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동행 (106/278)

《동행》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스터.

 로그아웃하자 하룬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과 캡슐이 수축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접속 해제와 거의 동시에 의식을 차린 덕분이지만 넓었던 공간이 좁아지는 것은 기분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분체는 좀 어때?”

 이 캡슐도 벨이고 그가 아끼던 분체도 벨이니 이름을 부르기엔 애매했다.

 -분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어쩌면 이번에는 캡슐인 본체와 완전히 분리된 벨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벨에게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분화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지가 걱정이었다.

 “필요한 것은 없어?”

 -당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체가 연구하던 바이오 사이보그의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 중에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 리스트를 출력해 놔. 이따가 유니온에 다녀올 테니.”

 -네, 마스터.

 하룬은 캡슐을 나와 지하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아즈만을 만나야 했다. 기지 전체를 총괄하는 아즈만이라 어디에서든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벨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셨습니까, 마스터.

 “응. 벨 상태는 어때?”

 -초기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예전 모습으로 분화하는 데 한 달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네 서브는 어때?”

 -역시 초기 분화를 시작했습니다.

 “벨처럼 100% 바이오체로 가능한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벨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뇌전으로 인해 생명의 근본이 되는 줄기 바이오 셀이 변이를 일으켜 DNA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각성을 한 마스터의 경우처럼 2중 나선 구조가 아니라 4중 나선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내 DNA 구조가 2중 나선 구조가 아니라 4중 나선 구조로 바뀌었다고? 언제?”

 -이번에 뇌전을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런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기작에 의해서인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각성이 일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마스터의 신체는 이번 각성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진화와 변이를 일으켰습니다. DNA 구조의 변화도 그중 하나인데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나선 구조가 바뀌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제게도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초고대 문명 시대를 열었던 지구인의 선조들 중에는 4중이나 6중 나선 구조를 가진 생명체가 있었다는 자료만이 있습니다.

 “호오! DNA 구조의 변화라.”

 배운 것이 별로 많지 않아 이렇게 유전공학적인 단어가 나오면 위축되고 대번에 식은땀이 난다. 하룬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감지한 아즈만이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확실한 것은 DNA 구조가 변화하면 그 후손에게 이어지면서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DNA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고도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이 도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야 좋은 일이다. 어쨌건 자신에게 좋은 일이니 자세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벨이 새롭게 탄생하면 그녀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좋아. 일단 그건 지금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니 넘어가고, 마그네틱 카를 지금 쓸 수 있겠어?”

 -네, 가능합니다. 이미 서브 컴퓨터가 마스터를 만나 바이오체로 변환했을 때 그 일을 담당할 새 컴퓨터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작업에서 필요한 것은 없나?”

 -많습니다. 서브가 관장하던 각종 용도의 사이보그들을 제작하는 데 상당한 광물과 합금이 필요합니다.

 “그럼 난 유니온에 좀 다녕로 테니 필요한 물품 목록을 뽑아 줘.”

 -네, 마스터.

 하룬은 서둘러 지하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없었다. 그 안에 생각했던 일들을 다 처리해야만 했다. 암시장도 들러야 하고 진수도 만나봐야 했다.

 돌아온 현실은 대낮이었다. 마그네틱 카를 타고 유니온에 있는 공장 주택으로 돌아온 하룬은 제일 먼저 진수부터 찾았다. 그는 게임에 접속해 있었는지 벨을 누르고 나서 한참 후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

 “여어! 하룬 대장, 어쩐 일이야?”

 태평하게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아직 대원들과 합류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형 보고 싶어서 왔지. 뭘 하는지 통 소식이 없어서 말이야.”

 “하하하! 지금 땅속 깊은 곳에 있거든. 희한하게 생긴 웜 새끼들을 사냥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일단 들어와.”

 안으로 들어가니 캡슐이 여섯 개나 있었다. 진수의 친구들이 모조리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 같았다.

 “친구 녀석들이야. 월세 받고 이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거든. 내가 소개시켜 줄게.”

 모두가 최상급 캡슐들인 것을 보면 진수가 친구들을 위해 제법 돈을 쓴 것 같았다. 늘 손해 보고 사는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런 친구가 자신에게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형. 암시장에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예요.”

 “그래? 안 그래도 내 친구 녀석들이 대장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도 아닌데. 하긴 녀석들이 나오면 널 귀찮게 할 테니. 쟤들도 내 백으로 돌풍 용병대에 들어오고 싶다고 난리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활짝 웃는 것을 보니 돌풍 용병대원이 된 자신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대장이 비욘드에서 NPC로 알려진 것을 알지만 말하진 않을 거야. 우리 돌풍이 신비해야 우리도 폼 나거든. 그래서 친구 놈들의 입에 도어 락을 채웠지.”

 숨길 것까지야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유저라는 사실을 밝힐 것도 없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로 판단하건대 진수의 말대로 나름 신비감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형도 지금 지하에 있다고요?”

 “응. 대충 던전과 가까운 지하 깊숙한 곳인데 이곳에 끝내주는 몬스터들이 있어. 생김새로 그렇고 그 능력도 희한하게 생긴 웜 새끼들을 상대하면 레벨을 올리고 있지. 비록 새끼지만 그 능력이 높아서 잡기는 힘들지만 워낙 경험치를 많이 주는 덕분에 벌써 90레벨을 돌파했어.”

 “희한하다고요?”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 물어보았다.

 “응. 새끼치고는 엄청나게 크고 흉측한 생김새도 그렇지만 마치 불 속에 들어간 듯 붉고 뜨거운 고치도 아주 희한해. 더구나 덜 자란 새끼인데도 가진 능력도 아주 대단해. 단단한 암반도 뚫을 수 있는 기괴하게 생긴 이빨은 강도가 강철 저리 가랄 정도고, 위험할 때는 입과 항문으로 체액을 내뿜는데 엄청난 강산성이라 닿는 것만으로도 바위가 녹을 정도야. 또 정말 급할 때는 화염까지 방사하는데 그 위력이 장난이 아니야. 처음엔 나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니까. 아직 새끼들이라 피부가 연약하고 신경절이나 뇌가 있는 머리를 잘라 내면 죽어 버리니까 살았지. 하여튼 엄청난 놈들이야. 네가 준 방어구와 포션들이 아니었으면 벌써 세 번은 돌아가셨을 거야.”

 어이가 없었다. 몰라도 이렇게 모르다니.

 “형! 그거 볼카웜이에요!”

 하룬의 말에 진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 볼카웜? 다크 엘프들이 던전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그 볼카웜?”

 진수는 비욘드 홈피를 통해 그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웜이 볼카웜의 새끼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유저들 중에 볼카웜을 상대하고 살아남은 것은 겨루가 유일했던 것이다.

 “그래요! 그놈이 얼마나 무서운 몬스터인데. 당장 밖으로 나와요. 새끼들을 잡고 있는 것을 알면 형이 위험하다고요.”

 “이, 이런! 큰일 날 뻔했잖아. 어쩐지 새끼치고는 엄청 세더라. 제길! 완전히 하르크 둥지 앞에 천막치고 자고 있었던 꼴이잖아.”

 이제야 진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볼카웜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는, 다크 엘프들이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과 무려 이백 명이나 되는 토벌대가 동원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왜 성체들이 안 나타난 거지? 내가 그동안 잡은 새끼들만 해도 열 마리가 넘는데.”

 하긴 그랬다. 볼카웜의 생태에 대해선 모르지만 새끼들을 위험하게 방치할 것 같지는 않은데, 진수가 새끼들을 잡고 있는 것을 성체들은 모르는 걸까?

 “아! 어쩌면 그럴 수도! 성체 한 마리를 죽였거든요. 지하에서 만난 엘프들 말이 그놈들이 복수심이 엄청나게 강하대요. 그래서 트레저 분지에 모인 인간들에게 잔뜩 신경을 쓰는 것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다. 에고! 네가 안 알려 주었으면 난 언젠가 놈들에게 잡아먹혔을 거야. 고맙다, 대장아.”

 그간 소식이 없어 들른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부활 장소를 사망한 곳 주변의 안전한 곳으로 설정해 놓은 터라 잘못하면 진수는 레벨이 1이 될 때까지 지하를 벗어나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볼카웜에게 무한 척살을 당할 뻔했다.

 “그래, 대장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설마 볼카웜을 직접 상대해 본 거야?”

 역시 진수는 그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룬은 그동안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똥물에 튀겨 죽일 새끼들!”

 진수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며 제국 정보 길드를 저주했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는 것은 자신도 여러 번 경험해 봤기에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음모가 있는 것 같아요. 자세한 것은 나도 그린 엘프족의 로드를 만나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요. 형은 이제 그만 지상으로 올라와서 대원들과 합류해 줘요. 해야 할 일이 많아요.”

 “무슨 일인데?”

 “응, 내 생각이지만 우리 대원들은 아마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만일 안 들어갔다면 내가 겨루라는 유저를 통해 연락을 해 두었으니 날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티노 부대장과 힘을 합쳐서 주변을 정밀하게 정찰해 줘요. 틀림없이 다크 엘프들이나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트레저 분지에 모인 사람들을 노릴 테니까.”

 비록 추측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추측이기도 했지만 아바타와 같이 각성한 후 갖게 된 육감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대원들을 붉은 모루 부족에 보내 방어구와 무기를 최대한 많이 준비해 달라고 해요. 대금은 내가 직접 방문해서 지불한다고 하면 될 거예요.”

 “알았다. 내 생각에도 뭔가 일이 크게 벌어지려는 게 틀림 없는 거 같다. 다른 건 더 없어?”

 “아! 그리고 돌풍과 동맹한 용병단과 세 길드의 인원들을 설득해서 트레저 분지 밖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그 안에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 것 같거든요. 붉은 모루 부족에 도움을 청하면 적당한 곳을 알려 줄 거예요. 어쩌면 드워프들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타루가 족장에게 다른 은신처를 알아보라고 전해 줘요.”

 “아니,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분지 근방의 지형은 내가 꿰고 있거든. 이삼천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적당한 곳이 몇 군데 있어.”

 “역시 형이다! 그럼 그렇게 해줘요.”

 하룬은 진수에게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이후로도 몇 가지를 더 당부하고는 그의 집을 나왔다.

 ‘누가 이 음모의 주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트레저 분지에 모인 사람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그건 확신이었다.

 배리어가 막아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햇살이 강한 낮 시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이사를 하는 바람에 암시장까지는 더욱 멀어졌지만 경지에 이른 메신저 스킬 덕분에 빠르게 날아가는 그의 몸이 먼지바람에 휩싸였다. 아마 누군가 그를 보았더라도 먼지 토네이도로 여겼을 것이다.

 암시장은 대낮의 열기로 축 늘어져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고 상인들도 낮잠을 자고나 졸고 있었다. 암시장의 피크는 사람들의 퇴근 이후라 지금은 막 가게를 열고 난 직후였다.

 대장간 작살도 조용했다. 하지만 화덕에 시뻘겋게 타는 숯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뒤늦은 점심이라도 먹는 것 같았다. 식사를 방해할까 봐 조금 망설이던 사이 안에서 바란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나왔다.

 “어! 하룬, 어쩐 일이야?”

 그는 이미 세 번이나 안면이 있었기에 하룬에게 알은체를 하며 그를 반겼다. 박살의 최고 최대 고객이라는 점을 빼더라도 하룬은 두 번이나 같이 하르크와 싸운 동료였다.

 “그냥 잠시 들렀어요.”

 “왜 안 들어오고?

 “식사하는 것 같아서…….”

 “이런! 참, 점심은 먹었니?”

 그 말을 듣고 보니 점심을 아직 먹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규칙적으로 식사를 해온 탓에 정직한 배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직 안 했구나. 우리도 막 먹으려던 참이었다. 같이 하자!”

 “네.”

 안으로 들어가자 바란이 보였다. 화들짝 놀라 통방울처럼 변한 그의 눈이 왠지 정겹다. 이들은 정말 순박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어쩐 일이야?”

 “하하! 지나다가 들렀대. 식사 안 했다니 바란이 밥 좀 퍼 줘.”

 “알았다. 어서 앉아, 하룬. 그래, 어떻게 지낸 거야?”

 바란은 무쇠 솥을 열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따듯한 밥을 커다란 그릇에 퍼서 하룬에게 내밀었다. 졸지에 식탁이 되어버린 테이블에는 몇 가지 즉석 반찬들과 함께 채소들과 캔에 담긴 가공 육류들이 보였다.

 “잘 지냈어요. 필요한 물품들도 있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물품들이 궁금해서 겸사겸사 들렀어요.”

 “그랬구나. 일단 지난번에 네가 준 목록에 있는 것들은 거의 다 구했어. 그런데 대부분 아우터 마을들에서 주문한 거라 옮기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요즘 들어 유니온의 보안 상태가 강화되는 바람에 밀반입하는 것이 무지 까다롭거든.”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배리어가 약해지는 것이야 이젠 비밀도 아니지만 보안 상태가 강해졌다는 말에 물어본 것이다.

 “최근 유니온과 50킬로미터 떨어진 북쪽 평야 지대에 꽤 많은 오르그가 결집하고 있나 봐. 그 수만 해도 수십만이 넘을 뿐 아니라 확장 기세가 엄청나서 유니온도 긴장하고 있는 거지. 이젠 가동이 가능한 파동포나 레이저포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거든.”

 “그렇군요. 그럼 차라리 우리 집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배달을 하면 어때요?”

 “다른 곳?”

 “네. 이 물건들의 원주문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직접 배달을 해줘요. 저도 그곳에 수시로 들르니까 내가 없더라도 내 이름을 말하면 될 거예요.”

 이들은 하룬이 이런 물건들을 직접 필요로 한다는 것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굳이 알릴 필요도 없었고, 알아보아야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여 유니온 방위군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줄줄이 문제였다.

 “그럼 그곳이 배리어 밖이야?”

 “네. 위치를 알려 드릴게요.”

 좌표를 들은 바란이 머릿속으로 따져 보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

 “여기라면 문제없어. 변종 생물들도 거의 없는 곳이고, 길도 좋은 편이야. 운임 비용이 확 줄었어. 그럼 앞으로 이곳으로 모든 물건들을 납품하면 되는 거야?”

 “네. 잘은 모르지만 그곳에서 직접 쓰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같아요.”

 “오케이! 그럼 다른 필요한 물건들은?”

 “여기요.”

 바란은 하룬이 건넨 목록을 보고는 동료에게 넘겼다.

 “대부분 구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야. 이번에는 기계류가 없고 거의 다 재료들이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다행이네요. 형들 고생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냐? 다 돈 받고 하는 건데. 요즘 유니온이 뭘 하려는지 예산을 풀지 않아 다른 대장간들이 망치를 놓고 놀고 있는데 우리는 너 때문에 이런 호황을 누리고 있어서 오히려 얼마나 고마운지 아니?”

 “그래요?”

 “그래. 엄청 불황이다. 요즘 암시장 경기가 최악이야. 소문으로는 군부 쪽에서 대규모 예산 집행권을 가져갔다는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다들 긴장하고 있어.”

 유니온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꼭 비욘드의 상황처럼 뭔가 엄청난 일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룬은 차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참 들은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란과 세란을 못 본 것이 조금 서운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그녀들이 불편했던 것이다.

 기지로 돌아온 하룬은 벨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 후 비욘드에 접속했다. 아직 시간이 꽤 있었지만 그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동굴 근처에서 발광석을 들고 생각에 빠진 다이리스를 만났다.

 “어머! 하룬 대장님, 일찍 돌아오셨네요.”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다이리스는 반갑게 하룬을 맞았다.

 “네. 대충 할 일이 끝나서 일찍 왔습니다.”

 “다행이에요. 우리도 거의 준비가 됐거든요.”

 그렇게 지쳐 있었는데 이틀 만에 기력을 되찾았다니 과연 전사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엘프 전사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했다. 확실히 다크 엘프들과는 달리 표정이 풍부하고 감성이 밝은 그린 일족이었다. 이종족인 인간에게도 다크 일족처럼 배타적이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이젠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셨군요.”

 “네, 하룬 대장 덕분입니다.”

 바리아를 비롯해 엘프 전사들의 얼굴이 밝았다. 영양가 있는 식사와 더불어 충분한 휴식을 취하자 굶어서 기력이 떨어진 것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당장 출발할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동파 통신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난 터라 그레이브 시티에서 우리를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진동파 통신요?”

 이 고요의 땅은 마나의 유동이 불안해서 광연 마법이나 마법 통신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 하룬으로서는 통신이라는 이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미리 약속한 시간에 정해진 신호에 따라 땅이나 벽을 두드려서 통신을 하는 걸 말합니다. 범위는 10킬로미터가 한계이고 상당한 주의력과 기술 그리고 청각 능력이 필요하지만 마나의 유동이 불규칙해 마나 통신을 할 수 없는 이곳에서는 꽤 유용한 기술입니다.”

 “그런 게 있었군요. 그럼 거리도 알 수 있는 겁니까?”

 “아니요. 아주 가깝다면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이 분지의 지반 구조가 볼카웜 때문에 생겨난 암로들이 많아서 가능한 방법입니다. 게다가 통신이라고는 해도 단지 간단한 내용을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지요.”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그 정도만 해도 꽤 도움이 되는 통신이다. 어쩌면 아주 예전에 썼다는 모르스 신호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무사하다는 통신을 보내기는 했지만 수신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다행한 것은 볼카웜들이 지면 가까운 곳으로 몰리는 바람에 우리의 안전이 보다 높아졌다는 거지요.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마 볼카웜들은 복수를 위해 지면의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그 피해가 얼마나 될는지 정말 걱정이었다.

 “그럼 빨리 출발하지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길은 어디로 잡을지……?”

 “음.”

 지금 엘프들은 지하에 들어와 헤맨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터라 방향감각은 물론 거리감각도 거의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하룬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곳은 드워프들이 조사한 곳보다 더 깊은 지하였던 것이다.

 ‘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표는 있었다. 진수가 볼카웜 새끼들이 있는 곳을 설명해 주었는데 그곳 근처라면 열천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태생적으로 불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일정한 시기에 열천을 찾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열천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은 있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하룬의 말에 바리아를 비롯한 엘프들이 화색을 띠었다. 그들로서는 전혀 방향을 감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근처를 뒤지다가 없으면 새끼들을 모조리 없애 버려야지. 그 근처엔 틀림없이 볼카웜의 알들이 쌓인 방도 있을 테니 거기까지 없애 버리자.’

 하룬은 이참에 기회가 닿는다면 볼카웜이란 몬스터를 말살할 작정이었다. 볼카웜도 인간을 비롯한 이종족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이니 먼 후대를 위해서라도 그게 좋을 것이다.

 하룬과 엘프 열둘은 곧 더 깊은 지하로 뚫린 통로에 들어섰다.

 -라이피 소환!

 하룬은 아래로 뚫린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라이피를 소환했다.

 -오랜만이네. 이곳은 내겐 너무 편안한 곳이니 자주 불러 줘. 친구의 현재 능력이라면 계속 소환 상태를 유지해도 될 거야.

 -알았어, 그렇게 하지. 그런데 열기를 좀 감지할 수 있겠어?

 -열기라면 불 속성의 마나를 말하는 건가? 그건 한참 밑으로 더 내려가야 하는데.

 -응. 열천을 찾아야 하거든. 뜨거운 물 말이야.

 -그런 거라면 나보다는 나이아가 더 잘 찾을 거야. 아니지. 아니 어쩌면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 나이아는 불 속성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가? 둘이 힘을 합하면 어때?

 -그럼 가능하지. 근데 우리 둘을 동시에 소환해도 될까?

 -한번 해 보려고. 힘들면 나이아는 돌려보내지, 뭐.

 -좋아. 나도 물질계에서는 나이아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어.

 녀석의 말을 들어 보면 정령계와 물질계에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궁금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룬은 바로 나이아를 소환했다. 순간 정령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령을 복수로 소환하는 데는 각각의 정령을 소환하는 것의 1.5배에 해당하는 정령력이 소모됩니다.

 역시나 안내음이 들려왔다. 이럴 때는 안내음이 편리하다.

 -저 왔어요, 하룬.

 -어서 와!

 하늘거리는 워터 드레스를 입은 나이아의 자태는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기쁜 듯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마음이 진탕될 정도이니 말이다.

 -인사해, 라이피야.

 두 정령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손을 흔들었다. 생각보다 미적지근한 첫 만남이었지만 두 정령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둘이 열천을 좀 감지해 줘. 아, 그곳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을 거야. 몇천에 해당하는 엘프들이 살고 있다니 규모가 제법 클 거야.

 -알았어요.

 -알았어, 친구.

 둘은 가까이 붙어서 대화를나누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다시 만나는 것을 보니 의견을 교환하는 것 같았다.

 “호, 혹시 정령입니까?”

 하룬이 통로 안으로 들어선 후 한동안 움직이지 않자 그를 따라 멈추었던 엘프들이 동요했다. 그들 역시 정령의 향기를 맡은 것 같았다. 바리아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대지의 정령과 물의 정ㄹ영을 소환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 속성의 정령과는 친구가 될 기회가 없어 열천을 찾는 것이 쉽지 않군요.”

 “대지의 정령과 물의 정령을 동시에 소환했다고요?”

 “네.”

 하룬의 대답에 바리아와 엘프들은 질린 얼굴로 그를 괴물 쳐다보듯 보았지만 하룬은 다른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약 천 걸음 정도 서북쪽으로 내려가면 비슷한 장소가 나올 거예요.

 -우리 둘의 판단이긴 하지만 확실하진 않아, 친구.

 -둘 다 고마워.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이 친구들이 좀 놀란 것 같으니 일단 돌아가. 나중에 부를겡.

 -호호, 알았어요.

 -귀찮은 족속들이군. 오랜만에 친구와 진한 대지의 향기를 즐기고 싶었는데. 쳇!

 나이아와 라이피가 돌아간 순간 눈을 부릅뜬 바리아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당신 정말 인간입니까?”

 “네에?”

 너무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정령을, 그것도 둘이나 동시에 부른단 말입니까? 정령의 향기로 보아 최소 중급은 넘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큰 문제라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요. 같은 속성이라면 몰라도 전혀 다른 속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우리 그린 일족의 원로들도 중급 정령 둘을 동시에 불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요.”

 다이리스의 말이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하룬으로서는 그들이 경악하는 것이 우스웠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할 일도 아니었다.

 “난 가능하던데. 일단 방향은 알았으니 출발합시다.”

 대답은 없었다. 아직도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룬이 열 걸음 정도 걸었을 때 다급하게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 이해를 못 하면 할 수 없는 일이고. 내가 정령 마법을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하룬은 방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통로에 신경을 쓰며 걸었다. 곧장 그 방향으로 가는 게 최선이지만 통로는 그렇지 않으니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엘프들을 너무 놀라게 한 것일까? 한동안 엘프들은 하룬의 곁으로 다가오지도, 이야기를 걸지도 않았다. 어쩌면 하룬의 정체에 대해서 고심하고 잇을지도 몰랐다. 혹시 그레이브 시티로 데려가는 것이 일족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을지 말이다.

 “정령사였던 겁니까?”

 한참이 지난 후 옆으로 다가온 바리아의 질문이었다.

 “네, 일단은. 하지만 정령들과는 친구입니다.”

 “검을 차고 있어 검사인 줄 알았습니다. 정령사라는 것도 놀라운데 정령과 친구라니 더욱 대단하군요. 엘프들도 정령과 친구로 지내는 자들은 거의 없는데.”

 “그런가요?”

 “네. 어리고 순수한 엘프들이 아니면 정령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엘프 종족 중에서도 존경받는 하이 엘프 일족이 아니고서는 그런 관계를 가진 이가 거의 없어 많이 놀랐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그레이브 시티를 찾아가는 진짜 목적이 뭡니까?”

 그의 본심이 나왔다. 그렇게 묻는 바리아의 얼굴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그레이브 시티는 당신들이 찾아 달라고 부탁한 곳입니다. 제가 가려는 곳이 아니고요.”

 “아! 그랬지요. 순간 오해했습니다.”

 바리아는 그제야 얼굴을 풀었다. 막 정신을 차린 직후에 한 이야기라 자신이 직접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 특별한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뭐죠?”

 어느 틈에 따라붙었는지 다이리스가 둘의 어깨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다른 전사들과는 달리 꽤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다이리스의 행동에 바리아는 살짝 눈치만 주었을 뿐이다.

 “아주 특별한 비수랍니다. 저와는 인연이 있는 물건인데 약 천 년 전쯤에 이곳으로 사라진 어떤 분이 소지하고 있었지요.”

 “그래요? 천 년 전이라. 그때까지는 검증의 관에 도전하는 인간들이 가끔 있기는 했는데…….”

 바리아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그 오래전 일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다른 엘프들도 긴장을 풀었다. 하룬이 최소한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이동한 하룬이 휴식을 위해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때마침 두 개의 통로가 연결되는 지점이었다.

 드드드.

 미세하지만 벽과 바닥이 울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하룬은 급하게 라이피를 소환했다.

 -라이피, 나와!

 순간 라이피가 소환되었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상황을 감지했다.

 -볼카웜이란 괴물이 이리로 오고 있어. 동남쪽에서 이쪽으로 곧바로 오고 있어.

 “준비해요! 볼카웜이에요!”

 하룬이 소리를 치자 엘프들이 활이며 검을 빼 들고 그가 주시하는 통로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전에 볼카웜을 상대했던 경험으로 보면 지금 놈과는 약 200미터 떨어져 있지만 속도를 감안하면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정령 마법을 쓸 수 있습니까?”

 “네, 저를 포함해서 셋이 가능합니다.”

 바리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투에 임한 하룬에게서는 항거할 수 없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나와 저도 모르게 군기가 든 바리아와 엘프 전사들이었다.

 “나머지는 저 옆 통로에 숨고, 셋은 내가 신호하면 어스 월을 펼치세요.”

 “어스 월요?”

 엘프들의 정령 마법은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설명을 해야 했다.

 “놈이 지척에 도달한 순간 타이밍을 맞추어 이 앞에 흙벽을 세우는 겁니다.”

 “하지만 대지의 정령은 저밖에는 부릴 수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필요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동료들을 위해 최고의 방어 수단을 펼치세요.”

 “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전사들은 다른 통로로 이동했고 이제 통로 앞은 하룬과 바리아 단둘이 막아서고 있었다. 하룬은 쉬는 동안 생각한 것이 있었다.

 ‘놈의 이빨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어디 제대로 한번 당해 봐라!’

 하룬은 연속해서 세 정령을 모두 소환했다.

 -위신느, 나와서 바람 방패를 최대한 크게 만들어 줘.

 -…….

 -나이아, 아이스 월을 부탁해.

 그것으로도 불안하다.

 -라이피, 최대한 두꺼운 벽을 부탁해.

 “지금이닷!”

 정령들에게 의지를 전한 순간 하룬이 바리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대지의 정령이여, 계의 언약으로 부탁하건대 대지의 벽을 세워 주시오!”

 꽈앙! 꽝! 꽈앙!

 바리아의 주문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전방으로부터 굉음이 연속해서 터졌다. 언제 생긴 것인지 크고 두터운 바람의 방패와 얼음벽 그리고 흙벽이 생겨났고, 그것들이 터져나간 것이다. 바리아가 소환한 대지 속성의 중급 정령이 만들어낸 흙벽까지 부서졌다.

 위이잉!

 끄르르!

 기이하고 끔찍한 피어와 함께 맹렬하게 돌아가는 볼카웜의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빨이 하룬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주둥이 곳곳에 틈이 벌어지고 하얀 체액이 나오는 것을 보니 놈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위신느, 놈의 발을 붙잡아.”

 -…….

 “나이아, 놈을 통째로 얼려 버려.”

 -…….

 “라이피, 소일 스피어.”

 연속해서 터져 나오는 하룬의 명령에 세 정령이 빠르게 움직였다.

 으드득!

 몸을 수축시켜 이동하려던 볼카웜의 몸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삽시간의 놈의 몸을 덮었던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다.

 끄르륵! 크륵!

 벌어져 있던 아가리 사이로 하얀 체액이 흘러나왔다.

 ‘됐다! 효과가 있어.’

 -위신느. 놈을 계속 붙잡고 있어.

 -…….

 -나이아, 계속 놈을 얼려.

 -…….

 -라이피, 내 정령력이 다할 때까지 소일 스피어로 놈을 공격해.

 세 정령에게 계속 공격을 명한 후 하룬은 본 소드를 빼 들었다. 촉수를 잘라 버려야 했다. 연속된 충격으로 놈의 촉수는 축 늘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위급한 상황을 인지한 듯 조금씩 꿈틀거리며 앞을 향해 일어서고 있었다.

 마나를 끌어 올린 본 소드의 날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나가 주입된 날은 눈이 멀 정도의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싸악!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힘겹게 허공을 부유하던 촉수들은 단숨에 잘려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촉수들의 끝은 충격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이제 됐다!’

 놈의 유일한 감각 기관인 촉수를 없앴으니 이제는 승산이 있다. 하룬은 지난번의 경험으로 놈의 주둥이 주변이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볼카웜은 자신을 속박하는 위신느와 나이아의 힘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더욱이 라이피가 벽을 통해 동체에 계속해서 찌르고 있는 소일 스피어로 인해 상당히 심한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타앗!”

 하룬은 기합성과 함께 놈의 주둥이를 공격했다. 계속되는 정령들의 동체 공격에 몸부림치던 볼카웜은 하룬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푸앗!

 본 소드에 찔린 주둥이가 걸레가 되며 체액을 분수처럼 쏟아 냈다. 하룬은 체액을 피해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들며 다른 곳을 찔렀다.

 푸욱!

 기분 좋은 파육음과 함께 깊이 박힌 본 소드를 손목을 비틀어 돌렸다. 놈의 상처 부위가 찍 벌어지며 다시 하얀 체액이 앞으로 솟구쳤다.

 끄러어억! 끄러어억!

 볼카웜은 괴기한 비명을 지르며 맹렬하게 주둥이를 돌려 무시무시한 이빨을 회전시켜 봤지만 하룬의 검은 얄밉게도 순간적인 틈을 파고들었다. 촉수가 사라진 이상 놈은 애벌레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머리통을 가진 만큼 생명력도 질겨 주둥이를 비롯한 얼굴 부위가 걸레처럼 변했지만 놈은 쉽게 죽지 않았다.

 “죽엇!”

 하룬은 계속해서 검을 찌르고 손목을 돌려 상처 부위를 깊게 도려냈다. 이빨과 연결된 살점은 모두 찢어졌고 더 이상 체액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놈은 죽어갔다. 여전히 주기적으로 몸을 꿈틀거리고는 있지만 놈의 요동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룬, 이젠 더 이상 힘이 없어요.

 -나도, 하룬. 키스도 못 할 거 같아.

 -난 조금 여유가 있지만 힘이 들어.

 “알았어. 모두 수고했어! 나중에 좋은 것 줄게.”

 하룬은 세 정령을 돌려보냈다.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을 때까지 소환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역시 한 번에 셋을 모두 소환하는 것은 자신의 지금 능력으로도 힘들었다.

 “서, 설마…… 셋이나 불러낸 겁니까?”

 단 한 번 정령 마법을 펼친 것만으로도 힘이 소진되어 바닥에 앉아 있던 바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왠지 불안했던 것이다. 전에도 다 죽은 것 같은 상태에서 엄청난 화염을 방사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것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피햇!”

 역시나 놈의 아가리에서 강렬한 열기기 느껴졌다. 하룬은 경고를 듣고도 놀란 나머지 꼼짝도 못 하고 서 있던 바리아의 몸을 붙잡고, 엘프들이 몸을 드러내 놓고 있던 다른 통로로 뛰어들었다.

 화르르.

 엄청난 화염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완전히 드러내고 구경하고 있던 엘프들은 돌진한 하룬 때문에 모두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쿠당탕!

 강한 힘 때문에 밀려 넘어졌던 엘프들이 약한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며 아직도 계속 통로를 가득 채운 화염을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끔찍한 열기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강렬한 열기로 인해 타 버린 듯 모발에서 탄내가 났다.

 부르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공포에 질려 세차게 멈을 떨었다. 저 화염 속에 있었다면 뼈도 남기지 못하고 다 타 버렸을 것이다.

 화염이 모두 사라진 것은 3분이 넘게 지난 후였다.

 “휴우, 엄청난 화염이군. 드래곤도 아닌 놈이 이런 브레스라니!”

 하룬은 혀를 차며 통로를 나왔다.

 “이런!”

 그새 볼카웜이 보이지 않았다. 도망친 것이다. 통로에는 놈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누렇고 허연 체액들이 벽과 바닥을 녹이는 가운데 심한 악취가 나고 있었다.

 “모두 천천히 날 따라와요.”

 하룬은 놈을 끛장내기 위해 아직도 느껴지는 진동을 따라 몸을 날렸다.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펼친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어둠이 차 있는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휴우!”

 “허어!”

 하룬이 사라진 통로를 보던 엘프들이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의 눈은 광채를 잃었고, 몸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그는 정말 인간일까요? 혹시 위대한 존재는 아니겠지요?”

 다이리스의 말에 바리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이내 제 크기로 돌아왔다.

 “위대한 존재가 사라진 지 벌써 수천 년이 지났다. 게다가 위대한 존재가 정령을 친구로 대한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틀림없이 인간이야.”

 “인간이 원래 저렇게 강한 존재였나요?”

 “글쎄다. 하지만 저런 인간들이 많다면 세상에 나갈 다크 일족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이 멸족당하고 말 거란 것은 확실하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바리아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체력이 약해진 것에 더해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볼카웜을 혼자 상대하는 인간이라니! 이건 너무하잖아!’

 비록 하룬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벌써 그 모습이 사라진 상태지만 볼카웜이 남긴 흔적이 너무 선명해서 뒤를 쫓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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