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론 자작》
“허어! 이거야 산 너머 산이고 강 너머 바다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공격을 당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단단하게 포위된 줄은 몰랐습니다.”
1황자와 란트렐은 허탈한 눈으로 분지 위에 늘어선 다크 엘프들과 분부 군단의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 어디에도 빈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분지는 다프란 왕국군과 파이론 제국군에 완벽하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그 두 사람처럼 워프 지역에서 간신히 탈출한 사람들은 트레저 분지 상황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 대부분은 철시에 당했지만 일부는 정령 마법에 당한 흔적도 있고, 또 일부는 육중한 그 뭉서에 짓밟힌 흔적도 있었다.
으드득!
1황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갈았다. 언뜻 보아도 수천이 넘는 시체가 널린 분지는 그야말로 지옥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란트렐의 눈이 흐릿해졌다. 이방인들을 통해 미리 듣긴 했지만 분지 상황이 너무 참혹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죽어 간 사람들 중에는 부활이 가능한 이방인들도 있겠지만 기사들이나 마법사들도 많았다.
“엘프 놈들이 분지 아래까지 진출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철시의 위력이 엄청나다지만 이곳까지 철시를 날린 것을 보면 이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기슭까지 엘프들에게 장악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에 올 정도로 실력을 쌓기 위해 그들이 바친 땀과 노력을 생각하면 절대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면 안 된다. 너무 참혹하고 안타까웠다.
물론 골든 배틀 때문에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마법을 날려야 하는 적들이지만 그래도 실력이 달려 항복하면 대부분 몸값이나 전향을 전제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인재들인 것이다.
“빌어먹을!”
란트렐은 평소에는 절대 내뱉지 않는 욕설까지 내뱉고 말았다. 이게 다 지휘 체계를 명확하게 해 놓지 않고 지휘관들이나 상관들이 대부분 검증의 관에 들어간 탓이다. 아무리 적이라도 평소 안면이 있는 귀족들이나 기사들이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엘프들이 장악한 땅이라 해도 무려 십만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불과 오만도 안 되는 다크 엘프들과 인간 연합군에 완벽하게 포위된 상황은 말이 되질 않았다.
“설마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1황자는 허탈한 얼굴로 뒤에 늘어선 형제들과 고위 귀족들을 보았다. 그들의 눈은 이미 빛을 잃었다. 모두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참혹한 지옥도가 펼쳐진 분지와, 분지를 둘러싼 산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위협적으로 포진하고 있는 적들을 번갈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 있는 란트렐과 같은 이들은 빨리 정상을 찾고 안전한 곳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미 한 번 험한 꼴을 당한 탓에 무엇보다 목숨의 중요성을 깨달은 존귀한 기사들이 직접 참호를 판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 1황자를 비롯한 황자들과 귀족들은 휘하의 핵심 수하들을 데리고 거대한 참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참, 대단한 등장이군. 다크 엘프들로 모자라서 파이론 제국까지 나서다니. 결국 피노세 대공이 우리를 말살하기로 작정을 했군.”
1황자는 이미 한차례 공격이 있었다는 것을 이방인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니 그 피해가 생각 이상으로 막심했다.
“오늘까지 총 여섯 번에 걸친 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오늘 아침에는 북부 군단의 일부 기사들이 말을 몰고 분지까지 내려와 학살까지 자행했답니다.”
란트렐의 보고에 1황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너무 황당해서 그런지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말을 탄 기사와 타지 못한 기사의 차이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이런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역적은 이미 제국 정보 길드와 손을 잡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을 이용해서 황자 전하들을 모두 이곳으로 끌어들였으니 말입니다.”
“야심을 감추고 이런 때를 노린 것이 분명합니다. 완전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손도 없고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태도에 선황께서 믿음을 주었지만 그것들이 다 거짓이었을 줄이야. 지금 생각하니 피노세 대공이 아끼는 소드 마스터 바스톤 백작이 귀족파의 몫이었던 수도군단장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 이런 일을 기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라인트 공작과 란트렐 황사가 말한 대로였다. 멋지게 당해버린 것이다. 설마 선황이 가장 아끼는 형제이자 군부대신으로 막강한 군권을 쥐고, 최고 귀족 회의와 원로원으로부터 황실을 든든하게 지켜 주었던 피노세 대공이 이런 야심을 감추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휴우! 누구보다도 욕심이 없고 정말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정보와 군권을 한손에 넣었으니 욕심이 났을 수도.”
그건 1황자의 말이 맞았다.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 너무 큰 힘을 주어 욕심을 부채질했을 수도 있다. 권력이란 분산이 되어야 안전한 법인데 선황은 피노세 대공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던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숨겨 온 것을 보아서는 그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란트렐 황사의 말에 1황자가 힘없이 대답했다.
거의 모든 황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이 트레저 분지에 모였을 때를 노려 황도를 장악하고 당당히 새로운 제국의 출현을 선포한 것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가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라버니?”
1황녀의 얼굴은 착잡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전통이라지만 실상은 형제끼리 싸우다 생각지도 못하게 제국을 숙부에게 빼앗긴 꼴이 되고 말았으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란했다.
“아그리아, 네 생각은?”
1황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중 하나지요. 하나는 이제라도 구심점을 정해 우리의 남은 힘을 모아 제국을 다시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 연고지로 탈출해서 거병을 하거나 왕국을 세우고 긴밀한 협조를 통해 전국시대로 돌입하는 거지요.”
“일곱째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을 받은 테슬런 황자는 굵은 눈썹을 몇 번 꿈틀거리더니 다른 황자들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평소 조용하고 평범한 것으로 알려진 테슬런 황자는 이번 검증의 관에서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드러내 다른 황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막강한 골든 배틀 후보였던 3황자와 11황자를 제치고 그 능력으로 검증의 4관인 심혼의 관을 통과하는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그런 그가 몇 번 입을 떼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1황자의 집요한 눈짓을 받은 7황자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무척 어려운 결정이군요. 휴우.”
무거운 한숨을 내쉰 테슬런 황자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서 황도 수복과 역적을 처단하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는군요.”
그의 말에 황자들은 침중한 얼굴로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야욕을 숨기고 있었던 자라면 준비한 것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제국 4대 군단 중 하나인 북부 군단이 그의 휘하에 있으니 그와 그의 세력을 처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형님 전하, 양해해 주신다면 전 따로 나라를 세우고 싶습니다. 외가인 미노스 후작가의 영지는 산과 강으로 독립된 땅이고 한 면만 효과적으로 틀어막는다면 그 수가 몇 배가 되든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땅입니다. 또한 그 땅과 인구는 능히 일국을 세워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 땅은 독특한 문화와 관습은 물론이고 고유한 언어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차피 제국에 녹아들어 가기 힘든 곳입니다. 더 이상 형제들과 싸워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파이론 제국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협력하겠습니다.”
1황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숨기고 조용하게 지내던 테슬런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은 했다. 그의 외가인 미노스 후작가의 움직임은 이미 선황이 건강했을 때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지금의 테론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긴 했지만 허울뿐이니까.’
1황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막상 뚜껑을 열자 자신 못지않은 심계와 지도력 그리고 인품을 가진 것으로 밝혀진 일곱째였다. 그가 가만히 있고 싶다고 해도 이제 그의 능력이 세상에 알려진 이상 미노스 후작가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의 골든 배틀에서 탈락한 후 이제 황도의 정치가에서 그 세력이 한참 격하된 미노스 후작가의 입장에서는 불확실한 것보다는 차라리 제국에서 왕국으로 분리하는 길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비록 테론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지 어언 천 년이 되었지만 제국에 융화되지 않고 지형 혹은 기질적은 차이로 미노스 지방처럼 고유한 풍습과 문화를 지켜 오는 곳은 많았다. 내치에 힘쓰는 대신 20~30년마다 한 번씩 진행되는 골든 배틀에 힘을 소진한 탓에 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하나로 녹아들지 못했다.
제국의 장점은 다른 것이 아니다. 각 지역을 하나로 묶어 각 지역이 필요로 하는 것과 잉여 물자를 제대로 수급함으로써 전체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 경제적인 이득이다. 또한 각 지역의 문화를 통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 코드를 만들고 경쟁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가는 것이 바로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뭉쳤을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이었다.
그런데 당금의 테론 제국은 제국의 틀은 유지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이 반석에도 서지 못한 상태에서 골든 배틀을 시행하면서부터 영지 간에 강력한 경쟁이 일어났고, 귀족가들이 황권을 노리면서 조각조각 갈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게 벌써 수백 년 이상 지속되었으니 이름만 제국이지 실은 연합체나 마찬가지였다.
1황자는 다른 황자들에게 차례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저 역시 아이크를 영토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습니다.”
11황자였다. 7황자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3황자와 함께 뛰어난 정치 감각과 능력을 보여 4대 강자로 분류되던 인물로, 동부권을 장악한 전통적인 군벌 가이로스 후작가가 그를 지원하고 있었다. 11황자가 이렇게 나설 줄은 다른 황자들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저 역시 바란트 지방으로 가서 나라를 일으키겠습니다. 후크란 산맥과 오론테스 산맥의 서쪽은 어차피 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척박한 땅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전 그곳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싶습니다.”
13황자였다. 심약한 것이 단점이긴 하나 지혜롭기로 소문난 황자 역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모후는 제국 서부 바란트 지역의 맹주이자 바다를 지배하는 바란트 공작가의 여식이었다. 바란트 지역은 후크란 산맥에서 서쪽 바다에 이르는 산지와 황무지를 말한다. 하지만 제국이 태동하기 이전 바란트 지역은 항해술에 능한 바다 사나이들의 땅이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 척박하긴 하지만 바다를 주 무대로 살아갈 작정이라면 그 역시 나쁘지 않아.”
1황자의 말대로 13황자가 말한 바란트 지역은 제국이라는 틀에 매여 있긴 하지만 어차피 독립된 땅이었다. 그 지역은 아직도 대륙 공용어보다는 바란트어를 더 많이 쓰고, 두 거대한 산맥 때문에 교역이나 교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이어 1황녀와 3황자를 비롯한 다섯 황자는 의견 표명을 유보했다. 그들의 배후에 있는 세력과 좀 더 시간을 두고 의논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브리엘라 황녀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 밖이었다. 입술을 꼭 깨문 그녀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1황자 전하께서는 어떤 복안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희들은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1황자가 이미 회유했거나 같은 모후의 소생인 황자와 황녀들이 그의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골든 배틀에서도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한 터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다.”
“두 가지요?”
누군가의 질문에 1황자는 굳건한 의지가 드러나는 눈빛으로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란트렐 황사와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황사가 조언하길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아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길은 이제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던 것에 달려 있다고 하더구나. 그것은 바로 제국민들의 마음이다. 제국민들이 테론 제국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테록 제국의 적법한 황자라는 명분으로 제국을 다시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능력만 된다면 너희들도 마찬가지 입장이지. 하지만 만일 제국민들이 이미 마음에서 테론 제국을 버렸다면 차라리 새로운 왕국 혹은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말도 안 됩니다. 그 개돼지와 같은 무식하고 천한 자들의 의중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내내 말이 없던 9황자였다. 음침한 성격에 평소 폭력적인 행동을 자주 해 황실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던 9황자다운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많은 황자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1황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틀렸어!’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과 기사들 중에서도 저런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제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왜 중요한지.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있어.’
지금은 신탁으로 인해 이 세계로 온 이방인들이 빠른 속도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들 역시 신분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 세계의 귀족들은 이곳처럼 백성들을 쓸모없는 개돼지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방인들의 등장으로 인한 영향은 이미 곳곳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평등에 관한 사고방식이나 생각은 그 무엇보다도 빠르게 하층민들에게 퍼질 수 있는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1황자는 잠시 고심한 끝에 좌중을 한번 쓸어보고는 결심한 것을 드러냈다.
“일단 자신의 판단대로 움직이도록 하자. 지금은 이 정도로 결정하고 골든 배틀을 중단한다. 다시 테론 제국의 이름으로 모이게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는 이제까지처럼 이름뿐인 제국이 아니라 진정으로 제국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때가 될 것이다.”
황자들과의 허심탄회한 회의를 끝낸 후 각 진영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선결 문제라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새로운 제국을 선언한 파이론 제국의 피노세 초대 황제가 이곳에 모인 잠재적인 적들을 가만히 놔둘 리는 없을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 고요의 땅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1황자는 황자들에게 한시적으로 모든 세력을 이끌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바로 고요의 땅을 무사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다. 가장 먼저 할 일이 뭘까?”
시간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제왕학을 학습한 황자들이 이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들 사이에 팽배했다.
“정보를 모아야 합니다. 현재 제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틈에 끼어 있을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을 체포하는 것이 선결 문제입니다. 그 존재를 찾아내면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1황녀는 정보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제국 정보 길드에서 파견한 자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진언했다. 사실 황자들이 현재 알고 있는 사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먼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황자회의는 각 진영에서 은밀하게 파악하고 있던 정보를 모았다. 그 결과 원로원에 속하는 귀족들로부터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이 이곳에 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란트렐 황사처럼 각 황자 진영에서 참모 역할을 하는 이들은 모인 정보를 바탕으로 막스크 상단의 상단주이며 4서클 마법사인 베론 자작이 제국 정보 길드의 숨겨진 수장일 거라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황자회의는 지체하지 않고 해당자를 수배해서 불러들였다.
그 시각 제국 10대 상단 중 하나인 막스크 상단의 상단주인 베론 자작과 그의 숨겨진 딸이자 현재 황도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헤르쉬 자작 부인은 심각한 얼굴로 은밀하게 마련된 참호 속에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원로원 진영의 일원으로 검증의 관에 들어갔던 베론 자작이 검증의 관과 워프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을 말하고, 헤르쉬 자작 부인은 이곳 트레저 분지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휴우,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길드가 어떻게 된 것 같구나.”
베론이 불안하다는 듯 말하자 헤르쉬도 동감을 표시했다.
“피노세 대공이 황도의 길드 본부를 장악한 것이 아닐까요?”
“설마? 그건 아닐 것이다. 그가 가진 권한으로는 길드를 장악할 수 없어.”
베론은 헤르쉬의 추측을 강하게 부인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피노세가 아는 길드와 자신이 아는 길드는 적어도 몇 겹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저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우리 길드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황도를 하룻밤 사이에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헤르쉬의 말에 베론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이번 정변에는 투, 아니 피노세는 물론이고 우리 길드의 수뇌부들 일부가 참여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소문뿐이니 너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필요는 없다. 아무렴 우리 길드가 굴러들어온 피노세 따위에게 장악 당했겠느냐.”
“하긴 그렇지요. 하지만 제국 곳곳에 퍼져 있는 이방인들의 정보력도 무시할 수 없으니 불안하네요.”
두 사람은 불안한 마음으로 믿을 수 없는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로드, 버처리비크가 황도에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타혼이었다. 베롱늬 오랜 심복으로, 소드 마스터 초급의 든든한 실력을 가진 그가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제가 버처리비크를 히든포스트에 있는 풀문에 보냈어요. 이번 정변 과정이 너무 궁금해서요. 한 마리는 이곳의 일이 심상치 않아 주변 정찰을 보냈고요.”
“잘했구나. 비밀리에 황도 본부를 감찰하는 풀문의 조사 결과라면 믿을 수 있겠지. 이리 주게.”
베론은 헤르쉬의 기민한 대응을 칭찬하며 기다렸다는 듯 타혼이 가져온 전통을 받았다. 타혼이 나가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베론은 급하게 밀랍으로 봉인된 전통을 열어 암호로 작성된 보고서를 읽었다. 헤르쉬는 자연스럽게 베론과 뺨을 맞대고 그 내용을 읽었다.
“허억!”
“흐읍!”
타혼이 가져온 암호문을 읽은 두 사람이 경악성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몸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베론은 암호문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고 이내 구겨진 암호문을 바닥으로 던지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독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고 붉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변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소문이 사실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헤르쉬의 얼굴은 파랗게 변했다. 그 암호문에는 그야말로 두 사람이 경악할 정보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제국 정보 길드의 투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피노세 대공이 완벽하게 장악했으며 그 와중에 황도를 포함한 인근 지역에서 길드원의 절반이 말살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으드득!
베론은 이를 갈았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피노세 대공은 그가 직접 손을 내밀어 길드로 끌어들인 인물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그의 영향력과 힘을 고려해 이제까지 없었던 투의 자리까지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결국 나까지도 그 더러운 놈에게 이용당한 건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베론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허탈하고 힘이 없었다.
“우리의 심복들은 여지없이 제거당했네요. 비록 흑사자 기사단과 흑마법사 병단이 눈치를 채고 몸을 뺐지만 중간 위치에 있는 길드원들은 거의 제거당했기 때문에 이젠 황도에 무사히 돌아가도 상당 기간 제자리를 찾기가 힘들 거예요.”
그사이 제정신을 찾아 바닥에 떨어진 암호문을 주워 꼼꼼히 읽어 본 헤르쉬 자작 부인은 연방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그녀는 그 거대한 제국 정보 길드가 이렇게 전격적으로 남에게 장악당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수백 년이 넘게 그녀 가문에서 관리하던 조직이다. 비록 강력한 권력과 금력을 지닌 피노세 대공이지만 단숨에 길드를 장악한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사이 뭔가를 생각하던 베론이 이를 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으드득! 스리, 후트가 놈에게 붙은 것이다.”
“네? 후트가요? 그럴 리가…….”
베론의 말에 헤르쉬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후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치마폭에 완벽하게 빠져 있는 사내가 아닌가? 지닌바 조직 관리 능력은 하늘을 놀라게 할 남자였지만 자신의 육향만 맡으면 이성이 마비되어 어쩔 줄 모르는 꼴을 보이던 후트였다.
“그놈의 전향이 아니라면 피노세 대공이 길드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보고서에는 그런 사실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길드의 중간 관리자들을 장악한 후트가 아니라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헤르쉬는 베론의 말이 이성적으로는 반박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감성적으로는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테베 백작령 길드에서 받은 보고가 있었다. 후트가 피노세 대공의 외조카인 안네스앙 백작 영애와 혼인할 거라는 소문이 적혀 있었지. 그때는 조직 내에서 후트를 시기한 자들이 일부러 퍼트린 새로운 헛소문일 거라고 치부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피노세가 후트를 끌어들이기 위해 조카딸을 이용한 거 같다.”
베론의 말을 들은 헤르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록 수많은 남자들을 정략이나 음모 혹은 정보를 위해 유혹한 그녀지만 후트에게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후트는 정보를 총괄하는 그녀와 짝을 이루어 조직원 관리를 전담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한때 그녀는 후트와 혼인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목적을 위해 남자들을 유혹하는 짓에 넌덜머리가 나기도 했지만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후트의 애정에 감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의도를 이룰 수가 없었다. 베론이 반대를 했던 것이다.
“그러게 그때 절 말리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베론을 노려보는 헤르쉬는 이 모든 것이 베론의 탓인 것 같았다.
“어리석은 것! 아직도 미망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냐! 그 녀석은 네가 아니라 네가 가진 힘과 권력을 탐했을 뿐이다. 난 놈이 널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걸 보았기에 네 행복을 위해, 네가 다치게 될까 봐 녀석과의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 야망을 가진 남자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야망을 품은 정인은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 녀석의 인간성이나 그릇은 널 결코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단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전 이제…….”
헤르쉬는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가문의 율법대로 세상에 밝힐 수 없는 부녀 관계지만 아비의 사랑을 모르지는 않았다. 베론은 진정으로 차가운 성정을 가진 사내지만 자신에게만은 늘 분에 넘치도록 사랑을 베푸는 아비였다. 그러하기에 그가 후트와의 결혼을 반대했을 때 마음속으로 반발은 했지만 순순히 그 의사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길드장님, 타혼입니다.”
전언을 전하고 밖으로 나갔던 타혼이었다.
“들어와!”
수행 비서이자 호위장인 기사 타혼이 당황한 표정으로 막사를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베론은 물으면서도 불안했다. 얼마 전 소드 마스터에 오른 실력을 가진 타혼이 이런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던 것이다.
“1황자로부터 전언이 왔습니다. 지금 당장 황자 연합의 소환에 응하랍니다.”
“황자 연합? 드디어 피노세에게 몰린 황자들이 뭉친 게로군. 그런데 그자들이 왜 날? 혹시 내 정체가 노출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전언을 수신받을 대상을 자작님이 아니고 제국 정보 길드의 길드장으로 호명했습니다.”
베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자신의 정체가 이곳에서 황자들에게 드러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제국 정보 길드의 보안이 뚫리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군. 분열 공작으로 그동안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내 정체가 노출된 것도 그렇고 길드를 피노세 대공에게 뺏긴 것도 그렇고…….’
“빌어먹을!”
베론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악재가 겹치다니, 어쩌다가 이런 사태가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던전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얻었을 때는 정말 날아갈 것 같았는데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가만. 그렇다면 이 던전에 대한 정보도 애초에 피노세가 노린 건가?”
헤르쉬는 후트의 배신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기에 대답을 해줄 수는 없지만 베론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말을 꺼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정보는 후트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
그때는 후크란 산맥의 보석 광산에 대한 공작 때문에 미처 이 정보에 얽힌 주변 상황이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정보 수집 능력과 조직 관리 능력에 대해서는 그가 전폭적으로 신뢰해 온 후트가 물어 온 특급 정보에 환호했을 뿐이다.
‘무서운 일이군. 어떻게 평생 정보를 다루고 살아온 내가 그런 움직임을 몰랐단 말인가?’
베론의 심경은 정말 착잡했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패닉 상태에 빠진 딸, 헤르쉬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며 독하게 마음을 추슬렀다.
“헤르쉬, 정신 차렷!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베론은 헤르쉬의 어꺠를 흔들어 그녀의 풀어진 눈에 빛이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기왕에 일어난 일, 도주한 길드원들을 규합해 복수를 해야 한다. 피노세는 수백 년을 이어 온 우리 길드의 진짜 저력은 알지 못한다. 길드를 배신한 피노세와 널 배신한 후트를 잔인하게 응징해야 해!”
응징이란 말에 헤르쉬의 눈빛이 강해졌다.
“응……징. 좋아요!”
헤르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 무엇도 녹여버릴 듯 뜨거운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슬쩍 그것을 본 타혼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베론의 심복인 그는 헤르쉬가 얼마나 무서운 여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자들에게 줄 선물이 있어야 한다. 빨리 주변 정찰을 보냈던 버처리비크를 소환해라!”
“네.”
헤르쉬는 서둘러 고요의 땅에 정찰을 보냈던 버처리비크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자신만의 특수한 능력으로 감응을 일으켜 버처리비크가 정찰한 내용을 전해 받았다.
황자 연합의 소환에 응해 자신의 정체를 순순하게 인정한 베론은 사람들 앞에서 제국 정보 길드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한 피노세 대공에게 장악된 것을 인정했다. 또한 그 역시 이번 사건을 통해 피노세 대공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토로해서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했떤 몇 가지 사건에 대해 빠져나갈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그 짧은 사이 베론은 1황자에게 붙기로 작정했다. 피노세와 대항하기 위한 가장 적당한 상대이기도 했지만 정보가 약한 1황자로서는 그 자신의 정보 역량과 반쪽에 불과하지만 제국 정보 길드의 효용 가치를 배척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결로이었다.
베론은 자신의 추측을 더해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가감 없이 보고했다.
“이 던전, 아니 검증의 관에 대한 정보를 이용해 함정을 판 것은 확실히 간교한 피노세 대공입니다. 분위기를 조성해서 길드장인 저를 이곳으로 오게 한 것도 그의 안배일 것입니다. 결국 전하들뿐 아니라 저와 제국 정보 길드 역시 그자에게 이용당한 것입니다.”
베론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피노세 대공이 아주 오래 전부터 야망을 품었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치를 떨었다. 이 모든 것이 다 피노세 대공의 음모였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치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피노세 대공은 지난 골든 배틀이 모후의 병 때문에 허무하게 끝난 직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일을 진행시켜 왔을 것이다. 그의 치밀함과 야망에 이가 갈렸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있었다.
“도대체 왜 그가 이런 짓을 벌인 거지? 후손도 없는 그가 굳이 황권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을 텐데…….”
1황자의 말에 다른 황자들이나 귀족들도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피노세 대공은 후손을 보지 못했고, 그 연유로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지만 얼마 전 이상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무슨 정보인가?”
1황자는 베론이 가진 정보가 피노세 대공을 직접적으로 움직이게 한 원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1년 전 사냥을 나갔다가 죽을 위기에 빠졌던 대공을 누군가 구했으며, 그를 구한 두 남녀가 대공의 저택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네. 그와 함께 대공이 그 은인들을 양자로 삼겠다고 술자리에서 말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저희 길드에서는 그 정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것과 이번 사건이 서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크흠. 양자?”
어찌 보면 이번 정변과는 별 상관없는 말이었지만 1황자는 직감적으로 피노세 대공의 생명을 구했다는 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정보가 너무 부족해!’
1황자는 정보의 아쉬움을 진하게 느끼며 베론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숨어 황실과 귀족들을 오가며 이간질을 하던 제국 정보 길드의 수장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당장 목을 자르고 싶지만 이자의 능력과 조직이 아깝구나.’
언뜻 살의가 일렁이는 눈으로 베론을 보던 1황자가 물었다.
“그럼 묻겠다. 이 난국을 타개할 좋은 계책이 있나?”
일단 이자의 효용가치를 파악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난세가 시작된 마당이니 이전까지 제거 대상이었다고 해도 능력이 있다면 이용해야 한다. 물론 언제까지나 그 목을 온전하게 둘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제국 정보 길드의 수장인 베론은 신뢰할 수 없는 자였다.
1황자의 물음에 베론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 시간 동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도 나름 생각을 했지만 암담하기만 했다. 그들로서는 이 분지를 벗어날 그 어떤 방법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워프 지역에서 벗어난 것처럼 누군가 북부군과 다크 엘프 연합군의 주의를 끌어 준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베론의 말에 란트렐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자신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라?”
1황자 역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분들의 실력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존귀하신 황자 전하들께서는 당연히 안 되며 이방인들은 그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머지 세력들은 그 지휘권을 비롯한 몇 가지 문제 때문에 효율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베론의 말이 맞았다.
현재 분지에 모인 인원은 무려 삼십만을 상회하고 있다. 삼만은 황자들과 연관이 있는 이방인들이며 팔만 정도는 직간접으로 황자들이나 원로원 혹은 최고 귀족회의와 연관이 있었다.
그 나머지 이만은 골든 배틀과는 상관없이 보물을 탐해 이곳으로 온 자유 기사들이나 중소 영지의 기사단 그리고 소속이 없거나 불분명한 마법사들이었다.
“그렇겠지. 구심점이 없는 자들이니.”
이미 1황자도 그들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방금 베론이 말한 약점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제 생각에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가 이 일을 맡는다면 성공한 가능성이 높습니다.”
베론의 말에 황자들의 눈에 강한 관심의 빛이 떠올랐다. 또다시 하룬과 돌풍 용병대가 언급된 것이다. 도대체 제국에서 나름 뛰어나다고 하는 존재들이 왜 그를 주시하고 신경을 쓰는지 몇몇 황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처럼 존귀한 신분에서 보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용병은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용병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거칠고 무례하며 더러운 작자들이다.
하지만 돌풍 용병대는 달랐다. 골든 배틀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인 1황자와 1황녀는 물론이고 얼마 전까지 제국을 이면에서 주물럭거렸던 거물인 제국 정보 길드의 수장까지 그의 능력을 인정하니 일면 기가 막혔다.
“무슨 의미인가? 설마 그들이 우리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들보다 더 강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8황자였다. 그는 황자이면서도 특이하게 검술을 익히는 것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우직한 기사 성향을 가진 인물로, 1황자를 추종했다.
“그동안 돌풍 용병대는 저희 길드의 주적主敵이었습니다.”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베론의 말에 황자들은 선선히 수긍했다. 후크란의 보석 광산도 그렇고 이곳의 던전에 얽힌 일에서도 제국 정보 길드가 돌풍 용병대에 강한 적의를 가질 상황이란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저희 길드에서는 전력을 다해 그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지만 아직도 그들의 비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 말에 황자들의 눈에 강한 호기심의 빛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돌풍 용병대의 실상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호오, 그 정도인가? 30분 전에 본 황녀가 입은 속옷의 색깔까지 파악한다는 자네들의 정보력으로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야?”
조롱하는 것이 분명한 4황녀의 말이지만 베론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녀의 말을 받았다. 속옷에 얽힌 사건 때문에 망신을 당한 적이 있는 4황녀가 제국 정보 길드에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들의 구성원도, 어떤 루트로 정보를 얻는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룬 대장은 이번 일을 통해 본 것처럼 일신의 능력은 물론이고 다른 용병들에게도 강한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은 물론이고 돌풍 용병대는 마치 양파처럼 그 속을 온전하게 전부 파악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조직에서는 하다못해 그가 이방인인지 아니면 제국민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가 부리는 정령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베론이 선선히 자신들의 정보력 부재를 털어놓자 황자들은 내심 크게 놀랐다. 권력의 최중추에 있는 그들은 제국 정보 길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정보력이 얼마나 강하고 치밀한지도 그간 황실에서 일어난 몇 번의 사건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다 파악하지 못했다니.
“그가 이방인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요?”
흥미로운 얼굴로 1황녀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용병 길드에 등록된 돌풍 용병대는 몇 개가 있지만 그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알려졌거나 그 정체가 명확한데 하룬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 등록한 돌풍 용병대가 마음에 걸립니다. 혹자는 그냥 이름뿐인 단체라고 하지만 지속적으로 확인한 결과 일부 대원들은 실제로 그 용병대에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호오! 그거 흥미로운 사실이군. 이방인 중에 그런 능력을 가진 이가 있다니.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대도 알겠지?”
1황자는 비록 그렇게 말은 하지만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베론 역시 1황자처럼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저 역시 이방인에 불과한 자가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이방인의 이름만 빌리지 않았을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돌풍 용병대와 하룬 대장은 그 정체가 불분명합니다.”
“그럼 왜 그를 추천했는가?”
1황자의 질문에 베론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런 것은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그를 추천한 것은 오로지 그의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 제국 정보 길드의 힘으로 이렇게 불확실한 정도의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베론의 솔직한 말에 황자들은 그가 마랗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이해했다.
‘하긴! 본 황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는 제국 정보 길드인데 일개 용병대에 대해서는 거의 알아내지 못했으니 그것이야말로 돌풍 용병대가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
4황녀는 눈을 빛내며 하룬이라는 이름의 용병을 떠올렸다. 이제야 1황자를 비롯한 몇몇 황자들이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대해 강한 호감과 함께 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만 해도 하룬 대장은 자신들의 대원이 아닌 다른 용병들, 그것도 삼백 명도 되지 않는 소수의 인원들만 이용해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성공시켰습니다.”
사실 그건 그랬다. 워낙 상황이 다급하고 의외인 탓에 제대로 느낄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무력하게 엘프들에게 공격을 받아 몰살할 위기에 빠진 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발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탈출시킨 것은 물론이고 당사자들도 안전하게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돌풍 용병대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사고의 틀을 완벽하게 깨는 기발한 계획과 상상을 불허하는 놀라운 능력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보는 뛰어난 정보력과 안목, 마지막으로 무력을 비롯한 실행 능력에 있습니다.”
사실 베론도 돌풍 용병대를 이렇게까지 극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 중에서 돌풍 용병대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가장 컸다.
또한 자신이 기대려고 하는 1황자를 비롯해 황자 연합의 중심인물들이 자신보다는 하룬과 돌풍 용병대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그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베론의 입장에서는 하룬과 돌풍 용병대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자신과 헤르쉬를 비롯한 길드의 요인들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도 가장 적당한 방안이 바로 돌풍 용병대를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너무 적지 않소?”
7황자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다. 알려지기로 그들의 숫자는 겨우 넷이다. 하룬 대장까지 해도 다섯에 불과하니 무려 삼십만의 목숨이 달린 일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혹 모르지. 그가 드래곤이라면 가능할지도.”
4황녀의 말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를 단순한 용병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에요. 그는 확실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과 다양한 인맥 그리고 방대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어요. 또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을 일거에 뒤집어 버리는 지혜와 능력을 소유했지요.”
브리엘라 황녀가 소심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럼 그를 불러 좋은 생각이 있는지부터 파악하지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전 불만입니다. 굳이 명령을 내리거나 향후 작위를 내세워 부려도 될 일을 왜 그 많은 돈을 주고 대우를 해줘가며 의뢰를 한단 말입니까? 제국민이라면 당연히 황권에 굴복하고 명령을 내리면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거늘. 전 형님 전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8황자의 말에 1황녀가 고개를 흔들며 그를 향해 책망의 눈길을 보냈다.
“용병은 돈으로만 움직이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귀족들은 돈의 노예가 되는 용병들을 하찮게 보고 무시하지.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돈은 정직한 것이다. 용병 길드가 만들어진 이래 용병들은 돈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만들어 냈다. 더구나 돌풍 용병대의 하룬은 결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기사들이나 하위 귀족들 혹은 평민들처럼 권위를 이용해서 강압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자가 절대 아니란 사실을 명심해라. 또 하나 어쩌면 그가 이방인의 이름을 빌렸을지도 모르는 이유 중 하나는 이번 경우처럼 단순히 제국의 이름이나 황권으로 겁박하는 것을 애초에 피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미리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말으 하다 보니 나왔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황자들과 베론은 순간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대해 한 가지는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확실히 아그리아의 말이 일리가 있군. 우리도 신탁의 권위로 보호받는 이방인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이것마저 생각했다면 그는 정말 뛰어난 심계를 가진 인물이겠구나.”
1황자의 말에 1황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자신이 한 말이지만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상대가 지치고 충격 받은 상황이라지만 소드 마스터와 7서클 마법사들을 비수 두 자루로 죽인 능력을 가진 하룬이 이방인일 리가 없다. 그는 분명히 용병을 우습게 아는 귀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방인의 신분을 빌렸음이 틀림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라면 이 어려운 상황을 풀 수 있는 방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건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난 우리의 군자금과 황실의 보물을 보상으로 주어서라도 이 의뢰를 성공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1황자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다는 황자들은 없었다. 이제 황자들 모두 하룬과 돌풍 용병대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정체가 불분명하고 천한 용병에게 의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심정적으로 불편한 것을 얼굴로 드러내는 황자들은 아직도 많았다.
“나도 전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살아 나가는 일이야. 나라를 세우든지 아니면 전하를 도와 황도를 수복한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자신만의 꿈을 꾸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야 한다.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천한 노예면 어떻고 용병이면 어떠냐? 더구나 그는 이미 막강한 제국 정보 길드를 몇 번이나 엿 먹일 정도의 정보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를 무사히 워프 지역에서 탈출시켜 준 경력이 있다. 지금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가 우리의 의뢰를 받아들일 거냐는 문제이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그런 하찮은 문제가 아니다.”
1황녀의 말에 몇몇 황자들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역시 달리 막강한 황제 후보가 아니었다. 신분에 집착하고 권위에 집착하는 자신들과 달리 두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능력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는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다.
그들이 하룬을 부러 폄훼하는 이유 중에는 그런 능력자를 잘 알고 있는 1황자와 1황녀를 향한 질투심도 한몫했다. 사실 그들의 속마음에는 어떻게든 하룬과 돌풍 용병대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들일 욕심이 가득했다. 그래서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남들이 반감을 가지길 원했지만 1황녀의 말로 졸지에 옹졸하고 덜떨어진 인사가 되고 만 것이다.
“하룬 대장이라. 이렇게 대단한 인물인 줄 알았으면 인사라도 제대로 할 걸.”
8황자의 말에 1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제대로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봐라. 신분을 벗어나 진심으로 대화해 보면 네가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난세가 아니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절대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이 이처럼 많다.”
‘역시 1황자!’
사람들은 신분이라든가 칭호에 연연하지 않는 1황자의 파격적인 언행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들은 어찌어찌 따라갈 수 있지만 저런 열린 마음은 쉽게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었기에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말하는 것을 듣자 하니 벌써 1황자는 하룬이라는 용병과 가볍지 않은 인연을 맺은 것 같았다. 새삼 하룬이라는 용병과 돌풍이라는 이름의 용병대에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럼 그들에게 의뢰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지요. 어차피 분지를 포위하고 있는 연합군도 우리가 가세해 전열을 다지고 있는 만큼 쉽게 공격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직 며칠 정도의 여유는 있어 보입니다.”
7황자의 말에 다들 동의를 표시했다. 지금까지야 제대로 지휘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없어서 당했지만 이곳에 있는 인물들은 제국에서 상위 1% 안에 드는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물론 지금 당장 싸우고자 한다면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지휘권을 통일하는 문제도 그렇지만 일사불란하게 통일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이 의뢰를 받아들일까요?”
한쪽에서 조그만 소리가 나오자 다소 달아올랐던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착 가라앉았다. 정신이 확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 확실히 우리는 우리 생각만 했구나.”
브리엘라 황녀의 말에 1황자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그래요. 그야 그가 가진 놀라운 능력으로 이곳을 벗어나는 데 아무 지장이없으니 그냥 떠나도 그만이지요.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의 암습에서도 살아났으며 검증의 관의 비밀 입구를 찾았던 그입니다. 어쩌면 벌써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1황녀의 말에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유일할 수 있는 구명求命의 패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두려웠다.
“론도 경, 빨리 하룬 대장의 행방을 찾아보게. 찾는 즉시 내가 보잔다고 전하게.”
1황자가 즉시 기사장 론도 백작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와 함께 1황자는 란트렐에게 물었다.
“황자, 그에게 어느 정도를 제시해야 의뢰를 받아들일 것 같소?”
“일단 하룬 대장의 말을 들어 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적지 않은 보상을 제시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는 황자 전하와 아그리아 전하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란트렐의 말에 1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다. 그에 대해 함부로 예단하기보다는 하룬을 만나는 것이 먼저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전향적인 생각을 전제로 하면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그를 만나 보지. 베론 자작, 자네는 사람들을 풀어 그의 행방을 찾아보게.”
“네, 전하.”
이곳에도 정보 길드의 끈은 여기저기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정보 길드의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밖은 난리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막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곳곳에 엉망이 된 시체들과 불에 탄 시꺼먼 것들이 널려 있었다.
“뭐야? 이곳도 습격을 받은 거야?”
“그런가 보다. 다크 엘프들이 작정을 한 거야.”
자신들이 머무르던 곳을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용병들은 예전에 주둔했던 막사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수뇌부들과 하룬이 있었던 것이다. 트레저 분지의 기슭과 산등성이에는 피라미드 산이 그렇듯 엘프들과 북부 군단으로 추측되는 이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일단 몸을 숨겨야겠습니다.”
“그러세. 제길!”
하룬의 말에 피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라. 없으면 파든지.”
지시는 피엘이 했지만 다카란 용병단과 세 길드의 길드원들도 같이 움직였다. 그들의 수뇌부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적어도 오천 이상은 당한 거 같군.”
프레스의 말에 하룬은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철시에 꿰뚫리거나 화상으로 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숫자를 짐작할 수 있는지 자신은 알 수가 없는데 용케 숫자를 말하는 것을 보니 그것도 재주인가 보다.
“대장이 아니었으면 우리 길드원들도 저기 섞여 있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너무 끔찍한 상황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세류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했다. 물론 첫 공격에 죽지 않은 이방인들은 다크 엘프들과 북부 군단의 선의로 분지를 벗어났다는 것도 들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다.
“그러게. 하룬 대장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소.”
프레스의 고마움은 이방인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곁에 있는 피엘도 마찬가지였다. 하룬의 전언이 전해지지 않아 대원들이 이 참혹한 곳에서 공격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떠올리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룬 대장, 이곳에서 피한 대원들과 연락할 방도는 있는 건가? 우리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고?”
걱정이 되는지 피엘이 물었다.
“네, 있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갈 방도도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하룬의 장담에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휴우, 정말 다행이군. 역시 사람은 확실히 줄을 잘 서야 해.”
묘의 호위를 받아 처참한 분지 상황을 둘러보고 온 아반이 한 말이었다. 하룬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같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흉악한 일이 생길 줄 알고 사람들을 분지에서 나가게 했는지 정말 궁금하기만 했다. 돌풍 용병대의 정보력과 그 대처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측정 불가의 대상이었다.
한동안의 작업 끝에 적을 상대할 때나 써야 하는 마법이나 무기까지 동원해서 임시로 몸을 피할 참호를 파고 그곳에 들어앉은 사람들은 다른 진영과 달리 밝은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준비했다. 준비라고 해 봐야 불을 피울 수 없으니 육포와 물이 고작이었지만 죽은 동료들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
다른 진영들도 사정은 거의 비슷했다. 마법과 갖은 도구를 사용해 철시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참호를 파고 들어앉은 것이다. 미리 참호를 판 것에 더해 깊이와 넓이를 더 보강한 것이지만 철시 공격으로는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졸지에 분지에는 거대한 지렁이가 지나간 자리처럼 여기저기 참호의 띠가 생겨났다. 참호들은 필요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땅 위로 나다니다가는 혹여 다크 엘프의 철시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 할 수 없이 만든 통로였다.
대책을 세우느라 그 참호의 통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듯 분지 전체의 분위기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룬은 참호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라이피를 소환해 제법 커다란 공간을 만들었다. 참호의 깊이가 2미터가 넘어가지만 사람들이 모야 이야기를 할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수하들의 안전을 챙긴 사람들이 그 공간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하룬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른 진영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도가 있었다. 그래서 절망적이지가 않았고, 자연히 움직임에 여유가 묻어 나왔다.
웬일로 자청해서 차를 타 직접 들고 온 뫼비우스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대장, 몇 군데 교섭을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교섭?”
“네. 다들 이곳을 안전하게 빠져나가려고 할 테니까요.”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다. 하룬에게 이곳을 빠져나갈 방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뫼비우스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거래를 주선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안 돼. 우리 정도의 숫자라면 몰라도 더 많아지면 우리까지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흐읍, 정말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이던 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