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상황》
자세한 작전은 집결지에 갔을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의뢰에 관한 사항을 마무리한 하룬은 황자 일행이 돌아간 후 피엘을 비롯한 용병 지휘부와 잠시 회의를 가졌다.
“어떤 방법을 사용할 건가?”
그렇게 묻는 프레스는 이번에는 그 어떤 기발한 수를 생각해 낼지 궁금해할 뿐 크게 걱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피엘과 나바스론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일단 정찰을 위해 파견해 두었던 대원들을 좀 만나 봐야겠습니다. 주변 지형에 대해 상세하게 조사하고 난 연후에나 자세한 작전을 구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러시게. 우리는 하룬 대장만 믿네.”
하룬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일임해 버리고 마는 세 사람에게 뭐라고 한 소리 해주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그럼.”
밖으로 나온 하룬은 대원들에게 대충 사정을 설명하고는 숙영지 북쪽 숲을 향해 메신저 워킹을 펼치며 사색에 들어갔다.
이미 의뢰 내용을 들은 대원들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자못 궁금해 했지만 하룬의 표정이 심각하자 걱정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지난번처럼 기발한 행동과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이왕 맡은 의뢰를 성공하기만을 바랐다.
‘젠장! 적 지휘부들을 암살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지휘부의 괴멸이 그 정도 효과가 있을는지 모르겠네.’
적 지휘부가 대형 막사에 머무른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다 북부군처럼 체계적인 군대 조직이라면 상급자의 부재가 발생해도 지휘권은 순서대로 그 하급자에게 넘어갈 텐데, 애써 생각한 작전이 효과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확 튀어 버릴까?’
너무 걱정이 되는 나머지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성급하게 의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탄 격이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20여 분 동안 사색을 하며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치던 하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츠츠츠츠!
갑자기 목에 걸린 목걸이가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동하는 목걸이의 펜던트를 손으로 잡은 그는 잠시 멍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다가 그게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곧 강한 눈빛을 흘렸다.
‘아! 이거 마나 통신구지.’
막상 목에 걸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마나 통신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하룬이 펜던트의 옆에 있는 작은 홈을 눌렀다.
-하룬! 하룬 대장 거기 있나?
놀랍게도 펜던트에서는 타루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걸걸하면서도 쇠가 긁히는 듯한 타루가 특유의 목소리를 잊을 리가 없다.
“타루가 족장님? 맞습니까?”
하룬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밖에는 통신할 대상이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하하! 맞아, 나일세. 이 고요의 땅이 워낙 마나의 유동이 심한 곳이라 통신이 안 될까 걱정했는데 분지와 많이 떨어진 이곳은 그런 현상이 덜하군. 생각보다 음질이 뛰어나.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그레이브 시티에 계신 게 아닙니까?”
이곳으로 오던 중 트레저 분지 쪽에서 들리는 폭발음과 먼지구름을 보았기에 걱정이 되었다.
-지금 우리 부족은 엘프들과 함께 스카이루프 산맥이 있는 서북쪽을 향해 가고 있네.
“네? 어떻게?”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다.
-하하! 검둥이 엘프 놈들이 지하로 피신한 그린 엘프들과 볼카웜들을 처치하기 위해 북부군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을 동원해 검증의 관을 폭파시켰네. 하지만 그 정보는 이미 다른 엘프들을 통해 알려졌지. 그래서 일찍 탈출할 수 있었어.
“그랬군요. 다행이네요.”
하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순간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놓였다. 수백 년 동안 살던 근거지를 떠나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 붉은 모루 부족이다. 자신과도 깊은 관계가 된 그들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다면 정말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엘프 친구들도 무사한 거지요?”
-그렇다네. 로드가 바꾸어 달라고 하네.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지.
혹시 몰라 같은 주파수를 가진 통신구 하나를 놓고 왔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하룬은 이제 마음 놓고 로드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하룬 대장인가?
“예, 로드!”
-허허허! 이렇게 유용한 마법 무구가 있다니 자네와 우리의 친구인 붉은 모루 부족은 대단하네.
“네, 그렇습니다.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장인들이지요.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허허허, 걱정하지 말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네.
로드는 그간의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다크 엘프들은 이 고요의 땅을 떠나 제국 북부의 비옥한 땅에 새롭게 세워질 다프란 왕국으로의 이주를 위해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 일족을 포함한 모든 엘프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본거지와 그들의 숙명인 검증의 관을 한꺼번에 없애기로 작정한 것이다. 더불어 심복지환으로 자리한 그린 엘프들은 물론 수많은 동족들의 원수인 볼카웜을 처리하는 것이 바로 그 결정의 내용이었다.
결계를 해제하고 북부군에 종군한 마법사들과 일족의 정령사들을 동원해서 트레저 분지 밖으로 드러난 화맥 중 하나를 폭파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결정 때문에 마지못해 다크 일족을 따르던 네 일족이 반기를 들었다. 옐로우와 블루 그리고 화이트와 오렌지 일족이 은밀하게 이 정보를 입수하고 그레이브 시티로 연락을 취한 것이다.
운이 따랐는지 식량 확보를 위해 밖에서 암약하던 그린 일족의 원로 하나를 만나이 사정이 전해지자 그린 일족은 목숨 걸고 싸우기 위해 분지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이미 본거지는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다크 일족의 상당수 전사들은 북부군과 함류해 황자 진영을 추격하는 상황이었고, 다크 일족의 로드와 다른 전사들은 북부군에 파견된 마법사들을 맞이하고 폭발에 필요한 물건들을 수령하기 위해 본거지를 떠났던 것이다.
지하를 벗어난 그린 일족은 암호를 남긴 네 일족의 뒤를 정확하게 쫓아갈 수 있었다. 트레저 분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드디어 대규모로 이주하는 엘프 행렬을 발견한 그린 일족은 네 일족과 합세해서 이주 행렬을 장악했다.
그리고 네 일족과 함께 정들었던 본거지를 떠나 새로 발견된 스카이루프 산맥으로 이주하기로 했다고 했다.
-허허. 놈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트레저 분지와 검증의 관을 폭파한 걸세. 불론 볼카웜들은 끝장이 났겠지. 아마 지금쯤이면 이주하는 행렬을 우리가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르겠군.
“곧 추격이 있을 겁니다.”
걱정이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노약자들이 합류했을 테니 추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네. 우리 전사들 중 일부가 그들 두 일족의 노약자들을 모종의 장소에 따로 옮겨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저들이 과격한 방법을 쓰는데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정직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상대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취한 방법이라네. 다크 일족은 행여 우리가 저들 일족을 멸족시킬까 두려워 조심하면서 그쪽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을 걸세.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린 일족은 그동안 다크 일족의 압박을 받아 온 끝에 잊고 있었던 투쟁이라는 본능을 되찾은 것이다.
‘평화는 지킬 힘이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힘없는 것은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하룬은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분지 쪽에서 폭음과 함께 지진이 느껴져 무슨 일인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걱정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빈말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그 정도의 정은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소식도 전할 겸 부탁이 있어서 통신을 부탁했네.
“말씀하십시오.”
-다른 일족들이 불안해하고 있네. 전장에 투입된 그들 일족의 전사들을 설득해 전장에서 빼내야 하는데 우리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고요의 땅 동쪽으로 파견을 나간 전사들은 일족별로 움직인 탓에 조치를 취했지만 고요의 땅 입구에 배치된 전사들은 다크 일족과 함께 있어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네. 더구나 그곳은 워낙 위험한 지역이고 먼 거리라 따로 엘프를 파견할 수도 없는 상황이네. 자네가 그들에게 연락을 좀 할 수 있겠나?
하룬은 로드의 부탁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이미 이런 내용을 알고 대비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네. 다크 일족은 우리 일족이 모든 일족의 노약자들을 감금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다른 네 일족이 우리와 같이 행동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을 걸세.
그렇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내가 준 선물을 보여준다면 자네가 우리의 친구인 줄 알아볼 걸세. 상황 설명은 이 마나 통신구로 하면 되니까 수고스럽지만 자네가 직접 그들을 좀 만나 주게.
쉬운 일은 아니다. 북부군이나 다른 일족과 섞여 있는 곳에 잠입해서 그들의 지도자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린 일족을 적으로 알고 있을 테니 잘못하면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하룬의 머릿속에는 벼락이 쳤다. 안개처럼 모호했던 것들이 벼락에 다 없어지니 머릿속이 맑아진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룬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되면 싸가지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뢰 수행이 쉬워진다.
십오만 중에서 네 일족의 전사들 숫자는 대충 절반은 될 테니 잘하면 절반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전제로 그가 네 일족을 무사히 만나 설득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자네밖에 믿을 인간이 없네. 자네의 능력이라면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고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이제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밖에 남지 않은 우리 엘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해주게.
그린 일족이라고 인간이 좋아서 싸우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기껏 수십만에 불과한 자신들로서는 인간들은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비세非勢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크 일족의 로드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참 만에야 통신을 끝낸 하룬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역시 인간들과 이종족의 공존을 위해서는 거주 지역이 분리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교역과 관계는 유지하되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피노세 대공이 어디까지 다프란 왕국을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동등한 입장에서의 협력이 아니라면 다크 일족도 머지않아 인간 특유의 잔인함과 비겁함을 철저하게 깨달을 것이다.
‘뭐, 다크 일족의 로드도 만만한 인사는 아니겠지만 세력 차이가 너무 나니 어쩔 수 없겠지.’
저녁 무렵 용병들과 이방인들을 이끌고 집결지에 도착한 하룬은 황자들에게 엘프들 중 일부를 회유하여 전권에서 빼내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1황자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다른 모든 사람들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오늘 밤 안으로 이 앞에 포진한 여섯 엘프 종족 가운데 넷을 회유하여 전권에서 이탈시키겠습니다. 이미 은밀하게 파견한 대원들을 통해 해당 부족의 로드들과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정말인가?”
황자들은 몇 번이나 묻고 하룬의 일관되고 자신 있는 대답을 들은 후에야 그의 말을 믿었다.
“자넨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1황자는 물론이고 다른 황자들과 고위 귀족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으며 기쁨을 표시했다.
“오라버니와 내가 생각하는 하룬 대장이라면 이 정도의 기발한 착상과 시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건 정말 대단해요.”
1황녀의 말에는 하룬도 결국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비록 아직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일로 인해 황자들과 귀족들은 하룬을 일개 용병이 아니라 이 변혁의 시기에 큰 변수가 될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하룬이 몇 차례에 걸쳐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기발한 전략과 최소한의 희생으로 완수한 경험이 있기에 믿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서로 적이었던 엘프들 중 거의절반을 전권에서 이탈시키겠다는 하룬의 말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하룬의 능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베론은 너무 큰 충격에 얼이 빠졌는지 입만 벌리고 있었다. 하룬이 설마 엘프들과 접근할 수 있는 정보망까지 이미 완성해 놓았을 줄은 정말 몰랐다.
‘어떻게? 그럼 돌풍 용병대는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의뢰를 하자마자 이런 절묘한 수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하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황은 큰 손실 없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룬 대장의 말이 틀림없다면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고요의 땅 입구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겁니다.”
7황자가 흥분해서 말했다. 전략지도에서 절반의 말이 사라지자 쓸 수 있는 전략이 너무나 많았다.
“좋아! 그렇다면 하룬 대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다시 전략을 수립하자. 다들 모이시오.”
1황자 역시 흥분해 연방 주먹을 쥐었다 풀며 상기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대지 위로 내리기 시작한 어둠 속으로 연합군 진영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판 참호 속에서 하룬은 팔찌에 내장된 투명 마법을 발현시켰다.
‘서둘러야 해!’
아이템 정보에 따르면 투명 마법은 총 한 시간 동안만 유지된다. 그 안에 정보를 모으고 은밀하게 로드의 부탁을 완수해야만 했다.
고요의 땅 입구를 중심으로 부채꼴을 이루며 펼쳐진 막사들의 숫자는 엄청났다.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펼쳐 적 진영으로 달려간 하룬은 마법 아이템의효능에 감탄했다. 사일런스 마법이 같이 발현되는 덕분에 그의 기척을 완전하게 감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적 진영으로 무사히 잠입한 하룬은 수뇌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막사를 찾기로 했다. 달빛이 좋으니 하늘에서 보면 잘 보일 것이다. 그래서 위신느를 소환했다.
-오랜만이네.
-응. 할 일이 있어서 불렀어. 합체하자.
위신느와 함체한 하룬은 팔을 날개처럼 휘둘러 하늘로 날아올랐다. 투명 마법까지 펼쳐진 터라, 삼엄한 경계를 펼치면서도 그의 기척을 알아챈 이는 없었다. 말 그대로 바람이 된 것이다.
-좀 춥네.
비욘드의 날씨는 가을이 깊어 가는 밤 시간이라 공기가 무척 찼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은 상쾌하기만 했다. 할 일이 없다면 정령력이 다할 때까지 하늘을 날고 싶었다.
‘저기구나.’
하늘 높이 올라간 하룬은 이내 목표하던 막사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오십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막사들이 진영의 중심 부위에 약간 거리를 두고 자리했다. 막사들의 앞에는 모닥불을 피운 상태로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하룬은 거대한 막사의 숫자가 수십 개가 넘는 터라 어디로 먼저 내려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연합군의 통수권을 누가 가졌는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난감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인영이 있었다.
‘응? 저건 다크 엘프들이네.’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거뭇한 얼굴색을 가진 다크 엘프들 몇 명이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한 막사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룬은 그들의 은밀한 움직임에 뭔가 수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리 없이 땅으로 내려와 위신느와의 합체를 풀고 소환을 해제한 하룬은 메신저 스킬을 펼치며 막사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아직 잠잘 시간은 아니었기에 막사 안에서 대화 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른 일족의 동태는 어때?”
음침하면서도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누구에겐가 물었다.
“조금씩 동요하고 있습니다.”
다소 굳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럴 테지. 우리 근거지 쪽에서 폭음과 함께 여기에서도 감지할 수 있는 지진이 발생했으니 말이야. 거기다 인간들이 분지를 탈출할 때도 그랬지만 그 후로도 피해가 가중되고 있으니…….”
“하지만 아직 로드의 의도는 물론이고 그곳 상황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겁니다.”
다른 목소리였다.
“지금이야 별문제가 없지만 나중에라도 본거지를 일부러 파괴한 것이나 그들 일족을 강제 이주시킨 것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큰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뭐,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본거지는 사라졌으니 새로운 다프란 왕국의 수도에 뿌리를 내리겠지요.”
“그리 쉽게 생각할 것은 아니야. 우리 일족이 다프란 왕국의 고위직을 차지했으니 틀림없이 불만이 나오게 될 거야. 거기다 본거지를 파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른다. 비록 그들 일족의 노약자들과 여자들이 우리 손에 있으니 공공연하게 어떤 행동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차후의 상황을 고려해서 동태를 잘 파악하게.”
“전 전사장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다프란 왕국은 우리 다크 일족이 중심이 되어 개국했습니다. 다른 일족들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로드의 말씀대로 그들을 그린 일족처럼 처리하지 않고 대업에 동참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날이 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꽤 젊은 것 같았다.
하룬은 이들의 짧은 대화를 통해 다크 일족과 다른 일족들 간에 갈등이 있으며, 다크 일족 간에도 다른 일족을 대하는 문제를 가지고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드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천 년의 핍박을 벗어나 엘프 왕국을 세운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지만 다른 일족들과 화합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구수나 무력 때문이라도 파이론 제국에 먹히고 말 것이다. 우리 일족만의 힘으로는 절대 왕국을 지킬 수 없다.”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인간 기사들의 실력이 뛰어나다지만 우리 일족의 힘은 더 뛰어납니다. 겨우 50년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다. 지금의 상황만 해도 우리에게는 무척 불리해. 인간들의 경우는 우리보다 평균적으로 무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 철시를 통한 공격이 막힌다면 우리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전사장님의 우려가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조심하는 건은 좋지만 너무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요의 땅은 인간들이 자랑하는 범위 마법도 펼칠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우리 정령사들은 얼마든지 정령을 부릴 수 있는데 다비르 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파미르에의 말에 동의합니다. 차라리 다크 일족의 미래를 위해 이번 전투에서는 다른 일족들을 선봉에 세워 그 숫자를 줄여야 합니다.”
“휴우.”
꽤 놓은 계급의 전사장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내쉬는 긴 한숨 소리는 하룬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 기밀이지만 이곳은 고요의 땅 끝이라 범위 마법이 가능한 곳이다. 어쩌면 인간 마법사들이 죽음을 작정하고 펼칠 수도 있으니 조심은 해야 한다. 그리고 쉐르 대원로의 말대로 시간을 두고 다른 일족의 순혈을 파괴하여 우리 다크 일족의 믹스트 블러드(혼혈)들을 늘린 후에야 다른 일족들은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로드의 급진적인 정책보다는 그 편이 시간은 걸리더라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비 불균형으로 우리 일족의 남자들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다른 일족을 선봉에 세우는 것은 나도 찬성한다. 아무튼 지금은 적들을 이곳에 묶어 두는 것이 관건이니 나머지는 전투가 마무리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좀 더 대화를 엿듣던 하룬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질 않자 다른 대형 막사로 이동했다.
그렇게 막사들을 살피며 이동하면서 하룬은 대충의 배치를 알 수 있었다. 북부군은 분지 안쪽을 향해 왼쪽에 포진했고, 엘프들은 중간과 오른쪽에 포진했는데 일족별로 분리되어 있었다.
드디어 목적한 곳을 찾은 하룬은 막사 안에 혼자 앉아 무언가를 고민하는 푸른빛이 도는 얼굴을 가진 전사장을 볼 수 있었다.
하룬은 투명 마법과 사일런스 마법의 효과를 이용하여 아무 기척 없이 뒤로 접근하여 여자로 추정되는 전사장의 목에 비수를댈 수 있었다.
“누, 누구요?”
목에 닿은 차가운 날의 감촉에 다일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룬은 투명 마법을 해제했다. 돌아다닐 곳이 많으니 사용 시간을 아껴야 했거니와 자신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걸 알아보시겠습니까?”
하룬은 왼손으로 그린 일족의 로드가 준 목걸이를 꺼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이, 이건? 그린 일족인가요?”
역시 그녀는 신물을 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안정을 찾았지만 강한 의혹이 묻어 나왔다. 비록 지금은 적대적인 입장이지만 그린 일족은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일족이라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난 인간입니다. 하룬이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이지요. 그린 일족 로드의 부탁을 받고 블루 일족의 전사장을 찾아왔습니다. 안내를 부탁합니다.”
상대방의 신분을 정확하게 모르는 터라 안내를 부탁한 하룬의 말에 다일리아의 눈빛이 강해졌다.
“인간? 용병이라고요? 그럼 혹시 마더포리스트에 방문했던 그인가요?”
하룬은 목을 겨누었던 비수를 치웠다. 보아하니 자신을 아는 것 같았고 그 목소리에 미약하지만 호감마저 느껴졌기에 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수가 사라지자 다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날 본 적이 있습니까?”
“있어요. 마더포리스트에서.”
그야 기억하지 못하지만 많은 엘프들이 그를 봤으니 그중 하나일 것이다.
“날 기억해서 다행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는데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고, 내가 엘프어로 말하는데도 알아들을 수 있는 신기한 인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하룬은 본인은 모르지만 엘프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일족의 노엘프들은 그가 인간의 로드라고 단정하듯 말했고,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친숙한 느낌을 주었기에 그녀 역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엘프 연합에서 제외된 그린 일족의 로드께서 어떤 부탁을 하시던가요?”
“내 설명보다는 우선 이 마나 통신구로 통신하는 것이 정확한 사정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나…… 통신구? 이 땅은 통신이 되지 않는 곳인데요.”
“이 아이템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실 알려진 것과 달리 이곳은 마나의 유동이 별로 없습니다. 더구나 그분은 통신이 가능한 안전 지역에 계십니다.”
하룬은 목걸이형 마나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통신구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타루가뿐이니 다른 자들이 방해할 리 없었다.
“타루가 족장님, 나오세요.”
펜던트의 한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마나석이 포함된 마법진이 활성화되며 진동에 따른 정격파동을 발산했다.
-난 타루가요. 하룬 대장인가?
“네. 블루 일족의 전사장과 만났습니다. 로드를 부탁합니다.”
-알았네.
신기한 눈으로 마나 통신구를 바라보던 다일리아는 이내 그린 일족의 로드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중간에 타루가가 끼어들어 뭔가를 작동하게 만드는 순간 홀연히 펜던트 앞쪽에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는데 바로 그린 일족의 로드였다.
‘저런 기능도 있었구나!’
이제야 타루가로부터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났다. 어찌 보면 현실의 과학 기술이 적용된 전자 기기보다 더 뛰어난 기능을 가진 마나 통신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린 일족의 로드와 대화를 나누던 다일리아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처음에는 못 믿겠다는 듯 잔뜩 얼굴을 찡그렸던 그녀는 중간에 같은 일족 중 아는 엘프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는 굉장히 흥분하고 있었다.
10여 분에 걸친 통신이 끝나고 통신구를 건네는 다일리아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마치 다크 엘프처럼 검붉게 보였다.
‘파란색에 붉은색이 더해지니 군청색처럼 보이는군.’
어두운 곳에서 보았다면 다크 일족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룬은 그녀가 더 이상 적의를 가지고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어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어 나도 만족스럽습니다.”
하룬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다일리아의 이어진 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일족들에도 이 사실을 확인시켜 주어야 해요. 내 말만 믿기에는 너무 중요한 사안이거든요.”
타당한 말이었다. 자신의 경우라도 믿을 수 없을 테니까.
“잠깐만 더 머물러 주세요. 은밀하게 세 일족의 전사장들을 불러 보아야 하니까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전장이니 대규모의 움직임은 피해야 했다. 비록 다크 일족이 착각하고 있다 해도 이런 움직임이 있으면 무언가 의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꼭 해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위험하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룬은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부탁을 받았으니 귀찮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럼 나와 같이 각각의 일족들을 찾아갑시다. 일족의 전사장끼리 모이는 것이라면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일단 우리 일족의 다른 전사장들부터 설득해야 해요.”
다일리아는 환한 얼굴로 막사를 벗어나 한 전사에게 전사장들을 불러 모으라는 지시를내리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곧 블루 일족의 전사장 다섯이 그녀의 막사로 모여들었다. 하룬은 일단 긴 후드로 얼굴까지 가지고 막사 한쪽에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찾아온 전사장들은 전투를 앞둔 긴장감 때문에 다소 흥분해서 차를 준비하는 그의 존재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일리아의 말을 들은 전사장들은 쉽게 그녀의 말을 믿지 못했고, 결국은 하룬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나 통신구를 통해 그들 일족의 어른들과 직접 통신을 하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흠. 그럼 우리도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몸을 빼내야 한다는 건데 쉽지 않은 일이야, 다일리아.”
“그렇습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 일족의 전사만 해도 일만사천에 달하고 네 일족의 전사들을 모두 합하면 육만이 훨씬 넘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우리 의도를 들켜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제국 병사들과 섞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쉽지가 않습니다.”
블루 일족의 전사장들이 저마다 의견을 냈지만 막상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이곳에 포진한 병력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전력이니 밤사이에 몰래 사라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전투 중에 빠져나가면 됩니다.”
“에엣?”
하룬의 말에 다섯 전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의 두 배 정도는 큰 귀가 쫑긋 세워졌다. 상당한 주의를 집중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현재 포진한 진형이 입구를 뒤로하고 부채꼴로 펼쳐진 것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하룬의 말에 다일리아가 대답했다.
“작전 회의를 통해 네 일족이 진형의 왼쪽에 포진하게 만드십시오.”
“그래서요?”
그렇게 묻는 것을 보니 진형을 바꾸는 것 정도는 가능한 것 같았다.
“그럼 끝나는 거 아닙니까?”
하룬의 말에 다섯 전사장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전투를 치르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자리를 바꾸자는 거군요.”
“맞습니다. 다만 비밀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엘프들은 일족에 대해서는 아주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라면 믹스트 블러드 전사들인데 그들도 설득하면 됩니다.”
하룬은 다일리아의 말에 엘프 종족 간에도 혼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유전자 풀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어쨌거나 엘프들 역시 유사 인간에 속하니 당연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그럼 연락은 마나 통신구를 통해 하는 것으로 하고 빨리 움직입시다.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입니다.”
“그러지요.”
그렇게 하룬은 다일리아와 함께 새벽까지 각 일족의 전사장들을 만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