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브 시티》
볼카웜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놈의 체액만 따라가면 되니 간단한 일이다. 아마 화염 브레스를 뿜어내느라 마지막 힘까지 소진했을 테니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모르지.’
하룬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결코 쉬운 놈이 아닌 것이다.
볼카웜은 생명력이 질기다. 안면부가 걸레가 되고 소일 스피어에 수십 군데가 뚫린 몸을 하고도 거의 1킬로미터가 넘게 움직였던 것이다.
더 이상 정령들을 소환할 수 없는 상황이라 위험했지만 볼카웜의 복수심을 생각하면 반드시 끝장을 내야만 했다.
계속 이어진 통로의 끝에서 갑자기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그레이브 시티?’
그건 아니었다. 폭 50미터 정도 되는 긴 타원형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붉은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생명의 존재는 볼카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후악!
공간으로 나가는 순간 강렬한 열기가 덮쳐 왔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땀구멍을 통해 땀이 흘렀다. 현실의 사막보다 훨씬 더 뜨거운 열기였다. 강렬한 열기로 달구어진 공기를 들이쉰 순간 폐부가 타는 것 같았다.
하룬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지만 할 일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에 온몸이 걸레처럼 변한 볼카웜의 모습이 들어왔다.
끄러어럭!
기괴한 비명을 지르는 볼카웜은 붉은색 강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놈은 강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었다. 벌써 볼카워은 강과 10여 미터 떨어진 거리까지 간 상태였다.
‘놓치지 않아!’
하룬은 발을 구르며 흡수한 마나를 회전시켜 발바닥을 통해 폭발적으로 내뿜었다. 순간 그의 몸은 높이 30미터나 높은 천장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타앗!
떨어지는 기세를 살려 놈의 머리통을 향해 마나가 주입되어 하얗게 빛나는 본 소드를 힘껏 내리쳤다.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본 소드에 머리통이 갈라졌다. 아무리 단단한 뼈를 가졌어도 가속도가 붙은 오러 소드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놈의 두개골은 컸지만 뇌의 크기는 작았다. 본 소드는 뇌를 엉망으로 찢고 안으로 들어갔다.
푸르르르.
볼카웜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며 서서히 제자리에 멈춰 섰다.
-볼카웜을 잡았습니다.
-레벨이 5 상승합니다.
-아이템 2개를 획득했습니다.
-집중이 1 상승합니다.
-정령력이 500 상승합니다.
-S.P.를 150점 획득했습니다.
-H.P.를 200점 획득했습니다.
‘굉장한 놈이었구나.’
하긴 딜런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내상을 입었으니 평범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그래도 레벨이 꽤 오른 상태였는데도 5나 상승한 것을 보면 대단한 놈이었던 것 같다.
특별한 점으로는 S.P.는 물론이고 H.P.까지 주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경험을 보면 H.P.는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나 막대한 해익을 끼치는 몬스터를 처치했을 때 주어졌다. 그렇다면 이 볼카웜 또한 인간들에게는 위험한 존재라는 이야기다.
‘정령들과 힘을 합하니 확실히 실력이 좋아진 거 같아.’
이제는 굳이 암기술이나 검술만 고집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정령술이 현실에서는 쓸 수 없는 능력이기는 하지만 그가 익힌 센스 소드 스킬만 가지고는 강한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가 없다. 메신저 스킬은 아직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수련하지는 못했다.
싸가지야 독 때문에 소환하기가 껄끄러웠지만 다른 정령들은 아니다. 그에게 세 정령은 이제 싸가지보다 훨씬 더 편하고 정이 갔다.
‘오랜만에 아이템이나 구경해 볼까?’
하룬은 인벤토리 창으로 들어온 아이템들을 꺼냈다. 하나는 방어구이고, 다른 하나는 둥근 구슬이었다.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볼카웜 방어구 세트(유니크)
볼카우머을 잡은 용사에게 주어지는 볼카웜의 가죽 방어구 세트이다. 지하 깊은 곳에서 높은 지열과 마나풍을 견디며 생존해 온 볼카웜의 가죽 중 안면 부위의 가죽은 최상급의 방어력을 지닌다. 또한 모자형 투구, 외투형 하드 레더, 목 부츠, 건틀릿으로 구성되었으며 불 속성을 품고 있어 화염계 마법에는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옵션: 자동 맞춤 기능, 자동 체온 조정 기능
세트 효과: 힘 +10, 체력 +20, 민첩 +20, 지하 몬스터 계열의 경우 상대 능력치 -30%
제한: 귀속 아이템』
볼카웜의 가죽 방어구는 연한 주황색으로 특별히 튀지 않으면서도 보기 좋았다. 당장 겹쳐 입을까도 생각했지만 현재 입고 있는 럼프 오크 가죽 방어구에 자랑스러운 돌풍 용병대의 문양이 새겨져서 그런지 굳이 갈아입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일단 나중에 착용하자.’
하룬은 그 아이템을 아공간에 넣고 다른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화륜의 구슬
등급: 미정
볼카웜이 수백 년 동안 지하에 살면서 강렬한 지열과 마나풍 속의 마나를 흡수해서 만든 특수한 마정석이다. 불 속성과 바람 속성의 원소력이 쌓여 만들어진 원소석의 일종이다.』
“좋은 걸 얻었네. 그레이브 시티에 들른 후에는 이놈들 사냥이나 해 볼까?”
캘프란 마을 촌장에게 원소석을 얻었을 때만 해도 그 가치를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령을 귀속시킨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더 가치 있는 아이템인 것이다. 다만 이 화륜의 구슬은 두 속성이 결합되어 있어 사용하기가 좀 난감했다.
현재 친구로 귀속시킨 네 정령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물의 정령 나이아였다.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진 터라 비교는 힘들지만 그의 생각에 가장 근접하게 정령 마법을 구현해 내는 것은 나이아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언제 시간을 내서 이 원소석들로 정령들의 능력을 업그레이드시켜야지.’
게임에만 존재하는 화신체가 강해지는 것이기에 급할 것은 없었다. 정령들이 원소석에 담긴 원소력을 흡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지상 위에 있는 던전 쪽 상황이 더 마음이 쓰였다.
하룬은 마음을 정하고 위를 향해 난 통로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볼카웜이 마지막 공격으로 사용했던 여덟 개의 이빨을 떠올렸다.
하룬은 본 소드에 마나를 주입해서 한참 씨름한 끝에 이빨 여덟 개를 모두 다 뺐다.
‘이거 잘만 사용하면 대박 무기가 될 거야.’
딜러의 오러가 담긴 검을 견딘 뼈였다. 평범할 리가 없었다.
볼카웜은 거대한 동체에 가공할 속도의 쇄도와, 마나가 깃든 검이 아니면 베이지 않는 가죽, 강산성의 소화액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러 소드를 견딜 수 있는 고강도의 이빨들과 위급할 때 뿜어내는 화염 브레스를 무기로 이제까지 고요의 땅에서 많은 생명체들을 잡아먹어왔다.
드워프들이라면 이것들로 좋은 무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희귀한 재료에는 환장하는 장인들이니 어쩌면 이번에도 보수를 받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룬은 상태 창을 열어 정령력과 마나가 거의 소진된 것을 확인하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이제 바리아를 비롯한 엘프들이 뒤따라올 것이다.
“정말 잡았군요!”
“와아! 진짜로 끔찍하게 생겼다.”
뒤따라온 엘프들이 탄성을 지르며 볼카웜의 사체를 구경했다.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동체와 흉측한 외모는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바리아를 비롯한 엘프들은 하룬에게 뜨ㄹ거운 눈빛을 보내며 축하 인사를 했다. 설마 볼카웜을 단신으로 상대해서 죽이는 인간을 자신들이 직접 볼 줄은 몰랐기에 그들의 하룬에게 깊은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이곳에 열천이 있는 것을 보니 근처에 그레이브 시티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군요. 저게 바로 열천이군요. 볼카웜 때문에 더운 것도 순간 잊었습니다.”
바리아는 이제야 느끼는 듯 땀을 훔치며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는 열천을 바라보았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생각에 엘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쩌면 거의 도착해 놓고 헤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여기는 지하가 아닙니까.”
무리의 수장으로 제대로 인도하지 못해 죽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자책감을 느끼는 바리아의 모습이 신선했다. 책임감이 대단한 엘프였다.
“그럼 이곳은 너무 더우니 밖으로 나가 근처를 뒤져 봅시다.”
하룬은 바리아를 비롯한 엘프들을 이끌고 근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근처에는 상당히 넓은 동공들과 열천이 있는 공간들이 많았다. 거의 하루를 꼬박 정찰한 끝에 드디어 그레이브 시티로 짐작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암도처럼 지반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발아래로 10미터 정도는 내려가야 하는 곳에 넓은 공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동공들과는 달리 수 킬로미터가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공간의 천장에 엄청난 크기의 발광석이 절반 이상 박혀 있는 곳이었다. 특이하게도 발광석이 뿜어내는 빛은 초록색 계통이 압도적이어서 눈에 들어오는 사물이 온통 녹색으로 보였다.
“이곳입니다. 저희 그린 엘프들의 피신처가 바로 이 그레이브 시티입니다.”
감격한 바리아의 뒤에서 엘프들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드디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일족들의 마지막 피난처이자 선조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레이브 시티의 녹색 땅은 신비하게만 보였다.
일행이 서 있는 위치에서는 그레이브 시티의 전경이 거의 다 들어왔다. 시티의 중앙에는 남북으로 붉은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보면 온천이나 열천 같았다. 그리고 그 중간 어름에는 마치 농경지처럼 보이는 평탄하게 다듬어진 곳이 있고, 그곳에서 움직이는 엘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엘프들은 서쪽에 주로 많이 보였는데 그곳에는 꽤 큰 암반들이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상태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키는 작지만 옆으로 넓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신비를 더했다.
나무를 본 하룬의 눈이 커졌다. 이런 지하에서 식물, 그것도 나무를 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곳에도 식물이 자랍니까?”
“네. 저기 천장에 박힌 그린 발광석의 빛이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원래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엘프들은 볼카웜이 서식하는 이곳 지하에서 일주일 동안 생존하는 방식으로 성인 의식을 치릅니다. 그렇게 성인식을 치르던 중 볼카웜에게 동료를 잃고 헤매던 한 선조가 이곳을 발견했지요. 당시 이곳에는 나무는 아니지만 먹을 수 있는 이끼류가 꽤 많이 자라고 있어 배고픔과 기갈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기력을 되찾고 식량까지 마련한 선조가 지상으로 돌아와 이곳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 선조는 후에 다시 이곳을 찾아 씨를 뿌렸고, 밀과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때부터 이곳은 우리 그린 엘프들의 피신처가 되었습니다.”
실로 신비한 이야기였다. 지하 깊숙한 곳에 나무와 같은 식물이 자라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했다. 발광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빛만으로도 광합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단 내려가시지요. 로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요.”
이제부터는 바리아가 선두에 섰다. 그는 들은 것이 많았는지 자신 있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닥은 부드러운 흙이었다. 열기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녹색 흙을 밟는 기분은 뭐라고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했지만 감촉만은 좋았다. 그렇게 한 50미터를 걸어가던 바리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부터는 제 뒤만 따라와야 합니다. 위험한 구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리아의 앞쪽은 미세하지만 붉게 보이는 흙이 깔린 곳이었다. 바리아는 전사들에게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지그재그로 움직이기도 했고, 제법 넓은 거리를 뛰기도 하면서 100미터 정도를 간 바리아가 긴 한숨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두 손을 무릎에 대고 숨을 몰아쉬던 바리아는 뒤를 돌아보고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보니 굉장히 긴장한 것 같았다.
“휴우, 다행이다.”
“바리아 님, 우리가 방금 지나온 곳이 수호 지역이에요?”
“그래, 위험한 곳이지.”
다이리스와 바리아의 대화를 듣던 하룬이 눈을 빛냈다. 미세하지만 자신들이 움직였던 곳과 다른 지역의 차이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색이 달랐다. 그가 밟고 움직인 곳은 다른 곳보다 그 색이 옅었다.
하룬의 눈길을 의식한 바리아가 조심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내부는 뜨거운 물과 혼합된 흙으로 이루어진 땅입니다. 늪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사의 일종입니다. 일정한 정도의 무게를 가진 물건이 저쪽 땅에 닿으면 대상물을 지하로 빨아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강력한 점성을 가지고 있어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따로 경계를 서지 않았군요.”
“네. 경계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볼카웜도 이곳은 통과하지 못합니다.”
달리 피신처가 아니었다. 이런 곳이라면 정말 완벽한 피난처나 다름없었다.
수호 지역을 통과한 바리아와 엘프들은 일족의 어른들을 만날 생각에 들떴는지 빠르게 걸었다.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몇몇 엘프가 무기를 들고 마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냐?”
활에 화살을 건 상태로 달려오던 한 전사가 소리쳤다.
“엘빌 망르에서 출발한 바리아 원로와 전사들이오.”
바리아의 이름을 아는지 전사들의 얼굴이 풀어지며 잡고 있었던 시위에서 화살을 뺐다. 몇 번 땅을 박차는 사이 100여 미터를 단숨이 달려온 전사 셋은 바리아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다슘 마을 출신의 전사장 엘마흐입니다. 원로께서 마을의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도착이 지체되어 걱정하던 중이었습니다.”
“도중에 길을 잃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소. 여기 있는 용병 대장 하룬이 우리를 구해 주어 간신히 살았소.”
그제야 하룬을 본 엘마흐와 전사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훑었다. 이종족을 향한 본능적인 적의와 아울러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눈길을 받은 하룬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우리 일족에 준하여 대해 주시오.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한 인간이오. 그 정도 대접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혹시 전사들이 무례하게 굴까 두려워 바리아가 나직이 말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금세 그들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잘 왔소.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안심하시오. 형제의 은인은 우리 모두의 은인이니 로드께서도 내치지는 않을 거요. 엘마흐라고 하오.”
엘마흐는 곧 바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리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뭐라고 얘기하려고 했지만 엘마흐가 먼저였다.
“일단 시티 홀로 가시지요. 로드와 원로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고 계십니다.”
“그럽시다.”
엘마흐의 안내를 받은 바리아 일행과 하룬은 발을 재게 놀려 수많은 엘프들이 밖으로 몰려나온 곳으로 향했다.
멀리서 본 나무 숲 사이에 있던 비슷한 크기의 암반들은 엘프들의 주거지였다. 재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들은 큰 암반의 속을 파고 거주할 공간을 만든 것이다.
‘정말 신비하군. 기회가 되면 한번 들어가 봤으면 좋겠다.’
돌로 만든 집이라니, 신기했다. 강가의 커다란 암반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형성된 돌집들이 수백 체가 넘었고, 한 집에 꽤 많은 숫자가 사는지 금방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엘마흐가 그들을 인도한 곳은 강가에 있는 거대한 암반 아래였다. 그 암반의 내부는 다른 돌집과 마찬가지로 파여 있었는데 크기가 굉장했다.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정도였던 것이다.
‘여기가 시티 홀인 모양이군.’
하룬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곳에서 다섯의 엘프들이 밖으로 나왔다. 한결같이 나이가 들어 주름진 얼굴이지만 맑은 정광을 가졌다. 아마도 이들이 여기 있는 그린 엘프들의 수장들일 것이다.
“로드! 원로 바리아가 엘빌 마을의 용맹한 전사들과 함께 왔습니다.”
긴 턱수염과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인 노엘프의 앞으로 다가간 바리아와 전사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잘 왔네.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고 있던 참이야. 워낙 상황이 다급해서 지도를 전하지 못한 상태라 길을 잃고 볼카웜에게 희생되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졸이고 있었네.”
“안 그래도 길을 잃고 굶주려 죽을 뻔했는데 여기 있는 인간 용병 하룬이 우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바리아의 보고에 로드를 비롯한 엘프들의 시선이 하룬에게 쏠렸다.
“돌풍이라는 용병대를 맡고 있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그린 일족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오!”
“허! 이런 기이한 일이.”
역시나 노엘프들은 물론이고 주위를 빼곡하게 채운 엘프들이 탄성을 토하거나 경악한 얼굴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귀한 손님이 방문하셨군. 난 그린 일족의 로드인 다다디윰이라고 하오. 그대는 인간족의 로드요?”
역시 몇 번이나 들은 질문에 하룬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되도록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우연한 기회에 다른 종족의 말을 알아듣거나 의사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나이로 보아 그럴 리는 없으니 그럼 각성을 한 거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변화였지만 각성한 것은 맞았다.
“그레이브 시티에 온 것을 환영하오. 더구나 우리 일족들의 목숨까지 구했으니 우리의 은인이오.”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지요. 밖의 사정이 궁금하니 바리아도 같이 들어가세. 엘마흐 전사장은 나머지 전사들을 쉴 곳으로 안내하게.”
하룬은 바리아와 함께 로드를 따라 시티 홀로 들어갔다. 뜨거운 강물이 흐르는 곳이라 그런지 그레이브 시티의 기온은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방어구를 제대로 갖추어 입은 하룬은 무척 덥다고 생각했는데 시티 홀은 제법 시원했다.
이곳의 엘프들이 나무가 있음에도 굳이 암반의 속을 파내 만든 집에서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돌이 바깥의 열기를 차단해서 쾌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시티 홀은 몇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로드가 향한 곳은 길고 거대한 돌 탁자가 있는 방이었다. 탁자 위에는 몇 가지 과일이 담긴 돌그릇이 있고, 그 앞에는 역시 돌로 깎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로드가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은 네 명의 엘프들을 소개했다.
“소개하지. 우리 일족의 대원로들이오.”
“만나서 영광입니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로드는 바리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래, 자세한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바리아 원로가 바깥 사정을 좀 말해 보게. 한동안 전언이 없어 궁금하던 참이야.”
그러고 보니 대원로들 모두 로드처럼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바깥의 소식을 듣지 못해 그런 것 같았다.
“결국 통합 로드가 전사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뭐, 전사 총동원령? 결국 세상에 나가려는 것인가?”
로드와 대원로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하룬 대장의 말을 들어보니 엄청난 수의 인간들이 검증의 관을 던전으로 잘못 알고 이곳으로 온 모양입니다.”
“인간들이?”
“하룬 대장의 말로는 수십만은 될 거라고 합니다.”
“허어. 드디어 사단이 났군. 그럼 함정일 확률이 높군.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게.”
로드가 하룬을 한번 쳐다보고는 바리아에게 물었다.
“이 이야기는 하룬 대장에게 직접 듣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바리아는 하룬에게 눈짓을 했다. 굳이 거절할 일은 아니어서 하룬은 던전에 관한 이야기와 트레저 분지에 수십만의 인간들이 모인 상태이며 지금쯤은 던전에 입장하고 있을 거란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주었다.
하룬의 말을 들은 로드와 대원로들은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의 계단이라니 왜 그렇게 이름을 바꾼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뭔가 음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골든 배틀이라는 특유한 시험을 치르는 제국의 황자들을 노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리아의 말에 하룬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미 그 역시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그 인간들과 손을 잡고 다크 일족이 드디어 일을 벌인 거로군.”
“그게 확실합니다. 호시탐탐 잃어버린 대지를 벗어나 풍요로운 땅을 욕심내던 그놈들이 그때 방문했던 인간들과 손을 잡고 더러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 인간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대화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지만 하룬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면 던전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두고 벌어진 음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흠! 우리가 손님을 앞에 두고 우리끼리 이야기를 하는 무례를 저질렀군. 사안이 좀 심각해서 말이오.”
로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하룬에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하룬이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1년 전 검증의 관에 들어갔던 인간들이 있었소. 간간이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찾아오는 인간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검증의 관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했소. 그렇게 따지면 무려 1,000년 만에 찾아온 제대로 된 손님들인 셈이지. 무슨 대공이라던가? 당시 검증의 관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아 그들을 맞이했던 다크 일족의 말을 들으니 그 대공이란 인간은 오백 명의 수하와 함께 이곳에 왔다고 했소. 그들은 시험의 공간 네 개를 통과한 후 다섯 번째 공간에서 튕겨 났다고 했소.”
“그럼 직접 본 것은 아닙니까?”
“그렇소. 이곳 고요의 대지에 거주하는 엘프들은 모두 여섯 종족이오. 일족의 규모나 전사의 숫자에 따라 4개월에서 10개월씩 검증의 관을 관리하는 임무를 번갈아 맡는데 그때는 다크 일족이 검증의 관을 관리하던 때였소.”
아마 그때 인간과 엘프들 중에서 야심을 가진 무리들이 만났을 것이다.
“아마 인간들은 다크 일족과 거래를 했을 거요. 다크 일족이 검증의 관을 관리한 것은 일곱 달, 그 후 현저하게 변한 다크 일족을 생각하면 그사이에 다크 일족과 그들 간에 야합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드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한 하룬은 던전을 두고 거대한 음모가 꽤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변화라고요?”
“그렇소. 그 얼마 후부터 이제까지 못 보던 뛰어난 무구들로 무장한 다크 일족이 다른 일족들을 힘으로 혹은 마비독과 같은 더러운 물건들을 사용해서 강제로 누르기 시작했으니 말이오.”
“야합을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엘프들은 약초술이 뛰어나지만 천연에서 얻은 것이 아니면 쓰질 않소. 그런데 그들이 사용한 마비독이나 마나의 사용을 제어하는 약은 천연에서 얻은 것이 아니었지. 또한 다크 일족이 사용하는 방어구와 무기의 품질이나 종류가 달라졌소. 우리 일족들 중에도 광산이나 쇠를 다루는 기술자들이 있긴 하지만 원래 비폭력을 선호하는 엘프들이기에 무장의 정도와 상태는 약한 편이오. 그런데 갑자기 다크 일족의 무장 상태가 바뀐 거요. 가벼운 활과 하살 그리고 레이피어 정도의 무장을 갖추고 있는 다른 일족들과 달리 다크 일족은 다양한 무기들과 방패, 철시와 복합궁 등을 갑자기 소유하게 되었소.”
“그들이 지원한 거군요.”
다크 일족은 대공이라는 인간에게 그런 물건들을 지원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맞소. 다크 일족을 제외한 나머지 일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각 종족의 로드들 중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전투 능력은 가장 뛰어났던 다크 일족의 로드는 직접 검증의 관에 들어 네 곳을 연이어 통과하는 기염을 토한 후 통합 로드 회의를 소집했소. 우리 엘프족의 역사에 네 개의 관을 통과한 이는 몇 없었기에 그는 통합 로드의 자리에 앉겠다고 선언했소.”
“검증의 관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까 로드에게 5단계까지의 시험이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 각각의 이름이나 내용은 듣지 못했다. 로드가 바리아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우리 일족에서 검증의 관을 관리하는 책임은 제게 있으니 그 질문에는 제가 대답을 하지요. 본래 검증의 관은 마법사나 기사 혹은 전사의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그 시험 과정은 총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외부에서 산처럼 보이는 곳들이 각각 검증하는 장소인데 한 장소에서 한 단계의 시험을 치릅니다.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시험하는 난이도가 올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각 장소를 단계 혹은 계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네 곳을 통과했다면 4단계를 통과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검증의 관에 얽힌 음모를 이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무튼 황제의 계단이란 말을 다크 일족이 인간들을 속인 것에 불과했다. 아니, 어쩌면 대공이라는 작자와 그렇게 말을 맞추었는지도 모른다. 골든 배틀에 목을 매는 황자들과 그 세력들에게 눈이 확 뜨이는 정말 자극적인 이름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그 사이에 끼어 광대짓을 한 것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쩐지 다크 엘프와 협상을 할 때 자신을 향해 은밀하게 발산되던 기분 나쁜 눈초리들이 느껴졌던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확인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럼 혹시 들어가는 인원수와 시험과도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개인이 들어가면 개인에 맞춘 시험이 시작되고, 단체가 들어가면 그 숫자를 고려한 난이도로 조정됩니다. 하지만 단체가 들어가면 시험의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시험을 보는 자들이 협력하는 경우를 고려하여 개인 수준에 비해 1.5배는 더 어려워집니다. 또한 탈락자들은 같이 입장한 인원들이 모두 시험을 치를 때까지 강제 워프된 장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계가 쳐 있어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죠.”
불안감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랐다.
“강제 워프되는 곳이 따로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섯 개의 시험 공간의 한가운데가 바로 그 장소입니다.”
‘빌어먹을! 완전 함정이다!’
그곳이라면 엄폐물이 전혀 없는 곳이다. 각 피라미드 사이에 있는 그곳은 사방 1킬로미터도 안 될 정도로 협소하다. 잘못하다가는 최소 삼백에서 최대 육천 명이 그 협소한 장소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자칫하다간 몰살이다.’
그렇게 좁은 곳에 모여 있다가 마법이나 화살 공격을 받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시험을 보는 와중에 한 팀으로 인식되기라도 하면 더욱 상황이 안 좋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크 일족은 트레저 분지에 모인 인간들 중 핵심 인물들만 따로 분리해서 처리할 흉계를 진작부터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자신을 통해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을 팀당 삼백 명으로 이야기한 것이리라.
“시험이라면 어떤 방식입니까?”
“마법이나 무기술은 기본이고 관찰력과 판단력은 물론 직관에 이르기까지 대상자의 모든 능력을 끌어내는 각종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족들과의 싸움으로 숭무崇武 사상이 강했던 고대 라 제국에서는 마법사이건 기사이건 검증의 관에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도전하는 일이 무척 흔했습니다.”
“몇 개를 통과하느냐에 따라 칭호 같은 것도 부여됩니까?”
“그렇습니다. 1단계를 통과하면 헤드, 2단계를 통과하면 리더, 3단계를 통과하면 캡틴, 4단계를 통과하면 로드 그리고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면 영웅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고대 라 제국에서도 5단계를 통과한 존재는 수백 년에 한 번 정도만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엘프 종족의 통합 로드가 되려면 최소한 로드의 칭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린 일족의 경우 240년 전에 하이 엘프이자 통합 로드이셨던 이든 이후 로드의 칭호를 받은 후예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크 엘프에서 최초로 로드가 나온 거지요.”
검증의 관은 능력에 따라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기 위한 믿을 만한 시금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하룬은 그것이 좋은 방법임은 맞지만 신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봐도 정치체제나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시간이 흐르면 그 운용이 비리로 얼룩지고 각종 폐해가 나타나는 법이다.
아무튼 일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검증의 관은 거대한 제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행정 관료가 아닌 마법사나 기사들은 대련이나 암투보다는 검증의 관을 얼마나 통과했는지에 따라 엄격하게 상대방을 예우했고,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로드는 한 종족을 지배할 수 있는 무력과 지혜 그리고 판단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를 통과해 영웅의 칭호를 받는다면 엘프와 다른 이종족들을 조화롭게 아우르며 평화와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는 거지요. 사실 보통의 경우 4단계를 일정 시간 안에 통과하면 지혜의 파편과 마법서가 주어지지만 5단계를 모두 통과해도 더 이상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더욱이 4단계를 제대로 통과하는 데 엄청난 힘이 들기에 감히 5단계까지 통과하려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드물었지요. 사실 영웅 칭호는 순수한 명예이기에 더 이상 욕심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로 영웅 칭호를 받은 것은 라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스물이 넘지 못했답니다. 더불어 검증의 관은 어디까지나 개인 혹은 각 단체의 능력을 판단하는 지표를 부여하는 것일 뿐 그 자리에 앉는 것과는 무관하지요. 라 제국은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그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검증의 관을 건설했을 뿐입니다.”
“그럼 다크 엘프의 로드는 그걸 기화로 엘프들을 장악한 건가요?”
“그건 내가 말해주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드가 바리아의 뒤를 이어 말했다.
“다크 일족이 최초로 로드 칭호를 받은 지 얼마 후 로드 회의에서 회의장 부근을 힘으로 점거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소. 마침 다른 일족에서는 로드 칭호를 받은 이가 없다는 것과 오랫동안 이어 온 우리 그린 일족의 독주에 반발한 다른 일족들의 시기심도 한몫해서 결국 다크 일족의 로드가 통합 로드에 올랐소.”
힘을 가지면 쓰고 싶은 법이다. 하룬 자신이 직접 경험했으니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다크 엘프들이 삿된 욕심을 가질 만도 했다.
“특히 청장년층 엘프들 중에는 세상 밖으로 진출하자는 다크 엘프 로드의 주장에 마음을 뺏기는 경우가 많았소. 라 제국이 멸망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고, 전해 오는 전설을 기다리며 이 척박하고 위험한 곳에 안주하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피를 가진 엘프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결국 다크 일족이 엘프 종족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 거요.”
어쩌면 한 번도 엘프족의 로드가 되어 보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크 엘프들로서는 대를 이어 염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크 엘프들이 한 무리의 인간과 야합을 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물론 그 목적은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단순히 시험 장소에 불과한 곳을 황제의 계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골든 배틀을 치르는 황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다음 뭔가를 획책하려는 것은 확실했다.
‘황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당연히 모를 것이다.
‘그럼 내가 끝까지 검증의 관에 대해서 함구했어야 했다는 이야기네.’
후회가 되었다. 애초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황제의 계단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가 막상 황자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무심코 그 이야기를 꺼내고 만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황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골든 배틀을 피 흘리지 않고 잘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무심코 넘어가고 말았는데 이렇게 되면 황자들을 트레저 분지로 모두 불러들인 것에 자신도 일조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럼 대공이라는 작자는 틀림없이 제국 정보 길드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겠군.’
그건 분명했다. 애초에 이곳에 대한 정보를 발설한 곳이 제국 정보 길드이니 말이다. 최소한 그들과 긴물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그린 일족은 왜 이곳으로 오게 된 겁니까?”
하룬의 질문에 로드를 비롯한 엘프들은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일이 있었소. 통합 로드가 새로 탄생한 후 로드 회의에서 안건이 하나 논의되었소. 우리 엘프들도 왕국을 세워 좁고 척박한 이 땅을 벗어나자는 것이었소. 사실 왕국을 건국하는 것이나 세상으로 나가자는 것에는 우리 일족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소.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우리가 세상에 나가 제일 먼저 할 일이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고 풍요로운 땅을 뺏자는 거였소.”
그럴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 테론 제국의 역사를 보면 인간들에게 풍요로운 땅을 빼앗기고 학살을 당했던 이종족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으로 처음 나가 할 일이 피를 흘리는 것이라니. 우리 그린 일족은 인간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소.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자는 그들의 주장은 많은 청장년 엘프들에게 호응을 받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극히 위험한 짓이오. 이 대지에 살아가는 엘프들을 다 해 봐야 오십만이 넘지 않고, 전사라고 해 봐야 이십만이 고작인데 과연 이 대륙의 인간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소. 인간들과는 달리 우리 엘프들의 성장은 매우 느리고 출산율도 낮은 편이오. 처음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건 안 될 일이오. 그래서 반대를 했더니 통합 로드는 조력자가 있으니 대륙의 북부만 손에 넣으면 된다고 하더이다. 하지만 우리 일족은 끝까지 인간들과의 무력 충돌을 운하지 않았기에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소. 그 후 다크 일족은 우리를 배신자로 몰아 위협했소. 원래 로드 회의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안건이 통과되지 않기 때문이지.”
“그래서 싸운 겁니까?”
그린 엘프와 다크 엘프 간에 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바리아로부터 들었다.
“휴우! 그렇소.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습격을 받았소.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습격한 다크 엘프들은 인간들에게 제공받은 무기들로 무장되어 있었고, 원래 전투력에 있어서는 그들 일족이 뛰어난 편이오. 수많은 희생자가 났고 우리 일족은 남은 힘을 최대한 끌어 모아 대규모 복수전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회유와 협박에 못 이긴 다른 종족들이 다크 일족의 편을 들게 되자 할 수 없이 몇 갈래로 헤어져 살 길을 찾기로 했소.”
그 이야기를 하는 그린 엘프 로드의 얼굴이 착잡했다.
“다크 일족은 우리 그린 일족을 철저하게 학살하기 시작했소. 절반은 스카이루프 산맥으로 피했고, 일부는 더 깊은 숲으로 숨어들었소. 또 우리는 이곳으로 숨어들었고. 그나마 원래 거주하던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 원로들과 전사장들이 목숨을 걸고 지상으로 나가 살아남은 일족들을 구해 이곳으로 피신하게 된 거요. 이제 우리 일족의 숫자는 전에 비해 사분의 일로 격감했소.”
로드의 탄식 섞인 말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제 엘프들을 통합했다고 생각한 다크 엘프는 전사 총동원령을 내렸소.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들과의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지. 그래서 마지막까지 지상에 남아 각 일족의 마을을 순회하며 다크 일족에 대항하는 전사들을 모으는 임무를 수행하던 바리아가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거라오.”
이제 모든 사정이 다 이해가 됐다.
‘젠장! 여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마음이 급해졌다. 곧 엘프들이 던전에 들어간 인간들은 물론이고 트레저 분지에 모인 인간들을 공격할 것이다. 그중에는 그와 친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르긴 해도 해란 자매도 이곳에 왔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원들을 비롯해 용병들을 분지 밖으로 빼돌린 조치가 현명한 것이었다. 비욘드를 하며 육체적인 부분도 많이 개발되었지만 육감이나 직관력도 엄청나게 발달한 덕분이었다.
‘빨리 비도지존의 유물 건을 마무리해야 해.’
생각 같아서는 이곳에서 며칠 보내며 특이한 이곳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그래, 얼마나 이곳에 머무를 거요?”
로드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만 쉬었다가 바로 떠나려고 합니다. 찾으려는 물건을 며칠 내에 찾지 못하면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밖의 상황이 심상치가 않네요.”
“알겠소. 이 옆에 따로 방이 있으니 그곳에서 쉬면 될 거요. 우리는 비상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소. 이대로 있을지 아니면다크 엘프들과 일전을 불사할지 결정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군.”
그럴 것이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숨어 살 수는 없었다. 비록 로드를 비롯한 대원로들은 쓸데없는 살육과 전쟁이 싫어 이곳으로 들어왔지만 뜨거운 피가 흐르는 젊은 엘프들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 하룬 님!”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바리아가 그를 불렀다. 뭔가 곤란한 말을 하려는 듯 뜸을 들인다.
“말씀하세요.”
“대가 말인데요. 하룬 대장께서도 정령사이니 저희들을 여기까지 안내해 준 대가로 정령석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바리아의 말에 하룬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넷이나 되는 정령을 데리고 있는 자신에게는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아이템이었다.
“다행입니다. 정령석이 인간들에게 필요한 물건인지 어떤지를 몰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인간들은 정령석을 특이한 보석류로 구분한다. 물론 다이아몬드나 미스릴처럼 귀중한 물건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공하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다.
다만 마나석과는 달리 일반인들이 몸에 오래 지니고 있으면 이로운 정령력이 미세하게 새어 나와 건강이나 미용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도 하고 그 색깔이 아름다워 사파이어나 비취와 같은 준보석보다는 더 가치가 있을 뿐이다.
바리아는 자신의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안에 든 눈알 크기의 정령석 다섯 개를 보여주고는 그것을 주었다.
‘완전히 대박이군.’
사실 바리아 일행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데 그리 많은 힘이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때 그걸 지켜보던 한 대원로의 눈이 하룬의 등에 있는 마법 배낭으로 향했다. 한눈에 그것이 꽤 높은 등급의 마법 배낭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하룬 대장, 혹시 식량이나 포션류가 충분합니까?”
하룬은 그가 물어보는 의도를 알았다. 이곳은 지하이니 부족한 것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신비하고 거대한 발광석의 존재로 인해 식물이 자라는 곳이긴 하지만 식량 부족은 만성적일 것이다.
자신이 쓰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기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하룬은 한동안 마법 배낭이나 아공간의 물건을 점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에겐 인간들이 귀히 여기는 물건들이 있소. 가능하다면 그 물건들과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바꾸었으면 좋겠소. 우리는 식량은 물론 각종 무기류나 방어구와 같은 물건들도 필요하오. 대장에게 필요치 않은 물건들을 모두 구입하고 싶소.”
이야기를 듣던 로드가 눈을 빛내며 제안했다.
이곳은 당분간 살기엔 별 부족함이 없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완비된 곳이 아니다. 부족한 물건들이 턱없이 많았다. 물론 실력이 뛰어난 원로들이나 전사들이 몰래 다크 일족의 눈을 피해 다른 일족과 거래를 하거나 그린 일족에 협조적인 마을에서 도움을 받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좋습니다. 서로 만족한다면 거래를 못 할 것도 없지요. 일단 남에게 보이지 않아야 할 물건들도 있으니 따로 확인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시오. 그럼 이 옆방을 쓰시오.”
바리아가 안내한 곳은 엄청나게 넓은 방이었다. 부족한 것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특별한 장식품이 거의 없는 방 안에는 나무로 만든 침상과 장식대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룬은 일단 마법 배낭을 내려놓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준비성이 투철한 티노가 준비해 준 것들도 많았고, 그가 직접 준비한 것들도 꽤 되었다.
밀이나 호밀, 보리 자루는 물론이고 적당히 말려 분말로 만든 야채와 버섯 그리고 고기들이 수십 자루나 되었다.
포션류도 꽤 많았다. 치료 포션은 넉넉해서 하급이 74병, 중급이 20병, 상급이 10병이나 되었다. 마나 포션도 하급이 46병, 중급이 30병, 상급이 10병이나 되었다.
헤니가 준비해 준 조제약도 꽤 많았다. 배앓이와 두통은 물론이고 지혈제와 각종 상처에 잘 듣는 외상 연고들이 거의 한 무더기나 되었다.
“가만! 아공간!”
하룬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공간을 오픈했다. 일전에 후크란 산맥에서 럼프 오크들과 조우했을 때 협곡에서 전멸당한 인간들로부터 얻었던 마법 배낭들이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하룬은 보물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배낭의 주둥이를 천천히 벌렸다.
“아싸!”
보급 담당 기사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마법 배낭 안에는 엄청난 식량과 각종 보급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마차 두 대분에 해당하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배낭 안에 있는 식량은 하룬의 마법 배낭에 있던 것보다 대여섯 배는 더 많았다.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면 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라 그 배낭만 풀어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넓은 방의 천장까지 거의 다 채워졌다.
하룬은 다섯 배낭을 꺼내 내용물을 확인했다.
희귀한 문양이 새겨진 마법 배낭은 그야말로 그 자체가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안에는 각종 포션류는 물론이고 잘 정련된 무기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은 다시 아공간으로 넣고 이번에는 자질구레한 아이템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직접 얻은 것들은 빼고 후크란에서 주운 것들을 꺼냈다.
각종 방어구와 무기류들이 조금 남아 있는 방의 빈 공간을 채웠다. 비록 등급은 떨어지는 무기류들이고 대부분 사용한 흔적이 있지만 상관없었다. 급한 것은 엘프지 자신이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대충 정리한 하룬은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이미 바리아와 로드를 비롯한 대원로들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물건이 얼마나 됩니까?”
“들어가서 보십시오.”
그들은 기대 어린 얼굴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오! 식량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니. 도대체 이게 몇 자루나 되는 거야.”
입이 떡 벌어져 다물지 못하는 엘프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그들은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다른 물건들도 살피기 시작했다.
“포션도 그렇지만 약초와 잘 조제한 약들도 많습니다.”
“이 무구들은 비록 등급도 낮고 사용하던 것이지만 잘 닦아 우리의 마법을 인챈트시키면 꽤 쓸 만한 것들이 될 것이오.”
언제 날 잡아서 아공간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엘프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식량이나 엘프들의 반응이 생각 이상이라서 뿌듯해진 하룬은 내심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보았다.
그때 상기된 얼굴의 로드가 다가와 그를 힘껏 안았다. 하룬은 사실 잘 몰랐지만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엘프 종족, 특히 로드쯤 되는 위치에서 이런 행동은 거의 볼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정말 고맙소! 하룬 대장은 바리아와 몇 전사들뿐 아니라 우리 그린 일족 전체의 은인이오. 사실 풍토병을 비롯한 병으로 고생하는 노약자들이 꽤 많지만 약재가 부족해서 애를 먹고 있었소. 만성적으로 부족한 식량도 그렇지만 특히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제대로 된 무기가 없어 막막했던 상황인데 이 모든 문제를 하룬 대장이 단박에 해결해 주었소.”
“도움이 된다니 저로서는 정말 다행입니다. 이곳에 들어왔던 일행들이 먹고 사용한 모든 보급품들과 무기를 제가 가지고 바리아 원로를 만났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평화를 사랑하는 그린 일족의 미래가 밝다는 증거겠지요.”
“맞소! 그대는 우리 그린 일족이 다크 일족을 몰아내고 평화를 되찾으라고 세계수가 우리에게 보내 준 인물일 것이오. 하하하!”
이제 로드뿐 아니라 다른 대원로들도 차례로 하룬을 안고 격정적인감사를 표시했다. 나이가 지긋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좀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의 진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판체 원로, 그것들을 가져오시오.”
“네, 로드.”
아까 하룬에게 거래를 요청했던 대원로가 바삐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금세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꽤 큰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보물이오. 열어보시오, 대장.”
하룬은 판체 원로에게 상자를 건네받았다. 내심 묵직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살짝 실망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화락!
상자를 연 순간 안에서 강렬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강렬한 보광이 한순간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몇 번 눈을 깜박거려 시력을 되찾은 하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상자의 반 정도에 차곡차곡 쌓인 미스릴 바였다. 그리고 나머지 반 정도를 채운 것은 귀한 돌들과 몇 개의 작은 유리병이었다.
“이건!”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미스릴 바라니!
“허허허! 그동안 우리 일족이 모은 보물들이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귀한 물건들이오.”
하룬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웃음 짓고 있던 로드의 말에 하룬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미스릴이 가루가 아니라 이렇게 막대 형태라니. 이런 것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미스릴은 너무나 귀한 마법 재료이자 보석이어서 이렇게 큰 막대 형태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주로 가루로, 마탑 상점에서 거래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보석 상점에서 콩알이나 고양이 눈알 크기로 거래되는 것이 전부였다.
잠시 미스릴 바를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던 하룬은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이것들은 가공한 것들보다 오히려 더 순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정령석과 마나석들이오. 그 안에는 원소석도 몇 개 있을 것이오. 정령석의 가치를 아는 것 같으니 좋은 선물이 될 거요.”
가공하지 않은 것이 가공한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룬은 로드의 말을 믿었다.
“맞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귀중한 물건들입니다.”
이제 하룬의 시선은 작은 유리병들로 향했다. 직접 꺼내 보니 다섯 개나 되었는데 그 용도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은 ‘천사의 눈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엘프 비전의 약재라오. 세계수의 수액과 일각수의 뿔 그리고 하프 정령의 힘이 합해져 만들어 낸 약으로 죽은 지 한 시간 안에 복용하면 즉시 살아날 수 있는 약이오.”
입이 쩍 벌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지만 로드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천사의 눈물 한 병만으로도 자신이 준 모든 물건과 바꾸어도 한참이나 모자랄 것이다.
“이런 귀중한 물건이 세상에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허허허! 우리 일족의 보물이오.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당대에는 재료가 있어도 천사의 눈물을 제조할 수가 없소.”
로드 딴에는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려는 것이지만 그 말을 듣자 하룬은 더욱더 부담스러웠다. 잠시 천사의 눈물을 바라보던 하룬이 상자 뚜껑을 슬며시 덮었다.
“이걸 다 받을 순 없습니다. 제가 내놓은 물건들은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열 배를 더 친다고 해도 너무 과합니다.”
사실 하룬은 아까 바리아가 의뢰의 대가로 정령석 다섯 개를 준 것도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정령석들과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그 품질이 천양지차지만 그래도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하룬을 바라보는 엘프들의 눈빛이 전에 비해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하룬의 태도가 기꺼웠던 것이다. 로드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거래란 파는 사람에게 맞는 가치가 아니라 살 사람에게 맞는 가치가 우선이오. 하룬 대장이 어떻게 생각하건 우리가 충분히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좋은 거래가 된 것이오. 이것은 비단 이번의 거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친구가 된 기념적인 증표가 될 테니 말이오. 이렇게 좋은 친구가 다섯 번의 목숨을 여벌로 가진다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손해를 보는 쪽에서 이렇게 말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리 자신이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지만 정말 엘프들로서는 엄청나게 밑지는 거래였다.
‘이건 거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구나. 이들은 나를 확실하게 친구, 아니 한 가족으로 받아들인 거야.’
잠시 고민하던 하룬은 상자를 받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대신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많이 해 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로드의 말대로 이 하룬과 돌풍 용병대는 이제 그린 일족을 친구로 대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소.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인간의 속담이 있다고 들었소. 우리 일족은 하룬 대장을 그런 친구라고 여기겠소.”
로드를 비롯한 대원로들과 바리아가 흡족한 웃음으로 하룬을 대했다. 하룬도 진한 웃음으로 그들에게 화답했다.
엘프 전사들을 불러 식량들과 물건들을 밖으로 옮기고 분배한 로드와 대원로들은 바리아와 함께 하룬을 배웅했다.
“다음에 올 때는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들과 무기류를 많이 가져오겠습니다.”
하룬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자신에게 기우는 거래라는 생각과 함께 식량 사정이 열악한 것으로 보이는 그린 엘프들의 처지가 안쓰러워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엘프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꺼내 놓은 것으로는 이 모든 인원이 몇 끼를 해결할 정도에 불과했다. 이왕 친구가 되었으니 특히 부족한 식량 정도는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래 주시오. 부탁하겠소.”
하룬의 진정을 느낀 로드와 대원로들은 그를 이렇게 빨리 보내는 것을 아쉬워하며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