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
‘이 녀석, 제법 깊은 상처를 입었구나!’
강력한 산성 체액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하얀 액체가 바닥에 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놈의 머리통을 가른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하얀 액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니 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10여 분을 추적한 끝에 하룬은 아까 놈을 상대했던 곳 정도 크기의 광장에 들어섰다.
꾸어억!
그의 침입을 알아차린 듯 볼카웜이 고막을 울리는 괴성을 질렀다. 이제야 하룬은 놈의 동체를 전부 볼 수 있었다. 길이는 약 12미터에 직경은 3미터가 넘는 괴물이 그를 향해 네 개의 촉수를 흐느적거리며 괴성을 질렀다.
하룬의 검에 갈라진 머리통에서 흐른 하얀 액체는 놈의 얼굴을 전부 뒤덮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위협적이었던 여덟 개의 이빨 역시 그 움직임이 이전보다 훨씬 둔해졌다.
“이제 네놈도 끝이다.”
뒤에서 알랭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옆에는 정상을 회복한 마스론 후작이 요행히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자네의 활약이 컸네.”
“아닙니다. 먼저 각하의 공격으로 놈의 주의가 분산되었던 덕분입니다.”
하룬의 겸양에 알랭 후작은 자존심이 보상된 듯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마스론 후작, 저놈의 촉수를 어떻게 해 주시오. 저것만 없어지면 놈은 애벌레나 다름없으니까.”
“좋소이다. 대신 누가 저놈의 주의를 끌어 주시오.”
마스론 후작이 흔쾌하게 말하자 하룬이 앞으로 나갔다.
“제가 하지요.”
“좋아! 아까처럼 한번 해 보자고.”
평생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뛰어 본 적 없는 마스론 후작은 이제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했지만 잊고 있었던 활력이 생겼는지 무척 기꺼운 얼굴로 하룬을 보았다.
“자, 갑니다!”
하룬은 놈을 향해 접근했다. 생각한 대로 놈의 촉수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이제 저 촉수들의 움직임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하룬은 메신저 스킬 레벨을 최대한 올리고 좌우로 움ㅈ기이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한 그의 두 다리는 어느새 잔상이 생겨 수십 개의 다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대단하군!”
“그렇소. 정말 대단한 놈이오. 처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소.”
두 사람은 의미 모를 이야기를 나누며 기회를 보았다.
하룬의 몸놀림이 빨라지자 네 개의 촉수도 미친 듯 그의 몸을 따라 움직였다. 하룬의 몸은 이제 수평만이 아니라 작은 광장의 벽과 천장을 바닥 삼아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단계의 패스트 스킬과 3단계의 점핑 스킬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던 것이 이 순간에는 마음먹은 대로 펼쳐졌다. 필요하면 통한다는 말이 이 순간에 사실로 증명되고 있었다.
하룬의 몸은 마치 새처럼 자유자재로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을 날아다녔다.
‘동체 시력을 벗어났다! 놀라운 능력이군.’
알랭 후작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검술로 보아선 익스퍼트 초급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구현한단 말인가. 정녕 이해할 수 없는 자였다.
어느새 하룬을 따라 맹렬하게 움직이던 촉수가 마치 마비라도 된 듯 한 자리에 멈췄다.
“지금!”
다급한 마스론 후작의 외침에 촉수가 끔틀한 순간 알랭 후작의 검에 솟아올랐던 오러 소드가 벼락처럼 촉수를 향해 날아갔다.
“오러 소드 스캐터?”
놀란 마스론 후작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졌다. 중급의 소드 마스터가 보일 수 있는 오러 소드의 비산이었다. 검날 모양을 이룬 오러 소드는 검을 떠나 촉수를 베어 버렸다.
후드득!
네 가닥의 촉수가 마침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하룬의 몸 역시 두 사람의 앞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광대짓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모두 나서라!”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 모였다. 기사 여섯에 겨루라는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알랭 후작과 함께 촉수를 잃고 죽어가는 거대한 볼카웜을 향해 쇄도했다.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혹은 이 어두운 지하까지 와서 몇 번이나 죽을 고생을 했던 설움을 풀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체액이 위험한 것을 아는 만큼 찌르기는 지양하고 놈의 몸을 베는 데 주력했다.
알랭은 놈의 이빨에 몇 번이나 곤란함을 겪은 탓인지 여전히 놈의 이빨들을 상대로 자신의 오러 소드를 펼쳤다. 하지만 죽어 가는 상황이면서도 놈은 전신을 구부리거나 뒤틀며 항문으로 혹은 상처 부위를 통해 위험한 체액을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위험하다 싶더니 결국 희생자가 나왔다. 이곳까지 온 유일한 이방인 검사 겨루가 바로 그 희생자였다. 그는 놈의 체액을 몸 전체에 정통으로 뒤집어쓰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이전까지는 별로 신경 쓰지 못했지만 그는 무려 익스퍼트 중급에 해당하는 실력자였다. 도대체 레벨이 얼만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하이 랭커였다.
그 정도라면 못해도 레벨 120은 될 것이다. 현재 알려진 최고 랭커의 레벨은 104였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레벨 업 속도가 극악해지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성취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나중에 은밀하게 그의 정체를 알아보려 했는데 로그아웃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잠도 자지도 못한 상태에서 피로가 누적되어 그만 집중이 흐트러지고 체력이 소진되어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하룬이 급하게 몸을 날려 그를 안고 뒤로 물러섰다. 정신을 잃은 겨루는 이미 얼굴 반쪽이 녹아 뼈가 보였다.
-나이아, 부탁해.
-맡겨 줘요.
아까 딜런을 치료했던 그대로 그녀는 상처 부위를 정화시키고 산성 체액을 분리해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너무나 큰 고통에 겨루는 이미 혼절한 상태지만 얼굴 반쪽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눈 밑에서 턱까지 녹아내린 탓에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응급치료는 한 셈이었다.
“이젠 장난은 그만합시다! 모두 뒤로 물러서시오.”
마스론 후작의 말에 알랭 후작이 흠칫하더니 뒤로 몸을 뺐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물러나 하룬 옆으로 모였다.
“익스플로전!”
“파이어 블레스트!”
“파이어 블레임!”
“윈드 스피어!”
무려 네 가지의 마법이 연속으로 펼쳐졌다. 마법들은 이제 눈과 귀가 되어 줄 촉수가 사라진 볼카웜의 동체에 작렬했다.
꽈앙!
폭음과 화염이 놈의 동체를 덮었다. 바람 창이 동체를 찌르자 놈의 비명이 좁은 공간을 터질 것처럼 울렸다. 놈이 있는 곳은 온통 화염에 휩싸여 고기 타는 냄새가 놈 특유의 냄새와 섞여 코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크크크! 이제 끝이군.”
마스론 후작이 음침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익어가는 괴물의 최후를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악전고투 끝에 볼카우머을 잡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널브러질 정도로 피로도가 극심한 상태였다. 겨루 때문에 마나와 체력을 한계까지 소진한 하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잃은 겨루를 발밑에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하룬은 힘겹게 손을 움직여 마나 포션을 마셨다. 막 체력 포션까지 꺼내려는 순간 마스론 후작이 뭔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그가 내민 것은 상급 체력 포션이었다. 황금색의 상급 표시가 선명한 포션 병을 본 하룬이 잠시 망설였다. 100골드가 넘는 고가의 포션이다.
하룬은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는 피곤한 얼굴이지만 미소 짓고 있었다. 비록 노골적으로 적대하며 지냈지만 생사를 건 싸움을 같이하다 보니 미운 정이 든 모양이다.
“마시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네. 우리 모두는 자네 덕분에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알랭 후작이 옆에서 권했다. 그 역시 마나를 완전히 소진한 탓에 얼굴이 창백했지만 포션을 마셨는지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하룬은 포션 병을 받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크읏!”
상급 포션의 맛은 원래 이랬던가? 왠지 목이 타는 것처럼 따가웠고,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하룬도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기다리면 괜찮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좋아지기는커녕 몸에 서서히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룬은 손을 쥐려고 했지만 손가락들이 쉽게 구부러지지 않았다.
자신의 몸 상태에 놀란 하룬의 눈이 마스론을 향했다.
“흐흐흐. 이제 소식이 오나 보네.”
그가 음침한 얼굴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싸가지가 전혀 없는 놈이라 다를 줄 알았더니 똑같은걸. 약발이 확실히 받는 모양이군. 손이 제대로 쥐이지 않는 모양이야.”
“제아무리 날고뛰는 정령사라도 마비독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하룬이 고개를 돌리자 이제까지 같이 목숨 걸고 볼카웜을 상대했던 알랭이 차가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겨루를 뺀 나머지 기사들도 검을 쥔 상태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살기에 하룬의 얼굴이 굳었다.
“뭐지?”
“넌 이제 필요가 없다는 거지 뭐겠어?”
마스론 후작이 기묘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이게 예정된 수순이었나?”
“당연히! 용병 따위가 나서는 꼴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거든. 더구나 넌 제국 정보 길드에 너무나 큰 손해를 끼쳤어. 어차피 네가 아니어도 볼카웜의 이빨도 있고, 엘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도 찾았으니 돌풍은 이제 가치가 없어졌거든.”
“그런 거군.”
하룬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면면을 쳐다보았다. 벌써 온몸이 굳고 있었다. 입과 눈 정도만 움직일 수 있을 뿐 손발은 까닥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었다. 티노도 그런 소리를 했다. 그랬기에 딜런을 비롯한 사람들의 부상을 핑계로 먼저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비록 이제 죽는 일만 남았지만 나머지 돌풍 용병대원들이 걱정이었다.
“1황자 전하께서도 이 일을 아시나?”
하룬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아인델프의 심복으로 1황자의 신임을 받는 막심이 있었다. 비록 뒤로 빠져 있는 상태였지만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배신!
자신이 행사할 수도 있는 엄청난 이권까지 내주었다. 마음이 넓고 나름 인정할 만한 위인이라고 생각했던 1황자에게 당한 배신은 정말 뼛골이 시릴 정도로 아팠다.
“난 오래전부터 정보 길드에 속해 있었다.”
“그런 거였나?”
들끓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나마 죽는 순간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다. 1황자의 명령을 받은 거라면 정말 실망했을 것이다. 그와 돌풍을 증오하는 제국 정보 길드의 개라서 정말 다행이다.
“돌풍에 대해 자세하게 털어놓으면 편하게 보내 주겠다.”
알랭 후작의 말을 들으니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신도 제국 정보 길드였나?”
“당연하지. 우리가 아니면 또 누가 이 모든 세력들을 아우를 수 있겠나?”
그들은 모두 한패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그를 죽이기 위해 이 지하로 들어왔던 것이다.
“놀랍군. 소드 마스터에 7서클 마도사가 한낱 정보 길드의 개였다니.”
“후후! 개면 어떻게 아니면 또 어떤가?”
알랭 후작은 화조차 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 속 깊은 곳에서 짙은 회한이 잠시 일렁였을 뿐이다.
“멋지게 당했군!”
하룬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더 크게 미소 짓고 싶어도 이미 안면 근육에도 마비가 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담담할 수 있다니 인물은 인물이군. 쯔쯔! 자네와 좋은 인연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알랭 후작이 검을 빼 들었다. 잠시 후 그의 예검의 끝에 작고 푸른 마나가 이슬처럼 맺히더니 알사탕처럼 커졌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저 괴물에게 속절없이 죽었을 테니 편안하게 보내 주겠네.”
“알랭!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마스론 후작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아랭의 검첨에 맺힌 구슬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굳이 생명의 은인이자 동료를 괴롭힐 필요는 없지 않나, 마스론 후작?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마스론이 돌아보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비록 제거 대상이긴 하지만 하룬이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다들 알랭 후작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마스론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방법이 없었다. 행여 하룬을 고문하자고 우기면 당장 자신부터 해치울 기세가 아닌가. 길드장이 특별히 내린 명령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들 대부분이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들. 약속을 어긴 것도 부담스러운데 볼카웜을 잡는 데 막대한 공을 세운 이를 고문한다면 자신이 무사하긴 힘들다.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하룬은 싸가지를 소환 대기했다.
-싸가지, 내 몸 상태는 어때?
이미 중독되었다는 안내음이 들렸지만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해독약은 손발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라 불가능했다.
-완벽하게 당했어. 그러기에 좀 조심하지. 아무튼 우리 주인 문제라니까. 배신이나 당하고 말이야.
쌀쌀맞은 녀석. 희망 섞인 말이나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네가 독을 흡수할 수는 없는 거야?
-흡수하는 건 가능하지. 그런데 내 독이 더 센데.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주인은 결국 죽고 말 거야.
그건 녀석의 말이 맞았다. 자기가 당한 것은 지독하긴 하지만 단순한 마비독이지만 싸가지의 독은 온갖 오염 물질들이 혼합되어 독으로 변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하룬의 눈이 번득였다.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가만! 이젠 완전히 바보가 되었네.’
정령의 힘을 생각하질 못했다. 황급하게 상태 창을 확인해 보니 정령력 수치가 123이다. 비록 원래의 정령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지만 한 번 정도는 정령 마법을 펼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미 마나 포션을 마신 상태이기에 잘하면 해독약을 복용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제발!’
이들에게서 벗어날 기회가 필요했다. 7서클 대마법사와 소드 마스터의 손에서 벗어날 아주 짧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화르르륵!
뭔가 불안한 소리가 났다. 화염에 휩싸인 볼카웜이 있는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하룬에게서 눈을 떼고 볼카웜을 쳐다본 사람들이 경악했다.
“흐억!”
“화염이닷!”
볼카웜이 죽어 가면서 죽음과 맞바꾼 마지막 힘으로 이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화염을 방사한 것이다. 순식간에 가장 앞에 있던 기사 둘이 타 버렸다. 화염은 마스론이 펼친 화염 마법을 매개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실드!”
마스론 후작이 급하게 실드를 쳤다. 그 순간을 이용해 하룬은 라이피를 소환했다.
-라이피, 날 더 깊은 곳으로 데려다 줘.
라이피는 대답할 시간도 없다는 듯 하룬이 앉은 곳의 땅을 아래로 쑥 꺼지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겨루와 하룬이 땅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나는 아니지만 뭔가 강력한 힘의 유동을 느낀 알랭과 마스론의 눈빛이 급변했다.
하룬의 머리가 있던 곳을 다급하게 날린 알랭의 검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를 피했다고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스론의 의지를 받은 손목의 마법 팔찌에서 생겨난 시퍼런 뇌전이 아래로 떨어지는 하룬을 향해 역속해서 방사되었다.
“이런!”
“잡아!”
“죽여야 해!”
당황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크윽! 으으으!”
하룬은 땅속으로 꺼지는 와중에 비명을 질렀다. 엄청난 전격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한 것이다. 마스론이 급한 상황에서 마법 아이템을 이용해 전격 마법을 무려 세 번이나 연사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마스론은 솟아오르는 땅을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설마 입까지 마비된 상태에서 정령 마법을 쓸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마스론은 ‘선더볼트’가 내장되었지만 이제는 모든 힘이 사라져 버린 팔찌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가문의 보물로, 전해지는 말로는 이제는 자취를 감춘 드래곤이 만들었다는 신기神器로 자연에 존재하는 선더볼트를 담았다는 팔찌는 총 다섯 번의 사용 횟수를 다하고는 신기神氣를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그러지고 말았다.
‘너무 과했구나!’
마법으로 발현한 것과는 달리 대상물을 완전하게 태운 후에야 밖으로 빠져나가는 선더볼트였다. 자신의 선더볼트완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력인 것이다.
한 번이면 족했다. 세 번이나 쓸 일이 아니었는데 당황한 나머지 연속해서 남은 마법을 다 써버린 것이다. 가문의 선조들이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만 사용했던 보물이 사라진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무서운 놈! 하지만 살아날 수는 없었을 터, 후환은 없을 것이다.’
마스론은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볼카웜을 상대로 그 정도 위용을 보인 작자라면 그만한 능력은 있다고 봐야 했다. 어쩌면 그 역시 숨겨 둔 아이템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죽었겠지?”
“당연하지. 마비독에 온몸이 마비되고 체력도 바닥난 상태에서 전격 마법을 세 번이나 맞았는데 살 수 있겠어?”
사람들은 솟아오른 새 땅을 보며 불안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새 땅이지만 전격 마법 때문에 온통 시꺼멓게 타버린 땅이었다.
행여 하룬이 살아나서 이 일을 폭로하거나 소문내면 낭패다. 돌풍 용병대의 숨겨진 힘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니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갑시다!”
묵직한 알랭 후작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독한 놈!”
마스론이 새로 솟아오른 흙에 침을 뱉고는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알랭 후작의 기이한 눈빛이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언니, 발전기가 제대로 가동할까?”
벨은 수소 발전기의 터빈을 체크하는 아즈만에게 물었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가동하지 않았던 발전기라 걱정이 되었다.
단순히 보호를 위한 것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발전이 본격적으로 되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될 거 같은데 잘은 모르겠어. 이제까지는 태양광 발전으로도 충분해서 몇십 년 넘게 가동을 안 했거든.”
아즈만은 그동안 보존을 등한시한 수소 발전기를 꼼꼼하게 체크하며 대답했다.
가동을 멈춘 기지에 생존과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만 필요했던 때와 달리 나노봇을 비롯한 사이보그들을 대량 생산할 예정인 그녀들의 계획상 엄청난 전력이 필요했다.
“입자가속기만 제대로 가동하면 나머지는 괜찮을 거 같은데.”
아즈만은 쾌청한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고는 바위로 위장된 덮개를 번쩍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실제 바위를 위에 붙인 덮개의 크기는 약 4제곱미터에 무게는 400킬로그램이 넘었지만 그녀는 가볍게 덮개들을 들어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바위의 반 정도에 해당하는 덮개를 제거하자 정교하게 세팅된 수소 발전기의 내부가 드러났다. 수소 입자의 가속과 충돌을 통해 발전이 이루어지는 주 발전실과 충돌 에너지를 사용 가능한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터빈실을 비롯한 수많은 발전 시설들이 최소한의 공간을 차지한 채 촘촘히 밀집되어 있었다.
종말 시대 말기에는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기존 화석연료들이 소진되기도 했거니와 일부 글로벌 그룹들과 강대국들 화석연료를 무기로 삼아 다른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시키려는 시도를 하자 몇몇 과학자들이 태양광 발전과 수소 발전을 동시에 하는 시스템 발전을 고안한 것이다.
Reed Jensen(National Laboratory에서 근무한 레이저 전문가)과 딸인 Anne과 같이 발명한 SOLAREC이 바로 그것이었다.
수소 에너지는 종말 시대 초기(서기 200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각광받았지만 수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전기분해법을 이용해야 하고 결국은 화석연료를 더 태워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Jensen과 Anne 부녀의 솔라렉은 이 단점을 멋지게 해결했던 것이다.
전기는 집중 태양광 발전 원리를 이용해서 발전했다. 돋보기의 원리를 이용한 원반을 이용해 햇빛을 오목한 거울을 통해서 열을 한 곳에 집중시켜 그 열을 이용해 발전하는 것이다. 거울들은 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같이 회전하면서 동장하도록 설계가 됐다.
수소 생산하는 부분은 똑같은 돋보기 원리를 통해서 햇빛을 자그마한 원통(?)에 집중시킴으로써 이 엄청난 열을 이용해 이산화탄소를 일산화탄소 및 산소로 분해하는 것이다(CO2→CO+O2). 산소는 대기로 내보내고 남은 일산화탄소를 재빨리 물과 반응시켜 다시 이산화탄소 및 수소를 만드는 것이다(CO+H2O→CO2+H2). 이렇게 함으로써 수소를 생산하게 되고 해가 질 때 이 수소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잉여 수소는 다시 시제품이 나와 있던 수소 자동차에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수소 핵융합 발전기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몇 번의 개량과 비슷한 원리를 가진 발전기들이 연속해서 나오며 화석연료는 어느새 효용이 급격히 감소했고, 이것은 자원을 선점한 글로벌 그룹들과 강대국들의 부와 국력을 약화시켜 급격한 과한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자 최후에는 비극적인 종말 전쟁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부품들과 발전 시설을 살피는 아즈만의 머릿속에서 그런 기초적인 지식들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과학 지식과 기술력을 가진 그녀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최근 심해지고 있는 낙뢰落雷와 호기심이 강한 벨의 존재였다.
벨의 본체인 캡슐 안에서 전자기파에 연결되어 공중에 뜬 상태로 비욘드를 플레이하던 하룬은 선더볼트를 맞는 순간 동화율이 87%가 넘어가고 있었다.
벨은 본래 자동 발전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형이었기에 지금 하룬이 게임 중에 당한 선더볼트의 전류량은 충당할 수 없었다.
본래 벨의 기능은 주인으로 인식된 하룬에게 게임과 동일한 환경을 인공적으로 조성해주는 것이 1차적인 목표였기에 게임에서 맞은 선더볼트의 87%에 해당하는 전류량이 필요했다. 때문에 분체인 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본체인 캡슐은 외부에서 전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태양광 발전과 수소 발전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 전력이 있을 리가 없는 상황이니 대기 중에 흐르는 양전하와 음전하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장이 수시로 변하고 대기 중에 넘쳐흐르는 양전하와 음전하가 수시로 충돌해 벼락이 형성되는 배리어 밖 상황에서 벨의 본체가 강력하게 전하를 끌어당기자 높은 곳에서 강력한 벼락이 형성되어 낙뢰로 떨어져 버렸다.
시퍼런 뇌전이 발전 시설의 축전기를 강타했다. 강력한 전하의 인력이 생성된 곳이었다. 피뢰침은 아즈만이 옮겼던 바위 덮개에 있었기에 뇌전은 정확하게 축전지를 향했다.
하지만 다른 낙뢰라면 당연히 따라왔어야 하는 굉음은 없었다. 그 엄청난 낙뢰가 가진 전류가 순식간에 하룬의 몸을 타고 흘렀던 것이다.
“엇!”
“헉!”
뜻밖의 상황에 놀란 벨과 아즈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시퍼런 뇌전에 휩싸였다. 비록 유기질과 무기질의 나노 단위 재료로 만들어진 바이오컴퓨터였지만 하룬의 몸이 원하는 전류를 초과한 전류가 다른 전도 물질을 찾아 이동하는 대상에서 비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떨어진 낙뢰의 총에너지의 대부분이 하룬의 몸에 집중되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녀들의 육체는 모두 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바이오칩으로 만들어진 그녀들의 신경세포는 물론 뉴런들도 마비 상태에 빠져 버렸고, 마치 핵전지가 방전된 사이보그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서 있어야만 했다.
벨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하룬으로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벨의 존재로 인해 게임에서 행하는 각종 움직임은 물론 물리적 타격까지 동화율만큼 적용되는 그로서는 실제로 사망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게임 안에서의 데미지가 실제의 육체에 그 동화율만큼 적용되어 데미지를 입는 것이다. 그런 점을 하룬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게임에서 익힌 스킬이나 수련이 현실에서도 사용 가능하거나 효과가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게임의 아바타가 피해를 입을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