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빠진 인간들》
“이런!”
1황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워프한 곳은 던전 사이의 작은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던전에 들어왔다가 중간에 밖으로 워프해 나간 탈락자들이었다.
“전하!”
1황자 휘하에 소속된 은사자 기사단의 단장 라닌 후작이 달려나왔다. 언제 판 것인지 시체 사이에는 많은 참호들이 파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몇 사람씩 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다크 엘프들입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려는 우리를 막아서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보니 역시나 다섯 개의 피라미드 산 곳곳에 다크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1황자는 이를 갈았다. 그의 표정을 본 라닌 후작이 물었따.
“전하, 뭔가 아시는 거라도 있으신지요? 저희는 워프한 후 영문도 없이 다크 엘프들에게 당해왔습니다.”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지. 얼마나 살았나?”
“각 진영이 협조가 되지 않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사분의 일 이상이 죽은 걸로 보입니다. 그들의 시체를 방패로 주기적으로 쏟아지는 화살 공격과 정령 마법을 막아 내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세 황자분들이 불행하게 화살 공격에…….”
라닌의 말에 황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기사전도 아니고 다른 형제들의 손도 아닌 엘프들의 화살 공격에 세 명이나 죽었다는 말에 참담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황자들과 회의를 해야겠다. 어서 불러라.”
“네, 전하!”
그나마 참호라도 있어 다행이다. 초반에 나왔던 마법사들이 디그 마법으로 판 것으로 보이는 참호들은 기사들의 시체를 겹겹이 쌓아 올려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보통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기사들의 시체들이라면 어느 정도 울타리는 될 것이다. 비록 동료들의 시신에 무례하고 참담한 짓이지만 그렇게라도 살아야만 했다.
라닌 후작의 안내로 시신들이 쌓여 만들어진 참호로 들어간 세 황자는 살아남은 황자들과 고위 귀족들을 불러 회의를 했다. 하지만 족히 일만은 되어 보이는 엘프들의 화살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일도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놈들의 화살은 철시입니다. 우리는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피할 곳이 없습니다.”
4황자가 침통한 얼굴로 보고했다.
“대인 마법은 거리가 너무 멀고 광역 마법을 펼치려고 하면 귀신처럼 알고 집중 공격을 하는 터라 희생자가 속출했습니다. 더구나 엘프들의 정령 마법도 위력적입니다.”
더구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서로 적대하고 있기에 무려 사천이 넘는 인원이 있지만 효율적으로 엘프들과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황자는 서로 경원시하는 각 세력들을 보고 금방 그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다.”
1황자의 말에 모여든 황자들과 귀족들이 주의를 기울였다.
“비상 상황이다. 아무래도 대공 중 한 명이 다크 엘프들과 제국 정보 길드와 짜고 이곳을 우리의 무덤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볼카웜을 처치하다가 죽었다던 하룬 대장이 살아 돌아왔다. 그는 제국 정보 길드의 개였던 알랭 후작과 마스론 후작에게 암습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하룬 대장은 다크 엘프들에게서 도망친 그린 엘프 일족을 통해 1년 전에 대공이라는 신분을 가진 인간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다크 엘프들과 모종의 암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난 그 대공이 군권을 쥐고 있는 피노세 대공이라고 생각한다.”
1황자의 말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너무나 뜻밖의 사태에 할 말을 잊은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설명을 들으니 충부히 이해가 갔다. 여기 있는 인물들은 누가 뭐래도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이거나 뛰어난 이들이다.
“그럼 이 모든 것이 피노세 대공이 제국 정보 길드를 이용해 판 함정이었다는 거예요?”
하룬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에 반색하던 막내 황녀 브리엘라가 이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렇구나. 우리끼리 골든 배틀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무래도 황실과 황도는 이미 그 대공이라는 작자에게 넘어간 것 같다.”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런 이리…….”
“곧 확인될 것이다. 우리가 황제의 계단으로 알고 있던 곳이 실제로는 검증의 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 증거 중의 하나이다.”
“설마.”
황자들은 이미 검증의 관에 들어갔다 나왔기에 1황자의 말에 심하게 동요했다. 다른 것은 단지 추측이나 소문에 불과한 것이지만 던전의 이름은 그들도 검증의 관에서 듣고 놀랐던 것이다.
“이런 소식은 이방인들이 우리보다 더 빠르다. 곧 이곳에 있던 이방인들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오면 확실해질 것이다. 어쨌든 트레저 분지에 있는 우리와 수하들만 죽는다면 테론 제국을 통째로 삼키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꾸울꺽!
누군가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깼다.
“비상 상황이다. 일단 이곳에서 살아나가야 한다. 각자 기반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세력을 모아야만 해. 쉽진 않겠지만.”
1황자의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추측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테론 제국의 최고 귀족들과 마법사 그리고 기사들이다. 한낱 엘프들에게 묶여 있을 수는 없지. 힘을 합쳐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일단 나도 이곳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시간을 좀 가지자. 모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수하들에게 이 사정을 이야기한 다음 다시 돌아와 의논하기로 하자.”
절체절명의 상황이니 힘을 합치지 않을 수가 없다. 벌써 골든 배틀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결국 세 황자만이 4관을 통과했으니 그들 중 한 명이 황제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결연한 표정의 황자들은 은밀하게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하룬이 밖으로 워프해서 본 첫 장면은 하늘 가득 쏟아지는 화살 비였다.
“뭐야?”
워프하자마자 화살에 맞게 생겼으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화살에 맞을 수는 없어 급하게 위신느를 소환했다.
-위신느, 윈드 실드!
위신느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소환되는 것과 동시에 소용돌이치는 바람으로 실드를 만들어 하룬의 전신을 가렸다.
탁! 탁! 탁!
직사로 쏘아지는 화살은 물론이고 곡사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살까지 윈드 실드를 두드렸다. 아마 웬만한 방패라면 뚫리고 말았을 가공한 위력이었다.
‘엘프? 다크 엘프들이군.’
막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다섯 개의 피라미드 곳곳에 몸을 드러내고 화살을 쏘는 엘프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대부분이 다크 엘프들이었다.
화살 비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적어도 다섯 번은 연속해서 감행되었고, 그 결과 상당한 피해가 났다. 비록 직사로 쏘아지는 화살은 사체들로 막을 수 있다고 해도 곡사로 쏘아지는 화살을 쳐 내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룬이 워프된 곳은 인적이 없었다.
‘그사이 참호를 판 것을 보니 나름 준비를 했나 보네.’
먼저 나간 황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은 일행을 만나 참호로 피신한 것 같았다. 구불구불하게 파인 참호는 세 개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고, 그 앞에는 사체들이 높이 쌓여 있었다.
‘일단 다크 엘프들의 화살 공격이 얼마나 강력한지 확인해 볼까?’
가장 가까운 참호도 몇십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물론 메신저 워킹 스킬을 사용하면 참호로 피신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다크 엘프들의 화살 공격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바람에 분지에서 유일하게 노출된 하룬은 엘프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했다.
‘꽤 위력적인걸.’
위신느의 바람 방패는 방어력이 엄청났다. 다섯 번에 걸친 화살 공격으로 수백 발이넘는 화살이 방패를 두드렸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위신느의 능력이 정령석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어디 반격도 해 볼까?’
-위신느, 윈드 애로우를 날리는 것이 가능해?
-안 그래도 괘씸해서 혼내 주려고 했어요. 얼마나 날릴까요?
-유도 기능은 되나?
-물론 가능하지요.
-그럼 일단 열 발 정도만 날려 볼까?
-후훗, 좋아요.
방패를 이루던 바람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바람 열 줄기가 빠져나왔다. 하룬이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자 그 바람은 이내 철시보다 더 길고 굵은 바람 화살로 변했다.
-가랏!
위신느의 조종을 받은 바람 화살이 쏟아지는 철시들 사이를 마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흔들거리며 날아갔다. 바람 화살은 일단의 화살 비를 지나치자 그 속도가 빨라졌다. 빠른 손으로 다시 화살을 재는 엘프들이지만 그 정도 시간을 ㅗ충분했다.
“케엑!”
“큭!”
바람 화살에 맞은 엘프들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중 대부분은 회피 동작을 취하거나 급한 나머지 활대로 화살을 쳐 내려고 했지만 바람 화살은 살아있는 것처럼 틈을 파고들었다.
-좋아! 얼마나 가능해, 위신느?
-방패를 유지하면서는 서른 발, 방패를 해제하면 그 배는 가능해요.
-그럼 최대한으로 다시 한 번 가자.
-알았어요.
타다다닥! 후두두둑!
바람 방패는 방향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화살 비를 제대로 튕겨 내었다. 방패의 방어력을 확인한 하룬은 다시 한 번 위신느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소환을 시킨 정령사의 정령력과 마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여느 정령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는 쓸 수 있는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스스륵!
철시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하룬의 주변으로 바람 화살 서른 개가 생성되었다.
“바람의 화살이여, 적의 목을 뚫어라!”
굳이 주문은 필요 없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참호 속에 웅크린 채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을 쳐 낼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그런 하룬의 모습을 보았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만들어 낸 막으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철시를 막아내며 바람으로 만들어진 화살을 생성시키는 하룬의 모습은 묘하게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온몸에 두른 바람 막으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엘프들을 향해 두 손을 펼쳐 보이는 하룬의 모습에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바람으로 만든 반투명한 화살은 철시만큼이나 길고 굵었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화살 비를 뚫고 흔들리며 나아가는 화살촉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화살은 갈수록 속도가 빨라져 종내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고, 잠시 후 엘프들의 신음이 미약하게나마 들리고 있었다.
“최고다!”
“끝내준다!”
참호 이곳저곳에서 감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제까지 속수무책으로 화살 공격에 당해야만 했던 사람들로서는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내려가는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엘프들과의 거리가 멀어 정확한 타격이 불가능한 마법 공격 대신 효과적인 원거리 공격 수단을 가진 동료가 나타난 것이다.
참호 앞에 쌓아둔 시체들 때문에 보고 싶었던 장면은 볼 수 없었지만 신음과 비명 그리고 급하게 들리는 소리로 사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그친 건가?”
어느새 다크 엘프들의 화살 공격이 멈췄다. 징그러웠던 화살 공격이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완 달랐다. 무조건 당하기만 했던 것과 달리 엘프들도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바람 방패를 온몸에 두른 하룬의 모습이 너무 근사하게 보였다.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하룬을 연호하는 소리가 나왔다.
“하룬! 하룬!”
“하룬 대장!”
그 가운데는 브리엘라와 홀의 목소리도 있었다.
한차례 화살 공격이 끝나자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엘프들도 추가 공격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그건 장담할 수 없었다.
바닥에 꽂힌 철시를 뽑아 구경을 하던 하룬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1황자의 전언을 가져온 한 기사를 따라 참호로 내려갔다. 구불구불한 참호를 따라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보냈다. 나름 제국의 기둥들인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자존심 때문에 용병에가 뭐라 인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속이 시원하게 엘프들에게 본때를 보여 준 것에 상당한 호감을 표시했다.
“어서 오게.”
어느 정도 걸었을 때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데브론 님!”
“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더군.”
“여긴? 아!”
데브론이 당연히 이곳에 들어왔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얼굴을 직접 보자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에게는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 아닌가.
그의 뒤로 홀이 얼굴을 드러냈다.
“홀, 왔군요.”
“하룬 대장.”
하룬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될 정도로 상한 홀을 보자 애써 잊으려 했던 연민과 그리움이 뭉클하게 솟아올랐다.
“우리도 왔소.”
“오셨습니까?”
홀의 아버지 세반 자작과 홀리오 남작 등 후크란 기사단의 실세들이 그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던 서운함과 억울함이 얼굴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자,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황자 전하들에게 가게나. 그분들이 자네를 기다리고 계시네.”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크란 기사단원들에게 목례하며 그 곁을 지나쳤다.
“대장!”
“하룬 대장!”
“우리도 왔어요.”
지나는 길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 중에는 재수 4인방도 끼어 있었다. 필립을 비롯한 네 녀석들도 무척 고생을 했는지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반가움과 동시에 미움에 가까운 감정이 솟아나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감정이 복잡해서 그런지 입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하룬은 그들에게 흐릿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안으로 향했다.
누가 판 것인지는 몰라도 참호 한쪽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과 함께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황자들과 고위 귀족들이었다.
먼저 그를 반긴 것은 1황녀였다. 그녀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하룬 대장.”
“무사하셨군요, 전하.”
“호호호. 역시 하룬 대장이에요. 이곳에 오자마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니, 정말 대단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미소 지으며 순간을 넘겼다.
“껄걸. 어서 오게.”
1황자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행여 무도한 엘프들의 습격에 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그럴 리가. 어쨌든 걱정해 주어서 고맙네. 다친 곳은 없나?”
“네, 전하.”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여기가 우리의 지휘부라네.”
1황자를 따라 안쪽으로 향하는 하룬에게 몇 사람이 눈으로 인사를 했다. 엘프들과의 협상 과정을 통해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다. 황자들을 포함해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처음 보는 하룬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지거나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하룬 대장에게 한 가지 의뢰를 하고 싶네.”
“의뢰 말입니까?”
뜬금없는 1황자의 말에 하룬이 되물었다. 1황자는 평소 호탕하고 시원한 성정답지 않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브리엘라 황녀와 데브론은 그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래. 부탁을 하고 싶지만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 의뢰의 형식을 빌리고 싶네.”
“무슨 일입니까?”
“이곳을 벗어나고 싶네. 자네가 용병들을 이끌고 엘프들의 주의를 끌어주게.”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포위망을 단숨에 뚫기 위해서 시선을 끌어 줄 미끼가 필요한 것이다. 그 미끼 역할을 하자면 아마도 생명을 장담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하룬은 빙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기꺼이 하지요.”
“괜찮겠나?”
“저는 용병입니다.”
돈과 목숨을 바꾸는 직업, 그것이 용병이다. 비록 돈 때문에 목숨을 버린다고 기사들은 손가락질을 하는지 몰라도 그것이 용병의 도덕이며 가치이다.
“다만 일단 다른 용병들의 의향을 알아봐야 합니다. 그 전에 대금은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이곳으로 들어오며 마련한 비자금이 100만 골드 정도 되네.”
그 정도라면 최상이다. 아마 살아날 것을 거의 기대할 수 없을 테지만 그런 돈이라면 의뢰를 받아들일 용병들이 있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몇백 골드가 전해진다면 죽을 자리라도 찾아갈 용병들은 꽤 많다. 다만 그 숫자가 문제였다. 돌풍 대신 들어온 용병들 중에 얼마나 살아남았는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하룬의 대답에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졌지만 몇 사람은 잔뜩 굳어 있었다.
“자, 이제 방안이 정해졌으니 자세한 것을 의논해 봅시다.”
회의를 서두르는 1황자의 목소리가 왠지 갈라졌다. 그는 하룬에게 아주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용병이지만 오랫동안 같이해 온 가신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과 여유 그리고 놀라운 능력을 가진 하룬을 언젠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다양한 감정을 품은 눈길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두 달이 떠올라 사위는 꽤나 밝았다. 그 달 사이로 홀의 얼굴이 보였다.
“대장, 오랜만이네요.”
“홀은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그 말에 홀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미안함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눈이 그 사이로 드러났다.
“보기 싫은가요?”
“아니, 그냥 마음이 아파서…….”
“대장이 황녀 전하를 많이 도와주셨다고 들었어요.”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소.”
어째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다. 하긴 이런 자리에서 심도 있는 대화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할 일이 있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네.”
홀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를 두고 용병들이 있다는 곳으로 향하려는 하룬을 향해 나직한 말이 속삭이듯 들려왔다.
“미안하오.”
홀리오 남작이었다. 왜 그가 이런 사과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야기를 나눌 상황은 아니다. 하룬은 잠시 그를 보며 목례하고는 발을 재게 놀렸다.
‘후우!’
왠지 뒤에 남겨진 홀의 눈에서 무거운 눈물방울이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열병처럼 찾아왔던 연정은 이제 비수가 되어 딱지가 앉은 상처를 다시 후벼 파고 있었다.
용병들의 참호는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서쪽의 피라미드 사이를 향해 구불구불 파인 참호는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는 용병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것만 따지면 그들을 따라갈 사람들은 없다. 하룬은 참호 사이에 아무 은폐물이 없음에도 당당하게 걸어서 이동했다.
“하룬!”
엘저였다. 언제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참호 밖으로 사람들이 머리를 내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저는 마음이 급했는지 밖으로 뛰어나올 태세였고, 보푸란이 그녀를 말리고 있었다.
“위험해!”
과연 너무 자신을 드러낸 것일까?
하룬을 향해 엘프들의 철시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직사로 쏘아진 화살들은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그를 노렸다. 하지만 피하려고 마음먹으면 못 피할 것이 없는 화살이다.
파밧!
눈 깜짝할 사이에 메신저 패스트 무빙을 시전한 하룬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참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타다다닥!
그의 잔상을 뚫은 화살들이 바닥에 꽂히는 소리와 함께 안도의 한숨 소리가 참호 안에 퍼졌다. 단숨에 하룬에게 달려든 엘저가 그의 목을 안았다.
“헤헤. 네가 올 줄 알았지. 아무렴 천하의 하룬이 볼카웜에게 죽을까 봐.”
“하하하. 우리도 믿지 않았네. 죽을 사람이 죽어야지, 안 그래?”
“그러게. 악마 오크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 사람이 지렁이 괴수에게 죽었다니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피엘과 다카린 용병단장 프레스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대장!”
“살아있을 줄 알았어요.”
아레스, 매그럼과 초른, 세류와 코엠 길드원들, 발트랑과 사예일행 그리고 아반 부녀를 비롯한 익숙한 얼굴들을 보자 마치 집에 들어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다들 괜찮은 겁니까?”
“그럼. 이 정도에 죽어 나가는 놈들은 전부 쭉정이들이지.”
피엘의 말대로 아는 얼굴들 중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참호 앞에 쌓아 둔 사체들은 대부분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었다. 비록 실력은 좀 떨어지지만 오랜 경험으로 생존 능력을 올린 용병들은 별 탈이 없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