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삭풍의 기병대 (120/278)
  • 《삭풍의 기병대》

     셀트라보 자작가의 삼남으로, 아르망 기사단의 중견인 델보는 기분이 좋았다.

     이 험한 곳을 말도 없이 왔기 때문에 전투마를 타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더구나 기병창은 기사 아카데미 시절에 사용했던 것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흐흐흐. 북방 야만인들을 상대하며 기사 서임을 받은 평민 출신의 네놈들에게 오늘 진정한 귀족 기사의 힘을 보여주지.’

     원래 북부 군단에 배속된 상당수의 기사들은 평민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힘 있고 배경이 있는 귀족 자제들은 일부러 험하고 위험한 전장으로 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일단 전장으로 배속이 되면 10년 복부는 기본이다. 그렇기에 야전 사령관들은 군단에서 5년 이상 복무한 아카데미 출신의 지휘관들을 기사로 서임시키곤 했다.

     귀족 출신의 기사들은 그런 자들을 전장 기사라고 불렀는데 군부가 오랫동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일부러가 아닌 이상 서로의 실력을 확인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귀족 출신의 기사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전장 기사들을 우습게 여겼다.

     “타앗!”

     델보는 힘찬 기합과 함께 전투마의 옆구리를 허벅지로 조였다.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장 기사 하나가 무식한 기병도를 쥐고 그의 출발과 함께 전투마를 출발시켰다.

     타닥타닥! 따그닥! 따그닥!

     속보를 시작해 빠르게 속력을 높였다. 오랜 훈련으로 빠르게 전투 상황에 맞는 투기를 일으킨 전투마가 갈기를 휘날리며 달렸다.

     델보는 옆구리에 낀 기병창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상대 역시 왼손으로 고삐를 쥔 채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기병도를 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부딪쳤다. 말의 속력이 워낙 빨랐던 것이다.

     까앙!

     “크윽!”

     충돌과 함께 델보가 신음과 함께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상대 기사가 기병창이 가슴을 찌르기 일보 직전에 마치 묘기를 부리듯 말의 옆구리로 상체를 뚝 떨어뜨렸고, 자신은 기병도에 옆구리를 강하게 타격당했던 것이다.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것이 아니었기에 타격의 후유증은 더욱 컸다. 말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등짝은 물론이고 내장이 심하게 흔들린 탓에 선홍색 피가 입을 통해 새어나왔지만 델보는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직도 앞이 뿌옇게 보였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하던 그는 비명을 지르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춤거렸다.

     “아, 안 돼!”

     말 머리를 돌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북부 군단의 기사는 그를 향해 거대한 기병도를 휘둘러 왔던 것이다.

     파악!

     그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이미 난장판이 된 곳으로 떨어진 델보의 머리통은 몇 번을 굴러 마법사들이 파 놓은 구덩이 속으로 빠졌다.

     “저런!”

     “이번엔 나다!”

     델보와 친하게 지내던 기사 둘이 한꺼번에 나섰다. 상대 기사는 둘이 말을 몰아 달려오는데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상대 진영에서도 다른 기사들이 더 출전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이런 살벌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했기에 아르망 백작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까앙! 깡!

     역시 기병창을 들고 달려간 두 기사는 달려오던 속력과 본신의 힘이 더해졌지만 한 번의 격돌에 기병창을 놓치고 델보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달려간 거리가 짧아서인지 아니면 둘이서 한 번에 상대를 해서인지 몰라도 충돌 시 꽤 멀리까지 날아간 델보와 달리 근처에 떨어진 두 사람은 황급히 검대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멀리서는 잘 몰랐지만 상대 기사의 기병도 날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근 2미터가 넘는 길이에 날의 폭이 팔뚝 길이가 넘을 것 같은 기병도는 통짜 강철로 제작된 것이었고, 마나의 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날에만 마나를 주입한 상태였다.

     이런 무지막지한 기병도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날에만 마나를 주입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상……급?”

     “빌어먹을! 야야앗!”

     두 기사는 상대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악을 쓰며 검을 날렸다.

     깨앵! 째앵!

     단 한 번의 격돌이었다. 거대한 기병도와 부딪친 순간 두 기사의 검은 강렬한 힘에 날아갔고, 잔뜩 힘을 주었던 팔은 보기 싫게 뒤틀려 버렸다.

     “가랏! 이 미꾸라지 같은 멍청이들!”

     기사의 기병도가 몸을 돌려 도망치려던 두 기사의 몸을 한 번에 베어 버렸다. 플레이트 아머는 아니지만 상당히 질이 좋은 방어구를 입은 두 사람의 허리가 한 번의 칼질에 두 동강이 나고 만 것이다.

     “이, 이런!”

     “이럴 수가!”

     삽시간에 사기가 떨어졌다. 테베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과 기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았다. 끓어오르는 투기에 자신의 차례라고 외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기사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기마 삼백여 기가 그들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강렬한 살기가 대기를 타고 사람들의 피부를 통해 들어왔다.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독하고 강한 살의는 몸의 근육을 위축시켰고,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치 함정에 걸린 동물처럼 처연한 꼴이었던 그들이 한순간에 자신들을 도륙할 지옥의 사자로 변해버린 것이다.

     “대, 대응해라! 대응해!”

     테베 백작의 뒤늦은 명령에 기사들이 전투마를 출발시켰지만 상대편은 이미 수십 미터를 날듯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같은 힘이라면 빠른 속도에 편승한 쪽이 유리한 법이다. 그걸 노렸는지 북부 군단의 최정예 부대인 삭풍의 기병대는 세 줄로 열을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꽈앙!

     “크아악!”

     “카악!”

     채 20미터도 달려 나가지 못한 아르망 기사단은 한 번의 격돌로 전열의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제대로 된 대열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뻗친 머리칼처럼 제멋대로 달려 나간 기사들은 선두 열의 중병기에 자신의 무기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그 이후는 지옥이었다. 땅으로 떨어진 자들은 육중한 무게의 말발굽에 짓밟혀 곤죽이 되었고, 적들의 선두는 각자 자신이 지닌 철퇴나 기병도 혹은 사슬이 달린 철구를 날려 제대로 기병창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아르망 기사들을 연방 후려쳤다.

     “이이익!”

     “각하, 어서 후퇴해야 합니다.”

     “으으으…….”

     기사단 후미에서 지휘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테베 백작령과 귀족들은 아르망 기사들을 살육하면서 파죽지세로 다가오는 상대의 파도에 감히 맞상대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채 몸을 돌리기도 전 다른 전투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장한 전투마를 타고 시꺼먼 가죽 방어구를 걸친 기사가 일직선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거대한 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다른 손으로는 기병창을 잡아채거나 쳐 내는 그의 기세는 실로 대단해서 그의 정면에 위치한 기사들과 전투마들이 마치 낙엽처럼 튕겨 났다.

     “이노옴! 내가 바로 삭풍의 기병대 파탄이다.”

     처절한 비명과 거친 투레질 소리 그리고 살기에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의 고함 소리는 사람들의 귀에 쏙 들어왔다.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흐윽! 전장의 살인마닷!”

     “도, 도망쳐야 해!”

     당장 귀족들은 말 머리를 돌려 멀찌감치 이동한 사람들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파탄 나후!

     실로 두려운 이름이었다. 평민 출신의 일개 병사에서 시작해 처절한 실전을 통해 검력을 키워 온 파탄은 사십 대 중반에 익스퍼트 최상급이 된 전설적인 전사로, 그의 칼에 떨어진 북방 야만인의 목이 수천, 아니 수만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북방 야만인을 상대로 쌓은 전공은 작위를 받아도 모자랄 정도지만 귀족들에게 그의 이름은 지옥의 사신처럼 여겨졌다. 그는 성격이 워낙 드세고 잔인한 데다 귀족 출신의 기사들을 교묘하게 자극해 일기투를 벌이게 만들었다.

     파탄은 어린 시절 영주의 손에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그래서 귀족이라면 치를 떠는 그는 얼치기 애송이 귀족 기사들은 물론이고 몇 번이나 파견했던 대규모 어쌔신들을 전멸시킨 사내였다.

     “다 쓸어버렷!”

     살기가 등등한 그의 고함에 안 그래도 형편 무인지경으로 밀리던 아르망 기사들은 더욱 빠르게 낙마해 말발굽에 밟혀 죽거나 아니면 무시무시한 중병기에 온몸이 짓뭉개져 죽어가고 있었다.

     처절하게 죽어 가는 수하들을 보면서 망설이던 테베 백작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무표정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하룬을 보더니 와락 주먹을 쥐었다.

     ‘빌어먹을!’

     명예로운 일기투 운운하던 자신이 얼마나 정신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알았지만 체면상 죽어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차라리 명예롭게 상대 기사와 싸우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그는 이미 꼬리를 안으로 집어넣은 말 고삐에 힘을 주어 상대를 향해 나아갔다.

     “내가 바로 테베다!”

     “크하하핫! 꽤 높은 놈이군. 잘됐다!”

     파탄은 생각지도 못한 거물 급 귀족이 자신을 상대하겠다고 나서자 호기롭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까앙! 채앵!

     익스퍼트 중급의 끝에 머물러 있는 테베 백작의 검은 오러에 휩싸여 그 끝에 오러 소드가 튀어나와 있었지만 단지 마나만 주입한 파탄의 대검을 부러뜨리지 못했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오크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북부 초원의 야만인들을 오랫동안 상대하는 가운데 효율적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그는 대검에 마나를 주입해 강도에 예기를 높이는 것만으로 오러 소드를 효과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까앙!

     휘청!

     중병기를 상대할 때는 같은 힘이나 무기가 아니면 민첩성을 이용해 빠르게 상대의 빈틈을 공략해야 하지만 한 번 충돌할 때마다 팔이 떨어져 나가는 충격을 받으니 비전 검술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크윽!”

     겨우 몇 합을 겨루었을 뿐인데 테베 백작의 몸은 간신히 말 등에 앉아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고, 머리 하나가 더 큰 파탄의 전투마는 앞발로 그의 전투마를 걷어차고 머리통을 물었다.

     “겨우 이거냐? 북부에서는 그래도 알아준다는 네놈도 허울만 좋은 귀족가의 개새끼에 불과한 거야? 좀 더 힘을 내봐! 하늘이 정한 귀족의 힘을 보여 주란 말이야, 이 씨발 종자야!”

     “이익…… 크윽!”

     테베 백작은 이죽거리며 놀리는 파탄을 향해 이글거리는 광망을 토해 냈지만 눈빛이나 살기에 가득한 마음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위에서 아래로 베어 오는 정직한 베기를 막다가 검을 놓치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실력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어서 낙마한 즉시 바닥을 굴러 일어선 테베 백작의 손에는 자신의 수하 중 한 명이 떨어뜨린 대검을 쥐고 있었다.

     “크크크! 겨우 그거냐? 제법 머리가 좋아 우리를 전멸시키기 일보 직전 상황까지 몰고 간 너희 수장을 저 멀리 후퇴시키고 우리를 맞이한 네놈들의 실력이 겨우 이 정도냔 말이다. 설마 귀족이라는 돼도 않는 허울로 다 잡은 승기를 네 것으로 돌리기 위해 나선 거냐? 그런 거야?”

     테베 백작은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마나를 주입시켰는지 파탄의 목소리는 전장을 넘어 저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자신의 허물을, 자신이 자초한 실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놀리자 두개골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이간질까지 시키는 것을 보면 예사로운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없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용병들과 이방인들의 얼굴에서는 아르망 기사단이 당한 것을 분노하는 기색은 사라졌다.

     “미친 새끼! 감히 어디서 천한 입을 놀리는 것이냐?”

     “크하하하! 과연 귀족이군. 너 같은 멍청한 귀족들 때문에 이 제국이 망한 거야. 능력이 아니라 타고난 신분으로 다른 자들을 노예처럼 취급하는 너희 같은 귀족들 때문에 네 아까운 수하 기사들이 이렇게 도륙당하는 것이고, 피노세 황제 페하께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나선 거란 말이다.”

     “이노옴!”

     테베 백작은 남은 힘을 모두 끌어 올려 바닥을 박찼다. 평소와 달리 팔뚝 길이의 오러 소드가 생성된 그의 대검이 말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노골적으로 조롱하던 파탄을 향해 날아갔다.

     ‘흑!’

     테베 백작이 파탄의 지근거리에 도착하자마자 방금까지 웃음을 터트리던 파탄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전혀 흥분하지 않은 냉정한 눈빛의 한가운데에 비웃음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본 순간 그의 대검을 향해 어느새 시퍼런 오러에 휩싸인 파탄의 검이 마주 날아왔다.

     까앙!

     테베는 격돌과 동시에 마치 새처럼 5미터 정도 날아갔다. 그의 손에는 아직 대검이 쥐여 있었지만 피로 얼룩진 어깨는 부서진 채로 빠져 버렸고, 대검은 부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쿨럭!

     “큭!”

     바닥에 강하게 부딪쳤지만 기를 쓰며 일어난 테베 백작은 시꺼멓게 죽은 피를 토했다. 장기가 강력한 충격의 여파로 자리를 이탈했고, 막강한 상대의 힘에 몇 군데의 혈관이 터져 버렸다.

     “네 목을 가지고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황도로 진군할 것이다, 어리석은 귀족의 표상이여!”

     더 이상 파탄의 이죽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광채를 잃은 테베 백작의 눈에는 여기저기 도륙당하는 수하 기사들의 처절한 모습만이 가득했다. 파탄의 기사 중 몇이 도망치는 귀족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그냥…….’

     하룬에게 전장을 계속 맡겼더라면 수하들이 저렇게 평민 출신의 기사들에게 도륙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때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찾아왔다. 이제야 차갑게 자신을 노려보았던 데브론 경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랏!”

     수하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그의 두 눈이 머리통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았다. 삼백의 아르망 기사단이 동수의 삭풍의 기사단에 도륙당하는 것이다.

     “하룬 대장, 제발! 저들을 살려 줘요!”

     브리엘라 황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사정했지만 하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발 부탁해요, 하룬 대장!”

     결국 홀까지 나서고 말았다. 가뜩이나 세력이 약한 브리엘라 황녀 진영에서 테베 백작은 주축이었고, 그의 기사단은 무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세력이 한 방에 날아가고 있으니 홀도 마음이 급했다.

     “늦었소. 이미 승기를 뺏겨 버리고 말았소.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보호할 정도의 무력밖에 남지 않았소. 만약 이 상태로 저들이 우리까지 넘본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절반은 죽어야 겨우 물리칠 수 있을 거요.”

     하룬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마법사들은 연속된 마법 공격에 지쳐 있었다. 4서클 이상은 몰라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3서클 이하의 마법사들, 특히 이방인들은 마나 포션을 마셔 마나를 회복했지만 더 이상 효과적인 대응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마법사들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후크란 기사단이나 데브론이 키운 친위 기사단은 전투마가 없는 상태였다. 기사들의 무력은 말을 타고 안 타고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게다가 탈출 과정에 플레이트 아머들은 방패로 사용했기 때문에 무장도 허술했다. 이런 상태에서 붙는다면 아르망 기사단의 재판이 되고 말 것이다.

     이미 그런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많았다. 데브론도, 세반 자작이나 다른 귀족들도 모두 하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굳은 얼굴로 참혹한 장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는 해야겠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리던 하룬은 도네이스를 쳐다보았다. 비록 용병들도 끔찍한 장면들을 많이 보았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는 또 다를 것이다. 그녀는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충천한 살기와 발광하는 광기로 가득한 전장이 내뿜는 공포에 질식된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네이스! 유효 사거리 안이다. 돌풍이 어떤 존재인지 나중에라도 기억하게는 해주어야지. 제대로 인사를 해주자고.”

     “맡겨 줘요, 대장.”

     도네이스는 등 뒤에서 근 2미터 길이를 가진 금속 막대를 꺼내들고 오우고 힘줄로 만든 시위를 걸었다. 그녀는 붉은 모루 부족이 만든 철시를 시위에 걸었다. 그녀의 곁에는 티노가 그녀에게 건네줄 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기잉!

     시위가 반원을 그리며 그녀의 뺨에 걸리는 순간은 잠시였다. 철시가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이제 꺼져 가는 전장으로 날아갔다.

     전장까지의 거리는 약 1,000미터. 강탄성궁의 유효 사거리가 900미터인 점을 감안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날린 철시는 격류를 타고 위로 오르는 물고기의 그것처럼 헤엄치며 포물선을 그렸다.

     빠득!

     늑대의 머리뼈에 은도금을 해서 만든 투구를 쓴 한 기사가 파공성을 듣고 시선을 돌렸을 때는 철시가 이미 그의 턱을 꿰뚫고 있었다. 놀랍게도 도네이스의 신력으로 날린 철시는 엘프들의 사거리를 한참이나 상회했던 것이다.

     쐐액! 쐐액!

     열 발의 화살이 연속해서 날아갔다. 시위를 당기는 것만 해도 힘들 것 같았지만 도네이스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고, 잘 발달된 근육은 마음먹은 곳으로 철시를 날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가 노린 상대는 조장급으로 보이는 기사들이었다. 마무리를 하는 일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이들이 곳곳에서 신음을 토할 새도 없이 철시에 안면 부위가 꿰뚫려 죽어가고 있었다.

     까앙!

     단지 한 명만이 용케 철시를 자신의 무기로 막았지만 대신 다른 희생자가 있었다. 그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던 두 기사의 몸이 줄줄이 뚫려 버린 것이다.

     삭풍의 기병대원들은 이제야 저 멀리에서 날아온 화살을 피해 바닥으로 엎드리거나 시체를 방패 삼아 숨기 시작했다.

     하룬은 곁에 서 있던 마리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네이스의 활 솜씨에 고무되어 투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리, 솜씨를 보여줘.”

     “네, 대장.”

     하룬은 아직 그녀의 활 솜씨는 보지 못했다. 하룬이 보는 사이 마리는 그에게 받은 강탄성궁에 철시를 걸었다.

     ‘이 강탄성궁의 유효 사거리가 900미터에 달하니 자신 있어.’

     유효 사거리는 궁사의 역량에 따라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알고 있었다.

     입술을 앙다문 마리의 뺨이 시위에 눌렸다가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쐐액!

     마리가 날린 철시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퍼억!

     막 얼마 남지 않은 아르망 기사들 중 하나를 쫓던 삭풍의 기병대원 한 명의 방어구를 뚫고 들어간 철시는 그의 몸을 끌고 말을 떠나 몇 미터를 더 날아갔다.

     쐐액! 쐐액! 쐐액!

     철시 세 발이 연속해서 날아갔다. 미리 보아 둔 것인지 기사 셋이 가슴이 꿰뚫려 뒤쪽으로 날아갔다. 도네이스에 비하면 손색은 있지만 보는 이에게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 놀라운 솜씨였다.

     그 모습을 보던 하룬이 싸가지를 소환했다.

     -싸가지, 나와.

     -켈켈켈! 주인, 잘 있었우?

     또 한번의 소환이 즐거운지 겁을 상실하고 또 말본새가 흐트러진싸가지였다. 하룬은 그런 녀석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감히 덤벼들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오는 위기감이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정령 합체.

     -우쒸!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너무해!

     싸가지는 잠시 앙탈(?)을 부렸지만 이내 비수에 합체했다. 상대의 마나를 잡아먹는 짙은 어둠의 힘이 담긴 어둠의 학살자였다.

     “가랏!”

     하룬은 커브피치 스킬을 펼쳐 비수를 날렸다.

     어둠의 학살자는 땅이 닿을락 말락하는 높이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날아갔다. 거무튀튀한 비수는 전격 마법의 영향권에 있던 시커멓게 탄 땅을 지나 검붉은 피로 얼룩진 땅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목표는 파탄!

     파탄의 근거리까지 날아간 어둠의 비수는 어쌔신의 그것처럼 바닥에 널려있는 시체들 사이로 느리게 이동했다.

     “으응? 뭐지?”

     미약하지만 마나의 유동과 알 수 없는 존재의 기척에 파탄이 주위로 시선을 돌리는 사이 어둠의 비수가 말의 배를 통과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쉽게 막지 못할 엄청난 빠르기였지만 파탄은 최상급 익스퍼터답게 반대편으로 상체를 급하게 눕히며 동시에 손목을 휘둘러 비수를 막으려 했다.

     그의 손목에는 강철로 주조된 폭이 넓은 팔찌가 있어 급한 상황에서 구명 수단이 되어주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막 팔찌에 부딪치려던 순간 어둠의 학살자는 방향을 틀어 팔찌와 건틀릿 사이의 작은 틈으로 향했다.

     “크윽!”

     워낙 작은 틈이라 김게 파고들어 가지 못했지만 파탄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원초적인 공포감과 함께 전신을 관통하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엄청난 승리에 고양되어 추가 공격을 가할지 같이 고민하고 있던 세 조장이 다시 공격을 하려는 듯 뒤로 물러났던 어둠의 비수를 향해 무기를 날렸다.

     따앙! 땅! 땅!

     익스퍼트 중급 정도의 세 실력자의 오러 소드에 막혀 싸가지가 합체한 어둠의 비수는 연방 튕겨 나고 있었다. 보통 기사와는 달리 수없이 많은 실전을 겪은 기사들의 대응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어둠의 학살자는 튕겨 나가는 순간 이전보다 더한 빠르기로 상대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들이 눈으로 보면서도 당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셋이었다.

     -그만 돌아와.

     -치잇! 한창 재미 좀 보려고 했더니.

     싸가지가 투덜거리며 뒤로 방향을 돌렸다. 겨우 상체를 위로 올린 파탄과 세 조장은 마치 홀린 것 같은 눈으로 물고기처럼 대기 중에서 유영하며 하룬에게 되돌아가는 어둠의 비수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비수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파탄의 거구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를 태우고 있던 전투마가 쓰러졌다. 파탄의 다리 한쪽 위로 쓰러진 전투마는 삽시간에 검게 변색되어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쿠웅!

     “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세 조장이 황망한 얼굴로 말을 들어 파탄의 몸을 빼려는 순간 그가 급하게 소리쳤다.

     “흐윽. 비수가 살아서 움직였다. 무, 물러나. 도, 독이닷!”

     막 그의 몸을 말 아래에서 빼려던 세 기사는 파탄의 얼굴색과 죽은 말이 시꺼멓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런 중독 현상을 보이는 것을 보니 엄청난 맹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조장은 죽은 기사의 하드 레더를 벗겨 내어 그것을 손에 둘둘 감고서야 겨우 말에 깔린 파탄의 다리를 빼낼 수 있었다. 파탄의 다리는 심하게 부서져 있었고, 중독이 되었는지 검게 변색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승리감에 고취되어 여유로웠던 전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삽시간에 서른이 넘는 기사들이 철시에 목숨을 잃었고 자신들에게는 누구보다 더 강한 존재였던 파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수에 베여 중독된 것이다.

     “서둘러! 뒤에 따라오고 있는 엘프들에게 가자. 들것! 들것부터 만들어서 세 필의 말 위에 올려라!”

     오랫동안 함께해 온 기사들답게 그런 상황에서도 기민한 행동을 보였다.

     도네이스가 다시 철시를 날리려고 했지만 손에 힘을 풀고 말았다. 이미 일단의 기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에 상대가 경각심을 끌어올린 상태의 익스퍼트 급 기사라면 더 이상 철시의 위력은 없다고 판단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전열을 정비한 삭풍의 기병대는 전장을 빠져나갔다. 전투마를 가지지 못한 하룬 일행은 그들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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