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비도지존 (109/278)

《비도지존》

 1황녀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휴우, 겨우 백육십 명 정도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절반이나 죽었어.’

 1관부터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훌륭한 예술품이 갑자기 골렘으로 돌변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법사들이었던 까닭에 예술품의 선호도가 높아 피해가 더 심했다. 드워프가 제작한 것으로 짐작되는 조각상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었던 까닭이다.

 조각상들이 생명을 가지자 방심했던 마법사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볼카웜에게 한쪽 눈을 잃었지만 덕분에 깨달음을 얻어 소드 마스터가 된 아인델프가 아니었다면 더 희생이 컸을 것이다.

 “정신 차렷!”

 마나가 충만한 고함 소리에 마법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실드 마법과 블링크로 위험에서 벗어난 마법사들은 이내 효과적인 마법을 날려 핵을 찾아 파괴할 수 있었다.

 1관 내내 등장했던 골렘들은 정말 끔찍했다. 통로는 위를 향했다가 아래를 향하는가 하면 이내 다시 위를 향하는 등 무척이나 경사가 심했다.

 그런 경사를 가진 통로를 막고 한 기씩 공격해 오던 골렘들은 스톤, 아이언, 주얼리까지 점점 더 강해졌다.

 마법사들은 순번을 정해 골렘들을 상대했지만 갈수록 골렘의 등급이 높아져 힘을 합쳐야 했기에 제대로 쉴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마지막 주얼리 골렘을 상대하면서는 마나 소진으로 무려 이십여 명이나 골렘의 주먹과 발에 전신이 으스러지고 머리통이 터져 죽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자들을 이끌고 통로의 끝까지 도착했을 때 나온 공간의 중앙에 놓인 석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통과를 알리는 안내음만 들렸을 뿐이다.

 -축하합니다. 검증의 관 1단계를 통과했습니다. 헤드 칭호와 함께 손등에 특유의 표식을 받습니다. 표준 통과 시간을 2시간 초과했습니다. 4단계까지 표준 시간 내에 통과하면 지혜의 파편과 마법서가 통과 시간에 따라 최대 네 권까지 주어집니다. 함께 입장하셨다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동료들은 워프된 곳에서 시험이 종료될 때까지 여러분을 기다릴 겁니다. 검증 포기를 원하시면 왼쪽의 워프 마법진 위로, 계속 시험을 진행하려면 오른쪽 문으로 입장하십시오. 이곳에서의 휴식 시간은 최대 12시간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사람들은 안내음과 함께 생성된 손등의 기이한 문양을 흐임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몇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자신들이 황제의 계단으로 알고 있었던 곳의 정식 이름이 ‘검증의 관’이란 사실에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정식 명칭과 달리 부르는 말이 다른 경우야 비일비재하니 지금 당장은 어떻게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른 한 가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마법의 흔적이었다. 자신들의 바로 곁에서 끔찍하게 사망했던 동료들이 실은 죽은 것이 아니란 사실과 이 모든 시험이 환영 마법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에 안심과 함께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정도의 환영 마법이 있을 거라고는 절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곤에 전 사람들은 어느 순간 완전히 뻗어 버리고 말았다. 심력이 바닥난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잠깐 수면을 취한 후 식사하고는 명상으로 피로를 풀었고, 기사들 역시 비전 마나 플로를 운행해서 몸을 제대로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1단계를 통과한 지 열 시간이 지났을 때 1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또 가보지요. 어떤 시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어디 한번 만나 보자고요.”

 1황녀는 마음이 급했다. 표준 통과 시간을 두 시간이나 초과했다니 줄여야만 했다.

 “네, 전하!”

 호기심이 많은 마법사들이 대부분인지라 사람들은 열 시간의 휴식으로도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지만 눈을 빛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1단계에서 너무 마법을 난사했어. 이런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좀 달라졌을 텐데.’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목숨의 위협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녀는 기대와 걱정을 안고 오른쪽 문을 열고 걸음을 내디뎠다.

 다시 거대한 통로가 나왔다. 벽에 일정 거리를 두고 발광석이 박힌 통로는 각종 기하학적 문양들이 양각 혹은 음각되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1황녀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걸 제대로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이번에 또 뭘까?’

 팔을 뻗어 서로의 손이 닿을 거리를 두고 4열로 서서 전진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미리 이야기한 대로 네 명의 선두는 정면을, 2열은 양 벽을, 3열은 천장을 그리고 4열은 바닥을 예의주시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1단계 시험을 통과하며 시간제한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무조건 조심하며 전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1황녀가 조금 안심하는 사실은 수하들 대부분이 마법사라 관찰력이 뛰어나니 위험의 징후를 빨리 예측할 수 있을 거란 점이었다.

 과연 그녀의 예측이 맞았던 걸까. 4열의 마법사들이 경고했다.

 “바닥에 뭔가 있다!”

 “조심해!”

 경고음과 함께 사람들이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로세로 1미터의 큰 벽돌이 깔린 바닥에도 여러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일부 벽돌로 된 바닥에서 작고 하얀 것이 꿈틀대고 있었다.

 “뭐지? 흰개미 같은데.”

 한 마법사가 무심코 개미 한 마리를 손으로 집었다.

 “아아악!”

 찢어질 듯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개미를 손에 쥐었던 마법사가 손가락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대열을 벗어나 벽에 자신의 손가락을 마구 짓뭉개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등에는 어느새 불룩한 것이 튀어나와 팔목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메롤라스 백작이 소리를 질렀다.

 “식인 개미다!”

 “개미를 털어 내!”

 그의 말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뛰기 시작했다. 살을 뚫고 들어오는 식인 개미의 존재에 질겁한 사람들은 어느새 겁에 질려 바닥을 세게 밟으며 발광했다.

 “진정해! 진정해!”

 1황녀 진영의 기사장인 아인델프가 소리를 질렀다. 볼카웜 토벌 때 한쪽 눈을 잃어버려 안대를 한 아인델프의 고함은 통로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정신차리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아인델프의 경고대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상황을 살폈다. 이내 혼란이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곧바로 더 큰 혼란이 찾아왔다. 곳곳에서 경악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식인 개미, 식인 개미 떼가!”

 “아악! 내 발! 발을 뚫고 들어왔어!”

 “살려 줘! 아악!”

 어느새 통로 전체가 꾸물거리는 흰개미 떼에 장악당한 것이다. 발광석의 흐릿한 빛 속에 하얗고 작은 개미 떼가 우글거리는 통로가 눈에 들어오자 벌레를 극도로 싫어하는 1황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파이어 플레임!”

 “파이어 월!”

 곳곳에서 화염계 마법이 펼쳐졌다. 일부에서는 서로의 마법 때문에 부상을 입는 자가 나올 정도로 사람들은 패닉에 휩싸였다.

 타다다닥!

 식인 개미가 불에 타는 소리와, 고기 타는 냄새가 순식간에 통로를 가득 채웠다.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아인델프는 1황녀를 안고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다들 뛰어라! 뒤는 이미 식인 개미에게 당해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 맡아라!”

 그 말과 함께 아직 상태가 괜찮은 사람들은 아수라장이 된 통로를 뛰기 시작했다. 근력이나 체력 면에서 기사들에게 현저하게 달리는 마법사들은 자신의 몸에 헤이스트 마법을 걸고 뛰거나 블링크를 연속으로 펼쳐 그곳을 벗어났다.

 그렇게 한참을 뛴 후에야 아인델프는 뒤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개미 같은 하찮은 미물이 쫓아오지 못할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우람한 팔에 안긴 1황녀는 볼 수 있었다.

 “아인델프 경, 벽을!”

 다급한 1황녀의 말에 벽으로 시선을 돌린 아인델프의 입이 딱 벌어졌다. 벽의 문양 사이로 새까만 무언가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히 식인 개미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그 불안감 사이로 윙윙하는 날갯짓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바로 뒤까지 쫓아온 메롤라스 백작의 눈이 커졌다.

 “살인 벌이다!”

 “살인 벌?”

 한 기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바닥이나 벽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무수한 개체가 모여 공격하는 식인 개미라면 모르지만 벌 따위야 오러 소드를 일으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얼굴은 더욱더 창백하게 질렸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이 벌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루는 마법 재료 중 살인 벌의 독침이 있었던 것이다.

 “달려! 독침 한 방이라도 맞으면 바로 즉사한다!”

 메롤라스 백작이 질린 얼굴로 앞서 달리며 아인델프의 어깨를 쳤다. 아인델프는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평소 백작의 박학다식한 면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발에 힘을 주고 바닥을 박찼다.

 “카악!”

 “커억!”

 살인 벌의 독침이 무서운 것은 쏘이고 30초도 안 되어 죽는다는 것과 더불어 그동안 상상을 넘는 고통을 그낀다는 것이다. 신경세포를 거슬러 침투해 두뇌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살인 벌의 독은 엄청난 극통을 느끼게 만든다.

 “빌어먹을!”

 차라리 첫 번째가 나았다. 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의 습격은 제대로 상대할 방법도 없으면서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실드!”

 누군가 급한 나머지 실드를 치고 달렸지만 그 운명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몸에 마법을 걸어 한발 앞서 도망치지 못했다면 마나가 다 소진될 때까지 실드를 난사한 후에는 결국 살인 벌의 독침에 쏘일 운명인 것이다.

 “도대체 이 미친 곳은 뭐야!”

 누군가의 분노성이 통로를 타고 미칠 듯이 뛰는 심장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하룬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피닉스와 나이아를 다시 소환해서 호수로 돌아 나왔다. 정령들의 능력이 높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이미 한 번 갔던 길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금방이었다.

 -하룬과 하나가 되는 것은 정말 기분이 좋아요. 하룬은 기분이 어때요?

 “그, 그게…… 나도 좋아. 무지.”

 하룬의 피부에 맞닿는 수막의 형태였지만 나이아는 그와 강하게 접촉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하룬 역시 그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은 이런 기분을 황홀하다고 표현하나요? 하룬은 어때요?

 순진해서 그런지 너무 대담한 질문이었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응, 그런 것 같아.”

 손과 몸에 맞닿은 그녀의 살은 한없이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그녀 특유의 체취와 함께 살과 살이 맞닿는 감촉은 정말이지 황홀했다.

 부드럽게 유영을 하면서도 나이아의 감촉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그 감각은 정말 좋았다.

 위신느와 동시 소환한 이래 나이아는 예전의 그 정숙하고 고결한 이미지를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나왔는데 그도 싫지만은 않았다.

 마침내 호수 밖으로 나오자 수막 형태에서 다시 본모습으로 돌아온 나이아에게 하룬이 물었다.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예전에 한 최상급 정령에게 들었어요. 그런데 그 정령과 계약했던 정령사는 변태였다는데…….

 “하하하!”

 얼굴이 뜨거워진다. 스스로 변태라고 자백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 그만 돌아가야지.”

 -하지만 변태라도 난 괜찮아요. 그 무엇이라도 하룬에게는 해주고 싶으니까.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어요. 내 존재의 소멸이라도…….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볼에 뽀뽀하고는 돌아갔다.

 -키키키! 정말 못 봐주겠네. 나도 여성체로 정할걸.

 “피닉스!”

 -돌아갈게. 하지만 조금은 다른 감정이긴 해도 나도 나이아와 같은 마음이야. 이미 우리는 같은 운명의 실로 매였거든. 또 불러, 하룬!

 피닉스는 장난스럽게 놀리다가 나중에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고 정령계로 돌아갔다.

 잠시 동안 감정을 추스른 하룬은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 보았던 동굴로 향했다. 벽 위쪽으로 한참 올라간 위치에서 위를 향해 뚫린 동굴은 멀리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공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하룬은 기대와 설레는 마음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올라갔다. 거칠게 파인 동굴이 크기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손으로 잡을 곳은 충분했다.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탓에 돌부리가 제법 많았다.

 동굴은 위를 향해 지그재그로 뚫려 있었다. 누군가 볼카웜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렇게 판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어떤 수단으로 이런 동굴을 팠을까? 지질을 보아하니 흙도 아니고 바위인데.’

 정말 궁금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비도지존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단단한 바위를 이런 식으로 뚫었다는 것은 정말 상상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그렇게 세 번이나 급하게 방향을 튼 동굴을 기어 올라간 하룬은 드디어 목적하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경 5미터 정도의 공간이 그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올라간 하룬의 눈앞에는 높이 2미터에 폭 1미터 정도의 문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문고리까지 달려 있었고 그 위쪽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 어디로 들어가는 문이지?’

 강한 호기심에 문 쪽으로 걸어가던 하룬의 눈이 무심코 다른 곳으로 향하는 순간 그의 발이 우뚝 멈췄다.

 “헉!”

 하룬은 경호성과 함께 눈을 부릅떴다. 공동의 한쪽 끝에 앉은 자세로 미라로 변한 시체와 그 미라가 쥔 작은 검이 화인처럼 그의 심혼에 박혔다. 하룬은 대번에 그 미라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비……도……지……존!”

 강렬한 열기에 자연적으로 미라가 된 시체를 본 순간 하룬은 격정이 치밀어 올라 떨고 있었다. 그가 게임을 통해 이루려던 또 한 가지의 꿈이자 목적이었던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정좌한 상태에서 가지런히 모은 손에 검 하나를 잡은 시신은 틀림없이 비도지존이었다. 그가 쥐고 있는 붉은색 검은 단검으로 분류될 정도로 짧았던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도 본능적으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하룬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긴 미라의 몇 걸음 앞에 멈춰 선 다음 존경의 염을 담아 그를 향해 정중하게 절했다.

 ‘예전 종말 시대 유행했던 소설을 보면 스승에게는 아홉 번 절을 한다고 했던가?’

 문득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 세상이야 허리를 반으로 접는 식의 인사도 촌스럽다고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존경심을 그에게 표시하고 싶었다.

 하룬은 진심을 담아 그를 향해 절하기 시작했다. 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슴을 꽉 채우는 정체 모를 감정이 그의 마음을 북받치게 만들었다.

 비록 미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하룬은 그의 흔적을 따라오며 그가 인간이나 다른 이종족들에게 해로운 존재들을 찾아다니며 홀로 그것들과 상대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소수의 인간들만이 그의 족적을 기억할 뿐이지만 그가 가졌던 마음은 제국을 일으킨 황제들이나 전쟁에서 나라를 구해 낸 영웅들보다 그 격이 더 높았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오지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 갔다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한참 동안 그를 추모하던 하룬은 이제는 듣지도 못할 비도지존이지만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했다.

 “언제까지 이 세계에 올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 위대한 뜻을 잇겠습니다. 너무 쓸쓸해하지 마세요. 당신은 위대한 영웅입니다.”

 하룬은 워낙 가진 것 없이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기본적인 욕심이 별로 없는 성격인지는 몰라도 권력이나 돈 혹은 명예에 관심이 없었다. 누구보다 더 부자이고 싶은 생각도, 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싶은 생각도,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생각도 그리 크지 않았다.

 물론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하룬은 그런 것들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위이이잉!

 갑자기 비도지존의 손에 들린 붉은색 단검이 빛을 토하며 울기 시작했다. 의외의 사태에 놀랐지만 하룬은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 붉은색 단검이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방어구 속에 찔러 넣은 비수들이 공명했던 것이다.

 불안감보다는 도대체 무슨 현상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비수들과 검을 보는 사이 방어구 속에 찔러 넣은 비수들과 비도지존의 손에 있던 단검이 스스로 움직여 한 곳으로 향했다.

 눈을 들어 그 방향을 보니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하나 솟아났다. 생김새는 영락없이 암기대였다. 어깨와 허리를 연결하는 부분과 허리 부분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암기대였다.

 비수들과 단검은 그 위를 빙글빙글 선회하며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제집을 찾아가듯 암기대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이건!”

 틀림없이 비도지존이 사용했던 암기대일 것이다. 하룬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손으로 암기대를 잡았다. 그 순간 안내음이 들려왔다.

 -비도지존의 무기 세트 중 세 개를 찾았습니다.

 -비도지존의 후예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기본 스텟이 2씩 상승합니다.

 연속으로 들려오는 안내음에 하룬은 뛸 듯이 기뻤다. 알고 보니 암기들뿐 아니라 암기대까지 갖추어야만 세트가 완성되는 것이었는데 이곳에서 세 번째 암기와 함께 암기대까지 얻은 것이다.

 하룬은 암기대의 정보를 확인했다.

『암기 벨트

등급: 레전드

내용: 고대 라 제국의 최고 장인 부루마프가 생명을 가진 전설의 금속 바라디움으로 만든 최고의 작품이다. 금속의 반정령이 산다는 전설이 있는 바라디움으로 만든 암기 벨트는 암기들의 집으로, 닦거나 갈지 않아도 청결 상태를 유지하며 예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다. 또한 시간의 경과에 따른 내구도의 감소를 없애준다. 동시에 300자루까지 암기 착용이 가능하다.

옵션1: 능력치 10% 증가

옵션2: 초당 마나 회복률 1%

옵션3: 착용자를 대한 몬스터의 능력치 10% 하락

옵션4: 방어막 형성, 충격 흡수율 50% 감소

제한: H.P. 1,000 이상 보유자』

 “와아!”

 입이 쩍 벌어진다. 옵션이 무려 네 개나 되는 레전드 급 무구라니. 아니, 직접적인 무구는 아니지만 그 옵션이 굉장히 높았다. 네 번째 옵션의 내용은 모르겠지만 충격 흡수율이 50% 감소라니, 정말 달리 레전드 급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싸가지보다 더 사기적인 능력을 주는 아이템이었다.

 유저가 많이 늘어났고, 이미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세상이지만 이런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이 얼마나 있을지 정말 궁금했다. 더구나 이 암기 벨트는 거의 하룬에게만 특화된 아이템이다. 사실 귀속 아이템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도지존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려 주는 것이 없어 섭섭했지만 기어코 간절하게 원했던 마지막 유물까지 찾았다는 기쁨에 하룬은 얼마간 멍하니 암기대와 비도지존의 미라만 보고 있었다.

 “아! 이 단검도 확인해 봐야지.”

 정신을 차린 하룬은 비도지존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었던 단검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화염의 단검

등급: 유니크

내용: 불 속성의 원소석에 미스릴 가루 그리고 파로비듐을 함께 정련해서 만든 단검이다. 비록 단검이지만 마나를 주입하면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켜 일반 검의 크기로 커지기 때문에 마법 검처럼 사용할 수 있다. 암기로 사용하면 대상물을 태워 버릴 정도의 화염을 방사한다.

옵션1: 힘 +3, 체력 +5, 지혜 +5

옵션2: 마나 주입 시 화염의 오러 블레이드 생성』

 “대단하다!”

 단검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유사시에는 일반 검으로 사용할 수 있다니 정말 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이 정도의 아이템이었기에 비도지존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가만. 이제는 나머지 비수들의 정보도 공개되지 않을까?”

 하룬은 이제까지 정보를 확인하지 못했던 비수들을 꺼내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블리츠 대거(전격의 비수)

등급: 유니크

내용: 고대 라 제국의 명장 부루마프의 후예가 신비의 금속인 바르타늄으로 만든 비수이다. 수십 번의 뇌전을 맞아 그 힘을 봉인하고 있는 비수로, 그 힘을 다스리는 자는 가히 뇌전을 사용할 수 있다.

옵션1: 지혜 +5, 심안 +3, 집중 +3

옵션2: 회수 시 초당 1%로 뇌전이 자동 충전』

『황혼의 킨드잘

등급: 유니크

내용: 고대 라 제국의 명장 부르마프의 후예가 신비의 금속 바라디윰으로 만든 비수이다. 생명을 가진 비수로, 의식을 치르면 주인의 의지대로 살아 움직인다. 금속의 반정령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옵션1: 의지 +3, 심안 +3, 집중 +5

옵션2: 마나를 주입하면 강철은 물론이고 오러 막이나 매직 실드를 베어 낼 수 있다.』

 “정말 최고다!”

 뇌전의 힘을 가진 블리츠 대거의 위력은 이미 확인한 바가 있었다. 물론 몰라서 당한 것이긴 하지만 많은 실력자들을 죽인 무시무시한 볼카웜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황혼의 킨드잘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절삭력을 가진 황혼의 킨드잘은 의지로 조종까지 가능했다. 아마 비도지존이 대마법사들이나 소드 마스터들을 비수로 꺾었다고 알려진 것은 이 비수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하나만 더 얻으면 된다!’

 비록 아무 단서도 없지만 벌써 다 얻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비도지존의 흔적을 찾아 인간들이나 이종족들의 생명을 해치는 몬스터를 쫓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룬은 암기대를 착용했다. 하지만 곧 경악성을 토하고 말았다.

 “어엇!”

 암기대가 갑자기 살아있는 것처럼 흐물흐물 퍼지더니 방어구를 통과해 속옷 안으로 스며들었다.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방어구를 벗은 하룬은 몸의 전체가 미세한 막으로 덮인 것을 발견했다. 속옷 안으로 몸에 밀착되어 형성된 그 막은 투명한 것에 더해 몸의 굴곡까지 그대로 유지될 정도로 딱 맞추어 생성되어 있었다.

 ‘신기하네. 코까지 덮었는데 숨을 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

 눈 위에도 막은 있었다. 하지만 막을 통과해 눈썹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정말 신기했다. 거의 새로운 피부나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하룬만은 살과 거의 밀착된 미세한 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암기대의 원형이 덧붙어 있었다. 정보에 나온 대로 살아있는 금속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이제 옵션 4의 내용이 뭔지 알겠군.’

 방어구 안쪽에 충격 흡수율을 절반으로 감소시켜 주는 방어구를 하나 더 겹쳐 입은 것은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었다.

 충격에서 벗어난 하룬은 막으로 변형된 암기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암기들을 모두 꽂았다. 붉은 모루 부족 드워프의 비밀 창고에서 얻은 어둠의 학살자를 꽂을 때는 정보를 확인할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보다는 한쪽에 있는 문에 관심이 갔다.

 ‘어차피 비도지존이 남긴 유물도 아니니까 나중에 확인하자.’

 하룬은 눈에 들어온 문 모양의 벽으로 향했다. 고대 라 제국의 언어이자 현재 대륙 공통어의 원류인 문자가 문에 새겨져 있었다.

 《검증의 관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문을 열라. 그대의 능력을 널리 세상을 위해 쓰고자 하는 자만 입장하라.》

 ‘어떻게 여기에 또 다른 입구가 있는 거지? 그럼 비도지존께서도 이곳을 찾으러 지하까지 온 건가?’

 신기했다. 이곳에 또 다른 검증의 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다는 것은 그린 엘프들도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비도지존은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지혜의 파편과 마법서가 있단 말이지. 시간제한 내에 네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다고 했지.’

 다른 것은 몰라도 지혜의 파편은 꼭 얻고 싶었다. 아니, 개방된 곳이라 얻을 수는 없고 배우는 것이 고작이겠지만 한 번 수준 높은 강의를 들은 하룬은 지혜의 파편이 전하는 고차원적인 강의를 듣고 싶었다. 그것이 검술이든 아니면 마법이든 말이다.

 하룬은 비도지존의 미라를 향해 존경의 염을 담아 한참 쳐다보다가 깊게 허리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