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처리비크와 새로운 의뢰》
비욘드에 접속한 하룬은 숙영지 상황이 궁금해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펼쳐 빠르게 움직였다.
멀리서 본 숙영지의 분위기는 활기에 차 있었다. 현실에 다녀오는 바람에 하룻밤을 꼬박 새운 격이라 근처에서 마나 플로를 세 번이나 돌린 하룬은 활력 넘치는 몸과 마음으로 귀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원들이 모두 나와 그를 반겼다. 명색이 대장인데 위험한 일은 도맡아 하는지라 대원들은 하룬에게 늘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용병들과 이방인들도 하룬의 수고로움을 익히 아는지라 목례를 해왔다.
“별일 없었나요?”
“네.”
티노의 대답에 안심이 되었다. 피곤에 찌들었던 대원들의 얼굴은 하루를 푹 쉰 덕분에 꽤 좋아 보였다. 헤니를 비롯한 이방인 대원들도 현실에 다녀와서 그런지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리더인 프레스 단장을 찾아가 정찰 결과를 보고하고 막사로 돌아온 하룬은 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짐에 따라 쉬지도 못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원래 돌풍 용병대는 숙영지의 가장 앞쪽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이 많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어! 저게 뭐지?”
“와이번인가?”
웅성거림이 점점 더 커지는 터라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온 하룬은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까만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이동해 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사람들은 궁금함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물체에 관심을 가졌다. 행여 와이번으로 확인되면 당장 깊은 숲 안으로 도망쳐야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그 물체는 그들을 향해 직선으로 이동해오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이번은 아니야!”
경험 많은 용병들이 다수 섞여 있으니 와이번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장 사람들의 눈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새?”
누군가의 말에, 눈에 힘을 주고 보니 정말 새였다. 와이번 같은 몬스터가 아니라 정상적인 새인데 그 크기가 무척이나 컸다.
“독수리 종류로 보이는데 왜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거지?”
“무슨 독수리가 저렇게 크지? 저런 새는 처음 봐.”
“혹시 알려지지 않은 목스터인가?”
설사 그게 독수리가 아니더라도 이상한 일이다. 독수리야 원래 사체만 먹는 새이니 다른 맹금류라고 생각해도 새가 살아있는 인간을 향해 덤벼든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새를 바라보았다.
가까워질수록 새의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는데 날개를 활짝 편 몸체가 족히 7미터는 되었다. 날카롭게 구부러진 부리와 광택이 흐르는 발톱은 독수리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어느새 도네이스와 마리가 철시를 활에 걸고 있었다.
“잠깐!”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이 움찔하며 시위를 당기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버처리비크인가?”
하룬이었다. 거대한 새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새라면 제국 정보 길드의 베론이 부리는 그 새일 가능성이 컸다.
“나에게 뭔가 보내고 싶은 소식이 있는 건가?”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버처리비크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놈의 거대한 동체와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 그리고 묘하게 빛나는 새까만 눈을 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긴장했다. 와이번이나 오우거처럼 광포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풋! 이놈이 감히 나에게 투기를 보내!’
하룬은 그 투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그를 찾아낸 것은 물론 자신에게 투기를 보내다니, 절대 예사롭지 않은 새였다.
하룬은 어퍼 오션의 마나를 두 눈으로 이동시키며 마나를 방사했다.
츠즈즈!
하룬의 두 눈에서 마나가 실린 시퍼런 안광이 빗살처럼 터져나와 50여 미터 안으로 접근한 버처리비크에게 향했다. 뇌전이 일렁이는 그의 안광은 단순한 빛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어 순간적으로 버처리비크의 몸을 허공의 한 점에 묶어 버렸다.
파드득! 파밧!
온 힘을 다해 날갯짓을 해 보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버처리비크의 새까만 눈알에 투기 대신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뛰어난 지능과 감각을 가진 버처리비크는 하룬의 눈에서 나온 한 줄기 힘이 자신을 꼼짝 못 하게 움켜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희한하네. 저 새가 왜 저러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원래 저렇게 날아오던 상태로 한 자리에 체공할 수도 있는 건가?”
사람들은 버처리비크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던 그 자세로 허공의 한 곳에 마치 멈춘 것처럼 있는 모습을 신기해했다. 날개를 활짝 편 상태로 박제가 된 것 같았다.
버처리비크는 날갯짓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런 상태가 된 것을 자각했는지 놈의 눈에 두려움이 점점 더 강하게 실리기 시작했다.
‘후후. 이 능력도 쓸 만하네.’
나인의 염동력만큼은 아니지만 눈빛만으로 상당한 거리에 있는 대상물의 동작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 하룬은 그 상태를 지속했다. 얼마간 마나의 변화를 지켜본 하룬은 이 능력을 발휘하는 데 생각보다 마나의 소모가 크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새로운 무기를 찾아 기뻐하는 하룬과 달리 구속된 버처리비크는 두려움이 공포로 변한 지 오래였다.
꾸르륵! 꾸르륵!
힘겹게 부리를 열어 기이한 울음소리를 토하는 버처리비크의 눈에 투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강렬했던 눈빛이 유순하게 바뀌자 하룬은 눈에서 힘을 뺐다. 그 순간 끊어지지 않고 어퍼 오션과 연결되었던 끈끈한 마나가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흠! 이 어퍼 마나는 확실히 보통 마나와는 다르구나.’
마나의 성질이 달랐다. 검에 마나를 주입하면 끊임없이 마나를 보충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마나가 검신이나 날을 통해 매순간 일정량이 외계로 방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전의 힘을 가진 어퍼 오션의 마나는 그렇지 않았다. 폭발로 방사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저 새 때문에 좋은 것을 알았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버처리비크가 하룬의 바로 앞에 날아내렸다. 땅에 내려선 버처리비크는 비록 거대한 날개를 접었지만 그 동체는 성인보다 훨씬 컸고, 전신으로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기에 멀찌감치 물러난 다른 용병들은 물론이고 돌풍 대원들도 강한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놀란 대원들이 딜런을 제외하고는 분분히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이리 와라.”
하룬은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 명령했다. 대원들은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친 상태에서도 하룬을 이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곧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버처리비크가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두 발을 깡충거리며 하룬에게 다가온 것이다.
“수고했다.”
그 말과 함께 잠시 뭔가 생각하던 하룬은 바로 앞에까지 온 버처리비크에게 아공간에서 육포를 건네주었다.
꾸르르릇! 끄릇!
버처리비크는 기쁜 듯 부리로 육포를 물었다. 손바닥만 한 육포에서 좋은 냄새를 맡은 것이다. 놈은 싱싱한 고기보다는 이런 육포를 더 좋아했다. 녀석을 길들인 사육사가 몇 번 주었던 특별한 먹이였기 때문이다.
하룬은 녀석의 발목에 매인 천을 발견하고 그것을 풀었다. 틀림없이 제국 정보 길드에서 그에게 보내는 것이리라. 이 고요의 땅은 마나의 불안정한 유동 때문에 마법 통신을 쓸 수 없다고 알려졌으니 이 녀석을 이용한 것이다.
“대장, 이 녀석은 도대체 뭡니까?”
그렇게 물은 방커의 눈에는 신기함과 함께 욕심이 일렁거렸다.
“버처리윙이라 하고 혹은 버처리비크라고도 부르는 새다.”
“아!”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멋진 녀석이군요.”
방커의 눈에는 놀라움과 함께 진한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후후후. 멋지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함부로 만질 생각은 하지 마. 이놈은 와이번도 감히 상대하길 두려워하는 하늘의 제왕이니까.”
“흐억!”
호기심이 동했는지 겁도 없이 버처리비크에게 다가오던 방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느새 육포를 다 먹어치운 버처리비크의 검은 눈이 방커를 향했는데 강렬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살기가 얼마나 강한지 오금이 저리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호오. 이 새가 정말 존재하고 있었군. 전설인 줄 알았더니.”
그제야 타니엘라 마법사가 놈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탄성을 질렀다.
“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뭐예요, 타니엘라?”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몰라. 이름도 확실치가 않아서 어쩐 책에는 버처리비크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에는 버처리 윙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그 정도로 희귀한 새야. 게다가 이 녀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어. 다만 와이번도 두려워할 정도로 흉포하고 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과, 하루에 천 킬로미터는 우습게 날 정도로 빠르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어. 도대체 이런 놈을 누가 이렇게 길들인 거지?”
타니엘라의 눈은 하룬에게 향했다. 아니, 모든 대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혹시 이 새가 우리 돌풍 용병대의 은밀한 연락 수단인 건가?’
비록 자신들이 돌풍 용병대원이긴 하지만 용병대의 비밀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진수처럼 숨겨진 대원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며 어떻게 고급 정보들을 입수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물론 티노야 절대적으로 하룬을 따르는 사람이라 굳이 물을 생각도 하지 않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용병대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는 터라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룬은 이 새가 제국 정보 길드에서 부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려고 했지만 천에 적힌 내용 때문에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제국 정보 길드가 나에게 의뢰를?’
자신 같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처럼 돌풍 용병대와 하룬 그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졌는데 의뢰를 맡기고 싶다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만나 보면 알겠지. 두세 시간 안에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했으니.’
“티노 부대장님.”
“네!”
“손님이 찾아올 것 같아 오늘은 출발할 수 없다고 지휘부에 좀 전해 주십시오.”
티노는 하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지휘부로 향했다.
한시바삐 고요의 땅을 벗어날 생각으로 강행군을 하던 중이라 대원들이나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지쳤다. 하루를 푹 쉰 덕에 얼굴색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정상 상태를 회복한 것은 아니다. 움직이기 전에 사람들의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그가 허벌 길드에서 받은 지도책에 따르면 이 고요의 땅을 벗어나는 길은 꽤 위험해 보이는 소로였던 것이다.
“응?”
문득 손등에 약한 통증을 느끼며 천에서 시선을 뗀 하룬은 버처리비크가 부리로 그의 손등을 가볍게 찍으며 이상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 아! 육포 더 달라고?”
꾸르르릇! 끄릇!
녀석의 목이 부풀며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맞는다는 소리 같았다. 하룬은 잘 훈제된 육포를 몇 개 더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녀석은 기분이 좋은 듯 접었던 날개까지 펴 퍼덕거리며 부리로 육포를 물어 조금씩 삼키기 시작했다.
꾸르르릇! 꾸르릇!
버처리비크가 육포를 다 먹고 기분이 좋아진 듯 울음소리를 토하는 순간 헤니가 조심스럽게 물이 가득한 큰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인간이 다가오자 투기를 발산하려던 녀석은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이내 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깡충거리며 다가갔다.
“흐윽!”
헤니는 버처리비크가 다가오자 기겁하면서도 물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헤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크고 아래로 살짝 굽은 부리를 물그릇에 넣어 물을 담고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마셨다.
워낙 큰 녀석이라 그렇게 몇 번 마시자 물그릇에 담겼던 물이 반 이상 줄어 버렸다.
물을 다 마신 버처리비크는 다시 하룬에게 다가왔다. 마치 응석이라도 부리듯 그의 손이며 손등을 부리로 비비거나 살짝 찍었다.
“녀석,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군.”
하룬은 천을 반으로 찢어 다시 녀석의 발목에 감았다. 의뢰를 들어 볼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육포 몇 조각을 꺼내 버처리비크에게 주었다. 녀석은 먹성이 굉장해서 손바닥만 한 육포를 스무 조각이나 먹고서야 겨우 만족하는 것 같았다.
다른 대원들, 특히 헤니와 방커가 버처리비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육포를 흔들거나 던져 주었지만 녀석은 그것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그들에게 강렬한 투기를 발산하며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적의를 드러냈다.
“히잉! 좀 친해지고 싶은데…….”
“대장이 아니면 아무도 다룰 수 없는 놈인가 봐.”
두 사람은 인상을 쓰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대원들은 나름대로 버처리비크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내렸다. 의문을 풀어줄 유일한 사람인 하룬은 베론의 의도를 추측하느라 그들의 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버처리비크는 심심했는지 한동안 하룬의 주위를 돌며 장난치기라도 하듯 몸의 냄새를 맡거나 부리로 쪼거나 비벼댔다.
‘이 녀석이 왜 이러지? 제 주인에게나 하는 짓을 왜 나한테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하룬은 녀석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일개 새치고는 보일 수 없는 대단한 풍모는 물론이고 웬만한 인간들을 압도시키는 강력한 기세를 발산하는 녀석이 싫지 않았다.
감히 인간에게는 대적할 수 없지만 하늘의 제왕으로 불리는 와이번도 우슴게 안다는 놈이 아닌가. 하룬은 자신도 이런 녀석이 하나 있었으면 했지만 그게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손바닥이나 손등을 부리로 찍을 때는 적지 않은 고통이 느껴져 결국 마나로 보호했다. 바텀 마나야 외계로 발산되니 아깝고 센트럴 마나는 아직도 움직이지 않으니 어퍼 마나를 사용했다.
지지직! 츠즈즛!
뇌전의 힘이 가득한 어퍼 마나였지만 녀석은 그것이 더 친근한지 날갯짓까지 할 정도로 신나 했다.
‘이상한 놈이군.’
그러고 보니 버처리비크에게서 무언가 다른 마나가 느껴졌다. 한 생명체 본연의 마나가 아니라 안개처럼 풀어졌다가 뭉치곤 하는 색다른 마나였다. 그 마나는 버처리비크의 마나와 일체화되었다가 하룬의 손길이 닿으면 이내 흩어지곤 했다.
‘날 두려워해? 분명히 이 녀석은 내게 친근감을 표현하고 있는데. 혹시 다른 존재가 녀석 안에 들어 있는 것인가? 도대체 뭐지? 혹시 정령?’
그가 아는 지식으로는 이런 존재는 정령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것도 그가 정령을 다루기에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정령이 있을 수 있지?’
만약 미지의 존재가 정령이라면 아마 지금 버처리비크와 합체된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을 자신에게 보낸 제국 정보 길드 요인이 정령사라는 말인데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다. 버처리비크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20~30분은 비행했을 거야. 그렇다면 정령을 한 시간 이상 소환한다는 말인데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령을 소환했을 때 정령력 소모량이 초당 10이다. 만약 한 시간 동안 정령을 소환한다면 필요한 정령력은 36,000이다.
‘이게 가능한 거야?’
갖은 노력으로 끌어 올린 그의 정령력은 채 3,000을 넘기는 데 그치고 있는데 그 열 배의 정령력이라니!
직접 경험해 본 엘프들도 정령력이 그보다 월등하지는 않았다. 상급 정령사라고 해도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최상급 정령사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 존재는 엘프족에도 거의 없다고 했다.
하룬은 버처리비크와 일체화된 존재가 정령이라고 확신할 수 없엇다. 그렇게 믿기에는 제국 정보 길드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베론이 자신에게 그런 수모를 감수했을 리가 없다.
‘마법인가? 그도 아니면 영능력?’
두 분야 모두 문외한이라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쩐지 정령술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육포를 맛있게 먹고 있는 버처리비크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또 놈의 몸 안에 안개처럼 흩어졌던 마나가 뭉치는 것이 감지되었다. 이번에는 하룬이 손을 대기도 전에 버처리비크가 몸을 한 번 크게 떨며 그 마나를 흩어 놓았다.
‘호! 버처리비크가 거부하는군.’
흥미로운 일이었다. 결국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버처리비크는 평소에는 미지의 존재와 일체화되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본인의 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 놈 역시 인간 못지않은 영성과 의지를 지녔다는 증거다.
‘후후후, 재미있군.’
하룬은 제국 정보 길드의 누가 이 버처리비크를 부리는지 확인하고, 그 비밀을 반드시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쩌면 그의 정령술이 한 단계 이상 진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하룬에게 붙어 친근함을 표시하던 버처리비크는 결국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란 것을 아는 듯했다. 날개를 활짝 펴고 몇 번 크게 흔든 녀석은 순식간에 사람들 눈에서 사라졌다.
버처리비크가 날아가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예상했던 방문객이 숙영지로 찾아들었다. 이런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과 그 호위 기사들이었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귀부인은 공작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흔들며 하룬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절 기억하시겠어요? 헤르쉬 자작 부인이에요.”
“알고 있소.”
일전에 강제로 대금을 받기 위해 베론 자작을 끌고 그의 거처에 갔다가 본 여인이었다. 하룬은 그녀가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룬의 딱딱한 대응에도 헤르쉬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우아하게 인사했다. 하룬도 선입관이 없었다면 순간적으로 혹했을 만큼 뛰어난 미모와 우아한 기품을 가진 귀부인이었다. 그러면서도 도발적인 성적 매력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를 본 대다수 용병들의 눈에서 열기기 흘러나오는 것을 본 도네이스는 바로 옆에 있는 티노마저 감탄한 얼굴이자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으윽!”
“이그! 대장 좀 본받아요!”
티노가 오만상을 쓰며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하룬 대장.”
“뭐,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 것 같소만. 설마 우리를 찾아온 거요?”
적의가 절절하게 묻어 나오는 하룬의 말에 습관처럼 지어진 헤르쉬의 미소가 깨질 듯 흔들렸다.
“어머! 정말 차가운 분이군요. 같은 분야에 있는 동업자끼리는 적대할 때도 있고 서로 도와야 할 때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금이 간 미소는 그대로지만 자존심이 상했는지 벌써 눈빛은 차가워진 헤르쉬였다. 하지만 하룬의 말은 더욱 차가워졌다.
“생각보다 간담이 큰 분이군. 난 배운 것이 부족한 사람이라 날 무시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건 못 참는 성격을 가지고 있소. 더구나 그 대상이 적이라고 분류한 자라면 추호도 봐줄 생각이 없지.”
스산한 하룬의 말에 딜런은 타혼을 향해 몸을 돌리고 검대에 손을 올렸다. 그의 눈에서 따가울 정도의 정광이 타혼에게 쏟아져 나갔다.
츠르릇!
순간적으로 싸늘한 긴장감이 주변을 침묵 속으로 몰아갔다. 헤르쉬를 호위한 타혼도 어느새 검 자루에 손이 닿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알려진 상대의 실력이 실제로 대하니 자신에 비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도네이스와 마리는 천천히 활대를 구부려 시위를 걸고 있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메모라이징한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티노를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은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호위 기사들을 빠르게 포위했다.
챙그랑!
금이 간 미소는 결국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서슬 퍼런 상대의 투기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헤르쉬의 얼굴이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베론으로부터 협상의 의지가 없는 우직하고 답답한 성격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방인까지 정신을 놓게 만드는 자신의 화사한 미모와 남자의 본성을 홀리는 매혹은 물론이고 제국의 사교계를 좌지우지했던 사교술도 소용이 없었다.
‘샤벨 타이거의 수염을 뽑은 격이군.’
난감했다. 이런 반응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노골적인 적의가 전신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하체에서 뭔가 찔끔거리며 나오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공포에 빠진 헤르쉬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나는 의뢰를 하기 위해 온 거예요. 아무리 보기 싫은 상대라도 의뢰를 위해 찾아온 손님에게 이런 반응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의뢰? 푸훗.”
하룬은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자신은 용병이니 의뢰라는 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상대는 아주 매력적인 미모뿐 아니라 상황에 가장 알맞은 핑계까지 댈 정도로 명석한 여인이었다. 당황한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하게 적의를 꺾을 수 있는 말을 꺼낸 것이다. 그 바람에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올라갔던 긴장이 다소 풀렸다.
“필요 없소. 제국 정보 길드의 의뢰는 거절하오. 방금 전까지는 이 자리에서 피를 볼 생각이었지만 그대들이 현재 황자 전하들에게 힘을 주고 있으니 참겠소. 가시오!”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딜런은 아쉬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검대에서 손을 내렸다. 도네이스와 마리 역시 빈 시위를 한번 튕기고는 시위를 풀었다.
“휴우.”
헤르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가운 곳에 있다가 순간적으로 따듯한 곳으로 들어온 듯 바짝 당겨졌던 신경줄이 한 번에 확 풀어졌다.
“그래도 손님이니 잠시 앉았다 가게는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대장 때문에 너무 긴장했더니 다리가 풀렸네요. 소변도 급하고.”
“푸하하하!”
하룬은 대소를 터트렸다. 가식에 찬 말과 행동이라면 사양이지만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귀부인의 선입관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솔직한 심정 토로에, 적의가 많이 희석되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배포를 가진 상대라면 잠시 대면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결국 그녀를 막사 안으로 들였다.
‘어차피 얼마 후면 자주 접속하지도 못할 텐데 남은 대원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들과 굳이 원한을 쌓아 둘 필요는 없겠지.’
솔직한 그녀의 태도에 어느 정도 적의를 푼 하룬은 자신이 떠난 후를 생각해서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경쟁자라면 모르지만 손님으로는 인정할 여지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남은 대원들을 건드린다면 아무리 현실의 상황이 중요해도 시간을 내어 반드시 끝장을 볼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안정을 찾은 헤르쉬 자작 부인은 그동안 제국 정보 길드가 돌풍 용병대에 적대적인 행위를 가한 것에 대해 먼저 사과했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며에는 지금은 황제가 된 피노세 대공의 간계가 개입되었음을 토로하며 적대감을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비록 보는 즉시 그 사람의 인품을 파악할 정도의 안목까지는 없지만 게임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한 하룬은 진실을 말하는지 여부는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제국 정보 길드의 입장을 해명한 헤르쉬는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꺼내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다. 하룬도, 같이 들어온 대원들도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설마 우리에게 고요의 땅을 벗어날 길을 안내해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하룬이 선수를 쳤다. 그 건이 아니면 이제껏 비밀스럽게 장막에 숨어 있던 그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다.
“대장이 제 일행을 고요의 평원으로 무사하게 인도해 주기만 한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다 들어 드리지요.”
“어떤 조건이라도?”
“네!”
헤르쉬는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정도로 다급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제국 정보 길드는 꺼낼 수 있는 최후의 카드를 내민 것이다.
즉, 조건 없이 항복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적대하지 않겠다는 말은 필요 없었다. 아무리 제국의 음지를 좌지우지하며 암약했던 제국 정보 길드라도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적대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원한 적은 없다는 건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표현하는 적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보다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같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약 오백 정도 됩니다.”
“오백이라.”
솔직히 놀라웠다. 어떻게 그 인원을 거느리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놀라웠다. 정말 놀라운 전력이다. 수백 년간 제국의 음지를 좌지우지했던 제국 정보 길드라면 길드장을 수행한 오백의 실력은 상당할 것이다.
물론 단순히 이곳을 같이 벗어날 인원이 오백이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어차피 그가 거느린 인원이 수천이 넘으니 합해도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단지 좀 귀찮을 뿐이다. 물론 어떤 조건이라도 다 수용할 뜻을 비치니 막대한 의뢰비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대장님,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군요.”
“내가 보기에도 그러네. 물론 우리 돌풍과는 악연을 쌓아 왔지만 그것은 이들 때문이 아니라 피노세 대공의 간교한 술책 때문이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을까?”
따라 들어왔던 티노와 타니엘라는 이들의 의뢰를 받아들이자고 했다. 다른 대원들 역시 말은 안 해도 둘과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간의 사정을 들은 후 헤르쉬를 향한 적의는 많이 사라졌다. 더구나 제국 정보 길드에서 이렇게 허리를 숙이고 들어온 것에 큰 자긍심이 느껴졌다.
“흐음. 정말 달콤한 제안이오, 헤르쉬 자작 부인.”
하룬의 말에 헤르쉬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룬 역시 엷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결정을 했소.”
“네! 조건만 말씀하세요.”
헤르쉬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그녀는 어떤 조건이라도 다 들어줄 의사가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조직을 재건할 수 있고, 복수도 할 수 있다.
“의뢰를 거절하오.”
“네에? 왜? 돌풍으로서는 전혀 밑질 것이 없는 거래인데요.”
헤르쉬는 물론이고 대원들도 얼굴에 놀란 티가 역력했다. 분위기로 보아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난 상황이 달라졌따고 태도를 바꾸고 싶지는 않소. 당신이 말한 대로 이제까지 제국 정보 길드가 우리 돌풍 용병대를 공격한 이유가 진정 피노세 대공의 음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건 당신의 말뿐 밝혀진 것은 없소.”
그 말에 일부 대원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동안 형성된 원한 관계에 비해 너무 쉽게 마음을 풀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돌풍의 입장에서도 우리와 손을 잡으면 장점만 있을 뿐 나쁜 일은 없어요. 우리 돌풍이 전 대륙으로 그 기세를 뻗어 나가는 데 충분한 도움을 줄 힘이 있어요.”
그거야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제국 정보 길드의 정보력과 힘이라면 테론 제국뿐 아니라 대륙 전체로 돌풍 용병대의 이름을 쉽게 알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그런 꿈이 없었다. 여기 비욘드에서 그가 꿈꾸는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자신의 능력 계발과 강해지겠다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의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지. 조직은 더 어려울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 일의 이면에 자신이 모르는 다른 것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들은 결코 그에게 이렇게 쉽게 고개를 수그릴 조직이 아니었다.
“설사 당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난 당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소. 당신들 역시 우리에게 마찬가지 감정일 것이오. 난 투명하고 깨끗한 것이 좋소. 최소한 감정에 있어서는. 싫으면서 웃는 낯을 하고 싶지는 않소. 당신이 말한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것도 아닌데 굳이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품으면서 당신들과 동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하룬의 말에 헤르쉬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성품을 익히 아는 티노와 헤니는 일찌감치 이해한 얼굴이었고, 나머지 대원들은 이제야 그것을 경험하며 이해하려는 눈치였다.
“더구나 이 의뢰의 이면에는 다른 것이 숨겨져 있는 느낌이오. 그래서 영 꺼림칙해. 내가 아는, 아니 세상에 알려진 제국 정보 길드의 힘이라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리가 없으니 필경 다른 이유가 있을 거요.”
하룬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그렇지 않아요. 이곳은 우리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당소예요. 더구나 고요의 땅 입구는 벌써 오래전에 다크 엘프들과 북부 군단이 봉쇄한 상황인데 우리라고 특별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헤르쉬는 다급한 얼굴로 말했지만 이미 하룬은 막사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보던 딜런과 타니엘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룬이 거절 의사를 표한 순간부터 그녀의 눈에서 당혹스러움과 함께 감탄하는 감정을 읽었던 것이다.
‘역시 대장의 생각이 맞는 건가?’
세간에 알려진 제국 정보 길드는 구하지 못할 물건이 없으며 해결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그런 길을 찾지 못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의 말대로 뭔가 다른 계산이 깔린 것 같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헤르쉬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안을 거절당한 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정곡이 찔린 것에 기인한 감정이었다.
‘확실히 뭔가 있긴 하군. 아무튼 우리 대장도 대단해!’
이미 살 만큼 산 두 사람의 녹록치 않은 경험은 하룬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우리는 대장의 판단을 믿네. 이제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아니, 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역시 찝찝한 마음으로 자네의 의뢰를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아.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단체의 말을 어찌 그리 쉽게 믿을 수 있겠나. 거래는 결렬되었네. 우리 대장은 한 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니 물러나게.”
딜런이 하룬을 대신해서 말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해요!”
“뭐가 심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우린 할 일이 많네. 그만 떠나 주었으면 좋겠군.”
노골적인 축객령이 떨어지자 헤르쉬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한 감정보다는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생긴 당혹스러움이 더 진하게 배어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막사를 나온 헤르쉬의 눈이 커졌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장면을 보았던 것이다.
하룬이 버처리비크와 함께 놀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녀를 수행했던 타혼 역시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버처리비크는 하룬이 주는 육포를 맛나게 받아먹으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고, 그의 어깨며 손에 연방 부리를 비비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비록 헤르쉬가 버처리비크란 놈을 은밀한 방법으로 부리기는 하지만 마치 계약을 맺은 사이처럼 데면데면한 것일 뿐이었다. 저렇게 버처리비크가 친밀감을 표시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꾸르르릇!
기이한 소리와 함께 암컷도 아래로 내려와 껑충껑충 뛰어 하룬의 곁으로 왔다.
“하하하! 너도 달라고? 알았다.”
하룬은 먹기 좋게 잘게 자른 육포를 암컷에게 주었다. 버처리비크가 기분 좋게 육포를 삼키고는 고맙다는 듯 하룬의 어깨에 부리를 비비는 것은 헤르쉬와 타혼의 정신을 한순간 저 멀리까지 날려 보낼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파득파득!
육포를 다 먹고 난 두 녀석은 큰 날개를 흔들며 하룬의 어깨를 쪼았다.
“하하하! 같이 날고 싶다고? 알았다, 그러자.”
녀석들은 그와 함께 하늘을 날고 싶어 했다. 아까 느꼈던 이상한 기운은 이제 감지되지 않았다.
하룬은 위신느를 소환했다. 소환된 위신느는 기쁜 듯 그의 몸을 휘감으며 습관처럼 키스하고는 곁에 있는 새로운 존재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이 새들은 뭐예요?
-버처리비크라고 하는 녀석들이야.
-굉장히 위험한 부리와 발톱을 가진 녀석들이네. 뇌전의 기운을 일부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나처럼 바람의 향기를 잔뜩 품은 것이 마음에 드는걸요.
-그래?그래서 내게 친밀감을 느낀 건가?
위신느는 대번에 녀석들이 자신의 본성인 바람의 마나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이 녀석들과 같이 하늘을 날고 싶어. 같이 가자.
-좋아요.
-정령 합체.
위신느를 몸 안으로 받아들인 하룬이 두 팔을 움직이자 마치 날갯짓을 한 것처럼 몸이 부드럽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두 버처리비크도 경쟁하듯 하룬의 양옆에서 날아올랐다.
-가자!
하룬의 몸이 그의 의지를 받은 위신느의 능력으로 금방 바람을 탔다.
긴 머리칼을 가르는 바람이 너무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위로 올라가는 상승기류를 탄 몸이 새처럼 빠르게 날아올랐다.
-멋진걸.
-후후후, 친구와 함께하니 더 좋은걸요.
하룬은 의식을 통해 하나가 된 위신느의 의지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수백 미터 상공이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새가 된 것처럼, 바람을 타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위신느에게 비행을 맡겼던 하룬은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의 앞뒤를 오가며 기운차게 날갯짓을 하는 버처리비크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버처리비크들은 작은 날갯짓으로 순간순간 변하는 공기의 유동을 이용해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속도를 높였다.
쐐액!
자신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던 두 버처리비크가 날개를 접은 채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쏘아지듯 내려왔다.
“하하하! 녀석들, 장난이 하고 싶은 거로군.”
하룬은 대소를 터트리며 버처리비크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자신이 마치 새라도 된 것처럼 두 팔을 벌려 날개처럼 펄럭여 보았다.
‘된다!’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위신느가 팔 주위로 투명한 막을 생성하자 그의 몸은 새처럼 바람을 탈 수 있었다.
‘새가 된 것 같군. 난다는 것이, 바람을 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늘을 나는 것은 정말 멋진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새끼 새처럼 균형도 잘 잡지 못하고, 날갯짓도 서툴렀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비행 요령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쐐액!
앞서 날던 두 버처리비크가 장난이 치고 싶은 듯 몸을 돌려 마주 날아오는 하룬과 부딪치기 일보 직전에 몸을 틀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양옆으로 날아갔다.
“어디!”
하룬은 오른쪽으로 빠진 암컷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수컷이 뒤를 따랐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세 마리의 새가 일렬로 줄지어 나는 것 같았다. 셋은 몇 번이나 방향을 바꿔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순서를 바꾸어 상대를 쫓으며 하늘을 무대로 놀고 있었다.
“와! 재미있겠다!”
언제 나왔는지 헤니가 눈을 빛내며 탄성을 질렀다.
“허허허! 저건 도대체 무슨 마법이지? 플라이도 아니고 플로팅도 아닌데.”
타니엘라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사형, 저건 마법이 아닌데요. 마나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마나가 불안정한 곳이라 저런 고서클 마법은 사용이 불가능한데요. 그렇다고 정령 마법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뭡니까?”
놀란 미루스가 물었다.
“낸들 아나. 우리 대장의 능력 중 하나겠지. 아무튼 대단하네. 벌써 점으로 변했군. 와이번도 두려워한다는 버처리비크가 대장을 따르는 것도 그렇고 저렇게 새처럼 하늘을 나는 것도 그렇고, 정말 우리 대장은 인간 같지가 않다니까.”
두 사제의 말을 들은 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그들로서는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 새처럼 하늘을 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놀란 사람들의 눈에 세 점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야에서 거의 사라질 정도로 이리저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룬과 두 버처리비크의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헤르쉬는 아예 망연자실한 표정이었고, 타혼 역시 얼이 빠진 얼굴이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대원들은 그저 부러워하는 눈길로 볼 뿐이었다.
‘뭐야? 저 새들은 도대체 우리 대장 거야 아니면 제국 정보 길드 거야?’
티노는 놀란 가운데서도 눈매를 좁히며 뜬금없이 떠오른 의문에 머리를 굴렸다. 이제 대원들은 버처리비크가 제국 정보 길드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황당해했다.
그렇게 버처리비크와 재미있게 놀며 비행하던 하룬은 한순간 정령력을 체크했다. 보다 생생한 게임을 즐기기 위해 안내음을 꺼 놓은 상태라 자칫하다가는 큰일인 것이다. 역시 정령력이 반 이상 줄어 있었다.
“나중에 다시 놀자.”
하룬은 아쉬워하는 버처리비크를 이끌고 막사 앞으로 날아내렸다. 버처리비크는 아쉬운 듯 몇 번이나 그의 상공을 선회하다가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하룬은 녀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헤르쉬는 말을 더듬었다. 뭔가 묻고 싶은데 놀란 나머지 말을 못 했다. 유령을 본 듯한 헤르쉬와 타혼의 얼굴을 본 하룬은 자신이 기분 내느라 실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고! 능력을 다 보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긴 하룬의 잘못은 아니다. 자신 역시 지난 전투에서 위신느와 합체하여 전황을 살피느라 하늘로 날아올랐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이런 식으로 비행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버처리비크 때문에 정령과 합체한 상태에서 비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제대로 공기를 타고 비행하는 방법을 알게 되어 뿌듯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헤르쉬에 대한 적의는 많이 풀어졌다. 그래서 다소 부드럽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더분에 버처리비크들과 잘 놀았소. 그럼 살펴 가시오.”
놀란 헤르쉬를 향해 용병식으로 인사한 하룬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과 몇 명의 수행 기사들은 하룬이 몸을 돌려 막사로 가는 동안에도 놀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대장,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나도 하늘을 날고 싶어요. 어떻게 안 될까요?”
하룬의 뒤를 따라오며 헤니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나도, 나도요!”
동심으로 돌아간 듯 도네이스도 그 뒤를 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신기한 능력이었다.
어느새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지휘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룬은 짧게 그 사정을 설명했지만 버처리비크에 대한 것은 언급을 피했다. 자신조차 잘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니 말이다.
아무튼 그 때문에 출발이 미뤄지고 말았다. 프레스를 비롯한 일행의 수뇌부는 버처리비크와 헤르쉬 자작 부인의 방문을 핑계로 하루 더 이곳에서 숙영하며 휴식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하룬은 이왕 하루 더 숙영하는 김에 차후 문제를 매듭짓고 싶어 저녁 식사 후 대원들을 한자리로 모았다.
“의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티노가 대원들을 대표해서 물었다.
“일단 거부는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황자들이 직접 온다면 거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하룬의 마음을 다들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제국 정보 길드의 의뢰이니 거부할 수 있지만 황자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뭐 그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이곳을 벗어난 후 계획에 대해서는 이야기들을 좀 해 봤습니까?”
“그게…….”
티노가 대원을 대표해서 나섰지만 말하기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아하니 의견이 중구난방인 것 같았다.
“기존의 황도에 본거지를 마련하자는 이야기도 나왔고, 요른 백작성에 거점을 두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대장님이 생각해두신 것이라도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하긴 티노와 도네이스를 빼면 용병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니 막막했을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면 좀 한적한 곳을 찾아 우리만의 시간을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딜런 경도 중요한 시기이고, 타니엘라 경과 미루스 경도 마법 연구 때문에 시간이 필요할 터이니.”
하룬의 말에 타니엘라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열의 빛이 일렁였다. 그는 사제인 미루스를 돌아보며 눈을 찡긋거리며 메신저 마법을 날렸다.
-흐흐! 어떠냐? 이 사형만 따르면 자다가도 마나석이 떨어질 거라고 했지.
물론 자신의 안목이나 판단에 의해 용병대에 가입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래도 미루스의 결정에는 타니엘라의 권유가 크게 작용을 했다. 그 역시 타니엘라처럼 오랫동안 정체 상태에 있어 마탑에서 홀대를 당하고 있지만 마법진이나 룬어에 대한 지식수준은 무척 뛰어났다.
“나 역시 이곳에서 경험한 것들을 수련해 내 것으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티노와 도네이스만의 시간도 필요하고요.”
“호호호. 그건 대장님의 말씀이 맞아요. 확실히 부대장이랑 언니에게는 달콤한 신혼을 즐길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야 해요.”
헤니의 말에 티노와 도네이스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아, 아니…….”
뭐라 말하려던 티노의 옆구리에 은밀하게 도네이스의 손이 향한 순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난 찬성이네.”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딜런은 당연히 하룬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이의 없네.”
“나야 당연히 찬성이지.”
곧 꿈에 그리던 마법서의 내용을 알게 될 테니 다른 생각이 있을 리 없는 타니엘라와 미루스의 말까지 떨어지자 더 이상 이의는 없었다.
“우리가 머물 장소는 후크란 북쪽에 있는 작은 약초 마을로 정하고 싶습니다. 맑고 깨끗한 마나와 온천 그리고 정이 많은 약초꾼들이 사는곳이라 조용하면서도 파로스 남작성과도 멀지 않으니 입지 조건은 괜찮은 편입니다.”
다들 모르는 곳이니 하룬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나중에 우리 규모가 커지면 후크란 산맥 북쪽에 있는 요새를 본거지로 삼을 겁니다. 원래 후크란 기사단이 지냈던 곳인데 이삼백 정도의 인원은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겁니다.”
“후크란 산맥 안이라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헤니의 말에 이방인 대원들이 긴장했다. 그들 역시 후크란의 악명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후후후. 우리 대장은 후크란 산맥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분이다. 걱정할 거 없어. 그곳이라면 수련은 물론 안전하기까지 하니 문제없을 거야.”
티노의 자신만만한 말에 얼굴은 좀 풀렸지만 여전히 두려운 기색을 걷어내지 못하는 네 이방인 대원들이다.
“그럼 우리가 온 길로 돌아가는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1황자 전하께서는 고요의 평원으로 내려가면 요른 백작성까지의 워프 마법진을 설치한다고 했으니 그곳까지는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내가 요른 백작성까지의 좌표를 아니 설령 황자들과 같이 가기가 곤란하다면 우리끼리 가도 될 걸세, 대장.”
“오! 그럼 타니엘라 경 역시 워프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는 겁니까?”
“미스릴 가루나 다른 마법진 재료들은 내게 있으니 돌아올 필요가 없으면 중급 마나석 두 개만 있으면 가능하네.”
고위 마법사가 있으니 이 점은 정말 좋았다. 6서클 마법사로 마법진에 특화된 타니엘라의 실력을 잠시 잊고 있었던 하룬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다들 편하게 쉬십시오.”
하룬이 밖으로 향하자 헤니가 은근한 표정으로 따라 나왔다.
“왜?”
“은밀하게 할 말이 있어서요.”
“그래? 해 봐!”
헤니는 잠시 눈치를 보더니 주변 상황이 이야기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우리 세계에 있는 한 방송사에서 좀 특이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어요.”
하룬은 헤니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대장이 사실 하룬이라는 이방인의 이름과 신분을 빌린 거라면서요?”
정말 뜬금없는 소리에 하룬은 기가 막혔다.
“에이! 테론 제국의 정보 길드들이 거의 다 그렇게 추측하고 있더라고요. 권력이나 세력에 관계없이 효율적으로 의뢰를 받기 위해 그랬다고 하던데요.”
헤니는 이어 방송에서 나왔던 내용들을 자세하게 전했다.
“하지만 일부는 이방인일 거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후후! 이거 재미있는걸.’
왜 사람들은 현실의 휴먼이건 이 제국인들이건 간에 자신들 입맛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하룬은 황당한 기분에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는 굳이 감출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꼭 밝힐 생각도 없었다.
“뭐, 편하게 생각하라고 놔둬. 신비한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런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고, 관심사가 아닌 것에는 무신경한 하룬의 말에 헤니의 눈이 실망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대원이니 진실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내 발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하룬의 등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칫! 좀 말해주면 어때서. 하긴 그럼 어쩔 거고 아님 어쩔 거야. 그저 날 지금처럼만 대우해주면 되지. 이 정도 상사를 만나는건 정말 기적이라고.’
헤니 역시 금방 관심을 접어 버렸다.
일행을 이끄는 세 용병단장이 모였다. 아직 하룬으로부터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소로의 존재를 듣지 못한 피엘과 프레스 그리고 나바스론은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이곳을 벗어날 방안을 고민해야만 했다.
벗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도무지 추격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는 이 주변 깊은 곳에 은신했다가 고요의 입구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움직일 생각이었다.
이대로라면 황자 진영과 합류해서 정공법으로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러자면 당연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테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어째 큰 건수 같지?”
프레스의 은근한 말이었다.
“그런 것 같네. 분위기를 보면 하룬 대장이 거절한 거 같은데 그쪽에서 밀어붙이는 것 같아.”
엘저를 통해 누구보다 돌풍 용병대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피엘의 판단이니 확실할 것이다. 프레스와 나바스론은 이미 두 차례에 걸친 의뢰로 인해 많은 자금을 축적할 수 있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의 의뢰라면 지난번과 비슷한 내용일 텐데 좀 어렵지 않을까?”
“아마 그렇겠지. 하룬 대장도 별다른 대책이 없으니 거부하는 거 같아.”
“입구는 당연히 막혔을 것이고, 뒤에서 추격해오는 자들까지 있으니 의뢰가 아니더라도 나서야 할 상황인데 과연 하룬 대장은 무슨 복안을 가지고 있을지.”
세 사람은 내용을 알 수 없는 의뢰를 가지고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이내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티노 부대장의 능력이 대단하던걸.”
피엘의 말에 프레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내 사위이니 당연하지.”
세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더욱 감탄하고 있었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그들은 이 일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룬이야 워낙 상식을 뛰어넘는 인간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처음에는 부대장이라는 직함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티노의 뛰어난 정찰 능력이 벌써 두 번이나 위험 상황을 막아주었다.
“앞으로 우리 용병단도 정찰 분야에 특화된 인재를 구해야겠어.”
프레스는 단단히 작정을 했다. 정찰의 중요성이야 어느 용병단이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곳 고요의 땅에서 본 티노와 하룬의 정찰 능력은 상식을 뛰어넘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 정도면 상급 스카우트의 실력일 것이다.
스카우트라고 부르는 전문적인 정찰 요원을 보유한 용병단들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스카우트라고 할 만한 용병이 없었다. 하지만 돌풍 용병대의 하룬과 티노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세 사람은 스카우트의 유용함과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하하하! 난 걱정 없네.”
“왜?”
“이번에 이곳에서 벗어나면 돌풍 용병대의 근거리에 우리 용병대의 근거지를 정하기로 했거든. 더구나 돌풍 용병대의 활동이 잠시 중단되는 사이에 티노 부대장은 한동안 우리 용병단에서 머물 예정이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돌풍 용병대가 활동을 중단하다니.”
프레스는 뜬금없다는 시선으로 피엘을 보았다. 나바스론도 역시 놀란 눈이었다.
“방금 돌풍 용병대 막사에서 돌아온 엘저에게 들었는데, 하룬 대장이 후크란 산맥 북쪽이나 약초 마을 인근에 본거지를 두겠다고 했대. 본거지를 마련한 후에는 잠시 활동을 멈출 거라고 하더군. 우리 어비스 용병대도 아직 본거지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라 돌풍 용병대와 함께하기로 결정했네.”
엘저의 말이라면 사실일 것이다. 엘저는 요즘 거의 돌풍 용병대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돌풍에는 이방인 출신에 같은 또래면서도 말이 통하는 헤니와 마리가 있고, 만나긴 힘들지만 엘저의 공식 친구인 하룬도 있었다. 피엘은 그녀의 행동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잠시?”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정해진 기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룬 대장이 자신의 대원들의 수련을 위해 용병대 활동을 한동안 중단할 생각을 하고 있다더군. 이곳에서 험한 일을 겪어서 그런지 능력을 올리기 위해 한동안 수련할 생각이라고 하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사실 가까운 곳에서 하룬과 돌풍 용병대원들을 보아 온 세 사람은 딜런 경이 곧 소드 마스터에 진입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용병대의 주축인 딜런이 빠지면 용병대의 활동도 위축될 것이 당연했다.
돌풍 용병대는 그 기풍이 여느 용병대나 용병단과는 달랐다. 물론 능력이 바로 돈으로 직결되는 용병들이라면 당연히 틈날 때마다 수련을 하지만 그들은 유난스러운 수련 광들이었다. 그 점만 본다면 기사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여기까지 강행군을 하는 동안에도 쉬는 시간이면 대원들끼리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하거나 개인 수련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기풍을 가진 돌풍 용병대이니 어쩌면 한동안 대원들 전체가 수련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 용병단으로 오면 되겠군. 나도 도네이스와 오래 떨어지는 건 좀 그러니 그 근처에서 한동안 머무를 생각이네. 그사이에 티노 부대장이 스카우트를 좀 양성해주면 되겠어.”
“무슨 소리야? 이미 우리 용병대에 오기로 되어 있다니까.”
피엘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말했지만 프레스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내 사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