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감정이라는 것 (115/278)

《감정이라는 것》

 네 사람이 현실로 돌아간 후 하룬은 이전의 숙영지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황자 진영이 판 참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지 이곳저곳에 파인 참호들이 마치 무덤처럼 보여 기분이 가라앉았다. 보물에 눈이 뒤집혀 이곳까지 왔건만 얻은 것은 없고 죽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죽을 자리를 파고 들어앉은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다.

 “하룬! 하룬 대장!”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건 바로 홀이었다. 그에게는 처음으로 여자로 다가왔던 존재가 그를 보고 있었다.

 창백하고 마른 얼굴에 쑥 들어간 눈은 그간 그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왠지 그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요?”

 우수에 찬 홀의 눈이 하룬을 향했다.

 “네, 비교적.”

 왜 대답이 짧은지 모르겠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한번 다쳐서인지 쉽게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다. 하룬은 자신의 좁은 도량이 부끄러웠지만 굳이 일부러 상대방을 배려해서 표정이나 태도를 꾸며 내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왜 자꾸 딱딱하게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그녀를 보면 묘하게 설레는데.

 “마음이 힘들어 수련에만 몰두했어요. 다들 열심히 수련했어요. 필립은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라섰고, 다른 단원들도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에요.”

 “다행이군요. 홀이 많이 신경 써 주십시오.”

 왜 자꾸 어색할까? 하룬은 이렇게 어색한 자리가 불편했지만 홀은 그와는 반대인 것 같았다.

 “네 사람을 수련 기사로 영입하자고 제의했던 홀리오 남작이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 사실 황녀 전하께 무척 혼이 났어요. 형제처럼 지내겠다고 해 놓고 뒤에서 배신한 꼴이라고요. 아버님도 그렇고 다들 대장에게 미안해하고 있어요.”

 하룬은 그 말에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마음이 많이 상했었다. 비록 그 시작은 용병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들을 쫄따꾸로 만들어 부려 먹으려던 사특한 마음의 발로였지만 시간이 흐르고 여행을 하면서 정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좋은 의도에서 한 일이니 마음을 풀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이 일로 무척 마음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말을 할 때는 얼굴도 들지 못했다.

 그녀가 후회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후련하고 기쁘기까지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남아 있긴 하지만 한때 그는 분명히 홀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물론 그 마음을 이제는 접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방인이고 그녀는 이곳 비욘드 세상 사람이 아닌가. 그녀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든 한때 좋아했던 그녀가 계속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생각으로는 벌써 잊었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처음 동료로서 받아들였기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홀 양이나 후크란 기사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확실히 잊어 가고 있습니다. 그 동기가 선의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 그보다는 기사 제의에 그렇게 쉽게 넘거난 녀석들에게 사실 많이 섭섭했습니다.”

 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녀석들은 자신을 동료로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녀석들이 알지는 모르지만 시작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녀석들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떠났던 것이고요. 홀 양과 후크란 기사단 여러분은 선의에서한 일인데 결과가 이렇게 되어 저도 유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많이 후회했어요. 그렇게 상처를 주고 홀로 보내서 마음이 아팠고요.”

 그녀의 마른 얼굴을 보니 굳이 듣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야 새로운 대원들을 맞아들이고 새로운 의뢰를 수행하느라 그 일을 곱씹을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지만 홀의 경우는 달랐을 것이다. 수련하는 내내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룬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숨겨 두었던 마음을 열었다.

 “사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여자를 정식으로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홀 양이 나타난 거지요. 처음에는 동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시작해 차츰 당신에게 호감을 느꼈고 강하게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달콤한 기분에 정신을 놓곤 했으니까요. 당신은 충분히 남자들에게 사랑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되는 분이니까요.”

 “그……랬나요?”

 수심에 차 있던 홀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예전처럼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하룬에게 홀은 첫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예전 그때의 마음이 남아 그 미소가 무척이나 설레고 있었다.

 “아마 무척 순수하게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때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마치 예전에 품었던 풋사랑을 이제 와서 고백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망설임 끝에 나온 고백이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은 처음으로 해보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이 있고 나서 가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사가 되겠다고 용병대를 탈퇴한 녀석들에게도 서운했지만 그런 기회를 제공한 후크란 기사단과 홀 양에게도 무척 서운했고 원망과 미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서운한 마음을 지웠습니다. 오히려 하찮고 손가락질 받는 용병보다는 만인에게 우러름을 받는 기사가 될 기회를 준 당신과 후크란 기사단에 고마웠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용병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되니 그 호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겠더군요.”

 ‘그렇게 생각해 주어서 고마워요.’

 홀은 차마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어느덧 하룬의 말 속에 자신과 그 일이 과거형으로 묘사되는 것을 느끼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서서히 가슴 밑바닥을 채우고 올라왔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보니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분의 차이도 그렇고 앞으로 브리엘라 전하와 더불어 대업을 도모해야 하는 당신에게 하찮은 용병에 불과한 내 존재가 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에요. 우리 황녀에게 당신이 얼마나 필요한데 그런 말을 해요. 그리고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데요.’

 하지만 후크란 기사단을 제외한 타 기사들이 하룬을 비롯한 용병들을 대하는 것이 어떤 식인지 잘 알고 있는 홀은 그 반박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하룬에게 호의를 가진 후크란 기사들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쉬이 그에게 알은척을 하거나 살갑게 굴지 못했다. 데브론도 눈살을 찌푸릴 뿐 기사들이 용병들을 막 대하는 것을 어쩌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귀족 신분으로 돌풍 용병대에 가입한 딜런은 무척 파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홀은 이 순간 딜런 경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의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행동은 다른 귀족들이나 기사들에게는 품위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황당한 것이지만 그녀에게는 꼭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접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연정을 느꼈던 당신을 영원히 잊지는 못할 겁니다. 하찮은 용병에 불과한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가는 길에 무한한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하룬은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이 순간은 정말 싫었다. 그것도 여자에게는 더욱더. 언제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거나 사귀어 본 경험이 있어야 멋지게 마무리를 할 텐데 말이다. 이런 순간에는 뫼비우스가 무척 부러웠다.

 “부디 앞날에 행복이 깃들기를 빕니다.”

 하룬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는 홀을 향해 묵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역시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현실적인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첫사랑이여, 부디 행복해지기를.’

 하룬은 서럽도록 부드럽고 밝은 달빛을 뒤에 남기고 용병들의 참호로 향했다. 들리지 않게 꺽꺽거리며 눈물을 삼키는 홀은 끝내 하룬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아직도 홀을 향한 마음의 여운이 진하게 남은 상태인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재수 4인방이 하룬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잘 지냈지?”

 하룬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심혼의 관을 통과하며 나름 얻은 것이 있어 녀석들에 대한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태도였다. 아마 그 전이라면 차갑게 굴지 않았을까?

 “응. 우리야 뭐…….”

 왠지 주눅이 든 것 같은 필립이었다. 다른 세 녀석도 반가워하면서도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플레이트 아머가 잘 어울리네.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는 말은 홀에게 들었다. 돌풍 용병대의 초대 대원들이었으니 알아서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지금 대원들 중에도 너희들처럼 기사를 꿈꿀 수 있으니까.”

 “열심히는 하고 있어.”

 역시 작은 목소리.

 그렇게 헤어진 것에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너희들이 잘못한 것은 없지.’

 자신을 못살게 구는 녀석들에게 싸가지의 독을 이용해서 괴롭힌 것은 자신이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걸 기화로 녀석들을 용병대로 얽어 들인 것은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복수는 복수로 끝냈어야 했는데.’

 이들과의 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던 것이다. 그래놓고는 녀석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선택한 길에 배신감을 느낀 것은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티노 부대장이 간간이 너희들 이야기를 해. 나도 너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고. 그런데 이렇게 모두 건강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사실 한동안 너희들을 원망하고 미워했던 것은 사실이야. 너희들이 그런 선택을 한 것에 실망도 컸고 마음이 상했거든. 그때는 나름대로 최고의 용병단을 만들려고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을 때라서 말이지.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선택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조금은 원망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너희들의 용기 있는 결정에 박수를 쳐 주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온 것이 후회되었어. 그래도 이렇게 멋진 수련 기사가 된 것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하룬이지만 한동안 마음 한 부분을 뒤흔들었던 옛 동료를 만나고 보니 그간의 소회로 인해 떠오른 다양한 감정에 말이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하룬과는 달리 네 사람은 별로 말이 없었고 그 태도도 무척 어색했다.

 “뭐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걱정스러운 나머지 그런 말까지 하게 만들었다.

 “아, 아니야, 대장.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 거기다 대장은 제국을 뒤흔드는 용병대장이 되었는데 우린 아직 수련 기사도 벗어나지 못했잖아.”

 필립의 말에 하룬이 설핏 미소를 터트렸다. 녀석들은 돌풍 용병대를 괜히 떠났다는 후회와 함께 위상이 달라진 하룬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 녀석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하하! 너희들은 명색이 수련 기사잖아. 이제 곧 있으면 정식 기사가 될 텐데 아무리 유명해도 일개 용병이 어떻게 기사를 뛰어넘겠냐?”

 하지만 그 말에도 녀석들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어쩌면 수련에 비해 진전이 더딘지도 모르겠다. 드러나는 기도로 보면 필립 녀석은 홀이 한 말대로 익스퍼트에 입문한 것 같았지만 나머지 셋은 예전에 비해 별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뭐든 열심히 하면 뭐가 되어도 되지 않겠냐? 나중에 다시 만날 때 너희들은 당당한 기사가 되어 있겠지? 그땐 나도 돌풍 용병대를 제대로 된 용병대로 키워낼 테니 그때 만나서 우리 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해후를 나누자. 용병 출신의 기사라니 근사한걸. 나중에 천한 용병이라고 무시하면 너희들 죽는다.”

 하룬의 말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녀석들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무슨 소리를. 한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인걸.”

 필립은 겨우 자신감을 찾은 얼굴이었다.

 “절대 무시 안 해! 대장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겁쟁이였을지 모르는걸.”

 지탄이 미소를 지었다. 곰 같은 녀석의 웃음에는 정겨움이 흐르고 있었다.

 “나중에 기사가 못 되면 갈 테니까 내 자리 비워 놓으라고, 대장.”

 시린느가 화사하게 웃으며 농담 같은 진담을 건넸다. 뭘 입혀 놓아도 그 미태를 감출 수 없으니 그녀의 말대로 기사가 되기는 애초에 그른 일일지도 모르지만 제법 수련한 티는 나고 있어 대견했다.

 “난 아무래도 용병 체질인 것 같지만 이왕 택한 길이니 지칠 때까지는 미친년처럼 달려 볼 거야. 용병 출신이 얼마나 독한지 보여주고 말 거라고.”

 욕 잘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미친년으로 변하고 마는 라트리나도 기질이 많이 변했다. 이제 참을 줄도 아는 것이다. 걸핏하면 제 성질을 드러내던 그녀가 지금까지 이렇게 얌전하게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비록 힘겨워하는 기색은 숨기지 못했지만 오기와 독기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우리 모두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당분간은 땀 흘려 노력하자. 나중에 언젠가 미숙했던 감정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할 날이 반드시 올 테니까.”

 “크크크! 이제 보니 대장 말발이 엄청 늘었는데. 원래부터 대장 체질이었나 봐.”

 라트리나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번 같이 웃고 나니 어색한 것들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장벽을 걷고 나니 예전에 같이 다니던 때처럼 마음이 풀어졌다.

 “더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내가 중요한 의뢰를 받아서 말이야.”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는 하룬을 향해 4인방은 미소를 보냈다.

 “대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는 우리도 보고 들어서 잘 알고 있어.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수련 기사 때려치우고 대장과 가슴 떨리는 일을 같이 하고 싶은데 지금의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더 이상 시간 뺏지 않고 보내는 게 전부네. 그래도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 출신이라고 테베 기사단 녀석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아. 다 대장 덕분이지. 그리고 꼭 부탁이 있는데, 부디 우리 브리엘라 황녀님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이 트레저 분지에서 내보내 줘.”

 필립의 말에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여 같은 마음을 보냈다.

 “꼭 들어주지. 그럼 나중에 다시 또 만나서 술이라도 마시면서 회포를 풀자.”

 하룬은 4인방의 웃음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러니까 마음이 편하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미워할 일이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뒤틀린 인간관계를 원래대로 돌려놓는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재수 4인방과의 인연을 통해 하룬은 한번 어긋난 생각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데브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홀과는 이야기를 나누었나?”

 데브론은 무심한 듯 물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홀 때문에 꽤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홀을 자신에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네. 아마 그녀는 제 첫사랑이었던가 봅니다. 잘 정리했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아프네요.”

 “후후후, 좋을 때야. 분명히 나중에는 좋은 추억으로 자리할 걸세.”

 데브론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하룬이 부러운 것 같았다.

 “옛 동료들과도 쌓였던 감정을 풀었습니다.”

 “잘했네. 감정이란 풀 때 풀어야지 미련으로 남거나 미움으로 변하지 않는 법이지.”

 하룬의 편해진 얼굴을 본 데브론은 안심이 된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조언해 주었다.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홀의 경우 마음이 좀 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여운은 남아 있었지만 재수 4인방은 이제 편해졌다.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였다. 만약 재수 4인방과 그런 식으로 감정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불쾌하고 더러운 감정을 담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정리를 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살다 보면 반드시 그때 했어야만 했던 일이 있다는 것을 종종 깨닫곤 하네. 말하기 부담스럽고, 행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미뤄서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지.”

 아직 데브론의 말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욘드를 하지 않았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난 지금은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새 데브론의 모습이 많이 늙었다. 마음고생이 심한 듯 쑥 들어간 눈도 그렇지만 피부도 윤기가 없어지고 주름살도 더 많아진 것 같았다.

 “휴우, 나도 황녀도 이제는 포기하고 싶은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애초에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골든 배틀이다. 그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는 황권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살아남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브리엘라 황녀를 위해 자신의 작위는 물론 많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한 귀족들과 기사들이다.

 그들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마부가 아니라 말이 마차를 끌고 가는 격이 된 것이리라.

 “앞으로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국은 난세가 도리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피노세 대공의 파이론 제국은 물론이고 야심이 큰 황자들도 이곳을 무사히 탈출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세력을 일으킬 테니 말이야.”

 이방인들을 통해 현재 제국의 상황이 얼마간은 알려진 후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머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향후 정국이 어떻게 진행될지 추측할 수 있었다.

 “난세는 힘이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명분과 고집으로는 생존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네. 그래서 차라리 1황자 측에 합류하려고 하는데 여태까지 황녀를 지지해왔던 귀족들과 기사들은 그럴 생각이 없더군.”

 그것도 이해는 간다. 겨우 세 개의 기사단 규모를 가지고 있을 뿐인 브리엘라 황녀 진영이 1황자 편에 선다고 해서 무슨 특혜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 기사단들의 실력이 그저 그렇다면 대우는 더욱 시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른 황자를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예컨대 7황자 정도면 어느 정도 혜택을 보장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브리엘라 황녀는 1황자라면 모르되 다른 황자를 지지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브리엘라를 지지하는 귀족들과 기사들은 그녀를 위해 희생한 시간이며 노고를 보상받기를 원하는데 황녀는 줄 힘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 세력은 알아서 붕괴하고 말 것이다. 모두가 상처를 입고 불행해지는 일만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지만 욕심에 빠진 사람은 그 결과를 볼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시간 있나?”

 다른 용건이 더 있는 것 같았다.

 “네. 없어도 내야지요.”

 “후후후, 그래야지.”

 데브론은 묘한 미소와 함께 다른 이들이 전혀 없는 참호로 그를 이끌었다. 가 보니 이미 손을 보았는지 제법 깊고 넓은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다듬었네. 오늘 내 밑천을 마지막까지 다 주려고 하네.”

 “네?”

 데브론에게 배울 것은 다 배웠다고 생각하던 하룬은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메신저 검술은 시작 단계가 너무 높아 쉽게 쓸 수가 없을 거야.”

 “네. 그렇더군요.”

 익스퍼트에 입문해야 겨우 사용할 수 있는 최상급 검술이다 보니 당연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용병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얻은 검술에 내 경험을 더해 새롭게 정리한 검술을 전수하려고 하네.”

 “네? 정말입니까?”

 “허허허! 이곳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지 불안한 상황이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자네에게 전수해야 마음이 놓을 것 같네.”

 “감사합니다.”

 하룬은 데브론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자신이 스승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데브론은 자신을 제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전할 것은 빌로우 검술과 디스펄션 검술이네. 디스펄션 검술은 특히 여러 적을 동시에 상대할 때 유용할 걸세.”

 데브론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빌로우 검술은 큰 물결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네. 대륙에 널리 퍼져 있는 대부분의 검술이 힘과 마나를 바탕으로 하는 헤비 소드라면 빌로우 검술은 패스트 소드 계열이라네. 거기에 내가 메신저 워킹 스킬을 결합시켰네. 그 요체는 빠른 발과 어깨 그리고 손목의 영활한 움직임이야. 이것처럼 빌로우 검술과 메신저 워킹 스킬을 같이 펼치면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배를 단숨에 삼키듯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네.”

 데브론은 하룬을 위해 빌로우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수련 검술의 한 호흡에 해당하는 검식들을 그 동작 폭을 키우며 연거푸 펼치자 시퍼런 오러가 깃든 검날이 마치 파도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표홀한 움직임과 함께 빌로우 검술이 펼쳐지자 데브론의 정면은 온통 시퍼런 검날이 온 공간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오러가 깃든 검은 단숨에 3미터 정도의 흙벽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시퍼런 오러가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데브론은 마치 누군가와 검을 겨루는 것처럼 이리저리 이동하며 빌로우 검술을 펼쳤는데 그때마다 하룬이 심안으로 살펴본 그의 앞 공간의 대기는 파도처럼 일렁였고, 이내 흙벽들이 엉망이 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빌로우 검술은 진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전진과 후퇴가 따로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데브론의 몸은 어느새 하룬을 공터의 구석으로 몰 정도로 주변 공간의 장악력을 높였고, 그의 검은 닿는 공간을 모두 찢어발기고 있었다.

 잠시 멈추었던 데브론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흣! 이번에는 두 개다.’

 두 개의 큰 파도가 솟구쳤다. 데브론의 발이 순간적으로 대여섯 개로 보일 만큼 빠르게 좌우로 이동하며 파도를 일으켰다. 그 검의 파도는 양쪽에서 일어나 그 앞에 있는 것을 모두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도는 하나씩 늘어났다. 파도가 늘어난 만큼 그 위력도 높아졌고 마지막에는 거의 일곱 개의 파도가 동시에 치기 시작했다. 이제 데브론의 발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수련 검술과는 달리 검의 궤도가 좁아진 대신 그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시퍼런 검날이 데브로의 시야가 닿는 곳 어디에나 날아가고 있었다. 그 앞 공간이 온통 시퍼런 오러가 깃든 검으로 가득했다.

 꽈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데브로의 시야에 있는 공간이 초토화되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가라앉자 앞의 공간이 몇 미터는 더 넓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높이 3미터 정도의 흙벽이 완전히 날아간 것이다.

 “굉장하군요!”

 하룬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자신이 배운 검술이 이렇게 위력적인지 처음 알았던 것이다.

 “후후후, 내 경지는 이제 겨우 익스퍼트 상급에 불과하네. 만약 최상급이 된다면 부채꼴 정도가 아니라 모든 공간을 다 장악할 수 있다네. 그 정도 실력이 되면 셀 수조차 없을 정도의 많은 검파(소드 빌로우)가 있어 주변을 완전히 파괴한다고 하네. 만약 깨달음이 있어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사방 10미터의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수 있지. 내 자질이 부족할뿐더러 용병으로 대륙을 떠도느라 수련 시간도 부족해 제대로 지도를 받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네.”

 데브론은 자신이 경지에 오르지 못한 것에 강한 자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의 딱딱한 얼굴이 더욱 경직되었다.

 데브론은 하룬이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빌로우 검술의 형과 식을 자세하게 몇 번이나 시연해 주었다. 다행한 것은 빌로우 검술과 메신저 워킹 스킬을 조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하룬은 짧은 시간에 빌로우 검술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  이제는 여러 상대를 대상으로 펼치는 디스펄션 소드라네.”

 데브론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 시작은 메신저 워킹 스킬이었다. 발바닥을 통해 마나를 흡입하는 동시에 강하게 응축시켜 발출하는 연속 동작에 데브론의 몸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흔들리는 어깨와 손목의 움직임에 검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어느새 데브론의 몸은 보이지도 않고 오러 소드가 한 방향에서 여러 방향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가며 폭발하듯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막아서는 공간 전체를 찌르고 베었다. 비록 그 반경은 빌로우 검술보다 좁았지만 찌르기 공격이 유달리 많아 마치 거대한 검이 폭발해서 사방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메신저 워킹 스킬이 그렇듯 검첨과 검날에 마나를 응축시킨 후 단숨에 폭발적으로 발산하는 것이 그 요체였다. 거기에 메신저 워킹 스킬이 결합하자 마치 분신술을 펼친 것처럼 보였다.

 두 검술을 하룬이 완전히 기억할 때까지 몇 번이고 펼쳐 보인 데브론의 얼굴은 창백했다. 이제 나이가 있고 한동안 제대로 검술을 수련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무리를 했던 것이다.

 하룬이 감격한 얼굴로, 미리 준비한 상급 포션을 데브론에게 건넸다. 포션을 마신 데브론은 하룬이 어느 정도를 기억하는 지 확인했다.

 “허허허! 역시 자네로군. 그래, 아주 정확하네. 이제 수련과 실전을 거치면 완전한 메신저 검술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 두 검술로 적을 쉬이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데브론은 하룬이 모든 것을 기억하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얼굴로 따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난 더 이상 진전이 없네. 근력도 떨어지고 마나의 축적 역시 거의 멈추었지. 자네가 내 대신 검술의 끝을 보아주게.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해질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강력함이 보이는데 어찌 눈을 다른 데로 돌릴 것인가.

 하룬은 벅찬 감격과 다짐으로 주먹을 굳게 쥐었다.

 하룬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용병들의 참호로 갔다가 자신들을 기다리는 기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쌓아 두었던 것들을 정리하고 난 다음이라 좀 쉬면서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1황자의 소환인지라 엘저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뒤로하고 황자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참호로 갔다. 지면 3미터 아래에 파인 제법 넓은 공간 안에는 황자들은 물론 고위 귀족들과 기사들로 꽉 차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안면이 있는 기사의 안내를 받아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간 하룬은 황자들의 전면에 자리한 한 사내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구지?’

 그 사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들어 있었다. 놀람과 경악, 두려움과 분노, 당황스러움과 황당함과 같은 감정들이 그 사내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게.”

 1황자의 말에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황자들에게 예를 표시한 하룬은 그의 손짓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황자들의 분위기는 무척 무거웠다. 아니, 실내 전체의 분위기가 거대한 돌덩이를 머리에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쪽은 막스크 상단의 상단주이며 제국 정보 길드의 길드장 베론 자작이네.”

 1황자의 소개에 하룬의 눈이 자연스럽게 베론에게 향했다. 자신을 몇 차례나 암습하려 했던 제국 정보 길드의 실세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평범한 신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드러난 신분이 만만치가 않았다. 무려 제국 10대 상단 중 하나를 운영하는 대상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앉아 있는 베론은 제국의 어둠을 좌지우지하는 자답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 기도를 지녔다. 팽팽한 피부 때문에 나이를 종잡을 수 없지만 적어도 쉰은 넘은 것 같았다.

 “반갑소. 베론이오.”

 “저의 경우에는 워낙 제국 정보 길드에 당한 것이 많아 그리 반갑지는 않습니다.”

 하룬은 굳이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정치적인 것이나 예의를 고려할 이유도 없고, 자신과 동료들을 몇 번이나 죽이려 했던 자와 눈에 뻔한 수사들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황자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후후후, 하룬 대장은 사람 대하는 자세부터 다시 배워야겠소. 적을 대하더라도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인데…….”

 베론의 말에 주변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많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카데미 같은 고급 교육과정을 받았기에 왠지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하룬이 배우지 못해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후후후. 난 누구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베론 자작. 물론 이용당하기도 싫지만 말이지요. 그러하기에 가면을 쓰고 온갖 수사로 치장한 대화로 속에 있는 감정을 숨길 필요는 없지요. 내가 수많은 의견을 수렴해 가며 나라를 다스릴 것도 아니고 타협을 해 가면서 정치를 할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살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죽이고 싶은 자 앞에서 가식을 부리며 마음속으로 살의를 삼키는 멍청한 짓을 왜 합니까? 죽이면 그만인데.”

 그렇게 말하는 하룬의 전신으로부터 감당하기 힘든 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베론 역시 이렇게 드러내 놓고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하룬에게 질린 것 같았다.

 “후후. 그렇다고 긴장할 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죽일 거였다면 이렇게 말도 섞지 않지요. 누가 어떻게 나오든 그저 죽이면 그만이니까. 난 다만 조심해야 할 분들이 있는 자리이고 언제 어디서건 손을 쓸 수 있으니 이 자리에서는 참는 것뿐입니다. 후후후! 경고하지요. 다음에 만나면 나랑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을 겁니다. 난 죽이려는 상대와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나 하룬은 혹시 후회를 하더라도 차라리 죽이고 나서 후회하는 편이 더 낫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나직하지만 딱 부러지는 하룬의 말에 베론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아니, 같은 점도 있었다.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인간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점이 너무 위험한 인간이었다.

 대놓고 다음에 눈에 띄면 죽이겠다고 말하는 하룬의 태도에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물론 제국 정보 길드와 돌풍 용병대 간의 악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살의를 드러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제길! 무식한 것에 더해 위험한 놈이군.’

 어떻게든 하룬과 돌풍 용병대를 이용하려고 생각하던 자들은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자들과 원한을 맺으면 어떤 흉한 꼴을 볼지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심혼의 관을 거치며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돌아보게 된 하룬은 누가 뭐라든, 어떤 상황이든 선이 굵게 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후회 없는 삶이란 없을 테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것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해내고 말리라 다짐한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하룬을 무식하고 감정에 솔직한 전형적인 용병으로 보았다. 때문에 암암리에 그에게 손을 뻗칠 의도를 가지고 있던 자들은 고개를 흔들며 마음속에서 그와 돌풍 용병대를 놓았다. 하룬으로서는 쓸데없는 관심과 귀찮음을 이번 기회에 해결한 셈이었는데 정작 그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하하! 그것참, 시원하게 세상을 사는군. 나도 그랬으면 참 좋겠소. 어차피 후회로 점철될 세상이라면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아무튼 하룬 대장이이 자리에서 살수를 쓰지 않겠다니 안심하고 용건을 말해도 되겠군.”

 1황자는 확연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농반진반으로 걷어내고는 황자들과 최측근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치고 누구에게 밀릴 신분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비밀을 아는 자는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그렇기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든 아니면 버티다가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꼴을 보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트레저 분지를 무사히 빠져나가고 싶은데 방법이 있겠나?”

 “몇 명이나 말입니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황자들과 제국 최고의 실세들은 하룬의 말에 눈을 빛냈다. 그 속에 담긴 뜻을 추측해 보자면 어느 정도까지는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닌가.

 “여기 있는 모든 인원이라고 하면 어렵겠나?”

 “불가능합니다.”

 똑 부러지는 하룬의 대답에 1황자의 눈초리가 살짝 떨렸다.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만 막상 듣고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얼마나 살릴 수 있겠나?”

 “그건 의뢰비와 베론 자작에게 달려 있습니다.”

 의뢰비라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뜬금없이 베론을 언급하니 사람들의 눈에 의혹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설명을 해주겠나?”

 “이미 분지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지 밖에 있는 우리 대원들이 있으니 그들을 고용해 분지 안팎으로 양동작전을 벌이다 보면 이곳을 벗어날 틈이 생길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르겠지요.”

 “흐음.”

 황자들은 이제야 의뢰금이 많을수록 좋다는 하룬의 말뜻을 이해했다. 하룬은 이방인들을 고용하려는 것이다. 비록 기사들에 비해 손색이 있다고는 하나 개개인의 능력이 소드 유저 중급에서 상급 정도인 이방인들이니 그 숫자만 받쳐 준다면 양동 작전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황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하룬의 말은 최선이었다.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이곳을 벗어났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과 때를 맞추어 동시에 다크 엘프들과 북부 군단을 공격한다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다.

 “베론 자작이 필요한 이유는 뭐지요?”

 1황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다시 하룬과 베론에게 고정되었다.

 “정보 때문입니다. 이 분지를 벗어나는 것이 당면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고요의 땅 전체에 어떤 포위망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정보가 필요합니다.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따라서 적절하게 흩어져 고요의 땅을 벗어나야 합니다.”

 “흠. 맞는 말이야. 놈들이 이곳만 포위하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일 생각일 테니.”

 1황자는 하룬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런데 베론 자작도 이 상황에서는 별수 없을 텐데.”

 4황녀였다. 하룬에게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면서도 이죽거리는 말투로 보아 한낱 용병에게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한다는 것에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베론 자작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버처리윙이 필요합니다.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 한 명은 버처리윙을 연락 수단으로 쓰는 것은 물론 페밀리어로 부려 주변 정찰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버처리윙이라면 그 와이번도 쫓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강한 변종 이글을 말하는 건가요? 그걸 길들인 사람이 있다는 말이네요. 그것도 저기 있는 베론 자작이?”

 하룬은 연속된 4황녀의 질문에 대답 대신 베론을 주시했다. 일시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베론에게 쏠렸다.

 하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확실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분지 밖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고요의 땅을 무사하게 빠져나가는 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던 베론은 오연한 자세로 버티다가 결국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나중에 황자들이 겁박할 때 쓰려던 패였는데 하룬 때문에 미리 알려지고 만 것이다.

 “이미 버처리윙을 통해 미리 분지 주변을 정찰해 놓았습니다.”

 결국 그의 입에서 버처리윙의 존재가 나오자 사람들은 놀람과 안도 어린 탄식을 쏟아내었다.

 “역시 돌풍 용병대의 정보력은 무섭군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전설의 새라고 알려진 버처리윙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새를 베론 자작이 개인적으로 길들여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 놀랍군요.”

 1황녀는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점점 더 희망이 커지고 있었다.

 몸집은 독수리와 비슷하지만 날개 길이는 그 두 배에 이르며 평균 비행 고도가 너무 높아 여간해서는 제대로 보기도 힘든 버처리윙은 인간에 못하지 않은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한다. 거기에 강철 같은 부리와 발톱을 가지고 있어 최상위의 몬스터인 와이번에도 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하루에 무려 1,000킬로미터를 비행할 수 있으며 하늘에서는 거의 적이 없는 버처리윙이야말로 연락 수단으로는 최상이었다. 사람들은 제국 정보 길드의 숨겨진 또 하나의 힘을 대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정찰 결과는 어떤가?”

 1황자는 밖의 상황이 궁금했다. 이렇게 갇혀 있으니 더욱 더 답답하고 궁금했던 것이다.

 “버처리윙이 정찰한 바에 따르면 고요의 땅은 현재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북부군과 엘프 연합군에 의해 입구로 가는 중요 길목이 모두 막힌 상태였습니다. 다만 그 숫자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흠. 정말 큰일이군!”

 1황자의 탄식에 다른 황자들 역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간략하게 보고를 한 베론은 고개를 숙인 채 하룬의 가공할 정보력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놈이 어떻게 버처리윙의 존재를 알았단 말인가? 이 사실을 아는 자는 길드는 물론 본가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베론은 오래된 가신이자 테베 백작령 지부장이었던 바후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일을 발설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연락 체계에 대한 대답을 하던 바후론이 우연히 알게 된 이 사실을 언급했다는 것을 베론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돌풍의 정보력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좋소. 그럼 정보는 추후 베론 자작이 더 알아내는 것으로 하고 이제 의뢰금만 결정하면 되나?”

 1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자들을 보았다. 더 이상 하룬에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황자들은 잠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했다. 지금 이 분지에 남아 있는 자들은 대부분 각 황자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니 나중에 어떻게 하든 의뢰금도 그들이 합쳐서 내야 한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의견이 정리되었다. 1황자는 하룬을 향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의뢰금은 현금과 마나석으로 400만 골드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황가의 보물 세 개로 하겠소. 물론 우리 외의 다른 자들에게 우리와 합류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우리가 받을 것은 논외로 하고.”

 “알겠습니다.”

 하룬은 토를 달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돌풍의 역량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과 계약을 하기엔 부족하다. 이재에 밝은 란트렐 황사를 비롯해 참모들을 거느린 황자들이라면 자신에게 주는 의뢰 대금의 상당액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조건과 한 가지 결정할 것이 더 있습니다.”

 “뭔가?”

 1황자는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제국 정보 길드와는 따로 계약을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따로 이곳을 벗어날 방도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와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겁니다.”

 “그건 어렵지 않지.”

 하룬이 제국 정보 길드에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제국 정보 길드를 압박할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는 들어주어야 했다.

 비록 베론이 애처로운 눈길로 애원했지만 1황자는 무시했다.

 “다른 한 가지는 포션을 지원해 달라는 겁니다. 적은 수로 적을 상대하려면 포션은 필수입니다. 아, 그리고 철시를 모아 주십시오. 되도록 많이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를 이 트레저 분지에서 큰 피해 없이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겁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그렇게 하겠네.”

 포션은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고, 철시는 하룬이 개인적으로 챙길 것이다. 제대로 된 궁사의 손에 넘어가면 철시는 다크 엘프들의 손에 있을 때만큼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마침 전 단원이 활에 능한 다카린 용병단원 대부분이 분지 너머에 있었다. 이방인들 중에도 궁사 직업을 선택한 이들이 있을 테니 그들이 쏘아도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도록 하지.”

 “네, 전하! 최선을 다해 의뢰를 완수하겠습니다.”

 하룬은 란트렐과 계약서를 완성했다. 황자들과의 계약이니만큼 요식행위에 불과한 터라 금방 끝났다.

 이 자리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친 하룬은 1황자에게 청원을 했다.

 “그럼 베론 경과 면담을 하고 의뢰를 위해 움직이겠습니다.”

 “그러게. 면담 장소로 옆에 있는 참호를 빌려주지. 깊고 넓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잘 모를 곳이네. 베론, 자네로 인해 계약이 깨지만 알아서 하게.”

 협박에 가까운 1황자의 말에 베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빌어먹을! 잘못하다가는 이곳에 뼈를 묻을 수 있겠구나. 그나마 저 고블린 새끼가 지금 당장은 날 해칠 의사가 없어 보이는 것이 다행이다.’

 베론은 마치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가축처럼 하룬을 따랐다.

 “얼마나 내놓을 겁니까?”

 하룬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리 말하지만 난 협상을 잘 못합니다.”

 ‘그래, 안다 알아! 너 직설적이란 거!’

 베론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잠시 고민을 했다. 비록 원수지간이긴 하지만 하룬이라는 용병이 화끈한 성격이라는 것은 이미 파악했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마음에 내키는 대로 결정을 하는 즉흥성과 함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책임감도 있어 동료라면 더없이 좋았다.

 “하룬 대장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제국 정보 길드는 이미 황도의 본부가 피노세 대공에 의해 박살이 난 상태요. 둥지를 잃은 내 한 몸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고려해 주시오.”

 “흐흐흐! 과연 그럴까요? 수백 년을 이어온 단체가 거점 하나를 잃었다고 힘을 상실했다? 하하하! 생각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군요. 어디 불러 보십시오. 귀하를 포함해 이곳에 있는 길드원들의 가치이니 알아서 결정하십시오. 이미 당신들에 대해서는 다른 대원이 모두 파악해 놓은 상태이니 신중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하룬은 내심 베론의 짓거리가 가소로웠다. 황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하던 제국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 돈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자신이 그의 역량을 높이 생각한 것 같았다.

 베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놈은 우리 길드의 내막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약한 척하려던 마음을 포기했다. 자신과 길드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버처리윙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100만 골드면 어떨지?”

 베론의 말에 하룬은 조용히 어둠의 학살자를 암기대에서 뽑아 들었다.

 “버처리윙을 자작이 직접 관리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일저에 본 그 여인이라면 자작을 얼마든지 대신할 것 같습니다. 귀하의 가치는 평생 축적한 그 마나로 족한 것 같군요. 그럼 잘 가십시오!”

 하룬은 읍습한 어둠의 기운이 피어오르는 비수를 던졌다.

 “아악!”

 어둠이 학살자는 베론의 왼쪽 어깨를 뚫고 깊이 박혔다.

 “헉! 내 마나가!”

 베론은 비수가 몸에 박힌 고통과 함께 자신의 마나가 비수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경악했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흡혈귀처럼 비수는 마나를 빨아 먹고 있었다.

 급하게 비수의 자루를 잡고 힘을 주었지만 진한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비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예사롭지 않은 비수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죽일 셈이군.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이한 비수가 존재한단 말인가?’

 베론은 경험과 직관으로 이 비수가 에고 아이템의 일종이라고 확신했다.

 하룬을 보았다. 조금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눈이 얼굴을 가린 긴 머리칼 사이로 보였다.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눈이 너무 두려웠다.

 “제발! 500만, 500만 골드를 내겠소.”

 자신과 딸인 헤르쉬 그리고 타혼을 위시한 수하들의 목숨 값이라면 그 정도는 될 것이다. 애초 그 액수를 생각했지만 오랜 습관이 그에게 액수를 줄여 부르게 만든 것이다.

 “지불 방식은?”

 역시 자신의 가치를 아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분지에 있는 십만 이상의 목숨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뿌듯한 마음이 스쳐지나갔다.

 “현금 100만 골드와 나머지는 보석과 마나석을 비롯한 물품들로 하겠소.”

 “좋습니다.”

 하룬은 두말하지 않고 어둠의 학살자를 뽑았다. 놈은 이제 본격적으로 베론의 마나를 빨아들이려고 하다가 방해를 받은 것이 안타까웠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하룬의 손길에 순순히 뽑혀 나왔다.

 베론은 고통으로 신음하며 어깨를 보았다.

 ‘흑! 피가 안 보여.’

 암기대로 다시 돌아가는 어둠의학살자는 베론의 피마저 빨아들인 듯 요요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시 우리 돌풍에게 이를 드러내면 알아서 하십시오. 완벽하게 우리 돌풍을 지울 능력이 안 된다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자작이나 길드를 지키는 길이 될 것입니다.”

 베론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수모는 정녕 처음이었다. 일개 용병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고통과 분노로 자신도 모르게 몸이 벌벌 떨렸다.

 “그럼 빨리 계산을 합시다. 자작도 내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베론은 정신없이 하룬을 이끌고 자신의 수족이 있는 참호로 향했다. 갑자기 나타난 하룬의 존재에도 타혼이나 헤르쉬는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하룬을 떼어 버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베론은 보석과 현금이 가득 들어있는 마법 배낭을 통째로 넘겼다. 500만 골드가 훨씬 넘을 테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그를 보내고 싶었다.

 “당연한 대가를 받는 것이니 고맙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나중에라도 보지 맙시다. 보면 죽이고 싶을 거 같으니까.”

 베론은 하룬의 흰 이와 미소 한 조각이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분노 속에 감추고 있는 공포가 그를 떨리게 만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로드?”

 “아,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제야 너무 놀란 나머지 평소에는 입에도 올리지 않던 아버지 소리를 하는 헤르쉬나,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타혼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룬의 모습이 저 멀리 참호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흘러서야 그는 길게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제야 어둠의 학살자가 박혔던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베론은 자신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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