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벨과 아즈만은 지름 2미터 정도의 튜브 안에 있었다. 튜브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져서 그 안이 훤히 다 보였고, 기능을 알 수 없는 많은 밸브들이 정밀기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벨은 이제 약 사흘 정도면 분화가 끝날 겁니다, 마스터.
아즈만이 뇌파로 상황을 알려 왔다. 아즈만과는 금속성 목소리보다는 뇌파를 이용해서 대화하는 편이 편해서 이렇게 하기로 했다. 뇌파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으니 마치 게임 속에서 정령들과 대화하는 것 같아 더 정감이 갔다.
하룬은 곧 벨을 볼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의 귀여운 행동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언제부터인가 벨은 그의 유일한 가족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전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건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럴 거라고 판단합니다. 약 94%의 정확도를 가진 판단입니다.
-다행이네. 녀석이 날 못 알아보면 섭섭해질 테니까. 그런데 이전에 비해 달라진 점이 있는 거야?
-네, 있습니다. 각종 전투술과 무기술 그리고 다양한 지식을 데이터화시켜 전하고 있습니다.
하룬은 아즈만의 배려가 고마웠다. 벨이 또다시 어떤 일을 당한다면 정말 참기 힘들 것이다. 이제까지야 마음을 주어 본 적이 없어 몰랐지만 이제 벨의 존재는 그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하고 깊은 감정의 원천이 되어 버렸다.
-고마워, 아즈만.
-아닙니다. 비록 무의식이기는 하지만 벨이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분화하는 중에 자신이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래? 후후후, 정말 예쁜 녀석이라니까.
하룬은 벨의 마음이 너무나 예뻤다. 녀석은 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던 적이 있었다.
-아! 각인은 제거되었다고?
문득 각인에 대한 생각이 났다. 가이아라는 미지의 존재에 의해 심어진 각인 말이다.
-네. 각인 대신 마스터를 향한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비록 모든 면에서 휴먼체와 동일하지만 벨은 다른 휴먼들과는 달리 마스터를 향한 충성심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하룬은 만족했다. 비록 가이아라는 존재가 심은 각인이 그를 도우라는 내용이기에 해가 될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누군가에게 조종되는 느낌이 싫었다.
-아즈만, 아니 아리는 어때?
아즈만, 아니 이제는 기지를 통제하는 슈퍼컴인 본체와 완벽하게 분리되었다는 말에 아리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주었다.
-아리는 14일 후면 완전히 분화될 예정입니다.
투명한 튜브 속에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 아리의 모습이 보였다.
-아리 역시 각인은 제거된 거야?
-네. 철저하게 살펴보았는데 각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벨의 경우처럼 그녀 역시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발산해서 그것에 맞는 교육 등 여러 지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벨에 비해 아즈만은 나중에 만나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이 전혀 모르는 미지의 존재의 안배를 느끼게 만들어서 그런지 하룬은 그녀에게 왠지 거리를 두었었다. 하지만 각인이 사라졌다는 말에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즈만, 고마워.
-아닙니다. 마스터가 없었다면 전 분체에 갇혀 제 존재를 영원히 드러낼 수 없었을 겁니다.
아즈만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아즈만은 벨이나 아리처럼 인공지능을 가졌으면서도 상당한 감정을 가진 특별한 존재였다. 서브 슈퍼컴으로 시스템 깊숙한 곳에서 은밀하게 홀로 분화해 왔던 아즈만은 컴퓨터이면서도 생물과 비슷한 감정을 가진 존재였다.
-앞으로도 각별하게 신경을 더 써줘. 당분간 유니온으로 들어가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여기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룬은 벨이 웅크리고 있는 튜브를 통째로 안았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재질이 아기처럼 웅크린 벨을 하룬의 품에 쉽게 안기게 만들었다.
“벨, 어서 빨리 내 곁으로 와 주렴. 이 오빠는 너의 밝은 미소와 웃음소리가 그립구나.”
하룬은 벨을 안은 채 한참 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치 벨이 예전 그대로인 듯 말이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아기처럼 웅크린 벨이었지만 밝은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벨이 든 튜브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하룬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리의 튜브를 안았다.
아리는 예전의 그 성숙하고 매혹적인 미녀의 모습이 아니라 벨처럼 귀여운 꼬마의 모습이었다. 아마 아직 덜 자란 모양이었다.
‘후후, 정말 귀여운데. 벨이 귀엽고 깜찍하다면 아리는 같이 성장한 여동생 같아. 같이 이야기하고 놀며 같이 커 온.’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아쉬웠다. 아직 이성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홀을 대상으로 한 풋사랑의 상처 때문에 그런지, 성숙한 여체로 강렬한 유혹을 발산하던 아리의 옛 모습보다는 지금 모습이 더 좋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아리, 어서 나와요. 당신이 요리해 준 음식들이 많이 생각나요. 그리고 당신의 그 방대하고 풍부한 지식들을 활용해서 날 도와줘요.”
이전 같으면 얼굴을 붉혔을 테지만 지금 아리의 모습은 하룬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소녀였기에 안으면서도 무척 편했다.
유니온의 집으로 온 하룬은 외출을 서둘렀다. 외출이라고 해 봐야 멀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옆집 진수를 만나는 것이다. 물론그 후로는 바란 남매를 만나러 암시장에 갔다가 마지막으로 아즈만이 부탁한 식재료들을 구하러 마트에 들를 예정이었다.
아직 낮 시간이라 한창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던 듯 진수는 한참 후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하하하, 우리 대장이 웬일이야. 난 아직 게임을 하는 줄 알았는데.”
너스레를 떨며 반기는 진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캡슐의 숫자가 더 늘었다. 이젠 거실까지 캡슐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하룬의 눈길이 캡슐들을 향하는 것을 본 진수가 음료수를 내오며 말했다.
“친구들이 더 들어왔어. 요새 F구역 상황이 최악이거든.”
“그래요?”
진수는 하룬이 유니온 상황을 모르는 것으로 여겼는지 짧게 말해 주었다.
“예전에는 주로 하르크가 에너지 배리어가 약해진 곳을 뚫고 침입해 왔지만 요즘은 방호력이 문제가 생겼는지 수시로 배리어에 구멍이 나는 상황이라 오르그들이 수십 마리씩 침입해 오는 통에 F구역이 난리도 아니야.”
전에 나인이 말한 대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여기 D구역은 그런 문제가 없어서 갈데없는 친구들을 받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어.”
또 진수 특유의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이다. 캡슐의 커버들이 다 닫혀 있는 것을 보니 그 친구들은 현실에서 제대로 된 직업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식비며 에너지 사용료 같은 생활비가 장난 아니게 많이 들 텐데도 저렇게 밝은 얼굴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많고 오지랖 넓은 진수다운 결정에 하룬은 내심 부러움을 가졌다.
‘나라면 저렇게는 못 했겠지?’
어린 시절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지 하룬은 진수나 다른 평범한 휴먼들이 가진 다양하고 깊은 감정은 가지지 못했다. 현실보다는 게임에서 오히려 사랑처럼 깊고 의미 있는 감정을 처음 경험했을 만큼 정도가 좀 심했다.
“괜찮아요?”
다소 애매한 질문이지만 진수는 대번에 그 내용을 이해했다.
“좋아. 누가 뭐라고 하든 내 마음이 편하면 그게 최고 아니야? 누구는 날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친한 녀석들이 위험한 곳에서 지내고 있다면 계속 불안하고 마음이 쓰일 테니. 더구나 지금 난 너 때문에 고액 연봉자가 되었으니 네게 받은 은혜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뿐이야. 이 모든 것이 다 너, 하룬 대장 덕분이라고.”
진수의 말에 하룬은 얼굴을 붉혔다. 정말 착한 것으로 따지면 코원 유니온에서 따라갈 휴먼이 없을 것이다.
“참, 어제 방송을 보니까 고요의 땅을 무사히 벗어났다며?”
“네. 그렇게 됐어요.”
하룬은 비교적 상세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진수는 때로는 감탄성을, 또 때로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드러내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아무튼 우리 대장, 정말 대단하다.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널 만난 것이 내 평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해.”
“객쩍은 소리는 마요, 형.”
“언제든 내 힘이 필요하면 말해. 내 현실의 목숨이라도 줄 테니까.”
“허어 참, 왜 그래요?”
“하하하! 그 정도로 네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야. 네 덕분에 진짜 살고 싶었던 삶을 즐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진수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야기로 하룬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룬은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 지금은 어디 있는 거예요?”
대원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준 후 신비하게 사라진 진수였다.
“고요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스카이루프 산맥에 있어. 엘프들과 북부군이 고요의 땅 입구를 틀어막은 탓에 어쩔 수 없이 강을 타고 위로 올라갔지. 호수 근처에 사는 나부로 부족의 전설을 찾아 탐험하고 있는 중이야.”
“전설이라고요, 형?”
“응. 그곳 원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한 스카이루프 산맥 한가운데에 ‘실버문’이라는 전설의 왕국이 있었대. 멸망한 라 제국의 후예가 건설했다는 그 왕국은 수십만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량 생산이 가능한 옥토와 금과 미스릴 광산을 가지고 있어서 그 성세가 대단했대. 물론 지금은 폐허가 되었겠지만 잘하면 뭔가 건질 수 있을지도 몰라서 친구들을 끌고 찾는 중이야.”
역시 탐구 정신이 강한 진수다운 행동이었다. 언제 또 그런 전설을 접하고 찾으로 나섰는지 모르겠다.
“잘 되길 바랄게요.”
한동안 진수와 밀렸던 이야기를 나눈 후 하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수는 친구들이 집안일과 바깥일을 전담한 덕분에 직접 마트에 갈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는 무척이나 부러웠다.
‘나도 현실에서 친구들을 좀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게임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진수처럼 세상은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일방적이든 아니면 쌍방이든 말이다. 어쩌면 하룬이 현실보다 비욘드의 세상을 더 좋아하는 까닭은 그곳에 동료이자 가족이자 마찬가지인 돌풍 용병대가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암시장을 향하던 하룬은 유니온의 중심을 기점으로 방사형으로 건설된 대로, 즉 코어 스트리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된 존 게이트Zone Gate가 굳게 폐쇄되고 신분 확인과 용건이 확인된 후에야 지날 수 있는 작은 비상문만 개방된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상위 구역인 C구역과 연결된 존 게이트가 전면적은 아니지만 부분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니온의 상황이 그 정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설마 여기까지 위험하다는 걸까?’
그건 확실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위협이 유니온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룬은 메신저 워킹 스킬로 빠르게 걸음을 옮겨 E구역 게이트로 향했다. 그곳에는 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심각하긴 하군.’
하룬은 레이저 건을 소지하고 게이트를 통제하는 방위군의 모습에서 긴장감을 읽으며 E와 F구역의 게이트를 통과해 목적지인 암시장으로 향했다.
“일이 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물건들을 구입하고 남은 돈은 이렇게 준비해 놓았다.”
바란의 말에 하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눈은 안주머니에 황금 바를 빼곡하게 채워 넣은 조끼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더 이상 하룬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보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바란은 작게 욕설을 하고는 소파에 몸을 푹 파묻었다. 하룬은 여전히 입을 닫은 채 그를 응시했다.
“에너지 배리어가 드디어 뚫리기 시작했어.”
그건 나인과 진수에게도 들은 바가 있었다.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그들이 배리어 안으로 기어들어 와 난리를 치고 있어. 각종 물자가 쌓인 상점들은 물론이고 상당한 자체 방어력을 갖춘 이곳까지 위험한 상황이야. 더욱이 유니온 근처에 오르그들이 상주하면서 아우터들에게 물건을 공수 받을 방법도 이제 사라지고 있어.”
상황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나인 일행을 습격한 오르그를 만났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어느새 그 정도로 위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오르그들이 연일 수십이 넘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있어.”
“방위군은요?”
그들이 하는 일이 배리어를 침입한 적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높은 세금을 말없이 내온 것이 아닌가?
“그들로는 안 돼. 이번에 남하한 오르그들은 이전의 놈들과는 달리 금속을 다룰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어. 놈들이 입은 방어구는 조잡하지만 화약 무기나 파동건까지 방어할 수 있고, 무기는 방위군의 메탈 슈트를 뚫을 수 있어. 특수군이 출동해야 놈들을 상대할 수 있는데 숫자도 적은 데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오르그들이 목적을 달성하고 도망치는 바람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군부의 높은 놈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일전에 나인 일행을 습격했던 놈들 역시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판으로 상체를 비롯한 급소를 가리고 있었다. 또한 몽둥이나 철괴 같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제법 날이 잡힌 검이나 혹은 도끼를 사용하고 있었다.
‘오르그들이 높은 수준으로 빠르게 분화하는 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짐승에 가까웠던 오르그들 대신 휴먼 못지않은 지능을 가진 종족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군부 쪽을 욕하던 바란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부 쪽에서 은밀한 소문 몇 개가 흘러나왔어.”
“소문요?”
“응. 한동안 폐쇄되었던 지하 도로가 개방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
“지하 도로라면?”
하룬은 순간적으로 유니온 안의 집과 기지로 연결된 지하 도로를 떠올렸다.
“대규모 물자 수송용으로 건설된 지하 도로 말이야. 다른 유니온과 공개적으로 무역하던 시절, 즉 이전의 13차 원로원에서 타 유니온과의 공개적인 접촉을 차단하면서 폐쇄했던 도로를 다시 연다는 이야기는 이런 위기가 우리 유니온뿐 아니라 다른 유니온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흐음. 심각하군요. 고집스럽고 고루한 노블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정도라면 상황이 많이 좋지 않을 것 같네요.”
“내 생각도 그래.”
과거 자급자족이 가능한 대형 유니온으로부터 시작된 유니온 폐쇄의 바람은 여러모로 자원이 부족한 코원 유니온의 모든 상황을 악화시켰다.
당시 유니온들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유니온의 태동이 시작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생성된 노블과 일반 휴먼들 간에는 심각한 갈등 상황이 커졌다. 그것은 과학자와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노블들이 비상 상황을 이용해 권력과 금력을 거의 다 소유한 상황이 개선되지 않아 야기되었다.
의식이 있는 지식인층은 지속적으로 빈부 격차의 해소와 합리적인 재화의 배분 그리고 정치 참여를 요구했지만 노블들은 그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휴먼들은 들판에서 변종 생물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배리어를 만든 것은 물론이고 건물과 도로를 비롯한 모든 인프라를 우리가 건설했는데 왜 우리에게 그것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거냐. 여기가 싫으면 배리어 밖으로 나가라.
노블들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게 된ㅜ소불위의 권력이나 엄청난 금력을 휴먼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니온의 기반은 당신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당신들, 노블들은 종말 시대에서 전해진 에인션트 컴퓨터들의 능력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니 그럴 자격이 없다!
의식 있는 자들은 노블들의 처사를 비난하며 부와 권력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때문에 시간이 흐르자 거의 모든 유니온에서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식량과 의복은 물론이고 각종 약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들이 부족한 유니온 주민들은 무장 봉기에 뛰어들었다.
그들 중에는 깨어 있는 노블들도 있었다. 특히 과학자들 중에 그런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일부 유니온에서는 실제로 혁명에 가까운 일들이 일어났고, 그런 유니온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 봉기는 더욱 거세졌다.
이런 상황이 되자 각 유니온들의 노블들은 힘을 합쳤다. 그것이 바로 전지구위원회의 전신인 전지구유니온연합회의 태동이었다. 전지구유니온연합회는 몇 가지 사항을 의결했다.
-전 유니온을 관통하는 지하 도로를 통제한다.
-모든 과학자들의 유니온 간 이동을 통제한다.
-모든 유니온을 관할하는 몇 개의 기업을 통해 물류를 통제한다.
-글로벌 넷의 정보를 전지구유니온연합회 이름으로 검열, 부분 통제한다.
-유니온 내의 무기 소지와 사용은 전면적으로 금지된다.
이런 몇 가지 사항이 의결되고 시행되면서 유니온들은 급속하게 소요 사태를 해결해갔다. 일단 부족했던 식량의 무료 지급을 미끼로 하층민들의 동요를 억제했고, 지식인층과 반체제 인사들을 유니온 밖으로 추방하는 등 강압 조치를 취해 대대적으로 숙청해 갔다.
그것이 휴먼력 54년에 일어난 ‘유니온 레귤레이션(유니온 통제)’였다.
그 후로 유니온 간의 인적 물적 교류는 유니온 정부가 철저하게 통제했고, 유니온 상층부의 권위와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반체제 과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살해되거나 유니온 밖으로 쫓겨났다.
그 후 휴먼력 95년에는 이전 문명에서 왕정이라고 부르던 정도의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한 노블들이 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니온의 고립 상황이 심각해졌다.
유니온들은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각종 지식의 수준을 현저하게 낮추는 대신 사상 교육을 심화시켰고, 높은 수준의 지식을 습득한 대학 졸업자를 통제 관리하면서 과학자들을 단순 기술자들로 바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니온들이 보유한 기술력은 노후화되어 수시로 작동 이상을 일으키는 슈퍼컴에 의존하게 되었고, 기술자들은 기계의 작동 원리는 알지만 부품이나 소재의 생산 방법이나 공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높은 지식이나 생산 기술을 가진 노블들 간에 권력 투쟁이 심화되어 암살이나 국지전이 발생하여 희생자가 속출하면서 많은 기초 지식들과 기술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니온들은 통제 무역조차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니온들을 그물처럼 연결했던 지하 도로들을 완전히 폐쇄시켜 버렸다. 대신 전지구유니온연합회를 전지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이 휴먼력 95년에 일어난 ‘유니온 아이솔레이션(유니온 고립)’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전 지구를 관할하는 무선 네트워크망을 사용하는 글로벌 넷의 상당한 영역은 강력하게 통제되었고, 대신 유니온을 관할하는 유니넷이 그 자리를 상당 부분 차지했다.
기술의 교류는 물론이고 인적 물적 교류가 완전히 금지되면서 유니온들 대부분의 정치 상황, 즉 노블들의 안정적인 권력 유지는 가능해졌지만 휴먼 시대의 근간이나 다름없었던 과학기술 문명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모든 기술은 유니온을 관할하는 슈퍼컴에 달린 상황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이번에 바다 건너 아레아 유니온으로부터 일단의 사람들이 온다고 하는데 군부 일각에서는 그들이 에너지 관련 기술을 보유한 노블들이라고 생각하나 봐. 그 정도라면 배리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군납을 전문으로 하는 박살 대장간의 가업을 이은 바란은 군부 쪽에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대장간은 에너지건의 받침대를 오랫동안 군부에 납품해왔다. 때문에 그가 가진 정보의 정확성을 꽤 높은 편이다.
“다른 유니온의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에너지 배리어를 E구역까지 축소할 계획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돌고 있어.”
거대한 황무지에 자리를 잡은 아레아는 무려 천사백만의 인구를 가진 대형 유니온으로, 아직 상당한 기술자들을 보유한 강력한 유니온이다. 종말 시대 미국이라는 나라의 과학기술 문명이 가장 많이 전해졌고, 다른 유니온들과 달리 신분 차이가 별로 없는 개방적인 곳이기도 했다.
“정말 큰일이네요.”
“그러게. 안 그래도 얼마 후 유니온 정부에서 긴급 담화를 발표한다고 하는데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어. 그나저나 네가 원하는 것들을 구해주지 못해서 어쩌냐?”
“일단은 좀 두고 봐야지요. 상황이 더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유니온 정부에서도 무슨 대책을 내놓겠지. 이러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업이 달린 이 암시장도 고사될 상황이니.”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수입이 준다면 유니온 상층부가 무슨 대책이든 내놓을 것이다. 바란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나마 필수적인 물건들은 구해져서 다행이네.’
하지만 전에 벨이 잡아 놓은 계획에 따르면 부족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영흥 마을 전사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룬이 전투형 사이보그들을 이끌고 직접 아우터 마을을 순회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 일 때문에 해란이와 세란이도 정신없이 바빠. 나중을 생각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은 하나라도 더 구해놔야 하기 때문에 녀석들까지 다른 암시장을 헤매는 상황이야.”
어째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현금보다는 금이 더 나을 것 같아 남은 돈은 금으로 바꾸어 놓았어.”
“고마워요, 형.”
언제나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현금보다는 금이나 은 같은 보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만약 유니온에 무슨 일이라도 나면 아무리 많아도 현금은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무슨 소리를. 다들 놀고 있을 때 우리는 너 때문에 호황을 누렸는데.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거래로만 계속될 사이는 아니잖아. 너나 네 뒤의 조직도 뭔가 단단히 준비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라도 잘 봐주라.”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았지만 하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만 있다면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물건을 구입해준 바란 남매를 챙기지 않을 리가 없다. 바란 말대로 그들은 단순한 거래상대로 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용건이 끝난 것 같아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일어서려는데 바란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속삭이는 것처럼 은근한 목소리도 그렇게 얼굴에도 꼭 비밀을 공유하자는 아이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룬, 내가 너에게 꼭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구경하지 않을래?”
“선물요?”
뜬금없는 소리에 하룬은 호기심이 동했다. 이제까지 여러 번 만났지만 바란 남매에게 선물은 물론이고 할인도 기대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물건과 돈에는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하룬 입장에서는 믿을 수 있기에 그런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내 손에 오게 된 물건인데 만들어지자마자 만든 이의 피가 묻어 재수 없다고 나한테 처분권이 넘어왔어. 물론 물건의 질은 최상이야. 우리야 작업이 그러니 그런 미신을 믿지만 넌 그런 거 안 믿지?”
물론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썩 내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선물이라니 궁금하기는 했다. 명색이 코원 유니온 최고의 대장장이라 자부하는 바란이 품질을 보증하는 물건이 아닌가.
“네.”
“하르크까지 죽인 실력자가 그런 미신을 신봉할 리가 없지. 잘됐다.”
바란은 하룬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금고를 열어 검은색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자, 봐!”
바란의 손에서 펼쳐진 것은 카라가 달린 외투였다. 칙칙한 검은색 외투는 외관상으로 보면 평범했다. 먼지바람이 심한 E와 F구역에 사는 주민들 중에 저런 외투를 입은 이는 흔했다.
하지만 집중력과 시력이 좋은 하룬에게 그 외투는 뭔가 특별해 보였다. 평범하면서도 강한 이끌림이 그를 홀렸다.
“멋진 녀석이네요.”
외투를 보고 난 후 바뀌는 하룬의 눈빛을 본 바란은 얼굴에 환한 미소가 생겨났다. 하룬이 이 외투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것에 만족한 것이다. 비록 거래까지 직접 하지만 바란은 타고난 대장장이였다.
일견 평범한 외투에서 소용돌이무늬를 발견한 하룬은 눈이 커졌다. 파동건도 뚫을 수 없다는 하르크 가죽 특유의 무늬였던 것이다.
“이 가죽 혹시?”
“맞아. 그때 네가 잡아 온 하르크 가죽이야. 이곳에서도 최고라고 자부하는 여섯 공방이 함께 작업해서 만들어 낸 최고의 물건이야. 특수한 방법으로 하르크 가죽을 부풀려 조직 안에 게르귬과 세슘 입자를 주입해 가공시켜 만들었어. 덕분에 방호력은 베탈 방호 슈트를 능가하고 강력한 적외선과 자외선을 막아줄 수 있어. 또 전자파를 중간에서 교란시켜 투과시키기 때문에 유니온 어디서건 걸리지 않을 거야.”
하룬은 바란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을 정도로 멋진 외투에 푹 빠져 있었다. 발목에 오는 긴 길이에 특이하게 후드처럼 생긴 모자와 붙은 얼굴 가리개까기 있어 고글을 쓰면 완벽하게 강력한 햇빛을 막을 수 있고, 코 부분에는 정화 필터까지 붙어 있었다.
“내가 만든 것은 바로 이 무기들이야.”
바란은 외투의 안쪽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화아!”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양날을 가진 비수들이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물건들과 함께 외투 안쪽에 빼곡하
(스캔본에 262, 263p 빠짐. 원본에도 없는 것으로 보아 스캔할 때부터 빠뜨린 둡.. 대충 옷이랑 무기 설명인 것으로 추정됨)
부위는 넉넉했고 팔목 부위는 조일 수 있게 되었다. 팔을 휘둘러보니 마음대로 움직여진다.
외투의 허리 부분부터 그 아래쪽으로는 마치 치마처럼 넓게 벌어졌다. 때문에 걷는 것은 물론이고 약 10센티 간격의 단추를 푼 상태에서는 마음대로 발동작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단추를 채우면 하부가 무거운지 펄럭거림이 없어 치마처럼 불편하지도 않았다.
“이건 내가 특별히 주문해서 제작한 부츠야. 매번 보아도 네 신발은 왜 그 모양이냐?”
하룬은 자신의낡은 신발을 내려다보고 얼굴을 붉혔다. 굽도 없이 바닥이 고무 재질이 아닌 합성 가죽인 이 신발은 메신저 스킬 때문에 신은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좀 그랬나?’
물론 더 좋은 신발이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바란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외양만 봐서는 신발의 수명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기에 올이 군데군데 나가 있고, 가죽은 변형이 되어 보기가 흉했다.
“그 정도의 현금을 다루는 네가 왜 이런 외양으로 다니는지는 몰라도 나 바란을 형으로 부르는 네가 이런 꼴로 돌아다니는 것은 내가 못 봐주겠다.”
“고마워요, 형.”
내친김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새 부츠를 신어 보았다. 그리고 공방 사무실 내를 몇 바퀴 돌아보았다.
‘호오, 메신저 스킬이 제대로 펼쳐지네.’
“부츠 바닥과 굽을 하르크 힘줄을 자연 기법으로 가공해 만들었다고 하더라. 그 덕분에 충격 흡수와 높은 통기성通氣性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거의 닳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은 몰라도 메신저 스킬이 마음대로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건 해란이와 세란이가 구해 온 거야.”
바란의 손에는 고글이 들려 있었다. 먼지바람 때문에 고글은 유용한 물건이었지만 제대로 된 것은 엄청나게 비쌌기에 하루 사는 것도 고단했던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하룬은 고글을 썼다. 대번에 시야는 어두워졌지만 금방 적응이 되어 쓰지 않았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적외선과 자외선을 차단해 주는 것은 물론 옆에 있는 단추 두 개를 누르면 홀로그램 글래스가 망원 기능과 현미 기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더라. 특수한 목적으로 한정 제작해서 군부에 은밀하게 납품되는 군수품이야. 가격이 꽤 센 녀석이다.”
언제부터인가 정도가 심해지는 해란과 세란의 행동에 질려 그녀들에게 호감을 버렸던 하룬으로서는 미안한 일이었다. 가격은 알 수 없지만 군수품을 빼돌려 선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언제 제대로 한번 쏴야겠군요.”
“하하하! 당연하지. 이참에 나도 ‘하늘정원’에서 식사나 해 볼까?”
바란의 말에 하룬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하늘정원은 C구역의 코어 스트리트에 있는 코엠 유니온의 최고의 식당으로, 기본 코스의 가격이 무려 100만 원에 달했다. 노블이나 기업가가 아니면 감히 드나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지만 분위기나 음식 맛은 천상의 그것처럼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몇십억을 다루는 네가 그 정도 가지고 떨지는 않겠지?”
바란이 아무 대답 없는 하룬의 태도에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설마요. 날만 잡으세요.”
마음에 드는 무기들이 잔뜩 장착된 외투의 가치를 생각하면 하늘정원에서 식사 한 끼를 대접하는 건 사실 너무 가벼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쓴 적이 없었기에 습관대로 큰돈에 조금 질린 것뿐이다.
“하하하! 과연 통이 크구나. 나야 네 여자 친구가 해준 예전 음식이 더 맛있지만 해란이와 세란이가 하도 하늘정원 하늘정원 노래를 불러서 말이야. 너한테 심각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하룬은 바란의 말을 통해 하늘정원에서의 식사가 어쩐지 불편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근데 정말 그냥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괜찮아. 너 때문에 남들 손가락 빨 때 한 밑천 단단히 챙겼으니까. 아! 그리고 외투 왼쪽 뒤를 만져 봐. 검 자루가 잡힐 거야. 유니온 안에서야 쓸 일이 없겠지만 하도 흉흉해서 다마스커스 공법으로 만든 검 하나를 장착해 두었다. 혹시쓸 일이 있으면 나중에 집어넣을 때 조심해라.”
바란의 말에 손을 등 뒤로 돌려 더듬어 보니 왼쪽 어깨에서 안쪽으로 검 자루가 만져졌다. 외관상으로는 아무 표시도 없었지만 가죽을 덧대 처리했는지는 몰라도 검이 꽂혀 있었다.
싸악!
보이지 않게 장착해서 그런지 검 자루를 손끝으로 잡아 빼야 하는 것이 좀 불편했지만 눈에 뜨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우후!”
덜 정련되었는지 검대도 없고 날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특이한 검이었다. 외형은 검과 몽둥이의 중간 형태였다. 두툼하지만 납작한 검신으로 보아 몽둥이보다는 검에 가까웠다. 뭉툭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검과 달리 두툼한 검신은 완만하게 구부러진 모양이었고 길이는 비욘드에서 쓰던 본 소드와 비슷해서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최상품은 아니지만 아주 단단한 녀석이야.”
“이름은 있나요?”
“검신의 혈조 옆에 새겨 두었어.”
검신의 한가운데에는 혈조가 파여 있었다. 혈조까지 있는 것을 보면 검이 맞긴 한가 보다. 그 중간 어름에 새겨진 이름은 ‘박살’이었다.
“이름이 좀 그러네요.”
뭔가 심오하고 멋진 이름을 기대했던 하룬의 눈썹이 꿈틀하자 바란은 이마에 식은땀 몇 방울이 솟아났다.
“하하! 박살 대장간에서 태어났으니 박살이 가장 멋진 이름이지. 이 녀석 말고는 감히 우리 대장간 이름을 당당하게 새긴 녀석이 없으니까.”
‘그런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린 하룬이 검을 자세하게 살피는 것을 본 바란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 검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남긴 검이라 자신이 완성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비전은 대부분 물려받았지만 이 검의 재질은 너무나 단단했다. 어떻게 혈조를 파고 이름까지 새겨 놓았는지는 몰라도 대충 모양까지 완성된 검의 가장 중요한 날조차 그의 실력으로는 살릴 수 없었다.
날이 세워지지 않은 검이라면 외투에 장착이 가능할 것 같아 원래라면 광선검이 꽂힐 자리에 꽂았더니 기가 막히게 맞아 하룬에게 줄 생각을 했던 것이다. 급하면 몽둥이 대용으로라도 쓰면 될 거라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사실 유니온에서 검을 쓸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행여 패트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자신까지 처벌받을 것이다.
“혹시 검문이라도 당하면 몽둥이라고 우기라고. 그럴 용도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니까.”
“아하! 그렇군요. 그런 의미가 있는 줄 몰랐네요.”
하룬이 기어코 감탄하는 것을 본 바란은 등줄기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재수 없어 없애 버리려던 물건으로 최대 고객인 하룬에게 공치사를 하려던 바란으로서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난 만들던 것이 남았는데…….”
“제가 형님 시간을 뺏었군요. 날짜와 시간이 잡히면 해란이에게 연락하라고 하세요. 그럼 그때 뵐게요.”
“알았다. 그때 보자.”
하룬은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암시장을 빠져나왔다. 철든 이후 이렇게 의복을 두고 기뻐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의 기분은 황홀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