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브리엘라 황녀 일행은 하룬을 따라 북서쪽으로 방향을 정해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고요의 땅 입구 쪽인 서쪽으로 다른 일행이 몰리는 것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트롤의 숲까지 하룬을 비롯한 용병들과 동행한 다음 얼마 전까지 광산 개발을 위해 건설했던 요새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그쪽으로 방향을 정한 사람들의 숫자는 무려 일만이 넘었다. 하룬을 비롯한 용병들과 연합을 결성한 유저들 그리고 같이 작전에 참여했던 일부의 이방인들이 합류했다.
아레스를 비롯한 지인들은 1황자를 따라갔다. 그들은 유저들의 최고 관심사인 마법서의 행방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헤니가 전담 취재하기로 자기들끼리 정했다고 한다.
하룬은 일행과 함께 흐뭇한 기분을 즐기며 걷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나저나 황실의 보물이나 빨리 확인했으면 좋겠다.’
1차 집결지에서 1황자로부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천문학적인 의뢰 대금을 완전히 다 받은 것이다.
약 천사백의 사망자가 나온 이방인들에게 약 90만 골드를 지불했고, 천백의 사망자와 이천이 넘는 부상자가 나온 다카린과 어비스 그리고 황자 진영에서 파견한 용병들에게 모두 150만 골드를 뿌렸다.
크고 작은 부상을 훈장처럼 몸에 새긴 자신의 돌풍 대원들에게도 1인당 2,000골드씩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포션 구입비용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물론 남아있는 포션의 양도 엄청났다. 수백만 골드에 이르는 현금은 물론 황실에서 전해지는 귀한 보물 세 점도 얻었다. 고생한 것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것이다.
거기에 워프 지역에서 탈출할 때 받은 돈과 베론 자작에게 받은 돈과 보석, 그리고 마나석을 포함한 아이템들까지 있다.
강탄성궁은 모두 수거해서 아공간에 철시와 함께 넣어두었다. 비록 전리품은 하나도 얻지 못했지만 엄청난 거금을 벌어들였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체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다. 브리엘라 황녀와 데브론이 하룬을 이 무리의 잠재적인 지휘자로 선언했던 것이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일개 용병이 어떻게 우리를 지휘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뛰어난 인물이며 영웅의 풍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명예로운 기사로서 어찌 용병의 지휘를 받겠습니까? 차라리 우리끼리 이동하지요.”
테베 백작과 그의 기사단을 비롯한 일부 브리엘라 추종 기사들이 그것을 결사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쪽 길을 선택한 일만의 인원 중 극히 소수였던 것이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그는 일개 용병이 아니다. 그가 있었기에 세력도 극히 미약한 우리가 검증의 관엘 들어갈 수 있었으며 두 번이나 엘프들의 손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돌풍 용병대에는 최상급 익스퍼터까지 있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
데브론은 거칠게 항의하는 기사들을 꾸짖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기사들은 용병을 따라야 하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끊임없이 용병들과 분란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브리엘라 황녀 일행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있었다.
결국 브리엘라 황녀까지 나섰다.
“그래요, 데브론 경의 말씀이 맞아요. 그분은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일 뿐 아니라 여기 계시는 데브론 님의 비전을 이어받은 분이에요. 비록 용병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용병들이 모두 따르는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해요.”
브리엘라 황녀는 물론이고 은연중에 그 수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데브론이 하룬이 자신의 제자임을 드러내며 압박을 가했다. 마침내 표면적으로는 그런 불만과 거친 행동은 사라졌다.
하룬은 티노를 후미로 돌리고 척후는 후크란 기사단에 맡겼다.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 도래한 것은 트레저 분지를 탈출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후미에서 추격 상황을 주시하던 티노가 급하게 돌아와 보고했다.
“말을 탄 기사단 혹은 기병들이 우리 뒤를 쫓고 있습니다. 약 반나절 거리입니다.”
형식적으로 무리의 수장을 맡고 있는 브리엘라 황녀에게 보고하자 급박하게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다. 하룬과 데브론, 딜런 자작, 테베 백작, 세반 자작, 타니엘라 마법사 그리고 몇 명의 귀족들과 이방인들의 대표들이 서둘러 모였다.
“빌어먹을! 북부 군단의 최정예 전력인 삭풍의 기병대로군.”
티노의 보고를 통해 초원에 부는 세찬 바람을 형상화시킨 깃발 문양을 알아본 테베 백작이 깜짝 놀라며 욕설을 내뱉었다.
“삭풍의 기병대라면?”
하룬이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제국 북부의 테베 성을 다스려왔던 만큼 북부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삭풍의 기병대는 북부 군단의 열 개 기병대 중 가장 강한 전력이오. 일반 영주를 모시는 기사단과는 달리 모두 삼백의 기사와 삼백의 수련 기사 그리고 칠백의 기병으로 구성된 최정예 기병대요.”
하룬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으로는 정보가 미흡했던 것이다.
테베 백작은 내심 하룬의 그런 태도가 고까웠지만 존경하는 데브론의 제자라는 신분을 가졌고, 일행의 우두머리인 하룬의 압박에 알고 있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삭풍은 북부 초원 지대의 야만인들이나 스카이루프 산맥의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아 온 기병대로, 대부분 평민 병사 출신들이오. 실전의 와중에 익스퍼트에 올라 전장 기사라고 부르는 치들과 소드 유저 최상급의 기병들로 구성된 자들에 불과하지만 우리처럼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전력으로는 그 열 배라도 가볍게 찢어놓을 수 있는 높은 기동력과 실력을 가지고 있소.”
그의 말에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이라? 기병이란 말이지.’
사실 다른 게임의 경우 거의 유저를 위한 것이라 말을 타는 기병이 등장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유저들을 위한 텔레포트 게이트가 활성화된 탓에 NPC라면 모르겠지만 유저들은 말을 탈 일도 거의 없었다.
더구나 다른 게임의 경우 대규모 전투는 거의 예외 없이 공선전이 주이기 때문에 이런 초지에서 기병대와 전투를 벌이는 경우란 아예 없었다. 반나절 거리이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하는데 경험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딜런 경! 기병대와 상대하는 일반적인 전술은 어떻습니까?”
하룬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딜런이 입을 열었다.
“제국의 전투 교범에 실린 내용을 먼저 말하지요. 기병은 달려오는 기세를 이용하는 만큼 같은 기병이 아니면 거의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은 기병으로 상대하는 것이고, 차선책은 기마가 출입할 수 없는 성으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니 오로지 방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목책을 세워야 합니다. 기사나 기병의 몸무게까지 포함하면 거의 300킬로그램에 가까운 말이 돌진하면 웬만한 목책은 그대로 깨질 테니 적어도 몇 겹으로 세워야 할 것이며, 시간이 있다면 흙을 이용해서 두께를 키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 딜런이 존중하는 태도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동한다고 하더라도 숲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니 일단 방어에 치중하면서 어떻게든 말에서 내리게 한 다음 공격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반 자작도 딜런의 말에 동의했다. 테베 백작 역시 마찬가지인 듯 아무 말 없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목책으로 쓸 만한 나무가 없습니다. 겨우 관목이니…….”
숲까지는 이삼일의 거리이니 난감한 노릇이다. 그렇다고 다른 대용품은 생각나지 않았다. 유저들은 막연히 숫자만 생각하다가 기병이란 뜻밖의 적에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고, 전술 전략을 체계적으로 배운 기사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전혀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 얼굴이 굳었다.
“일단 한 시간의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뭐라도 좋으니 쓸 만한 방법을 생각한 후 다시 회의를 하겠습니다. 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피할 수 없으니 이곳에서 숙영하겠습니다.”
하룬은 이 일행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방인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들 중 게임에서 기병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상당수의 유저들이 로그아웃을 한 것이다. 특히 연합한 길드가 아니라 이번 전투를 같이 했다가 살아남은 중소 길드의 유저들은 거의 예외 없이 로그아웃을 해 버렸다.
“의리 없는 자들!”
이방인들을 찾던 와중에 만난 세류가 이를 갈았다. 그런 자들의 숫자만 무려 이천이 넘는다고 했다.
“사실 우리 길드원들도 흔들리고 있어요. 기병이나 말을 탄 기사들을 상대해 본 경험도 없는 상태고, 그들 전력이 길드원들을 상회하고 있으니 불안한 상태예요.”
이해는 갔다. 사실 유저들로서는 이런 전투를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곳에 온 유저들이 꽤 높은 기량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소드 유저 상급에 해당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회의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전했다. 믿었던 아반 부녀의 아반가르드 길드마저도 모두 로그아웃한 상황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생긴 것부터 영락없는 장사꾼이었다니까.”
사예가 투덜거렸다.
“어쩌실 겁니까?”
발트랑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기병과 말을 탄 기사들을 아무런 방어책도 없이 맞이하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말은 유저들의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도 다른 유저들과 같이 차라리 전투를 피해 로그아웃하고 싶을 테지만 그동안의 의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면 승산은 있습니다.”
하룬의 말에 유저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기발한 계획과 능력으로 여러 차례위험에서 벗어난 하룬의 능력을 믿고 싶었다.
“사실 여러분이 이곳에서 현실로 돌아가면 다시는 돌아오기 힘들 겁니다. 이곳이 다크 엘프들과 북부군의 영역에 들어가면 아마 이방인들은 다시 돌아오더라도 고요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한 척살을 당하게 될 겁니다. 날 따른다면 최소한 여러분만이라도 고요의 땅을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발트랑은 하룬의 말이 미덥지 못한 듯 물었다.
“네. 날 믿고 따른다면 반드시 삭풍 기병대를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하룬은 실제로 믿는 것은 없지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말에 사람들의 사기가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부터 어느 정도는 계산적으로 말하고 움직였다.
“좋습니다. 우리는 대장과 끝까지 같이하겠습니다.”
“호호호, 저희 코원은 언제나 대장과 한편이에요.”
“우리 노폭스도 대장과 함께하겠습니다.”
남은 유저들은 하룬을 믿어주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룬이 말한 대로 이 고요의 땅이 다크 엘프들과 북부군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설사 이 싸움을 피해 로그아웃을 해도 다시 이곳으로 접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부활 지역을 바꾼다 해도 한 번은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룬을 향한 믿음으로 그와 한번 연합을 했던 유저들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동안의 경험도 그렇게 소문으로도 하룬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렇게 팔천의 인원 중 꽤 많은 수를 차지하는 유저들의 믿음이 자신을 지지하자 하룬은 뿌듯했다. 용병들은 이제 자신의 말이라면 묻지도 않고 따를 정도였다.
‘해 보자! 까짓거!’
몇 번 큰 의뢰를 성공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잘하면 승산이 있을 거 같았다. 큰 얼개는 생각해 놓았으니 이제 사람들의 중지를 모아 세부적인 것을 의논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면 될 것이다.
하룬은 라이피를 소환해서 부채꼴 방향으로 너비 약 5미터, 깊이 약 5미터의 참호를 여러 개 팠다. 중간에 약 10미터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폭을 가진 통로를 유지했지만 그 총길이가 무려 100여 미터나 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그가 가진 정령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정령석의 도움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 정령력이 꽤 늘었다는 것이다. 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전하게 소진한 다음에는 그 양이 더 늘어났다.
그게 다 제대로 정령 마법에 관한 제반 지식들을 배우지 못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정령의 힘을 쓰게 된 탓이었다.
하룬의 이런 놀라운 능력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거야 원, 엘프들보다 더하잖아.”
“그러게. 말은 들었지만 완전 괴물이네.”
“저 정도면 소드 마스터가 부럽지 않겠어.”
사람들은 쑤군거렸지만 하룬은 나이아를 소환해 그 구덩이에 물을 반쯤 채웠다. 그 작업이 끝나자 미리 이야기가 된 대로 기사들은 관목이지만 나무를 자르고 용병들이 그 나무들을 얽어 구덩이를 덮었다.
무려 팔천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느렸지만 어느 정도 분업화가 되자 순식간에 구덩이가 끈과 밧줄로 얽힌 나무와 가지들로 덮였다. 용병들은 그 위에 나뭇잎과 풀 벤 것을 깔고 흙을 조심스럽게 뿌렸다.
“됐네, 하룬 대장. 가까이서 보면 알 수 있지만 어느 정도 거리에서는 알아차리기 힘들 거야.”
피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함정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약간 내리막의 끝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으로 선봉은 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최대한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 아르망 기사단은 팔목 방패로 빛을 반사시켜야 합니다.”
“알았소. 그것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아르망 기사단장 발도키 자작이 큰소리로 장담했다.
적들의 방심을 위해서 관목 가지를 얽어 대충 만든 조잡한 방패를 수백 개 만들었다. 그것을 든 용병들이기사들 사이에 섰다.
마법사들의 준비도 끝나 가고 있었다. 6서클 마스터인 타니엘라를 중심으로 한 마법사들은 하룬이 말한 대로 두 파트로 나누어 마법을 준비했다. 1대는 전격 마법을 비롯한 공격 마법을 그리고 2대는 디그 계통과 화염계 마법을 메모라이징하도록 해서 예상 경로 외곽에 배치했다.
더러 그 마법들을 알지 못하는 이도 있었지만 때가 때이니 만큼 마법서를 공유한 덕분에 약 칠백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거의 동일한 마법 주문을 외울 수 있었다. 필요한 마법들이 대부분 4서클 이하였기 때문에 이방인 마법사들은 이 기회에 새로운 마법 주문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드드드드!
모든 사람들이 대지가 울리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을 때에야 마법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아르밍 기사단과 궁수들의 뒤에 자리를 잡았고, 방패를 가진 이방인들이 그들의 호위를 맡았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각자 맡은 역할만 제대로 수행한다면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하룬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일렁였다. 평지에서 기병대를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기사들의 사기가 단숨에 확 올라갔다. 이들은 직접 기병대를 상대할 최정예이니만큼 사기가 중요했다.
초원을 달리는 말의 속력은 무척 빨랐다. 대지의 굉음이 커짐에 따라 멀리서부터 구름처럼 흙먼지가 일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척박한 고요의 땅 서쪽 일원이라 비록 풀들과 관목이 자라기는 하지만 수많은 말의 발굽에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두두두두!
선두가 보였다. 북부 산지의 맹수인 샤벨 타이거 가죽의 주재료로 철과 미스릴 가루로 보강 처리를 한 방어구를 입고 있는 기사들이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준비잇!”
하룬의 고함에 안쪽으로 약간 말려 들어간 형태로 늘어선 선두에 아르망 기사단과 나무 방패를 든 용병들이 자리했다. 아직 햇빛을 반사시킬 팔목 방패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선두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정렬한 기마는 조잡한 나무 방패를 들고 대항하듯 늘어서있는 용병들과 전투마를 타지 못한 기사들을 마주 보며 정렬했다.
마주한 적들의 비웃는 소리가 이 너머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거창!”
적의 선두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기병들은 일제히 약 5미터 길이의 기병창을 옆구리에 끼었다. 햇빛에 반사된 창두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사람들의 간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전속 전진!”
속보로 이곳까지 온 잘 훈련된 전투마들은 기병들이 허벅지로 옆구리를 강하게 조이자 투기를 드러내며 전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땅이 울렸다. 귀가 먹먹했다.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강렬한 살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이런 대규모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이방인들 중에는 덜덜 떠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이 저 기병들의 창에 목이 꿰여 죽을 것 같아 사지가 벌벌 떨렸다.
입술이 바싹 마른 사람들의 눈이 하룬을 향했다. 하룬이 들어 올린 손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무기를 잡은 손아귀가 하얗게 질렸고 자신도 모르게 숨결이 거칠어졌다. 심장이 평소의 10분의 1로 쪼그라든 듯 제대로 피가 돌지 않는 느낌이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두근두근!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코와 입에서는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고, 금방이라도 악을 쓰는 악다구니나 고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방패!”
하룬의 고함에 팔목 방패를 착용한 아르망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방패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전투마와 삭풍의 기병대 대원들은 반사되는 햇빛에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달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멈출 수도 없거니와 이 정도는 그들에게 장애 축에도 끼지 못했다.
바로 눈앞으로 억센 근육을 가진 전투마가 마갑을 쓴 채 붉게 충혈 된 큰 눈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 몸이 벌벌 떨렸다. 선두 열은 금방 젖은 땅을 말굽으로 파헤치며 사람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세류를 비롯해 많은 유저들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은 인간이 동시에 내지른 것이었다.
히히잉!
“으악!”
“함정이닷!”
선두의 말들이 함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구슬픈 말들의 울음소리와 인간들의 비명이 가뜩이나 졸아들었던 심장을 옥죈 것도 잠시, 사람들의 얼굴에는 성공했다는 희열의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달려오던 속도가 있었던 터라 선두의 말과 기병이 통째로 바닥으로 꺼지는 것을 보면서도 뒤의 몇 열은 함정 속으로 빠졌다. 놀란 기병들이 말의 고삐를 강하게 채 멈추게 하자 말들이 일제히 울며 앞다리를 높이 들어올렸다.
숙련된 기마술을 가지고 있는 기마병들이지만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던지 일부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내 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겪으며 멈추어야 했던 말들의 발굽에 짓밟히고 말았다.
으드득!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머리통이 짓눌려 뇌수가 터져 나왔다. 팔과 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이거나 부러지고 으스러졌다. 선홍색 장기들이 붉은 피와 함께 젖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심장이 약한 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많은 이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할 수 없는 살육의 공포가 온몸을 거대한 바위처럼 짓눌렀다. 구토를 하거나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터진 하룬의 고함이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마법을 날려라!”
그 순간 마법사들이 기사와 용병들의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체인 라이트링!”
“라이트닝 볼트!”
“선더볼트!”
가장 선두에서 팔뚝 방패로 기마와 기병들의 눈을 잠시 멀게 했던 기사들 사이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일단의 마법사들이 전격 마법을 날렸다.
쯔르르!
츠츠츠츳!
“아악!”
“마법이다!”
젖은 땅을 타고 전격 마법이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시퍼런 뇌전들은 서로 합해지고 나뉘기를 거듭하면서 축축하게 젖은 대지에 발을 내디딘 말들과 기병들의 몸을 감전시켰다. 무려 삼백 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마음먹고 날린 전격 마법의 위력은 정말 무서웠다.
수많은 기마들이 몸을 직격한 전격을 맞고 제자리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한 번 더!”
하룬의 고함에 마법사들이 다시 전격 마법을 날렸다.
츠르릇! 츠즈즈즛!
시퍼런 뇌전이 아직도 경련하고 있는 말과 기병들을 덮쳤다. 이번에는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난번의 뇌전과 합해져 가장 후미까지 뻗어갔다.
말과 사람이 통째로 검게 타들어 갔다. 비명조차 지를 겨를이 없었다. 뭘 어떻게 움직일 수도 없이 전격에 노출된 말과 사람들이 경련과 함께 타들어 가는 장면은 정말 참혹했지만 그들은 적이었다.
“궁수 앞으로! 일점사로 쏴!”
목표를 정해 쏘라는 하룬의 지시에 대부분 용병들인 궁수들은 신중하게 시위를 당겼다. 강탄성궁으로 날린 철시는 강력한 위력을 보여줄 것이기에 기대가 컸다.
쐐액! 쐐액!
가공할 파공성과 함께 직선거리로 무려 300미터를 날아간 철시들은 후미 열의 말과 기병들의 몸을 꿰뚫었다. 오백의 용병들은 사람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다섯 발을 연속해서 날리고서야 겨우 후들거리는 팔을 쉬게 할 수 있었다.
파악! 푹! 푸욱!
히히히잉!
“으악! 화살이다!”
전격 마법에 어느 정도 노출이 되었던 사람들과 말은 도망을 칠 수조차 없었다. 전격에 감전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돌격!”
이번에는 테베 백작의 고함이 터졌다. 선두에 섰던 기사들과 뒤에 대기하고 있던 일부 유저들이 함정 사이로 좁은 통로를 힘차게 도약하며 앞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의 목표는 상대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
자비나 용서는 없다. 전장에서 단숨에 목을 베는 것은 최선의 호의였다. 그것이 전장에서 적으로 만난 자들이 아는 유일한 예의였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은 날듯이 달리며 후미로 향했다.
“후퇴! 후퇴하라!”
뿌우우!
후미에 있던 한 지휘관의 명령과 함께 후퇴를 알리는 뿔고둥 소리가 울렸다. 전격의 세기가 약해지자 공격 반경에서 벗어난 덕분에 용케 정신을 차린 중간 이후의 대열이 말 머리를 돌렸다. 공격해 오는 것만큼이나 후퇴도 기민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정예 기마병다운 동작이었다. 천삼백의 기마 중 무려 절반 이상이 기민하게 후퇴를 하고 있었다. 일부는 말이나 기병 때문에 주춤거리거나 동작이 굼떴지만 후미는 전격 마법에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던 탓이다.
하룬은 이미 소환되어 대기하고 있던 위신느와 합체를 하기로 했다. 즉흥적인 생각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결정이었다.
-위신느, 정령 합체.
위신느가 그의 몸을 한 바퀴 휘감아 돌더니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가자!”
하룬의 몸이 하늘로 날았다.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느닷없이 플라이 마법을 펼친 것처럼 그가 하늘로 날아오른 것도 신기했지만 그보다 그 올라가는 속도나 고도가 일반 플라이 마법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50여 미터를 올라간 하룬은 후미 열 한가운데 황금색 투구를 쓰고 있는 인물을 보았다. 그가 지휘관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후미 열은 차림새가 가죽 재료의 방어구를 입은 선두와 달리 플레이트 아머나 흉갑 아머를 착용했다.
‘기병들을 먼저 내보낸 거군.’
감이 왔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반원을 그리며 경사진 아래쪽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에 불안해 정예 기사들은 뒤로 빠진 것이다. 그 지휘관 주변에는 마법사로 보이는 인물 몇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지 계열의 마법으로 바닥을 뒤집어 젖은 땅을 타고 흐르는 전격 마법을 막았다.
‘하지만 우리도 숨겨둔 한 수가 있지.’
하룬은 진격으로 주변과 좀 떨어진 곳에 구덩이를 파고 숨었던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히든 매직!”
높은 공중에서 마나를 담아 내지른 하룬의 고함 소리에 경사면 곳곳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전방에서 기마대를 맞이해 전격 마법을 날린 마법사들을 제외한 사백 명의 마법사들이었다. 용병 두 명씩의 호위를 받고 있는 그들은 준비한 마법을 펼쳤다.
“디그!”
“빅 호울!”
“어스퀘이크!”
말들이 지날 곳이면 어김없이 크고 작은 구덩이들이 생겨났고 작은 지진들이 발생했다. 구덩이가 연결되어 제법 큰 참호가 생겨난 곳도 있었다.
히히힝!
“으윽! 뚫고 지나가라!”
“아악!”
“크악! 살려 줘!”
삽시간에 후퇴하던 후미 열이 무너지고 말았다. 디그 마법은 2서클로, 4서클 마법사의 경우 연속해서 열 번 이상 펼칠 수 있는 하위 마법이었다. 물론 깊이가 최소 1미터는 넘어야 했기에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정도밖에는 펼치지 못했지만 수백 명이 만든 구덩이는 천 개가 넘어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4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연속해서 화염계 마법을 펼쳤다. 미리 약속한 대로 후퇴로를 끊기 위해 후방을 화염으로 감싸 버렸다.
“파이어 월!”
“파이어 플레임!”
용케 구덩이를 피해 달려 나가려던 말들이 후끈한 열기와 함께 생성된 화염에 놀라 발작을 일으켰다. 비록 오랜 훈련으로 투기를 일으키고 앞뒤 발로 상대 말이나 사람을 차고 밟을 정도의 전투마들이지만 화염에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히히히잉!
후미는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당황한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며 앞발을 높이 들었다. 일부 말들은 흥분해서 자신의 등에 탄 기수를 떨어뜨리고 제 꼬리를 무는 것처럼 빙빙 돌거나 혹은 격렬하게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사방에 파인 구덩이를 피해 후퇴한 기마는 채 열 필이 넘지 않았다. 나머지는 무수한 구덩이들로 인해 포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4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그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던 것이다.
“홀드!”
“매직 애로우!”
“파이어 애로우!”
“윈드 커터!”
수많은 공격 마법들이 날아가자 포위망을 빠져나갔던 기마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처참한 몰골로 죽어 버렸다. 그들 대부분이 기사였지만 한꺼번에 쏟아지는 마법 공격을 당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말들을 진정시켜라!”
“재정렬해라! 단숨에 벗어날 것이다.”
후미의 지휘관들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기를 빼 휘두르며 분위기를 잡았다. 제대로 훈련된 전투마들은 금방 진정해서 제법 깊고 넓은 구덩이였지만 눈에 익숙한 장애물 정도는 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문제는 잔뜩 일으켰던 말들의 투기와, 기병이나 기사들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오랜 훈련을 받은 정예들이니만큼 그들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말들을 진정시키고 달릴 준비를 갖추었다.
“궁수 속보! 준비, 발사!”
기사들의 뒤를 따라 달라온 궁수들은 그사이 100미터 이상 전진을 한 상태였다. 사거리는 겨우 100미터이니 철시의 위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하룬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잡고 다시 철시를 날렸다.
쑤욱! 슈슈슉!
이번에도 다섯 발이 한계였지만 구덩이에 발이 빠져 넘어진 말들과 놀란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철시를 피할 여유도 없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저놈이!”
하룬은 금색 투구를 쓴 기사가 자신을 향해 석궁을 날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석궁의 유효 사거리는 약 200미터 내외이니 위험했던 것이다. 다행히 위신느와 합체한 상태여서 그의 몸은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자리를 이동했다. 활을 가진 몇 명이 그 기사를 도와 화살을 날렸지만 하룬은 마치 새처럼 표홀하게 날아 화살을 피한 후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내려섰다.
그때였다.
“하하하! 내가 아르망 기사단의 델보다! 누가 나를 상대하겠느냐?”
언제 잡아챈 것인지 모르겠지만 주인을 잃은 전투마를 잡아 탄 아르망 기사단의 델보가 한 금색 투구의 기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런 상태에서도 일기투를 신청하다니. 완전히 개념이 없군.’
호기가 일어 한 행동이겠지만 이 기사라는 족속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은 어떻게든 그들을 전멸시켜야 할 상황이다. 그의 행동 때문에 공격의 맥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빌어먹을!’
내심 욕설을 했지만 무리를 지휘하는 입장이고, 또 이미 벌어진 일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안 됩니다.”
하룬의 말에 테베 백작이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리를! 고귀하고 명예로운 기사가 어떻게 상대방의 불리를 틈타 개떼처럼 합공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기사들의 마지막은 기사들이 지켜주어야 하는 법이오. 에잉! 용병이라서 그런지 품위가 없군.”
“허헛!”
하룬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겨우 승기를 잡았는데 놈들이 숨을 고르게 놔주란다. 그것도 유리한 상황에서 굳이 일기투를 벌이겠다니.
‘이 작자, 완전히 꼴통이잖아. 아니, 귀족들은 다 이런가?’
황당해하는 하룬의 표정에 기분이 나빴는지 테베 백작과 기사들이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내 지휘를 받기 싫다니 그럼 이후로 따로 행동하도록 합시다.”
하룬은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크험! 당연한 말이지. 아무리 황녀 전하의 부탁이 있어 참았지만 더 이상 용병의 지휘를 받을 수 없으니까.”
하룬의 지략이 아니었으면 기병들에게 벌써 도륙이 되었을 텐데 닭대가리인지 벌써 그것을 잊고 있었다. 그저 눈앞의 승리에 잔뜩 마음이 부푼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줄까?’
불끈 주먹을 쥔 하룬의 어깨를 누군가가 꽉 잡았다. 데브론이었다. 돌아보니 그의 노안이 딱딱하게 굳었고, 아르망 기사단을 쳐다보는 눈에서 시퍼런 광망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휴우. 그러게, 하룬 대장. 아무래도 우린 자네를 끌어안을 인덕이나 행운이 없는 것 같군.”
“미안합니다.”
“아니야.”
데브론은 하룬을 향해 쓸쓸하게 웃는 낯을 보여 주었지만 다시 테베 백작을 향하는 시선은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백작! 자신은 있는가? 저들은 북방 초원의 거친 전사들과 수없이 전투를 해 왔네.”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우리 기사단의 기량은 근위 기사단에 밀리지 않습니다. 전하는 저희 아르망 기사단이 책임지겠습니다.”
테베 백작은 데브론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어쩌면 후회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존심이 강한 귀족인지라 입 밖에 내놓은 말은 끝까지 책임지려 하는지도 몰랐다.
데브론 역시 그를 질책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용병으로 타국을 떠돌던 그인지라 아무런 뒷배나 자금력이 없어 그래도 이제까지 브리엘라에게 충성심을 보내온 테베 백작과 일단의 귀족들을 어쩔 수는 없었다.
“갑시다!”
하룬이 소리치자 브리엘라 황녀 진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좀 떨어진 안전지대로 향했다. 하룬의 말에 망설임도 없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던 테베 백작과 귀족 기사들이 제법 큰 소리로 뒷담화를 했다.
“퉤엣! 재수 없는 용병 새끼!”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천한 새끼가 운 좋게 몇 번 사람들을 구했다고 저 위세야!”
데브론의 얼굴이 갈수록 차갑게 굳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하룬을 욕할 때 드디어 그들의 원하는 일기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