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얼굴들
자신의 등장을 반기는 사람들과 간단하게 회포를 풀고 유저들이 모인 곳으로 향한 하룬은 육포와 빵 같은 마른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부활이 가능한 유저들이기에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대장! 헤니로부터 대장이 살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많이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했어요."
아레스였다. 그동안 결계 때문에 로그아웃을 하지 못하다가 하룬을 마지막으로 결계가 사라지자 작업상 방송사 일로 현실에 나갔던 아레스가 접속을 한 것이다. 그는 하룬이 이렇게 무사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뛸 듯이 기뻐했다.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하룬도 기분이 좋아졌다.
"대장, 그런데 제국에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레스는 황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반란이 일어나 황도에서 큰 난리가 났고 황도를 장악한 피노세 대공이 새로운 제국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소식은 황도에서 게임을 즐기던 유저들을 통해 제일 먼저 알려졌고, 이곳 트레저 분지까지 왔다가 검증의 관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북부군단과 다크 엘프들의 공격을 받고 허망하게 분지에서 쫓겨난 유저들을 통해서도 알려졌다고 했다.
"하룬 대장 덕분에 우리 길드원들이 무사할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세류가 감사를 표했다. 그녀 역시 트레저 분지에 모인 인간들을 향한 북부군단과 다크 엘프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많은 이방인들까지 죽음 당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같은 배려를 받은 아반 부녀와 발트랑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두 사람이 이끄는 길드는 빠른 이동을 위해 일부러 한번 죽음을 선택했었고, 그 결과로 레벨 다운까지 감수했기에 더욱 고마워했다. 한 번만 더 죽으면 레벨이 엄청나게 떨어질 상황이었다.
그렇게 분의기가 정리되자 아레스가 하룬에게 보고를 하는 식으로 다른 주제를 꺼냈다.
"지금 우리 세계에서는 이 소식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 이방인들에게 부여된 주요임무 중 하나가 골든 배틀에 참가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다들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스토리 퀘스트가 아예 깨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겠다.'
하지만 스토리 퀘스트를 깰 생각은 이미 하룬도 했었다.
정해진 이야기대로 가는 것은 재미도 없을뿐더러 앞으로 이곳 테론 제국 주민들이 내내 고통 받을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할 수 있으면 자신의 손으로 스토리 퀘스트를 깨려고 했던 것이다.
아레스의 말에,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의견을 개진하며 향후 정국의 변화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의논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테론 제국 사람들에게 파이론 제국의 등장은 오히려 반길 일일수도 있지. 몇십 년을 주기로 계속 젊은이들이 골든 배틀 때문에 죽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수백 년 이상 반복되어 왔으니까."
초른의 말에 사람들은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비욘드의 홈피에도 초른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유저들이 올린 글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테론제국의 농노들과 평민들을 계몽해서 신분 사회를 혁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유저도 꽤 많았다.
이곳 테론 제국의 백성들도 파이론 제국의 등장에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고 했다. 파이론 제국의 피노세 초대황제는 골든 배틀을 폐지하고 장자 세습의 원칙을 준수하겠다고 천명했다. 또한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황도인근을 장악한 것 때문에 일반 평민들의 경우 별 반감도 없으며 일부는 환호하며 반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 황자들이 이곳에 살아있으니 스토리 퀘스트가 끝난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세류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세류 길드장의 말이 맞습니다. 마지막까지 가 봐야 알게 될 겁니다. 권력투쟁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발트랑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골든 배틀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계승권자들이 모두 죽는다면 모르지만 아직 스토리 퀘스트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대장, 마법서는 어떻게 됐어요?"
세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주위는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정작 하룬에게 묻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죽었다고 알려질 만큼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나왔을 하룬에게 차마 그것에 대해 묻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이 하룬에게 쏠렸다. 현실세계의 필요 때문에 간절하게 마법서를 원하는 이방인들 뿐 아니라 용병들 역시 마탑에서 무려 100만 골드의 상금을 내걸었기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룬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검증의 관에서 외운 마법서는 총 여섯 권이었다. 처음의 두 권과 나중에 네 권의 내용을 모두 외운 것이다. 물론 마법에는 문외한이라 그 내용은 거의 짐작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하룬은 짧은 순간 고민했다.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마 저렇게 기대에 차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 거짓말을 하기도 힘들었기에 갈등이 생겼다.
"마법서들은 황자들이 얻었답니다."
문득 하룬의 뒤에서 뫼비우스의 말이 들려왔다. 잠깐 보이지 않더니 그사이 그쪽에 정보를 얻으러 갔던 모양이다. 아무튼 뫼비우스처럼 발이 넓은 유저도 별로 없을 것이다.
"1황자를 비롯해서 4관을 통과한 황자 일행과 귀족들이 마법서의 내용을 공유하기로 했다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에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뫼비우스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하지만 뫼비우스는 곧 사람들의 얼굴색을 다시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고대어로 적힌 마법서라 지금으로써는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는 모른다고 합니다."
아반이 주먹을 힘껏 쥐었다. 어떤 종류의 마법인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당장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대장은 제대로 던전에 들어간 것이 아니니 그걸 얻었을 리가 없지요."
하룬 바로 전에 나왔던 1황자를 포함한 사람들을 통해 하룬이 다른 입구로 던전에 들어왔다는 것을 전해들은 뫼비우스의 짐작이 담긴 말이었다.
'내가 마법서를 얻지 못한 것에 기분이 좋은 건가?'
묘하게 뫼비우스가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바람에 하룬에게 마법서에 대해 물을 생각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제길! 우리가 원하는 마법이 실려 있는 마법서여야 하는데. 그러나저러나 그 작자들은 돈을 준다고 해도 그 마법서를 내놓을 리가 없는데."
아반이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법 수준이 현재와는 비교도 할 수없이 발달했다던 고대 라 제국의 마법서이니 그걸 돈을 받고 넘길 리가 없다. 더구나 그들은 돈이라면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작자들이 아닌가.
마법서에 목을 매었던 사람들은 잔뜩 실망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휴우. 100만 골드가 아니라면 1,000만 골드를 불러서라도 얻어야지."
아반의 말에 사예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황당한 시선으로 자신의 부친을 보았지만 아반의 의지는 그만큼 단단했다. 그의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희망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그 정도면 배팅할 수 있겠다는 마음인 것같았다.
하긴 사본이라면 그 정도 조건에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300억도 아니고 3,000억? 기절하겠군.'
계속해서 유저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 환시세가 골드당 30,000 정도로 안정된 상황이다. 그 시세로 따지니 현실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약간 부담 간다는 정도의 감정을 담아 말하는 아반이나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하룬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양반 재산이 얼마야?'
노블 혹은 재벌로 추정되는 아반이 한 말은 몇십만 원에도 허덕이며 살던 하룬에게는 가히 상상조차 안 되는 것이었다.
망연하게 사람들의 반응을 보던 하룬의 눈에서 기묘한 광채가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입수한 마법서의 가치가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것이란 사실을 이제야 실감한 것이다. 아반을 비롯해 유니온의 상층부가 원하는 마법이 그 안에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있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시간을 두고 추이를 지켜봐야지.'
보물을 지킬 힘이 없는 이상 드러내 놓고 자신이 마법서를 얻었다고 떠벌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뫼비우스 때문에 자신과 마법서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짜식! 여자만 꼬이고 사는 줄 알았더니 꽤 쓸 만한 구석이 있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키워 줘야겠군.'
사실 뫼비우스의 그 잘난 얼굴과 약간의 노력만으로 여자들을 유혹하는 능력 때문에 약간의 질투심을 가졌고 그의 행실 때문에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지만, 같이한 시간이 많아지며 그런 것은 서서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정보를 다루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인식이 들어찼다.
찰나지간에 하룬은 뫼비우스와 정보를 연관시켰다. 하지만 마법서를 주제로 흥분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이후 그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하룬은 마저 식사를 하며 마법서에 대해 열띤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양해를 구하고는 용병들이 있는 참호로 건너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할 시간이었다.
"어서 오게. 고생했지?"
"캬하하하! 네가 무사하다는 것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제일 먼저 피엘과 엘저가 그를 반겼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잇는 곳과는 조금 떨어진 참호에 다른 용병들과 함께 있었다. 아까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반가움을 표시하지 못했던 엘저가 하룬을 덥석 안았다.
'크윽. 이건 무슨 냄새냐?'
엘저가 그 단단한 근육질 몸으로 꽉 안아 숨쉬기가 힘든 것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여자의 향기는커녕 그동안 제대로 씻은 적이 없어 쉰내와 악취가 진동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당장 그녀를 떼어 냈다가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더구나 그녀의 우정을 알기에 참아야만 했다.
"웬만하면 그만 하룬을 풀어 주지. 아빠라도 지금의 너와는 안고 싶지 않거든."
피엘의 말에 엘저는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듯 하룬을 밀듯이 떼어 냈다.
"좀 있다가 다시 이야기 하자. 난 참호를 보강하다가 말고 와서 말이야."
그동안 통 씻지를 못했던 탓에 자신의 코에도 악취가 진동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엘저는 정신을 차린 후에는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운 얼굴로 한창 깊이와 폭을 보강하고 있는 참호 작업을 도우러 황급히 움직였다.
"흐흐흐. 저 녀석이 그래도 자네 앞에서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의식하는군."
뭔가 야릇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피엘의 말에 하룬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농담 섞인 진담이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미 사정은 대충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상황을 알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되긴, 자네가 본 대로일세. 검증의 관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3관을 통과하다가 나오니 이 지경이었네."
피엘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추측과 함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엘프들의 철시 공격이 너무 강력했고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어 그 역시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에 걱정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그사이 피엘의 얼굴이 좀 마른 듯했다. 여러모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하룬의 안위도 그렇고 자신들이 검정의 관 3단계에서 죽어 버린 일이나 강제 워프되어 이곳에 오고 나서 엘프들에게 예기치 않은 공격을 당했으니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네는 어떻게 된 건가?"
피엘의 물음에 하룬은 대충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두 후작이 제국 정보 길드의 하수인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지만 결국 검증의 관에서 하룬의 손에 제거되었다는 말에 경악했다.
그가 놀라는 모습에서 자신의 실력을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은 하룬이 사실을 말했다.
알고 보니 그 두 사람이 제대로 관문을 통과하느라 무척 지친 상태였다고 합니다. 안 그랬으면 제가 어떻게 소드 마스터에 7서클 마법사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저야 비밀 통로를 통해 그곳에 갔고 심혼의 관을 간신히 통과했던 두 사람은 저를 보고 유령으로 생각해 놀란 것을 틈타 겨우 죽일 수 있었던 겁니다."
"흐음. 그렇지? 그렇겠지?"
이제야 겨우 인정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쉬이 놀람이 가시지 않는 듯 피엘이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대원들이 돌풍 용병대와 함께 분지 밖으로 이미 피했던 것이다.
"아무튼 자네 덕분에 우리 대원들이 무사히 트레저 분지를 나가서 다행이네 이방인들의 말을 들으니 분지에도 철시 공격이 가해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네."
"그 소리는 저도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내 예전부터 대륙 전체에 난세가 도래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이런 식으로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자세 말을 듣길 잘했지, 분지에 그대로 있었으면...... 휴우, 끔찍하군. 아무튼 자네가 우리 곁에 있어 정말 다행이야."
하룬이 피엘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참호 보강 작업을 마무리한 프레스가 못 보던 인물 세 명을 데리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단장님도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이런, 그런 소리는 대장이 나한테 들어야지. 죽었다가 살아오더니 어째 신수가 더 훤해졌군."
딸을 돌풍 용병대에 맡긴 프레스는 하룬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살가웠다. 친구 아버지로서 각별한 정을 주고 있는 피엘에 비해서도 차이가 별로 없을 정도였다. 나이도 한참이나 어리고 규모도 작은 돌풍 용병대지만 자신이 제대로 대우해야 남들에게 딸이 무시 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듯 그의 태도는 언제나 예의를 잃지 않았다.
프레스는 피엘처럼 미리 연락을 해준 덕분에 대원들이 무사히 분지를 미리 빠져나간 것에 후사를 하더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동맹에선 한 명도 4단계를 통과하지 못해 면목이 없네."
그건 사실 의외였다. 자신이 직접 통과해 봤지만 그렇게 어려운 관문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룬은 자신의 동맹에서 최소한 몇 명은 4단계까지 통과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관문은 아니었는데.......'
하룬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대장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동료들이 있어 같이 왔네. 이 친구는 드래곤테일즈 용병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나바스론이라고 하네. 내 오랜 친구이자 뛰어난 검사라네. 그리고 이분은 제국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클라우드 용병단의 맥클라우드이고, 이분은 메이소 용병단의 척메일이라고 하네."
피엘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눈으로 인사를 했지만 하룬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 명 다 굉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전문 용병단과 제국 10대 용병단의 단장들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클라우드 용병단의 맥클라우드는 이목구비는 물론 체구까지 큰 사람이었다. 비록 머리는 듬성듬성 백발이 섞였지만 근육질의 몸과 구릿빛 낯빛은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반갑소."
"하룬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룬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맥클라우드가 이끄는 클라우드 용병단은 몬스터와 마수사냥으로 유명했다.
"허허허! 용병계의 신성新星이 이렇게 환대해주니 고맙구려. 꼭 만나보고 싶었소."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합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허허, 겸손하기까지."
맥클라우드는 하룬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얼굴이었다.
"나 역시 하룬대장을 보고 싶었소. 1황자 전하께서 하도 칭찬을 많이 하셔서 어떤 인물인지 내내 궁금했었소."
메이소 용병단의 척메일은 전형적인 용병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흉터가 가득한 흉악한 얼굴에 강렬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는 척메일이지만 눈빛은 깊고 강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역시 기도가 예사롭지 않군.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 오늘은 하룬대장이 어떤 인물인지 잠시 짬을 내어 보러왔소. 나중에 용병길드에서 따로 볼 날이 있을 거요. 그때는 좋은 시간을 가져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용병계의 거목들을 만나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하룬은 애써 기운을 돋우어 기백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과는 얽힌 것도 없으니 당당해지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할 일이 있어 먼저 가오. 그럼."
두 사람은 진짜 하룬의 얼굴만 보러 왔는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1황자가 세 개의 용병단과 계약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 그들 중에 클라우드 용병단과 메이소 용병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들이 30만 골드를 내고 검증의 관에 입장한 용병단일 것이다. 그 돈은 아마 1황자와의 계약에서 챙긴 것이리라.
"에잉! 뭐가 그리 바쁘다고. 하긴 공연히 황자전하와 계약을 하는 바람에 두 용병단 친구들이 요즘 완전히 하인 신세긴 하지. 하룬 대장도 섭섭하게 생각 마시게."
프레스의 왼쪽에 서 있던 사람이 하룬에게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깊이 파인 주름살과 타다 못해 검게 변한 얼굴을 가진 나바스론은 피엘이나 프레스와 거의 같은 연배로 보였다.
아래위로 하나씩 빠진 앞니 때문에 좀 웃기게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얼굴이나 손등에 문신처럼 새겨진 흉터들로 인해 무시무시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용병아카데미에서 드래곤테일즈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요인 호위에 특화된 전문 용병단으로, 늘 넘치는 수요와 파격적인 의뢰비로 인해 용병들이 들어가기를 꿈꾸는 용병단 중 하나였다. 이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개개인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알려졌다.
"호위를 꿈꾸는 용병들의 가슴에 언제나 열망이 되는 단장님의 이름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런, 이런. 무슨 소리를. 이제 다 늙어 은퇴할 늙은이에게 별 민망한 말을 다 하는군. 용병들의 새로운 영웅이 이렇게 매끄러운 혀를 가졌다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나야말로 정말 만나서 기쁘네. 아무리 영웅이라도 내가 말을 놓는 것은 퇴물들의 특권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게."
"아, 아닙니다. 프레스 님과 피엘 님의 친구분이시라면 저에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두 분은 저에게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분들입니다."
하룬의 말에 피엘과 프레스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것을 본 나바스론이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허허! 이 친구들 좀 보게. 내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머리에 눈이 내려앉을 나이가 되니 날 제쳐놓게 용병계의 뜨는 영웅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정도로 컸네. 내가 제대로 키우긴 한 모양이야."
"이런! 말본새하고는. 벌써 노망이 난 거야?"
"제대로 눈 한번 틔워 주려고 귀한 사람 소개시켜 주었더니 배은망덕하게 나와 피엘을 흉봐? 이보게, 하룬 대장. 소개한 거 취소네. 그냥 소개 안한 걸로 치고 무시하게나. 있으나 없으나한 쓸모없는 작자니까."
세 사람은 하룬을 제쳐놓게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하룬은 일부러 성을 내며 과장된 얼굴로 싸울 기세인 그 모습들에서 깊고 진한 정을 느낄 수있어 무척 부러웠다. 자신에게도 저런 친구들이 많이 있으면 좋으련만. 태생적으로 좋은 성격을 타고나지 못한 때문인지 아니면 어릴 때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자라서인지 제대로 된 친구라곤 게임속의 엘저밖에 없는 스스로가 안타까웠다.
하룬은 세 사람의 격의 없는 대화를 들으며 정리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저, 세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세 용병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하룬을 주시했다.
"사실은 1황자전하로부터 의뢰를 제안 받았습니다."
"의뢰?"
"어떤 의뢰요, 하룬 대장?"
당장 피엘과 프레스가 강한 관심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의뢰가 풍기는 위험한 냄새가 진하게 풍겼지만 하룬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하룬은 1황자에게 받은 의뢰의 내용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으음."
듣고 난 세 용병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들어 보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이었다.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는데 불가능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서 세분이 도와주신다면 그 의뢰를 수락할 생각입니다."
하룬의 의사를 들은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 눈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피엘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나야 자네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언제나 상관없네.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수락한 건가?"
피엘의 목소리에는 진한 우려가 담겨 있었다. 난다 긴다 하는 제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어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그중 3분의 2가 죽어 다른 동료들의 방패로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하룬은 강한 눈빛을 쏟아 내며 힘주어 말했다.
"가능합니다."
비록 그는 자신감을 보였지만 경험 많은 세 용병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구상한 계획부터 설명해야 했다. 1황자의 의뢰를 받는 순간 떠올린 계획이 있었다.
"먼저 제가 생각한 계획부터 들어보시죠."
"좋소. 한번 들어봅시다."
세 사람은 하룬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의뢰였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있는 하룬은 이미 몇 가지 불가능에 가까운 의뢰를 수행한 증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렇게 일말의 기대는 하고 그의 의견을 물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곳은 지금 가을이고 저 피라미드 산에는 제법 많은 풀들과 관목들이 자라있습니다. 더구나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풀들은 누렇게 말랐습니다. 엘프들이 주둔하고 있는 피라미드산은 큰 나무도 없이 키큰 풀들과 말라죽어가는 나무들만 있을 뿐입니다."
하룬이 거기까지 언급하지 나바스론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럼 혹시 화공을?"
"네. 비록 피라미드 산이 그 규모가 작고 우리가 있는 곳이 분지이기는 하지만 좁은 곳이라 골바람을 타면 쉽게 불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골바람이 뭔가? 난 이해를 못하겠는데."
나바스론의 질문에 하룬은 언젠가 유니넷으로 독학할 때 공부했던 상식을 떠올렸다.
"아시다시피 바람이란 대기가 햇볕에 데워지는 정도에 따라 생성됩니다. 낮에는 산봉우리 부분이 빨리 데워지기 때문에 산골짜기나 분지아래에서 위를 향해 바람이 붑니다. 그것을 골바람이라고 부릅니다. 밤에는 반대가 되어 먼저 차가워진 산봉우리에서 아직 덜 식은 평지를 향해 바람이 내려가는 겁니다. 그것을 산바람이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난 직후 저들의 긴장이 풀리는 낮시간을 이용해서 화공을 펼쳐야 합니다."
"흠. 그게 골바람이었군. 우리 용병단은 주로 하는 일이 요인 호위라 내 상식이 좀 없는 편이오. 그런데 바싹 마른 풀이라 자칫하면 저 위쪽뿐 아니라 우리 쪽으로도 번질 수도 있는데 그리고 아무리 긴장이 풀리는 시간이라지만 우리를 감시하는 놈들은 여전히 있을 텐데."
"그래서 바람을 조종하기위해 마법사들이 필요하고, 방화선을 만들기 위해 용병들이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활을 잘 다루는 프레스 단장님과 다카린 용병단원들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흠, 마법사들이야 바람을 저들에게 날리기 위해서 필요하다치고 우리의 능력이 꼭 필요한 이유는 뭐요? 우리 다카린이야 다른 용병들보다 활을 잘 다룬다는 것 외에는 특출한 것이 없는데."
프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하룬을 보았다.
"바로 그 능력입니다. 한 번의 화공으로는 단단한 진영을 이루고 있는 저들을 효과적으로 흔들 수 없습니다. 저들 중에는 물의 정령과 대지의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들이 있으니 쉽게 불길을 잡거나 막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산기슭에서 시작할 1차 화공에 이어 산중턱이나 정상부근에 추가적인 화공이 이어져야만 합니다."
"흐음. 화공의 의미는 알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우리 용병단이 해야 할일은 모르겠소, 설마 우리에게 다크 엘프들을 화살로 공격하라는 이야기면 포기하시오. 활을 가지고 온 단원이 별로 없으니까. 나를 포함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활과 화살을 다른 단원들에게 맡겨 놓고 왔소."
프레스의 말에 나바스론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거기에 우리 마법사들이 과연 엘프들의 눈을 피해 파이어볼과 같은 마법을 펼칠 여유가 있겠나? 놈들은 마나의 유동을 귀신처럼 알아채는데."
"그게 아닙니다. 활을 소지한 단장님과 다카린 용병단원은 2차 화공을 담당할 겁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화살에 이것을 달아 쏘면 땅에 떨어지는 동시에 상당한 화염이 일어날 겁니다."
"그게 뭔가, 하룬 대장? 포션 병 같은데."
물어보는 나바스론뿐아니라 피엘과 프레스도 하룬이 내미는 포션병을 조금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화염병이라는 아이템입니다. 보기에는 작은 병이지만 한 번 떨어지면 그 충격을 반경 5미터 정도가 2분 동안 화염에 휩싸이게 됩니다."
"호오! 화염병? 이런 물건이 있었단 말이오? 한번 구경 좀 합시다."
세 사람은 하룬으로 부터 받은 화염병을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의 아이템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구체적으로 화공을 어떻게 펼칠지 윤곽을 잡을 수있었다.
"허어! 이렇게 작은 것이 그런 무시무시한 위력을 펼칠 수 있다니. 그럼 불길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가겠군."
"흐음. 이 정도라면 정말 쓸 만하겠군. 몇 개나 있소, 대장?"
하룬은 이미 만들어 둔 것과 임시로 만든 가죽주머니에 있는 분량을 생각해 보고 대답했다.
"이미 만들어진 것은 마흔 개 정도 되지만 모든 재료가 다 있으니 마저 만들면 총 이백 개 정도는 될 겁니다. 그럼 한 방면에 마흔 개 정도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쪽 마법사들이 불길만 잘 조절한다면 이후는 잘 마른 풀들과 관목들이 알아서 엘프들을 손쓸 수 없게 만들 겁니다. 이곳을 벗어날 사람 숫자가 사천 명이 넘지만 거의 모두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니 우리가 10분 정도만 막으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이 다섯 개의 주변 피라미드 산의 풀과 나무면 그 정도는 타지 않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하하하, 화끈하겠군!"
나바스론이 이제까지의 걱정과 근심을 털어 내려는 듯 크게 웃었다.
"문제는 공격이 아니라 우리가 안전하게 탈출하는 것이군."
프레스는 처음에 비해서는 조금 밝아진 얼굴이었다. 물론 우려는 아직 남아 있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게. 놈들의 능력이라면 아무리 우리가 추가적으로 화염병을 공격을 한다고 해도 그리 오래지 않아 방법을 생각해 낼 테니 말이야."
피엘의 말에 나바스론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맞아. 요는 시간 싸움인데 우리가 가장 나중에 탈출하니 위험은 피할 수가 없어. 잘못하다가는 다른 사람들은 다 탈출하고 우리만 남아 분노한 다크 엘프들에게 학살당할 수도 있고."
세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행각에 잠겼다. 이윽고 피엘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하룬 대장이 쓸 만한 방법까지 생각해 냈으니 우리 목숨을 떠나 의뢰 자체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아 하니 지금 하지 않아도 나중에 억지로 엘프들의 시선을 끄는 일에 동원 될 수도 있는 데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것이 좋겠지. 좋아! 어차피 하룬 대장이 하겠다면 우리야 당연히 따라갈 생각이었으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지. 우리 어비스는 하겠네. 설마 자네가 우리를 사신死神에게 끌고 가지는 않겠지."
그가 지금 믿는 것은 오직 하룬의 자신감이었다. 악마 오크가 우글거리는 후크란 산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는 하룬의 능력이라면 모험을 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소. 나도 하겠소. 까짓것 해 보지, 뭐. 돌풍과 프레스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이니. 제국 10대 용병단이라는 이름을 도박으로 딴것은 아니니까."
프레스의 얼굴은 피엘보다 더 편안했다. 설마 사돈 간이다 마찬가지인 하룬이 달리 생각한 것도 없이 불가능한 의뢰를 같이하자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피엘이 말한 가능성을 그도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귀족, 거기에 황자들이라면 하찮은 용병들은 방패막이로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는 종자들인 것이다.
"한동안 안본사이에 이놈들의 간덩이가 무지하게 커졌군. 하하하! 그래, 좋아! 나도 하지. 던전인지 검증의 관인지 제대로 깨지도 못하고 이렇게 비루먹은 개 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나바스론 역시 결심을 굳혔다. 지금하지 않아도 나중에는 억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것도 그 결정에 한몫했지만 하룬의 기발한 발상을 믿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위에 계란 치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랜 친구이자 그 능력을 믿는 두 사람이 하겠다는 소리에 어느 정도 기대도 되었고, 또 불가능에 가까운 의뢰를 하룬이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세 사람을 위해서라도 하룬은 불안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반드시 해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불안했던 것이 모두 사라졌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내가 직접 해보기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지 않겠다.'
하룬은 마음이 든든했다. 세 사람이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황자들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생각했다. 탈출 루트는 자연스럽게 트레저 분지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향해 난 피라미드 산들 사이의 길로 정해졌다.
"관건은 탈출 루트 쪽에 포진한 적들의 화력을 무력화시키고, 나머지 네 방향에서 가해질 공격을 얼마나 잘 막아내느냐는 것입니다."
이번 의뢰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이 워프지역에서 탈출할 때까지 적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탈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엘프들이 우리의 화공을 얼마 만에 진압하느냐와 숫자도 얼마 안 되는 우리 용병들에게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는 거요."
하룬의 말을 피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받았다. 프레스 역시 피엘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드래곤테일즈의 단장인 아바스론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다크 엘프들의 분노에 찬 공격을 얼마 되지도 않는 용병들이 감당하며 탈출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의 전력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하룬의 말에 피엘부터 대답했다.
“우리 어비스는 사십오 명이네. 마법사는 셋이지.”
“우리는 구십 명이오. 마법사는 일곱이오.”
“드래곤테일즈는 마법사 서른일곱을 포함해서 모두 백 명이네.”
이곳 검증의 관까지 들어온 것을 고려하면 이 숫자의 용병들은 거의 1급이나 특급일 것이다. 그 정도 등급의 용병이면 최소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을 가졌으니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숫자가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마법사가 많은 드래곤테일즈 용병단이 백 명이나 검증의 관에 들어온 것이 다행이었다.
드래곤테일즈 용병단이 검증의 관까지 들어온 것은 의외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세가 비교적 약한 8황자 일행을 고요의 땅까지 안내한 의뢰의 대가로 요구한 것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황자 진영에 끼어 이곳에 들어온 용병들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저까지 합해서 이백사십육 명이군요.”
하룬은 잠시 생각했다.
‘드래곤테일즈가 합류한 것이 다행이군.’
보통 용병단에서 마법사의 비율은 2할이 넘지 않는다. 하룬이 생각하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윈드 계열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4할에 가까운 인원이 마법사인 드래곤테일즈의 합류는 고무적이었다.
‘그래도 마법사의 숫자가 좀 부족하니 이방인들 중에서도 쓸 만한 인재들을 섭외하자.’
그렇게 생각에 잠긴 하룬의 모습을 세 노용병들은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어차피 의뢰를 받은 것은 돌풍이었다. 자신들은 경험이 많지만 창의력과 추진력은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젊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하룬에게 일단 맡겨 두는 것이 좋았다. 더구나 그는 한순간에 용병들의 위상을 높이 끌어올린 인물이 아닌가.
‘문제는 네 방향에서 쏟아질 화살과 마법 공격이야. 정령 마법이야 이곳이 결계 내의 지역이라 어느 정도 약해지겠지만 화살 공격이 문제란 말이야.’
작전 중이나 퇴각 중에 화살 공격을 막을 효과적인 수단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곳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방도군요.”
하룬의 말에 세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침묵을 유지했다.
‘제길! 머리가 굳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동안 제대로 된 의뢰를 받지 않아서 그런지 아무런 생각도 안 나네.’
피엘은 그동안 길드 본부의 일을 하느라 의뢰를 받지 않아 현장 감각이 떨어졌음을 탄식하며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프레스와 나바스론도 자신과 비슷한 상황인지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막 탄식하려던 피엘을 보며 프레스가 급히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하룬이 뭔가를 생각하는 것을 본 것이다.
세 사람은 하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룬의 표정 변화에 따라 세 사람의 마음도 급변을 거듭했다.
마침내 초조함을 참지 못한 나바스론이 입을 열려는 순간 하룬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탄성을 지른 하룬에게 세 쌍의 눈길이 쏠렸다. 그들의 눈에는 강렬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철시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물건을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룬은 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사람들이 없는 꺾어진 참호 한구석에서 아공간을 열었다.
“아공간 오픈!”
하룬은 아공간에서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을 꺼냈다. 폭은 8미터가 넘고 길이는 무려 40미터가 넘는 엄청난 가죽이다. 그 가죽을 바라보는 하룬의 눈이 빛났다. 엘프들이 사용하는 철시가 비록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마나가 실린 검날도 쉽게 벨 수 없는 질기고 단단한 가죽이다.
세 사람은 하룬이 품 안 가득 안고 오는 것이 가죽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는 알지 못했다.
“저, 저건 무슨 가죽이지?”
세 용병은 하룬의 몸만 한 엄청난 크기의 가죽을 보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하룬이 펼쳐 놓은 가죽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보았다.
“무슨 가죽인데 이렇게 두껍고 질긴 건가?”
“후크란 보석 광산 지대에 서식하는 특별한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입니다. 이 가죽이라면 정령 마법은 몰라도 다크 엘프들의 철시를 어느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겁니다.”
하룬의 말에 세 사람은 깜짝 놀라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언 스네이크라면 나도 잘 아는데 이건?”
프레스와 피엘은 이렇게 큰 가죽이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이란 사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그놈은 가장 큰 것이 길이 15미터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생김새는 맞는 것 같은데…….”
피엘은 비록 하룬이 헛소리를 하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연방 거개를 저으며 가죽을 살펴보았다.
하룬은 굳이 이것이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 가죽이 다크 엘프들의 철시를 막을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일단 시험을 한번 해 보지요. 제가 가죽을 펼쳐 들고 있을 테니까 누가 한번 화살을 쏘아 보시지요.”
“내가 하지!”
프레스가 나섰다. 신궁으로 알려진 도네이스에게 궁술을 가르친 프레스이니 그의 활 솜씨는 최소한 엘프들에 버금간다고 할 것이다. 평소에 봉처럼 들고 다니던 키 높이의 금속 봉을 구부리고 양쪽에 오우거의 힘줄로 가공한 줄을 걸어 거대한 활을 만든 그는 바닥에 꽂힌 철시들 중 몇 개를 뽑아 시위에 걸었다.
참호를 따라 약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선 하룬은 양손으로 가죽을 쫙 펴서 자신의 앞을 가렸다.
“괜찮겠소?”
불과 1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력한 탄력을 가진 특수한 대궁으로 철시를 날리려는 프레스의 눈에 우려와 불안감이 교차했다. 마나를 주입하지 않아도 이 정도 거리에서 쏘는 철시라면 바위라도 뚫고 깊이 박힐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사 뚫리더라도 다치지 않을 겁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위신느를 소환해서 전신에 바람 방패를 두를 생각이었다.
“만약 그 거리에서 내가 날린 철시가 그 가죽을 뚫지 못한다면 다크 엘프들의 철시는 확실하게 막을 수단이 생길 거요.”
“그럴 거라고 확신합니다.”
용병들은 때아닌 궁술 시범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뭔가 엘프들을 상대할 방안을 찾아낸 것 같은데 사실은 말도 안 되는 광경이라 말은 못 하고 불안한 눈길로 프레스와 하룬을 번갈아 보았다.
“저 가죽이 뭔지 모르지만 도저히 가망이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단장의 대궁으로 날리는 철시인데…….”
“일단 지켜보자고. 하룬 대장이라면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용병들은 나직이 수군거리며 상황을 주시했다.
하룬은 위신느를 소환해 몸에 바람 방패를 둘렀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바람 방패의 모습까지 드러내야만 했다.
프레스는 소용돌이치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방패가 하룬의 몸 바로 앞에 생성되었다고 놀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하룬 대장이 정령사라는 걸 왜 자꾸 잊는 거지. 저 친구가 아무 대책 없이 나설 리가 없는데 말이야.’
걱정을 덜었으니 이제 마음 놓고 철시를 날릴 차례이다. 그러고 보니 활을 잡는 것도 오랜만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오른쪽 뺨을 적당하게 누르는 압력을 느끼며 감각을 최대로 끌어 올렸다.
파앙!
강력한 파공성과 함께 철시가 날았다. 프레스의 감으로 볼 때 이 정도면 적어도 500미터는 날아갈 것이다. 그사이에 있는 웬만한 것들은 전부 뚫을 수 있을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퍼억! 티잉!
맹렬한 속도로 날아간 철시는 하룬이 두 손을 높이 들어 펼치고 있는 가죽과 부딪치는 순간 튕겨 나가고 말았다.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이 얼마나 방호력이 대단한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와아!”
“철시가 가죽을 못 뚫었어.”
“아니야, 촉은 박혔는데 그 이상은 뚫지를 못한 거라고.”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면서도 프레스의 눈은 거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가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칭 신궁의 아버지인 자신이 철시로 10미터 거리에서 쏜 화살이 가죽을 뚫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흔적도 선명하게 남기지 못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어! 방금 전 날린 철시라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위도 뚫을 수 있는데.“
비록 마나를 주입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거리라면 그 어떤 것이든지 다 뚫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하던 프레스는 오기가 났다.
“하룬 대장, 한 번 더 가도 되겠소?”
“네, 한 번 더 부탁합니다.”
하룬의 믿음직한 말이 이 순간만큼은 왠지 얄밉게 보였다. 마치 자신의 궁술 실력을 무시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프레스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헉! 오러!”
“이런! 저러면 위험한데.”
“프레스 단장, 진정해!”
주변 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 화살촉이 박혔던 자리를 응시하는 프레스의 눈에서 불이 솟아 나왔다. 정신을 집중해서 한 점을 응시하고 온 힘을 활과 시위 그리고 철시에 담았다.
쐐액!
역시 가공할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물고기가 유영하듯 그렇게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까운 터라 그 유영 폭이 극히 좁아 오히려 위력이 극대화되었다. 옅은 주황색 오러가 날아가는 철시를 환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철시는 너무나 어이없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티익!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러가 실린 철시의 촉이 조금 더 깊이 박혔을 뿐 잠시 후에는 그마저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의 촉이라도 온전히 다 박혔더라면 조금은 나았을 텐데.
“허어, 참! 이럴 수도 있는 거군. 오러 애로우가 뚫지 못하는 가죽이 있다니.”
프레스는 결국 허탈하게 대궁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가 날리는 오러 애로우는 이 정도 거리라면 실제로 바위도 문제없었다. 그런데 가죽이 그것을 견딘 것이다.
“이 가죽의 내부 구조가 특이해서 그럴 겁니다. 베는 것은 몰라도 일점의 충격은 거의 문제없이 막아내는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아마 이놈들의 가죽은 현실의 하르크 가죽과 거의 동일한 구조일 것이다. 다양한 결을 지닌 피부층이 겹쳐 만들어진 가죽이기에 마나가 담긴 도검류로는 벨 수 있지만 찌르기 공격이나 회전력 혹은 화약의 힘으로 발사되는 총포류에는 거의 손상이 되지 않는다.
“하하하! 그럼 우리 목숨은 확실하게 지킬 수 있겠군.”
“맞아! 이런 가죽이라면 다크 엘프들의 철시 공격에도 끄떡없겠어. 하룬 대장이 제대로 된 보호 수단을 가지고 있었군. 이 엄청난 의뢰를 어찌 받아들였나 걱정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프레스는 허탈하고 약간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침통한 얼굴이었다가 곁에서 피엘과 나바스론의 대화를 듣고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화살이 약한 것이 아니라 가죽이 문제였다는 것과, 그것 덕분에 용병들의 목숨 줄이 길어졌음을 확신한 것이다.
이 정도 크기의 가죽이라면 어깨를 맞대고 보폭을 최대한 줄이면 모두 덮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다 들어갈 수 없다면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의 방어구를 최대한 껴입고 버텨야 한다.
“하룬 대장이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시오. 난 그대로 따르겠소. 늙어서 그런지 머리가 굳어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소.”
프레스는 이제 승복했다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하하하! 나도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테니 계획을 말해 보게.”
“우리가 최소한 엘프 놈들의 화살에 의해 몰살당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섰으니 우리도 하룬 대장이 원하는 그대로 움직이겠네.”
피엘과 나바스론까지 프레스처럼 완전히 하룬에게 승복했다.
하룬은 세 사람의 조언을 받아 일사천리로 계획을 완성했다. 인원과 시간 배분 같은 구체적인 사항은 노련한 세 늙은 용병들이 다 짠 것이다.
어느 정도 계획이 수립되자 네 사람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떠올랐다. 모두의 머릿속에 계획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룬이 만든 뼈대에 살과 근육을 붙이자 근사하고 기발한 계획이 완성되었다. 용병들이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들이 맡은 일들만 제대로 수행한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각자 맡은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피해를 최소화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하룬의 말에 피엘과 프레스가 안심했다는 얼굴로 변했다.
“하룬 대장 말을 듣고 보니까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 화끈하게 풀리는걸. 정말 기발한 계획이네. 하룬 대장, 왜 새파랗게 젊은 친구를 용병계의 영웅이라고 부르는지 이젠 알 것 같군. 나, 나바스론, 그대에게 아주 반했네. 하하하!”
나바스론이 대소를 터트렸다.
표정이 풀린 것은 그들 네 명만이 아니었다. 언제 접근했는지 각 용병단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용병들이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뢰 대금 말인데요.”
돈이 언급되자 세 사람과 주변의 용병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하룬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금 이전에 자신이라는 인간을 믿고 합류했으니 최고로 대우해주고 싶었다.
“어느 정도 선이면 될까요?”
하룬의 질문에 세 사람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난감해하는 얼굴이었다.
“흐음. 이런 상황이니 특급에 해당하는 의뢰로 보면 되겠는데. 하지만 그 기한이 짧으니 반액 정도로 해서 500골드까지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용병 길드에서는 암묵적으로 각 급수의 의뢰에 대한 보수를 정하고 있다. 하룬은 자세하게 몰랐지만 피엘의 말을 들으니 특급 의뢰가 1,000골드 정도 하는 모양이다.
“그거야 보통의 경우 이야기지. 지금은 우리 역시 같은 처지이고 저들이 고귀한 종자들이니 그렇게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건 프레스의 말이 맞아. 대금 산정이 쉽지는 않겠어.”
귀엣말로 소곤거리는 프레스와 나바스론은 피엘의 말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감히 같은 장소에 있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을 고귀한 신분의 황자들과 귀족들이 권위와 겁박으로 강제로 작전을 펼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제가 생각하기엔 두당 1,000골드면 어떨까 싶은데요?”
어느 정도를 불러야 하는지 감이 없었던 터라 일단 그 정도 액수를 불러 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더 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일단 특급 의뢰의 일반 보수가 1,000골드라니 그 정도에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1,000골드? 정말인가? 정말 자네가 그 정도의 보상을 받아낼 수 있겠는가?”
피엘은 눈을 크게 뜨며 액수와 수령 여부를 확인했다. 하룬은 피엘의 말을 통해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런 반응에도 마음이 불안했다. 자신이 너무 약하게 부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어차피 나주엥라도 총 의뢰 대금이 100만 골드라는 것이 알려지면 너무 적게 불렀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네. 의뢰의 중대함과 위험으로 보아 그 정도는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허어!”
탄성을 지른 세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빛이 강렬해지고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멋지군!”
“역시 통이 크군.”
만족을 표시하는 세 사람의 반응에 하룬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사실 1급 용병이라고 해도 1년으로 환산해서 1,000골드를 벌기는 지난한 일이다. 용병들은 수입 대비 지출이 보통 6할 이상이다. 무기를 비롯한 장비를 본인이 책임져야만 하기 때문에 그 정도 액수면 특급 용병이 반년 내지 1년 동안 벌어들이는 돈인 것이다.
용병단으로서는 엄청난 거금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미 연봉으로 계약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특별 의뢰로 취급해서 보수의 3분의 1을 보너스로 준다고 해도 용병단 입장에서는 나머지 절반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만 해주시게. 대장 능력으로 더 이상 받아 챙기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네.”
나바스론이 만족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룬은 그들이 이미 이 의뢰에 대한 보상 금액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하하! 당연한 말을. 아, 어쩌면 우리 하룬 대장이라면 정말로 더 받을지도 모르겠네.”
피엘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물론 어느 정도 희생은 각오하고 있지만 의뢰 대금이 들어오면 용병대의 재정이 대번에 좋아질 것이다.
피엘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단기간에 용병단으로 크기 위해서는 영입 자금을 비롯해 수많은 자금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개개인의 실력이 좋아도 일단 규모가 커져야 많은 의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현재 용병계의 풍토이니 모험을 하기로 한 것이다.
프레스와 나바스론 역시 만족했다. 이곳까지 와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입장인데 이렇게 거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정말 다행한 일이다.
하룬이 과연 어떤 계획으로 탈출 루트 방향의 엘프들을 처리할지는 이제 궁금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런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하룬에게 향하는 용병들의 눈 속에 믿음의 빛이 생겨나고 있었다.
“자, 이제 세부 사항을 의논해 보지요. 이번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시간과 행동을 정확하게 맞추는 겁니다. 한 군데라도 늦거나 미흡하면 전체적인 그림이 비뚤어져 버립니다. 이곳에 올 정도의 실력자들이니 그 정도는 잘 아실 겁니다. 자, 일단 피엘 단장님은…….”
하룬과 세 용병단장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수하들을 연방 불러들이며 계획을 조율했다. 거사를 치를 시간이 낮이고 이곳이 좁은 분지이기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밤이라면 시간을 맞추는 것이 극히 어려우니 말이다.
그사이 새로운 참가자들이 생겼다. 뜻밖에도 세류의 코엠 길드가 이번 의뢰에 동참한 것이다. 자금 때문일 리가 없으니 오로지 세류의 개인적인 의견이 작용한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던 하룬으로서는 세류의 선의가 고맙기만 했다.
그렇게 계획은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점차 치밀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