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헬 몬스터, 볼카웜! (99/278)
  • 《헬 몬스터, 볼카웜!》

     “어서 오십시오.”

     지하 광장으로 들어서는 아인델프 일행을 마중 나간 티노는 그들의 행색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 안 그래도 벌써 도착했어야 할 사람들이 소식이 없어 그를 비롯한 몇 명이 수색을 하려고 생각 중이었다.

     “역시 먼저 도착했군. 티노 부대장인가?”

     아인델프의 목소리는 가뭄에 갈라진 밀밭처럼 푸석푸석했다.

     “네.”

     “중간에 볼카웜과 부딪쳤네. 기사 둘을 잃었지.”

     이럴 때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섣불리 위로를 하거나 말을 받을 위치도 아닌 것이다.

     “쉴 곳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리로.”

     “고맙네.”

     아인델프 일행은 티노를 따라 광장 한편에 피워진 불가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오는 동안 발견한 석탄 덩어리를 몇 개 캐 온 것으로 불을 피운 것이다. 지하 깊숙한 곳이라서 그런지 꽤 서늘했는데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자 긴장이 확 풀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오, 하룬 대장.”

     걱정이 되어 다른 통로로 얼마간 들어갔다가 소리를 듣고 나온 하룬이 인사하자 아인델프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이전에 1황녀를 수행하고 찾아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말투며 행동에 하룬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레스, 따듯한 차를 좀 준비해 줘.”

     “네, 대장.”

     일행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데다 남들보다 무력이 달리는 아레스는 팀의 막내를 자처했다. 기자가 된 이래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아서 그런지 적극적으로 바뀐 성격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인델프 일행이 따듯한 차로 몸과 마음을 덮은 긴장의 장막을 걷어내자 하룬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가로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아인델프 일행에게 쏠렸다.

     “볼카웜과 조우했네. 정말 악마 같은 놈이었네.”

     아인델프를 대신해 다프가 볼카웜과 마주했을 때부터의 상황을 상세하게 풀어놓았다. 볼카웜의 외모를 바닥에 그려가면서까지 말이다.

     아인델프는 자신이 볼카웜과 싸웠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놈이 가진 여덟 개의 바깥쪽에 난 이빨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얼마큼의 빠르기를 가졌는지 설명하면서 그는 혀를 내둘렀다.

     “놈은 마치 여덟 명의 익스퍼트 상급 실력을 가진 검사들을 한데 뭉쳐 놓은 것과 같았네. 5서클의 마법 공격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마법에도 강력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네. 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질 않네.”

     아인델프의 처연한 말에 딜런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번득였다. 자신과 비슷한 무위를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 아인델프의 말 속에서 은은한 공포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아인델프 일행에게 볼카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하룬은 몇 번이가 질문해 상세한 점까지 파악했다.

     ‘걱정이군. 이 정도의 괴물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이렇게 되면 아직까지 오지 않은 사람들은 놈에게 잡아먹혔다고 보는 게 맞는 건가?’

     굳이 입 밖으로 그런 사실을 꺼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옵니다.”

     감각이 뛰어난 티노가 광장 한쪽에 난 통로를 향해 달려갔다.

     “으응, 저들은?”

     1황자가 보낸 1조였다. 곧 소드 마스터에 오를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 융크란 백작이 세 명의 수하와 함께 피에 물든 외양으로 온 것이다. 그들 역시 볼카웜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불가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는 그들의 눈에는 안도의 빛이 일렁였고, 긴장이 풀린 듯 기사 한 명은 다리의 힘이 빠져 티노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출발한 지 하루 정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지하 광장에 온 인원은 겨우 칠십이 명에 불과했다. 모두 나름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검술 실력이며 마법 실력을 가진 인물들인데 지하로 내려온 하루 사이 3분의 2가 볼카웜이란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학살당한 것이다.

     무사히 지하 광장으로 내려온 조는 하룬 조, 원로원과 최고 귀족 회의에서 파견한 두 조 그리고 10대 용병단 중 하나인 클라우드에서 파견한 조가 고작이었다.

     전력에서 많이 달리는 이방인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다른 조들은 경쟁의식 때문에 최고의 실력자들이 한둘씩 섞여 있었지만 이방인 길드에는 그런 실력자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가지고 내려온 마른 음식으로 배를 채운 사람들은 저마자 편한 자리를 차지하고 휴식을 취했지만 하룬 일행은 번갈아가며 통로의 기척을 살폈다. 그나마 클라우드 조에서 교대를 해 준 덕분에 조금 쉴 수 있었다.

     하룬은 가부좌를 틀고 마나 플로를 돌렸다. 단시간에 몸의 피로를 없애는 데는 마나 플로가 최고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하룬은 몸 상태가 다시 활력을 찾자 클라우드 조와 교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인물이지만 예사롭지 않은 자였다.

     “하룬 대장, 날 좀 보세.”

     “하룬입니다.”

     상대를 몰라 먼저 인사했다. 상대는 날카로운 매부리코를 가진 중년의 인물로, 심상치 않은 기도를 뿜어냈다.

     “난 마스론 후작이네. 샤닌 마탑의 주인이지.”

     들어본 바 있는 인물이다. 7서클 마도사로,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 중 한 명이다. 다만 샤닌 마탑이 예전에 원로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 역시 그러하네. 용병으로 자네만 한 무명武名과 유명세를 떨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네.”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다.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메마른 목소리는 날카로운 외모와 함께 불편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생존한 이들끼리 회의를 하려고 하네. 자네도 참석하게.”

     그는 하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따로 피운 불가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자 몇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그 면면이 가히 최고의 인물들이었다. 물론 대회의나 출정식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하룬이 모르는 인물들도 몇 명 있었다.

     “어서 오게.”

     반갑게 맞이하는 이는 이미 안면이 있는 아인델프와 융크란 백작 그리고 전에 다카린 용병단을 통해 인사했던 클라우드 용병단의 부단주 빌더스였다.

     “하룬입니다. 지도 때문에 출정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모르는 이들에게 용병식 인사를 하자 그들도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 알랭 후작일세.”

     유명한 인물이다.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이 자리에 왔는지 모르겠다. 골든 배틀의 강력한 후보 중 한 명인 7황자의 후견인이자 제국의 검으로 불리는 최강자였다.

     “고롱보스 기사단 단장 데니스 백작일세.”

     그는 누군지 모르겠다. 일개 용병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불쾌하다는 것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인물 따윈 관심도 없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하룬이 불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마스론 후작이 용건을 꺼냈다.

     “네기 명목상이긴 하지만 이번 토벌대의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회의를 주재하겠소.”

     그는 마치 허락을 구하듯 잠시 말을 멈추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여서 아인델프를 비롯한 몇 사람의 눈살이 일그러졌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소. 이것은 정보가 부족한 것에 크게 기인하는 것으로 이곳에 대한 정보를 맡은 돌풍 용병대의 잘못이 크오.”

     대뜸 하는 소리가 그따위라니!

     하룬이 뭔가 반론을 펴기도 전에 그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깟 괴물에게 습격당해 먹잇감으로 전락한 자들은 자신의 실력 없음에 저승에서라도 반성해야 할 것이오. 그러게 평소 실력을 키우는 데 매진했더라면  한낱 몬스터의 먹이가 되지는 않았을 거요.”

     스르릉!

     갑자기 아인델프의 곁에 놓여 있던 검갑에서 검이 뽑혔다. 날카로운 검날의 예광이 주위로 퍼졌다. 융크란 백작 역시 기세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마나가 급격하게 유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 물론 그건 일부 자각 없이 주인의 힘을 믿고 세를 과시하던 멍청이들에게 해당하는 소리였소.”

     약간은 떨리는 것 같은 마스론 후작의 목소리였다.

     차악!

     검이 다시 검갑에 채워졌다. 급격히 유동하던 마나가 봄눈처럼 사라져 버렸다.

     “용병 하룬! 어찌 그리 허술한 정보로 우리 전력을 이렇게 깎아 버렸나? 감히 용병 주제에 황자 전하들과 독대 몇 번 했다고 네놈이 그렇게 광망하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 달랑 지도 한 장 보내는 것으로 네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나? 이 많은 희생자들을 어떻게 책임질 건가?”

     황당했다. 하룬은 자신이 왜 마스론 후작에게 이런 질타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여 이곳 주민이었다면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자신은 아니다.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강렬한 분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뭐, 뭐야? 가, 감히 네가…….”

     하룬으로서는 황당했지만 마스론 후작은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얼굴이 일그러지며 주문을 외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매너 없는 인간에겐 예의 따윈 필요 없지.’

     무력시위를 벌이기로 마음을 먹은 하룬은 세 정령을 소환했다. 입술을 움직이기라도 하면 한 방에 날려 버릴 조합을 떠올린 하룬의 단호한 기세에, 모인 사람들이 움찔했다.

     다들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라 강력한 마나의 유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감지한 마나의 유동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당신이 뭔데 나에게 황자 전하들도 감히 묻지 않는 책임을 지라는 거지?”

     얼굴을 들고 마스론 후작을 바라보는 하룬의 눈이 어느새 붉게 변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의 광망이 마치 달구어진 꼬챙이처럼 마스론 후작을 향하고 있었다.

     “다, 당신? 이, 이런 천한 놈이 감히 어딜…….”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지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아무리 유명한 용병이라도 후작이라는 고귀한 귀족이자 마탑의 주인인 자신에게 이렇게 살벌하게 나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엘프들과 협상한 게 죄인가? 당신이 속한 원로원에 던전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준 것이 잘못인가? 그도 아니면 음지에서 활동하는 비밀 대원 열둘의 목숨과 바꿔 겨우 만든 지도를 건네준 것이 잘못이었나?”

     이빨이 절로 갈렸다. 이놈의 귀족들은 현실의 노블과 똑같았다. 물론 개중에는 쓸 만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신분만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압박하는 게 일상이다.

     하지만 하룬의 말이 위협이라고 생각했는지 마스론 후작의 음성이 높아졌다.

     “감히 용병 놈이 어디 귀족에게 그딴 막말을 하는 것이냐? 엘프어를 좀 한다고 전하들을 현혹시켜 던전에 들어갈 자격을 받으니 네놈이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아는 모양이지.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네놈을 제국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리하겠다. 이노-옴! 당장 꿇어랏!”

     그의 노호성을 들은 이들 중 아홉이 불가를 향해 달려와 하룬을 포위했다. 아마도 원로원이 파견한 인물들일 것이다.

     하룬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주변엔 어느새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마스론 후작을 비롯해 사람들이 앉은 바닥은 미세하게 떨렸다.

     -나이아, 워터 밤을 준비해 줘.

     하룬의 몸 주변에 부는 바람 속에는 어느새 수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생겨나 있었다. 아무리 7서클 마법사라 할지라도 지근거리에서 워터 밤이 폭발하면 무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개념 없는 작자가 이끄는 토벌대는 사양이다. 그의 막말에도 아무 반응이 없는 다른 이들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던전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 등을 맡길 수 없는 동료는 적보다 더 위험한 법이다.

     “돌풍 용병대는 이번 토벌대에서 빠지겠소. 또한 던전 역시 포기하겠소. 황자 전하들께서도 뭐라 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후작께서 문제를 삼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소. 이번 협상에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다른 분들도 동조하는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나가서 엘프들과 협상을 없는 것으로 돌리겠소. 그러니 이번엔 후작께서 직접 협상하시오. 분명히 말하지만 돌풍 용병대는 볼카웜 토벌대의 정보를 책임지겠다고 한 적이 없소. 대원들의 희생을 무릅쓰며 볼카웜을 잡는 데 도움이 될 일을 한 것을 문제 삼는 후작과 동조하신 분들의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제국의 후작이라도 황자 전하들이 인정한 내게 없는 죄를 씌울 수는 없소.”

     하룬은 이제 막나가기로 결정했다. 제국 정보 길드의 입김을 받은 이런 인사가 이끄는 토벌대라면 설령 볼카웜을 잡는다고 해도 무엇이건 트집을 잡아 그에게 없는 죄를 씌울 것이 분명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우리끼리 떨어져 나가 볼카웜을 한 마리라도 더 잡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정나미가 떨어졌다.

     “비켜!”

     하룬은 벼락처럼 손을 휘둘렀다. 이미 전신을 휘감아 돌고 있는 위신느가 오러 소드와 같은 날카로운 바람칼을 휘둘렀다.

     “흐윽!”

     “흑!”

     그를 반원형으로 포위했던 기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투명한 윈드 소드의 기운을 느끼고는 황급하게 몸을 숙이거나 굴렀다. 강력한 풍압까지 동반한 윈드 소드는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그들의 심혼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부대장, 올라갈 준비를 하시오. 내 1황자 전하와 1황녀 전하를 직접 만나 왜 우리가 토벌대의 정보를 책임지게 되었는지 사정을 알아볼 것이오.”

     “네, 대장!”

     티노는 물론이고 다른 조원들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군장을 꾸렸다. 마치 미리 준비를 시킨 것처럼 그들의 행동은 민첩하고 절도가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스론 후작의 얼굴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설마 이렇게 전격적으로 행동할 줄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다급한 눈빛이 알랭 후작에게 향했다.

     ‘빌어먹을! 한번 기를 죽이려고 한 것인데…….’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후작이 말한 대로 돌풍 용병대가 토벌대의 정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들은 바가 없다. 오히려 이곳에 내려오는 동안 돌풍이 전한 지도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무사하게 올 수 없었으리란 것을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진짜 하룬이 위로 올라가 던전 사항을 주재하는 1황자와 1황녀에게 이 사실을 고하기라도 하면 아무리 자신이 제국에 다섯이 넘지 않는 대마도사에 후작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더 벌어질지 모르는데 엘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이 이 고요의 땅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이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해서는 그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제국 정보 길드와 얽히면 좋은 일을 하고도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세간의 평가가 정확한 것이었군.”

     아인델프의 입에서 조소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대놓고 후작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스론 후작은 평소처럼 발작을 할 수 없었다. 아인델프는 그의 마법 실력으로도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는 대단한 자였고, 그의 배후에는 1황자가 있다.

     “이보게, 하룬 대장!”

     몇 발자국을 뗀 하룬은 낮으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다들 너무 긴장한 데다 자네와 돌풍이 궁금한 나머지 마스론 후작이 농담을 한 걸세. 너무 노여워 말게. 안 그런가, 후작?”

     “그, 그렇소. 난 그저 돌풍 용병대와 하룬 대장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농담, 아니 시험을 한 거요. 암! 같이 볼카웜을 잡으려면 그 인성이나 실력을 알아봐야 하니 말이오.”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함께 안도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국의 두 후작이 그렇게 주장하니 하룬도 막나갈 수는 없었다. 아까처럼 막무가내로 핍박을 가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엇나간다면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게임을 접을 생각이라 상관없지만 티노와 도네이스 그리고 딜런은 정말 곤란해질 수도 있다.

     마음을 정한 하룬은 웃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후작께서는 무슨 농담을 그리 실감나게 하셨습니까? 전 정말 후작께서 타고난 협잡꾼인 줄 알았습니다. 하긴 대마도사께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귀족이라는 권위와 그 신분으로 누를 비겁하고 덜떨어진 분은 아니시겠죠.”

     그 말에 마스론 후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곧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제국의 최고위 귀족인 후작이 일개 용병에게 이런 조소를 받고 참아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광장 이곳저곳에서 숨죽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 중에는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많았다. 그들 역시 마스론 후작이 부린 억지에 역겨움을 느꼈고, 하룬의 말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하고 통쾌함을 느꼈던 것이다.

     마스론 후작의 몸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수염 역시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뭐라고 대꾸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속으로 분노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 마스론 후작께서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는 성공했으니 이제 볼카웜이라는 괴물을 상대할 방안을 의논해 봅시다.”

     어느새 알랭 후작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끌었다. 알랭 후작에게 강렬한 경쟁의식을 느끼는 마스론 후작으로서는 통탄할 일이지만 이제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없었다.

     ‘저놈 때문이야!’

     마스론의 날카로운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의 살기는 아지랑이처럼 녹여 버리는 살벌한 하룬의 시선에 눈을 돌리고 말았다. 감히 마주 대할 수 없는 끔찍한 야성과 지독한 살기가 그의 심혼을 흔든 것이다.

     ‘천한 용병 새끼!’

     마스론은 내심 이를 갈았지만 이제 섣불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로서는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했지만 살벌한 하룬의 시선을 감당하는 것은 거절하고 싶었다.

     볼카웜을 지하 광장에서 처리하려는 시도가 먼저 이루어졌다. 자신의 동체에 딱 맞는 지하통로에서는 협공도 힘들 뿐 아니라 놈의 저돌적인 돌격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볼카웜은 지하 광장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놈 역시 넓은 곳에서는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틀을 꼬박 매복했지만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생존자들을 네 조로 나누어 놈을 사냥하기로 했다. 하룬은 마스론 후작의 교묘한 언변에 조장도 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영양가 없는 책임자 자리는 이제 사절이다.’

     하룬 일행은 아인델프 조에 속하게 되었다.

     척후에는 남다른 감각이 있는 티노와 하룬이 낀 아인델프 조는 몇 번이나 볼카웜의 후미를 따라잡았지만 놈의 결코 뒤를 허락하지 않았다. 녀석 역시 후미를 인간들에게 허용하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을 때 결국 사고가 터졌다. 마스론이 이끄는 조가 네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멸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융크란 백작이 이끄는 조 역시 다섯 명만 겨우 살아남을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룬과 함께한 자들을 제외하면 이방인들은 이제 완전히 전멸했다. 애초에 그 무위가 떨어지는 데다 누구도 그들을 지켜줄 생각을 하지 않은 탓이다.

     “빌어먹을! 한 놈이 아니었어!”

     맞았다. 마스론 후작의 말대로 고요의 평원 지하에는 몇 마리의 볼카웜이 서식하고 있었다. 놈들은 인간 못지않은 지능을 지니고 있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지 융크란 백작 조를 상대할 때는 협공까지 했다고 했다.

     “이제 겨우 4분의 1만 남았소.”

     알랭 후작의 말은 무거웠다. 하룬 조와는 달리 다른 조들은 볼카웜을 상대하는 것이 쉬울 줄 알고 음식도 일주일 분량만 준비했다. 이렇게 피해가 큰데 보급을 위해 지상으로 나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놈을 제대로 상대합시다. 하룬 대장, 놈을 유인해 주시오.”

     유인?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들은 잘 알면서도 그걸 부탁하고 있었다.

     “난 하룬 대장의 몸이 얼마나 날렵한지 보았소. 우리 중 누구도 대장처럼 발이 빠른 사람은 없소. 놈만 제대로 유인할 수 있다면 우리가 차륜전을 벌여서라도 처치할 것이오. 부탁하오.”

     하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놈이 얼마나 빠른지 잘 알고 있었다. 지하 통로를 통해 놈을 쫓거나 놈과 직접 마주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놈이 육중한 동체에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들었다.

     “뭐하나? 제국의 검께서 명령하시지 않는가? 4인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감히 거부할 생각은 아니겠지? 4인 회의는 지하에 모인 모든 세력을 대표하는 기구란 말이다.”

     이때다 싶은지 마스란 후작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속내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놈을 잡을 유일한 방법이다. 돌풍의 이름값은 해야지. 용병들을 이런 토벌대에 넣어 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데 중요한 임무까지 맡기니 영광으로 알아라.”

     “그런 영광은 사절합니다.”

     그 말에 마스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낱 용병에 불과한 천한 놈이 사사건건 후작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천불이 솟았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하룬이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들을 태세이자 알랭 후작은 반색하며 물었다.

     “놈을 찾아낼 수는 있지만 유인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스론 후작 정도의 대마도사께서 저와 동행해서 놈의 화를 돋우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질 겁니다. 마법으로 공격해서 화를 돋우고 놈을 유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은 이곳에서 후작 각하밖에 없습니다. 마법으로는 제국에서 첫째가라면 서러운 분이니 말입니다.”

     그 순간 마스론 후작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설마 하룬이 자신을 끌어들일 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난 원거리에서 요격하는 마법사란 말이다. 너처럼 빠르지 않다고.”

     “흐음, 그거 괜찮은 방법이군요. 후작의 실력으로 헤이스트 마법을 연속해서 사용하면 여기 있는 어느 누구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말이오.”

     당장 아인델프가 찬성하고 나섰다.

     “나도 찬성이오. 명목상이긴 하지만 이 토벌대의 수장을 맡고 있는 마스론 후작께서 직접 나선다면 제국의 모든 이들이 그 감투 정신을 찬양할 것이오. 황실을 우습게 보는 마법사들도 마스론 후작을 본받아 제국과 황실을 향한 충성심이 고양될 것이오.”

     융크란 백작도 찬성표를 던졌다. 넷 중 둘이 찬성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이미 한번 놈과 맞붙어 자신의 마법으로도 별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던 마스론 후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럼 그렇게 결정합시다.”

     알랭 후작의 말에 마스론 후작은 심장이 털썩 내려앉았다. 전투 마법사도 아니고 수십 년 이상 마탑주로 마법 실력을 쌓기보다는 정치에 주력해 온 그로서는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라는 말이었다.

     “네, 네놈!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날 걸고넘어지는 거냐?”

     후작은 더 이상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이미 자리를 떠난 세 사람을 향해 망연자실한 시선을 던지다가 하룬을 노려보았다.

     “후작께서는 저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절 끌고 가셨습니까?”

     “그, 그야…….”

     “전 기사도를 배우지 않아 절 해치거나 위해를 가하는 자는 이제껏 그냥 놔두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것이다. 힘없는 약자의 비애를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든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룬은 질린 얼굴로 더 이상 말을 못 하는 마스론 후작을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던졌다.

     “후작께서는 이제까지 너무 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만 상대하셨나 보군요. 그 정도 연륜에 드러내 놓고 적의를 표시하다가는 언제 뒤통수에 화살을 맞을지 모른다는 평범한 진리마저 모르시는 듯합니다. 저야 별 볼일 없는 용병이지만 후작께서는 그 지위까지 올라가기 위해 원한도 많이 쌓으셨을 것 같은데…….”

     마스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몇 년 동안 마탑에서 나오지 않는 사이 감이 많이 떨어졌구나!’

     사람 보는 눈도 없어졌다. 예전에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지 어떨지 귀신처럼 파악해서 처신하곤 했는데 그새 나이가 든 것인지 아니면 정말 감이 떨어진 건지 이 살벌한 젊은 놈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1황자와 1황녀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그 역시 그들에게 마법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가 본 어느 귀족 자제들보다 더 영민하고 뛰어난 이들이다. 그들이 단순히 작위나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깔아뭉갤 수 있는 평범한 용병을 열 내며 칭찬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놈이 날 노리고 있다!’

     자신이 그렇듯 놈도 거리낌 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노리고 있다. 예전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는 남의 칼로 상대를 해치우는 것이 그를 비롯한 정치 마법사들과 고위 귀족들의 특기가 아닌가?

     ‘휴우. 지난번 정령력의 유동으로 보아 정면으로 싸워도 만만치 않은 놈인데 내가 너무 일찍 이빨을 드러냈구나.’

     적과의 동거에 익숙한 그이지만 하룬의 능력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종류이기에 마스론 후작은 심사가 복잡했다. 확실한 것은 놈이 후작 위 같은 것은 전혀 존중하지 않는 무도한 작자지만 그 숨겨진 능력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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