으니 대기를 끌어들여 압축했다가 한순간에 벡터(방향)를 정해 폭발시킨 것이리라.

 여자의 이능력으로 네 검사는 위험에서 벗어나 오르그 몇 놈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넷 중 한 명의 실력은 좀 떨어졌지만 세 사람은 오르그의 경동맥이 지나는 부위를 제대로 노렸다.

 하지만 위험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피를 보자 흉성이 폭발한 오르그들이 전보다 더 거세게 네 사람을 밀어붙였다. 세 검사는 오르그들의 무기를 힘이 아니라 궤적에 미리 넣거나 혹은 무기를 비틀어 그 힘을 흘리는 고급 검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명은 힘으로 맞받아치다가 입으로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결국 다시 아까처럼 다섯 사람은 오르그들에 의해 한 곳으로 밀려났다. 내상을 당해 선홍색 피를 토해내는 한 남자의 등이 벽에 닿았을 때 아까 이능력을 썼던 여자가 힘겹게 일어났다. 세 검사는 그녀에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공간을 벌려 주었다.

 “혼?!”

 기합이 터지는 순간 포위망의 앞쪽에 있던 오르그들이 일제히 비틀거렸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과 함께 세 검사가 빠르게 달려 나가 오르그 셋의 경동맥응ㄹ 베어 버렸다.

 ‘굉장한 능력이군!’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오르그들의 정신 상태를 혼미하게 만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르그들의 머리를 향해 부채꼴로 방사되는 일종의 파동은 하룬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였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

 두 번째로 기합성을 터트려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이능력을 가진 여자의 몸이 인형처럼 뒤로 넘어갔다. 다행히 부상을 입은 남자가 그녀를 안았지만 그 충격에 두 사람은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세 검사의 능력밖에는 믿을 것이 없었다.

 비록 놀라운 검술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검 자체가 오르그의 피부를 베는 것에 불과하고 포위된 상황이라 다섯 명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다.

 ‘구해야 해!’

 변종 생물들과의 전투에 특화된 특수군도 아닌 휴먼들이 다른 이들을 향해 나선 것은 높이 살 만했다. 물론 자신들의 능력을 너무 과신해서 도피할 기회도 만들지 못하는 그들이 좀 한심했지만 그래도 이들은 충분히 구할 가치가 있는 이들이었다.

 어차피 자신도 나서려고 하던 참이다.

 마음을 정한 하룬은 박살을 쥐고 바닥을 박찼다. 몸에 붙은 메신저 스킬을 통해 발바닥으로 들어오는 기가 느껴지자 힘이 솟았다. 두세 번 바닥을 박차는 사이 그의 몸은 다섯 명을 포위한 오르그들의 후미에 접근했다.

 ‘속전속결!’

 등을 보이고 있는 한 오르그를 향해 날아가는 박살에게 보이지 않았던 날이 생겨났다. 기를 주입한 것이다. 순간 하룬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이래서 일부러 날을 만들지 않았구나!’

 하룬은 시퍼렇게 일렁이는 날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별로 많이 주입하지도 않았는데 기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적은 양으로도 날이 생성된 것이다. 평소에는 몽둥이처럼 사용하면 되고, 기를 주입하면 날이 새로 생성되니 그야말로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이었다.

 ‘이 정도면 10분은 충부해!’

 비욘드의 경험에 비추어 대충 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예상한 하룬은 이름도 모르는 해란의 할아버지에게 감사드리며 박살을 날렸다. 제대로 된 검술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그저 용병 아카데미에서 지겹게 수련했던 찌르기와 베기만으로도 오르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싸악!

 단숨에 한 오르그의 목덜미가 반쯤 베어졌다.

 끄악!

 비록 비명을 질렀지만 잠시 후 베어진 목덜미에서 피가 대량으로 분출되자 오르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룬은 형용하기 힘든 짜릿한 감각을 느끼며 박살을 휘둘렀다. 등을 보이고 있던 오르그들이 마치 썩은 빵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적이닷!”

 포위망 외곽이 무너지자 놀란 오르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일부가 몸을 돌려 하룬에게 달려들었다.

 슈우욱!

 박살이 몇 배의 길이로 늘어난 듯 잔상을 남기며 하룬의 몸과 함께 날아갔다.

 푸욱!

 파동탄의 위력으로도뚫지 못하던 오르그의 가죽이 뚫리면서 심장이 관통되었다. 박살을 쥔 손목을 살짝 비틀며 구멍을 넓힌 하룬은 빠른 속도로 검을 빼서 다른 오르그를 향해 휘둘렀다.

 싸악!

 일곱 개의 피부 층으로 이루어진 오르그의 단단한 가죽을 베고 경동맥마저 베어 버리자 놈들은 분수처럼 피를 흘리며 움직임이 느려졌다.

 이 오르그들이 비록 지능이 높다지만 놈들은 오직 타고난 괴력과 빠른 몸놀림으로만 공격해오고 있었다. 이미 한차례 난전을 통해 놈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높은 수준의 검술을 익힌 하룬에게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시간이 갈수록 박살을 쥔 하룬의 몸은 더욱 빠르고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나인 일행을 구할 때 펼쳤던 빌로우 검술 대신 다수를 상대하는 데 효율적이라는 디스펄션 검술을 펼친 것이다.

 슈슈슈!

 순간적인 마나의 집적과 폭발을 이용한 디스펄션 검술은 메신저 워킹 스킬과 결합하여 한 번에 많은 검이 동시에 오르그들의 급소를 찌르는 것 같았다.

 박살의 잔상이 흐트러진 후에는 머리와 심장이 꿰뚫려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는 오르그들의 사체만이 남았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휴먼들을 둘러싼 포위망의 외곽이 절반 이상 무너질 정도로 박살은 갈수록 더 많은 검날을 만들어 오르그들의 급소를 찌르고 있었다.

 왜애애앵! 왜애애앵!

 하룬은 빠르게 몰아지경에 빠져들었지만 이번에는 한 줄기 감각을 남겨 두어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이 사이렌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변수가 출현한 것이다.

 “타앗!”

 빠르게 움직이며 포위되는 것을 피하던 하룬은 낮은 기합성과 함께 바닥을 박차고 위로 솟아올랐다. 거의 5미터는 되는 높이였지만 움직임은 가볍기만 했다.

 ‘위험하군!’

 먼저 오르그들을 상대하던 다섯 명 중 둘이 부상을 입고 세 사람이 만든 작은 공간 안에 들어가 있었다. 분노와 공포 그리고 절망이 담긴 그들의 눈이 하룬을 보는 순간 찢어질 듯 커졌다.

 하룬은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팔을 휘둘러 방향을 바꾸고는 한 발로 다른 발을 찼다. 순간 떨어지던 그의 몸이 다시 1미터 정도 솟구치더니 빙글 몸을 돌렸다.

 ‘특수군?’

 허공에서 다시 한 번 위로 솟아오를 때 방어군과는 달리 얼굴을 포함해 전신을 가린 메탈 슈트를 입고 광선검을 들고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타앗!”

 작은 기합성과 함께 몸을 둥글게 말아 머리가 아래를 향하도록 자세를 바꾼 하룬은 아래쪽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까앙!

 길게 휘두른 검 끝에 세 오르그의 무기가 날아가거나 베어졌다. 그 충격을 이용해 몸을 돌려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한 하룬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오르그들의 굵은 다리를 향해 박살을 휘둘렀다.

 싸악! 쓰윽!

 큭!

 털썩! 쿠웅!

 작고 부드러운 절삭음이었지만 그 얼마 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억눌린 비명과 둔탁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순식간에 오르그들에게 포위되었던 다섯 명에게 이어지는 길이 생겨난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서둘러!”

 “누, 누구요?”

 멍청한 녀석!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런 말이나 하는 쓸데없는 놈들이라는 생각에 인상을 썼던 하룬이 다시 소리쳤다.

 “그 자리에서 죽고 싶나?”

 “어! 특수군이 출동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 명은 하룬이 만들어 낸 잔혹한 길을 향해 부상자 두 명을 부축한 채 달려왔다.

 “가장 뛰어난 자가 뒤를 맡아!”

 하룬은 다시 좁아진 공간을 보며 바닥을 박차고 낮게 날아가며 박살을 휘둘렀다.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표홀하게 움직이는 박살은 그림처럼 잔상을 남기며 오르그들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파악! 파악!

 이제 난전의 요령을 어느 정도 터득한 하룬은 쓰러지는 오르그의 몸을 걷어차며 후미의 공격을 차단하는 놀라운 기술까지 사용하면서 길을 뚫었다. 이번에 그의 검은 정교한 검로가 아니라 센스 소드 특유의 감각적이고 영활한 움직임을 보이며 오로지 힘을 기반으로 무기를 날리는 오르그를 죽여가고 있었다.

 왜애애앵! 왜애애앵!

 다시 한 번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후퇴! 후퇴하라!”

 그사이 특수군의 가세로 불리함을 깨달았는지 오르그들 사이에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흉성이 터지면 완전히 미쳐버리는 오르그들이었지만 확실히 이놈들은 달랐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몸을 돌려 전장을 이탈했다.

 하룬은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박살에 주입하던 기의 운행을 하단전으로 돌렸다. 마음껏 몸을 움직였는데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단전의 기 역시 5분 이상 운용이 가능할 정도였고, 몸의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빠르게 자신의 상태를 체크한 하룬은 멍청한 휴먼들에게 눈을 돌렸다. 입을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다섯 명의 외관은 그야말로 멍청함의 표본이었다.

 “가시오!”

 용건을 마쳤으니 더 이상 볼일이 없어 막 몸을 돌리려던 하룬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그의 눈이 고정되었다.

 그의 눈길이 닿은 남자는 검을 쥔 손과 어깨까지 아직 경련을 일으키는 상태였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격렬하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무슨 이유로 실력이 달리는 상황에서 무모한 짓을 한 것인지 모르지만 검을 든 자로서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그런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색함이 아닌 친밀함이 느껴진다. 그 순간 잠시지만 그 친밀함의 대상이 누군지 생각났다.

 “럼?”

 “어엇!”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을 들은 남자가 기어코 탄성을 터트렸다. 마치 괴물처럼 오르그들을 해치우던 무시무시한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현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누구?’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화르릇! 화르릇!

 기이한 소리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열기에 눈을 돌려 보니 평상시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탱크가 보였다. 화염방사기를 탑재한 T-S 탱크의 보조포가 불길을 토해내고 있었다. 워낙 거리가 가까운 터라 주포의 파동 포탄은 발사되지 않았지만 전방 10미터 반경을 불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화염의 방사는 위력적이었다.

 “럼이 맞나?”

 “아, 네!”

 럼은 정신없는 중에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구해 준 이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궁금했지만 대답이 먼저였다.

 “가자!”

 하룬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까 중년 사내가 들어간 건물로 뛰었다. 화염 방사 탱크 때문에 오르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탓에 그와 뒤를 따르는 다섯 명은 빠르게 거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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