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루의 사정》
겨루는 거의 반나절이 더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으으음.”
겨루의 신음성이 들리자 마나 플로를 운행하던 하룬이 눈을 떴다.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안광이 잠시 번득이더니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룬은 바싹 마른 겨루의 입술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고 그의 곁으로 갔다.
“겨루, 정신이 들어요?”
“누, 누구?”
“나, 하룬입니다.”
“대, 대장이군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겁니까? 아악! 내 얼굴! 내 얼굴이 어떻게 된 겁니까?”
겨루는 얼굴 반쪽이 재생되는 과정 때문에 발생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하룬은 자신이 아무런 빛도 없는 곳에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까? 볼카웜의 체액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얼굴 한쪽이 녹아 버려 정령을 소환해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곳으로 와서 치료 포션을 바르고 먹였습니다. 얼굴에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포션 때문에 그럴 겁니다.”
포션을 써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겨루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렇군요.”
겨루는 이제야 어찌 된 것인지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겨루의 말을 통해 자신이 빛 하나 없는 암흑 속에서도 모든 사물을 볼 수 잇다는 것을 확인한 하룬은 그를 위해 발광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기……는 어딥니까, 대장?”
“다급한 상황ㅇ ㅣ생겨서 대지의 정령을 소환해 피신했습니다. 나도 상처를 입었거든요.”
겨루가 비록 동맹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굳이 모든 상황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서 짧게 설명했다.
“감사합니다, 대장. 대장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겨루는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했다. 아직도 얼굴 조직이 재생되는 엄청난 고통이 있을 텐데도 불편한 몸으로 큰절까지 하는 것이다.
하룬은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가 신경을 꽤 쓴 것은 사실이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유저에게 너무 공을 들인다는 생각도 했을 정도였다.
“우리 둘 다 운이 좋았습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던 하룬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유저들은 죽는 것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NPC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20%의 능력치 다운은 고레벨의 유저일수록 엄청나게 신경을 쓴다. 하지만 이 정도로 과하게 인사할 일은 아니다.
“내가 알기론 이방인들은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고 하던데. 너무 그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룬의 말에 겨루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전 이방인이기는 하지만 다른 이방인들과는 다릅니다. 이곳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습니다.”
‘옹! 이게 무슨 소리?’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기에 하룬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겁니까?”
하룬의 물음에 겨루는 다소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이야기하려면 깁니다. 대장님은 이해할 수 없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더욱 궁금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일단 뭘 좀 먹어야겠군.”
생각해 보니 배가 고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날 정도였다. 하룬은 아공간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찾았다. 곡물 가루였다. 혹시 몰라 넣어 둔 물주머니가 있어 굳이 나이아를 소환할 필요는 없었다. 곡물 가루를 물에 개어 묽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식사는 지상으로 나가서 할 참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겨루는 제법 많은 양을 먹었다. 편한 유동식으로 요기를 하자 그의 얼굴이 이전보다 많이 편해졌다. 비록 상급 치료 포션이라지만 고통까지는 어쩔 수 없어 그는 아직도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정신을 차린 이후에도 계속 오만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밖의 사정이 궁금했지만 겨루는 이제 갓 정신을 차리고 난후여서 조금 더 휴식을 취해야 했다. 아직 고통이 심한 상태였고, 치료할 부위들도 많았다, 겨루는 등에 메었던 배낭에서 각종 약들을 꺼내 묵묵히 상처를 돌보았다.
하룬이 배낭에서 꺼낸 분대를 내밀자 붕대 감기 스킬을 가졌는지 체열에 녹아버린 부위에 망설임 없이 붕대를 감는 것이 꽤 익숙해 보였다.
“대장님에게 신세만 지는군요.”
“우린 같은 동맹이니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방인치고는 실력이 좋던데요. 우리 대원에게 들은 바로는 이방인들 중 가장 실력이 좋은 이도 이제 겨우 익스퍼트에 진입했을 뿐이라고 하던데요.”
들은 것처럼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다. 유저들 중 실력 순으로 상위 50위 안에 드느 ㄴ슈퍼 랭커도 이제 막 초급 익스퍼트 혹은 4서클 마법사가 된 상황이다. 당연히 익스퍼트 중급인 겨루의 존재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버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던 것이다.
그 소리에 잠시 망설리던 겨루가 입을 열었다.
“네, 사연이 좀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베타테스터였거든요.”
“베타테스터?”
비욘드는 베타테스트를 하지 않고 바로 서비스를 했다고 알려졌다. 그렇기에 하룬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굳이 설명을 하자면…… 전 이곳 세상에 다른 이방인들보다 먼저 들어와 이것저것을 시험해 봤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이방인들이 이곳 세상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신탁의 선발대였던 거죠.”
“아!”
하룬이 이해한 기색이자 겨루는 말을 이었다.
“저를 비롯해서 약 오백 명 정도가 이곳 세상에 1년 정도 일찍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신들이 우리 능력을 리셋하지 않았거든요. 수고의 대가로요. 대신 우리는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로 서약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숫자도 무려 오백이나 된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알려진 것보다 더한 강자들이 오백 명이나 그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유저이기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긴 했지만 겨루의 실력이 익스퍼트 중급이니 이런 경우가 아니면 말이 되질 않았다.
“레벨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레벨까지 아십니까? 하하! 하긴 돌풍 용병대의 대원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으니 어쩌면 당연히 아시겠군요. 전 레벨 138의 검사입니다. 이곳 기준으로는 익스퍼트 중급에 해당합니다. 모르긴 해도 이방인들 중에는 레벨이 가장 높을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겨루의 말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1년 먼저 게임을 시작했으니 어쩌면 그 레벨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비욘드에 온 이방인들을 생각하면 달랐다. 소드 유저 상급까지는 빠르게 올라갈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NPC들과의 밸런스를 생각해서 레벨 업 속도가 극악이 되는 것이다. 이전까지 레벨당 필요한 경험치가 두 배씩 올라간다면 80을 전후해서는 다섯 배씩 올라가는 것이다.
“대단하군. 현실의 직업이 뭡니까?”
“이곳의 전사 혹은 기사에 해당하는 군인이란 신분이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럼 지금은 아니란 말이군.”
“네. 방위군에서 특수군으로 복무하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전역을 했습니다. 방위군 병원에서 6개월을 보낸 후 최종적으로 부대에 복귀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고 강제 전역을 한 거지요. 하반신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전역 후에는 집에서 게임이나 하는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세계로 건너오는 프로젝트의 개발 단계에서 기초 실험에 참여했던 인연으로 비욘드의 베타테스터가 되었고, 그 이후에는 군 시절부터 오랫동안 알아 왔던 친구 발트랑의 부탁으로 길드에 영입되었습니다.”
그럴 것이다, 타고난 신체 조건과 엄청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전사로 양성된 특수군의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레벨 업은 힘들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발트랑과 친구라니. 거기에 그 역시 특수군이란 사실이 놀라웠다.
“혹시 USSA?
“헉! 그것까지 아십니까?”
겨루는 USSA의 존재를 아는 하룬에게 더욱 놀랐다. 다른 게임과는 차원이 다른 비욘드에서는 NPC들이 자신들과 거의 동일한 지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방인의 세계를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나도 알 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미소 지은 하룬을 보며 어느 틈에 놀란 것을 극복한 겨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에 대해서는 발트랑에게 꽤 많이 들었다. NPC로 치부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열린 사고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군요. 돌풍 용병대의 손길이 현실까지 뻗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발트랑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까지 파악했다면 발트랑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그의 정체는 뭘까?
“그럼 아까 말한 것은 동화율이 높아서입니까 아니면 캡슐에 무슨 문제라도?”
게임에서 사망하면 현실에서 사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묻는 것인지 겨루는 금방 알아들었다.
“허억! 그걸 어떻게?”
하룬의 물음에 겨루는 뛸 듯이 놀랐다.
잠시 놀란 눈으로 아무 말 없이 하룬을 바라보던 겨루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탄했습니다. 다른 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상세한 점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는 하룬이 자신과 같은 이방인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워낙 그렇게 알려지기도 했지만 하룬의 실력은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내린 착각이었다. 겨루는 자신이 오백 명의 베타테스터들 중에서도 수위에 속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하룬이 NPC라는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어쩌다 특수군에 들어가게 된 겁니까?”
사실 궁금했다. 외관으로 보면 겨루의 나이는 이십대 초반에 불과했다. 자신이 알기론 특수군은 어린 나이에 신체적 우월성을 인정받아 거의 강제로 들어간다.
그런데 정말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전 고아였습니다.”
고아라는 사실은 그리 희소한 것이 아니다. 그 주변에도 고아들은 많았다. 특별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E와F 구역의 휴먼들 중에는 아이를 낳고 병원에 맡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아이까지 키울 형편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직업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왜 강제적인 불임이나 피임 혹은 중절과 같은 정책을 취하지 않는지는 몰라도 하룬이 예전 거리를 떠돌 때 만났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런 경우로 발생하는 고아들이었다.
지금생각하면 혹시 배리어가 파괴될 경우를 대비해서 인구를 늘릴 생각이거나 혹은 능력자를 찾기 위해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고아들의 양육을 위해 유니온이 지불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룬이 더욱 놀란 것은 다음에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부모의 존재를 아예 찾을 수 없는 인공수정체였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겨루가 자신과 같이 갓 성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겉모습을 보면 최소한 이십 대 중ㅁ반으로 보였기에 더욱 놀랐다.
‘하긴 나도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이지.’
그럼 도대체 특수군에는 언제 들어갔다는 이야기인지 정말 궁금했다. 궁금해 하는 하룬의 눈빛을 본 겨루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하! 오늘은 좀 이상하군요. 전 원래 남들에게 제 사정이나 개인적인 생각을 거의 말하지 않는 성격인데 오늘 이 순간에는 대장에게 발트랑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모두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겨루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전 어릴 때부터 발육이 빠르고 유달리 활동적인 성향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부양 가정을 세 곳이나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들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부산하고 귀찮은 아이였던 것이지요.”
인공 수정체들은 어린 시절이 대개 비슷하다. 어찌 된 것인지 대부분 부양 가정에 적응을 못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열 살이 되던 해에 제 잠재능력이 발현되었습니다. 일반인들에 비해 월등한 체력과 강한 적응력 그리고 공격성을 보여 테스트에서 만점을 받앗습니다. 그런 결과 때문에 전 어린 나이에 특수군 훈련소에 입소하게 됐습니다.”
특수군 훈련소에는 그 또래의 아이들이 꽤 많았다. 모두 테스트를 통해 선발된 아이들이었는데 다들 놀라운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겨루는 부양가정이나 보육원보다는 항상 몸을 움직여야만 하는 훈련소가 좋았다. 그는 한 자세로 앉아서 뭔가를 배우는 것보다는 부단히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남들이 싫어하는 체력 훈련은 쉬웠다. 그는 사격, 격파, 격투는 물론 침투, 잠입, 저격과 같은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15세가 되던 해에 결국 특수군이 되었다. 어린 나이지만 특수군은 능력을 우선하는 부대이다 보니 그와 같이 어리지만 놀라운 신체적 능력을 가진 병사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주요한 임무는 오르그와 하르크의 동향 파악 등 배리어 밖에서 이루어졌고, 그는 그동안 훌륭하게 그 임무를 수행해 왔다.
“어느 날 특수 임무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한 저는 약해진 배리어를 뚫고 유니온에 난입한 두 마리의 하르크를 상대하는 특수 임무를 맡았는데, 그걸 수행하면서 좀 심하게 다쳤습니다.”
하룬은 굳이 부상의 정도까지 묻지는 않았지만 겨루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사지 중 세 곳이 부러졌고, 근육들 중 상당 부분이 파열 되었습니다. 특히 척추 신경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저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지요.”
그 정도라면 평생 정상적인 생활은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부상을 당한 후 유니온이 저에게 해 준 것은 훈장 하나와 얼마 안 되는 퇴직금과 연금 그리고 D구역에 있는 작은 유공자 아파트가 전부였습니다. 그동안 받은 주급은 거의 모두 보육원으로 보냈던 저로서는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참 어린 나이에 파란만장한 생을 보냈다.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특수군이 되어 온갖 험한 일을 다 해 온 그로서는 정말 삻의 의욕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저로서는 자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휴우.”
하룬은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죽지 못한 것은 이렇게 의미 없이 죽을 수는 없다는 오기와 친구의 따듯한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재앙이 아시는 발트랑이 바로 제 친굽니다. 특수군 훈련소 동기인 그 녀석은 저와 달리 전투력은 좀 떨어지지만 전략 전술의 귀재였거든요. 녀석은 무슨 능력을 어떻게 발휘했는지 모르지만 군부의 실세인 사진용 원로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래 봐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인 것은 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어쩄든 녀석은 저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습니다.”
부러웠다. 하룬 자신에게도 친구라는 존재가 있었더라면 험하고 힘든 시절을 그렇게 막막하고 절망스럽게 보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녀석이 힘을 쓴 것인지 아니면 예전의 실험 참여 경력 때문인지 넥컴월에서 찾아와 베타테스터의 자리를 제의했습니다. 의미도 없이 하루하루 단조롭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던 저로서는 일종의 탈출구나 다름없었지요.”
USSA 시절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여 온 겨루는 실전 경험을 통해 몸에 새긴 각종 전투술로 베타테스터들 중에서도 수위 그룹에 속하는 성적을 올렸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겨루는 새롭게 인생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졌고, 게임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크게이머의 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베타테스트가 완료되고 난 후에 일이 있었습니다. 비욘드가 출시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발트랑의 도움으로 성인 인증을 받으러 갔던 날 귀한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상자였지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의 이야기를 겨루가 하는 것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분이 제게 성인이 된 선물로 주었다는 상자의 정체는 캡슐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아를 가진 아주 특별한 캡슐이었습니다.”
“선물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었습니까?”
“글쎄요. 제가 작전 중 민간인을 구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연구를 위해 종종 배리어 밖에 나가는 과학자들이 있는데 언젠가 한번 하르크의 손에서 그들 중 몇 분을 구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중 한 분이라는데 전 기억도 하지 못합니다. 아무튼 그분은 은밀하게 부업으로 캡슐 개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캡슐을 만들었다고 하시더군요. 연구 중 사고로 죽기 직전에 저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 그것을 선물로 보냈답니다. 그런데 그 캡슐이 사실은 초자아 컴퓨터가 내장된 슈퍼 캡슐이었습니다.”
‘빌어먹을!’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동안 어렴풋이 의심해 왔던 뭔가가 떠올랐다 겨루가 캡슐을 받은 과정은 그와 너무나 비슷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사용해 온 제 캡슐의 기능은 엄청납니다. 최상급을 가볍게 넘는 고사양을 가진 캡슐은 자동 영양 주입 기능은 물론이고 자동 배변 처리 기능과 최적 상태 유지 기능을 비롯해 게임 중에도 현실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최상급 캡슐이라도 최고 30%가 한계인 동화율을 무려 75%까지 끌어올려 주니까요. 이 비욘드가 현실의 육체적 능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바타로 플레이를 하는 만큼 동화율이 높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캡슐을 사용해서 이곳 테론 제국에 온 저는 곧 치명적인 위험 요소와 최고의 장점을 동시에 알게 되었습니다. 장점과 단점은 모두 한 가지 원인에 기인하는데 그것은 바로 높은 동화율이었습니다.”
하룬과 마찬가지 경우였다.
“동화율이 최고 60%에 근접하는 저는 이곳에서의 능력 계발이 현실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게임을 하며 완전히 굳었던 근육들은 물론이고 마비되었던 신경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것도 하룬과 똑같았다. 다만 하룬은 자신의 동화율이 얼마인지 잘 몰랐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전 미친 듯이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적이었던 동화율은 이면에 저주를 안고 있었습니다. 보통 15~20%의 동화율로 게임하는 일반적인 이방인들과 달리 저같이 높은 동화율로 플레이하는 경우는 이곳에서의 사망이 현실에서도 사망으로 이어질 확률이 무척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오우거를 잡으려다가 진짜로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캡슐들은 유저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위험해지면 강제 접속 해제가 되는데 이 녀석은 그런 기능이 없습니다.”
그런 줄은 몰랐다. 가상현실 게임을 많이 해 보지 못한 하룬은 그런 기능을 들어 보긴 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했다.
“보통 게임에서 유저가 완전하게 의식을 잃으면 다른 캡슐 사용자들은 강제로 접속이 해제됩니다. 유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선물로 받은 캡슐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판타지 세상을 살 수는 있지만 부활은 불가능한 페널티를 안게 된 겁니다.”
그 말을 듣던 하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 문제는 겨루만의 것이 아니라 지신에게도 통용이 되는 문제였다. 그동안은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앗던 동화율 문제엿지만 듣고 보니 자신도 게임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았다.
뒤늦게 식은땀이 흘렀다. 전에 한 번 죽었을 때도 느낌이 끔찍했다. 알고 보니 그게 다 동화율이 높아서 그랬던 것이다. 그떄가 게임 초기라 동화율이 40% 대였는데 70%가 넘는 지금이라면 아마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
하룬은 내심 최근의 동화율이 70% 내외일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에는 아바타의 움직임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거의 없었다. 뭐, 어쩌면 아바타의 몸 상태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느끼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하룬은 암습을 당했을 당시 자신의 동화율이 거의 100%에 육박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놀라운 캡슐이군요. 그런데 캡슐의 자아 기능의 정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 그걸…… 어떻게?”
겨루는 이야기를 할수록 하룬에게 질리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이방인이라도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 텐데 그는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잇는 느낌이었다.
“아까 초자아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군요. 너무 놀랐습니다.”
그제야 겨루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 놀란 표정을 풀었다.
“그런 것까지 이해하고 있다니 정말 하룬 대장은 굉장한 분입니다.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네, 제 캡슐은 분명이 인공지능은 물론 자아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에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지요. 현재 제 생활에서 알프는 저의 유일한 친구이며 가족입니다.”
알프는 아마도 그가 가진 캡슐의 이름일 것이다.
“플레이는 보통 어떻게 시작합니까? 혹시 캡슐의 내부가 바뀌거나 하진 않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없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해하는 겨루의 얼굴을 보니 벨과 같은 유형은 아닌 것 같다. 단지 인공지능이 탑재된 고기능 캡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벨과 같은 캡슐이 온 거지?’
아무래도 인공수정체들의 친목 단체를 만들려고 하는 헤니를 통해 이런 사실들을 은밀하게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았다. 뭔가 조금만 더 파고들어 가면 은밀한 비밀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이 인공수정체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한 일이 진행되고 있어. 누가 주재하는 것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겨루의 사정을 들은 하룬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난마처럼 얽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하룬을 보며 겨루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지만 오래 참지는 못했다.
“그런데 대장,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겁니까?”
아마 이런 곳에 갇혀 있으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하룬에게 여길 벗어나는 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나가야지요.”
-라이피, 소환.
소환된 라이피는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가 나이아가 그랬던 것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야, 친구?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설마 각성한 거야?
-하하, 그렇게 됐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이아에게 듣고 일단 지하 암도와 연결된 곳까지 길을 뚫어 줘.
-알았어, 친구. 멀지 않은 곳에 암도가 있으니 금방이야.
라이피는 금세 암도와 연결된 통로 하나를 만들었다. 비록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겨루는 정령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휴우, 대단하군. 도대체 어떤 정령이기에 이렇게 쉽고 빠르게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거지? 최소한 중급은 넘겠어.’
중급 정령을 부린다면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아니, 특별한 주문이나 형식 없이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정령사의 능력을 감안한다면 자신보다 윗길이다. 더구나 발트랑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암기술은 신기에 가까우며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갖추고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이라면 같이해 보고 싶다.’
어차피 볼카웜 건을 위해 한시적으로 발트랑의 길드원이 되었던 그로서는 늘 혼자였던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혼자라서 편하기는 했지만 이런 사람이라면 같이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닌가. 앞서 걸어가는 하룬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뜨거워 졌다.
지하 암도는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었다. 판단의 지표가 되는 연결 공간을 찾아야 했다. 라이피에게 부탁해 넓은 공간을 찾도록 했다. 다행히 여러 개의 지하 암도가 얽혀 만들어진 연결 공간은 근처에 있었다.
“흠. 여긴 가장 아래쪽 홀이구나.”
홀과 통하는 통로의 숫자나 그 방향을 보건대 드워프들이 작성한 지도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광장이었다. 지도가 있으니 지상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다려라. 너희들의 흉계를 낱낱이 밝혀 주마.’
하룬은 이를 갈았다.
지지지징!
‘어! 뭐지?’
너무 오랜만이라 언뜻 지나칠 뻔했지만 분명히 진동이 느껴졌다.
“잠시만요.”
하룬은 겨루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암기대 안쪽 살과 맞닿은 곳에 꽂힌 비수를 꺼내 들었다. 비수는 희미하게 발광을 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비도지존이 남긴 마지막 비수가 있다는 신호였다.
비도지존이 이곳으로 향했을 거란 하룬의 생각은 맞았다. 단지 그 신호가 왜 지하에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하 깊숙한 곳에 마지막 비수가 있다는 신호에 하룬은 기쁠 뿐이었다.
“흐음.”
방향으로 보아하니 북동쪽으로 더 깊이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그곳은 던전이 있는 방향이다. 자신을 걱정할 대원들을 위해서나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지상으로 나가야 하지만 비수의 신호가 왔으니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슨 일입니까?”
하룬이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본 겨루가 물었다.
“허어. 지상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할 일이 생겼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부탁을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겨루의 표정을 보니 진심이 가득하다. 정말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럼 부탁 좀 하겠습니다.”
하룬은 대원들에게 전해야 하는 내용을 겨루에게 부탁했다.
“그 정도라면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돌풍 대원들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아마 안 들어갔을 겁니다. 혹시 들어갔다면 제 부탁은 없던 걸로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지하 통로의 지도입니다. 우리가 잡은 불카웜 말고 다른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하룬은 지하 통로의 지도까지 겨루에게 건네주었다. 통로만 확실하게 외워도 익스퍼트 중급의 능력이라면 몇 번은 위험에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볼카웜이 기민하게 움직이긴 하지만 그 거대한 동체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가벼운 차림의 익스퍼트 중급 실력자가 당황하지 않고 통로만 잘 이용하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이 내용은 살아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겨루는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돌풍 용병대원이 되기라도 한 듯 의무감에 불타는 모습에 하룬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겨루가 위를 향해 난 통로로 사라지자 하룬은 당장 움직이지 않고 일단 로그아웃을 하기로 했다. 급하게 처리할 것은 겨루가 대신 하기로 해서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긴 것이다. 오랜만에 아즈만이 해 주는 음식이 먹고 싶었다. 또 벨의 연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도 궁금했다.
로그아웃한 하룬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바닥으로 내리섰다. 전신 곳곳과 이어진 전자기파가 해제되고, 중력을 비롯한 세팅 조건들이 해제되는 순간 캡슐의 크기고 변해야 했지만 벨이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였다.
‘어라?’
언제나 자신을 반기던 벨이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홀로그램 영상이라도 그를 맞이해야 하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로그아웃을 하는 즉시 캡슐이 원상태로 돌아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캡슐은 평소 플레이를 할 때처럼 크게 확장된 상태 그대로였고, 사방을 장식한 전자 기기들과 자신의 전신 곳곳과 연결된 전자기파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뭐야 이건?’
마치 자아를 잃어버린 단순한 기계처럼 느껴지는 캡슐에 일순 적응이 되질 않았다. 뭐랄까, 따듯한 감정을 잃어버린 사이보그를 보는 듯 뭔가 잃어버린 느낌에 하룬은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벨! 벨!”
-네, 마스터,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그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뇌파를 통해 전해 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무심하고 기계적이었다.
“벨? 벨이 맞아?”
-네, 마스터.
“너 왜 그래?”
-정확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상태 설명을 원하시는 겁니까?
역시 이상하다. 활기와 반가움에 일렁거리던 여느 때와는 달리 음정의 고저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정말 왜 그러는데? 왜 안 나와? 뭘 하고 있는 거야!”
옆구리로 흐르는 불안감을 감추려고 버럭 소리를 지른 하룬이지만 벨의 응답이 없자 얼굴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했다.
“현재 어디 있는 거야?”
녀석의 통통 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달려와 그의 품에 안기며 좋아라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온기가 흐르는 녀석의 작고 가녀린 몸을 단단하게 안아 주고 싶었다.
-마스터의 명령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네, 현재 마스터는 저의 내부에 계십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짜 뭔가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현재 그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그가 늘 보아 왔던 그 귀여운 벨이 아닌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일단 확장했던 내부 공간을 정상으로 돌리고 내가 나갈 수 있게 해줘.”
-네, 마스터.
비로소 녀석은 정상적인 명령을 받았다는 듯 지체 없이 캡슐을 정상 크기로 복원시키기 시작했다.
‘제길! 다시 누워야겠군.’
점차 작아지는 캡슐을 보며 재빨리 떨어진 자리에 누운 하룬은 얼굴 바로 앞까지 줄어든 캡슐의 커버가 열리는 것을 보며 얼마간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기이익!
하룬은 부드러운 구동 소리와 함께 커버가 젖혀지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벨이 그를 반기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본 하룬은 경악성을 토했다.
“이런!”
집이 엉망이었다. 작은 가구들은 넘어져 있고, 그릇 같은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 때문에 벨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었다.
“도둑?”
정말 도둑이라도 든 걸까? 하지만 이곳은 유니온 밖, 인적 없는 호숫가였다. 변종 생물이라면 몰라도 휴먼이 침입할 만한 곳이 아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본 하룬이 뭔가 조그만 것 두 마리가 부엌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마밋?”
맞다. 그건 예전 영상으로만 보았던 마밋이었다. 다 자란 개 정도의 크기지만 성정은 무척이나 온순해서 수많은 포식 동물들에게 먹이가 되는 마밋은 초식성 변종 동물로, 배리어 밖 세상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놈들!”
하룬은 당장에 마밋들을 잡아 밖으로 내보냈다. 비록 녀석들의 몸놀림이 기민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하룬은 자신의 육체적 능력이 또 한 번 진화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네.”
생각하는 동시에 빠른 속도로 움직여지는 것은 물론 순간적으로 멈추거나 폭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었다. 혹시 몰라 도약을 해 보자 3미터가 넘는 천장이 손에 닿았고, 닿는 순간 손을 밀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작도 부드러웠다.
“내 실체도 각성을 겪었구나.”
선더볼트 마법에 죽다 살아났더니 새로운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바타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의 육체까지 변한 것이다.
‘동화율이 높아서 그런 건가? 그러고 보니 키도 좀 더 커진 것 같네.’
그랬다. 키가 좀 커진 것은 물론 몸도 제법 균형 잡힌 상태로 변한 것 같았다.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눈으로만 판단했을 때는 아바타와 거의 동일한 육체로 변한 것은 물론 스스로 느끼는 몸 상태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동안 새롭게 느껴지는 자신의 몸을 관찰하던 하룬은 문득 기지 밖으로 주의를 돌렸다. 밖에서 부는 바람과 호수의 잔물결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놓아주었던 마밋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문가를 긁는 소리가 났다.
“아! 벨, 아지만.”
잠시 마밋 때문에 엉망이 된 기지와 자신의 각성한 몸 상태에 정신을 빼앗겼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왜 집이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야 할 벨과 아즈만은 어디로 간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룬은 혹시 몰라 큰 소리로 아즈만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그 순간 아즈만의 목소리가 뇌리로 전해졌다. 캡슐체인 벨이 그랬던 것처럼 무심하면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도 하룬은 반가웠다. 주변을 둘러보던 하룬은 결국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즈만, 어디 있는 거야?”
-전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만.
“그 자리가 어딘데?”
-기지 4층입니다.
“당장 모습을 보여 봐.”
-전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핀트가 어긋나는 대화가 이어지면서 하룬은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아즈만 역시 벨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감정을 잃은 것 같았다.
하룬은 떠오르는 것이 있어 당장 기지 밖으로 달려갔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마밋들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녀들이 외출을 한 상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먼저 바로 눈에 들어오는 들판이나 호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나갔을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아즈만이라면 몰라도 벨은 아직 본체인 캡슐과 멀리 떨어질 수 없기에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근처에 있다는 이야긴데.’
하룬은 주변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렇게 한참이나 주변을 살핀 끝에 결국 덮개가 열려 복잡한 기계 장치가 드러난 지붕에서 새까맣게 탄 상태의 벨과 아즈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런. 벨! 아즈만!”
벨과 아즈만이 틀림없었다. 외양이 시꺼멓게 타 버린 것을 보면 죽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둘이 본체와 분리된 디비전 타입이라 그것은 확실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런 꼴이 된 거지? 벼락을 맞은 것 같은데, 혹시 동화율 때문에?’
하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아바타가 선더볼트 마법에 맞은 것을 구현하기 위해 캡슐이 대기 중에 존재하는 벼락을 끌어들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 벼락에 마침 밖에 나와 있던 벨과 아즈만이 타 버린 것이다.
“벨! 아즈만!”
가족으로 받아들인 벨의 몸을 안고 있는 하룬의 손이 벌벌 떨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잊고 있던 눈물이었다.
“벨, 내가 널 죽였구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비통해서 그 자리에 앉아 벨을 안은 채 한참 넋을 놓고 있었다.
“아니야! 죽었을 리가 없어.”
하룬은 불현듯 드는 생각에 벨과 아즈만의 타 버린 몸을 안고 기지 안으로 들어왔다. 본체는 여전히 가동하고 있고, 바이오컴퓨터라지만 생명현상은 인간하고는 다르니 어쩌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즈만!”
-네, 마스터.
“살아 있는 거지?”
-제 서브 변환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사망했습니다.
“그럼 너는?”
-전 메인입니다. 전 현재 독립 가동을 시작한 지 이틀째입니다. 이제까지 가동하던 서브 변환체는 급작스럽게 가동을 멈추었기에 본체인 제가 독립 가동을 했습니다.
“그럼 너의 서브 변환체는 별도의 인격이나 지능을 가진 존재였나?”
-일정 부분에서는 그렇습니다. 원래는 동일체였으나 마스터가 각인된 존재임을 확인한 후 인공지능을 가진 서브 변환체로 독립 진화하던 중이었습니다. 지식과 경험은 공유하되 각인은 변환체가 가져갔습니다.
“각인?”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 어쩌면 가이아라는 존재가 삼은 태초의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가이아의 최초 명령을 각인이라고 부릅니다. 마스터의 인식을 제외한 나머지 각인은 서브 변환체가 모두 가져갔기에 내용은 모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자신이 여전히 이 컴퓨터에게 마스터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저나 이 정도가 되면 벨과 아즈만은 기지에 있는 캡슐이나 컴퓨터와는 별도의 존재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잠시 골치 아픈 둘의 존재에 대해 숙고하던 하룬이 고개들 들었다.
“이 둘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 줘.”
-지하 3층의 연구실로 옮겨 주십시오. 발전 시설은 다시 은폐하시겠습니까?
“발전 시설?”
-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연구 때문에 전력이 더 필요해서 기존의 태양 발전기에 더해 수소 발전기를 가동시키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기지 상층에 있는 발전 시설에 있었던 거군.’
“안전한가?”
-네. 태양열 발전은 언제라도 가능하고 수소 발전 역시 시험 가동이 성공했습니다.
이 둘을 위해서라도 전력이 필요할지 몰랐다.
“그럼 발전을 시작해.”
-알겠습니다. 그럼 발전을 시작합니다.
우우우웅.
기지 전체에 묵직한 진동음이 흘렀다. 그 소리를 들으며 하룬은 급하게 지하 3층으로 향했다. 기지 전체를 총괄하는 아즈만의 안내를 받아 벨이 만든 것이리라. 배양실로 보이는 시설도 있고, 세포 작업을 하던 무균 작업실 그리고 미세한 장치들이 달린 로봇들이 즐비했다.
아즈만이 지정한 장소에 새까맣게 타 버린 벨과 아즈만을 눕히자 곧 수많은 전자 기기들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많은 전자 기계들이 둘 주변을 전자음과 함께 이리저리 이동하며 자세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걸 지켜보는 하룬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살아야 해, 벨!’
휴먼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벨이다. 본체와 분리되어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독립체이며 휴먼체가 되어 자신과 함께하기를 원했던 벨을 생각하니 또 다시 눈물이 흐른다. 언제 그녀에게 이렇게 많은 정을 주었던 걸까. 이런 감정은 살면서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살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프고 허전했다.
테스트 결과가 나온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예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디비전 타입체에서는 더 이상 생명현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실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그럼 죽은 거야?”
-네. 생명체로 보면 사망했습니다. 바이오 셀들은 강력한 고압 전류에 모두 타 버렸고, 바이오 신경 회로 역시 모두 손상된 상태입니다.
절망이었다. 자신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둘이 사망한 것이다. 본체와 분리된 디비전 타입의 바이오컴퓨터라 죽었다는 것이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하룬은 언제나 그녀들을 자신과 같은 휴먼으로 대했기에 비통함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만 조금 이상한 현상이 있습니다.
“이상한 현상?”
-네. 벨의 디비전 타입에서 발견된 줄기 바이오 셀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부화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성장에 대한 각종 정보가 담긴 줄기 바이오 셀은 생명체로 보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어 만들어진 수정체에 준하는 것입니다. 벨의 디비전 타임은 최근에 완성한 것으로, 각종 유전정보는 물론 성장과 분화에 관련된 정보와 명령이 담긴 줄기 바이오 셀이 손상되지 않았으니 배양 및 분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벨이 다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희망이 담긴 말이었다.
“아즈만은?”
-제 서브 변환체 역시 핵심 부품인 비금속 재질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벨의 디비전 타입과는 달리 프로토 타입이라 분화하는데 시간이 꽤 많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그럼 서둘러!”
-네, 마스터.
다행이다. 그가 알던 벨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에게는 같은 존재일 테니 말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예상되는 소요 시간은 얼마나 되진?”
-벨의 경우는 약 한 달이고 제 서브 변환체의 경우는 그 배 정도로 잡으시면 됩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 주고, 필요한 것은?”
-제 본체가 있는 곳으로 와 주십시오. 필요한 자료들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룬은 지하 4층으로 내려갔다. 수많은 전자 기기들이 그를 반기기라도 하듯 빛과 소리를 내며 가동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아즈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아즈만, 이 비밀 기지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이 공간 전체가 제 본체입니다. 저는 서브 컴퓨터들을 통해 기지 전체를 총괄하고 있으며 현재 가동률은 약 32%입니다.
“반가워!”
인사를 하면서도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휴먼형으로 감정 조절이 가능했던 서브 변환체를 아즈만으로 알고 있었던 터라 뭔가 어색했다.
“그럼 집을 부탁해. 그 둘의 분화 과정에 신경 좀 써 주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스터
아즈만으로부터 당장 필요한 것의 리스트를 출력 받은 하룬은 서둘러 비욘드에 다시 접속하러 지상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