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준비 (117/278)
  • 《준비》

     타니엘라와 그 사제인 미루스의 가세로 돌풍 용병대는 그 내실을 단단하게 다지게 되었다. 이제야 검사와 마법사를 비롯한 직업의 균형이 서서히 맞아가고 있었다.

     새로운 대원들의 입대로 인해 용병대는 강한 활력에 차 있었다.

     헤니는 새로운 이방인 대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에게 돌풍 용병대에 대한 것들을 말해주느라고 신이 났던 것이다.

     하룬은 네 사람에게 이방인들의 동정을 살피는 임무를 주었다. 첫 임무라서 잔뜩 긴장한 세 대원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갔던 헤니는 오후 늦게야 돌아왔다.

     “현재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고요의 땅 입구로 가고는 있습니까?”

     하룬의 물음에 겨루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마법서였는데 그것을 누가 얻었는지도 모르면서 힘들게 온 이곳을 떠나려 하겠습니까? 이방인들은 호기심이 매우 강합니다.”

     “흐음, 그건 다행이군요. 황자 연합에서 제국 정보 길드에 의뢰해 파악한 정보를 들으니 고요의 땅 입구로 가는 길목마다 다크 엘프들과 북부 군단이 지키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왜 다행입니까?”

     방커였다. 그는 이방인들이 분지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왜 다행인지 이해하질 못했다. 돌아보니 이미 그 사실을 들은 헤니를 제외한 겨루나 마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방인들을 분지 밖으로 내보내 준 것은 호의가 아니라 각개격파를 위한 곳으로 보여. 십만에 달하는 다프란 왕국의 전사들과 북부 군단의 정예 병사들이 요소마다 포진한 것이 구심점이 없는 이방인들을 해치우려는 것 같다는 것이 대장의 판단이야.”

     “헤엑!”

     하룬 대신 대답한 헤니의 말에 대원들은 다들 깜짝 놀랐다.

     “이런! 어쩐지 너무 쉽게 보내준다 싶었더니.”

     이제야 이방인들을 분지에서 내보내 준 암중의 이유를 알자 마리가 한탄을 했다.

     “하지만 그 병사들이 이방인들을 공격한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은데. 분지에서 탈출할 수 있는 황자 진영을 대비한 포석은 아닐까?”

     겨루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현재로써는 아닐 거 같아. 당장 분지만 해도 계속 다크 엘프와 북부군이 증원되고 있고, 분지 밖에서 상대하기 위해 여유 병력을 남겨 놓기보다는 그 병력으로 총공격을 하는 것이 더 나으니까. 더구나 분지를 포위하고 있는 병력과 달리 주로 하급 전사들이나 일반 병사들이 대부분이라니 기사들이 대부분인 분지 안의 황자 진영을 상대하기 위한 것은 아닐 거야.”

     하룬의 말에 겨루를 비롯한 새 이방인 대원들은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수 없었다. 제국 정보 길드의 정보가 확실하다면 고요의 땅 길목에 포진한 병력은 이방인을 해치우기 위한 것이 틀림없었다.

     “빨리 알려야 해요.”

     헤니가 움켜쥔 주먹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앞에는 많은 유저들이 전투에 특화된 북부 군단과 엘프 연합군에 학살되는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하룬은 네 사람에게 은밀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헤니를 제외한 세 사람에게는 첫 의뢰가 되는 것이다.

     “어때, 할 수 있겠어?”

     “뭐, 좀 어렵겠지만 할 수는 있을 겁니다. 이래 봬도 제가 아는 인물들이 꽤 됩니다. 방커와 마리도 꽤 인맥이 넓으니 어느 정도 숫자는 모을 수 있을 겁니다.”

     방커와 마리도 자신 있다는 듯 겨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겨루나 방커, 마리만큼은 아니지만 인공수정체 친구들을 통하면 어느 정도 숫자는 채울 수 있을 거예요.”

     “좋아.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이면 이 사태에 대한 일련의 사실들이 방송으로 밝혀질 거야.”

     “그런가요?”

     헤니는 하룬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본인도 직접 방송사와 거래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 건도 하룬이 아레스를 비롯한 가까운 이방인들을 통해 정보를 공개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일단 현실로 돌아갔다가 이 내용이 방송되면 그때 적극적으로 움직이라고. 그럼 설득하기가 더 쉬울 거야. 일단 방송이 되면 모임을 주선해 봐. 적어도 백 명 이상은 동원할 수 있는 친구들이라야 해. 물론 보안은 유지되어야겠지. 수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니까 되도록 입이 무겁고 믿을 수 있는 자들만 접촉해야 해. 행여 적들이 알면 이 계획은 허사가 될 테니까.”

     “알겠어요.”

     헤니는 영문을 잘 모르는 겨루와 방커 그리고 마리를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하룬이 어떤 식으로 이방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려 주어야만 했다.

     하룬이 향한 곳은 드워프들이 머무르는 장소였다. 비록 대충 인사는 나누었지만 타루가 족장은 할 말이 있는 듯 그를 데리고 원로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하룬은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붉은 모루 부족의 원로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벌써 이렇게 피난민 꼴이 되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정말 화가 나네. 인간들이야 그렇다지만 같이 핍박을 받는 소수 이종족으로서 엘프들이 감히 우리를 이렇게 대하다니. 대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다크 엘프들의 노예로 갇혀서 그들이 원하는 무기만 만들다가 죽어 갈 뻔했네. 대장과 돌풍 대원들에게는 고맙다는 말밖에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군.”

     타루가는 평소답지 않게 무척 흥분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엘프들이 자신들을 이렇게 대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사실 이들이 진수를 필두로 한 돌풍 용병대의 말을 무조건 믿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피해야 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타루가 족장과 원로들 그리고 일부 전사들이 마을에 남아 다크 엘프들이 진짜 자신들을 억류하고 노예처럼 부려 먹을 의향인지 확인까지 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다크 엘프 원로 중 한 명이 전사 백을 끌고 와 붉은 모루 부족에 단시간 내에 수십만 발의 철시를 만들 것을 명령했고, 만약 거부한다면 부족민 전체를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다크 엘프들의 의도를 확인한 대가는 작지 않았다. 싸움이 붙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았던 용병 수십이 죽고 드워프들 중에서도 넥이나 죽는 처절한 전투 끝에 드워프와 용병들은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용병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공격 준비를 취하지 않았고, 다크 엘프들의 숫자가 조금만 더 많았다면 그마저도 어려울 뻔했다.

     “휴우,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이 고요의 땅은 이미 다크 엘프들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으니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고.”

     한 원로의 한탄이 바로 그들의 현재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붉은 모루 부족은 현재 희망이 없었다.

     “대장,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일족이 다 죽을 때까지 항전하고 싶지만 어린 드워프들이 무슨 죄겠는가.”

     지도자의 고민이 뚝뚝 묻어 나오는 타루가의 말에 하룬도 처음에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고요의 땅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걸음도 느리고 많은 짐을 가지고 있는 드워프까지 동행한다면 정말 어려운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 뿐인데 왜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거지?”

     한 원로의 한탄에 하룬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뭘 말인가?”

     하룬에게 뭔가 의견이 있는 것 같아 보이자 원로들이 긴장하며 그를 주시했다. 아무튼 현재 자신들이 의지할 대상은 돌풍 용병대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인간이면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신들을 친구로 대한 유일한 존재들이었다.

     “분지 아래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그레이브 시티라고 부르는 지하 도시입니다.”

     비록 그린 엘프들이 신신당부한 비밀이었지만 하룬은 어쩔 수 없이 그 존재를 밝히고 있었다. 이들이라면 알려도 괜찮을 거 같았다. 아니, 서로 좋은 일이 될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지하 도시? 햇빛도 없는 지하에 도시를 건설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태양은 없지만 대신 거대한 발광석이 있어 그 빛이 식물까지 자라게 만들더군요. 다크 엘프들에게 밀린 그린 엘프들이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호오! 정말 신기한 일이군. 우리 드워프 종족의 오래된 이야기 중에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만 단지 전설이나 꾸며 낸 이야기로 여겼는데 실제로 있을 줄이야.”

     타루가의 말을 들어보니 이런 장소가 또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실제로 보기 전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자신도 타루가와 다름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헌데 문제가 있네, 하룬 대장. 그들이 과연 우리를 동거인으로 받아 줄지, 또 그곳이 우리가 살 수 있는 환경이 되는지는 모르지 않나.”

     하룬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같은 적을 가진 것만으로도 그린 엘프들은 드워프들을 받아줄 것이다. 또 살 수 있는 환경이란 단순히 먹고 자는 것이 아니라 드워프들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말하는 것이리라.

     “제 생각으로는 그린 엘프들도 여러분을 반겨줄 것 같습니다. 같은 처지이니까요.”

     “그럴까?”

     한 번 엘프에게 당해보니 겁이 나는 모양이다. 더구나 지하라니 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는 도중에 엄청난 열천을 봤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광석들이 매장되어 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일단 피할 곳이 필요하니 당분간 거기서 기거하는 것이 어떨지요.”

     “휴우, 할 수 없지. 우리에겐 당장 안전한 곳이 필요하니.”

     타루가는 시무룩한 얼굴로 하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잠깐! 열천이 있다고 했소, 대장? 얼마나 뜨거운 열천이오?”

     평소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던 원로 하나가 흥분한 얼굴로 물어봤다. 나이가 가장 많은 이였다.

     “글쎄요. 손을 넣으면 금방 익을 정도라고 해야 하나요? 자세한 온도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뜨거웠습니다. 그런 열천이 그레이브 시티 인근에 많았습니다.”

     원로들의 얼굴이 갑자기 상기되었다. 빛을 잃었던 그들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쳐졌던 어깨가 위로 올라왔다.

     “어쩌면 백화가 가능할지도…….”

     “맞소. 열천이 있다는 것은 근처 어딘가에 엄청난 고열을 뿜어내는 물질이 존재한다는 말이오. 게다가 열천이 많다니 멀지 않은 곳에 그 열원이 있다는 이야기요. 당장 가야 하오. 어차피 광석이야 그곳 주변에 없다면 좀 귀찮고 위험하지만 이 근처에서 채광해서 옮기면 되는 일이오.”

     갑자기 원로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하룬의 말을 계기로 활발하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열천에 관계된 뭔가가 이 드워프들의 작업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룬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자신을 의식하는 것 같은 눈치가 보였다. 약간 지루하다는 느낌이 막 들었을 때 마침내 타루가와 원로들이 하룬에게 다가왔다.

     “하룬 대장, 당장 가겠네.”

     확실하게 결정을 했는지 누구 하나 불만스러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당장 처리할 일이 있으니 하루 정도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분지를 포위하고 있는 다크 엘프들과 북부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니까요.”

     “오! 그렇군.”

     타루가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당장 가지 못하는 것이 서운한 얼굴이다.

     “가만! 그거라면 대장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뭘 말입니까?”

     하룬이 기대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간 시꺼먼 얼굴과 속을 가진 엘프 놈들의 속셈을 모르는 상황에서 놈들이 주문했던 활과 철시를 만들고 있었네. 비록 대궁이지만 일반궁 무게밖에 되지 않는 활이 천오백에 철시가 사만 오천 발이니 잘 사용하면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걸세. 유효사거리도 기존에 엘프들이 사용하던 것보다 백여 미터 더 기네.”

     “정말입니까?”

     타루가의 말에 하룬은 침을 삼켰다. 정말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1황자 진영에 철시를 모아 달라고 부탁은 했지만 과연 다카린 용병단원들이 가진 활로 철시를 날릴 수 있는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들과 헤어지면 도네이스와 다카린 용병단원들을 대상으로 몇 개 가져온 철시들을 이용해 시험을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활이 있으면 굳이 시험할 필요가 없다. 엘프들도 쏘는데 오랜 경험이 있는 다카린 용병들이 그걸 사용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리 오게. 우리 부족의 마법 배낭에 모두 쓸어 담아 놓았으니까.”

    타루가와 원로들이 하룬을 그들의 마법 배낭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것은 일전에 타루가가 지고 있었던 큰 짐의 형태를 지녔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 배낭처럼 손을 넣어 원하는 것을 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좌표를 이용해서 물품을 보관하는 것 같았다.

     타루가는 합금으로 만든 은색의 큰 활대와 활줄 그리고 철시들을 꺼냈는데 그 양이 거의 마차 두 대분은 될 정도였다.

     “이 활대는 미스릴 가루를 비롯해 엘프들이 가져온 마법 재료를 강철과 섞어 만든 것이네. 굳이 마법진을 그리지 않아도 복합궁보다 뛰어난 탄성도는 물론 강력한 내구성과 복원력을 가지고 있네. 또 이 활줄은 트롤의 힘줄을 찌고 말리길 여러 번 반복한 다음 마법 처리를 한 것이기에 철시의 사거리를 늘려 주네.”

     하룬은 한쪽 끝에 활줄이 걸린 상태의 은색 활을 들어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맑은 은색 광택을 가진 활은 무게가 그 크기에 비해 가볍고 손에 착 붙었다. 줄을 걸고 당겨 보자 그리 큰 힘이 아닌데도 활대가 쉽게 구부러졌고, 손을 놓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활줄이 튕겨졌다.

     ‘다크 엘프들 때문에 좋은 물건을 얻었구나.’

     흐뭇한 마음으로 활을 한참 보자 심안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활에 대한 정보가 보였다.

    『강탄성궁

    등급: 레어

    내용: 붉은 모루 드워프 부족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활로, 희귀한 마법 재료들과 강철을 섞어 경량화는 물론 탄성과 내구성을 극대화시켰다. 트롤의 힘줄을 가공한 활줄로 인해 사거리와 정확도를 크게 증가시켰다.

    무게: 약 3킬로그램

    길이: 1.8미터

    사거리: 유효 900미터』

     이 정도면 쿼럴로 쏘는 석궁의 위력을 극대화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단순히 사거리만 늘린 것이 아니라 궁수의 실력에 따라서는 연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컸다.

     마나 궁술을 가진 도네이스와 같은 명궁의 손에 들리면 그 위력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화살이 강철 촉에 그 대가 철이니 마나를 주입하면 기사들의 갑옷은 웬만하면 다 뚫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덥석 받을 수는 없다. 어찌 되었건 드워프들의 정성과 노고가 들어간 명품이 아닌가?

     “저…… 대금은?”

     “주지 않아도 되네. 자네와 돌풍 용병대가 아니었으면 우리 일족이 어찌 지금 이렇게 살아 있겠나? 더구나 자네는 우리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차피 그 활과 화살은 이곳에 우리가 자리를 잡는 조건으로 만들었으니 자네가 주인이나 다름없네.”

     “저야 그냥 받으면 좋지만 어째 마음이 편하진 않네요.”

     “하하하, 역시!”

     하룬이 곤란해하는 태도를 본 타루가와 원로들은 그 모습에 만족한 듯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괜찮소, 대장. 대장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하고도 넘치는 보상을 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오. 더구나 우리에게 우리 선조들이 만져 보지 못한 희귀한 재료인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과 뼈를 가공할 기회까지 주었으니 그렇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되오. 우리는 이것만으로 부족해 다른 것들까지 준비했으니 구경이나 해보시오. 우리 원로들이 돌풍 용병대를 위해 따로 준비한 것은 마나 통신구요.”

     이런 일이!

     원로들은 하룬과 돌풍 용병대가 자신들의 일족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공동으로 만든 마나 통신구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 마나 통신구는 별도의 중계소나 기구 없이 통신할 수 있는 물건이라오. 뭐, 핵심적인 기술은 이 안에 들어있는 중급 마나석의 마나를 일정한 양만큼 진동시켜 마나파를 형성시키고 마법 재료로 만든 안테나를 통해 그 마나파를 쉽고 빠르게 받아들이도록 한 것이오.”

     설명은 들었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하룬이 알 리가 없다. 다만 이 마나 통신구가 일종의 무선 송수신기의 원리를 차용했다는 것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룬은 마나 통신구의 외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치 아령처럼 생긴 마나 통신구는 현실에서 고대 문명의 유물이었던 무전기라는 것과 유사해 보였다. 잘 보니 한쪽에 켜고 끌 수 있는 작은 단추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고,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안테나와 비슷한 부속만 있을 뿐 달리 특이한 점은 없었다.

     그렇게 살펴보는 사이 심안이 발동해 그 정보가 보였다.

    『마나 통신구

    등급: 레어

    내용: 특정한 주파수를 가진 마나파를 이용한 개인 간의 통신구다. 때문에 범용으로 사용할 수는 없고 반드시 지정된 통신구를 가진 상대와만 통신이 가능하다. 중급 마나석을 사용했기에 따로 충전할 필요가 없다.

    통신 가능 거리: 약 120킬로미터

    옵션: 마나석을 상품으로 교체하면 그 거리를 늘릴 수 있다.』

     “정말 꼭 필요했던 물건입니다. 이런 뛰어난 마법 물품을 가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룬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본 원로들의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렇게 좋아할 줄은 사실 자신들도 몰랐다. 진수정을 비롯해 여러 개의 특수한 마법 재료들을 사용해 손수 마법진을 새기고 많은 실험을 통해 발생하는 마나파를 정교하게 일치시키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그간의 노고가 전혀 아깝거나 힘들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마나 통신구의 수량은 모두 삼십 개였다. 그중 세 개는 더 부가적인 기능을 가져 다른 모든 마나 통신구와 동시에 통신을 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대장과 돌풍 용병대는 벌써 오래전부터 우리 붉은 모루 부족과는 친구이지 않은가. 우리를 두 번이나 구해준 은혜에 비한다면 이건 약소하네. 기다리게. 내 원로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으니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과 뼈로 멋진 방어구를 만들어내고 말 테니까.”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빈 포션 병이 필요합니다. 되도록 많이요.”

     지난번에 임시로 만들었던 화염병은 모두 썼기에 새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효과를 아주 톡톡하게 보았으니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거야 쉽지. 그건 간이 용광로만 있어도 만들 수 있으니까. 크기는 어느 정도면 되는가?”

     “그거야 보통…… 아니, 손가락 크기에서 주먹만 한 것까지 다양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크기를 다양하게 부탁했다.

     “하하!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 오늘 내로 만들어 주지.”

     “감사합니다.”

     하룬은 뜻밖의 선물에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한 후에야 겨우 그 물건들을 아공간에 넣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성심으로 대하니 그 이상으로 보답하는 드워프들이었다.

     하룬은 대원들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왔다. 할 일을 준 헤니와 세 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저마다 할 일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그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는 일단 대원들을 불러 보았다.

     “여러분이 할 일이 있습니다.”

     하룬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들에게 현재 분지 상황과 고요의 땅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상황들을 설명하고는 자신이 황자 진영으로부터 받은 의뢰의 내용까지 밝혔다.

     “대단한 의뢰군요!”

     티노는 흥분했는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의 역량으로 이 의뢰가 가능할까요, 대장?”

     “그래요. 이 정도의 일이라며 적어도 제구 10대 용병단 서넛은 연합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도네이스도 걱정이 되는지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뭐, 저들을 끝까지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주의를 끌고 최대한 많은 숫자를 한 곳에 모이게 하는 일이라면 굳이 못 할 것도 없지. 아무튼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우리 돌풍의 이름은 일개 용병대를 넘어설 것이 확실하네.”

     딜런은 그리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과 하룬 그리고 대원들의 능력을 믿었다. 이왕 대장이 이 의뢰를 받아들였을 때는 생각한 바가 있었을 테니 낙관적으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려운 의뢰일수록 흥미를 가지는 그의 성격은 이럴 때 빛이 났다.

     “우리가 할 일은 정확히 뭐요, 대장?”

     타니엘라는 자신이 돌풍 용병대에 들어온 후 처음 수행하는 의뢰이라서 그런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의 임무는 분지 안과 밖에서 연합군에 공격을 가해 최대한 주의를 끄는 것입니다.”

     “흠. 그럼 한쪽으로 힘이 몰린 사이 황자 진영이 허술해진 곳에 맹공을 가해 분지를 빠져나간다는 전략이군.”

     “맞습니다, 딜런 경.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필요할 뿐 아니라 연합군의 주의를 확 끌 수 있을 정도의 위협을 가해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룬이 의뢰 내용을 확실하게 밝히자 저마다 나름의 방법을 찾느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일단 우리를 도울 인원부터 구해야 합니다.”

     티노의 말에 타니엘라도 동의했다. 작전의 요체야 간단하지만 연합군의 주의를 확 끌 수 있을 정도의 전과를 올리려면 상당한 무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일단 헤니를 비롯한 네 이방인 대원들에게 부탁해 이방인들을 찾아보게 했습니다. 또한 분지 안에서 내응할 인원은 내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모을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하룬이 가장 중요한 일에 착수했다는 것에 안심하면서 다른 것들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그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일만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네.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니 그 이상이 필요할지도 모르네. 최소 그 정도 병력이 아니면 길게 능선을 따라 포진해 있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엘프와 북부군 연합을 효과적으로 한곳에 끌어들이기 힘들 걸세.”

     딜러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그래서 신무기를 쓸 생각입니다.”

     하룬은 미리 준비해 온 활을 대원들에게 내밀었다. 대원들은 웬 활을 꺼내는지 연유를 몰라 궁금해했지만 도네이스는 활을 본 순간 줄을 당겨 보더니 연방 탄성을 터트리며 놀라워했다.

     “이건 강력한 위력의 활입니다. 드워프들이 제작한 것으로, 유효 사거리가 엘프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100미터가 더 길어 무려 900미터에 달합니다. 물론 화살은 엘프들과 똑같은 철시고요. 전 이 화살로 충분히 연합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웃, 대단해요. 사거리가 900미터라니. 게다가 이 뛰어난 탄성과 가벼운 무게 그리고 이 활대의 강도는 무기로 써도 될 정도예요.”

     활의 가치를 잘 모르는 나머지 사람들이야 그런가 보다 하지만 도네이스는 이런 물건이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도네이스, 이곳에 있는 다카린 용병단이 얼마나 되지?”

     “약 사백오십 명 정도예요. 물론 모두 2급 이상이고요.”

     “다들 활 솜씨는 어때?”

     “다카린 용병단은 활을 필수적으로 다루어야만 해요. 때문에 이곳에 온 단원들은 다른 용병들에 비하면 능숙하다고 할 수 있는 궁술 실력을 가졌어요.”

     기대하고 있던 하룬이 흡족해할 만한 대답이었다.

     “다행이군. 그럼 이 활을 숫자대로 내줄 테니 그것으로 분지를 포위한 연합군을 요격하면 되겠군. 아! 티노, 어비스에도 궁수들이 있을까요?”

     “있을 겁니다. 아니, 이 사람처럼 전문적으로 궁술을 익히지는 않았더라도 1급 정도 실력을 가진 용병들이라면 활을 다루는 것은 필수입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럼 못해도 최소 오륙백의 궁사가 확보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신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염병으로, 포션 병만한 크기면 약 2미터 반경을 2분 동안 태울 수 있는 화염을 생성시킵니다.”

     “정말인가, 대장?”

     타니엘라가 깜짝 놀랐다.

     “네. 지금 당장 보여줄 수는 없지만 워프 지역에서 탈출할 때 화염병을 사용한 화공으로 많은 적들을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인원과 실력이 부족한 마당에 굳이 난전을 벌일 필요는 없지요. 풀이 거의 자라지 않는 황무지에 경사가 완만한 분지 안쪽이라면 그 효용이 작겠지만 이 분지 밖 지형이라면 연합군에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이 두 가지 신무기에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도와준다면 연합군의 주의를 끄는 것은 쉽습니다. 문제는 그 상황을 한동안 지속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원들은 하룬이 말한 신무기에 탄복하면서 이번 의뢰를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토론을 통해 여러 변수를 고려한 전략이 차츰 완성되기 시작했다.

     밤새 현실로 돌아갔던 네 이방인 대원들은 고요의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방송을 본 다음 아침 일찍 출발해서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의 이방인을 데리고 본거지로 돌아왔다.

     “반갑습니다. 난 돌풍 용병대를 이끄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여기저기서 하룬의 인사에 호응하는 것을 본 하룬은 네 대원이 자신에 대해 꽤나 잘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들만 데리고 온 것인지는 몰라도 그를 향해 모든 유저들이 호감 어린 시선을 던지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한 것은 한 가지 일을 우리와 같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입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유저는 없었다. 하룬은 대원들이 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 되겠지만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분지 안의 상황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한 연합군의 진의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큰일입니다. 방송에서 그들의 음모를 밝혀주지 않았다면 넋 놓고 이곳에서 죽을 뻔했습니다. 하룬 대장님,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전투입니다. 다크 엘프들과 북부 군단을 상대해서 황자 진영이 무사히 분지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끝까지 저들과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몸을 빼면 됩니다.”

     거기까지는 모두 들은 것 같았다. 전투 이야기가 나왔지만 흥분한 것 이외의 다른 표정은 없었다.

     “레벨 80 이상은 1인당 150골드, 90 이상 200, 95 이상은 300골드를 전투 수당으로 준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습니까?”

     역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었다. 유저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사냥터와 퀘스트가 포화상태가 되자 예전보다 사냥감과 아이템의 가격은 빠르게 내려갔기에 요즘은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알게 된 네 유저가 위험하긴 하지만 엄청난 액수의 보상을 제시한 것이다.

     “네, 맞습니다. 전투가 종료되는 순간 여기에 있는 우리 대원들이 지급할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 돌풍 용병대원들의 지시를 엄수해야만 합니다. 지시를 어긴다든지 작전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 단체에는 보상을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걸린 전투이니 추호도 실수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계약서를 통해 명확하게 약속을 해야 합니다.”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몇 번이고 지시에 대한 절대복종을 요구했다. 자신이 너무 빡빡하게 구는 것 같아 혹시 거부할 유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거부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돌풍 용병대와 같이 전투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보상도 받고 레벨도 높일 수 있는 기회인데 당연히 해야지.”

     유저들은 소리 높여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철시 공격만 없다면 레벨 100~120대의 엘프들과 80~100의 북부군 정예병들을 상대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비욘드 게임을 한 이래 이렇게 큰 규모의 집단 전투에 주축으로 돌풍 용병대와 같이한다는 생각은 유저들에게 강한 흥분과 자극을 주었다. 알려지길 하룬의 돌풍 용병대는 실패할 의뢰는 애초에 맡지도 않는다고 했으니 걱정할 일이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한 분씩 앞으로 나와 계약서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하룬은 미리 계약서를 준비한 헤니를 앞으로 내세웠다. 계약은 빠르게 끝이 났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헤니가 미리 모두에게 설명했기에 서명을 받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중소 길드의 길드장들은 비밀 엄수를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가는 대로 은밀하게 다시 이곳으로 집결할 것이다.

     “모두 얼마나 되나?”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하는 네 사람은 금방 계약한 인원을 뽑아내었다.

     “모두 서른네 개 길드에 4,814명입니다. 95 이상이 420명, 90 이상이 1,680명이네요. 80 이하는 2,714명입니다. 직업별로 보면 마법사가 348명, 궁사가 89명, 나머지는 검사 계열입니다.”

     생각보다 쓸 만한 전력이 많아 다행이었다. 딜런은 일만 이상을 이야기했지만 하룬은 오천 명 정도를 예상했다. 형제와 같은 두 용병단과 동맹을 맺은 이방인 길드의 길드원들이 가세하면 충분했다. 분지 안쪽도 다른 용병드로가 이방인들을 끌어들이면 그 정도 인원은 될 것이다.

     “일단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다른 대원들이 짠 계획을 듣도록 하지. 모두 수고했어.”

     하룬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대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곳으로 향했다.

     티노에게 나머지 일을 맡긴 하룬은 서둘로 붉은 모루 일족을 데리고 예전 드워프들의 마을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비록 분지와 가까운 곳이었지만 모든 드워프가 떠난 동굴 마을은 괴기스러운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 머무르고 있던 병사들과 갱도 입구에 있던 경계병들은 싸가지의 수면독을 이용해 재웠다. 때문에 그 많은 드워프들이 엄청난 양의 짐을 들고 갱도를 통해 지하 암도로 이동한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레이브 시티의 위치와 가장 가까운 길은 어느 정도 짐작하는 터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볼카웜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사실 화염병의 필요성 때문에 한 마리 정도 더 볼카웜을 잡을 생각이었던지라 내심 나타나길 기다렸는데 말이다.

     그레이브 시티에 도착한 하룬은 그린 엘프들에게 환대를 받았다.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던 식량을 아주 많이 가져왔기 때문이다. 마차 두 대 분의 마법 배낭이 열다섯 개나 되었다. 유저들 중에는 이렇게 마법 배낭으로 폭리를 취하려고 식량을 가져온 자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비록 높은 가격이었지만 헤니를 통해 사들인 것이다.

     그린 엘프들은 드워프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들 역시 무기를 위해서라도 드워프들의 솜씨가 필요했다. 둘 다 이득이 되는 일이니 분위기가 좋지 않을 리 없었다. 더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드워프들은 흥분해 있었다. 열천에 관계된 일 때문인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들어도 모를 것 같아서 애초에 묻지도 않았다.

     드워프들은 그린 엘프들이 내준 구역의 암석 집들에 짐을 풀었다. 늘 불을 가까이하는 드워프들이라서 그런지 이 그레이브 시티의 열기도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든 데 일조했다.

     “고맙네.”

     로드는 하룬의 손을 꽉 잡고 놔주질 않았다. 식량 사정이 무척 열악했던 것 같았다. 지난번 자신이 준 양도 꽤 많았지만 이곳의 인구가 많으니 곤란했을 것이다.

     “아닙니다. 귀한 물건을 서슴없이 내주신 분들인데 이건 정말 약소합니다.”

     “아니네. 대원로들까지 식량 때문에 동분서주하는 상황이었네.”

     하룬은 그제야 로드와 함께 있었던 대원로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예전 기록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우리 엘프들과 약속을 지키려는 인간은 별로 본 적이 없네. 우리와 인연을 맺은 덕분에 유명해지거나 힘을 가지면 오히려 이종족인 우리 엘프들을 멀리하거나 소홀하게 대하는 인간들이 아주 많더군. 그런데 하룬 대장은 식량뿐 아니라 우리가 꼭 필요한 드워프 친구들까지 데리고 왔으니 그야말로 우리에겐 더없는 친구이자 은인이네.”

     하룬은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쑥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만 지었다. 사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물론 오기 전에 그린 엘프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구했지만 사실 이건 드워프들을 맡아 주는 선물이었다.

     “마침 스카이루프에 있는 일족들과도 연락이 되었네. 머지않아 우리 일족이 하나가 되어 이 고요의 땅에서 다크 일족을 몰아내게 될 걸세. 그때까지만 도와주게. 반드시 친구에게도 우리가 힘이 되어 줄 테니.”

     “알겠습니다.”

     로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잘 알고 있다. 지속적으로 식량을 지원해달라는 것이리라. 자신이 로드에게 받은 아이템들은 식량 따위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나중에라도 기회가 된다면 식량을 더 구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로드가 식량 사정을 걱정해야 할 정도이니 그 사정이야 뻔했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자신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면 되는 것이다. 이미 그에게는 천문학적인 돈이 있었다. 아공간에 있는 현금만 해도 물경 200만 골드가 넘는다.

     “아!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그렇게 물으면서도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태세인 것을 보니 로드가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곧 트레저 분지를 빠져나가기 위해 큰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저를 도와 다크 엘프들과 싸울 수 있는 엘프 궁사들을 좀 빌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호오! 그런가? 한데 정령사나 전사가 아니라 궁사라. 무슨 이유라도?”

     “사실은 드워프들에게 멋진 활을 받았습니다. 지금 다크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롱 보우보다 훨씬 뛰어난 기능을 가진 명품이지요. 한데 분지 안에는 이 활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분지 밖에는 다카린 용병단이 있어 든든했지만 분지 안에는 제대로 활을 다룰 수 있는 인원이 별로 없었다. 활의 효용은 경사가 완만한 분지 안이 더 높았다.

     “어떤 건가?”

     “이겁니다.”

     하룬은 마법 배낭에서 강탄성궁을 꺼내 보여 주었다. 활 다루는 솜씨를 타고난 엘프 로드답게 보는 것만으로 눈이 커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강탄성궁을 받아 이리저리 쓰다듬고 만져보았다.

     “이, 이런 활이 있다니. 귀한 미스릴 가루며 여러 금속을 합해 만들었군. 이 정도의 강도를 지닌 활이 이렇게 탄성도 높다니 정말 명품이야.”

     “유효 사거리가 900미터라고 하더군요.”

     “정말 그 정도는 되겠군. 철시를 쓴다면 무시무시하겠어. 이렇게 뛰어난 활이라면 다크 엘프들이 가진 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 이 활을 정말 저 붉은 모루 부족이 만들었단 말인가, 대장?”

     로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크 엘프들이 가진 롱 보우에 많은 피해를 보았던 그로서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정을 하룬은 잘 이해했다.

     “네. 다크 엘프들이 그 재료를 제공해주긴 했지만 만든 것은 분명히 저분들입니다. 저들을 잘 대해주면 그린 엘프들은 막강한 신무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알겠네. 정말 귀중한 정보일세. 내 항상 대장에게 신세만 지는군. 언제 어떤 상황이든 반드시 대장의 부탁 한 가지는 꼭 들어주겠네. 우리 일족의 모든 목숨이 걸린 위험한 일이라도 말이네.”

     로드는 굳은 얼굴로 하룬에게 약속했다.

     ‘내가 한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로드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너무 겸양하는 것도 꺼려졌지만 어쨌든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고요의 땅에 머무르는 그린 엘프들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순간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엘프 궁사 오백을 지원해 주겠네. 우리에게도 이 활을 사용해 볼 좋은 기회가 되겠지.”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목숨이 살아나게 될 겁니다. 또 다크 엘프들에 대한 선입관으로 엘프들을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것도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야 떠올린 생각이지만 그 말을 들은 로드는 활짝 웃었다.

     “껄껄껄, 과연 그렇군! 우리 일족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폐쇄적으로 살 수는 없지. 인간들과 조화롭게 공존하려면 힘도 있어야겠지만 우리 그린 엘프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 우리가 다크 엘프들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점도 보여주어야만 해. 대장이 이렇게 깊은 생각으로 꺼낸 이야기인데 난 그것도 모르고 사상자가 나올까 봐 두려워 꺼렸네.”

     로드는 대원로들을 불러들여 하룬과 나눈 이야기를 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전에 인연을 맺었던 바리아 원로를 수장으로 한 오백의 엘프 궁사들에게 하룬을 지원하게 했다.

     로드는 헤어지기 직전에 자신의 신물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작은 녹색 정령석으로 만든 목걸이였는데 그것이 그린 엘프 로드의 신물이라고 했다.

     분지를 향해 길을 떠난 하룬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전 볼카웜 새끼들을 처리했던 곳을 들렀다. 기대와 달리 그곳은 새까맣게 탄 상태로 전혀 변화가 없었다.

     ‘볼카웜을 이렇게 찾아 헤맬 줄은 정말 몰랐네.’

     바로 지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폐허가 된 이상한 곳에 들른 하룬의 행동을 바리아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굳이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저 뭔가 찾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지금 하룬과 같이 다크 엘프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대와 불안에 휩싸여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큰일이네. 지난번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티노에게 주고 왔는데.’

     이번 전투는 물론 이 고요의 땅을 벗어나도 쓸모가 많을 것 같아 이곳을 떠나기 전에 될 수 있으면 잔뜩 만들어 둘 생각이었던 터라 실망감이 컸다.

     막 하룬이 몸을 돌려 몇 걸음을 뗀 순간 여전히 괴기하게 변한 공동의 모습을 구경하던 한 엘프 궁사가 소리를 질렀다.

     “어! 저게 뭐지?”

     하룬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열천 밖으로 빠져나오는 거대한 볼카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달리 몸통 부분이 튀어나온 괴기한 모습의 볼카웜은 열천을 천천히 기어 나와 이제는 까맣게 변색한 땅으로 힘겹게 향하고 있었다.

     ‘암컷이다! 알을 낳으려는 것인가?’

     보는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유달리 무거워 보이는 몸짓도 그렇고 비록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천천히 이동하면서 괴기한 신음을 내고 있었다. 이곳의 열천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아마 이곳보다 더 좋은 부화 장소가 없어 다시 이곳을 찾은 것 같았다.

     “보, 볼카웜이다!”

     “으으으!”

     어릴 때부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볼카웜의 거대한 모습을 본 엘프들 사이에서 겁에 질린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내 엘프 궁사들에게 활을 재게 만들었다.

     “멈춰!”

     하룬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공동 안으로 뛰어 내려갔다.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다. 놈의 몸통 가죽이 비록 아이언 스네이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고는 해도 화살에 쉽게 뚫릴 정도는 아니다.

     꾸워어!

     시끄러운 소리에 놀란 볼카웜이 민첩한 몸놀림으로 몸을 돌렸다. 열천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방금 전과는 달리 무척 빨랐다. 아무리 흉악한 몬스터라도 모정은 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피하려는 것이다.

     하룬은 달려가며 피닉스를 제외한 세 정령을 한 번에 소환했다.

     -라이피는 놈의 몸을 붙들어! 나이아는 워터 밤! 위신느는 바람칼로 놈의 진로를 막아!

     정령들은 미처 대답할 틈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소환 즉시 하룬의 부탁대로 움직였다.

     끄으악!

     비명과 비슷한 기괴한 소리와 함께 볼카웜은 버둥거릴 뿐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바닥이 마치 족쇄처럼 몸을 빨아 당긴 것이다. 그와 동시에 크고 넓은 항문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물 덩어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했고, 나아가려는 앞쪽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거대한 바람칼이 선회하고 있었다.

     볼카웜이 공황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해 가까이 간 하룬은 꼬리 쪽을 밝고 도약했다가 놈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그의 손에는 마나를 가득 머금은 본 소드가 쥐여 있었다.

     푸욱!

     마나를 머금은 본 소드는 볼카웜의 머리뼈를 뚫고 깊숙이 박혔다.

     끄아악!

     비명과 함께 발광하는 볼카웜은 결국 라이피의 힘을 이기고 몸의 자유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이내 빌로우 검술을 응용해 머릿속을 휘젓는 본 소드에 뇌가 곤죽으로 변하자 서서히 죽어갔다.

     -수고했어, 친구들. 이제는 돌아가도 좋아.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자 하룬은 세 정령을 돌려보내고 놈의 주둥이로 내려섰다.

     “역시!”

     위급하면 생성되는 물질인지는 몰라도 놈의 주둥이와 앞에는 하룬이 원하는 걸쭉한 액체가 잔뜩 고여 있었다. 하룬은 드워프들에게 받은 많은 유리병을 꺼내 그 약체를 용기에 채우고는 고무로 만든 마개로 단단히 막았다.

     “저 인간, 인간이 맞습니까?”

     한 엘프 궁사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바리아 원로에게 물었다.

     “맞을걸.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위대한 존재는 아닌 것이 확실해. 뭐, 저 정도이니 로드나 대원로들이 우리 그린 엘프의 친구로 인정했겠지.”

     “그렇군요. 우리 일족의 친구는 괴, 굉장히 무섭군요. 전 혼자 힘으로 볼카웜을 잡는 존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직접 보기 전에는 그랬다네.”

     그래도 바리아 본인은 일전에 이런 가능성에 대해 의심할 상황을 겪었기에 덜 놀랐지만 엘프 궁사들은 앞에 있는 궁사들의 말을 전해 듣고는 마치 파도를 타듯 놀람과 경악성을 토해냈다.

     ‘휴우, 방금 전 한 번에 정령 셋을 불러냈다는 것을 알면 까무러치겠군.’

     바리아는 그것까지 말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랬다가는 정령 마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였다.

     “다 됐습니다. 이제 위로 올라가면 됩니다.”

     어느새 하룬은 볼일을 마쳤는지 가까이 와 있었다. 만족스러워하는 하룬의 얼굴을 본 바리아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볼카웜의 거대한 사체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것은?”

     “아! 그렇지요.”

     하룬은 깜빡 잊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정령을 소환했다.

     화르르!

     -피닉스, 태워 버려.

     -후후, 멋지겠군요.

     볼카웜의 주둥이 가까이 날아간 피닉스의 입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마치 폭탄처럼 쏘아졌다.

     “갑시다!”

     “아, 네.”

     엉겁결에 몸을 돌리려던 바리아와 입구의 궁사들은 굉음과 함께 볼카웜의 사체가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강력한 화염인지 꽤 먼 거리였음에도 후끈한 열기가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설마 최상급 정령일까?’

     대원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리스 대원로가 몇 년 전에 최상급 정령을 소환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만 종족을 떠나 그 외의 존재가 최상급 정령을 소환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바리아는 앞을 향해 성큼 걸어가는 하룬의 뒷모습을 보며 알지 못할 경외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인간들과 전쟁을 하겠다고? 미친놈들!’

     바리아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증오해왔던 다크 엘프들이 가엽다고 생각하며 하룬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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