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
하룬은 쉴 새 없이 치는 몸 안의 벼락 속에서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강인한 의지는 한 줄기 의념을 일으켰다.
‘이렇게 계속 가면 죽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해결하고 싶은 것들이 있고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비도지존의 유물
강해지는 것. 그 누구와 비교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강하다고 인정하는 것.
벨의 비밀과 자신을 둘러싼 흐릿한 비밀을 푸는 것.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생각, 생각을 해내야 해!’
하룬은 이를 악물고 멀어져 가는 의식을 붙잡았다.
쿠르릉 꽈앙! 꽈르르 콰앙!
시퍼런 뇌전이 내리친다. 순간 하룬의 몸이 미세하게 공중으로 튕겼다가 떨어졌다. 벼락에 맞은 몸의 한 부위가 시꺼멓게 타 버렸다. 뇌전은 한 줄기가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생성된 것인지 모를 시퍼런 뇌전들이 수십, 아니 수백 수천 줄기가 하룬의 몸속 구석구석을 향해 뇌기를 방사하고 있었다.
그런 뇌전을 맞으며 뭔가를 떠올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하룬은 필사적으로 고통을 견뎌 내며 머리를 굴렸다.
‘아!’
떠올랐다.
‘어퍼 오션!’
정수리의 마나 오션에는 이미 비도지존의 유물 중 하나인 블리츠 대거를 통해 얻은 라이트닝 파워가 있었다. 그곳에 자리한 라이트닝 파워는 자연의 힘이되 순화되어 자신의 의지에 반응하며 사용이 가능하다.
그곳이라면 이 선더볼트의 뇌전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가두어야 해!’
생각하는 즉시 정수리 부위의 마나 오션으로 의식이 향했다. 벼락이 몸의 내부를 지지는 고통이야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극렬했지만 그래도 그는 이미 많은 종류의 고통을 격고, 이겨왔다.
‘반응한다!’
어퍼 오션에 자리를 틀고 있는 구형의 라이트닝 파워는 그 좁은 곳에서도 수백 줄기의 뇌전을 방사하며 마침 그 주변으로 떨어지는 낙뢰와 반응해 그것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하룬의 의식은 좀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다.
라이트닝 파워는 아주 조금씩 주변으로 퍼지는 낙뢰를 흡수하며 활성화되고 있었다. 그 양은 너무나 미미하지만 그 덕분에 몸속에 치는 벼락의 기세는 미세하게나마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몸 외부는 어떻지 몰라도 몸 내부는 새까맣게 다 타 버릴 것이다. 이미 상당 부분이 상했다. 의식이 향하는 거의 모든 곳이 새까맣게 변한 상태였다.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뼈와 연골 그리고 신경과 줄기 세포를 비롯한 세포 단위까지 벼락에 다 타 버릴 것이다.
‘끌어들여!’
어퍼 오션에 자리를 잡은 라이트닝 파워구에 강한 의지를 실었다.
마침 어퍼 오션 근처의 마나 로드를 타고 흐르던 한 줄기 뇌전이 촉수처럼 오션 밖으로 뻗은 라이트닝 파워의 끝에 걸렸다.
츠츠츠츠!
‘된다!’
그의 라이트닝 파워가 마나 로드를 타고 흐르던 한 줄기 뇌전을 끌어당겼다. 두 줄기의 뇌전은 순식간에 반응해서 한 줄기로 이어지더니 이내 라이트닝 파워구로 돌아왔다.
기본적으로는 같은 성질의 힘이다. 아무 의지도 없이 단순한 현상에 불과한 선터볼트의 뇌전은 이미 인간의 의지를 받아들여 반 정도는 살아 있는 라이트닝 파워구에 합쳐진 것이다.
희망이 생겼다. 더구나 타행인 점은 이미 웬만한 곳은 초 당 수백 수천 번이나 터지는 선더볼트의 뇌전에 다 타 버려 고통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육체적 고통이 너무 강하면 흐트러지고 만다. 하지만 상당한 부분의 감각이 상실되어 지금정도의 고통이라면 견딜 만하다.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회선이다. 뇌전의 성질은 전류, 전류는 도체를 타고 흐른다. 정상적이라면 이미 몸 밖으로 빠져나갔어야 하지만 이 선더볼트는 그렇지가 않았다.
‘어쩌면 대상물을 완전히 태울 때까지 몸 안에 머무는지도…….’
하룬은 라이트닝 파워구에 집중했다. 이미 다른 곳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하룬은 자신이 이미 반 이상은 죽은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몸의 외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몸의 내부를 이루는 세포들 중 상당수가 선더볼트에 타 버렸다.
하룬은 라이트닝 파워구에 전심전력으로 집중했다.
츠츠츠!
쉴 새 없이 선더볼트를 끌어들였다. 라이트닝 파워구는 점점 더 커져 갔다. 어느 순간에는 크기의 증가를 멈추고 밀도를 높였다. 그렇게 크기와 밀도를 높여가던 라이트닝 파워 구의 힘은 어느새 제법 먼 곳까지 뇌전을 뻗어 선더볼트의 줄기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은 이제 더 이상 의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도 잊었다. 하룬은 이제 라이트닝 파워구와 일체가 되었다. 그의 의식은 끊임없이 선더볼트를 끌어와 지신의 일부로 만들었다.
라이트닝 파워구는 마치 욕심 많은 아이가 끝없이 음식을 탐하는 것처럼 욕심을 부렸다. 시간이 지나자 이제 거침없이 자신의 뇌전을 하룬의 전신으로 뻗어 선더볼트를 끌어당겨 흡수하기 시작했다.
츠츠츠!
어느 순간 하룬은 더 이상 빨아들일 선더볼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 있지?’
하룬의 일부가 된 라이트닝 줄기는 온몸 구석구석까지 움직이며 선더볼트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선더볼트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하룬의 강력한 의지에 순화되어 방향성과 목표를 가지게 된 라이트닝은 마침내 하복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나 오션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구체 형태를 이루고 있는 라이트닝 마나와는 달리 액체처럼 끈끈한 마나가 차 있었다.
츠르륵!
바텀 마나 오션의 마나와 선더볼트를 흡수했단 라이트닝 파워가 석였다. 놀랍게도 하룬이 메신저 스킬과 마나 플로를 통해 쌓은 마나가 라이트닝 파워를 잡아당겼다.
잡아끈 것이 전부가 아니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형태는 분명히 달랐고 완벽히 섞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바텀 마나 오션은 끝도 없이 라이트닝 파워를 받아들였다. 선더볼트를 모두 흡수한 라이트닝 파워의 크기나 양은 그간 마나 플로를 통해 축적한 마나보다 몇십 배는 더 컸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금세 마나의 성질이 바뀌었다. 비록 블리츠 대거 안에 갇혀 주인의 의지를 받아들인 탓에 순화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광폭한 성질을 가지고 있던 라이트닝 파워는 기존 마나와 섞이기 시작했다.
하룬의 의신은 라이트닝 파워를 통해 마나와 합일된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대신 합쳐진 마나와 의식이 하나가 되었다.
번개의 성질을 가진 마나가 마나 오션을 가득 채웠다. 아니 채우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그 한계를 초월한 생태였기에 밀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 그 마나는 하룬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휘리리릭! 휙휙
하나가 된 마나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고속 회전을 통해
밀도를 높임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로 합해지기 위한 과정이다. 마나 오션을 가득 채우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마나 덩어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회전 자체가 없어진 것처럼 빠르게 회전하던 마나는 드디어 겨자씨처럼 작아졌다. 처음 마나 플로에 성공했을 때와 비슷한 크기였다. 대신 그 마나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힘을 가지고 있엇다.
드디어 회전이 멈추었다. 엄청나게 넓은 마나 오션에 겨자씨처럼 작아진 마나라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하룬의 의식이 마나에서 빠져나오려던 순간이었다. 겨자씨처럼 줄어들었던 마나가 한순간 폭발했다,
꽈앙!
마나 오션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하룬의 몸 내부가 한순간에 터져 버린 것 같았다.
풀썩! 주륵!
그 자세 그대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진 하룬은 두 귀와 눈, 코와 입, 항문을 통해 씨꺼멓게 죽은 피가 흘러 나왔다.
마나 오션을 폭발시킨 거대한 마나는 자연의 법칙 그대로 밀도가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댐 수문이 폭발로 터져 나가고 수억 톤의 물이 한꺼번에 하류로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았다.
이미 터지고 타버린 마나로드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다행이라면 이미 메신저 스킬과 마나 플로를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길을 닦아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엄청난 마나는 이미 닦인 길을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꼬리뼈를 지나 척추를 타고 올라간 마나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괴하며 뒷머리를 타고 올랐다.
꽈앙!
하룬의 몸이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간신히 열린 정도에 불과하던 정수리 부위의 관문이 터져 나갔다. 순간 정수리의 뼈가 녹아 버렸다. 곧 그 부위의 피부를 통해 스스로 외계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나는 기존에 라이트닝 파워가 자리했던 어퍼마나 오션을 지나 이마와 인중을 통해 앞면을 지났다.
꽈앙!
또 한 번 관문이 뚫렸다. 원소석이 자리하고 있었던 명치부위가 마치 혹처럼 튀어나왔다가 쑥 들어갔다. 그 순간 원소석은 뇌전의 성질을 가진 마나에 순식간에 녹아들기 시작했고 마나의 흐름이 끊겼을 때는 원소석이 절반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 전신의 피부가 맹렬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하룬의 피부는 악취가 나는 이물질을 배출하고, 외계의 마나를 흡입하는 동시에 전에 없던 새로운 조직들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콰르르!
거칠 것이 없는 노도처럼 맹렬하게 움직이는 마나는 온몸의 마나로드를 모두 찢어 버리고 부숴 버렸다. 한 가닥 의지만이 남은 하룬의 몸 안에는 선더볼트 대신 광폭하면서도 거대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기세가 담긴 마나가 익숙한 마나로드를 돌았다.
꽈앙!꽈앙!
가로막는 벽과 문을 모두 무너뜨린 마나의 기세에 마나 로드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마나의 흐름은 점점 더 빨라졌다. 익숙하고 가장 안정적인 마나 플로의 그 운행로를 따라 흐르는 마나는 그 속도가 빨라지면 통과하는 마나 로드 주변에 강력한 진공상태를 발생 시킨다. 이 때문에 주 마나 로드와 연결된 작은 마나로드들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열리기 시작했고 곧 본류의 꼬리를 형성하던 마나가 그곳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나의 흐름이 결국 열여덟 번이나 전신을 추천하자 이제 온몸 구석구석 마나가 지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미세 마나통로까지 모두 개통되어 전신에 마나가 꽉 찬 상태가 되자 하룬의 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 하룬의 몸이 어느 순간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마치 누군가 그의 몸을 위로 올린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그의 몸을 반죽이라도 하는 걸까? 그의 몸이 우그러들었다. 몸 전체가 사방의 압력을 받아 수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몸의 뼈들이 부러지고 근육이 녹아 내리더니 몸이 두개골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몸은 놀라운 변화를 시작했다.
몸의 중요 부위에 자리한 줄기 세포들이 무서운 기세로 증식과 분화를 시작했다. 벼가 생겨나고 근육이 생성되었다. 신경세포가 자라고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거의 분쇄 되었던 장기들이 새롭게 만들어져 자리를 잡았고, 새롭게 분화한 심장의 박동을 통해 혈액이 공급되자 강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룬의 아바타가 두대골 크기에서 장상적인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완전히 새로운 육체가 허공에 생겨난 것이다. 아마 의식을 잃은 겨루가 보았다면 눈을 까뒤집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새 기지를 향해 떨어져 내리던 낙뢰는 사라졌지만 벨의 본체인 캡슐 안, 공중에 뜬 상태인 하룬의 몸은 비욘드에서의 그것과 똑같은 변화가 있었다.
벨과 아즈만이 낙뢰를 맞는 순간 하룬의 동화율은 99.999%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자아를 가지고 하룬의 상태에 어느 정도 관여하던 벨의 존재가 사라진 탓이기도 했지만 낙뢰로 게임과 거의 동일한 상태가 현실에서도 구현된 것에 기인했다.
뼈가 모두 분쇄되고 근육이 녹아 버린 상태에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던 하룬의 몸이 다시 예전과 같은 상태로 변한 것은 불과 몇 분 사이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아바타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의 하룬은 다시 태어난 듯 처음부터 새로운 성장 과정을 진행했던 것이다,
시꺼먼 피부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뽀얗고 매끄러웠으며 광택이 흘렀다. 성장기를 잘못 보내는 바람에 심한 불균형을 이루었던 그의 몸은 어느새 단단한 뼈와 질긴 근육질을 가진 육체로 탈바꿈했다.
게임 속 아바타와 현실의 하룬은 그렇게 각성을 했다. 몇 번의 행운이 겹치기도 했지만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절대 놓지 않았던 그의 의지력 때문이었다.
하룬이 눈을 떴다.
번쩍!
강렬한 빛이 그의 눈을 통해 방사되었다가 사라졌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시퍼런 뇌전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살아난 건가?’
자신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는 하룬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왜 알몸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겹으로 껴입었던 방어구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시커멓게 변색된 비수와 단검류들이 그의 몸 주변에 널려 있었다. 더구나 몸은 새까맣게 변색된 뭔가가 덮고 있엇다.
하룬은 그것이 선더볼트에 의해 입고 있던 방어구들이 탄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지독한 마법이었어!’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방어구들이 모두 타고 녹아 없어질 정도의 마법에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하네?’
분명 자신이 있는 곳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곳임에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었다. 발광석도 없이 말이다. 뭔지 모르지만 자신의 몸이 변한 것이 틀림없다. 마치 비 개인 하늘처럼 맑고 청량한 감각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훅! 후욱!
손발을 뻗어 보니 마음먹은 대로 움직인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제대로 힘이 실린다. 전신에는 폭발할 것 같은 활력이 휴화산처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선더볼트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런지도 몰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몸의 내부에어 치던 수없는 선더볼트를 어퍼 마나 오션의 라이트닝 파워구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하룬은 선 자세로 마나 플로를 돌렸다.
‘어엇! 이럴 수가!’
생각을 하는 순간 마나가 움직였던 것이다. 마나는 순식간에 마나 로드를 탔는데 그것이 놀랍다. 이전까지의 마나 로드가 1차선 도로였다면 지금은 왕복 18차선은 될 정도로 넓어졌고, 마나 로드를 흐르는 마나량이 거대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분명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말이다. 하룬은 그런 의문을 잠시 접어 두고 마나 플로에 정신을 집중했다.
호호탕탕!
엄청난 양의 마나가 시원하게 뚫린 대로를 마치 슈퍼 마그네틱 카처럼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 벽이 사라졌다.’
비록 하나로 이어지긴 했지만 그의 마나 로드 곳곳에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겨우 구멍만 뚫어 그 구멍을 통해 지나던 예전과 달리 벽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어퍼오션?’
정수리를 지난 마나는 어퍼 마나 오션을 지났는데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전에 그곳이 원룸이었다면 지금은 이사한 공장 주택만큼이나 커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곳을 가득 채운 라이트닝 파워는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커져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다른 느낌이다. 묘하게 친숙했다. 분명 라이트닝 파워구는 맞는데 그 성질이 바뀐 것 같았다. 아니, 기본적인 성질은 비슷한 느낌이다. 마치 기체처럼 풀어진 상태의 마나는 지금 운행하고 있는 마나와는 상당 부분 같으면서도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지금 운행하고 있는 마나의 성질도 이전과 달라졌다.
‘마나에 뇌전이 섞였다!’
그랬다. 어퍼 오션의 라이트닝 파워 특유의 성질이 기존 마나와 섞여 있었다. 이 액체 상태의 마나는 금방이라도 칠 것 같은 뇌전이 비활성화된 상태로 존재했다. 과학적으로 풀면 양전하와 음전하로 분리된 상태로 마나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충돌해서 뇌전을 생성시킬 수 있는 바로 직 전 상태였다.
이번에도 잠시 의문을 접고 마나를 움직였다. 액상의 마나는 이윽고 명치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엄청나게 큰 마나 오션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긴?’
이전에는 그 존재를 잘 몰랐던 곳이다. 원소석이 자리를 잡았기에 비로소 의식했던 곳이다.
‘이곳도 마나 오션이다!’
바텀과 어퍼 마나 오션처럼 그곳에도 마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마나는 기체 상태로 거의 3분의 1 정도 크기로 작아진 원소석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흥미가 동한 하룬은 전신 구석구석까지 마나를 끌고 돌아다녔다. 신기하게도 전신의 마나 로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뚫린 것은 물론 넓게 확장되어 있었다.
‘마나 오션이 또 있다!’
양 손바닥과 양 발바닥의 중심에 또 다른 마나 오션이 생성되어 있었다. 메신저 스킬 때문에 발바닥 중심부를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마나를 축적할 수 있는 마나 오션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상당한 양의 마나가 축적된 상태였다.
상체의 정종알을 지나는 세 개의 마나 오션 말고도 네 개의 마나 오션이 더 존재하는 것이다. 그 마나 오션에는 기화되거나 혹은 액상의 마나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
하룬은 운행하던 마나를 제자리로 인도하고는 각각의 마나 오션에 존재하는 마나들을 느껴 보았다.
‘다르다!’
각 부위의 마나 오션에 존재하는 마나들은 그 형태가 조금 씩 달랐고, 그 성질 역시 달랐다. 아직 확실한 차이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아랫배 깊숙한 곳의 바텀 마나 오션에 존재하는 마나와는 차이가 있었다. 하룬은 내친김에 어퍼 오션의 마나를 움직여 보았다.
화르르!
아랫배의 마나 오션과 달리 기체 상태로 존재하던 마나가 그의 의지에 반응해 마치 바람처럼 마나 로드를 움직였다. 당연히 그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그 무엇이라고 될 수 있을 것처럼 자유로운 형태였다.
‘밖으로 표출할 수 있을까?’
번쩍!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그 마나는 그의 눈을 통해 외계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 움직임은 마치 파도와 같은 진동 형태였고 그의 생각 혹은 의지를 담음 상태였다.
‘혹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눈을 벽의 한 곳에 집중했다. 그곳에는 종류를 알 우 없는 작은 광석이 박혀 있었다.
‘빠져!’
그 광석이 벽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심상으로 그리는 순간 그의 눈빛이 번쩍이더니 단단하게 벽에 박혀 있던 광석이 밖으로 쑥 빠져나왔다.
‘헉!’
하룬의 눈이 커졌다.
‘이건 나인이가 쓰던 종류의 힘?’
그것과 같은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비슷한 종류의 힘은 맞다. 뇌파에 일체화된 마나는 그 움직임이 파동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생각을 떠올리고 그 형상을 구채화 시키는 순간 발현되는 것이다.
아직 어떻게 발현되는지 자세한 기작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의지와 상응해 외계로 빠져나간 마나가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 염력이라는 것 역시 일종의 마나였던 것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움직임이 뇌파처럼 파동을 그리는 것도 그렇고 심상을 구체화 시키는 순간 시차 없이 발현되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난 명상이라든가 하는 정신 수련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의문은 점점 커졌지만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은 후에 뭔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확실한데 그 변화의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하룬은 이번에는 명치 부위의 마나 오션에 존재하는 마나를 움직였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활용하는지 모르겠다. 의지를 심어도, 심상을 떠올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몇 번 시도 헀지만 전혀 사용할 수가 없었다.
양 손바닥과 양 발바닥 중심에 ㅇ존재하는 마나 오션은 비록 기체 상태였지만 그 마나의 성질은 기본적으로 아랫배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마나 오션의 마나와 같았다. 단지 기체 상태로 존재했기에 그 움직임이 가벼웠다. 의지가 실리는 즉시 마나는 손과 발을 통해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이건 외부로 마나를 표출할 때 좋겠네.’
하룬은 자신의 뼈가 마치 탄소강처럼 단단해지고, 근육을 형성하는 근섬유들이 탄소섬유처럼 질기고 단단해 졌다는 것은 아예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새로 형성된 마나 오션들과 마나들에 한참을 빠져 있었다.
‘그래! 상체의 세 곳에 존재하는 마나 오션을 각기 바텀, 어퍼, 센트럴 오션이라고 부르자. 바텀 오션의 마나는 마나 플로를 통해 커지는 게 확실해. 어퍼 오션과 센트럴 오션의 마나는 어떻게 축적하고 사용하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간 알게 되겠지. 이렇게 되면 지혜의 파편을 얻어야 하겠는걸.’
전에 얻었던 지혜의 파편에 담긴 지식의 수준을 떠올린 하룬은 새로 얻은 미지의 마나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던전을 끝까지 클리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뭔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확실해!’
그것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벙법이 있었다.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하면 될 일이다. 이곳은 게임이니 말이다.
“상태 창 오픈!”
상태 창을 연 하룬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통 확인을 하지 않았더니 너무나 많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레벨 업에 따른 보너스 스텟을 체력과 지혜 그리고 행운에 나눠 넣은 후에 최종적으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검사, 정령사
레벨: 114
칭호: 불카웜 슬레이어(외 12개)
생명력: 4850
마나: 4,450
정령력: 2,420
힘: 162(+5) 체력: 175(+5)
지식: 82 지혜: 158
행운: 60 민첩: 182(+5)
지구력: 82 심안: 33
집중: 44 의지: 12
자정: 20%
S.P.: 2,480 명성: 8,210
통솔력: 880 카리스마: 28
H.P.: 2,250
물리 방어력: 20%
마법 방어력: 25%
독 저항력! 30%
‘언제 레벨이 이렇게 올라간 거지?’
하룬은 자신이 볼카웜을 잡을 때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아니, 지금은 그 사실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생명력과 마나 그리고 정령력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에 놀라고 있었다.
‘이전에 확인했을 때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나 되는 수치네. 레벨이 오른 것에 따른 것은 분명히 아닌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또 일어났다. 아바타가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하룬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몸에 걸친 것이 모두 다 타버려 가루로 변한 탓에 알몸의 자신을 둘러본 하룬의 눈이 다시 커졌다.
‘성기가? 설마 내가 NPC라도 된 거야?’
하룬은 믿기지가 않아 직접 손으로 만져 보기까지 했다. 현실의 그것보다 튼실하고 큰 성기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하다.
아바타는 원래 성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NPC들과 성적 접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확인한 자신의 몸에는 꽤 튼실한 물건(?)이 사타구니에 모습을 보였다.
‘뭐야? 무슨 일이지? 내가 정말 NPC라도 된 걸까? 그도 아니면 동화율 때문에 그런가?’
하룬은 너무나 달라진 몸의 변화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좋은 일인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변화를 이미 겪어 보았던 터라 혼란을 금세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다른 유저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게임을 해 왔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나 의논할 대상이 없어 불안함은 더했다.
하룬은 자신의 몸을 상세하게 관찰했다. 이전과 달라진 것 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일단 아바타의 키가 좀 더 커졌다. 하지만 이전처럼 비쩍 마른 체형은 더 이상 아니었다.
잘 발달된 근육들은 더 강인해졌으며 뼈는 더 단단해졌다. 몸이 닿는 공기를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은 최고조로 올라갔으며 심신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고 적당하게 이완 되었다.
‘가만, 뿔은?’
자신의 머리통을 만져 본 하룬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게 자란 세 개의 뿔을 느낄 수 있었다. 뿔은 더 커지고 굵어졌는데 묘하게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완전히 마왕이 되었군.’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마족으로 오해하리라.
‘일단 옷부터 챙겨입자.’
“나이아, 소환!”
우선은 몸부터 씻어야 했다. 몸에서 심한 악취는 물론 시꺼먼 땟자국이 여기저기 보였던 것이다.
눈앞이 잠시 일렁이더니 나이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투명한 워터 드레스를 입은 나이아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굴곡 잇는 몸매며 아름다운 미소까지 모두 예전과는 달랐다.
‘눈이 좋아진 걸까?’
나이아는 인사를 하려다가 갑자기 입을 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의 모습에 놀란 것일까?
-어머! 각성했군요. 축하해요, 하룬
“내가 각성한 걸 느낄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요. 확연하게 달라졌어요. 이전에 비해 두 배 정도는 능력이 올라간 거 같아요.
나이아에게 축하 인사를 받자 확실하게 자신이 각성한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현상이라 나도 좀 어리둥절해. 일단 내 몸 좀 씻겨 줄래.”
-맡겨 줘요. 와아! 근사해요. 이렇게 멋진 육체는 처음 봐요.
전과 다르게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나이아 때문에 공연히 마음이 들떴다. 이것도 어쩌면 자신이 각성한 효과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아는 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몸 전체를 하룬에게 감싸서 그음 몸에 얼룩진 노페물들을 말끔하게 치워 주었다.
-멋져요, 하룬.
나이아는 마지막으로 하룬의 몸에서 수분을 빨아들인 후 황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하룬은 쑥스러워서 나이아를 금방 돌려보냈다. 돌아가기 싫다는 듯 콧등을 찡그리는 나이아의 모습이 여운처럼 나았다.
“생각보다는 괜찮은데.”
비록 아바타지만 그의 몸은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로 변해 있었다. 또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의 살결은 매끈하고 깨끗했다.
하룬은 아공간에서 속옷을 꺼내 입고, 럼프 오크 방어구를 그 위에 입었다. 전에는 두겹의 방어구를 껴입었지만 지금은 하나만 입고 있어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
비수도 챙겼다. 녹아 버린 것들이 많았지만 비도지존의 유물을 비롯해 삼십여 개는 그래도 멀쩡한 상태였다. 암기대가 따로 없어 모두 아공간에 넣었지만 그래도 한 자루는 방어구의 틈에 끼워 넣었다. 비도지존의 다른 비수를 만나면 신호를 보내는 비수였다.
‘아!’
하룬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싸가지를 소환했다.
-무슨 일이야, 주인? 호오!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완전히 달라졌는걸, 주인.
“혹시 나한테 생긴 일, 못 봤냐?”
아직 아공간을 만들지 못해 정령계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정령들과 달리 이 녀석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모두 봤을 거란 생각이 들어 물어본 것이다. 각성한 것은 확실한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했다.
-보긴 했지만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겠어. 어마어마한 마나의 흐름을 느껴 주인을 주시하기는 했지만 주인의 몸 안에서 일어난 변화까지는 알 수 없으니까. 아무튼 내가 본 것은 주인이 한동안 선더볼트로 인해 타 죽을 것같이 굴다가 어느 순간에 말짱해졌다는 것 그리고 몸이 엉망으로 부서지고 해체되었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녀석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주인의 정령력이 그렇게 늘어난 거지? 정령석이라도 먹은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정령석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수중에 꽤 많은 정령석이 들어왔다.
“네 상태는 어때? 아직도 원하는 것을 못 얻은 거야?”
녀석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흡수했던 엄청난 양의 오염 물질들을 배출하기 위해 아직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응, 주인. 아직 힘이 부족해.
“줄까?”
-뭘?
그렇게 물으면서도 목소리는 기쁨으로 떨리고 있다. 녀석의 눈빛이 뜨거워지는 것을 보니 무엇을 말하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 있어. 너에게 주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자꾸 일이 생겨 잊고 있었어. 앞으로 네 힘이 많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서둘러.”
하룬은 정령석을 내밀었다. 녀석의 귀여운 얼굴에 환한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
“모자라면 말해. 몇 개 더 있으니까.”
-헤헤헤! 고마워, 주인. 빨리 흡수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지. 실망하지 않을 거야.
싸가지는 신이 나서 아공간으로 돌아갔다. 얼굴만 귀엽지 다른 부분은 여전히 괴물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녀석이 어쩐지 좀 측은했다.
‘저 독 데미지만 어떻게 할 수 있으면 녀석을 소환한 상태로 데리고 다녀도 되는데.’
언젠가 한 이야기지만 녀석은 자신의 힘으로 물질계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형상도 자신이 직접 만들 수 있었고. 독 데미지만 없다면 녀석을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로 만들어 펫으로 데리고 다니거나 아니면 무기의 형태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막 해독약을 먹으려던 하룬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꺼 놓았던 안내음을 다시 켜 두었다.
-중독 상태입니다. 초당 7의 독 데미지를 입습니다. 자정 능력의 발현으로 초당 2씩 회복됩니다.
‘응? 자정 능력의 발현?’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상태 창을 보니 독 저항력이라는 항목이 생성되어 있었다. 그동안 싸가지 때문에 지속적으로 독에 노출된 탓인지 아니면 달라진 육체적 능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에 대한 저항력이 30%나 되었다.
하룬은 그래도 일단 해독약을 복용했다. 몸이 불편한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런 후 그의 시선이 비로소 외계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돌과 흙이 섞여 있는 벽이었다. 천장과 사방의 벽이 모두 같았다.
‘아!’
이제야 이곳으로 오게 된 모든 정황이 생각이 난다. 눈을 뜨곤 달라진 자신의 육체와 마나 때문에 정신이 팔려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이곳은?’
라이피가 찰나의 틈을 이용해 그에게 만들어 준 피신처였다. 사방 3미터 정도의 구덩이는 호흡과 움직임이 원활할 정도였다.
‘라이피를 소환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중독 현상도 사라졌다. 강한 마비독에 중독되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던 그였다. 해독약도 먹지 않았는데 마비독이 해독된 것이다.
‘자정 스텟 때문일까?’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던 시간이 얼만 ㅏ되는지 모르니 그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아무튼 자신에게 무척 좋은 일일 일어났다는 것을 확실했다.
잠시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운 하룬의 눈에 구석에 처박힌 한 인물이 들어왔다.
‘누구? 아! 겨루라는 유저구나.’
이제야 생각이 났다. 유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실력을 가진 겨루에게 한순간 관심을 가졌지만 경황이 없어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볼카웜의 강산성 체액에 맞아 얼굴반쪽이 녹아 버린 상태였다.
겨루의 꼴은 처참했다. 얼굴의 반쪽은 하얀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이 녹아서 눌어붙었고, 방어구 곳곳은 체액에 타 버려 엉망이었다. 왼쪽 손목에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나 있었다.
‘죽었나?’
겨루에게 다가간 하룬은 그의 코밑에 손가락을 댔다.
“어! 살아있다!”
역시 미약하지만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진 하룬은 그의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봐! 정신 차려봐!”
몇 번이나 그의 몸을 흔들며 소리쳐 불렀지만 그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나이아가 한 응급조치는 그를 즉사하지 않게 한 것 이외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ㅁ못했나 보다. 하룬은 아공간에서 상급 치료 포션을 꺼내 반은 그의 상처 부위에 붓고, 나머지는 입안으로 조금씩 흘려보냈다.
포션이 닿은 얼굴 부위가 순식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소독과 동시에 새로운 피부 세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겨루가 정신을 잃은 것이 다행이다. 아마 제정신이었으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기절을 했는데 강제 로그아웃이 되지 않았단 말이지.’
지금 겨루의 상태는 보통 유저와는 완전히 달랐다.
예전에 자신은 비욘드의 지식이 거의 없어 기절을 하더라도 강제 접속 해제가 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헤니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건 정상이 아니었다. 하룬은 그것을 벨의 존재 떄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엇다.
‘역시 이 친구도 뭔가 있겠구나.’
자신도 그랬지만 이 친구도 일반적인 유저의 범주는 벗어 난 것이 틀림없다.
그런 치명상을 입고도 강제 로그아웃을 당하는 대신 기절 상태에 빠져 있는 겨루에게 강한 흥미가 일었다. 비록 심한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상태지만 그는 자신과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선더볼트와 마비독을 이겨 내는 사이 무슨 일이 생겼을지 궁금했다. 대원들은 어떤 상황인지, 던전에 대한 일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일단 나가야지’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다.
‘으드득! 가만히 두지 않겠어.’
알랭 후작과 마스론 후작 그리고 제국 정보 길드!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다고 그런 비겁한 암수를 써서 암살한단 말인가. 이제는 더 이상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나 그와 돌풍 용병대를 죽이려고 시도 한 놈들이니 인정 따위는 이제 버릴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