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프란으로》
고요의 땅을 내려가는 길에 혹시나 뒤에서 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단지 우려일 뿐이었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친 북부 군단과 엘프들은 물론 반나절 거리까지 접근했던 추격자들도 그들을 추격할 여유가 없었다.
특히 엘프들은 이주하던 일족들에게 사고가 생기자 이미 고요의 땅을 벗어난 이들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당장 로드와 합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더구나 네 일족이 전투를 피해 달아난 것도 큰일이었다.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하룬은 원로원과 최고귀족회의 그리고 몇 개의 마탑들에게 현금과 보석으로 총 300만 골드를 확실하게 챙겼다.
의뢰 대금을 챙긴 하룬은 전투에 참가한 이방인들에게는 개인당 300골드씩을 그리고 드래곤테일즈 용병단에는 개인당 1,000골드씩을 지급했다.
다카린 용병단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제껏 가지고 있던 강탄성궁 칠백 개와 철시의 상당량을 넘겨주었다. 세 용병 수뇌부에게는 따로 만 골드 상당의 보석을 선물로 주었기에 그를 따라 참전을 했던 이방인들과 용병들은 크게 만족했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 하룬 대장?”
1황자는 자신과 함께 가자고 제의했다. 그를 따른다면 작위는 물론 부와 명예를 한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당분간 저희 용병대는 내실을 기하기 위해 활동을 중단하려고 합니다.”
하룬은 그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1황자는 내심 하룬의 존재가 아쉬웠지만 더 적극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긴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이네. 혼란의 시대로 들어섰으니 말이네. 이렇게 헤어지기가 아쉬워 술자리라도 가질까 했는데.”
아쉬움과 호의가 담긴 1황자의 말에 하룬도 살짝 흔들리기는 했다. 하지만 헤어질 거라면 빨리 헤어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변혁의 시대이니 주인공이 되어 주도적으로 움직이려면 미리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할 걸세. 부디 좋은 결과를 이루길 바라네. 그대와는 모쪼록 지금과 같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마음 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룬은 과분하게 느껴지는 1황자의 태도에 강한 호감을 가졌지만 이방인인 자신의 신분도 그렇고 이제 더 이상 게임에 지금처럼 매진할 생각이 없기에 거리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나마 그에게는 호의를 가지고 있기에 마나 통신구를 하나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하룬의 돌풍 용병대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 같은 생각에 1황자는 크게 기뻐했다.
“아마 그 오미차가 많이 생각날 것 같네요.”
1황녀의 깊고 지혜로운 눈빛이 그를 향했다. 그녀 역시 하룬에게 귀고리형 마나 통신구를 받아 귀에 걸고 있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과도한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1황자나 1황녀는 그를 제대로 대접해 주었다. 그의 능력을 알아보는 눈은 물론이고 열린 가슴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하룬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었기에 고위 귀족들은 물론 기사들조차 그와 돌풍 용병대만큼은 제대로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나중에라도 하룬 대장과는 다시 손발을 맞춰 보고 싶소.”
“저 역시 그렇습니다. 강녕하시고 대업을 이루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이번 검증의 관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보인 7황자 역시 하룬을 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황자들과 고위 귀족들이 나중의 인연을 기약하며 물러난 자리에 헤르쉬가 들어왔다.
“이곳에 와서 세상 넓은 것과 사람 깊은 것을 제대로 경험했어요.”
헤르쉬의 말대로 피노세 황제에게 길드가 무너지고 자신하던 많은 일들에서 좌절을 겪은 탓인지 그녀의 눈빛은 좀 더 깊어지고 강해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렇소.”
“요청하신 비밀은 이야기한 대로 다음에 볼 때 알려 드릴게요. 그때는 대장이 어떻게 우리 버처리윙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지와 새처럼 나는 비밀을 말씀해 주세요.”
그녀가 말한 비밀은 바로 버처리비크의 몸속에서 느꼈던 이상한 기운에 대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그 비밀을 듣고 싶었지만 곧 1황자를 따라 움직여야 하는 사정 때문에 나중을 기약한 것이다.
“그럽시다.”
“석 달을 넘기지 않을 거예요. 다음에 볼 때는 나를 좀 부드럽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하룬은 베론 자작에게 일단 세 가지 정보를 요구했다. 그리고 버처리비크에 대한 비밀은 서로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제대로 된 결과만 가지고 온다면 이제까지 품고 있던 안 좋은 것들은 다 버리겠소.”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벌써부터 다음에 만날 일이 기대되네요. 부드러운 하룬 대장은 또 어떤 느낌일지 말이에요.”
헤르쉬는 1황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시종일관 그의 곁에서 종종거리며 움직이는 베론 자작의 손짓을 보고는 우아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전투 전에 겁을 먹고 로그아웃했지만 그래도 이만에 달하는 이방인들은 직접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 중에는 1황자와 같이 행동하기로 한 그의 지인들도 있었다.
“대장, 우리도 가볼게요.”
아레스를 비롯해 그와 인연을 맺은 이방인들도 작별을 고했다. 그들은 마법서 세 권을 손에 넣은 황자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직 그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일단은 그들 주변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 다들 조심하고 다음에 건강한 모습으로 봅시다.”
아레스, 매그럼과 초른, 아바 부녀의 아반가르드 길드, 세류의 코엠 길드, 발트랑의 아리수 길드원들도 헤어지기 아쉬운 얼굴로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작별 인사를 하고는 대형 워프 마법진으로 향했다.
그들이 떠난 뒤에야 뫼비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꼭 찾아가겠습니다.”
뫼비우스는 뭘 하고 다녔는지 가장 마지막으로 찾아왔다. 혼란한 와중에도 은밀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뭔가 꾸미는 일이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인데?”
뜬금없는 하룬의 물음에 뫼비우스는 그 잘생긴 얼굴에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사는 세상과 이곳 세상을 아우르는 정보 길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도 그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기에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너라면 잘해낼 거야.”
하룬은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좋았다. 그것의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록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잘생긴 얼굴로 그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미인들과 로맨스를 만들어내는 것에 강한 괴리감과 질투를 느껴 거리를 두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행동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강해지고자 노력하는 만큼 뫼비우스도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활용해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날 찾아오거나 현실에서 내 이름을 가진 형제를 찾아. 박살 대장간을 통하면 연락할 수 있을 거야.”
“그게 사실이었군요. 대장이 이방인의 이름을 빌리고 있다는 것요.”
뫼비우스의 말에 하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헤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다. 굳이 자신에 대해 밝히고 싶은 이유가 없었기에 남들이 편하게 생각하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내 외모나 성격과 비슷한 친구야. 내가 미리 말을 해둘 테니 필요하면 찾아가. 과도한 일이 아니라면 널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안 좋은 인연으로 얽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다. 때문에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함께한 시간 동안 하룬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사람은 현재의 능력보다는 꿈을 꾸며 노력하는 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현실의 그도 이 하룬 대장과 닮았다면 정말 제대로 사귀어보고 싶다.’
그가 겪은 바에 따르면 하룬 대장은 직관력이 뛰어난 인물로, 호불호가 비교적 명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가진바 능력도 심상치 않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것은 기발한 사고와 그 사고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능력이었다. 또한 제자리에 멈추어 있기보다는 앞을 향해 노력하는 진지한 삶의 태도를 가졌다.
‘정말 배운 것이 많아!’
그가 받아 주기만 한다면 평생 형님으로 모시고 싶은 인물이다. 물론 지은 죄가 있어 언감생심 그런 마음은 눈곱만큼도 드러낼 수 없지만 말이다.
뫼비우스는 현실의 하룬은 어떤 존재일지 정말 궁금했다. 이곳에서 시급하게 정보망을 갖추는 일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 제일 먼저 그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제껏 가져 본 적 없는 친구로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타니엘라 사형제의 능력으로 요른 백작성의 외곽으로 워프한 하룬 일행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알라미즈 산으로 향했다. 요른 백작은 이번에 개국한 파이론 제국의 후작이 되었기에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서두른 덕분에 며칠 후 하룬 일행은 석양이 지기 전에 약초 마을인 캘프란에 도착했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약 삼십 호에 달하는 전형적인 산골 집들의 굴뚝에서는 저녁을 준비하는 정겨운 연기가 나왔고, 저 멀리 보이는 언덕 위 초지는 노을에 잠겨 가고 있었다.
“멋진 곳이군요.”
“정말 그러네. 과연 우리 대장이 좋아할 만한 곳이야. 마나도 맑고 깨끗해서 이런 곳이라면 수련에도 큰 효과가 있을 듯하네.”
딜런과 타니엘라는 제각기 다른 이유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우리가 늘 꿈꾸던 곳이에요.”
“맞아! 내가 살고 싶었던 곳이야.”
헤니와 마리는 마치 그림처럼 맑고 평화로운 약초 마을의 모습에 단숨에 반해 버렸다. 에너지 막에 갇혀 사는 유니온이든 변종 생물로 우글대는 유니온 밖에서든 절대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있는 티노와 도네이스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뭔가 속삭였다.
‘이곳은 변화의 바람이 전혀 닿지 않은 듯 예전 그대로군.’
어쩌면 자신들로 인해 이곳이 언젠가는 이런 평화로움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밀려왔지만 일단은 더 늦기 전에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 시급했다.
하룬 일행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이제는 그들의 근거지가 될 곳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마을로 향했다.
목책 앞 30여 미터까지 도착한 하룬은 뜻밖에도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은공! 은공!”
머리서도 하룬을 알아본 알프가 목책을 열고 달려 나와 그를 반겼다. 전에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그의 외관은 전과 그대로였다.
“알프, 잘 있었습니까?”
“네.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지요. 이게 모두 다 은인 덕분입니다. 마누라가 몸이 좀 무거워진 것을 빼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아, 여기는 내 동료들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캘프란 마을 자경대장 알프라고 합니다. 은공과 일행이시라니 무조건 환영합니다.”
곰 같은 체구를 가진 그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대원들은 미소 지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외인들은 당연히 경계해야 할 자경대장이 이렇게 반기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예상외의 환대에 기분은 좋았다.
“들어가시지요. 촌장님도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반길 겁니다.”
알프는 마치 영주를 안내하는 사람처럼 곰살맞게 굴며 하룬과 그 일행을 목책 안으로 이끌었다.
“캘프란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알프와 함께 경계를 서던 두 자경대원이 큰 소리로 그들을 반겼다.
“일단 피곤하실 테니 제집으로 가십시오. 온천에 몸을 한번 담그고 나서 맛있는 식사와 술 한 잔 하면 피곤이 쫙 풀릴 겁니다.”
“그럽시다. 몸이 찌뿌듯할 때면 언제나 이곳의 온천욕이 그리웠지요.”
하룬이 드물게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대원들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나름 힘들게 살아온 대원들이라 온천욕은 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딜런과 두 마법사가 그런 호사를 경험할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한 가지에 평생 매진해 온 그들에게 온천욕이란 취미 생활을 경험할 시간은 없었다.
“기대가 되는군.”
“흐흐! 나도 그러네. 여기 생각보다 더 좋은 곳일지도…….”
딜런과 타니엘라는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알프는 일행을 바람의 노래 주점으로 안내하고는 먼저 들어가 부인에게 짧게 사정을 설명한 후 하룬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촌장 집으로 달려갔다.
“은공! 은공이 오셨군요.”
막 저녁 준비를 마친 이프란은 전에 비해 배가 좀 더 나왔지만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와 하룬을 반겼다.
“이프란의 음식 맛이 그리워 다시 들렀습니다. 괜찮은 거죠?”
“잘 오셨어요! 저희 식구는 은공 덕분에 모두 무탈하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이프란은 활짝 웃으면서 하룬을 반겼다.
“아, 아저씨!”
겔란이었다. 또랑또랑하게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고마움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어린 나이지만 하룬이 아버지인 알프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 겔란이구나. 그새 키가 많이 자랐는걸.”
하룬은 소년의 머리를 헝클어 주듯 쓰다듬어 주었다.
“잘 오셨어요. 마을 어른들과 엄마, 아빠가 늘 아저씨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랬니?”
“겔란, 귀한 분들이니 잘 안내해 드려라. 은공과 일행분들은 겔란을 따라가셔서 여장을 푸시고 온천욕부터 하고 오세요. 그사이에 푸짐한 저녁을 준비해 놓을게요.”
이프란의 말에 겔란은 일행을 2층으로 안내했다. 2층 방은 모두 여섯 개로 이인 실 두 개는 티노와 도네이스 그리고 마리와 헤니에게 돌아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기 마음에 드는 방에 여장을 풀었다.
하룬은 특별대우는 원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원들의 배려를 받아 넓고 큰 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 방이 깨끗하고 커서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가지요!”
하룬은 일행을 이끌고 숙소 뒤편에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욕 경험이 없는 대원들은 하룬의 인도를 받아 첫 경험을 했다. 이곳 날씨는 벌써 가을이 깊어 가는 때라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했기에 온천의 느낌은 더욱 각별했다.
온몸으로 스며드는 온천 열기와 금세 송골송골 맺히는 땀은 노폐물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 무척 상쾌했고, 차가운 물로 중간 중간 땀을 씻어내는 기분은 정말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즐거움을 주었다.
“대장, 난 이곳이 벌써 마음에 드네.”
근육질 몸매지만 흉터로 인해 더욱 야성적으로 보이는 알몸을 드러낸 딜런의 말에 이파리 하나 없는 살풍경한 나무 같은 몸을 드러낸 타니엘라가 맞장구를 쳤다.
“카카카! 자네도 그런가? 온천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보니 마치 명상을 하고 난 것처럼 상쾌하고 시원한걸.”
“사형, 온천욕이 이렇게 좋은 걸 모르고 있었다니 억울합니다. 몇 번 기회가 있었는데도 귀찮아서 거부한 것이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네요.”
미루스 역시 온천욕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나이가 들수록 뜨거운 온천욕은 더 각별한 느낌을 주었다. 그 무리에는 티노도 끼어 있었다. 그는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지 눈까지 감고 온천의 느낌을 즐겼다.
“대장, 멋진 곳입니다. 자연은 아름답고 깨끗하며 사람들은 친절하고 착해 보이네요. 게다가 이런 별미까지 맛볼 수 있으니 정말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습니다.”
겨루 역시 온천의 감각을 제대로 즐겼다. 그 역시 특수한 캡슐의 도움으로 높은 동화율을 유지하고 있기에 온천의 매력을 경험했다.
다만 방커만이 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최상급 캡슐의 사용자였지만 온천욕의 매력을 경험할 정도의 동화율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동안 알몸을 드러낸 채 온천욕을 즐긴 사람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의 섬유로 만들어진 동그란 것으로 때를 벗겨냈다.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시꺼먼 때를 밀어내며 서로 놀리고 부끄러워하는 대원들의 모습은 마치 동심을 가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워 보였다.
하룬은 방커와 겨루의 눈이 은밀하게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이방인인 그들의 아랫도리에는 약간 튀어나온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자, 이제 나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읍시다!”
하룬이 옆의 여탕까지 들리게 큰 소리로 말을 하고서야 소란스럽고 즐거운 온천욕이 끝났다. 준비한 새 옷을 입자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된 대원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티노, 가자고요.”
하룬은 넋을 잃고 도네이스를 바라보는 티노의 등을 가볍게 쳤다. 물기에 젖은 긴 머리카락과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도네이스의 얼굴에 새삼 반해 버린 티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오늘 보니 우리 도니도 천생 여자로군. 아주 매력 있어.”
“우리 티노 부대장은 어떻고? 내가 아까 보니 잔근육까지 잘 발달된 몸매가 장난이 아니던데.”
일부러 두 사람을 화제로 놀리는 짓궂은 대원들의 농담에 티노와 도네이스는 붉게 변한 얼굴을 들지도 못했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여관으로 돌아가니 중앙의 테이블이 빽빽하게 각종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따.
가득한 것은 음식뿐이 아니었다. 식당은 반가운 소식을 듣고 몰려온 마을 사람들로 가득했다.
“은공!”
“촌장님!”
촌장의 늙고 마른 손이 하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 그래도 넘치는 은혜를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내 생전에 은공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와 주었군.”
“하하하!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쁘군요. 그때 다치신 분들은 다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필러, 데니스, 아닝!”
촌장의 말에 세 사람이 앞으로 나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얼굴을 보니 그때 알라미즈 산에서 본 기억이 있는 마을 청년들이었다.
“은공, 그때는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어머니를 제대로 봉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박한 청년들의 진정이 담긴 감사 인사에 하룬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비록 게임 속에 존재하는 NPC들이지만 힘없고 무능력했던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뿌듯해졌다.
“마을 어르신들의 걱정과 우려가 그대들을 살렸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수에 맞게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필러라는 청년의 말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하룬과 그 일행은 필러를 비롯한 세 청년을 시작으로 마을 주민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서야 비로소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자, 어서들 가라고. 저녁 먹고 다시 이곳에 모이면 내가 제대로 한번 쏘지. 손님들이 먼 길을 와서 많이 시장하실 테니 편하게 드실 수 있도록 우리가 자리를 피해 드리자고.”
촌장의 말이 떨어지고서야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졌다.
“시장하실 테니 어서 드세요. 여보, 당신도 앉아요. 촌장님도 그쪽으로 앉으세요.”
이곳 안주인이자 상당한 포스를 지닌 이프란의 말이 떨어지고서야 비로소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프란 특유의 조리법으로 조리된 고기 요리도 그랬지만 스튜와 소스를 곁들인 약초와 채소도 맛이 정말 좋았기에 대원들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제대로 음식 맛을 알 수 없는 헤니와 방커 그리고 마리도 일행의 분위기에 취해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대장, 아예 우리 식사를 여기에서 하면 어떨까요?”
하룬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를 두드리는 겨루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럴까?”
“그거 좋은 생각이군.”
“나도 찬성! 우리 겨루가 오램나에 좋은 의견을 냈군.”
“이프란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 덕분에 잘못하다간 부엌데기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내가 편해졌네요.”
겨루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과연 맞는 말이야!”
딜런과 타니엘라가 찬성하자 다른 대원들의 의견은 들어 볼 필요도 없었다. 푸짐하면서도 맛깔스러운 음식 솜씨는 물론 이곳 특유의 약초와 향신료로 요리한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은공,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에 한동안 머물기라도 하신다는 겁니까?”
대원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알프가 하룬에게 물었다.
“네. 제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우리 용병대의 근거지를 근처에 마련하려고 합니다.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하룬은 대답하며 촌장과 눈을 맞추었다. 마을에 외지인이 장기간 머무르는 일이니 그의 허락을 받아야했던 것이다.
“용병대를? 저, 정말 그럴 생각이 있단 말인가?”
“네, 촌장님. 가능하다면 일단 우리 돌풍 용병대가 먼저 자리를 잡고, 머지않아 어비스 용병대도 오게 될 겁니다. 또 어쩌면 다카린 용병단 일부도 이 근처에 머무를지 모르겠군요.”
하룬의 설명에 알프와 촌장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되, 됩니다!”
“당연히 되네!”
두 사람의 뜨거운 반응에 하룬은 안심했다. 세간에 불안한 이미지를 가진 용병들이 다수 마을 근처에 머무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산간 오지 마을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다. 항상 몬스터의 습격에 시달리는 이런 작은 마을, 특히 사냥을 하거나 약초를 채집해서 파는 것으로 삶을 꾸려 가는 이들에게 용병대의 장기 주둔은 삶을 안전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더구나 용병대가 주둔하면 의뢰 때문에라도 외부와의 교류가 빈번해져서 마을의 규모도 커질 뿐 아니라 외지인들을 위한 각종 편의 시설을 세울 수 있어 마을 입장에서는 새로운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또한 캘프란 마을 주민들의 경우에도 특산물인 각종 약초를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팔 수 있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촌장님이 이렇게 반겨 주시니 안심이군요. 마을에는 폐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청년들을 구해준 은인이면서도 촌로에 불과한 촌장에게 깍듯한 예의를 잃지 않는 하룬이 속한 용병대라면 안심이다.
촌장은 귀에 걸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이런 귀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대지를 관장하는 미요스 여신의 은혜라는 생각에 마을 규모가 커지면 작은 신전이라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촌장이었다.
마을 주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촌장이 사는 술과 요리로 밤을 꼬박 새운 돌풍 용병대원들이었지만 새벽 수련에는 넷이나 참석했다. 하룬과 타니엘라, 미루스 그리고 딜런이었다.
순수하고 맑은 마나로 가득한 새벽 공기를 헤치고 각자 수련을 하거나 명상을 한 네 사람은 여관으로 돌아가던 길에 촌장을 만나 어제 이야기한 곳을 찾았다.
마을을 보호하는 목책과 1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다.
“이곳은 아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특별하고 귀한 약초를 채집하러 몇 년 전 이곳에 들른 한 상단 주인이 6개월 동안 머물 요량으로 지은 건물이라네. 그동안 우리 마을 사람들도 간혹 들러 휴식을 취하곤 했기에 조금만 손보면 열 사람이 지내기는 그리 답답하지 않을 걸세.”
촌장의 말대로 건물은 아직 튼튼했다. 제법 실력 있는 목수를 동행했는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깨끗한 상태였다.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해 넓은 지하실까지 있어 더없이 좋았다.
“괜찮은 상태군.”
타니엘라가 꼼꼼하게 건물을 살피고는 만족감을 표시했다.
두 채의 건물에는 모두 다섯 개의 크고 작은 방과 조리실이 있고, 넓은 마당에는 우물도 있었을 뿐 아니라 돌로 쌓은 견고한 돌담이 존재했다.
“이쪽의 넓은 방 두 개가 있는 건물은 접객실이나 업무실 혹은 대원들의 모임이 있을 때 사용하면 될 것이고, 우리는 저쪽 건물과 지하실에 머물면 될 듯하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뭐, 부족하면 더 지으면 될 테니 오늘부터 이곳에 머무는 것으로 하고 식사는 알프의 가게에서 하도록 하지요.”
하룬은 어비스 용병단이 걸렸지만 이 건물 옆에는 상당히 넓은 터가 있어 직접 지어야 하는 것을 빼면 다른 걱정은 없었다.
“딜런 경, 먼저 가셔서 대원들을 좀 챙겨 주십시오. 전 두 분과 할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
“그러시게.”
딜런은 두 마법사가 화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는 대충 그 내용을 짐작했다. 딜런이 촌장과 함께 멀어지자 건물 안으로 들어간 하룬이 두 마법사를 마주했다.
“일단 황자 진영에서 손에 넣은 두 마법서의 제목과 서문의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어, 어디 있나?”
타니엘라는 입술이 타는 것 같은 긴장감에 휩싸여 전과 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렇게 연구하고 싶었던 고대 ‘라’ 제국의 마법서를 보게 되었으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외워서 머리에 넣어 왔습니다. 이번 의뢰의 보수로 그중 한 권의 내용을 필사하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저야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니 두 분이 제목과 서문을 연구해서 어느 것을 받을 것인지 결정해 주십시오.”
“하하. 잘했네, 대장. 내 생전에 라 제국의 마법서를 연구하게 될 줄이야. 대장, 정말 고맙네! 내 대장 말이라면 끓는 물속이라도 들어가겠네.”
“나 역시 그렇네, 대장. 대장은 우리와 같은 마법사들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구할 수 없는 엄청난 보물을 구해 준 것이나 다름없네. 나와 사형은 죽을 때까지 대장과 돌풍을 위해 목숨을 다해 공헌하겠네.”
60이 다 된 노구의 마법사 둘은 하룬에게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었다. 사실 이미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고도의 정령 마법을 익힌 하룬이나 마법사와 관계없는 다른 대원들에게 마법서는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마법서를 누군가에게 은밀하게 팔 수는 있겠지만 황자 진영이 그 정도를 감안하지 않고 마법서의 내용을 넘길 리가 없으니 이번 건은 온전히 자신들 둘을 위한 것이리라.
“두 분은 이미 돌풍 용병대원입니다. 마도사 신분으로 남들이 천하고 더러운 존재라 손가락질하는 용병이 되었으니 이 정도의 선물은 해드려야지요. 두 분의 실력이 높아지면 저와 돌풍의 위상이 올라가는데 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은 끝내 눈초리에 이슬까지 맺히고 말았다. 이런 대접은 그들이 몸담고 있던 마탑에서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감격했다.
사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하늘과도 같은 6서클 비기너 신분의 마법사, 즉 마도사였지만 마탑만 놓고 보면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전혀 진전이 없는 그들은 애매한 신분이었다.
높다면 높은 경지였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한숨이 나오는 신분이었던 것이다. 위로는 7서클 마탑주를 비롯해 6서클 유저 이상의 경지에 이른 수많은 고위급 마법사들이, 아래로는 다들 천재라고 불렸던 후배들이 거친 기세로 자신들의 경지를 넘기 위해 노력하는 실정이다.
더 높은 경지로 오르지 못한 탓에 동료들이 마법 실험이나 연구에 매진하는 시간에 마탑의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외부의 일을 처리하는 등 갖은 업무를 수행해 온 둘로서는 자신들을 위해 100만 골드의 가치를 가진 마법서를 구해 주려는 하룬의 마음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 반드시 우리 돌풍 용병대를 대륙에서 가장 뛰어는 용병대, 아니 그 어느 기사단보다 뛰어난 단체로 만들어 놓고 말겠네.’
막 떨어져 내리려던 눈물을 로브 끝으로 찍어 내던 타니엘라는 전에 없던 각오를 했다.
하룬이 두 마법서의 제목과 서문을 외우자 미루스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잉크와 깃털 펜 그리고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조심스럽게 그 내용을 종이에 적었다. 긴장했는지 받아 적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용케 모든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그 말에 타니엘라가 흥분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은 알 수 없네. 이 글자들은 고대 라 제국의 마법사들이 사용한 마법 언어인 ‘룬’ 어로, 글자 자체가 복잡한 의미와 특유의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특히 같은 글자라고 해도 다른 글자와의 연결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이루어지는 만큼 차분하게 연구를 해 봐야 하네.”
역시 생각했던 대로 그 결과를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 시대의 마법은 고대 마법서를 수백 년에 걸쳐 해석해서 만들어냈다고 하니 그 기반 자체가 다를 것이다.
“아무튼 빨리 이곳을 벗어날 필요가 있군요.”
“그래도 우리 둘은 마법진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기 때문에 고대 룬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결과물을 대장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걸세.”
타니엘라는 이제 완전히 하룬에게 감복한 듯 확실하게 대장 대접을 했다. 어느새 그를 존중하는 말투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점에 대해서는 애초 관심이 없는 하룬인지라 그 점은 모르고 지나갔다.
아침을 먹고 난 후 비로소 자신들의 본거지가 될 곳을 구경한 대원들도 만족감을 표시했다. 힘을 합쳐 대충 청소를 하자 당장 쓸 수 있을 정도였기에 더욱 만족스러웠다.
“일단 티노와 도네이스는 마을 사람들 중 목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부려 두 사람이 살 집을 짓도록 하세요.”
“그, 그건…….”
티노는 따로 머물 집을 마련하라는 소리에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도네이스는 감격한 듯 물기 섞인 목소리로 크게 대답을 했다.
“그 일은 제가 책임지고 할게요. 그리고 짓는 김에 대장이 머물 처소도 마련할게요.”
신혼이니 다른 대원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하룬이 각별하게 챙기는 것이 도네이스는 무척이나 기뻤다. 남편을 이름뿐인 부대장이 아니라 제대로 대우해 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어비스 용병대가 황도에 마련했던 임시 거점에서 모든 짐을 가지고 이곳에 오려면 적어도 석 달은 걸릴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각자 필요한 것들을 하도록 합시다.”
하룬의 말에 대원들이 숙연해졌다.
“이방인 대원들은 이 기간 동안 현실에서 할 일이 있으면 그쪽 일에 매진해도 됩니다.”
“전 그렇게 할게요.”
헤니는 이번 기회에 백사회 활동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기초를 잡았으니 인공수정체 형제들이 서로 도와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그래서 황 박사에게도 도움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전 이곳이 좋아요. 매일 접속해서 도니 언니에게 궁술을 배울게요.”
마리는 요즘 정체를 겪고 있는 궁술 때문에 도네이스에게 도움을 청한 상태였다. 특히 마나 궁술의 경우 세세한 가르침이 필요했다.
“전 발트랑이 부탁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해 놓고 와서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아 수련할 생각입니다.”
“저도 겨루와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겨루와 방커는 현실에서 발트랑을 도와 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원래 딜런의 지도를 바랐지만 그가 새로운 경지를 위해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럼 티노 부대장이 혹시 모를 대외적인 일을 총괄해 주세요. 세 분은 각기 수련하거나 연구할 일이 있고, 저 역시 후크란 산맥에 다녀와야 할 것 같네요.”
“아무리 대장이라도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대번에 티노가 걱정이 되는지 말릴 태세였다.
“걱정 마세요. 가는 길에 할 일들이 좀 많습니다.”
하룬의 말에 티노가 아직 우려가 남은 얼굴로 수긍했다. 무슨 할 일이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하룬을 굳게 신뢰하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마 어비스 용병대나 다카린 용병단에서 티노 부대장에게 스카우트 양성 지도를 부탁할지도 모르니 준비를 좀 해주세요.”
“그거라면 미리 들었습니다.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장인이 경험 많은 2급 용병들로 보낸다고 했으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세 분도 수련이나 연구 중이라도 혹시 마을에 몬스터가 침입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손을 거들어 주십시오.”
“알겠네, 대장. 걱정 말고 볼일 보고 몸 성히 돌아오게.”
딜런이 자애로운 얼굴로 하룬을 보았다.
“딜런, 그럴 게 아니라 중간에 귀찮아지면 곤란하니 아예 자네와 우리가 이 근처의 몬스터의 씨를 말려버리면 어떨까?”
“그럴까?”
딜런도 중간에 방해받을지 모르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위험 요소를 미리 제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럽시다. 우리 셋에 티노 부대장과 도네이스 그리고 마리만 있어도 이 근처에 있을지 모르는 몬스터의 씨를 말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
미루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럼 그 문제는 마을 촌장과 자경대장인 알프와 상의해서 티노 부대장이 처리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티노의 든든한 대답을 듣고서야 하룬의 당부가 끝이 났다.
“자, 그럼 이제 각자 할 일을 합시다.”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각기 맡은 일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