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의 위기》
현실로 돌아온 하룬은 아즈만에게 나인 일행의 위치를 확인했다.
-마스터,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마음이 급한 터라 하룬은 성의 없이 물었다.
-그동안 마스터가 공급해 주신 재료들로 전투형 생체 사이보그들을 생산했습니다. 진화하는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마스터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오, 진화하는 인공지능까지?"
-다행하게도 이 기지에 근무했던 과학자들 중에는 컴퓨터 관련 과학자들이 많아 자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하룬은 급격하게 호기심을 보였다. 보통 사이보그들이 가지는 인공지능과는 달리 진화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성능 면에서 시간이 지나면 확연하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겠습니다.
아즈만의 말이 끝나자 사이보그 네 기가 지하에서 올라왔다. 말로 들었으니 사이보그라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냥 밖에서 보았다면 휴먼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외관상으로는 완벽한 휴먼형 사이보그였다.
'이들이 사이보그라고?'
하룬은 자신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삼남 일녀를 둘러보며 하나씩 자세히 살폈다.
'생체형이라 그런지 인간처럼 느껴지는걸.'
한층 부드러워진 그의 시선이 옮겨 가는 사이 아즈만이 설명을 했다.
먼저 왼쪽에 서 있는 남자는 이십 대 중반으로, 호리호리한 체구에 균형 잡힌 탄탄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긴 외투를 입었는데 언뜻 보니 제법 많은 무기들이 있는 것 같았다.
-태룡입니다. 전대 문명에서 전해지는 체술과 각종 무기술을 익혔습니다. 마스터의 호위를 맡을 겁니다.
두 번째는 특이하게도 여성이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갈색 단발머리의 여성은 작은 키에 마른 체구라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태연입니다. 폭발적인 주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00미터를 3초대에 주파하여 도약거리가 10미터가 넘는 민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기는 잠입, 암살, 추적입니다.
세 번째는 하룬보다 더 키가 큰 거한이었다. 민머리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순간 생각난 브루스 윌리스)
-태력입니다. 5톤의 무게를 10분동안 들 수 있으며 권법과 봉술에 능합니다. 특기는 다대일 전투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으로, 눈빛이 무척 맑았다.
-태범입니다. 전 문명에서 전래하는 전략 전술을 모두 배웠으며 많은 시뮬레이션으로 그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무기는 파동건입니다.
모두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미리 사이보그라는 설명을 듣지 않았으면 휴먼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와 기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현실에서 제대로 된 부하를 처음 얻게 되어 뿌듯한 기분이었다.
하룬은 어색한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멀뚱거리며 쳐다보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모두 반가워."
"첫째 태룡입니다. 마스터의 목숨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둘째 태연이에요. 마스터가 귀찮아하는 것은 제가 책임질게요."
"셋째 태력입니다. 마스터의 앞길을 책임지겠습니다.
"막내 태범입니다. 마스터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질겁니다."(말이짧다 너?)
네 명 모두 그를 향해 뜨거운 충성심을 드러냈다. 인간이라면 이런저런 상정이나 마음으로 이렇게 완벽한 충성심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에게도 현실에서 완벽한 수하들이 넷이나 생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하필 그 숫자가 넷이라 재수 4인방을 연상했지만 하룬은 그들을 태가사 남매라 부르기로 했다.(태기사 남매라고 읽어버렸어)
'그럼 이 친구들이 생겼으니 이번엔 내가 직접 물건을 받으로 가 볼까?'
어차피 주변 정찰은 하고 있었지만 최근 오르그의 출현이 빈번하고 그 뒤를 따라 사냥을 하는 하르크가 출몰한다고 하니 물건을 가져올 나인의 마을 사람들도 지킬 겸 밖에 나가 볼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간다고 하니 아즈만이 몇 가지를 준비해 주었다. 두 벌의 옷과 날이 적당하게 휘어진 검이었는데 직접 잡아보니 게임에서 즐겨 쓰는 본 소드와 비슷한 무게라서 금방 익숙해졌다.
"고마워, 아즈만."
-마스터가 만족하시니 다행이에요.
일전에 아즈만의 분체가 멀쩡할 때 지나가듯 말했는데 어느새 제작되어 있었던 것이다.
옷 한 벌은 속옷이었는데, 피부에 ㅊ가 달라붙어 비욘드에서 아바타가 입고 있는 암기대 벨트가 변한 방어구처럼 통기성이 뛰어나고 방호력도 좋았따.
'충격을 분산시켜 주고 특히 하르크의 날카로운 손톱에도 찢기지 않습니다. 다만 조심할 것은 불에 약하니 그것만 주의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한 벌은 일체형으로 몸에 꼭 달라붙는 방어구였다.
-플라튬과 일리자움을 합성시켜 만들어낸 신소재 실로 제작한 방어구입니다. 둔기류나 도검류는 물론이고 폭발성 무기나 총기류 그리고 파동 무기류에도 강한 방호력을 지닙니다. 자체적으로 미세 진동을 하는 방어구로, 충격 대비 약 30%의 데미지를 분산시키거나 자체 흡수합니다. 물론 옷 고유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어 바깥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의 최신 기술로 만든 겁니다.
무광택 가죽 같은 촉감을 지는 검정색 방어구가 마음에 쏙 들었다. 두 벌 다 입었음에도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 착용감이 뛰어났고, 그 방호력까지 뛰어나다니 외부로 나갈 떄는 안성맞춤이었다.
"패트롤 호크의 정찰에 의하면 한 시간 전에 동북방으로 약 5킬로미터까지 도착했다니 마중을 나가지."
"네, 마스터."
하룬은 처음으로 마련한 비수 세트를 챙기고는 타가사남매와 함께 나인 일행이 오는 곳을 향해 출발했다.
'엄청나군.'
하룬은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치고 있는 자신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속도로 이동하는 태가사남매에게 감탄했다. 일반인에 비해 약 열 배의 신체 능력을 가졌다는 아즈만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신체 능력에 더해 각기 특화된 분야에 가공할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든든했다.
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가량 이동했을 때 하룬의 옆에서 달리던 태룡이 잠시 주춤하더니 자리에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하룬이 멈추자 나머지 셋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마스터, 패트롤 호크의 보고입니다. 북동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인간들과 오르그들이 대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나인 일행이 틀림없었다.
"패트롤 호크가 보내온 정찰 영상을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정신을 집중하시고 고글 왼쪽의 상단을 보시면 메뉴가 뜰 겁니다. 그곳에서 '정찰 영상 보기' 란의 글자에 집중하시면 정찰 영상이 뜹니다."
"알았다. 고마워."
하룬은 고글의 왼쪽 상단에 집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지만 마음을 집중하자 메뉴라는 흰색 글자가 생성되었고, 다시 그 메뉴에 집중하자 아래쪽으로 하위 항목이 펼쳐졌다.
메뉴
-통신
-정찰 영상 보기
-원거리 조종
정찰 영상 보기 란에 집중하자 다시 세부 항목이 보였다.
정찰 영상 보기
-위성 영상
-패트롤 호크 영상
-가드 영상
-기지 영상
두 번째 패트롤 호크 영상에 집중하자 고글의 스크린이 마치 그의 눈인 것처럼 변하며 전혀 다른 풍경이 보였다.
'나인이다.!'
나인을 비롯한 영흥 마을 전사들 수십 명이 눈에 들어왔다. 호크의 위치가 높은 상공이라서 그들의 모습이 좀 작게 보였지만 호크가 하강하는지 점점 커졌다.
그들은 원을 이룬 라나두들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낙타의 변종인 라나두는 엄청난 양의 짐을 등에 실은 상태에서 머리를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라나두들이 만든 원형 공간의 내부에 라인과 로수가 있고, 나머지 전사들은 일곱명씩 짝을 이루어 사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곽에는 백을 헤아리는 많은 오르그들이 가죽옷으로 하체만 겨우 가린 채 살벌한 기세로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따. 보아하니 이미 한 번 초전이 이루어졌고 이ㅏ제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될 것 같았다.
'좀 나아진 건가?'
비욘드를 통해 검술과 각종 전투 기술을 익히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내심 기대했지만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보는 건 나중에.'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뇌파에서 자연스럽게 연동된 고글의 스크린에 맺혔던 영상은 사라지고 다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자!"
하룬은 발에 힘을 주어 바닥을 차고 날았다.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펼친 하룬의 몸이 마치 새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뒤를 돌아보자 마치 단거리 선수들처럼 질주하는 태가사남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정도는 아니지만 이 속도로 한 시간 이상 지속해서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일이지.'
속도는 하룬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었지만 엄청나게 빨리 달리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대지의 기를 빨아들였다가 순간적으로 압축시킨 다음 분출하는 패스트 스킬을 펼쳤다.
하룬 일행은 2.4킬로미터를 약 5분여 만에 주파해 목적한 곳의 바로 위쪽에 자리한 작은 바위 언덕에 도착했다. 초당 8미터 정도의 속도로 달려간 것이다. 물론 최고 속도는 아니었다. 하룬이 태가사남매를 비려한 것이다.
언덕 아래에는 이미 싸움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오르그들이 전 방향에서 아우터들을 향해 달려들며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우아악!"
"죽엇!"
빠악! 따악!
곳곳에서 상대의 무기를 받아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꽤 많은 수련을 했는지 영흥 마을 전사들은 휘어진 도를 안정된 자세로 휘두르며 중앙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오르그들의 공격을 막았다.
'어렵군.'
오르그들의 무기는 전투 도끼와 대검 또는 짐승의 뼈다귀나 단단한 나무 몽둥이였다. 휴먼들보다는 머리 하나가 작은 오르그들이었지만 그 힘은 놀라워서 어느 새 영흥 마을 전사들은 하나둘씩 밀리고 있었다. 일단 숫자로 보아도 한명이 셋 이상의 오르그들과 싸우는 상황이니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것이다.
마침내 부상자가 나왔다.
"으윽!"
전사 하나가 오르그가 휘두른 대검을 맞받아치다가 힘이 달려 손아귀가 찢어지며 도를 놓치고 말았다. 당장 공격하던 오르그 셋이 당황한 전사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 전사는 한 오르그가 휘두른 뼈다귀에 맞아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까앙!
옆에서 싸우던 전사 하나가 그 상황을 보고 몸을 날려, 동료를 향해 날아오는 무기를 걷어 냈지만 그 때문에 당장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무려 여섯이나 되는 오르그들이 쓰러진 동료를 뒤에 두고 사력을 다해 도를 휘두르는 전사를 에우며 전 방위에서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런! 커브 피치!'
하룬은 서둘러 비수를 날렸다. 조금 더 실력을 볼 셈으로 구경하다가 희생자가 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셋이라면 몰라도 여섯을 막기엔 불가항력이었다. 금방 오르그들의 무기에 전사의 머리통이 날아가고 육신은 갈기갈기 찢기고 말 것이다.
하룬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늦었지만 몸을 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머엄춰어엇!"
나인이었다. 라나두들이 만들어낸 원진 안에 서있던 나인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갑자기 오르그들의 동작이 거짓말 처럼 뚝 멈추었다.
'이건?'
지난번에 하르크와 상대할 때 나인이 썼던 그 이상한 능력이다. 순간적으로 적의 몸을 멈추게 하는 바로 그 염력이 발현된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전사는 쓰러진 동료를 안고 뒤로 물러나더니 그를 야크들이 만든 원진 안으로 던졌다. 그 순간 멈추었던 오르그들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파악! 퍽!
오르그들의 무기가 뒤늦게 바닥이나 허공을 찢었다.
푸욱!
끄아악!
앞으로 달려가던 오르그 한 마리가 쓰러졌다. 그 오르그의 뒤통수에는 비수 한 자루가 깊이 박혀 있었다. 바로 하룬이 던진 비수였다. 급한 마음에 기가 주입된 비수가 오르그의 두꺼운 가죽을 뚫은 것이다.
"하룬!"
나인이 반가운 얼굴로 하룬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이에요, 나인."
하룬은 기이한 염동력으로 전사들을 구해 낸 나인이 휘청거리다가 로수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는 것에 반가이 대답하며 손이 잡히는 대로 비수를 날렸다. 비록 현실에서의 수련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비수들은 마음 먹은 대로 날아가고 있었다.
끄르륵!
크윽!
순식간에 오르그 여섯이 비명과 함꼐 스러졌다. 하룬의 비수는 절저히 머리와 심장만 노렸다. 기를 머금은 비수는 여지없이 오르그들의 단단한 가죽을 뚫고 그 목숨을 취했다.
"공격!"
하룬의 명령에 태가사남매가 전장에 뛰어들었다.
태룡은 어느 틈에 예리하고 날카로운 날을 가진 검을 꺼내 사방으로 휘두르면서 하룬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가 지나온 곳에는 오르그 넷의 목이 몸통에서 분리되며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비록 기를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가공할 속도를 가진 쾌검으로 질긴 가죽과 단단한 뼈를 가른 것이다.
태력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건틀릿을 끼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발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오르그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빠악! 퍼억!
육중한 거구의 몸놀림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빠르기로 날아간 태력의 주먹은 오르그들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있었는데 얼마나 위력이 강한지 머리통이 반으로 찌그러들거나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태연은 낫같이 생긴 무기를 휘둘렀다. 낫처럼 생긴 그 무기는 태연의 손에 쥔 줄과 연결되었는데 뭘 어떻게 조종하는지 몰라도 예리한 안쪽 날이 모르그의 목을 자루고 있었다.
빠앙! 빠앙!
태범은 전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오르그들을 향해 파동건을 쏘고 있었다. 파동건에 맞은 오르그들은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큰 진폭을 가진 파동을 맞은 충격으로 비틀거렸다.
그 순간을 전사들은 놓치지 않았다. 전사들의 휘어진 도는 충격을 받은 오르그의 목이며 머리통 같은 급소를 베고 있었다.
보통의 파동건과는 달리 총신이 매우 길고 몸체가 큰 그의 파동건에서는 시퍼런 파동탄이 연속해서 튀어 나가며 먼 거리에 있는 전사들을 지원했다.
하룬과 태가사남매가 전투에 끼어들자 당장 전황이 급변했다. 압도적인 숫자로 전사들을 밀어붙이던 오르그들은 새로운 적들에게 동료들이 죽어 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놈들!"
이제 나인을 근접 경호하던 로수까지 원진에서 빠져나와 하룬의 반대편에 있는 전사들을 도왔다. 약하지만 기가 주입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그의 도는 상대 오로그의 무기를 베거나 부수고 급소를 베었다.
'대단하네.'
로수의 경지는 비욘드로 치면 소드 유저 상급에서 최상급에 해당했다. 순간적으로 기를 무기에 주입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하룬과 태가사남내 그리고 로수가 가세하자 그들의 함부로 당해 낼 수 없는 압도적인 힘과 기백에 오르그들의 투기가 한순간에 바닥에 떨어졌다.
"타앗!"
하룬은 비수가 다 떨어지자 아즈만이 제작해 준 검을 뽑아 들었다. 본 소드와 같은 중량과 모양을 가진 검이라 숙련도가 제법 높은 빌로우 검술이 마음먹은 대로 펼쳐졌다. 하지만 현실에서 처음 펼치는 검술인지라 좀 어색했고, 그 때문에 오르그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자 순간적으로 위험에 빠졌다.
"히익!"
두 오르그의 대도와 몽둥이를 피하느라 몸을 숙이는 것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펼쳐 옆으로 이동한 하룬은 식은 땀이 나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그나마 숙련도가 높은 메신저 스킬이 본능적으로 펼쳐저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난 하룬은 자신을 공격한 오르그들의 확연하게 열린 급소를 볼 수 있었다.
'공격!'
생각하는 순간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훤하게 열린 오르그의 옆구리부터 배까지 길게 베어 버렸다.
'나도 모르게 기가 검날에 스며들었다!'
하룬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지도 싣지 않았는데 기가 날에 주입된 것이다.
'이젠 확실하게 익스퍼트 급에 올랐어.'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한 오르그의 몽둥이가 그의 머리통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하룬은 펄쩍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순간적인 도약이었지만 그의 몸은 오르그의 키 이상으로 뛰어올랐고 떨어지는 순간 검이 몽둥이가 지나친 궤적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끄아악!
이번에는 제대로 거리가 조절되지 않아 오르그의 목이 반절밖에 잘리지 않았다. 벌어진 목으로부터 솟아난 피가 하룬의 얼굴에까지 튀었다.
푸악!
상대의 피를 얼굴에 뒤집어쓰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던 하룬은 등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과 함꼐 맹렬하게 앞을 향해 굴렀다.
쌔애액!
역시 공격이 있었다. 오르그 하나가 그의 등판을 향해 대검을 날렸던 것이다. 오르그의 피 때문에 눈이 너무 따갑고 목표물이 몇겹으로 보였지만 하룬은 풀 스윙으로 대검을 휘두른 오르그의 비틀린 몸을 보았다.
"백 웨이브!"
하룬의 검이 마치 격렬하게 역류하는 파도처럼 거칠고 흉포한 기세로 날아갔다.
푸욱!
끄르륵!
하룬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간 상체를 되돌리기도 전에 검으로 놈의 몸을 찔렀다. 그의 손이 마치 더러운 것을 털어 내듯 가볍게 움직이자 목의 상처가 크게 벌어지며 비릿하고 뜨거운 피가 뿜어졌다.
"머엄춰어엇!"
다시 한 번 나인이 소리를 질렀다. 또 누군가 위험에 빠진 모양이다. 손을 들어 얼굴의 피를 닦아 낸 하룬은 여지없이 멈춘 오르그들과 서둘러 라나두를 향해 물러나는 전사들을 볼 수 있었다.
군데군데 쓰러진 오르그들의 사체와 원진 안으로 들어가는 부상자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힘이 빠진 듯 쓰러지는 나인의 모습이 보였다.
"한 방향씩 맡아라. 태범은 안쪽에 들어가 나인을 보호하고 위험한 사람들을 지원해."
"네, 마스터"
태가사남매가 하룬의 지시대로 한 방향씩을 틀어막았다. 그 덕분에 유일하게 오르그들을 죽이고 있었지만 나인 때문에 마음껏 전투에 전념할 수 없었ㄷ던 로수의 원진 안으로 들어가 파동건을 쏘아 대는 태범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가랏!"
비록 현실에서는 처음 쓰는 빌로우 검술이었지만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지 이내 손에 익어 갔다. 오르그들은 주로 힘을 사용하는 단순한 공격이라 몸이 빠른 하룬과 태가사남매에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가나자 자연스럽게 오르그들의 약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룬의 검은 마치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움직이며 오르그들의 숨통을 끊었다.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심장이 뚫리거나 혹은 머리통이 베어진 오르그들이 ㅆ ㅡ러져 있었따.
원진 안으로 들어간 태범의 파동건이 지원하자 전사들과 태가사남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파동건의 충격을 받아 순간적으로 공격의 맥이 끊긴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ㅇ ㅣ아니었다.
'지독한 놈들!'
이미 전세가 기울었고 대장이 전투 중에 죽은 것 같았지만 오르그들은 물러나거나 도망칠 생각을 않고 살기가 더 충천한 상태에서 계속 달려들었다.
'하지만 소용없다!'
실전의 중요성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따. 이제 빌로우 검술은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졌다. 센스 소드를 익힌 덕분인지 아니면 빌로우 검술의 검로가 원래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하룬의 검은 이제 간결하고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오르그들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끄르륵!
베고 찌르는 하룬으 ㅣ검은 마치 거친 파도처럼 광폭하면서도 힘이 가득했다. 계속해서 더해지는 파도는 훨씬 더 큰 파도를 만들었고, 그 파도는 앞을 막는 모든 것들을 부숴버릴 듯 출령이며 나아갔다.
"후우욱!"
어느새 앞과 옆에서 오르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오르그들을 상대로 빌로우 검술을 펼친 하룬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수십의 오르그들이 자신의 뒤쪽에 쓰러져 있었다. 한 방향을 완전하게 뚫은 것이다.
익숙하게 펼쳐지던 빌로우 검술의 거칠지만 아름다운 궤적이 떠올랐다. 이제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수련 검식과 실전 검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검술 하나를 펼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던 하룬은 태가사남매에 의해 어느새 많은 오르그들이 죽은 것을 볼 수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투기를 가진 오르그들은 하직도 맹렬한 기세로 대항하고 있었다.
"이놈들!"
하룬의 메신저 스킬을 펼치며 바닥으 박찼다. 아직도 하단전의 기는 상당량 남아 있었고 완숙에 이른 메신저 스킬로 적은 양이나마 기가 계속 보충되고 있어니 거치 것이 없었다.
하룬과 태가사남매는 나머지 오르그들을 맞아 용맹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휴먼이라면 기세가 꺾이거나 도망치기라도 할 텐데 흉성이 폭발한 오르그들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바람에 피범벅이 되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메신저 소드는 아직 무리였지만 빌로우 검술은 어느 정도 몸에 익었다.
메신저 스킬로 계속 보충되는 기를 주입받은 하룬의 검은 마치 파도처럼 강렬한 기파를 뿌리며 오르그들을 베었고, 전투형 사이보그인 태가사남매의 전투 기술도 점점 진화해 갔다.
싸악!
하룬을 향해 도끼를 날리려던 오르그의 목이 그림처럼 날아갔다. 처음에는 검 끝에 걸리는 뼈와 살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어느새 완숙에 이른 빌로우 검술과 기가 주입된 검으로 인해 종이를 베듯 깨끗하게 목을 벨 수 있었따.
본능력으로 적을 찾던 하룬의 몸이 멈추었다. 이제 더 이상 서 있는 오르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 위험한 상태군. 또 이성을 잃었어.'
완전히 주의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한번 피를 보기 시작하자 오직 적을 베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온몸이 피범벅이 된 태가사남매가 그에게 모여들었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다들 이곳저곳에 작고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하룬의 누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몸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통증이 느껴지는 곳이 두 군데나 되었다.
왼쪽 어깨 어름과 옆구리의 살이 쩍 벌어져 있었다. 격력한 전투 때문에 통증은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제법 큰 상처였다. 방어구가 아니었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옷을 벗어 주십시오."
하룬은 스며들었던 피가 굳으며 진득해진 옷을 간신히 벗었다.
파동건으로 전투 지원을 했기에 그나마 부상을 입지 않은 태범은 등에 메었던 배낭을 열어 구급약을 꺼냈다. 큰 병에 든 소독약으로 상처 부위를 씻어 내고 지혈제로 보이는 가루를 뿌리자 참기 힘든 통증이 느껴졌다.
"큭!"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은 하룬의 눈에 어느새 출혈이 멈충 상처 부위가 보였다. 비록 통증읐 컸지만 빠른 효과를 가진 약이었다.
태범이 상처 부위에 외상 약을 바르고 더는 벌어지지 않도록 꿰메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하룬은 주먹을 쥐고 인상을 썼다. 휘어진 바믈이 살을 관통할 때마다 참기 힘든 격통이 느껴졌지만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태범의 손놀림이 빨라 치료는 금방 끝이 났다.
태범은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붕대를 익숙하게 감는 것으로 치료를 마치고 다른 동료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비록 사이보그이긴 했지만 바이오 휴먼체라 치료는 필수적이었다.
극통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욱신거리는 통증은 여전했다. 하룬은 그제야 영흥 마을 전사들이 있는 곳으로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일행 중 태범처럼 치료술을 가진 이가 있어 그쪽도 임시 치료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따. 그런 와중에 창백한 얼굴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인이 로수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덕분에 살았어요."
"많이 다치신 분들이 안 보여 다행이네요."
하룬의 말대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전사는 보이지 않았다. 위기 때면 터져 나오던 나인의 염동력과 제때 뛰어든 하룬 일행 덕분이었다. 더구나 전투 중반 이후에는 하룬과 태가사남매가 주로 오르그들을 상대했으니 중상자가 나올 리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 근방은 변종 생물이 없는 곳이데."
"이놈들은 우리를 추적해 왔네."
로수가 기운이 없는 나인 대신 대답했다.
"최근 북쪽에서 십만 단위가 넘는 오르그 부족들이 대거 남하하고 있어. 하르크들까지 놈들을 쫓아 내려오고 있지. 그래서 최근 아우터 마을들이 빠르게 폐쇄되고 있는 상황이네."
패트롤 호크와 위성 정찰 결과를 통해 아즈만으로부터 대충 상황을 보고받았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심각했다. 유니온 안은 몰라도 밖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부족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렵 부족이라 사냥에 의존하고 있지. 때문에 최근에는 아우터들이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어. 평지 쪽의 마을은 놈들에게 파괴되거나 빼앗기고 아우터들은 안면이 있는 산속 마을로 이동하고 있네."
"도대체 숫자가 얼마나 되는데……?"
"아우터 통신 '백본'을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대륙에서 이쪽 땅으로 들어온 오르그는 물경 백만을 헤아리는 숫자라고 하네. 놈들을 쫓아온 하르크의 숫자도 천이 넘어가지. 이주해 온 오르그는 일곱 부족이나 되는데 그궂ㅇ 다섯이 수렵 부족이네."
로수의 설명에도 하룬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오르그 부족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휴먼들에게도 영향이 있는 겁니까?"
"당연히 있지. 농경을 시작한 부족들은 굳이 우리 휴먼들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네. 오히려 거래를 원하지. 오르그들은 다른 수렵 부족보다는 휴먼과의 거래를 더 원하네. 농경부족도 경작을 위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은 해야겠지만 수렵 부족처럼 휴먼들을 식량의 한 종류로 여기지는 않네. 수렵부족의 경우는 휴먼들의 식량과 문명이기를 무척 욕심내고 있네."
“그 이야기는 오르그들이 상당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저희도 잘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오르그들 중에도 정착 생활을 시작한 농경 부족들이나 수렵 부족의 일부는 변종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지능과 나름의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이제야 기운을 차린 나인의 대답에 하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르그가 독자적인 문화를?’
“백본 통신에 따르면 대륙에는 아우터들이나 유니온과 거래하는 오르그 부족들도 있다고 했어요. 믿을 수는 없지만 서방의 일부 유니온들은 오르그들 중 일부를 받아들인 곳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휴먼들의 공용어도 어렵지 않게 배운다고 해요.”
“놀라운 일이군요.”
“그렇지요? 저도 그 소식을 듣고 놀랐어요. 그나마 휴먼들에게 다행한 것은 그들끼리 전쟁도 빈번하게 발생해서 농경 부족과 수렵 부족 간에는 휴먼들 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다고 하더군요.”
나인의 말에 하룬은 이제까지 지능이 낮지만 높은 전투력을 가진 변종 생물로 알고 있었던 오르그에 대한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오르그가 일종의 변종 인간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예전에 아즈만이 그런 가능성을 시사했었다. 종말 시대 말에 유전 공학 기술로 이능을 가진 신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국가나 기업 단위로 해당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수행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인간들과 동물들이 대규모의 추악한 유전자 실험의 대상이 되었으며 종말 전쟁의 와중에 탈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빌어먹을!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로군.’
하긴 이런 존재들이 뜬금없이 나올 리는 없다. 수천만 혹은 수억 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는 진화 이론으로는 오르그와 하르크 같은 변종 생물의 존재를 전혀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합시다. 행여 또 다른 추적이 있을지 모르니.”
“네.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됩니다.”
“다행이네요. 좌표는 알지만 그래도 와 보지 않은 곳이라 감이 없었거든요.”
나인과 로수는 부상을 입은 전사들을 서둘러 치료하고 길을 재촉했다. 비록 휴식이 필요했지만 이 자리에 계속 머물렀다가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부상자들도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오르그의 추적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하룬과 나인 일행은 무사히 해가 지기 전에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 정말 좋은 곳이군요.”
잔잔한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언덕이 만들어 낸 평화로운 그림에 나인이 탄성을 터트렸다.
‘이상한걸.’
분명 이곳은 나인이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이곳에 와서 감탄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쉬고 계십시오.”
하룬은 태가사남매와 함께 라나두들을 가둘 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슨 용도인지 몰라도 이미 태가사남매가 근처 숲에서 잘라온 통나무들이 있고, 하나같이 엄청난 힘을 가진 그들이었기에 통나무 울타리를 가진 임시 우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나두들을 모두 우리에 가둔 후에야 하룬은 사람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 미리 아즈만에게 연구 시설임이 드러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전해 두었던 것이다.
“어머! 집이 정말 좋군요. 이렇게 멋진 곳인지는 몰랐어요.”
“아늑하고 편한 곳이군.”
나인과 전사들은 놀란 눈으로 지하 1층의 주거 공간을 포함해 집 안 곳곳을 구경했다. 유리로 된 천장을 통해 호수의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것을 본 그들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또 1층에 있는 수경 재배실도 그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들 역시 유니온 안은 물론이고 안 가본 데가 별로 없었지만 이렇게 곳곳이 다른 기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게 된 집은 처음 구경하는 것 같았다.
“나인 덕분에 좋은 집을 얻었지요.”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 집을 제가 소개시켜 드렸군요.”
그렇게 말하는 나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룬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자세한 사정을 묻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 참았다.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완전히 개조를 했으니까요.”
하룬의 말에 나인은 비로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애초에 자신이 소개했던 이곳과 지금의 이곳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거란 사실응ㄹ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곳일지는 몰랐어. 아니지, 그동안 공사를 했겠지. 사진으로 본 이곳은 폐허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쩐지 많은 물품들을 구입하더라니.’
물론 이 집과는 관계없는 금속 재료나 기계류 등이 많았지만 그간 바란을 통해 구입한 물품들의 상당량이 이 집을 개조하는 데 쓰였을 것이다.
“전사들은 1층을 쓰면 됩니다. 식사를 준비할 테니 먼저 좀 씻으시지요.”
“네,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할 일이 많았다. 심한 부상은 없었지만 임시로 치료한 상태였기에 차분하게 상처를 돌볼 시간이 필요했다.
“참, 벨은요?”
벨이 보이지 않는 것이 궁금했나 보다.
“유니온에 있습니다.”
“아!”
나인은 당연한 일을 물었다는 얼굴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집 구경도 잠시, 전사들은 1층에 자리를 잡고 서로를 치료했다. 치료사로 보이는 전사가 돌아다니며 치료 방법을 설명하거나 직접 시술했다. 그래도 상행 경험으로 가벼운 상처치료 기술쯤은 알고 있는 전사들은 서로를 도와 치료를 시작했다.
팔다리가 부러진 전사들은 부목을 댔고, 외상을 입은 전사들은 상비한 외상 약을 바르거나 찢어진 곳을 바늘로 꿰매었다. 무척 아플 텐데 마취도 없이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은 태가사남매와 함께 전사들이 먹을 음식을 마련했다. 빵과 우유 그리고 야채와 구운 인조고기밖에 없었지만 시장했던지 영흥 마을 전사들은 엄청난 식욕을 자랑하며 모두 해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식사를 마친 대부분의 전사들이 그간의 강행군에 따른 피로 때문에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휴식에 들어갔을 때 하룬은 나인과 함께 호숫가를 산책했다.
“그동안 여기서 지낸 건가요?”
“네. 개조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습니다. 지하에도 몇 층이 더 있는데 거기까지는 아직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고생했겠네요. 집이 너무 예뻐요.”
“고맙습니다.”
나인의 말에 하룬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실 하룬은 집의 외관이나 내부 시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편하게 자고 생활할 수 있으면 만족하는 하룬에게 채광 시설이나 질 좋은 가구 그리고 각종 생활 도구들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아버지의 유품 속에서 이곳에 대한 사진을 비롯해 정보가 기재된 기록을 찾았지만 이런 곳인지는 몰랐어요. 이런 곳인 줄 알았다면 진작 둘러 볼 것을 그랬어요.”
나인의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여자라서 그런지 주변 환경이나 시설이 잘 갖추어진 집에 욕심난 것 같았다.
하룬은 이참에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랬군요. 그동안은 몰랐나 보지요?”
“네. 이곳에 대한 정보는 상행의 경과를 기록한 전자 일지 속에 들어 있었어요. 그동안 수도 없이 전자 일지를 열람했지만 본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언제나처럼 일지를 읽던 중에 페이지가 건너뛰는 것을 발견하고 검색해 보니 여기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었어요.”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비록 유니온의 보호 밖에 있는 아우터들이지만 그들도 발전 시설은 가지고 있어 컴퓨터 같은 전자 제품은 사용한다. 특히 직접 상행을 하거나 상단 보호를 수행하는 영흥 마을 전사들은 홀로그램 영상 화면을 가진 시계형 휴대 컴퓨터를 유용하게 썼다.
‘뭔가 있긴 있군. 나인 같은 이능력자가 그동안 찾지 못했던 정보가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염력을 쓰려면 무엇보다 어퍼 마나 오션이 발달해야 한다. 기를 축적하지는 못해도 외계의 기를 장악할 정도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가져야 하는 이능력자가 그런 사소한 것을 오랫동안 놓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벨과 아즈만의 분체에 새겨진 각인과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지금의 그를 이끈 것은 알 수 없는 존재가 관여한 결과가 아닐까 의심하던 하룬으로서는 그를 둘러싼 비밀의 막을 한 겹쯤 걷어 낸 기분이었다.
“게임이 효과는 있었나 보네요. 전사들이 많이 노련해졌더군요. 나인의 초능력도 한 단계 더 발전한 것 같고요.”
“다 하룬 덕분이에요. 아, 해란에게 듣기로 저보다 몇 살은 더 많을 거라고 하던데 편하게 말해 주세요.”
“그럴까요?”
“네, 그게 더 편해요. 하룬은 꼭 오빠같이 여겨지거든요.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내성적으로 보았지만 의외로 나인은 시원스러운 데가 있었다. 하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 이제 내 진짜 나이를 밝히는 것은 물 건너갔군.’
게임 속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마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 때문에 동갑들에게도 존댓말을 듣게 생겼지만 호칭이야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또래들은 한 살 차이를 가지고도 꽤 신경을 쓰는 모양이지만 감정 변화 폭이 좁은 하룬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갈 뿐이다.
“후후. 그래도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마을 촌장이라 다들 어려워하는 데다 로수 오빠마저도 오빠라기보다는 삼촌 같은 존재라 편하게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오빠가 생겨서 너무 좋아요. 어릴 때 소원이 오빠나 동생이 생기는 것이었거든요. 이상한 능력을 가졌다고 마을에 있는 또래들은 절 괴물 취급해서 늘 혼자였어요.”
그런 아픔이 있는 줄은 몰랐다. 비록 사고로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이전에 했던 나인의 말을 통해 그녀의 아버지가 자애롭고 따듯한 가슴을 가졌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인의 어린 시절은 그와는 다르게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도 여동생이 하나 더 생겨서 기분이 좋아. 우리 벨은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터라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경우도 있었거든.”
“정말요? 호호호. 혹시 19금 주제 말인가요? 어쩌지요? 그런 부분은 해란이라면 몰라도 혼자 큰 것이나 다름없는 저도 영 맹탕인데. 난 오빠에게 그런 걸 배울 생각이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룬이 자신을 정말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듯 나인의 목소리가 밝게 빛났다.
“해란이가 그런 데 빠삭한가 보네?”
“후후. 맞아요. 걔야 유니온에서 자랐고 더구나 암시장에서 컸으니 성과 섹스를 비롯한 19금 주제에 대해서는 제 선생님이나 다름없는걸요. 아! 그러고 보니 오빠도 유니온에서 자란 거 아니었어요?”
나인의 질문에 하룬은 좀 머쓱했다. 대체 자신은 뭘 하고 생활해 왔는지 한심했다. 유니온의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성 경험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한 경우는 중학교나 초등학교 때 경험하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른 나이부터 성교육을 받는 영향도 있지만 하루를 살기가 버거운 부모들이 대부분 맞벌이를 하는 통에 혼자 크다시피 방치된 환경에 기인한 현상이다. 임신을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그것에 일조를 했다. 낳아서 입양하면 되기 때문에 부모들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뫼비우스 같은 녀석은 적어도 백 단위의 여자는 경험했을걸.’
그 생각을 하자 공연히 자신에게 화가 났다. 다른 아이들이 당연하게 경험하는 것들을 그는 경험하지 못했다. 가정의 사랑과 관심에 목이 말라 반항하고 삐뚤어져 행동하면서도 무리에 끼지 못하고 혼자 외톨이로 지낸 시간들이 너무 후회되었다.
“난 평범한 사람이 못 되어서 그래. 그래서 이제라도 평범해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중이야.”
“헤엥!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룬 스스로도 자신이 평범하다는 범주에서는 한참 벗어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비욘드를 한 이후 그가 생각하는 평범한 생활에는 많이 접근한 상태였다.
따듯한 관심과 격려, 마음 써주는 가족의 존재와 노력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먹을 곳과 잘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그가 생각하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벨의 존재가 더욱더 그리웠다. 녀석의 말랑말랑한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따듯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의 폼에 파고드는 녀석의 작은 몸짓이 너무 그리웠다.
잠시 벨 생각에 대화가 끊어진 것을 자각한 하룬은 나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발견했다.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해란처럼 부담스럽지도 않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나인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의지하니 더 관심이 갔다.
“무슨 일인데?”
“실은 오르그들 때문에 마을이 위험해요.”
그거라면 아까 들었다. 들을 때는 심각하다고 느꼈지만 그 문제로 나인의 영흥 마을까지 영향을 받고 있는 줄은 몰랐다.
“더구나 마을을 지킬 전사들이 수련을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이렇게 밖으로 돌고 있으니 더욱 걱정이에요. 마을에는 아직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을 여자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흐음, 그럼 이주를 생각하는 거야?”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마을의 이주라면 쉬운 문제는 아니다. 전에 들은 바로는 영흥 마을의 총인구는 42세대, 172명이었다. 사이언스 마을이나 용광로 마을처럼 특별한 생활 수단이나 방어 수단이 없는 영흥 마을로서는 이주는 큰일이 아닐지 모르나 안전한 장소를 찾고, 노약자들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유니온과 멀어져 생활 수단이 사라지는 터라 결정하기가 힘드네요.”
나인의 고뇌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휴우. 어쩌다가 저 어린 나이에 무거운 책무를 맡아서…….’
나인이 너무 가여웠다. 이능력을 가진 탓에 어린 시절에는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컸고, 성인이 돼서는 자유로운 삶 대신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인생이 불쌍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같이 한번 생각해 보자.”
나인은 자신의 어깨 위에 살짝 놓인 하룬의 손에서 온기를 느끼고는 가슴이 따듯해졌다. 유일하게 의지가 되었던 아버지가 죽어서도 자신이 걱정되어 하룬을 보내준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항상 무거운 짐에 짓눌렸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오빠, 고마워요.”
하룬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감싸 안았다.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은 그녀의 가볍고 작은 몸이 그의 탄탄하고 잘 발달된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편안해.’
하룬의 품에 안긴 나인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절대적인 믿음을 주던 존재가 바로 아버지였다. 그 품 안에서는 아무런 고민도 고통도 없었다.
벨의 부재로 한동안 외로움을 느꼈던 하룬 역시 나인의 가녀린 몸을 안고 있으니 가슴이 훈훈해졌다. 정말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여동생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친해졌지만 막상 두 사람은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훗. 꼭 아빠 같아.’
몇 살 차이 나지 않아서 해란과 세란은 은근슬쩍 말까지 튼 모양이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와 마을 전사들에게는 선대의 피맺힌 복수를 해준 은인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있었다.
‘오……빠! 훗, 오빠가 생겨서 너무 좋아.’
오빠라는 말이 이렇게 따듯하고 좋은 느낌을 줄지는 몰랐다.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연방 입으로 오빠라는 단어를 뻐끔거린 나인은 하룬의 품속에서 어린아이처럼 꼼지락거리며 그리움 속에서만 느꼈던 안온함과 따듯함을 언제까지라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늘 마가 끼는 법이라 했던가. 멀리 로수가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인! 나인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꽤 멀리까지 나온 것 같았다. 나인은 화들짝 놀라 하룬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람들에게 걱정하게 만들었나 보다. 어서 가자.”
“네, 오빠.”
아쉬운 마음을 억지로 누른 나인은 그의 품을 벗어나자마자 찾아온 박탈감에 하룬의 손을 잡았다.
멈칫!
하룬의 몸이 잠시 굳었다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전에는 안기기까지 했었는데 그때는 이런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 갑자기 자신을 여자로 느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인은 그런 하룬의 순진한 반응이 너무 즐거웠다.
“푸훗.”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하룬은 당황했다.
“왜?”
“아니요, 그냥.”
나인은 몸을 밀착시켜 하룬의 팔짱을 꼈다. 파르르 긴장하는 하룬의 몸이 느껴졌다. 팔과 밀착된 가슴을 통해 하룬의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따듯해, 후훗.’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애교가 살아난 것일까. 나인은 당황한 빛이 역력한 하룬의 팔에 매달려 기지로 돌아가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별걱도 아닌 이야기였지만 왠지 신이 났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해도 만족스러웠고, 재미있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봐주는 것도 즐거웠다.
나인은 평상시와 다른 자신의 태도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마음이 편했다. 평상시의 감정 폭이 10이라면 지금은 100까지 확장된 상태였다. 날 듯 가벼운 걸음과 자신이 말하고도 깔깔거리며 밝게 웃는 얼굴은 아버지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기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하룬이 말했다.
“난 게임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접속해야 해. 미안하지만 내일 배웅은 못 하겠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운해하는 나인을 보니 뭉클한 감정이 솟았다.
‘아무래도 내가 벨 때문에 사람 정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네.’
“대신 다음에는 내가 마을로 찾아갈게.”
“언제? 언제요?”
그가 직접 방문한다고 하니 대번에 목소리가 밝아진다.
“가기 전에 연락할게. 어차피 너도 게임 때문에 마을 밖에 있을 거 아니야.”
“호호. 그래요. 꼭 방문해야 해요.”
“알았어. 약속할게.”
이제 현실에서도 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한동안은 게임을 접을 생각이니 전투력 향상을 위해서도 그렇고 끝까지 찜찜한 양부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사이언스 마을에 잠시 들렀다가 영흥 마을에 들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기지로 돌아온 하룬은 로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태가사남매에게 따로 명령을 내려 나인과 영흥 마을 전사들이 안전하게 떠나는 것을 확인하라 이르고는 비욘드에 접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