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슬픔 없는 이별 (121/278)

《슬픔 없는 이별》

 휘이이잉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의 이성을 깨웠다. 이제 전투는 끝났지만 사람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누군가 나직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휴우."

 데브론은 한숨과 함께 참혹한 전장에서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일그러진 얼굴의 하룬이 있었다.

 '정말 저 아이에게는 할 말이 없군.'

 꼴에 기사라고 기사전을 신청해 다 이긴 전투를 이렇게 망쳐버린 테베 백작이 살아 있었다면 단칼에 목을 벴을 것이다. 데브론 역시 기사로 성장하긴 했지만 도망자 신세를 경험했기에 명예욕에 사로잡힌 테베 백작이 너무 한심했다.

 데브론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낀 하룬은 부글거리며 끓는 마음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티노 부대장, 다른 용병들과 함께 전장을 정리하세요."

 "네, 대장."

 하룬의 심기가 어지러운 것을 알아채고 티노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자, 모두 전장을 정리합시다. 마법사분들은 구덩이를 파 주십시오. 기사들의 시신은 한쪽에 따로 모으고 적들은 방어구와 무기를 비롯해 전리품을 챙긴 후 구덩이로 던져 넣으십시오."

 다들 경험이 많은 용병들인지라 전장 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용병마법사들은 힘을 합쳐 거대한 구덩이를 팠고, 후크란 기사단원들은 테베 백작을 비롯한 기사들의 시신을 따로 보아 유품을 정리했다. 용병들은 익숙한 솜씨로 삭풍 기병대원들의 방어구와 무기, 전투마 등 보급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리품은 단장님들이 분배하시지요."

 하룬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피엘과 프레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럴까?"

 "그래, 그건 우리가 맡지요."

 원래 전투에서 발생하는 전리품은 전투에 참여한 자들이 나눠갖는 법이다. 비록 죽은 이가 사용하던 물건이지만 이 비욘드 세상에서는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무구 자체가 워낙 비싼 탓이다.

 피엘과 프레스 그리고 나바스론은 티노를 비롯한 용병들의 도움을 받아 전리품을 종류별로 나누어 분배했다. 티노는 돌풍에 배정된 무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전용 방어구 덕분에 방어구를 비롯한 무구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피엘이 은밀하게 챙겨준 중급 마나석 세 개와 식량이 담겨있는 마법 배낭 두개는 거절하지 않았다.

 일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데브론이 후크란 기사단원들과 친위 기사단원들을 동원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별다른 고구가 없는 상황이라 하룬은 용병 마법사들과 이방인 마법사들에게 그 작업을 돕도록 했다.

 모두의 노력으로 전투를 망친 아르망 기사단은 한명씩 땅속에 누워 영면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진하고 어두운 침묵이 오랫동안 흐른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전장을 떠날 수 있었고,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세 시간 정도를 걸은 후에 만난 작은 숲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전날 까지만 해도 모두 가진 식량을 꺼내 스튜를 비롯한 음식까지 해 먹었지만 이날은 죽어간 이들을 애도하기 위해 마른 빵이나 육포로 저녁을 해결하고 일찍 휴식에 들어갔다.

 하룬은 착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정찰을 자원해서 먼 곳까지 나갔다 왔다. 메신저 워킹 스킬에 전념하는 사이 그나마 기분이 나아진 상태로 돌아오니 대원들이 모닥불 주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니가 건네준 육포와 빵으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사이 대원들은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연거푸 참혹한 전투를 치른 후유증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헤니가 말을 꺼낸 것이다.

 "황녀 일행이 자손심이 많이 상한 것 같아요."

 하룬은 그녀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도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이곳으로 이동하는 내내 그들의 태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차가웠다. 잘한 것도 없으면서 은연중에 적의를 드러내는 그들이 너무 불편했다.

 "저희들이 왜 자존심이 상해? 잘한 게 뭐가 있다고!"

 괄괄한 성격의 방커가 속이 뒤틀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자신들의 잘못을, 우리도 아니고 적의 수장에게 까발렸으니 면목도 없고 자존심도 상했겠지. 이런 상황이니 어쩌면 따로 가자고 할지도 모르겠어."

 헤니의 말에 겨루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왜? 우리랑 같이 있으면 더 안전할 텐데."

 "아르망 기사단이 멍청한 짓을 해서 황녀 진영의 위치를 완전히 흔들어 버렸거든. 이제 용병들과 이방인들이 더 이상 동료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눈치챘겠지."

 "설마 그렇다고 이 위험한 상황에 따로 움직이겠다고 할까."

 겨루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꺼야. 여기 비욘드의 귀족들이나 기사들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너무 강하더라고. 우리 세상의 노블들보다 더 심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사는 것보다 죽어서 명예를 지키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작자들이 수두룩하더라고."

 "미친! 지킬 며예가 도대체 뭔데? 나 같으면 쪽팔려서 숨어버리고 싶겠다.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린다고? 언제 어디서 다크 엘프들이나 북부군에 공격받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겨루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하룬 역시 헤니의 말에 동감이었다. 둘러보니 방커와 마리를 빼고는 다들 헤니의 말에 동감하는 얼굴이다.

 "헤니의 말이 맞다. 테론 제국의 귀족들과 기사들은 오랫동안 틀에 박힌 사고에 갇혀 살아왔어. 황실이나 고위 귀족가에서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를 조장했지. 휴우! 이제 생존이 최우선인 난세가 다가왔지만 아직도 그 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 혈통이나 명예보다는 능력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시대가 왔지만 귀족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고루한 마음 때문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는 거지."

 묵직한 딜런의 말이 뒤따랐다. 귀족 신분에 용병이 된 그와 같은 파격적인 사고를 가진 귀족은 거의 없는 현실이었다.

 "그건 딜런의 말이 맞아 그런 고루한 생각을 가진 것은 귀족들만이 아니라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네. 이제 제국은 해체되고 수많은 강자들이 눈치를 보며 본격적으로 세를 일으킬 텐데 귀족들은 물론이고 마탑과 머법사들도 아직 구태의연하게 권위 의식에 젖어 변화에 적응하기보다는 기득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이런 변혁의 시기일수록 적극적인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지."

 타니엘라 마법사의 말에는 그간 마탑에서 생활하며 느낀 소회하 담겨있었다.

 "대장!"

 딜런이 굳은 얼굴로 그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딜런 경."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 막내 황녀 일행과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네. 설사 그들이 원한다고 해도 더는 동행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들은 틀림없이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걸세.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도 기사 혹은 귀족이라는 체면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 돌풍 용병대를 비롯한 용병들이 적극적으로 삭풍 기병대와 싸우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있을 걸세."

 "그럴 리가요. 전투마를 탄 기병대를 우리더러 어떻게 상대하라고. 우리 중에 제대로 된 마상 전투 경험을 가진 것은 딜런 경밖에 없는데 설마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마리가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소리를 높여 말했지만 딜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마리. 이 당의 귀족들과 기사들, 아니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란다. 자신들이 잘못을 했다고 해도 아르망 기사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동안 우리가 돕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거지."

 "말이 안 되잖아요. 후크란 기사단이나 친위 기사단마저 나서지 않았는데 왜 우리를 원망해요?"

 마리를 비롯한 방커와 겨루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딜런의 말에 동의하는 듯 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떻게든 잘못된 판단에 대한 책임을 나눠서 지고싶은거지. 기발한 전술로 몇 번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의뢰를 성공시킨 하룬 대장과 우리 돌풍을 비롯한 용병들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냥 방관했다는 원망을 해서나마 그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의 심리란다."

 오래간만에 말을 길게하는 딜런의 얼굴은 처연했따. 그는 여기까지 오는동안 브리엘라 황녀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고 들었따. 명색이 귀족이었지만 용병 신분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이나 기사들은 그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말도 안됩니다. 다 잡은 전투의 승기를 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에 더해 자멸한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원망합니까? 적의 괴수마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룬 대장과 우리가 뭐 신이라도 된답니까? 대장 계획대로 했으면 희생자도 거의 없이 적을 괴멸시킬 수 있었는데 일을 그 꼴롤 만들어 놓고 왜 우리를 원망합니까?"

 방커가 벌컥 성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평소에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알고 보니 굉장히 다혈질이었다.

 "그건 방커 말이 맞아요. 잘못했으면 외곽에 배치되었던 마법사들까지 도륙이 날 뻔했습니다. 그리고 정규 기사단에 해당하는 기병대를 우리 같은 용병들에게 상대하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밖에는 안됩니다.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우리를 원망해서는 안 되지요."

 다른 대원들도 사실 머리로는 딜런의 말을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용남할 수 없었다.

 삼백 명으로 구성된 정규 기사단이 말을 타고 전투에 돌입하면 보명은 삼천이 넘어도 그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 물론 방패나 창을 비롯해 질 좋은 무구로 무장하고 끝까지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모르지만 보통의 경우 기병은 열의 보병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갖추었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더구나 아르망 기사단의 테베 백작은 그 어느 때보다 지휘권이 강화되어야 할 전투 시에 브리엘라 전하로부터 지휘권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대장의 재가도 없이 함부로 기사단을 움직였습니다. 아무리 기사단의 명예가 중요하다고 해도 브리엘라 전하의 안전이 최우선이니만큼 함부로 움직이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자는 상대 단장의 말대로 대장의 공을 빼앗으려고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명예를 아는 귀족이자 기사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입니다. 그가 한 행동은 자칫 황녀 전하의 안전까지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점점 더 격앙되어 가는 겨루의 말을 딜런이 손을 들어 끊었다.

 "맞아! 대원들이 한 말은 추호도 틀림이 없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특히 인간들은 더하지 그중에서도 권력이나 명예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무리는 일반인들도 상식으로 아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다.

 "휴우."

 하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딜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집을 나와 유니온 정부에서 주는 임시직 일을 하면서도 그런 경우를 경험했다. 겨우 다섯 명을 대표하는 작업장조차 쥐꼬리보다 못한 권한을 내세우며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고 판단 내리는 것을 보고 겪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요?"

 헤니가 걱정되는지 따라 일어났다.

 "아무래도 데브론 님을 만나 봐야겠어."

 일단 부딪쳐야 한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시간을 끌어서 좋은 게 없다. 비록 오래 살진 않았지만 하룬은 망설이다가 때를 놓치는 것보다 부딪혀 해결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대원들은 고요의 땅을 벗어냐 향후 우리의 거취를 의논해 주십시오."

 하룬은 이곳을 벗어나면 지금처럼 게임을 즐길 생각이 없었다. 부족하긴 하지만 비욘드 게임을 통해 원하던 것들은 대부분 이루었다. 이제는 현실 생활에 좀 더 신결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겠습니다, 대장.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니 먼저 이야기 하고 있겠습니다."

 티노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제 티노는 예전의 그 소심하고 노예근성이 수시로 드러나던 사내가 아니었다. 도네이스와 부부의 연을 맺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은 그는 어느새 부드럽지만 은근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딜런이나 타니엘라 같은 강자들을 끌어안을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룬은 브리엘라 황녀 진영이 묵고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 사이에 있는 이방인들의 막사는 조용했다. 아직 어둠이 다 내리지도 않았지만 대부분 로그아웃을 한 모양이다. 접속 제한 시간이 다 된 이들도 있겠지만 너무나 생생하고 처참한 전투를 연속해서 겪었으니 충경이 컸을 것이다.

 용병들의 막사는 그래도 나름 활기가 있었다. 술은 없지만 모닥불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용병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들은 하룬이 지나가면 손을 흔들거나 몸을 일으켜 알은체를 했다.

 '그래도 용병들이라서 그런지 나를 동료로 인정해 주는 구나'

 엘저를 비롯해 부상을 입은 용병들이 많아 걱정이었다. 분지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어깨와 옆구리에 큰 부상을 입은 엘저는  비록 포션까지 사용했지만 강행군을 하는 상황이라 회복이 더뎠다.

 사실 삭풍 기병대와 전면전을 피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부상당한 용병들이 많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 작전 수행 과정과 도피 과정에서 많은 용병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것은 물론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해서 찾아갔을 떄 그녀는 포션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부상이 일상사인 용병들인지라 아버지인 피엘조차 별로 걱정하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하룬은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 가슴이 짠했다.

 용병들의 막사를 지나가자 가장 안쪽에서 마갓를 마련한 브리엘라 황녀 진영이 나왔다. 그들은 마치 용병이나 이방인들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듯 자체적으로 불침번을 운영하는 터라 몇 명의 친위 기사들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서서 주변을 신경쓰고 있었따.

 "무슨 일이오?"

 경계를 서던 기사가 하룬을 발견하고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말과 태도에서 약한 적의가 느껴졌다.

 '이걸 그냥 날려 버려? '

 어쨌든 아직까지 일행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하룬인지라 자신을 전혀 모르는 척하는 기사의 행태에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황녀와 데브론의 체면을 생각해서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꾹 눌렀다.

 "황녀 전하를 뵈러 왔소."

 "전하께서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소. 나시에 오시오. 계통을 통해서 말이오."

 역시나 일부로 그를 모르는 척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룬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기사는 찔끔하는 눈치였지만 이를 악물고 하룬의 눈빛을 견뎌 냈다.

 "그럼 데브론 님을 뵙고 싶소."

 "그분도 잠자리에 드셨소.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내일 아침에나 찾아오시오 그분 역시 제대로 계통을 밟지 않으면 만날 수 없을 거요."

 하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열불이 치밀어 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적어도 이 기사와 주변에 있는 기사들은 하룬을 이 무리의 지휘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룬은 애써 화를 삭이며 눈을 떴다.

 "그대는 나를 모르는가?"

 하룬의 목소리가 마치 잘 벼린 검날처럼 변하자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동료들의 기척을 느끼며 입매가 한쪽으로 비틀렸다.

 "하룬이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으로 알고 있소. 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갈!"

 "흐윽!"

 은근히 하룬을 막아서는 모양새를 취하던 기사 넷이 기함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하룬의 폭발적인 기세에 눌린 그들의 몸은 열병에 걸린 것처럼 벌벌 떨렸다.

 하룬의 두 눈에서 시뻘건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대들도 전투의 와중에 내 지휘권을 항명하고 다 잡은 승기를 놓치게 만든 아르망 기사단처럼 일개 용병이기에 내 지휘를 받을 수 없다고 몸으로 항변하는 것인가?"

 "……."

 기사들은 감히 하룬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의 투기에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하룬의 기세는 마치 샤벨 타이거처럼 눈빛만으로 그들의 심혼을 제압했던 것이다. 이 순간 하룬은 소드 마스터에 비견될 정도의 강렬한 기세를 가진 강자였다.

 "황녀 전하께서 직접 임시 지휘자로 임명한 내게 항명한다는 의미를 모르고 있는가? 기사의 덕목이 뭔가? 당신들은 충성을 맹세한 주군인 브리엘라 전하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고 있다. 내 능력이나 출신이 중요한가? 그게 황녀께서 직접 내린 명령에 불복종할 정도의 사유인가? 황녀 전하와 데브론 경이 당신들보다 판단력이 떨어져서 나를 지휘자로 인정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명의 기사는 아무른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점점 더 높아지는 하룬의 목소리에 반해 네 기사는 물론이고 기사들의 숙영지 전체가 고요 속에 가라앉았다. 하룬의 고성에도 아무도 나와 보는 이는 없었다.

 "황녀 전하께서 직접 지휘권을 인정한 나를 모른 척하는 것은 물론 출입마저 막는다는 것은 그대들의 상급자들이 내린 명령이겠지? 그대들의 생각뿐이라면 벌써 누군가 나와 그대들을 꾸짖었겠지 정녕 그대들이 브리엘라 전하를 모시고 대업을 이룰 생각이 있기는 한 건가?"

 심화가 폭발한 하룬의 목소리에는 마나가 담겨 숙영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설사 자던 이들이라도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직도 숙영지는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 잠겨있었다.

 "길을 열어라! 더 이상 길을 막는다면 정당한 지휘권을 무시한 항명죄와 주군이신 브리엘라 황녀 전하에 대한 불충죄로 베어 버리겠다."

 더 이상 존중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 동안은 브리엘라 황녀와 데브론 때문에 기사들을 존중해 주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하룬의 굳은 목소리에 네 기사가 화들짝 놀라 여픙로 물러났다. 그들로서는 살인적인 기세는 물론 정당한 명분까지 가지고 있는 하룬을 더 이상 막을 만한 간담이 없었다.

 '놀 좆 같은 새끼들!'

 하룬이 찾아오면 개무시하라고 명령했던 상급자들은 물론 그 윗선에 있는 귀족 나부랭이들은 틀림없이 이 모든  것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릴 것이다. 다른 때라면 상급자나 다른 귀족들이 나서서 하룬을 맞았을 테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네 기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브리엘라 황녀의 막사 앞에 도착하자마자 홀이 막사 휘장을 젖히고 그를 맞이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보아 이미 모든 상황을 보고 들은 것 같았다. 입구 쪽에 서 있는 것을 보니 나올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던 듯했다.

 "미안해요."

 막 그녀를 스쳐 안으로 들어갈 때 들려온 목소리에서는 미안한 감정이 올올히 풀려나오고 있었다.

 막사 안에는 몇사람이 더 있었다. 세반 자작과 훌리오 남작 그리고 친위 기사단의 핵심 인사로 소개받았지만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 네 귀족이 무장한 상태로 한쪽에 앉아 있었다.

 막사로 들어서는 하룬에게 목례로 세반 자작과 훌리오 남작은 사나운 눈빛으로 네명의 귀족을 쏘아보았다. 보아하니 하룬을 대하는 기사들의 행동으로 내부적 갈등이 있는 것 같았다.

 후크란 기사단과, 데브론이 돌아다니며 영입한 기사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험준한 환경에서 수련해 왔기에 기사들 고유의 특권 의식이 없는 후크란 기사단과 귀족가의 기사들 사이에는 좁히기 힘든 사고의 차이가 있었다.

 막사 안 분위기를 통해 그런 내막을 읽은 하룬은 화가 많이 풀렸다.

 "하룬 대장, 어서 오세요."

 브리엘라 황녀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듯 그녀의 얼굴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전에 없이 강렬한 기세와 주변 귀족의 침중한 얼굴로 보아 이 막사 안에서도 바깥처럼 한바탕 실랑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하룬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주변 귀족들의 눈이 커졌지만 그런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룬에게 사과했다.

 "모든 것이 다 나의 불찰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일찌감치 포기를 했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부족한 능력에도 무리를 하다 보니 대장에게까지 못 볼 꼴을 보게 만들었군요."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처연한 말에 하룬은 가슴이 아렸다. 자신의 인생을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자의 답답하고 막막한 절망이 이제 막 성년으로 향하는 소녀를 진한 어둠의 수렁으로 빠트린 것이다.

 격노한 상태였지만 하룬은 일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창 달콤하고 행복한 꿈을 꾸어야 하는 소녀가 감내할 상황이 아니었다. 황녀가 태어난 브리엘라가 너무 안타깝고 불쌍했다.

 그때 막사 밖에서 데브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오. 황녀. 이 모든 것이 다 내 탓이오."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이 막사 휘장을 젖히고 나타났는데, 이글거리는 눈빛은 황녀 주위에 배석한 귀족들을 향하고 있었다. 서슬 퍼런 그 눈빛에 귀족들은 더욱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닙니다. 외숙부!"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데브론의 말에 하룬과 브리엘라 그리고 홀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데브론이 아니었더라도 적당한 대상을 찾지 못한 군소 귀족들은 그녀를 골든 배틀의 장으로 몰았을 것이다.

 고위 귀족이라면 당연히 황위를 노리고 골든 배틀에 뛰어들겠지만 중하급 귀족들 중 일부는 가문의 이름이나 명예를 위해 실패할 것이 분명한데도 참여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골든 배틀 과정에서 이름을 날린 기사들이나 귀족들이 꽤 많았고, 그들은 결국 황실의 부름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늦ㄴ 브리엘라는 골든 배틀이 진행되는 가운데 개인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도구일 뿐이었다.

 "일단 앉으세요."

 브리엘라 황녀의 말에 하룬과 데브론은 바닥에 깔린 카펫에 앉았다.

 "오늘 정말 수고가 많았어요."

 홀에게 찻잔을 건네받던 하룬은 황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누구도 그렇게 기발한 방법으로 제국에서도 그 무력으로 소문난 삭풍의 기병대를 상대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정말 감탄했어요. 테베 백작과 아르망 기사단이 멋대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브리엘라 황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입맛이 썼다. 그렇다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그녀를 지지해 온 테베 백작과 아르망 기사단에 나쁜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미 지나 버린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하룬은 치밀어 올랐던 노화를 가라앉혔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맞는 말이야 하룬 대장의 말대로 이미 벌어진 일이지. 하지만 사람이라면 잘못한 일을 통해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하네. 그래서 더이상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지. 그런데……."

 데브론 역시 황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오늘 일을 두고 우리끼리 회의를 했네."

 하룬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데브론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역시…….

 '그래서 나를 무시한 거군. 이제 볼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이번 전투를 통해 그들이 하룬을 중심으로 하는 용병들과 이방인의 연합 세력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그저 기사들의 하부 조직이나 치다꺼리를 해 줄 전력으로 생각했던 용병들은 하룬의 존재로 위상이 올라가는 반면 그 들의 경우에는 아르망 기사단의 치명적인 실수로 현격하게 낮아지자 불편해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서로에게 더 좋을 수도 있겠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일단 우리가 분리되면 추격자들도 분리될 테고, 오늘보다는 효과적으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네."

 "네. 그 점에 있어서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하룬은 굳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추격자들의 주목표는 자신들이 될테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아르망 기사단이 거의 전멸하는 바람에 브리엘라 황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육백도 채 되지 않으니 추격자들이 어느 쪽을 따를지는 불문가지인 상황이다.

 '그래도 내가 상대하는 것이 더 낫겠지.'

 데브론이 보내는 따뜻하고 자상한 눈빛을 통해 그 역시 하룬이 가진 생각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네가 우리에게 베푼 친절과 배려에 감사하네. 자네가 도와준 덕분에 분지에 도착해서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고, 다른 황자 세력에 밀리지 않을 수 있었네. 더구나 검증의 관에도 들어갈 수 있었고,이렇게 분지 밖으로 탈추하기도 했지. 이런 은혜도 모르면서 귀족입네 하며 모른 척하는 종자들은 사람 새끼라고 할 수가 없지."

 데브론의 거친 말에 세반 자작들을 비롯한 귀족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그들로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르신꼐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귀족들과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룬은 이 자리에서 브리엘라 황녀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데브론에 대한 개인적인 마음 때문에 그들 전체를 배려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예전 같으면 황녀와 자신들을 무시하는 하룬의 말을 트집잡고 나올 만도 한데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따. 이제 모든 상황을 알게 되어 하룬에게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슴에는 하룬을 향한 미안함과 함께 용병따위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불편함 그리고 고귀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용병에게조차 능력이 떨어진다는 자책감 등 여러 가지 마음이 혼재되어 있었다.

 "말을 가져가십시오."

 "정말 그래도 되겠나?"

 "네."

 말을 타지 못하는 하룬으로서는 당연한 제안이었지만 데브론을 비롯해 막사 안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읻번 전투에서 아무런 공도 없고 그동안 보급을 비롯해 여러가지로 하룬에게 도움을 받아 차마 ㅓ내ㅣ 못했지만 간절하게 바라던 ㅓㅅ이바로 전투마에 관한 것이었다.

 안그래도 따로 길을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는 신분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전투마를 빼앗을 생각도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용병들과 이방인들 때문에 포기하고 만 그들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선물이었던 것이다.

 다크 엘프들과 북부 군단의 추격을 피해 안전하게 광산지대로 가야하는 그들로서는 빠른 이동 수단이 무엇보다도 필요했고,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기사들인 만큼 전투마의 존재는 굉장히 중요했다.

 "고맙네. 계속 자네와 돌풍 용병대에 신세만 지는군."

 "아닙니다."

 하룬은 그렇게 대답하며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운 브리엘라 황녀를 보았다. 지치고 힘든 표졍이 역력했다. 육체의 피로와 고단함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책감과, 상황에 질질 끌려가는 것 때문일 것이다.

 하룬의 시선이 향하자 황녀는 힘든 가운데서도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역시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환하지는 못했다.

 "일주일 정도의 여정을 생각해서 식량이나 건초같은 물건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부디 안전하게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하룬 대장. 너무 많이 신세를 지고도 미안한 짓만 해서 마음이 불편하군요. 언젠가 제게 힘이 생기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께요."

 역시 심성이 착한 브리엘라 황녀다. 1황자처럼 넓은 흉금과 지도력이나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1황녀처럼 지혜롭지도 못하며, 7황자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그저 자신을 추종하는 귀족들과 기사들의 충성이라는 족쇄에 묶여 아무것도 자의로 행동하지 못하는 불쌍한 황녀가 하룬은 내심 안타까웠다.

 "정말 미안해요."

 막사를 나오자 재빨리 따라 나온 홀이속삭이듯 말했다.

 주변 상황 때문에 마음껏 행동하지 못하는 그녀가 불쌍했다. 단체에 속한 터라 구성원 대부분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표출할 수 없으며, 잘못한 것이 있으면 같이 욕을 얻어먹는 조직의 생리를 그녀를 통해 엿볼 수 있었따.

 '이래서 조직이 싫어!'

 하룬은 앞으로 조직이나 단체에 속할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 조직을 이끄는 무리가 될 것이다. 그럴 능력이 안된다면 차라리 영원히 솔로로 남을 작정이었다.

 "괜찮아요. 홀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홀이 브리엘라 전하와 데브론 님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마요."

 하룬의 다정한 말에 마음이 놓이는지 살포시 미소짓는 모습이 오래전 보았던 그림을 닮았다. 종말 시대에 존재했던 과일 중 배꽃이라던가? 순백의 청순함과 처연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던 그 꽃잎을 닮았다.

 순간적으로 예전 감정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을 뻔했던 하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내 그의 손은 마음이 시키는 곳이 아니라 머리가 시키는 곳으로 가서 준비했던 주머니 두 개를 꺼냈다.

 "이건 데브론 님에게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홀이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 쓰도록 하세요. 재수4인방도 틈틈이 챙겨 주면 좋겠습니다."

 묵직한 주머니 두 개를 받은 홀이 주둥이를 풀어 보았다.

 "허억! 이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머니 안에서 뒤섞인 100골드짜리 골덴화와 보석들이었다. 그 무게를 추정하건데 적어도 몇십만 골드는 될 것 같았다.

 하룬이 자신을 챙기는 마음에 감격한 홀의 눈에 금방 눈물 방울이 맺혔다. 해 준 것이라곤 배신밖에 없는데 하룬은 계속 그들을 돕고 있다.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

 "정말 고마워요."

 안그래도 테베 백작이 죽어버리는 ㅁ바람에 자금을 조달할 방도가 없어 데브론과 함께 고민하던 홀이었다. 하룬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 후크란 기사단이 머물던 요새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아! 비어 있어요."

 "내가 써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그럼 그곳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또 다른 것을 두 개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마나 통신구니까 하나는 데브론 님 드리고, 다른 하나는 홀이 가지고 있다가 위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상급 마나석을 사용하면 후크란까지 통신이 가능할 겁니다.

 인벤토리를 뒤져 상급 마나석 하나를 꺼내 주고 작동 방법도 가르쳐 주었따. 홀은 아무 말 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나 가슴 아프고 아쉽게 종(終)을 고했다고 생각한 인연이었지만 그 끈이 아직 끊어지지 앟았음을 확인한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꽉 차올랐다. 하룬은 자신의 근거지가 후크란 기사단이 머물던 요새가 될 것이며 언제라도 그녀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일단은 약초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가 인원이 많아지면 후크란으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나중에라도 갈 곳이 없으면 그곳으로 와요. 용병 생활도 꽤 할 만해요."

 "후훗. 알아요. 다른 용병대라면 모르지만 돌풍 용병대라면 다르겠지요. 그러니까 정말 용병이 되고 싶네요."

 하룬의 돌풍 용병대와 같이 생활해 본 홀은 이전까지 품고 있던 용병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가족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배려해 주는 것도 너무 좋았고 같이 발전해 가는 과정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생활이라면 나 역시 딜런 자작처럼 용병이 되지 못할 것도 없지.'

 황녀와 데브론 경은 이번에 광산 지대로 가면 향후 거취를 확실하게 결정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상황이다. 그녀가 예상하는 대로라면 브리엘라 황녀는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고 골든 배틀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다같이 가는 거야. 후크란 기사단 실력이면 돌풍 용병대에 들어가는 것은 좀 부족할지 모르지만 더 열심히 수련하면 되겠지.'

 어차피 기사로서는 소양이 부족해 동료 기사들로부터도 경원시당하는 후크란 기사단이다. 데브론 경이나 아버지 세반 자작도 허례허식에 물든 귀족들과 기사들의 만남에 진저리를 치고 있으니 황녀만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면 새로운 생활이 열릴 것이다.

 "꼭 갈게요. 데브론 님도, 브리엘라 님도 하룬 대장을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재수 4인방도요."

 "당신은요?"

 하룬은 일순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며 수줍어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등을 보였다.

 '저도 당연히 당신이 보고 싶지요. 지금 이렇게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립답니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홀의 대답이 그의 등 뒤를 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