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새로운 대원들 (116/278)
  • 《새로운 대원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하룬은 빠르게 움직여 참호와 연결된, 볼카웜이 판 암도 하나를 찾아냈다. 타루가 족장이 준 지도의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다 들어 있었다. 비록 넓은 길은 아니지만 드워프들이 파 놓은 갱도가 암도 하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룬은 행여 나타날지도 모르는 볼카웜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긴장한 상태에서 걷다가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 암도를 통해 탈출시킬까?’

     암도를 걸으며 잠시 그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이 많은 인원이 이 암도를 통해 분지를 벗어나려 했다가는 오히려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아직도 맹렬하게 활동하는 볼카웜은 물론이고 분지를 주시하고 있는 적들의 이목에 걸리면 오히려 땅속에 영원히 매장당하는 수가 있다.

     어차피 그가 떠올린 계책이란 양동작전이 그 요체다. 하지만 이방인들의 경우는 얼마나 고용할 수 있을지 몰랐고 그 실력이 많이 떨어져 적들에게 제대로 타격을 입힐지 걱정이었다.

     ‘일단 분지 밖 상황부터 파악해야겠다.’

     하룬은 볼카웜의 등장을 걱정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오래지 않아 암도와 붉은 모루 부족 드워프들이 판 갱도가 연결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연결 부위가 흙으로 막혀 있었던 것이다.

     ‘무슨 문제가 있었군.’

     달리 막혀 있을 리가 없다.

     하룬은 갱도 저편 상황이 어떨지 몰라 약간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고는 라이피를 소환해서 막힌 연결 부위를 살펴보게 했다.

     -친구, 이거 아주 엉성하게 채워 놓았는데. 속이 비어 있어.

     -그래?

     아마 붉은 모루 부족은 돌풍 용병대와 함께 몸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룬이 올 경우를 대비해서 안은 허술하게 채우고 보이는 곳만 제대로 막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길을 뚫어 줘.

     -그거야 쉬운 일이지.

     라이피는 어렵지 않게 금방 길을 뚫었다. 하룬의 생각대로 연결 부위를 제외하고는 텅 비거나 혹은 부드러운 흙으로 대충 채운 것이다.

     마침내 드러난 갱도는 좀 심한 오르막 경사를 가지고 있어 보통 사람이라면 올라가기가 힘들겠지만 메신저 워킹을 펼친 하룬에게는 그리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갱도를 오른 지 한참 만에 드디에 평평한 곳에 도달한 하룬이 갑자기 넓어진 공터를 보고 안심하려는 순간 그의 귀에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왜 이곳을 지키라는 거야. 난쟁이 똥자루만한 드워프 놈들은 다 도망치고 없는데.”

     “그러게 말이야. 아마 상대도 안 될 드워프들에게 선발대가 전멸해서 그런 거 아닐까? 멍청한 새끼들! 드워프라면 그래도 상당히 호전적인 종족인데 겨우 선발대 백으로 어떻게 할 생각을 하다니, 생긴 것은 미끈한데 엘프들도 어지간히 돌머리인가 봐. 그나저나 심심해서 죽을 맛이군. 드워프 새끼들이 조그만 거라도 떨어뜨리고 갔으면 좋으련만 며칠을 뒤져도 먼지밖에 없으니. 제기랄!”

     인간이었다. 예전 드워프들이 설치했던 용광로가 있던 자리에 가죽으로 만든 특이한 방어구를 입은 병사 둘이 방만한 태도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벽에 기댄 두 병사의 시선은 갱도는 물론 통로에도 향하지 않았다.

     “그거 들었어?”

     “뭘?”

     “다크 엘프 새끼들이 엄청 깨졌다는 거.”

     “뭐? 정말? 그 무시무시한 놈들이 누구한테 깨졌다는 거야?”

     “저 검증의 관인가 하는 다섯 개의 산에서 지키고 있던 녀석들이 검증의 관을 나온 황자 일행의 공격을 받아 거의 오천 이상이 불에 타 죽었다던데.”

     “후와! 정말? 근데 어떻게 불에 타 죽었지? 그놈들 화살이 얼마나 무서운데. 정령 마법은 어떻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이곳으로 지원 나온 다크 엘프 전사장이 우리 대장에게 한 말이니 틀림은 없을 거야. 아무튼 그것 때문에 지금 다크 엘프들이 마치 악마처럼 변해 있다고. 이래서는 황자 일행이 투항하겠다고 결정해도 다 죽을 판이라던데.”

     “크크크. 시원하다. 그 얼굴 새까만 새끼들이 얼마나 오만하게 구는지 배알이 뒤틀렸는데. 흐흐흐.”

     “그건 나도 그래. 그 귀만 긴 검은 토끼 새끼들은 밤일할 때도 토끼처럼 그렇게 짧을까?”

     “캬캬캬. 아마 그러지 않을까?”

     “크크. 그럼 나 정도 되면 엘프 계집들이 환장을 하지 않을까? 내가 제법 오래 하는 편이거든.”

     “미친놈! 왕복 스무 번에 내려오는 놈이 무슨.”

     “이거 왜 이래? 토끼는 세 번이라고, 세 번!”

     “캬캬캬! 잘났다, 잘났어.”

     하룬은 조심스럽게 발을 끌어 소리를 내지 않으며 그들의 앞을 통과했다. 모닥불의 크기가 작아 하룬까지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음담패설로 변하고 있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행하게도 나머지 병사들은 통로와는 멀리 떨어진 동굴 안 깊숙이에 숙영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동굴 입구에도 경계병이 없었다. 드워프들이 판 갱도가 막힌 것을 확인했지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갱도 입구만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드워프들의 거주 동굴을 벗어난 하룬은 진수가 미리 이야기했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곳은 험준한 산을 몇 개나 넘은 곳으로, 위치를 보면 분지의 정서 쪽, 즉 호수에 대칭 되는 돌산이었다. 미리 이야기한 대로 돌산의 중턱에 있는 작은 숲으로 향하던 하룬은 익숙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장!”

     소리를 지르며 거대한 바위 밑에 교묘하게 가려진 그늘 안에서 뛰어나오는 사람은 바로 티노였다. 아마 그가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뒤를 따라 여전히 육중한 거구이긴 해도 이제는 여성미가 물씬 드러나는 도네이스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왔다.

     “대장, 몸은 괜찮은 겁니까?”

     “하하하, 그럼요. 그런데 이거 적을 경계하던 중이 아니라 연애하던 거 아니었어요?”

     “아, 아닙니다.”

     하룬의 농담에 손을 흔들며 부인하는 티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뭔가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왜 이제 와요? 다들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미처 하룬의 농담을 듣지 못한 도네이스가 그를 반겼다.

     “검증의 관까지 들어갔다 나오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 있습니까?”

     “절 따라오십시오. 히든 대원이 제대로 된 은신처를 물색해 두었더군요.”

     히든 대원이라면 진수를 말하는 것이리라. 진수는 하룬이 비욘드 세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자신도 신비감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 그것 때문은 아니었지만 지난번에 다른 대원들을 소개했을 때도 얼마 후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기에 대원들은 진수가 다른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농담처럼 히든 대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티노와 도네이스를 따라 돌산 중턱의 숲으로 들어간 하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넓은 공터를 볼 수 있었다. 대부분 거대한 바위들만이 보이는 산의 외관과는 달리 이 숲의 안쪽에는 넓고 평탄한 초지와 산 중턱에서 홀연히 떨어져 내리는 폭포가 보였다.

     폭포에서 시작된 개울물이 흐르는 초지에는 많은 막사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수련을 하는 등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에 익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바로 어비스와 다카린 용병단들과 동맹을 맺은 이방인 길드원들이었다.

     티노가 하룬을 안내한 장소는 공터의 입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거대한 동굴이 있었다. 동굴의 입구 옆에는 익숙한 막사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딜런이 바닥에 앉아 검을 쥔 채 명상에 빠져 있다가 기척을 느끼고는 벌떡 일어났다.

     “대장!”

     “하하. 딜런 경, 무사했군요.”

     생사를 같이했던 하룬과 딜런은 반가운 마음에 서로 깊게 포옹했다.

     “볼카웜의 체액에 강력한 독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고 무척 걱정했습니다.”

     “대장이 아니었으면 그 지하에서 죽었을 걸세. 고맙네, 대장.”

     “하하하! 같은 식구끼리 이런 소리를 들으니 좀 그러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요.”

     곧 안쪽에서 헤니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 미처 다 밀린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타루가를 비롯한 드워프들이 동굴에서 나왔고, 언제 소식이 전해졌는지 어비스와 다카린 용병단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까지 찾아왔다.

     한동안 정신없이 인사와 함께 그간의 상황을 설명한 하룬은 식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손님들을 물리치고 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룬은 검증의 관에 대한 대충의 이야기와 워프 지역을 탈출한 이야기 그리고 현재 분지 안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대원들로부터 드워프 마을 근처에서 진수를 만나 하룬의 안배대로 드워프들과 함께 이곳까지 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진수 형은 또 어딜 간 거야?’

     진수는 이들을 이곳에 데려다 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했다. 비밀 임무가 있다나.

     ‘아무튼 대책이 없다니까.’

     생각은 그랬지만 진수가 암중으로 돌풍 용병대에 기여한 것은 많았다. 던전으로 알려진 이곳 검증의 관을 발견한 것도 그였으며 볼카웜의 해처리 장소를 알려준 것도 그였다. 또 트레저 분지 외곽에 이렇게 교묘하게 외부와 격리된 안전 장소를 찾은 것도 대단한 정보였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밀린 이야기를 대충 풀고 난 대원들은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티노는 인근 지역을 정찰하기 위해 나갔고, 헤니는 드워프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하룬은 오랜만에 딜런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기회에 하룬은 딜런에게 검술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구했다.

     딜런은 볼카웜에게 부상을 당했다가 회복한 후 기도가 약간 달라졌다. 어딘지 부드러우면서도 무게감은 예전에 비해 더해졌다. 아마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룬은 그런 딜런에게 검과 검술에 대해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 범위를 넓혀가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다.

     “대장, 겨루라는 이방인이 찾아왔습니다.”

     하룬은 대원들과 감격 어린 해후를 나누고 딜런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도네이스의 말에 하룬은 순간적으로 마땅찮은 기분이 들어 눈썹을 꿈틀했다.

     이번에 데브론에게 확실하게 메신저 검술에 대해 배운 하룬은 딜런에게 조언을 구했다. 비록 검술의 내용이나 그 상세한 묘용까지 말할 수는 없었지만 반드시 익히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에서도 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기에 더욱 욕심이 났다.

     딜런이 평생 수련해 오며 깨달은 검에 대한 이론은 실로 놀라워서 듣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하룬은 검술이 아닌 검을 대하는 자세와 기본적인 파지법 등을 비롯해 기본적이면서도 다양한 검술 이론에 대해 딜런으로부터 배우는 중이었다.

     “그럼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 대장.”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파악한 딜런이 먼저 하룬을 배려해 일어났다.

     “네.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허헛! 그만큼 되니 깨달음도 있는 법이지. 지금처럼 정진한다면 내 경지에 도달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걸세.”

     딜런은 마치 데브론이 그랬던 것처럼 하룬을 향해 강한 신뢰와 기꺼움이 가득한 말을 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딜런이 나가자 겨루가 처음 보는 두 명의 이방인과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어려운 부탁까지 해 놓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인사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사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겨루가 수고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불의 정령 피닉스도 얻지 못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스승인 비도지존과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인사는 진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아닙니다.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그런 부탁이라도 들어드릴 수 있어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겨루는 작은 일이나마 하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겨루 님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룬은 재차 감사했다. 그의 감사가 생각 밖이었던지 겨루는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연방 손사래를 쳤다. 자신이 한 큰일은 생각하지 않고 받은 은혜를 더 중하게 생각하는 그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마침 동굴에서 나온 헤니가 준비한 찻잔을 놓고 나가자 겨루가 비로소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사실 이곳에 온 것은 대장님에게 객쩍은 감사 인사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겨루의 말에 하룬은 맑고 깊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런 그의 시선은 겨루의 내면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것 같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역시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하룬의 실력은 자신의 능력을 한참 상회한다고 여겼다.

     “저…… 무례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말을 꺼내 놓고 망설이는 겨루의 태도에 하룬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두근거리던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용기가 솟아올랐다.

     ‘역시! 고수는 눈빛 하나로도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고 하더니…….’

     겨루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까발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 하룬의 시선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때 겨루의 옆에 있던 여자 전사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아니면 용기를 냈는지 흔들리던 겨루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원으로 받아 주십시오.”

     “네에?”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게 전부라니. 그의 말을 들은 하룬이나 말을 한 겨루나 곁에서 듣던 두 전사 모두 황당해졌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이해한 겨루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마침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후후. 전직 특수군이라고 해서 무척이나 냉정하고 잔혹한 성정을 가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수하네.’

     하룬은 거듭 겨루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신만큼이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외모지만 지금 보니 제대로 나이가 보였다. 그런 그를 더 이상 당황스럽게 할 수는 없었다. 처음 듣는 순간에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어떤 뜻인지 이해했다.

     “하하! 좋습니다. 뭐, 다른 대원들의 의견도 들어봐야겠지만 일단 나는 겨루 님을 대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겨루 정도의 실력을 가진 유저는 없다. 일부러 영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인데 알아서 자신이 먼저 들어오겠다고 사정을 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돌풍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겨루는 이렇게 쉽게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에 받아들여질 줄은 몰랐는지 적지 않게 감격한 얼굴이었다.

     “나도 좋은 대원을 만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흡족한 하룬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는지 겨루는 상기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축하해요. 내가 선배니까 잘 모셔야 해요.”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흥미가 동해 어느 틈에 들어온 헤니가 짐짓 농담을 하며 겨루의 기분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물론입니다, 선배!”

     “하하하! 둘 다 같은 나이고 인공수정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잘 사귀어 보세요. 아, 헤니는 지금 다른 세상에서 인공수정체들의 권익을 도모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하룬의 말에 겨루의 눈이 커졌다.

     “어머! 그럼 겨루…… 님이 나랑 동갑이란 말이에요?”

     헤니는 심하면 삼십 대로도 보일 험악한 인상의 겨루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고는 이내 인공수정체라는 말이 깜짝 놀랐다.

     “반갑…… 반가워, 헤니. 헤니가 나처럼 인공수정체라는 출신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정말 반가워.”

     “……나도. 너무 놀랐어. 어쨌든 환영해.”

     헤니는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이제 한 식구가 된 겨루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조금 있다가 정찰 나갔던 티노 부대장이 오면 다른 대원들과 인사를 나누세요.”

     “네, 대장. 그리고 말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지.”

     하룬은 동갑에 같은 인공수정체인 겨루의 말에 내심 어색했지만 워낙 알려진 바가 그러니 굳이 사실을 밝히기도 힘들었다. 그의 말에 좀 진정된 겨루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제 친구들입니다. 둘 다 특수군 동기들입니다. 저처럼 인공수정체 출신으로 1, 2년 사이로 훈련소에 들어갔습니다. 둘 다 저와는 형제와 같은 사이로 제대 직전에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부상을 입고 제대했는데 그 능력만큼은 굉장히 뛰어납니다. 그래서 이 둘을 우리 용병대원으로 천거하고 싶습니다.”

     겨루의 말에 하룬은 두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방수라고 합니다. 이곳 이름으로는 방커라고 합니다.”

     꽤 키가 큰 편인 하룬에 비해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방커는 전사의 몸을 타고났다. 몸의 앞뒤로 강철 방패를 매단 특이한 방어구를 걸친 그의 무기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전투 도끼와 대도였다.

     “방커라고 합니다. 꼭 돌풍 용병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만약 받아 주신다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나오는 정광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거구였지만 몸은 균형이 잘 잡혀 있고, 강인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평소에는 더없이 순한 성격인데 일단 전투만 벌어지면 거의 버서커 수준으로 전투에 몰입하는 장점이자 단점을 가진 친굽니다. 용맹한 것으로 따지면 당해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저처럼 베타 출신입니다.”

     겨루의 소개에 헤니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하룬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호오! 그럼 익스퍼트 중급 정도는 되겠군.’

     심안을 통해 살펴본 그의 몸은 영락없는 전사의 그것이었다. 거기다 전신에 상당한 양의 마나가 분포하고 있어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라고 해요. 현실 이름과 이곳 이름이 같답니다.”

     자신을 소개한 마리는 방커에 못지않은 거구를 지닌 여성 유저였다. 손에 쥐고 있는 굵은 금속 봉을 보니 롱 보우를 다루는 것 같았다. 그 크기가 도네이스가 가진 세 개의 활 중 가장 큰 것과 비슷했다. 도네이스처럼 힘을 타고난 듯했다.

     “활 솜씨가 발군인 친구입니다. 둘 다 마지막 전투를 같이 했습니다. 둘 다 그 전투로 인해 저와 비슷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타 역시 같이했습니다.”

     겨루의 말 속에는 한때 대원이었던 두 사람을 향한 강한 책임감과 더불어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겨루는 두 사람의 심각한 부상에 상당히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 역시 쓸 만하겠군.’

     심안으로 살펴본 마리의 몸은 남자인 방커보다 더 좋았다. 근육의 밀도나 뼈의 굵기 그리고 마나의 유동도 힘차고 그 양 역시 많았다.

     하룬은 눈을 빛내며 두 유저를 보았다. 두 사람은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견디기 힘들었는지 잠시 마주 보다가 이내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좋습니다. 두 분 역시 환영합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던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실제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는지 보통 이상의 반응을 보이며 좋아했다.

     설마 이 대단한 용병대에 이렇게 쉽게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세 사람은 별다른 질문이나 시험 없이 흔쾌하게 자신들을 믿고 받아 준 하룬의 배포와 도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화통하고 멋진 분이군요. 최선을 다할게요.”

     나름 질문에 대비해서 며칠 동안 셋이서 모범 답안까지 만들어 면접 연습까지 했던 것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보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는 대장을 만난 것 같아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잠시 후 티노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도네이스와 함께 막사로 들어왔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은 그렇게 꼭 붙어 다녔다. 가끔 헤니가 그런 두 사람을 놀렸지만 둘은 뻔뻔하게 부부는 일심동체라며 당당하게 대응했다.

     하룬은 헤니에게 딜런을 불러오게 해서 모두에게 세 이방인을 대원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의견을 물었다. 대원들이야 하룬이 정한 것이 토를 달 리가 없어 세 사람은 즉시 대원으로 받아들여졌다.

     “호호. 마음에 딱 들어요. 힘도 장난이 아닐 것 같고 성격도 화통한 것이 나랑 비슷한 거 같아요.”

     “고마워요, 언니.”

     도네이스는 마리를 보는 순간 강한 호감을 표시하며 그녀를 반겼다. 두 사람 다 활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둘 다 엄청난 거구를 가진 점 때문인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마리는 나름대로 활달하고 애교가 많아 금방 다른 대원들과 말을 나누었지만 방커는 숫기가 별로 없는 성격인지 대원들이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하곤 했다.

     “좋은 몸들이야. 둘 다 꽤 거구지만 제대로 수련한 티가 나는군. 조금만 더 노력하고 실전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거야.”

     겨루야 이미 몇 번 본 사이여서 언급이 없었지만 말없이 두 사람의 몸을 살펴본 딜런의 말에는 하룬도 안심이 되었다.

     계약금으로 1,000골드를 받은 세 사람이 놀라는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제대 후 별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라 생활고에 시달려 왔던 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거금에 말을 잊고 한동안 멍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하하! 최선을 다하게. 우리 대장은 능력만큼 인정해 주니까.”

     티노의 말에 세 사람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의지를 불태웠다.

     ‘이거 꿈은 아니겠지. 세상에! 연봉 6,000골드라니. 게다가 의뢰를 맡으면 건당 전리품까지 배분하고 방어구와 무기까지 구입해 주면서도 이런 대우를 해주다니. 기억은 안 나지만 간밤에 분명히 돼지꿈을 꾼 거야.’

     세 사람은 육포와 포도주로 자신들의 돌풍 용병대 입대入隊를 환영해 주는 선배 대원들의 축하와 당부를 받으며 웃다 못해 입이 찢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하룬 역시 입이 귀에 걸리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돌풍 용병대원으로 받아들인 후 상태 창을 확인해 보니 셋 다 웬만한 기사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이름: 겨루

    종족: 인간

    직업: 검사

    레벨: 138

    칭호: 오우거 슬레이어(외 4개)

    생명력: 2,440

    마나: 2,260

    힘: 84(+5)      체력: 88(+5)

    지식: 42        지혜: 76

    행운: 10        민첩: 28(+3)

    지구력: 42      의지: 8

    S.P.: 84         명성: 520

    통솔력: 174』

     겨루의 상태 창을 보니 스텟치가 잘 분배되어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최초에 주어진 스텟이 최대 50에 레벨에 따른 스텟치가 276이니 모두 해 봐야 326에 불과하지만, 칭호에 따른 스텟치와 아이템에 의한 스텟치 그리고 자신의 경우처럼 동일한 행동이나 수련을 반복해서 생긴 스텟치가 무려 102나 되었다.

     검술 스킬도 세 개나 되었는데 모두 중급 레벨이었다. 통솔력도 뛰어나고 실제로 현실에서 다양한 전투를 경험한 고급 인력이었던 만큼 제 역할을 확실히 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방커와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방커는 레벨 132의 투사였는데 지식이나 지혜는 낮지만 힘과 체력은 엄청났다. 특히 방패술 스킬은 중급 5레벨에 육박해서 돌격이나 난전 상황에 뛰어난 실력을 보일 것 같았다.

     마리는 레벨 133의 궁사로, 마나 궁술이 중금 3레벨이고, 심안 스텟과 집중 스텟이 많이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도네이스의 실력에 비해서는 약간 손색이 있지만 용병으로는 1급에서 특급 사이는 되었다.

     ‘휴우. 이런 유저들이 무려 오백이란 말이지. 다들 뭐 하고 지내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초월적인 존재들이 있는 줄 모르고 하이 랭커들은 자신의 실력에 만족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새 대원을 가장 반긴 사람은 헤니였다. 그녀는 특히 자신과 동갑이며 같은 인공수정체들을 동료로 맞이한 것에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었고, 세 사람 역시 헤니에게 각별한 호감과 함께 그녀가 만들었다는 모임에 가입하기로 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기존의 사람들은 술과 음식 그리고 대화로 첫 만남을 축하하며 밤을 보냈다.

     밝은 햇살이 천막을 뚫고 비치고 나서야 하룬은 겨우 잠에서 깰 수 있었다.

     피로와 술 때문에 약간 늦잠을 잤지만 덕분에 몸과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고 활력이 넘쳐흘렀다. 마나 플로를 하고 났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개울로 나가 세수를 하고 돌아온 하룬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딜런을 볼 수 있었다.

     “허어, 이거 참!”

     아침부터 막사 앞에 앉아 낮게 한탄을 하는 딜런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딜런 경?”

     하룬은 딜런이 이렇게 난처해하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늘 검술에 대한 수련이 아니면 명상으로 비교적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말일세, 대장.”

     평소답지 않게 꽤 고민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하룬은 재촉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고민하던 딜런이 마음을 잡았는지 숙연한 얼굴로 하룬을 보았다.

     “대장, 내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십시오.”

     딜런이 하는 부탁이라면 웬만한 것은 들어줄 수 있다. 아니, 다른 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진수와 마찬가지로 천애 고아이자 친구 하나 없는 하룬에게는 식구이며 친구의 존재였다.

     “그게…… 사실은 어젯밤 늦게 타니엘라가 왔었네.”

     “그랬군요.”

     타니엘라가 다른 세력에 합류하지 않고 자신을 따라왔다는 것은 하룬도 잘 알고 있었다. 어제도 인사하는 중간에 그를 보긴 했지만 많은 시간을 내지는 못했다.

     “내가 기분이 좋은 연유를 묻기에 새 대원들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도 우리 용병대에 들어오겠다고 하더군.”

     “그래요? 마탑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걸로 생각했는데.”

     “그게 이번 검증의 관 때문에 마탑에 크게 실망한 것 같네.”

     무슨 사정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따. 이번 검증의 관에는 마탑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참가하지 않았다. 이미 큰 규모의 마탑들은 골드 배틀에 참가하는 황자들과 연수를 했기에 검증의 관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작은 규모의 마탑들은 한 세력으로 뭉치지 못했다. 아마 타니엘라는 그런 마탑에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

     “자신은 물론이고 아끼는 사제와 함께 마탑을 떠나 돌풍 용병대원이 되고 싶다고 하네.”

     “그렇습니까?”

     놀라운 이야기였다. 원래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대우 수준도 그렇지만 각종 실험이나 사위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마탑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상이다. 마법사인 타니엘라의 경지가 6서클의 비기너이니 그 사제도 최소 4서클 이상일 것이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전 그분들이 들어온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자는 생각입니다만.”

     “그게…….”

     역시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딜런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결심한 듯 입술을 떼었다.

     “나중에 마법서를 꼭 구해 달라고 하더군. 뭐든지 다 할 테니 1황자 전하가 입수한 마법서의 내용을 알려달라고 하네.”

     “마법서를요?”

     “노망이 난 것은 아닐 테고. 그 마법서들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뻔히 알면서 그런 부탁을 하다니. 더구나 그런 귀한 마법서를 1황자가 내놓을 리 없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조건을 내걸다니. 말로는 할 수 있으면 해달라고 했지만 말이 가지는 책임과 가치를 알면서도 그런 조건까지 받아들이며 그들을 영입해야 하는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네.”

     ‘내가 이미 마법서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은 것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 비록 쉬는 척했지만 그가 있는 자리에서 마법서의 내용을 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무려 열이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황자들이나 대마법사 대신 하룬에게 가능성을 찾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 거래의 대가로 마법서의 내용이 걸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가능성이 있었다. 황자들을 트레저 분지에서 탈출시키는 의뢰 역시 수행을 했으니 말이다. 또 황자들과 따로 인맥이 없는 상황이라 현재 그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라도 그 마법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걸로 생각되는 돌풍 용병대에 들어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관없지. 어차피 나도 마법서의 내용을 풀어줄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들이 필요했으니까.’

     일부러 찾으려고 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지만 좋은 기회였다.

     “알려준다고 하십시오.”

     “으응? 줄 수 있나?”

     “뭐,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고생한다면 구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허허허, 그렇군. 대장이라면 1황자 전하의 수중에 있는 마법서의 내용을 충분히 건네받을 수도 있지. 내가 너무 걱정을 하고 있었군. 하하하!”

     딜런은 대소를 터트리며 바람처럼 움직여 타니엘라와 그 사제들이 묵는 곳으로 달려갔다.

     바야흐로 새로운 인재 영입의 계절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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