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검증의 관 4단계 통과 (110/278)

《검증의 관 4단계 통과》

 다들 곤하게 잠이 든 새벽 어스름이었다. 트레저 분지는 이제 막 짙은 어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던전을 중심으로 부채꼴을 이룬 인간들의 진영은 최근 빈발하는 실종 사건 때문에 곳곳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불침번이 번을 서고 있었다.

 “젠장! 그 볼카워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이게 뭔 꼴이야!”

 “그러게.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인지 보기나 했으면 무섭지나 않지. 익스퍼트 급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한 놈에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한 놈을 잡아서 그런지 예전보다 더 난리를 치는 느낌이야.”

 “제발 우리 쪽에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실 불침번은 별 소용이 없었다. 땅의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실력의 마법사가 아니면 놈의 접근 자체를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놈은 지하 10미터의 깊이에서 한 막사 전체를 아래로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놈을 감지하는 것이나 잡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웠다.

 거의 말번 불침번들이 잘 깨지 않는 잠을 쫓아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불덩어리들이 날아내렸다.

 “뭐야?”

 “불? 불화살이다!”

 “공격이다!”

 불침번들이 정신을 차리고 경계 종을 치거나 소리를 질러 동료들을 깨우는 사이에도 헤아릴 수 없는 불화살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악!”

 “끄악! 내 팔!”

 불화살들은 막사에 맞거나 막사를 뚫고 들어가 곤하게 자는 사람들의 몸에 박혔다. 삽시간에 인간들의 진영은 비명과 고함으로 가득 찼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 났다! 흙! 흙을 퍼 와!”

 막사를 뛰쳐나왔던 사람들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들이 있는 막사가 불타고 있자 당황했다. 기름을 먹인 불화살과 그동안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아 메말랐던 탓에 막사에 붙은 불은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고함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물 대신 흙을 퍼서 막사에 붙은 불을 끄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 노력들은 대부분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다시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불화살들이 날아왔던 것이다.

 “크아악!”

 “악!”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화살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막사에 붙은 불을 어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삽시간에 트레저 분지의 한쪽이 불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야!”

 “어디서 날아오는 거지?”

 제대로 된 엄폐물도 없는 상황이다. 눈치가 빠른 몇몇은 각종 나무나 금속 재질의 물건으로 머리 위를 가리거나 몸을 가렸지만 자다가 막사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쌔애액!

 어둠 속에서 다시 뭔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불화살이 아니다. 하지만 그 파공성은 살벌하기만 했다.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날아오는 화살의 존재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몸에 소름이 잔뜩 돋았다.

 “또 온다!”

 그나마 막사에 붙은 불 때문에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된 것이 이럴 땐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무기를 휘둘러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물론 그 과정 중에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거나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화살은 그 후로도 몇 차례나 더 날아왔다. 그때마다 수많은 피해자가 나왔지만 사람들은 땅에 납작 엎드린 상태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변변한 나무도 없는 개활지라 달리 도망치거나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사이 화살을 피해 엘프들이 장악한 던전 지대로 들어선 사람들도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대지여, 요동쳐라!”

 “바람의 화살이여, 날아라!”

 “화염의 화살이여, 적의 살을 뚫고 뼈를 태워라!”

 결계를 침범한 인간들은 이내 정령사들의 정령 마법에 땅속으로 파묻히거나 화살이 맞아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다. 그들이 미리 말한 대로 엘프들은 결계를 침범한 인간들을 단호하게 처리했다.

 수차례나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고 나서야 겁에 질린 인간들은 결계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죽일 놈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를 갈았다. 몇 차례 화살 공격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땅을 파고 참호를 만들기도 했다. 곡사인지라 그래도 피해가 날 수밖에 없지만 그나마 그냥 멍하니 화살 공격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효과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공포가 유발한 식은땀을 흘리며 참호를 팠다.

 공포의 살육이 잠시 멈춘 것은 여명이 찾아온 후였다. 사위가 밝아지자 사람들은 처참한 주변 풍경과 함께 자신들에게 불화살과 화살 공격을 감행한 범인들을 볼 수 있었다.

 분지가 내려다보이는 등성이마다 엘프들과 인간들이 가득했다. 얼핏 보아도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인간들과 엘프들이 같이 서 있는 걸까? 무슨 이유로 트레저 분지에 모인 인간들을 공격하는 것일까?

 “엘프들이다!”

 “인간들도 있어. 저놈들은 대체 누구지?”

 그 의혹은 곧 어느 기사의 고함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저놈들은 북부군이야!”

 살아남은 인간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일반 병사로서는 감히 오기 힘든 이곳이었다. 그런데 엘프들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스카이루프 산맥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북부군이었다. 제국의 북부는 거의 산악 지대여서 북부군은 대부분 레인저 군단이었다. 기사들이나 병사들 모두 레인저 병과를 가지고 있어 산을 타고 산악전을 치르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미 무리의 수장들을 대부분 던전 안으로 들여보낸 사람들은 공포와 분노 그리고 의혹으로 얼룩진 눈으로 범인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던전 쪽에서 굉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나가 깃든 그 소리는 분지에 쩌렁쩌렁 울렸다.

 “본인은 북부군 총사령관 다브릿 후작이다!”

 공포와 의혹으로 혼란스러운 사람들의 눈이 던전으로 향했다. 가장 앞쪽의 던전 꼭대기에 한 인물이 모습을 보였다. 테론 제국군 특유의 경갑주를 걸친 그 인물은 본인이 북부군 총사령관이라고 했다.

 북부 초워 지대의 야만인들을 막고 있어야 할 북부군 총사령관이 왜 이 자리에, 그것도 엘프들과 함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제라츠 용병단의 보호를 받으며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포 역시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제부로 황도와 황실은 위대하신 피노세 대공에게 장악되었다. 대공께서는 백성들에게 쓸데없는 피를 강요하는 골든 배틀과 같은 악습을 자행하는 테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가진 제국을 건설하기로 결심하셨다. 이에 우리 북부군은 그 위대한 족적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제국의 표석이 될 자는 투항하라!”

 그의 말에 한순간 트레저 분지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잘 모르는 유저들은 물론 제국민들도 말을 잊은 것이다.

 쿠데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피노세 대공은 황제의 형제로 오랫동안 군부를 총괄하는 군부대신이었다. 그런 그가 황도를 점령하고 황실을 장악한 것이다.

 “위대하시고 영명하신 우리의 군주 피노세 대공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여셨다. 파이론 제국은 테론 제국의 잔재와 악습을 모두 걷어 버리고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건설할 것이다. 동참할 자는 투항하라. 이곳은 우리 북부군과 다프란 엘프 왕국군에 장악되었다.”

 새로운 제국의 출현이라니. 메인 스토리인 골든 배틀 때문에 각 황자 진영에 붙은 유저들은 물론 각 황자 진영의 기사들은 너무나 뜻밖의 사실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파이론 제국? 다프란 엘프 왕국?”

 누군가 힘없는 목소리로 새로운 나라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모두가 골든 배틀에 정신이 없는 사이 그동안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군부가 일을 내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도 잠재적인 적인 이종족 중 하나인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던전으로 향했다. 그 안에 이곳에 모인 인간들의 수장들이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

 “테론 제국은 이제 사라졌다. 새로운 질서에 동참하고자하는 자들은 즉시 투항하라. 투항한 자는 신분을 보장함은 물론 공을 세워 작위를 얻거나 승작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다브릿 후작의 투항 권고는 몇 차례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어느 결정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제국의 기사들은 던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물론 움직이는 자들도 있었다. 이 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방인들이었다. 길드에 가입되지 않은 자들은 굳이 이곳에서 벌집이 되어 죽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가까운 분지 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이방인들은 투항하라. 그대들은 신탁으로 우리 세상으로 온 존재들, 순순히 고요의 땅을 떠난다면 막지 않을 것이다.”

 다브릿 후작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유저들 중에 살아난 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던전과 가까운 곳에 황자 진영이 자리를 잡은 탓에 유저들은 대부분 산등성이 쪽에 있었다. 공격한 자들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타격은 주로 중심부를 향했고, 유저들의 희생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젠장! 뭘 좀 건지나 싶었더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그럼 던전도 다 조작된 거겠군.”

 “맞아. 파이론 제국에서 제대로 된 함정을 판 거야. 엘프들과 짜고 말이지.”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제국의 핵심을 이루는 실세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고대 마법서가 숨겨진 던전을 이용한 것이다.

 유저들은 힘없이 분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형 길드에 소속된 유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그럼 골든 배틀도 다 깨진 거군.”

 “무슨 게임이 메인 스토리 자체가 이런 식으로 깨지는 거야.”

 “일단 나가자고. 우리 힘으로 저들과 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이곳으로 온 자들은 그래도 이방인들 중에선 상위에 속하는 실력과 레벨을 가졌지만 그래 봐야 익스퍼트 급에 도달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상위 랭커들은 돈이든 실력이든 이용할 것은 다 이용해서 상당수가 던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남은 이방인들로서는 정령 마법을 사용하는 엘프들은 물론이고 파이론 제국의 병사들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비록 마법서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곳에 왔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던전에 들어가는 것도,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막사는 불타고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들은 재가 되었다.

 이내 투항하는 이방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순식간에 분지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몇 번의 공격 끝에 살아남은 십오륙만에 가까운 이방인들이 투항했다

 다행하게도 파이론 제국과 다프란 엘프 왕국은 그들의 발길을 막지 않았다. 신탁으로 허락된 존재들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들도 아니니 쓸데없는 분란을 초래할 이유가 없었다.

 “휴우, 이곳에 오긴 왔는데 도아가는 건 정말 기약이 없네.”

 “언제 돌아가나?”

 분지를 떠나는 이방인들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들러리를 선 격이니 허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식량과 같은 보급품도 부족한 상태라 나오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떠나지 않는 이방인들도 있었다. 그 수는 삼만이 넘었다. 주로 길드 상층부가 던전에 들어간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명령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명색이 제국 정보 길드의 핵심 인사라는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자 힘이 빠졌지만 머리를 맹렬하게 굴리고 있엇다.

 ‘혹시 투가 이 일을 기획한 것일까? 아니야, 그분이 그럴 리가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까지 이런 대사를 숨길 리가 없어. 그럼 뭐지? 다른 세력도 아니고 군부라니!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는 동안 어떻게 우리 길드가 까마득히 모를 수 있지? 뭔가 있어! 절대로 이럴 수는 없어.’

 정보를 총괄하는 그녀로서는 이 상황이 너무나 끔찍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그녀는 제국을 수백 년 동안 음지에서 조종해 오던 자신들이 어쩌면 이용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1황자는 피가 흥건한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감히 내게 허튼소리를 하다니.”

 이가 갈렸다. 설마 황후마저 버러지 같은 말이나 하는 쓰레기 같은 황사와 야합해 자신을 욕보이는 소리를 하러 왔을 줄은 몰랐다.

 충언을 하던 란트렐의 목은 이미 베어 버렸다. 목이 잘린 채 분수처럼 피를 뿜어냈던 그의 사체는 이미 굳기 시작하는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전하! 살려 주세요. 제발!”

 이제 스물이 넘은 1황자가 황후의 품속에서 벌벌 떨며 빌었다. 황후와 란트렐의 손에 이끌려 자신에게 차라리 양위를 해 달라는 진언을 하겠다고 온 녀석이 피를 보더니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노옴!”

 설마 심약한 아들이 자신의 모후인 황후와 함께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기에 그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아들은 벌벌 떨며 오줌까지 지렸다.

 “이 아이만은 안 됩니다. 이 아이는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될 고귀한 혈통을 타고 태어난 아이입니다. 당신의 아들입니다.”

 황후는 자신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너무나 의연하게 아들을 품에 안고 다독이며 조리 있게 그를 설득했다. 그런 모습에 그는 더욱 화가 났다.

 “다 필요 없다. 새끼야 다른 녀석들도 많아. 그런데 네년은 도대체 뭐가 부족했냐? 남편을 쫓아내고 네가 직접 황제라도 되고 싶은 것이냐?”

 “전하는 황제의 그릇이 아닙니다. 충동적이고 우유부단하며 너무 여색을 밝힙니다. 패악을 일삼는 뒷거리의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네 이년!”

 황제가 된 1황자는 어검을 높이 세웠지만 그의 팔과 손은 부들거릴 뿐 쉽게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황후의 말은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말이 날카로운 검이 되어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베었기 때문에 분노와 함께 심한 자책감이 들었다.

 “폐하는 처음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1황녀에게 황좌를 양보했어야 합니다. 형제들을 정리할 독심毒心이 없기에 이런 사태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황제로서의 자질이 아예 없는 분입니다. 그러하기에 제가 나선 겁니다.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골든 배틀을 없애지도 못하고, 또 내란의 불씨가 될 형제들의 목숨을 살려 둘 정도로 약한 마음으로는 결코 테론 제국을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1황자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황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팔을 베고 다리를 끊고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그가 늘 후회하곤 했던 점을 반평생 살을 맞대고 살아온 황후가 조목조목 짚고 있었다.

 “차라리 자진하십시오. 뒤는 저와 1황자가 맡겠습니다. 술에 찌들고 여색에 탐닉하여 그 검도 제대로 쥐고 휘두를 수 없는 그런 몸으로는 결코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폐하께서 그 사실을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닥쳐라, 이년! 어딜 감히!”

 그는 고함을 질렀지만 황후는 여전히 의연하고 당당한 자세로 그를 쏘아보며 자신의 단점과 이제까지 잘못한 점들을 낱낱이 말하며 그를 압박했다.

 ‘차라리 죽어 버릴까?’

 그러면 편해질 것이다. 거대한 제국을 경영한다는 압박감도 사라질 것이고, 아무런 정도 없이 살아야만 했던 황후로부터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더 이상 뒤에서 혹은 숨어서 그를 욕하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

 “차라리 죽어 버리세요, 전하!”

 ‘저년을 당장 한칼에 날려 버릴까?’

 자신의 심장에 수도 없이 비수를 박았던 황후의 목을 한칼에 날리고 싶었다. 저 조잘거리는 입에 발을 처박아 혀를 뭉개고 남편을 죽이려는 패륜의 피를 뿜어내는 심장을 박살내고 싶었다.

 치밀어 오르는 살기 때문에 눈이 붉게 충혈 되고 있다. 심장 박동은 금세라도 한계치를 벗어날 것처럼 위험했고 억지로 눌러 놓았던 외계에 대한 공포는 분노로 바뀌었다.

 그의 검이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다 죽여 버리고 말겠어!’

 막 황후의 머리통을 두 쪽으로 벨 듯 떨어지려던 검이 한 순간 멈추었다.

 “아니야!”

 1황자는 짐승처럼 절규했다.

 ‘도대체 왜?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난 누구지? 난 테론 제국의 1황자. 난 결코 우유부단하고 심약하지 않아. 도대체 뭐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1황자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가끔 황후가 미울 때도 있었다. 기분에 취해 수하들과 술을 과하게 즐기거나 혹은 제국의 황제로서 어긋난 행동을 할 때 그리고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를 풍기고 1황자궁에 들어가는 날이면 황후는 여지없이 그를 가르치려고 들었다. 그래서 미워한 적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황후를 좋아했다.

 “난 그런 존재가 아니다! 난 위대한 테론 제국의 자랑스러운 황자다!”

 자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수하에게는 호탕함으로 존경받고, 비록 경쟁하는 사이지만 형제들에게도 존경받고 있다.

 모든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하며 인정을 베풀 아량도 가지고 있다. 또 용서하지 못할 죄인에게는 과감한 처단을 하는 용단도 가지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위대한 황제가 되기 위해 숱한 현자들로부터 배워 왔으며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길이라 믿고 그렇게 행해 왔다.

 물론 그 과정에 몇 가지 실수도 있고, 때로는 원칙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자신은 황후가 말한 그런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황후의 독설에 쪼그라들어 그 형체도 찾기 힘들었던 자긍심이 부풀어 올랐다. 술과 여색에 절었던 그의 얼굴에 건강한 낯빛이 돌아왔고, 움츠러들었던 어깨는 반듯하게 펴졌다.

 어느새 그를 독살스럽게 노려보며 독설을 퍼붓던 황후와 바보 같은 행동으로 그를 실망시키던 아들이 스르르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였는지 모르겠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데 너무나 생생해서 꿈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자 네 번째 홀이 눈앞에 있었다. 매 관문이 끝나는 곳마다 있는 홀이었다.

 “전하!”

 란트렐이다. 그가 자신보다 먼저 홀 안에 도착해 있었다.

 “황사!”

 분명 자신의 검에 목이 베여 죽었던 황사다. 충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자신에게 죽었던 황사가 살아있는 것을 보니 선황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보다 반가울 것 같지는 않았다.

 “뭐였소?”

 “심혼의 관이었습니다. 자신이 평소 무의식중에 가장 두려워하는 환상을 경험하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하지 않는다면 정신이 붕괴되어 죽고 마는 무서운 관문이었습니다.”

 란트렐도 어떤 환상을 이겨냈는지 몰라도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있고 얼굴은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휴우, 정녕 무서운 곳이로군.”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은 무사히 통과하실지 걱정입니다.”

 란트렐은 부연 안개로 가득 찬 통로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곧 안개 속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치가 떨리는 심혼의 관을 통과한 이들이다.

 “왜 결계가 열리지 않는 거지?”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는 1황자는 홀의 중앙에 위치한 석판의 결계가 해제되지 않는 것이 초조해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온 만큼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히 1단계를 통과했을 때 4단계를 표준 시간 이내에 모두 통과하면 지혜의 파편과 마법서들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황제의 계단이라는 이름에 집착했지만 이내 이곳이 엘프들에게 들은 것과는 다른 곳이라는 걸 알았다.

 이곳에 들어온 인물들은 하나같이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아닌가. 이들은 각종 함정들과 암기들이 즐비한 3관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통과를 한 후 힘을 모으기로 했다.

 힘을 합쳐 4관까지 최대한 빠르게 통과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그래서 얻는 마법서는 똑같이 공유하기로 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이곳에 온 것이니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통과 시간에 따라 마법서의 개수가 달라진다고 했지만 구드슨 후작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도착한 순간 생성된 결계 속의 석탁 위에는 책 모양이로 생긴 금속판과 마법서 두 권이 보였다.

 “누군가 아직 통로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누가? 우리 일행 중에는 없는데.”

 “우리도 없소. 확실하게 확인한 거요.”

 같이 시험을 치르며 어쩔 수 없이 약하나마 동료 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이곳 안에서만큼은 협조하기로 했으니 비밀로 할 것이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결계도 해제되지 않고, 당연히 생성되었어야 할 워프 마법진과 다음 관문으로 들어가는 문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 확실히 누군가 통로에 있는 것 같군.”

 1황자의 의견에 1황녀와 7황자도 동의했다.

 “젠장! 차라리 힘으로 결계를 찢어 버릴까?”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성정의 마스론 후작이 알랭 후작을 쳐다보며 속삭였다.

 “섣불리 행동하지 말게.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모르겠나? 여긴 강제로 어쩔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잘못하다가는 강제로 워프될 수도 있어.”

 알랭 후작이 그를 말렸다.

 “제길! 답답하군.”

 마스론 후작이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며 조급함을 억지로 눌렀다.

 이곳에는 현재 열두 명의 인원이 있었다. 일찍부터 그 왕재를 인정받은 출중한 황자들인 1황자와 1황녀 그리고 7황자가 황자들 중에서 이곳까지 왔다. 1황자 휘하에는 란트렐 황사와 론도 기사단장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1황녀 진영에는 아인델프 기사장과 메롤라스 백작이 살아남았다. 7황자 진영에는 소드 마스터 알랭 후작이 이곳까지 왔다.

 세 진영을 제외한 인물들은 각기 프론티어 마탑의 탑주인 솔론 후작, 11황자의 장인으로 소드 마스터인 다킨 후작, 원로원의 대표인 마스론 후작, 최고 귀족 회의의 대표인 구드슨 후작이었다.

 “어! 누군가 온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입을 다문 그들의 귀에 저벅거리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이곳까지 왔다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발소리가 왜 이렇게 가벼운 거지?’

 란트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4단계를 통과한 사람이라기엔 발걸음이 너무 가볍고 규칙적이었다.

 심혼의 관을 거친 열두 명은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치른 것처럼 지친 상태에서 홀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 면면이 소드 마스터에 대마법사들이었음에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그 모두가 파김치가 되어 통과했고 대부분은 이제 겨우 기력을 되찾거나 절반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홀로 들어선 사람은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었다.

 “허억!”

 “하룬 대장!”

 “정말 하룬이군요!”

 하룬든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결코 쉽지 않은 통로를 통과한 사람들이 열두 명이나 선실에 있었던 것이다.

 “무사하셨군요.”

 용병식 인사를 하는 하룬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1황자와 황사 란트렐, 1황녀와 론도 후작이 있었다.

 “혼자 온 거요?”

 “네. 지하 통로를 헤매던 중 우연히 이 건물로 출입할 수 있는 비밀 문을 찾았습니다.”

 그의 말에 하룬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눈에 어렸던 의혹이 말끔히 가셨다.

 ‘그랬구나. 그랬기에 여기까지 오고도 저리 멀쩡한 모습이지.’

 행여 혼자의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걱정하던 사람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 올려놓았던 무거운 돌덩이를 치울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하룬의 눈에 알랭 후작과 마스론 후작이 보였다. 그들은 흡사 유령을 본 듯 낯빛이 변해 흔들리는 눈동자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제국 정보 길드의 알랭 후작님과 마스론 후작님도 계셨군요. 지하 통로에서 마지막 전투 때 절 암습하셨던 분들을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너…… 네가 어떻게?”

 “흐음. 믿을 수가 없군.”

 두 사람은 하룬의 인사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마스론 후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알랭 후작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빌어먹을! 통과하자마자 붙들고 늘어져 질문을 퍼붓는 황자들 때문에 포션도 아직 못 마셨는데.’

 두 사람은 소진한 마나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 직전에서 살아 돌아온 능력 미상의 하룬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하룬의 말에 눈매를 좁혔다. 너무나 의외의 말이 하룬의 입에서 나왔고 두 사람은 눈에 띄게 당황했던 것이다.

 “하룬 대장, 그게 무슨 소리요? 제국 정보 길드라니?”

 “이봐, 마스론 후작! 이 친구 말이 무슨 소리인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든 순간 알랭과 마스론이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알랭이 하룬 쪽을 한 번 보며 뭔가 물었지만 마스론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룬의 입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혹을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나중에 보자!”

 “다음엔 반드시 목을 잘라 주마!”

 마법서도 보지 못하고 홀을 떠나는 것이 억울한 듯 저주를 퍼부은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미처 어쩌기도 전에 하룬이 홀에 들어온 순간 생성된 워프 마법진으로 달려갔다.

 “그렇게는 안 되지! 제국 정보 길드의 개들이여, 가랏!”

 언제 들린 것인지 하룬의 두 손에 나타난 두 자루의 비수가 섬광처럼 폭사되었다.

 막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하룬이 던진 비수는 뒤늦게 날아갔지만 막 마법진에 발을 걸친 두 사람의 가슴과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실드!”

 뒤늦게 마스론 후작의 실드 마법이 펼쳐졌다. 블리츠 대거는 순간적으로 솟아난 실드를 뚫고 들어갔다.

 지지지직!

 시퍼런 뇌전이 흐르는 블리츠 대거는 잠시 실드에 막히는 듯했지만 이내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마스론 후작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아악!”

 지지직!

 연속해서 실드 마법을 펼치려던 마스론 후작은 블리츠 대거가 가슴에 박히는 순간 비수로부터 흘러나온 전격에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다. 소드 마스터인 그가 어떤 생각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전격이 그의 뇌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소드 커튼!”

 파라랏!

 알랭 후작의 팔이 수백 개가 된 것처럼 잔영을 남기며 움직였다. 순간 수백 자루의 검이 그의 몸을 틈 하나 없이 막아섰다. 마치 검으로 이루어진 막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펼쳐진 것이긴 했지만 그의 비기인 소드 커튼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는 마음먹은 대로 펼쳐진 자신의 비기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을 들어 워프 마법진 안으로 넣으려고 했다.

 “크윽!”

 순간 알랭 후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래로 향하는 그의 눈에는 옆구리에 자루까지 깊이 박힌 비수가 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후 완성한 소드 커튼은 그 어떤 검도 막을 수 있었다. 비록 4관문을 통과하느라 본신의 능력이 절반 정도로 약해졌다고는 하나 마법은 물론 수십, 아니 수백 자루의 검도 튕겨내거나 막을 수 있는 소드 커튼을 뚫고 들어온 비수가 옆구리 깊숙한 곳에 박힌 것은 그의 자부심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어떻게 소드 커튼을?”

 그는 참담한 눈길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꼭 묻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룬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으으윽! 이……게?”

 ‘마물이다! 살아있어! 살아서 내 마나를 빨아먹고 있어!’

 흡혈귀처럼 마나를 빨아들이는 비수라니.

 순식간에 그가 평생을 수련해서 축적했던 마나가 비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소용돌이를 만들며 전신으로부터 마나를 빨아들이는 탐욕스러운 비수에 그는 질린 눈길로 황급히 비수를 빼내기 위해 움직였다.

 “끄아아악!”

 힘줄을 생으로 뽑아내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마나를 탐하던 비수는 어느 순간 전신으로 그 탐욕의 범위를 넓혔다. 뼈와 근육 그리고 말단 조직에 축적되어 일체를 이루었던 마나가 빨려 나가는 것은 생으로 뼈와 근육을 잡아 빼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으드드드.

 알랭 후작의 몸이 급살을 맞은 듯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조금씩 말라가는 그는 시퍼런 뇌전에 휩싸여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마스론 후작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워프 마법진에 몸 한쪽을 넣은 상태였기에 그들의 죽음은 바로 현실의 죽음이었다. 마법진은 이미 구동을 했지만 두 사람의 시체가 가운데에 걸쳐져 있었기에 몸의 반쪽만이 워프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참혹한 장면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잘게 떨었다. 7서클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를 한순간에 처리한 하룬의 능력은 둘째 치고, 두 시체가 마지막까지 짓고 있었던 표정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돌아와!”

 하룬의 손이 움직였다. 아이를 부르듯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시퍼런 뇌전이 흐르는 블리츠 대거와 거무튀튀한 비수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사람들의 동체 시력을 초월하는 속도로 돌아왔다.

 하룬은 묵묵히 두 비수를 암기대에 꽂고 아직도 경련을 일으키는 구동하기 시작한 워프 마법진을 향해 다가갔다.

 ‘역시!’

 남은 마스론 후작의 사체 반쪽은 그 내부까지 모두 다 타버렸다. 그가 자신에게 선사한 선더볼트 세 방까지 흡수한 블리츠 대거의 위력은 측정 불가였다.

 그 옆에 미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라붙은 알랭 후작의 두 다리가 남아 있었다. 그 위는 이미 워프되어 버린 것이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났으면 피와 골수까지 흡수되어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기분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그렇게까지는 놔둘 수 없었다.

 “하룬 대장, 어찌 된 일인가?”

 분노와 황당함 그리고 강한 의혹으로 범벅이 된 1황자의 물음에 하룬은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분노와 의혹이 범벅된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자신들과는 수십 년 이상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정적들이며 한편으로는 용병에게 죽음 당하면 안 되는 존귀한 신분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제국 정보 길드의 명령으로 저를 암산했던 자들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룬은 지하 암도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으으음!”

 이곳저곳에서 낮은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7황자의 경우는 믿고 있던 알랭 후작이 제국 정보 길드의 하수인이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증거라도 있나?”

 “있습니다.”

 하룬은 이마에 차고 있었던 헤어 캠을 꺼냈다. 볼카웜을 잡으러 지하로 같이 들어갔다가 초기에 죽어버린 아레스로부터 넘겨받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볼카웜을 잡을 때 그가 겪었던 모든 상황들이 촬영되어 있었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입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발설하는 모습까지 있었다.

 “무서운 자들이군. 도대체 어디까지 그 촉수가 뻗어있는 거야?”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두 사람이 제국 정보 길드의 요인이란 사실에 하룬이 두 사람을 한 번에 처치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듯했다.

 “더 두려운 일이 있습니다.”

 하룬의 말에 사람들은 입도 열지 못했다. 또 어떤 사실이 나올지 두렵기만 했던 것이다. 제국 최상부에 위치한 그들의 육감은 여지없이 들어맞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그린 엘프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공? 혹시 피노세 대공?”

 1황자는 뭔가 의심 가는 것이 있는지 대뜸 이름을 하나 댔다.

 “그것은 모릅니다. 아무튼 그자가 제국 정보 길드를 끼고 뭔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트레저 분지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만 처리하면 제국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룬의 충격적인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려 열세 명의 황자가 이곳에 모였다. 그들을 추종하는 귀족들은 물론 기사들과 마법사들까지 합하면 제국 상층부를 구성하는 인원의 절반은 족히 될 것이다. 그들 모두를 이곳에서 처리할 수 있다면, 대공의 작위와 제국 정보 길드를 주무르는 능력을 가진 인사라면 제국을 한입에 삼키는 것도 부질없는 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음모의 주재자는 어떤 준비를 해놓았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곳에 모인 모두는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거대한 음모에 빠진 것이다.

 “빨리 나가야 해!”

 1황자가 이를 갈았다.

 “잠깐만! 마법서는요? 5관은 어찌할 겁니까?”

 1황자의 뒤를 따르던 란트렐은 막 결게가 해제되어 모습을 드러낸 마법서들과 금속판을 보며 물었다.

 “이제 5관은 문제가 아니네. 다음에 언제라도 다시 오면 돼. 잘못하다가는 먼저 워프된 자들까지 몰살당하고 있을지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장 떠날 수는 없다. 마법서는 어떻게든 내용을 외우고서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애초에 이곳에 들어온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밖의 상황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을지 모릅니다.”

 1황녀의 말에 1황자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왕 들어왔으니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네 말이 맞다.”

 급하다고 해도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마법서의 내용까지 두고 갈 필요는 없었다. 마법서를 반출하는 것도 안 되고, 카피 마법도 통하지 않으니 외워서라도 나가야 했다.

 “각 마법사들은 외울 수 있는 부분까지 나누어 외워라!”

 “네.”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콘텐츠 메모라이징!”

 마법사들은 5서클 마법인 기억 마법을 자신의 몸에 걸었다. 단순히 암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내용을 기억이라도 해두어야 했다. 각 마법서에는 세 가지씩의 마법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자신에게 기억 마법을 펼친 마법사들은 큰 소리로 그 내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하룬은 한쪽에 앉아 위신느를 소환했다.

 -위신느, 내용을 외울 수 있겠어?

 -가능해요. 공기의 유동만 기억하면 되거든요.

 말을 하는 과정 동안 공기가 유동하니 그 내용은 모를지라도 정령석으로 한계를 벗어난 바람의 정령 위신느가 그 유동을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모두 기억해줘.

 -맡겨만 주세요.

 하룬은 묵묵히 앉아 위신느에게 집중하며 나름대로 휴식을 취했다. 마법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도 정숙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생각에 빠졌다. 제국 정보 길드와 야합하여 이런 거대한 음모를 꾸민 주재자에 대한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현재 제국의 대공은 다섯 명이다. 대공은 선대 황제의 형제들 중 골든 배틀 이후까지 살아남은 황족들이다. 골든 배틀을 치른 이들 대부분이 그 과정 중에 척살되지만 보통은 막판까지 경합하는 과정에서 연합하는 경우가 왕왕 일어나기에 대공은 항상 여러 명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직할령의 한 곳을 영지로 받아 평생 그곳에서 나올 수 없는 처지이다. 즉, 목숨을 보장받지만 실제로 권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허수아비도 아니지.’

 1황자는 피노세 대공을 떠올렸다.

 충분한 세를 가지고도 모친 때문에 골든 배틀을 치르지 못한 비운의 황숙이다. 선대 황제와 비견되는 재질과 세력을 가졌지만 골든 배틀을 치르기 직전 병에 걸린 모친 때문에 골든 배틀을 포기한 피노세는 자신의 세력을 선대 황제에게 빌려주고 대공의 자리를 보장받았다.

 다른 대공들 역시 선대 황제에게 협력한 이들이다. 그들도 황제의 자리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대공이 된 황숙들은 다른 황숙들과는 달리 휘하 귀족들이나 수하들을 잃지 않았다. 다만 행동의 자유를 잃은 것에 불과했다.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마법서를 내려놓았다. 기억 마법으로 마법서의 내용을 외운 것이다. 물론 다른 마법서의 내용까지 외우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나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지혜의 파편에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잠시 1황녀가 금속판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한 표정으로 손을 뗐던 것이다.

 다른 몇 사람도 그녀의 뒤를 따랐지만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을 뗐다. 대신 몸 상태를 최고로 끌어올리기 위해 마법사들은 명상을 했고 기사들은 일정한 동작을 행하며 자신 특유의 마나 플로를 돌렸다.

 “다 되었으면 바로 나간다.”

 하룬의 이야기가 맞는다면 현재 밖에서는 흉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워프 마법을 통해 밖으로 나간 수하들이 얼마나 생존하고 있을지, 트레저 분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자네는 같이 나가지 않겠는가?”

 “전 좀 쉬어야겠습니다.”

 홀의 한쪽 벽에 등을 기댄 하룬은 일부러 몸에 힘을 빼고 대답했다. 긴 머리칼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무척 지친 것으로 보였다.

 “하긴!”

 1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적으로 4단계를 통과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친 상태에서 두 실력자를 처치했으니 기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네. 빨리 나와 우리를 좀 도와주게.”

 이제 1황자에게 하룬은 단순한 용병이 아니었다. 그가 가져온 정보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제국 정보 길드와 완전하게 척을 짓게 된 상황에서 하룬은 그에게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습격이라도 무려 7서클 마법사와 소드 마스터를 해치운 인물이 아닌가?

 “다들 조심해라. 지금은 골든 배틀을 따질 때가 아니다. 일단 생존이 가장 중요하니 모두 협력해야 한다.”

 “알겠어요, 오라버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위험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 형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1황녀와 7황자는 1황자와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남다른 황재皇材를 지닌 그들도 1황자의 판단에 동의했다. 하룬의 말이 절반만 사실이라도 지금은 한가하게 황자들끼리 다툴 때가 아니었다.

 열 명의 사람들은 차례대로 워프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워프되고 나면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마법사들은 마법을 외우고 있었고, 기사들은 무기를 힘주어 잡았다.

 “좀 있다가 봐요, 하룬 대장.”

 “네, 전하.”

 1황녀가 그윽한 눈길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7황자는 강렬한 눈빛으로 하룬을 응시하다가 설핏 미소 지었다. 상당한 호감을 드러내는 그의 눈빛에 하룬이 목례를 보냈다.

 파앗!

 순간적으로 마법진이 활성화되며 그 안에 선 사람들을 정해진 곳으로 워프시켰다.

 “흐음. 이제 갔군.”

 몸의 일부분만이 남은 시체 두 구와 함께 남은 하룬은 어쩐지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이 있었던 홀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이제 지혜의 파편이나 좀 살펴볼까.’

 하룬은 홀의 중앙에 있는 석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까 몇 사람이 지혜의 파편을 접하고는 실망하는 얼굴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파앗!

 갑자기 석탁 위에 있던 마법서들과 지혜의 파편이 빛을 냈다. 휘황한 빛이 잠시 그 물건들을 감싸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뭐지?”

 석탁에는 전과는 달리 네 권의 마법서와 지혜의 파편이 자리하고 있었다. 행여 고대 라 제국의 유물이 사라졌을까 봐 마음을 졸였던 하룬의 눈에 안도감이 흘렀지만 약간의 의혹도 섞여 있었다.

 석탁에 있는 마법서를 먼저 살펴본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마법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읽는 것은 가능했기에 그 내용이 아까와는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건가?’

 앞서 왔던 이들과 다르게 시험을 치렀던 그에게 보상이 나타난 것이다.

 1관부터 3관까지 통과하는 것은 하룬에게는 무척 쉬웠다. 1관읜 위신느의 바람 칼과 나이아의 워터 밤으로 골렘의 숨은 핵을 찾아 제거했다. 마지막 주얼리 골렘의 경우에는 라이피에게 명령해 바닥으로 아예 파묻어 버렸다.

 2관부터는 더 쉬웠다. 나이아와 합체한 상태에서 위신느의 바람 방패를 전신에 두른 후 메신저 스킬로 그저 질주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3관까지 통과했다.

 4관도 큰 문제는 없었다. 지금의 하룬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에게 강한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도 뚜렷했고, 그 마음도 단단했다. 흔들릴 일이 전혀 없었다.

 환상 속에서 하룬은 자신의 예전 모습을 비웃고 놀리는 어린 시절을 다시 경험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도 기가 죽지도 않았다.

 그렇게 4관을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까 사람들이 알았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내 밥을 놓칠 뻔했군.’

 방금 전에 1황자 일행을 따라갔더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보상을 놓쳤을 것이다. 새로 더해진 두 권도 그렇지만 다른 마법서의 내용도 아까와는 분명히 달라졌다.

 “지혜의 파편은 어떨까?”

 지혜의 파편을 생각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까와는 내용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어.”

 지혜의 파편은 종합적인 지식이 담겨 있는 유물이니 마법서완 다를 것이다. 행여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지금으로써는 알 수가 없다. 공으로 마법서의 내용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예기치 않았던 행운이다.

 “일단 마법서는 외워놓자.”

 기억 마법이 아니더라도 위신느의 힘이라면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가능했다. 마법서를 읽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한 능력이 생긴 것이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자인데도 읽는 것이 가능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마법서 네 권의 내용을 기억한 하룬은 이제 관심을 지혜의 파편으로 돌렸다.

 손바닥 모양의 음각 부분에 손을 대자 예전처럼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이질적인 광경이 보였다. 영상이 떠오른 것이다.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한 노인이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노인의 말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마치 문서처럼 정리가 되었다.

 《제1강: 마나의 성질과 마나 오션

 수천 년 동안 마나 오션은 두 곳으로 알려졌다. 마법사들에게는 심장이고, 기사들에게는 하복부 깊숙한 곳이 바로 두 마나 오션이다. 하지만 학파에 따라 다양한 실험을 하고 검증된 지금에선 새로운 이론들이 정립되었다. 마나가 축적될 수 있는 곳은 무한하다는 것이 최근까지 정립된 이론이다.

 마나는 인간의 몸속뿐 아니라 몸 밖에도 축적이 가능하며, 일부 실험적인 학파의 경우에는 마나 오션이 필요 없다는 이론까지 주장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검증된 바에 의하면 마나를 축적할 수 있는 곳은 총 여덟 곳이다.

 기존에 알려진 로우 오션과 심장 부위의 미디엄 오션 외에도 정수리 부위의 어퍼 오션이나 음부의 제니틀 오션, 손바닥 중심의 팜 오션 그리고 발바닥 중심인 솔 오션에도 마나를 안정적으로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모든 마나를 그 부위들에 축적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안정적으로 모든 마나를 축적할 수 있는 곳은 로우 오션이 유일하며 다른 오션들은 각기 적합한 성질을 가지는 마나들이 있음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확인되었다.

 어퍼 오션은 사고와 사색, 명상과 집중을 통해 뇌파의 힘을 키워 외계로 발현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어퍼 오션에 안착할 수 있는 마나는 정신에 관여하는 빛과 어둠, 음과 양의 성질을 가진 마나이다. 다른 마나들도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마나는 그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것이 극히 어려우며 의식의 집중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다. 이 어퍼 오션의 마나를 사용하면 원거리 텔레포트나 사이킥 에너지의 발현과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동시에 여러 개의 움직이는 분체를 만들거나 원거리에서도 바로 앞에 있는 듯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강력한 집중과 의지의 힘으로 이 어퍼 오션의 마나를 뇌파를 통해 외계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천부적인 재질은 물론 엄청난 고련을 거쳐야만 한다.

 미디엄 혹은 센트롤 오션은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흔히 마법사들이 의지의 힘으로 자신에게 알맞은 성질의 마나를 끌어들여 회전을 통해 외계 마나와 공명을 하기 가장 쉬운 고리형의 서클이며, 다른 하나는 단순하게 어퍼 오션과 로우 오션의 중간으로 감정 상태를 총괄하는 오션이다.

 심장 부근에 위치한 마나 오션으로 심장과 관련이 있다. 심장은 1분에 72번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며 평생 삼십억 번 가까이 뛰어 1회 박동에 70cc, 1분에 4,900cc의 혈액을 13만 킬로미터의 혈관에 순환시키는 역할을 하는 무게 350~600그램의 기관이다.

 심장과 붙어 있는 폐는 높이가 25센티미터, 무게가 500~650그램으로 심장 좌우에 있어 개수로 삼억 개, 면적이 40~100제곱미터 폐포를 통하여 공기 중의 산소를 피 속에 넣어주고 피 속에 있는 탄산가스를 뽑아내어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한다.

 심장은 불로 나타낼 수 있는데 바로 뜨거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심장의 뜨거운 기운이 단전으로 내려와 신장의 물을 데워 척추를 타고 올라 복부 쪽은 따듯하고 머리 쪽은 시원한 상태를 바람직한 상태水昇火降(수승화강)로 본다.

 미디엄 오션은 로우 오션이 육체의 신진대사에 직접 적용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감정을 맡고 있다. 우리가 흔히 가슴이 아프다든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든지 희열에 가슴이 벅차다든지 속이 다 시원하다든지 하는 갖가지 감정의 기운들이 엉기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 미디엄 오션은 로우 오션과 어퍼 오션이 소통하는 교량이 되며 세 오션 간의 연결이 매끄러워야 신체와 정신 그리고 감정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 미디엄 오션을 개발하는 방법은 일정한 방법에 따라 감정을 절제하거나 일정한 순서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감정을 표출시키는 것 등이 있다…….》

 하룬은 시간의 흐름도 인식하지 못한 채 지혜의 파편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있었다. 먼저 개괄적인 마나와 마나 오션에 대한 총론에 이어 각 마나 오션과 각종 마나에 대한 각론이 이어지자 하룬은 기어코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자 모든 것이 바로 마나였다. 모든 것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결합 방식이나 양 그리고 성질에 따라 만물로 표출된다는 것과 그 각각의 마나는 사람들마다 어울리는 성질이 따로 있으며 타고난 체질이나 기질에 따라 마나를 수련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각론은 너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이 많아 단숨에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마나의 성질에 따라 마나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었고, 마나를 축적하는 방법이나 마나 오션의 종류에 따라 축적할 수 있는 마나들도 모두 달랐다.

 어쨌든 거의 반나절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그가 지혜의 파편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자신이 직접 알아낸 마나 플로가 효율 면에서는 무척 낮지만 안전한 방법이라는 점과 고대 라 제국에서 검증되고 확인된 여덟 곳의 마나 오션 중 무려 다섯 곳을 자신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백분의 일도 채 이해하지 못한 느낌이네. 아무튼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면 마나를 다루는 내 능력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될 거야. 마나에 대한 이 모든 지식은 현실의 기와도 일맥상통하니 난 엄청난 기회를 잡은 거로군.’

 마법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하룬은 그렇게 원하던 기의 축적과 사용 방법에 있어 거의 완전하고 안전한 안내서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정령도 현실에서 끌어낼 수 있을지 몰라.’

 분명히 그런 내용이 있었다. 정령계에 존재하며 계약에 따라 소환되는 그런 정령들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오랫동안 마나가 뭉친 곳에는 반정령이라는 존재가 생겨날 수 있다고 했다. 그 반정령은 또렷한 실체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성을 가지게 되면 실체를 갖추고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정령으로 성장한다. 그것을 지혜의 파편에서는 요정으로 정의하고 있었는데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에너지가 가득한 현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과거 종말 시대에도 유령이니 요괴니 하는 존재들이 심심치 않게 보고되거나 회자되었으니 말이야.’

 안 그래도 정령들과 감정을 교류하면서 현실에서도 이런 존재들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을 하던 하룬으로서는 새로운 길을 본 것 같았다.

 ‘정말 즐겁군. 공부할 것이 많다는 것이 이렇게 기대되고 즐거운 일이란 사실은 처음 알았어.’

 아마 학창 시절의 공부가 이와 같았다면 그는 절대로 엇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이 흥미를 가지는 것, 알기를 열망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진짜 공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하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깝지만 지금은 이만하고 일어나야겠어.’

 그래도 다행한 것은 지혜의 파편에 실린 내용은 금방 다시 생각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다. 아마 이곳에 있는 지혜의 파편이 밖으로 반출될 수 없기에 그 자체에 기억 마법이라도 인챈트된 것 같았다.

 하룬은 지혜의 파편과 마법서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워프 마법진과 다음 단계로 향하는 문으로 갈라진 곳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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