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피로 물든 트레저 분지 (118/278)

《피로 물든 트레저 분지》

 트레저 분지의 서쪽에 있는 호수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미명을 뚫고 분지의 기슭에서부터 정상까지를 얇은 천처럼 가리고 있었다. 밤을 새우거나 일찍 잠에서 깬 사람이라면 뭔지 모를 평화와 안식 그리고 신비로움을 느낄 법한 안개 속에 흐릿하게 드러난 전경이다.

 하지만 분지 정상과 면한 호숫가에는 하룬과 오백의 엘프 궁수 그리고 사천에 달하는 용병들이 소리 죽여 모여들고 있었다.

 각 황자들이 자신들과 계약한 용병들을 수백 명씩 보내 준 덕분에 굳이 이방인들을 고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곁에 있는 이방인들은 세류의 코엠 길드밖에는 없었다.

 “과연 대단하네요.”

 세류가 옆에서 소곤거렸다. 분지를 안개로 감싸기 위해서 용병들 속에 있는 마법사들은 꽤 오래 미스트 마법을 펼쳐야만 했다.

 ‘사거리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정상까지는 약 1,000미터 정도. 이곳은 분지에서 정상까지 가장 급경사를 이룬 곳이어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가장 짧았다.

 호수의 자연적인 물안개에 미스트 마법까지 더한 끝에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드디어 강탄성궁의 유효 사거리를 확보한 것이다. 즉, 목표를 설정하고 화살을 날려 그 대상을 맞힐 수 있는 거리를 확보했다는 말이다.

 하룬은 조금씩 선명해지는 주변을 보며 목걸이 형태의 마나 통신구를 손으로 잡았다. 그가 긴장한 것을 말해주듯 마나 통신구가 부르르 떨더니 마나파를 발출했다.

 “여기는 대장이다!”

 -여기는 1조. 말하라!

 1조는 딜런이 맡고 있었다. 1조는 하룬일행이 공격하는 분지 반대편을 공격하기로 했다.

 “준비는 됐나?”

 -준비는 완료되었다!

 “좋다! 셋, 둘 하나. 공격!”

 통신과 동시에 하룬의 불끈 쥔 주먹이 위로 올라가는 순간 약 사천이 넘는 용병들이 정상을 향해 안개에 젖은 키 작은 풀 위를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격이닷!”

 파이론과 디프란 연합군 중 경계를 하던 엘프 하나가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는 순간 여기저기서 경고음과 요란한 알람 소리가 퍼져 나갔다.

 “저격 궁사 준비! 날려!”

 오백의 엘프 궁사 중 특히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사십팔 명은 사라지는 안개 속에 우왕좌왕하는 적들 중 지휘자나 정령사를 찾아냈고, 그들의 강탄성궁에서 철시가 위를 향해 날아갔다.

 쐐액! 쐐액!

 안개를 뚫고 파공성이 연이어 들리더니 곧 정상으로 향하는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아악!”

 “적의 화살 공격이다! 궁수들은 응전하라!”

 비명 속에서 지휘관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십팔 명의 엘프 궁사들은 침착하게 목표를 찾아 철시를 날렸다. 비록 습격을 받아 혼란해진 상황이라 목표물의 움직임이 커서 실패할 확률이 높았지만 그들은 팔 개 조로 여섯이 목표물에 집중해서 철시를 날렸기에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령사들은 정령을 소환해 흙벽을 만들어라!”

 “정령하슬 보호하라! 저격이다!”

 그렇게 외치는 자는 여지없이 엘프 궁사들의 화살에 꿰뚫린 상태에서 죽어 갔다. 갈수록 혼란은 커져만 갔고, 연합군의 일부는 아래를 향해 내려오고 다른 일부는 정상 쪽으로 올라가는 등 무질서한 행동을 보였다.

 “죽어랏!”

 “이놈들!”

 마침내 단숨에 오르막을 치고 올라간 용병들이 첫 번째 참호에 도착했다. 참호 안에 자리르 잡은 연합군은 엘프들은 별로 없고 북부 군단의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악! 내 팔!”

 “살려 줘! 안 돼!”

 강병으로 소문난 북부 군단의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과 함께 용병들의 무기에 사지가 잘려 나갔고, 머리통이 베여 쓰러졌다. 분지 정상으로 향하는 오르막은 용병들의 무서운 기세에 죽어가거나 쫓겨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연합군으로 가득했다.

 “저격 궁사는 계속해서 저격한다. 나머지는 각 조별로 맡은 참호를 향해 자유 발사!”

 마침내 하룬은 나머지 엘프 궁사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엘프 궁사들은 세 조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참호를 맡은 것이다.

 슈우욱!

 쇄애액!

 직사 혹은 곡사로 위를 향해 날아가는 철시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마치 어둠을 깨우는 해의 전령처럼 보였다. 서서히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아아악!”

 “크윽!”

 비록 멀리 떨어졌지만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오는 다양한 비명들. 죽어 가는 그들은 이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룬은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이 이 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인도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내게는 적일 뿐. 이곳은 전장이다.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제 철시 공격은 잠시 멈추었다. 엘프 궁사들은 바리아 원로의 지시에 따라 타격점을 위로 올리고, 용병들이 가장 위 참호까지 올라가면 자리를 왼쪽으로 옮겨 공격받는 곳으로 지원을 가는 연합군을 노릴 것이다.

 “마법사 진격!”

 그 명령과 함께 하룬은 땅을 강하게 박차며 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붉은 모루 부족 드워프들이 철시에 대비해 특별히 제작한 강철 방패를 든 용병들에게 이중으로 둘러싸인 마법사들이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위로 오르는 와중에도 철시는 정상 부근으로 점차 그 타격 범위를 옮기며 날아가고 있었다. 물론 상대들이 날린 철시도 아래로 향해 날아왔지만 사거리를 벗어난 탓에 궁수들은 큰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티잉!

 하룬은 본 소드를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철시를 튕겨냈다. 기습으로 선기를 뺏긴 상태에서 지휘 체계가 흐트러진 연합군이지만 이렇게 철시를 날리는 다크 엘프 궁사들은 아직 많았다.

 그래도 호수의 존재와 그 위로 펼쳐진 숲으로 인해 공격로의 오른쪽에 포진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룬은 공격로의 왼쪽을 따라 달려 올라갔다.

 “죽엇!”

 푹 꺼진 땅속 구덩이에서 갑자기 창이 날아왔다. 비록 가장 기초적인 무기에 불과했지만 숙련도에 따라서는 강력한 무기였다. 창날은 하룬의 움직임이 빨랐던 만큼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을 금방이라도 뚫을 것 같았다.

 휙!

 하룬의 몸이 달리던 상태에서 옆으로 돌았다. 날카로운 창날이 그의 옆구리를 스치며 앞의 공간을 찔렀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하룬은 길게 옆으로 파인 참호와 그 속에서 자신을 향해 창을 날렸던 병사의 놀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참호 속은 시꺼멓게 그을린 흔적이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연합군 병사들을 용병들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하룬은 주저하지 않고 참호 속으로 뛰어내렸다.

 “이놈!”

 상대가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나며 창을 회수하더니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다시 창을 찔러왔다. 아까는 자신의 메신저 워킹 스킬 때문에 오히려 위험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대의 움직임은 물론 창의 궤적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하룬은 얼굴을 노리고 찔리는 창날을 향해 인사를 하듯 몸과 머리를 숙이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본 소드가 쥐여 있었다. 본 소드의 요요하게 빛나는 날은 어느새 상대의 방어구가 가리지 못하는 목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커억!”

 놀란 눈빛이 아직도 생생한 상대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뒤이어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고 아직도 의지가 남은 몸은 피하려는 듯 뒤를 향해 몇 걸음 물러났다가 뭔가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미안! 지금의 당신은 내 적일 뿐이야. 내 목숨을 탐하는.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하룬은 잠시나마 짧은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에서 참호를 통해 수많은 북부군이 지원을 위해 이동해 오는 것이 보였다.

 ‘이 참호까지는 북부군의 관할인가? 그럼 엘프들은 더 위쪽에 있겠군.’

 지금보다 더한 혼전 양상이 펼쳐지면 엘프 궁사들이 요인 저격을 하기 힘들어진다. 그때를 위해서 그는 더 위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참호를 두는 것보다는 적들을 그린 엘프 궁사들에게 노출시켜야 했다.

 하룬은 라이피를 소환해 참호의 상당 부분을 메워 버렸다. 이제 막힌 구간 때문에 할 수 없이 땅 위로 몸을 드러내야만 할 것이다. 이미 참호의 난전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겨우 소드 유저 중상 급의 북부군 병사들이 최소 2급 이상의 경험 많은 용병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위로 올라가라!”

 누군가의 명령에 용병들은 힘을 내서 참호 위로 뛰어올랐고, 적들이 기다리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 틈에 끼어 하룬 역시 빠른 속도로 달려 올라갔다.

 “크윽!”

 누군가 눈먼 철시에 당한 모양이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벌써 두 번째 참호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이곳도 북부군이 맡은 것 같았는데 앞서와 달리 서넛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이미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선발대가 참호에 화염병을 투척했는지 이곳 역시 살아남은 연합군이 별로 없었다. 좁은 참호인지라 화염이 옆으로 길게 뻗어나간 탓에 연합군은 화염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위로 갈수록 연합군의 실력이 뛰어난지 아니면 정령사들의 정령 마법 때문인지 이곳에서는 용병들의 시체들이 간간히 눈에 들어왔다.

 참호로 뛰어내린 하룬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용병에게 달려갔다. 안면이 있는 용병이다. 드래곤테일즈 용병은 놀라운 속도로 검을 휘둘러 양쪽에서 자신을 향해 찌르고 베는 검을 막고 있었다.

 “조심해!”

 하룬이 달려오는 것을 본 상대 병사가 경고를 했다. 그 즉시 몸을 돌려 하룬을 맞이하는 병사의 기민한 동작을 보니 과연 정예병이었다. 하지만 하룬은 이미 참호의 벽을 차고 그 병사의 옆구리로 본 소드를 날리고 있었다.

 “흐윽!”

 세 겹의 가족으로 만든 하드 레더가 본 소드의 날에 쩍 벌어졌고, 날은 탐욕스럽게 그보다 훨씬 더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비명과 함께 자신의 옆구리를 본 병사는 검을 놓고 쩍 벌어진 상처를 두 손으로 힘주어 잡았다.

 그 순간 옆구리르 반 정도 베고 나온 본 소드가 병사의 이마를 뚫고 박혔다. 병사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너, 너무 빨라!”

 쓰러지는 그 병사의 눈이 라이피를 소환해서 참호 한 구간을 메워 버리는 하룬의 뒷모습을 향했다가 이내 빛을 잃었다.

 “고맙소, 하룬 대장.”

 하나 남은 적을 단숨에 해치운 용병이 어느새 참호를 벗어나 위로 올라가는 하룬에게 소리쳤다.

 “부디 살아남으시오!”

 전장에서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소리였다. 의미 없을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힘이 되는 소리였다.

 하룬의 몸은 어느새 오르막의 중턱 쯤에 위치한 세 번째 참호에 도착했다. 벌써 대부분의 용병들이 이곳까지 진출했고 여기는 다크 엘프 전사들과 북부군 병사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 중에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지휘관급 인사들이 상당수 섞여 있어 용병들도 이제 사상자가 늘어났다.

 다카린 용병단의 용병 하나가 익스퍼트 중급으로 보이는 엘프 전사의 검에 목이날아가기 바로 직전 하룬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암기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이내 뽑혀 나온 비수가 그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커억!”

 엘프 전사의 검날이 목덜미로 파고들던 순간 눈을 감았던 그 용병은 이상한 감각에 눈을 떴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과거 영상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검날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인 것이다. 동시에 상대의 목에 비수 한 자루가 깊이 박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돌렸고 연방 비수를 날리는 하룬을 볼 수 있었다. 미명을 뚫고 날아가는 비수와 단검의 요사스러운 날이 너무 경이롭게 보였다. 치열하게 박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뚫고 동료 용병들의 모습을 위협하는 상대의 목덜미에 여지없이 박히는 암기의 모습은 마치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보였다.

 “하, 하룬 대장!”

 그 소리를 들은 하룬이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아직도 목덜미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의 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없었다. 암기를 귀신처럼 사용한다는 하룬의 위명이 떠올랐다.

 “와아악!”

 그는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맹렬한 기세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저 사람이 지켜줄 것이다. 검을 휘두르는 그의 팔 근육이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불근거렸다.

 하룬은 참호를 따라 이동하며 강자로 판단되거나 지휘자로 보이는 적들에게 비수를 날렸다. 이런 혼전 중에 비수를 날리는 것은 기습으로 간주되는 행위였지만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기습이면 어떻게 비열한 수면 어떤가.

 ‘살아나야 한다!’

 살기가 넘쳐나는 이 참혹한 전장에서 아직 제대로 수련도 하지 못한 메신저 검술을 펼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적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야 동료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룬이 세 번째 참호를 벗어나 네 번째 참호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기다리던 상황이 일어났다.

 “아아악! 불이다!”

 “피햇!”

 분지 정상 부근이 신음과 비명에 더해진 고함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드디어 양동작전의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 오르막과 달리 급경사를 가진 반대편은 바싹 마른 풀과 관목이 있는 곳이다. 미리 약속한 대로 그쪽은 화공이 펼쳐졌다.

 그린 엘프 궁사들의 철시 공격으로 인해 반대편으로 몸을 피했던 연합군이 이번에는 아래쪽이나 옆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악! 밀지 마, 이 새끼야!”

 “진정하고 지정된 장소를 떠나지 마라!”

 혼란이 극에 이른 모습이었다. 이제는 안개가 거의 사라져 정상 부근이 제대로 보였다. 수백 수천이 넘는 연합군이 분지 반대편에서 넘어오는 화염에 쫓겨 한 덩어리로 몰리거나 혹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룬은 인벤토리에서 비수와 단검에 단단히 묶은 중형 화염병들을 꺼냈다. 비록 마른 풀이 거의 없어 효과적인 화공을 펼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극도의 혼란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룬은 이제 200미터 위쪽에 한 덩어리로 뭉친 연합군을 향해 비수와 단검을 날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머금은 암기는 정확하게 목표한 바위로 날아갔고 거대한 화염이 연속해서 폭발 소리와 함께 피어올랐다.

 “끄아악! 불이닷, 불!”

 “아아악!”

 몸에 불이 붙은 채로 비명을 지르며 아래를 향해 달려 내려오던 자가 무엇에라도 걸렸는지 경사면을 구르더니 결국 한참만에야 그 모습을 감추었다.

 ‘저기로군, 마지막 참호가.’

 마침내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지막 참호의 위치를 찾았다. 이미 상당수의 용병들이 네 번째 참호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선발대 몇 명이 벌써 화염병을 던져 참호에서는 길게 화염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피범벅이 된 용병들의 얼굴은 마치 지옥의 케르베로스처럼 살기와 투기로 반쯤 미친 상태였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죽일 상대를 찾고 있었다.

 ‘도대체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문득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스쳐갔다. 미쳐 날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현실감이 사라졌다. 마치 고대 문명의 유물인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대장, 화살 공격의 방향이 바뀌었소!”

 언제 왔는지 프레스가 하늘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용병들은 네 번째 참호로 뛰어내려 연합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행하게도 정상 부근에서 발생한 화염과 극도의 혼란으로 인한 공포로 상대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정신을 차린 하룬은 어느새 철시가 한참 더 왼쪽으로 타격점을 바꾸었음을 알았다. 지원군이 왼쪽으로부터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제 이 참호를 점령하면 다카린 용병단원들은 참호 속에 들어가 활을 사용하십시오.”

 “알겠소.”

 하룬은 네 번째 참호를 뛰어넘어 위를 향해 달렸다.

 쉬익! 쉭!

 철시들이 섬뜩한 파공상과 함께 그를 향해 날아왔다. 정상 부근에 잠복한 다크 엘프 궁사들이 날린 것이다.

 하룬은 힘주어 앞을 보며 본 소드를 빠르게 날렸다.

 까앙! 까앙!

 그를 노리고 날아오던 철시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러지거나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빠르게 위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쐐액! 쐐액!

 거리가 가까워져서일까? 파공성은 더욱 강렬해졌고, 수많은 철시를 상대로 선을 그어 그림을 그리는 본 소드를 쥔 손은 그 충격으로 떨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네 번째 날아오는 철시를 다 막아 낸 순간 본 소드를 바닥에 떨어뜨린 하룬은 메신저 점핑 스킬을 이용해 하늘로 뛰어 올랐다. 거의 5~6미터 상공으로 날아오른 하룬의 눈에 다섯 번째 참호에 몸을 숨긴 채 철시를 날리다가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자신을 보고 놀란 연합군이 들어왔다.

 체공을 다한 하룬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화염병이 참호를 향해 간격을 두고 날아갔다.

 꽈앙!

 화르르륵!

 참호에 떨어진 화염병은 폭발과 함께 화염을 일으켰다. 좁은 참호라 그 어디에도 화염을 피할 곳은 없었다. 한순간에 약 50미터 길이의 참호는 화염으로 가득 찼고, 그 속에는 전신에 불이 붙은 채 참호를 기어오르는 연합군의 처참한 모습만이 보였다.

 하룬은 오른쪽으로 달렸다. 화염 때문에 놀란 적들은 그가 달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철시를 날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뭔가 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저놈에게 화살을 쏴! 가까이 오게 해서는 안 돼!”

 하지만 그 경고는 너무 늦었다. 이미 하룬의 몸은 점핑 스킬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기민하게 행동한 몇몇 엘프의 철시가 하룬의 발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아악! 피햇!”

 공중으로 솟구친 하룬의 손에서 화염병이 참호를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본 몇 명이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꽈앙!

 화르르릇!

 다시 50여 미터의 구간이 화염으로 가득했다.

 “실드! 실드!”

 “실프 소환!”

 그래도 이쪽은 마법사도 있고 정령사도 있고 그 대응도 비교적 빨랐지만 화염병이 만들어 낸 화염은 그들까지 삼켜 버렸다. 강력한 열기는 실드를 녹여 버렸고, 소환된 정령들은 엄청난 열기의 화염에 소멸되어 버렸다.

 “살려 줘!”

 “크아악! 제발!”

 화염은 지옥의 그것처럼 타오르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맹렬하게 피어난 화염은 그래도 상대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줄여 주었다. 강렬한 열기가 몸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 정신을 잃은 것이다.

 조금씩 밝아지는 시야에 호수와 면해 있는 정상 부근에서 화염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마치 단단한 띠처럼 보이던 연합군이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을 향해 움직이던 띠가 갑자기 불룩 튀어나오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이동을 하지 못하고 병목현상을 일으킨 것 같았다.

 그것은 이미 한 곳을 뚫었고 이제는 지원해 오는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됐다!”

 밤을 이용해 분지의 기슭에 판 참호까지 이동한 1황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거리가 멀어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1황자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떠오른 감회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역시 대단한 친구야!”

 “그렇군요. 오천도 안 되는 용병들로 저런 결과를 만들어 내다니.”

 1황녀 역시 상기된 얼굴이었다.

 연합군이 만들어낸 띠는 어느새 그곳을 향해 점점 굵어지고 그 색깔도 검게 변하고 있었다. 상당수의 인원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 숫자를 추측건대 대충 삼만 정도는 되는 듯했다.

 연합군의 띠가 가늘어진 것은 육안으로도 확인되었지만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 또 다른 신호를 기다려야만 했다.

 “저, 전하! 저길 보십시오!”

 란트렐 황사의 말에 눈을 돌려 보니 정확히 자신들의 왼쪽 분지 정상에서 화염이 솟구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본격적인 양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더 기다려!”

 모두 작전을 잘 알기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1황자는 터질 것 같은 긴장감과 짜릿한 흥분 때문에 굳이 소리를 질렀다.

 딜런은 용병들과 이방인이 섞인 삼천의 임시 부대를 이끌고 목표로 하는 분지 정상을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는 헤니를 비롯한 네 이방인 대원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지 정상까지 엷은 안개가 감싸고 있었다. 보는 풍경만으로는 너무나 평화로웠지만 딜런의 오감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기요!”

 헤니의 낮은 경호성에 눈을 옆으로 돌리자 저 멀리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약속한 공격 시간이 된 것이다.

 “화염병 투척!”

 명령과 함께 다카린 용병대원 스물이 화염병을 촉 바로 옆에 매단 화살을 일제히 쏘았다.

 꽈앙! 화르르!

 10미터 간격으로 거의 같은 위치로 날아간 화염병은 폭발과 함께 강렬한 화염을 일으켰다. 금세 급한 경사를 타고 화염이 아래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궁사대는 각자 목표를 향해 발사!”

 딜런의 명령에 활에 일가견이 있는 용병들과 이방인 궁사들 오백여 명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그들 각자에게 미리 지정된 목표 지점이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목표는 금방 드러났다. 정상으로 향한 경사면 곳곳에서 화염피 퍼지는 기세에 놀란 엘프들이 뛰어나왔기 때문이다.

 “1대는 땅을 판다!”

 1대 이백여 명은 주로 이방인 저서클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2서클 마법인 디그 마법이나 3서클 마법인 홀 마법을 이용해서 땅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2대는 흙으로 방화선을 만들어랏!”

 2대 이천백여 명은 조잡하지만 삼과 같이 생긴 목제 도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디그 마법이나 홀 마법의 결과로 생긴 흙더미를 퍼서 구덩이들 앞쪽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3대, 실시!”

 3대 이백여 명은 또 한 무리의 마법사들로, 주로 풍계 마법을 익힌 이방인들이었다.

 “블로우!”

 “윈드!”

 풍계 마법은 화염의 크기를 더욱 크게 만들었고, 위로 올라가는 속도를 올렸다.

 궁사대는 연방 철시를 날렸다. 그들의 주변 땅에는 잡기 좋게 거꾸로 땅에 박아 둔 철시들이 그득했다.

 “아악! 살려 줘!”

 “크아아악!”

 애처로운 비명이 들리며 바싹 마른 풀과 나무들이 화염에 타는 열기가 이제 막 밝아지려는 세상을 기괴한 붉은색으로 채색시켰다.

 온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 뛰는 엘프들과 북부군의 모습과, 이제 코앞까지 닥쳐 든 열기는 극도의 긴장 상태와 함께 흥분을 최고조로 이끌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뛰는 이방인들은 빨라진 심장 박동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생생한 대단위 전투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단해! 이건 게임이 아니야!”

 누군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화염이 방화선까지 내려왔다. 위로 향하던 화염은 벌써 수많은 연합군의 생명을 불태우며 3분의 2 능선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 흙으로 잔불을 정리해라!”

 딜런의 명령에 사람들은 준비한 나무 삽으로 흙을 퍼 기세가 확연히 약해진 불길을 집기 시작했다.

 치이익! 치익!

 흙에 불길이 잡히는 소리가 잠시 요란하더니 드디어 열기가 식기 시작했다.

 “2대부터 전진! 궁사대는 뒤를 따르며 계속 화살을 날리며 엄호해라!”

 딜런의 명령에 이천백여 명의 전사들이 방화선을 넘어 위로 올라가는 길목에 섰다. 그들은 푸른 물이 흘러나오는 연한 생가지로 신발을 포함한 발목을 둘둘 감은 상태였다.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는 바닥을 빠르고 쉽게 걷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제 정상으로 오르면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전사들의 가슴은 흥분과 긴장으로 요란하게 박동치고 있었다.

 ‘이건 진짜 전쟁이다!’

 불에 타거나 화살에 죽어가는 적들의 모습과 그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사람들의 발걸음은 언제부터인가 빨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선두는 이미 중턱까지 올랐고 가장 후미의 궁사대도 방화선을 통과한 상태였다. 그들은 어깨와 허리에 커다란 전통을 메고 연방 화염에 휩싸인 정상 부근으로 철시를 날리고 있었다.

 “대기! 조금만 더 기다려!”

 1황자는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혀로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는 십만이 넘는 대군의 투기를 억제했다. 그의 명령은 각 진영으로 퍼져나갔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자신들 쪽에 처져 있던 연합군의 띠가 드문드문 빈 곳이 보일 정도로 엷어졌다. 양쪽으로 지원을 나간 탓에 병력이 빈 것이다.

 드디어 자신들이 움직일 순간이었다. 1황자는 띠의 공백이 더욱 넓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돌격!”

 1황자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 진군을 명령했다. 참호 속에서 대기하던 십만이 넘는 대군이 쇄기 형태를 이룬 상태에서 위쪽으로 전속력으로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분지 정상까지는 약 1킬로미터이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강인한 체력을 가진 기사들에게는 평지나 다름없었다. 마법사들은 이미 선두 열에 포함시켜 호위 기사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연합군은 인간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쇄액! 쉬익!

 살이 떨리고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파공성과 함께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화살이 마치 검은 비처럼 인간들을 향해 날아왔다.

 “실드!”

 “메가 실드!”

 각 진영의 마법사들은 최선을 다해 최대한 범위를 넓힌 실드 마법을 구현했고, 실드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방패를 들어 올리거나 나름대로 구한 조잡한 물건으로 방패를 대신했다.

 까앙! 깡!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은 자신의 무기로 철시를 쳐 냈다. 다행히 마법사들이 구현한 수십 수백 겹의 실드는 철시 대부분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철시를 막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아악!”

 “크윽!”

한 번의 화살 공격에 많은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엘프의 철시는 거의 1미터에 달하기 때문에 조잡한 물건들로 만든 임시방패로는 제대로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희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거리가 닿는 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크 엘프 궁사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쉴 새 없이 철시를 날리고 있었지만 선두에 포진한 뛰어난 기사들에게 철시는 충분히 쳐낼 수 있는 무기였다.

 황자 진영이 양동작전으로 포위망이 엷어진 곳으로 돌진하고 있을 때 하룬은 이미 애초에 공략했던 구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적지 않은 용병이 죽었고, 부상을 입은 자는 부지기수였다. 엘저마저 왼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아직은 안 돼!’

 저 멀리 황자 진영이 이룬 쇄기가 위를 향해 뾰족한 날을 드러내며 돌진해 올라가고 있었다. 이미 그 부분의 연합군이 상당수 양옆으로 지원을 위해 이동한 상태였기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포위망을 뚫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자신들을 향해 참호를 따라 혹은 몸을 드러낸 채 달려오는 연합군이 보였다. 돌아보니 이미 한차례 악전을 치러낸 용병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쉴 시간이 필요해.’

 하룬은 라이피를 소환했다.

 -지반이 약한 곳을 알아?

 -그럼.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이 저쪽에 있어.

 라이피가 가리킨 곳은 멀지 않은 분지의 정상 부근이었다. 그곳부터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아주 위력적일 것이다.

 -좋아! 그럼 그곳의 지반을 무너뜨려.

 -친구의 정령력과 마나가 단숨에 소진될 텐데.

 걱정스러워하는 라이피의 말에 하룬은 정령석을 꺼내 들었다.

 -정령력은 되도록 이 정령석에서 끌어다 썼으면 좋겠어.

 -후후후, 그러지. 기대하라고, 친구.

 라이피의 능력은 중급 정령을 훨씬 상회하고 있지만 광범위한 지진은 어렵고 국지적인 지진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반이 약한 곳이라면 그 효과는 지대할 것이다. 더구나 그쪽에는 지금 그린 엘프들의 철시 공격 때문에 더 이상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연합군이 적체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르르릉.

 분지를 둘러싼 등성이 한쪽이 굉음과 함께 요동을 쳤다.

 “아악!”

 “지진이닷!”

 몸이 날렵한 다크 엘프들이지만 막 공격에 집중하던 참이라 강하게 내디뎠던 지반이 심하게 흔들리며 균열까지 발생하자 당황헤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엘프들과 뒤섞여 있던 북부군 병사들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르르!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정상 부근의 지반이 대규모로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 폭이 거의 50여 미터에 달했고 지반이 연속적으로 무너지면서 급기야 거대한 산사태로 변해 버렸다. 거대한 흙더미가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리자 연합군은 혼비백산했다.

 지휘자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피햇!”

 “산이 무너진다!”

 “뛰어라!”

 분지 기슭에서 철시를 날리는 그린 엘프의 타격 범위를 피해 느리게 참호를 통해 이동하거나 앞이 적체되어 얼굴이 앞 동료의 뒤통수에 닿을 정도로 붙어 대기하던 연합군은 지진에 이어 산사태가 일어나자 혼란에 빠졌다.

 자연의 재앙은 무서웠다. 그렇게 날렵한 몸놀림을 가진 엘프들과, 훈련과 실적으로 강병이 된 북부군들이었지만 참호와 바짝 붙은 동료들 때문에 한꺼번에 쏟아지는 흙더미를 피할 수가 없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수없이 많은 다크 엘프 전사들과 북부군 병사들은 거대한 흙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하룬 일행이 있는 구역과 산사태가 일어난 구역 사이에 포진한 엘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참호를 벗어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카린 용병단을 위로 올려 보내지 말걸.’

 다카린 용병단을 정상으로 올려 보낸 것이 후회가 되었다. 혼란에 빠진 지금의 적들을 상대하려면 궁사가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올라온 티노 일행과 합류해 능선을 타고 공격을 해올 연합군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상급 마나 포션으로 빠르게 마나를 회복한 하룬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정령력을 확인하고 위신느를 소환했다.

 -위신느, 최대한 많은 바람칼을 만들어 사방으로 날려 줘.

 위신느는 삼십여 개의 작은 바람칼을 만들어 혼란에 빠진 연합군을 향해 날려 보냈다. 혼란으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에 젖어 있던 연합군은 위신느의 바람칼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크아악!”

 “정령사가 있다! 아악!”

 위신느는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건만 자신의 바람칼을 지휘자들을 향해 집중적으로 날렸다. 다크 엘프들은 물론이고 북부군 중에도 지휘관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수하들을 독려했다.

 희뿌연 바람칼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가다가 대상의 앞에서 갑자기 속도를 빨리했다. 다크 엘프 전사들의 지휘관들은 대부분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라 정령의 힘이 담긴 바람칼을 막거나 튕길 수 있었지만 갑자기 빨라진 그 속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싸아악! 스윽!

 짧은 순간 여섯 개의 목이 날아갔고, 바람칼 열두 개가 사라졌다. 남은 바람칼은 무의식중에 하룬이 장악한 구역으로 달려오는 다크 엘프들과 북부군에 무차별적으로 날아가 팔다리는 물론이고 몸통을 베어 냈다.

 삽시간에 그 구역은 주인을 잃은 사지와, 전신이 난자되어 죽어 가는 비명을 지르는 연합군으로 가득 찼다. 몸을 피하고 정령을 소환하던 정령사들도 위신느의 바람칼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접경 지역으로 모인 용병들 중 일부가 남은 화염병을, 위험을 피해 모인 연합군이나 몸을 드러낸 정령사를 향해 던졌다.

 꽝! 꽝! 꽝!

 화르르!

 지옥의 겁화가 이럴까? 화염을 공포와 두려움을 증폭시켰고 화염에 몸이 타들어 가며 죽어 가는 사름들을 보던 연합군 일부가 무작정 아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거의 일만에 달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타격이 더 필요했다. 하룬은 거의 남지 않은 정령력을 의식하면서도 나이아를 소환했다.

 -나이아, 워터 밤.

 소환된 나이아는 지체하지 않고 수백 개의 물방울을 생성시켰다.

 -위신느, 도와줘.

 -알았어, 나이아!

 하룬의 정령력이 거의 바닥이었기에 두 정령이 힘을 합쳤다. 어느새 바람칼을 소멸시킨 위신느가 나이아가 만들어 낸 물방울을 강력한 바람으로 멀리 날렸다. 그 물방울들은 사태를 일으킨 곳을 넘어 다시 이쪽으로 집결하고 있던 연합군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팡! 팡! 팡!

 소리는 가벼웠지만 터진 워터 밤의 위력은 무서웠다. 그 파편이 수천수만 개의 물방울로 변해 연합군을 향해 총탄처럼 날아간 것이다. 크레모아라는 고대 문명의 무기처럼 아래쪽 전 방향으로 날아간 물방울은 연합군의 드러난 부분을 뚫고 들어갔다.

 “카악! 내 눈!”

 “아악!”

 물방울 파편에 직격당한 다크 엘프들과 북부군은 관통상을 입은 것처럼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비록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무력을 현저히 떨어뜨린 것이다. 땅에 떨어진 것들도 그 충격으로 터지며 사방에 마른 흙을 비산시켰다.

 하룬의 눈은 저 멀리 황자 진영을 향하고 있었다. 벌써 상당수의 인원이 분지를 넘어간 것이 보였다. 넓게 펼쳐진 쇄기의 꼬리 부분만 힘을 잃은 듯 양쪽에서 가해지는 공격을 받아 그 폭이 좁아지며 힘겹게 정상으로 오르고 있었다.

 “이제 갑시다!”

 하룬이 소리를 질렀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저 멀리 아래쪽에서 화살을 날리던 그린 엘프들도 준비한 철시가 동이 났는지 바리아 원로의 인솔로 암도를 찾아 달려가고 있었다.

 “빨리!”

 “서둘러라!”

 피엘과 프레스가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화염으로 새까맣게 타 버린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룬과 용병들 중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일단의 사람들은 정상을 거쳐 화마가 쓸고 간 내리막을 전력으로 달렸다. 다른 사람들은 미리 알려준 길을 통해 집결지로 향할 것이다.

 하룬은 지친 다카린 용병단원들을 독려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의뢰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향한 곳은 황자 진영이 뚫고 나간 분지의 바깥쪽이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십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밟고 달려간 곳은 전에 없던 길이 나 있었다. 아직도 달려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룬과 용병들은 짧지만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100여 미터 떨어진 길 건너편에는 양동작전을 펼쳤던 딜런을 위시한 용병들 중 일부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미리 하룬이 황자 진영으로부터 얻어낸 귀한 포션을 마셔 체력과 마나를 보충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최대한 기력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아직도 많구나.’

 사람들은 끝이 없을 것처럼 줄지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아는 얼굴도 보였다.

 ‘데브론 님과 홀은 어디에 있는 거지? 벌써 내려간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세가 가장 약한 브리엘라 황녀를 선두열이나 안전한 중간에 포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분지 정상에서 브리엘라 황녀를 안은 후크란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홀은 경갑주를 입은 채 황녀의 지근거리에서 달리고 있었다. 아마 그 뒤쪽에는 세류의 코엠 길드를 비롯해 그와 관계가 있는 이방인들이 쫓고 있을 것이다.

 “이런!”

 양쪽에서 연합군이 공격을 하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연합군이 전열을 정비한 것이다.

 “공격!”

 하룬의 고함 소리에 양쪽의 용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모두 활에 능한 용병들이다.

 슈욱! 슈욱!

 수백 발의 철시는 약 700미터 떨어진 정상 쪽으로 날아갔다.

 “캐액!”

 “공격이닷! 피해!”

 무수한 연합군이 철시에 몸이 꿰뚫려 죽어갔다. 몇 번 화살을 날리지도 않았는데 이쪽 오르막과 정상 쪽은 살아있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저쪽으로 피한 모양이군!’

 정상 반대편에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연방 들려왔다. 그쪽으로 공격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곡사를 날려 정상 반대편을 요격하랏!”

 뛰어난 활 솜씨를 가진 일부 용병들은 하룬의 지시대로 각도를 조절해서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대장님! 화살이 다 떨어졌습니다!”

 “여기도 끝입니다!”

 문제는 화살이었다. 다들 이곳까지 오면서 철시가 거의 남아있질 않았던 것이다. 전투에 몰입한 상황이니 남은 철시를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리라.

 이쪽에서 철시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얼마 후에는 다시 연합군의 모습이 정상에 나타났다.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 있었고, 도망치는 사람들의 폭은 줄어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하룬은 아직도 넘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욕설과 함께 비수를 꺼냈다. 화염병이 묶인 비수 중 남은 두 자루가 사람들이 넘고 있는 길의 양쪽으로 날아갔다.

 꽈앙! 꽈앙!

 화르르르!

 이제 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브리엘라 황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능선을 따라 달려오던 양쪽의 연합군이 거대한 화염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화염은 마른 풀과 나무를 태우며 양쪽으로 이동했다. 엉겁결에 너무 위험해서 화염병을 쓰긴 했지만 화염이 분지를 탈출하는 황자 일행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자 놀란 연합군이 분지 양쪽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일부는 재수 없게도 하룬과 용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내려오다가 죽음을 당했다.

 어쨌든 당장의 위협은 피했지만 점점 좁아지는 양쪽의 화염 때문에 분지를 탈출하는 인간들의 대열도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드디어 데브론과 브리엘라 황녀가 홀과 함께 하룬이 있는 곳을 지나쳤다. 재수 4인방 녀석들도 용케 무사한 모습으로 후크란 기사단 속에서 보호를 받으며 지나쳤다. 그 뒤로는 테베 백작가의 기사단과 또 한 기사단이 지나갔다.

 이제 정상 부근의 화염은 불과 10미터 간격으로 좁아져 이동하고 있었다. 그 화염 사이를 세류의 코엠 길드를 비롯한 이방인들이 통과하고 있었다.

 하룬은 안타까운 마음에 나이아를 소환했지만 바닥을 기는 정령력 때문에 그녀는 곧 소환이 해제되고 말았다.

 “힘을 내!”

 하룬이 소리를 질렀다. 이제 연합군이 문제가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화염 때문에 남은 사람들이 분지를 탈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비록 급해서 한 일이었지만 하룬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사이에도 이방인들은 이를 악물고 화염 사이를 통과해서 달려 내려왔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이 뻔한 터라 그들도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화염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화염 사이를 달렸다. 다행이라면 화염 때문에 양쪽에서 가해지던 공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있는 힘을 다해 뛰기만 하면 되었다.

 분지 반대편 상황을 모르는 하룬은 마음이 초조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힘들게 연 탈출로가 막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 갔다.

 결국 화염은 연결되고 탈출로는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그 화염 사이를 뚫고 나온 사람은 자신의 옷에 붙은 불길을 끄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중심을 잃고 내리막길에서 굴렀다. 미안한 마음에 하룬은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일어나 자신을 부축한 하룬을 보더니 감격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룬 대장!”

 “살아서 다행입니다.”

 “절 구한 것이 하룬 대장이라니 정말 전 운이 좋군요.”

 아는 얼굴이었다. 아반가르드 길드의 길드원으로, 험상궂은 인상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네?”

 그는 하룬이 묻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알아차리고는 대답했다.

 “제가 마지막입니다. 아주 끝내주게 운이 좋았지요. 우리 뒤에는 다른 길드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놈들의 공격에 모두 죽었습니다.”

 “휴우.”

 그의 말에 하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들을 맨 마지막으로 돌렸는지 1황자 진영에 화가 났다.

 “그래도 마지막 부분으로 밀린 유저들 때문에 우리까지는 살았어요. 하룬 대장이 절 구하기까지 했으니 정말 전 행운아입니다.”

 “다행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틈이 없었다. 어느새 화염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더구나 이미 일이 종료되었으니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일만 남았다.

 “후퇴! 전속력으로 후퇴!”

 하룬의 고함에 용병들이 앞서 탈출한 사람들이 만든 길을 따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피융! 피융!

 철시가 아래로 내려오는 화염 뒤에서 날아왔다. 하룬과 딜런, 피엘을 비롯한 특급 용병들이 가장 뒤에서 거꾸로 달리며 날아오는 철시를 검으로 휘둘러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다행하게도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화염이 쓸고 간 분지 정상에는 연합군 수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화염이 드디어 잦아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십만이 넘는 인간들이 일거에 밟아 댄 대지는 누런 속살을 드러낸 상태였기에 더 이상 화염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 옆은 푸른 잎이 무성한 숲이니 가만히 놔두어도 불길이 커지긴 힘들 것이다.

 “쫓아라!”

 “죽여 버리자!”

 수뇌부가 미처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복수심에 휩싸인 일단의 다크 엘프 부족들이 도망치는 인간들을 쫓아 산을 내려갔다. 그들은 볼카웜을 제외하고 이런 막대한 피해를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에 대규모 피해에 눈이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안 돼! 돌아와!”

 몇몇 엘프들이 그들을 만류했지만 발이 빠른 수천의 엘프들은 벌써 아래까지 반 이상 달려 내려갔다. 흥분한 북부군 중 상당수도 엘프들을 쫓아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인간들은 산을 완전히 내려간 시점이었다.

 “이런!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북부군의 부군단장 중 한 명으로, 연합군 공동 사령관인 바할 후작의 시선이 불안하게 엘프들의 뒤를 쫓았다. 물론 분지를 탈출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그들이라 매복할 정도의 지략을 발휘하긴 힘들 테지만 이번에 시간차를 두고 가해진 공격을 보면 불안하기만 했다.

 거의 황무지에 가까워 아무런 엄폐물이나 방해물이 없는 분지 쪽과 달리 분지 바깥은 사정이 달랐다. 수많은 나무들과 관목이 자라나 있고, 큰 바위들도 많았다.

 와아!

 막 중턱을 통과한 순간 바로 아래쪽에서 인간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미리 의논한 대로 황자 진영이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곳곳에 매복시켰던 것이다.

 “죽여랏!”

 “다 베어 버려!”

 “매직 애로우!”

 “윈드 애로우!”

 꽈꽝! 꽝!

 “크아아아!”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졌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달려 내려가던 엘프 전사들과 그 후미를 바짝 뒤쫓아 가던 북부군이 갑자기 쏟아진 마법 공격과 월등한 실력을 가진 기사들에게 도륙당하고 말았다.

 급하게 다시 뒤돌아 도망친 인원은 내려갔던 인원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내려가던 관성으로 인해 멈추는 것도 쉽지 않았고, 매복이 중턱과 그 바로 위쪽으로 두 군데나 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거나 근처에 있던 모든 다크 엘프들과 북부군이 기습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무서운 놈들!”

 “도대체 언제 이런 전략을 생각했단 말인가?”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달려온 다크 엘프 수뇌부는 탈출의 와중에도 매복해서, 뒤쫓던 인원을 거의 몰살시킨 인간들에게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공격은 무리였다.

 “피해 상황을 파악해라!”

 “휴식과 함께 정찰대를 파견해라!”

 몇 가지 지시와 함께 급하게 회의에 들어간 연합군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많은 희생이 발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록 그들 대부분이 개개인의 기량 면에서 엘프와 인간의 연합군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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