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볼카웜 토벌대 (98/278)

《볼카웜 토벌대》

 현실 시간으로 닷새, 게임 시간으로 보름을 꼬박 수련에 매진했던 하룬이 비욘드에 접속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돌풍의 막사가 있던 자리는 여전히 공터로 남아 있었기에 어비스 용병단으로 향한 하룬은 그곳에서 막사 하나를 얻어 그 안에 모인 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딜런은 이번 수련으로 뭔가 얻은 것이 있었는지 전보다 더 심유한 눈빛으로 그를 맞이했다.

 “딜런 경, 축하합니다.”

 날 선 검처럼 예리했던 그의 기도는 어느새 평범한 촌부의 그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분명 벽 하나를 깬 것이다. 제 일처럼 기뻐하는 하룬의 진심이 전해지자 딜런이 드물게 쑥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허허, 다 대장 덕분이네.”

 “대장!”

 “대장!”

 딜런과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언제 온 것인지 몰라도 아레스는 물론이고 매그럼과 초른, 뫼비우스도 그를 반겼다.

 동맹 관계를 맺은 후 아예 근처에 막사를 친 아반 일행과 발트랑 일행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과는 달리 이미 하룬과 함께 던전 입장이 결정된 상태라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들에게 하룬의 존재는 그야말로 행운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의뢰에 불과했지만 한번 맺은 인연으로 엄청난 행운을 잡았으니 하룬을 가볍게 대할 수가 없었다.

 세류의 코엠 길드원들도 소식을 듣고 몰려나왔다. 세류는 하룬에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지만 사람들이 부담스러운 듯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환대에 무표정했던 하룬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현실이든 게임이든 이제야 겨우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는 것을 배운 하룬의 표정은 어색하기만 했지만 다행이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인접한 터라 금방 소식을 받고 달려온 프레스 단장과 어비스의 피엘과 엘저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막사 안으로 들어간 하룬은 현 상황에 대해 티노에게 보고를 받았다.

 “대회의는 이틀 전에 끝났습니다. 엘프들이 요구한 메스 기사단 문제 때문에 원로원 측 진영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여기 모인 모두를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엘프를 강간해서 죽인 자들과 그 책임자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요.”

 하룬은 혹시라도 종족의 자존심 운운하며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던전의 유혹은 그의 생각보다 더 큰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를 제외하고 던전에 들어갈 총 열아홉 개 팀이 결정되었습니다. 먼저 기득권을 가진 여섯 황자와 원로원 그리고 최고 귀족 회의 측이 입장 권한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황자들끼리 은밀하게 이루어진 비밀회의를 통해 나머지 황자들에게도 입장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클라우드 용병단과 메이소 용병단이 30만 골드를 내고 한자리를 차지했고,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세 이방인 길드가 액수 미정의 참가비를 내고 나머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티노가 이렇게 간단하게 보고를 하지만 그 과정은 정말 복잡하고 시끄러웠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까지 와서 던전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는 상황은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방인들은 유니온별로 뭉쳤어요. 코원과 코투 유니온이 연합한 세력과 차 계열의 유니온이 한 세력, 나머지 인 계열의 유니온들이 한 세력이 되었어요.”

 헤니 역시 따로 알아보았는지 각각의 세력에 대해 짧게 보고했다. 아마도 유저들이 생각한 대로 각 유니온들 역시 이번 던전 건에 전력투구하는 것 같았다. 마법서들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황자들이 이번 기회에 막대한 군자금을 얻었군. 특히 1황자와 1황녀는 꽤 많은 돈을 챙겼겠는걸.’

 하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만약 돌풍 용병대가 이렇게 했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다행히 이 테론 제국의 실세인 황자들이 주재한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두고 이러저러한 불만을 쏟아 낼 간이 큰 NPC는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세류가 이끄는 코원 길드처럼 스토리 퀘스트를 위해 골든 배틀 세력에 달라붙지 않은 길드들은 던전에 들어갈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아마도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 이대로 있을 유저들이 아니었다.

 “대회의를 통해 선발된 팀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해 가면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단독 혹은 연수를 통해 따로 볼카웜이란 괴물을 잡겠다는 것이죠.”

 그 말에 하룬은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볼카웜을 잡기만 한다면 엘프들이 던전에 입장시켜 주겠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던전이 아니라 볼카웜을 잡다가 실력이 떨어지는 NPC들과 유저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볼카웜이란 몬스터에 대해 아는 사실은 거의 없지만 엘프들이 그놈을 잡는 것을 조건으로 한 것으로 보아 보통 몬스터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볼카웜을 잡기 위한 토벌대는 각 팀에서 익스퍼트 급의 기사 다섯과 4서클 이상의 마법사 다섯으로 파견해서 꾸리기로 했습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 이백 명의 인원으로 볼카웜이라는 괴물을 없애지 못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1황자 전하로부터 볼카웜 토벌대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토벌대를요?”

 “네.”

 1황자의 생각을 모르겠다. 아무리 그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용병에 불과한 하룬에게 그런 중책을 맡기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원들이야 자신들의 대장이 그런 중책을 맡는 것에 흥분한 얼굴이지만 하룬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우리 돌풍의 이름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겠군. 어떻게 할 건가, 대장?”

 딜런이 기대 어린 시선으로 하룬을 보았다.

 “결속이 될 리가 없는 급조 세력입니다. 또한 잘나고 고귀한 분들이 많을 테니 제가 지휘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제대로 볼카웜을 상대하려면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하룬의 대답에 딜런은 미처 생각 못 한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자신이야 하룬을 지근거리에서 보아 왔기 때문에 그의 뛰어난 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아무리 뛰어나도 용병에 불과한 하룬의 지휘를 제대로 따를 리가 없었다.

 “하룬 대장, 우리 측 전력은 어떻게 할 텐가?”

 프레스가 흥분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하룬에게 물었다.

 “그건 단장님들이 결정해 주십시오. 저희 돌풍에서는 저와 딜런 경 그리고 티노 부대장이 갈 겁니다. 아! 볼카웜을 상대하는 모습을 촬영해야 하니 아레스도 가야겠군요.”

 그에게 지명받지 못한 도네이스와 헤니의 얼굴에 금방 불만의 빛이 떠올랐지만 서늘하고 단호한 하룬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장이 한 말에 토를 달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좋아! 우리는 엘저와 보푸란 조장이 갈 것이오.”

 “우리 다카린은 부단장인 푸린 마법사를 보내겠소.”

 아레스를 포함하면 모두 일곱 명이다. 하룬은 아반을 비롯한 외부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같은  팀이니 한 명씩은 파견해야 구색이 맞는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세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코엠 길드는 난도 부길드장을 파견하겠어요.”

 그 사이 코엠 길드는 비류 대신 3인자였던 난도를 부길드장으로 조직을 개편했나 보다.

 “우리는 묘 전사를 보내겠습니다.”

 묘라면 어느 정도 전력이 될 것이다. 비록 익스퍼트에 근접한 소드 유저 최상급이지만 실전은 꽤 많이 치른 전사였다.

 “저희는 겨루 전사장이 갈 겁니다.”

 난도와 묘는 하룬이 이미 아는 사람이고 발트랑이 추천한 겨루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니온 군부 인물로 추측되는 발트랑 측의 전사장이라니 믿을 만할 것이다.

 아레스를 빼면 공히 익스퍼트 급에 근접한 실력자들이니 자격 미달은 없었다. 다만 마법사가 두 명밖에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룬 역시 마법사나 다름없으니 어떻게든 무마될 것이다.

 “그럼 나중에 볼카웜을 잡고 나선 이전에 합의한 대로 다카린 30, 어비스 15 그리고 돌풍과 세 이방인 길드의 55 비율로 던전에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을 냅시다.”

 프레스가 주먹 쥔 손을 내밀며 다른 사람들을 응시했다. 하룬과 피엘을 비롯한 다섯 명이 불끈 쥔 주먹을 프레스의 주먹과 마주쳐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최선을 다해 보지요.”

 “우리 어비스 역시 최선을 다하겠소.”

 “다카린은 친구를 절대 배반하지 않겠소.”

 “코원은 동맹의 든든한 허리가 되겠어요.”

 “아반가르드는 동맹의 검이 되겠소.”

 “저희 역시 동맹의 날카로운 창이 되겠습니다.”

 이미 하나로 뭉친 여섯 무리의 수장들은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마주하며 우의를 다졌고, 막사 안에서는 곧 작은 잔치가 열렸다. 이 술자리에는 여섯 세력의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해서 친교를 다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1황자 진영을 방문한 하룬은 금전적인 보상의 절반에 해당하는 47만 5천 골드를 받는 것과 동시에 불카웜 토벌대를 이끌어 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강력하게 고사했다.

 그 제안에는 1황자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지만 조리 있게 용병이 존귀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이끌 수 없다는 이론을 펴자 결국 1황자도 더 이상은 권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 출정식을 가질 테니 일찍 오시게. 같이 아침식사라도 하자고.”

 비록 황궁은 아니지만 현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인 1황자의 식사 초대가 하룬은 불편하기만 했다.

 “고맙고 영광스러운 말씀이지만 전 할 일이 있어 토벌대가 지하로 향할 때 합류하겠습니다.”

 연속되는 고사에 1황자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곁에 있던 란트렐이 눈치를 주었지만 하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미리 다른 대원들을 보내 지난 보름 동안 지하에 볼카웜들이 뚫어 놓은 통로를 확인하게 했습니다. 어제 정도는 왔어야 하는데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작업이 미진한가 봅니다. 오늘은 그 대원들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거 같습니다. 다녀오는 대로 지하 통로의 지도를 넘겨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1황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요청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던전 입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활동을 돌풍 용병대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그렇군. 하긴 우리는 어떻게 지하로 들어가는지 몰라서 오늘 각 세력을 소집해 그걸 의논하려 했는데 역시 돌풍 용병대군.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내 권위를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했네. 그런 이유라면 더 이상 권할 수 없겠지. 그럼 대장 대신 부대장이 회의에 참석하게. 그리고 혹시라도 일이 일찍 끝나면 출정식에 참석하게나. 내 자네와 돌풍 용병대의 위상을 한껏 올려 줄 테니까.”

 황자의 말을 들은 하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이런 상황에서 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안 그래도 아레스를 비롯한 유저들이 돌아다니며 파악한 분위기로 보면 여기 모인 인간들은 돌풍 용병대에 감탄 반, 시기 반인 상태였다.

 함께 점심 식사나 하자는 1황자의 제의에도 대원과의 약속을 핑계로 막사에 돌아온 하룬은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볼카웜을 상대하거나 던전에 들어가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보너스를 지급하겠습니다.”

 하룬은 대원들에게 만 골드씩을 지급했다. 평범한 가정이라면 몇 대를 놀고먹을 수 있고, 남작기의 몇 년 수입에 해당하는 거금에 대원들은 뛸 듯이 좋아했다.

 하룬은 던전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제 비욘드 게임은 접을 생각이었다.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재미있고 좋아도 이곳은 가상현실이다. 그가 살아야 하는 현실은 이곳이 아니란 생각이 요즘 부쩍 들었다.

 대원들에게 하루의 휴식을 준 하룬은 은밀하게 옷을 바꾸어 입고 용병 몇 명의 틈에 끼어 어비스 용병단의 숙영지를 빠져나왔다. 제국 정보 길드를 비롯해 몇 세력에서 보낸 정보원들이 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어젯밤에도 확인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패스트 워킹 스킬로 질풍처럼 달린 하룬의 발이 멈춘 곳은 드워프 마을이었다. 엘프 로드를 만나고 오는 길에 타루가 부족장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하 통로의 지도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름 힘들게 부탁을 했지만 타루가는 흔쾌하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허락했다.

 지하 통로를 생각하니 진수가 떠올랐다.

 ‘진수 형은 괜찮은지 몰라.’

 레벨 업을 위해 샌드웜의 서식지로 간다는 말과 함께 떠난 진수 생각이 간절했다. 티노가 있긴 했지만 타고난 파인더인 진수가 있으면 볼카웜들이 뚫은 지하 통로들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어서 오게.”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하하하! 그런가? 이제 마음이 좀 편해져서 그런가 보네.”

 엘프들과의 만남도 잘 끝났고, 인간들의 위협에서도 벗어난 상황이다. 비록 마을을 건설하지는 못했지만 질 좋은 광석들을 캐내는 것은 물론 용광로 건설까지 마무리되는 상황이라 타루가를 비롯한 드워프들의 얼굴이 좋아 보였다.

 “부탁하신 지도를 좀 받으러 왔습니다.”

 “허어, 이 친구. 성격도 급하지. 일단 들어오게.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까.”

 타루가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간 하룬은 드워프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제 드워프들에게 하룬과 돌풍 용병대는 유일한 인간 친구로 대접받았다. 비록 의뢰이긴 했지만 돌풍 용병대는 드워프들에게 안전한 거주지를 건설하게 해주었다. 드워프들의 특성상 고집이 세고 이종족에는 닫힌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룬과 돌풍 용병대만은 예외였다.

 하룬은 타루가로부터 지난 보름 동안 드워프 전사들이 직접 몸으로 뛰며 작성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지도, 잘 사용하게. 그것을 위해 우리 전사 열둘이 죽거나 다쳤으니까.”

 “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상자가 났다는 소리에 하룬은 미안해졌다. 타루가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아픔이 드러나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런 표정 할 것 없네. 어차피 우리 거주지 근처이니 나중에라도 조사를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그나마 볼카웜의 희생물이 된 인간들이 없었다면 우리 일족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걸세. 그래도 인간들 때문에 볼카웜들의 위협이 적어 다행이었네.”

 하긴 1황자를 방문했을 때 들은 바로는 최근까지 볼카웜으로 인한 실종자 수는 매일 삼십에서 오십 명 사이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것이 볼카웜이라고 부르는 괴물의 짓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 일로 몇 차례나 분쟁이 일어나거나 전투 일보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감사하게 잘 쓰겠습니다. 친구들의 희생이 어린 지도이지 값진 결과를 끌어낼 것입니다.”

 “부디 그러길 바라네. 그 끔찍한 놈들이 이 근방에 있다고 생각하니 영 불안하기만 하네.”

 이곳에 정착한 이상 볼카웜은 드워프들에게도 반드시 없애거나 피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타루가 부족장은 하룬의 부탁을 선선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물론 대가는 지불하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대가는 무슨. 그래, 부탁이라는 게 뭔가?”

 한번 마음을 준 상대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드워프의 성정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타루가의 태도에 하룬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감을 느꼈다.

 제대로 된 인간들과 관계를 맺질 못하고 살아와서 그런지 이럴 때는 드워프들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특별한 방어구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방어구?”

 일전에 보물 창고에 들어갔을 때 방어구가 아니라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비수를 들고 나온 것을 기억하는 타루가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당장 하룬이 지금 입고 있는 방어구의 품질만 해도 인간들의 작품으로는 최상이었던 것이다.

 “재료는 이걸로 해 주십시오.”

 하룬은 아공간에서 아이언 스네이크의 거대한 몸체를 꺼냈다.

 “헉! 아공간? 아니, 이건!”

 하룬이 아공간을 사용하는 것을 본 타루가는 눈을 크게 놀랐지만 아이언 스네이크를 본 순간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후크란 산맥에서 운 좋게 잡은 아이언 스네이크입니다.”

 “후욱. 저, 정말이군. 어떻게 이런 귀한 물건을…….”

 타루가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퉁방울처럼 커진 눈으로 연방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을 만졌다.

 “세상에! 뼈까지 그대로 있군.”

 하룬이 꺼낸 것은 놈의 서식처에서 줍다시피 얻은 오래된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과 뼈였다.

 “이봐! 모두 이리로 좀 와 봐!”

 갑자기 타루가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근처에 있던 원로들은 물론 다른 드워프들이 몰려들었다.

 “헉!”

 “케엑! 이게 뭐야?”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이다! 제대로 된 놈이야!”

 몰려든 드워프들은 저마다 감탄성을 지르며 마치 보물이라도 보는 듯 조심스럽게 아이언 스네이크의 가죽과 뼈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적어도 천 년은 묵은 놈의 가죽과 뼈로군.”

 이제야 흥분을 겨우 가라앉힌 타루가가 하룬의 곁으로 와서 한 말이었다.

 “그렇습니까?”

 “허허! 정말 자네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는 인간이네. 어떻게 저런 귀물을 얻었단 말인가? 대대로 우리 조상들이 다루어 보고 싶어 하던 최상의 재료인데.”

 타루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주었지만 하룬도 우연히 얻은 것이라 할 말이 없었다.

 “이놈은 진짜 아이언 스네이크야. 저 거대한 동체와 아직도 강도가 떨어지지 않은 뼈로 보건대 도저히 자네가 잡았다고는 믿지 못하겠네.”

 “아까 말했듯이 운 좋게 얻은 것입니다. 진작 이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아이템 때문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두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두 번을 다 아이템 때문에 잊고 만 것이다. 진작 이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들어 두었더라면 볼카웜이라는 미지의 몬스터를 상대하러 가는 그의 마음이 조금은 더 편했을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저 가죽을 다루려면 우리도 많은 준비를 해야 하네. 최고의 열을 내는 숯은 물론 가죽을 제대로 가공하기 위해선 많은 인원과 기구가 필요하네.”

 “시간은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을 맞추긴 글렀지?’

 아쉽긴 했지만 이제라도 두 번이나 잊었던 용건을 꺼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드려야 할지?”

 “대가 말인가? 하하하! 이런 귀한 재료를 가져온 사람에게 무슨 대가를 받겠나? 우리 선조들 중에 이런 귀한 재료를 다루어 본 분들은 거의 없을 테니 이걸 다루어 방어구를 만드는 작업을 한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보상을 받는 걸세.”

 하룬은 난감했다. 엘프들과의 협상 보상으로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금을 벌었기에 마음 놓고 부탁을 한 건데 이들이 돈을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성격이 못돼서 그런지 대가 없이 뭔가를 얻으면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한 식구라면 몰라도 드워프들은 그에게 그 정도의 관계를 맺은 사이는 아니다.

 “한 달 후에 오게. 우리의 명예를 걸고 일족 모두가 이 가죽에 매달리겠네. 이런 재료라면 우리의 가죽 스킬이 몇 단계는 발전할 수 있을 거야. 하하하! 자넨 정말 우리에겐 너무 소중한 친구라니까.”

 타루가는 곁에서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하룬의 허리를 덥석 안고 한 바퀴 돌렸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안 그랬으면 입술에 뽀뽀라도 할 기세라 하룬은 기겁을 했다.

 “친구 덕분에 내 대에 이런 귀한 재료를 다루어 볼 수 있게 됐어.”

 “우갸갸갸! 이 친구가 우리에겐 완전 복덩이라니까.”

 원로들이 기괴한 웃음과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며 다가오자 하룬은 기겁해서 도망을 쳤다.

 “하하하! 한 달 후에 오라고. 우리가 제대로 된 물건들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뒤에서 타루가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온몸에 소름이 잔뜩 돋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상태인지라 하룬은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분지 밖에 나간 김에 메신저 검술 수련을 하고 저녁이 다 되어서야 겨우 막사로 돌아온 하룬은 토벌대 예비 모임에 다녀온 티노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대부분 별로 볼카웜을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샌드웜의 일종이라는 점도 그랬지만 본 적이 없는 터라 기사들은 대놓고 한칼에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회의 분위기는 예상한 대로였다. 다들 경쟁하던 입장이니 만큼 협조나 협의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토벌대 활동을 통해 명성을 쌓고자 하는 기사들이나, 빨리 끝내고 던전에 참가하려는 마법사들은 볼카웜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각 팀별로 활동하기로 한 것입니다. 쓸데없는 상전들이 없으니 위험하긴 해도 우리에겐 더 나을 거 같아 아무 의견도 개진하지 않았습니다.”

 “잘했어요, 티노. 말을 한다고 들을 인사들도 아니니까요.”

 타루가의 말을 들으며 몇 가지 상대할 방법을 고민해봤지만 특별히 좋은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부딪쳐 봐야 그 전력이나 패턴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음 날 일부러 출정식에서 빠진 하룬은 티노를 대표로 하는 일행이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자 조원들을 이끌고 실종 사건이 일어났던 곳들 중 외딴 곳을 찾았다.

 땅이 한번 들썩인 자리는 볼카웜이 적어도 막사 하나를  통째로 삼켜 버린 흔적을 보여 주었다.

 출정식에 참석한 티노 편에 1황자에게 지하 땅굴 지도를 보냈다. 사람들은 조를 이루어 지도를 보며 다들 편한 루트를 찾아 1차 집결지인 지하 광장으로 향할 것이다. 일단 그곳까지 가는 동안 볼카웜의 흔적을 살피기로 티노 편에 자신의 의사를 전했고, 동의를 받은 것이다.

 어비스의 드워프 보푸란이 허리춤에서 묘하게 생긴 기구를 꺼내 주섬주섬 조립했다. 보아하니 삽의 기능을 가진 드워프 특유의 무기 같았다.

 “왜, 땅을 파려고?”

 다카린 용병단의 부단주인 푸린이 묻자 보푸란이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교가 있는 사이라고 했다. 마법사와 드워프 전사지만 왠지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안 그럼 네가 마법으로 팔래?”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일단 하룬 대장의 명령을 받아야지. 비록 한시적이지만 우리를 이끄는 사람의 의견을 묻고 행동해야 단체의 규율이 서지.”

 푸린의 말에 보푸란의얼굴이 굳었다. 그도 오랜 용병 생활을 통해 그런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행동이 앞서는 성격 탓에 자신도 모르게 나서고 만 것이다. 하룬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민망함이 떠올랐다.

 “미안하오, 대장. 내가 좀 성격이 급하우.”

 “아닙니다. 미리 이야기한다는 것이 좀 늦었군요. 모두 뒤로 조금 비켜나세요.”

 하룬은 라이피를 소환했다. 굳이 시작부터 힘을 쓸 필요는 없었다.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니 말이다.

 -라이피, 지하로 향하는 길을 열어 줘.

 -알았어, 친구.

 곧 땅속으로 뚫린 어두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피의 능력이 이전과는 판이할 정도로 향상된 것이다.

 “이런! 이렇게 간단한 것을.”

 “그러게.”

 딜런과 티노, 아레스를 제외한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 엄청난 크기의 통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정령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 가지요. 아레스, 푸린 님, 라이트 마법을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팀들이 인원을 동원하거나 마법으로 열심히 땅을 파고 있을 때 하룬 일행은 라이피의 도움으로 땅속 깊숙한 곳으로 비스듬히 뚫린 통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보름여의 시간 동안 드워프들이 작성한 지하 통로들에 대한 지도는 비교적 정확했다. 다만 그 위치나 각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 적절하게 수정해야만 했따.

 다른 조들의 경우 마법사들이 몇 명이나 포함되어 있어 라이트 마법으로 통로를 밝혔지만 하룬 일행에게는 마법사가 푸린과 아레스밖에 없어 중간에 선 하룬은 아공간에 간직했던 발광석을 꺼내야만 했다.

 선두는 언제나처럼 티노가 맡았고 그 바로 뒤에 푸린과 딜런이 위치해서 티노의 안전을 챙기기로 했다. 하룬은 중간에 위치해 지도의 내용대로 약 100미터 아래 있는 지하 광장으로 가는 길을 지휘했다.

 1황녀 진영의 수석 기사 중 한 명인 아인델프는 다시 한 번 지도를 보았다. 지하로 이리저리 뚫린 통로의 한 모서리였다. 이 지도 덕분에 무수하게 얽힌 통로를 헷갈리지 않고 1차 집결지인 지하 광장으로 쉽게 내려가고 있었다.

 “정말 정밀하군. 어떻게 이런 지도를 구했을까?”

 “그러게요. 이 정도의 정밀함을 가진 지도는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미리 준비했을 리는 없고 지난 보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 지도를 만들기 위함이었나 봅니다. 드러난 대원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실은 꽤 많은 대원들이 있는 것 같군요.”

 “아마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짧은 시간에 이 넓은 지하를 조사해서 이렇게 정밀한 지도를 완성할 순 없었을 테니 말이야.”

 “아그리아 전하께서 감탄하신 이유가 있군요. 아무리 뛰어나도 용병인 이상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능력이 상상 이상입니다.”

 “그렇지. 절대 예사 용병대는 아니야. 나에게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 검사가 포함된 용병대라니. 후후후.”

 다프와 이야기를 나누며 아래로 향하는 지하 통로를 걷던 아인델프는 딜런을 의식하고 있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에 머물러 있은 지 벌써 7년이 넘었다.

 비록 제국에 소드 마스터들이 몇 명 있다고는 하나 그들의 나이가 70이 넘었고, 후작 위를 가진 군부의 세 사람을 제외하고 숨겨진 나머지는 만날 길이 없었다.

 ‘그 친구와 싸울 기회가 있으면 뭔가 얻을 수 있을까?’

 아인델프는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바로 수련이나 대련이 아니라 죽음을 담보로 한 실전. 한 치의 실수에도 생사가 오가는 피 튀기는 실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남들이 다 말리는데도 골든 배틀이라는 진창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일단 볼카웜부터.’

 지금은 동료가 된 딜런을 두고 투기를 끌어 올릴 때가 아니었다. 볼카웜은 그들 조에서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래야 그 위상이 반석에 오른 주군인 1황녀의 위상이 더욱 확실하게 올라갈 테니 말이다.

 “이제 오른쪽 길이다.”

 “네. 로이얀, 오른쪽이다!”

 메롤라스 백작의 동생이자 6서클 마법사인 다프의 명령에 선두에 선 로이얀이 방향을 틀었다. 특별히 1황녀가 하사한 플레이트 갑주를 착용한 로이얀의 뒷모습이 든든했다.

 실버 와이번 기사단의 막내인 로이얀은 익스퍼트 초급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중급 이상이다. 특히 최상급인 아인델프와 6서클인 다프의 경지는 토벌대에서도 상위에 속하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정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두를 맡았던 로이얀이 나직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뭔가?”

 중간에서 기사들의 보호를 받던 마법사 중 다프가 물었다.

 “땅이 울립니다. 진동이 강해지는 것으로 보아 뭔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바닥은 물론 통로 벽까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볼카웜이?”

 다프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기사들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마법사들은 메모라이즈한 마법 중 좁은 통로에서 가장 효율적인 화염계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젠 단단한 통로의 천장과 벽에서 미세한 흙과 돌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준비해랏!”

 후미를 맡은 아인델프가 황급하게 앞쪽으로 나왔다. 로이얀과 나란히 선 그의 검에서는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다프는 라이트 구를 하나 더 생성해 어둠 속에 가려진 통로의 먼 앞쪽으로 날려 보냈다. 이런 상황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공포를 유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흉측한 괴물이라도 그 모습을 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르니까.

 그가 날린 빛의 구는 꽤 먼 거리까지 날아갔다. 적어도 30미터는 족히 갔으리라.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괴기한 생김새를 한 괴물의 얼굴이 쑥 나타났다.

 “흡!”

 “허억!”

 여덟 자루의 검을 쥔 검사들이 한 덩이로 뭉치면 이럴까? 직경 3미터가 넘는 통로를 가득 채운 엄청난 크기의 괴물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긴 털로 가려진 얼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은 퇴화되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콧구멍과 더듬이로 여겨지는 긴 네 가닥의 촉수를 가진 놈의 입은 선홍색이었다. 하지만 입 주위에 나 있는 이빨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위아래로 네 개씩 나 있는 이빨은 제각기 다른 각도를 이루어 전면을 향하고 있었는데 바스타드 소드처럼 길고 라이트 불빛에 비쳐 상아처럼 빛나고 있었다.

 샌드웜처럼 몸의 체절을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짧은 다리라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동해 오는 속도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빨랐다. 놈을 보여 준 라이트 구는 이미 놈의 얼굴에 부딪쳐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마나를 끌어 올려!”

 놈의 이빨이 마나가 깃든 검을 능히 상대할 수 있다고 들었기에 아인델프는 수하 기사들에게 그렇게 명령했다.

 “빨리 마법을 날려!”

 너무나 흉측한 괴물의 외모 때문에 잠시 넋이 나갔던 탓에 주문이 해제되어 마법을 날리는 것이 늦어버렸다. 놈의 전진 속도 역시 생각 외로 빨랐기에 적절하게 마법을 날린 것은 다프밖에 없었다.

 “파이어 월!”

 기사들의 전면 5미터 앞에 화염으로 이루어진 막이 생성되었다. 지독한 열기가 순식간에 통로의 온도를 높였지만 긴장 때문에 아무도 그 변화를 느낄 수는 없었다. 뒤이어 두 마법사가 화염계 마법을 지원할 풍계 마법과 뇌전계 마법을 날렸다.

 “윈드 스톰!”

 “선더볼트!”

 화염 속으로 파고든 시퍼런 뇌전이 땅과 벽을 타고 앞으로 쇄도했고, 강력한 바람은 화염을 더욱 크게 키웠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몬스터는 감히 전진할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고 다프와 두 마법사는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틀렸다. 여전히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을 뚫고 볼카웜의 흉측한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화염 때문인지 앞의 공간을 마치 헤엄치듯 움직이던 촉수가 돌돌 말린 상태로 바뀐 것밖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어 보였다.

 “흡!”

 다프는 기겁했다. 내심 확신이 있었기에 마법을 연사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두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아인델프와 두 기사가 앞을 향해 달려갔다.

 기합성도 없이 검을 날리는 아인델프와 두 기사의 검에는 오러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인델프는 아직 오러 소드까지 사용할 생각은 없는 듯 오러로 검을 감싼 상태였다.

 까앙! 깡!

 “크윽!”

 “큭!”

 금속성의 충돌음과 함께 볼카웜의 이빨을 검으로 맞받아친 두 기사가 억눌린 비명과 함께 튕겨 날아갔다. 아인델프는 그들처럼 뒤로 튕기지는 않았지만 거의 1미터나 주르르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런 괴물이?”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는 아인델프의 입에서는 어느새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강력한 충격에 그만 내장이 진탕된 것이다.

 “노옴!”

 분노한 그의 검첨에서 시퍼런 오러 소드가 1미터 가까이 솟아 나왔다. 세상에 못 자를 것이 거의 없다는 오러 소드였다. 그의 경지를 말해 주듯 일반 오러 소드보다 굵은 그것은 다시 한 번, 촉수로 아인델프가 있는 공간의 대기 성분을 탐색하는 볼카웜에게 향했다.

 까앙! 깡! 까앙!

 순식간에 아인델프의 오러 소드는 세 번이나 놈의 얼굴을 노렸지만 그때마다 묘하게 각도를 튼 볼카웜의 이빨이 부딪쳤다. 놈의 촉수는 검의 빠르기를 뛰어넘었고, 그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감지한 것이다.

 아인델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낱 몬스터에게 이런 곤란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러 소드를 받아 내고도 흠 하나 나지 않는 엄청난 강도의 이빨들은 어느새 마치 여덟 명의 검사가 휘두르는 검처럼 그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중앙의 가장 긴 두 이빨은 창처럼 찌르기를 시도했고, 외곽으로 조금씩 거리를 두고 난 여섯 개의 이빨들은 잇몸으로 짐작되는 살점이 검사의 손처럼 움직이자 횡으로 종으로 이동했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영활하고 빠른지 아인델프의 중검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고, 거의 2미터 공간을 자유자재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창 같은 이빨은 각도를 달리하며 아인델프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허어! 어떻게 저런 괴물이 있을 수 있다 말인가? 마치 익스퍼트 급 기사 여덟이 합공하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다프는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주군으로부터 상대하기 어려운 괴물이라는 것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한 번의 충격으로 두 기사는 오공에서 피를 흘릴 정도의 심각한 내상을 입었고, 익스퍼트 최상급의 노기사는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기 밀리는 것을 본 중년의 두 기사가 앞으로 뛰어나왔다.

 “교대하겠습니다.”

 두 기사와 자리를 바꾼 아인델프의 손은 연속한 충격으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볼카웜의 이빨은 그의 오러 소드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까앙! 까앙!

 상대가 바뀌었지만 점점 더 영활한 움직임을 보이는 볼카웜의 이빨은 기사들의 강격을 무난하게 받아내는 것은 물론 빈 공간까지 찾아내고 있었다. 좁은 통로에서 마음껏 자신의 검술을 펼치지 못하는 핸디캡을 가진 검사들은 힘겹게 놈의 공격을 받아냈지만 한 번 격돌에 두세 걸음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뒤로 빠져!”

 다프의 외침에 두 기사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 마법사들의 마법이 볼카웜을 덮쳤다. 놈의 벌어진 입을 노린 것이다.

 “파이어 플레임!”

 “파이어 볼!”

 “윈드 커터!”

 놈의 이빨은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날아오는 파이어 볼과 윈드 커터를 후려쳐 냈지만 유도 기능을 가진 파이어 플레임은 이빨들의 궤적을 피해 놈의 얼굴을 덮쳤다. 선홍색 살점이 괴기스러운 입안에서 터졌다면 좋았을 텐데 이중 구조를 가진 입들 중 안쪽의 입이 닫혀 버렸다.

 화르르!

 끄아아악!

 순식간에 놈의 얼굴에 난 털들이 타고 촉수가 말렸다. 매캐하고 들척지근한 냄새와 함께 볼카웜의 비명이 들리자 아인델프 일행의 사기가 단숨에 올라갔다. 놈이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헉!”

 “피해!”

 그것도 잠시, 뒤로 쑥 빨리듯 사라지기 무섭게 놈의 얼굴이 다시 확대되어 보였다. 분노한 놈이 저돌적으로 돌진한 것이다. 아인델프를 비롯한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도망쳤다.

 “타앗!”

 “흐읏!”

 일행의 앞으로 후퇴했던 두 기사가 기합성과 함께 자신의 모든 힘과 마나를 끌어 올려, 돌진해 오는 놈의 얼굴을 향해 검을 날렸다.

 까앙! 깡!

 “으아악!”

 “카아아악!”

 놈의 이빨을 격타한 검과 함께 뒤로 날아가던 두 기사의 몸은 순식간에 볼카웜의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여덟 개의 이빨은 두 사람의 방어구를 포함한 몸을 분해했고, 안에 있던 날카로운 이빨들은 찢어진 살덩이를 씹고 피를 빨아 먹었다.

 도망치는 와중이라 이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했지만 처절한 비명과 뼈가 갈리고 살이 찢기고 씹히는 소리는 일행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왼쪽으로 돌아!”

 그나마 아인델프의 외침이 아니었다면 일행은 놈의 밥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들의 몸이 왼쪽 통로로 사라진 직후 놈의 동체가 그들을 스치고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전속력으로 달려!”

 아인델프는 그 와중에도 지도의 내용을 떠올렸다. 비록 아직도 몸에 충격이 남아 있었지만 그 경지가 남다른 덕분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완전히 얼이 빠져 헤이스트 마법조차 걸지 못한 상태로 죽어라 뛰고 있었다.

 다행히 놈은 다섯 번이나 방향을 틀며 도망치는 그들을 더 이상 쫓지 않았다. 근처에서 또 다른 먹잇감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후우, 후.”

 “허엇! 흐읍.”

 통로의 방향이 바뀌는 한 모서리에서 무너지듯 쓰러진 사람들은 공포에 젖은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오러 소드도 통하지 않고, 마법도 통하지 않는 괴물!

 이런 괴물이 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설로 남아 있는 드래곤이라면 이럴까? 도대체 왜 이런 괴물이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휴식을 할 시간이 없다. 일단 지하 광장까지 전속력으로 움직여야 해. 돌풍 용병대라면 뭔가 수가 있을 것이다. 빨리 움직여!”

 돌풍 용병대가 구한 이 지도가 없었다면 일행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익스퍼트 최상급인 기사인 아인델프도 오래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니 놈의 기척에라도 걸린다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그들이라면…….”

 다프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후크란의 악마 오크들을 피해 보석 광산으로 안내했고, 모두가 어떤 수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엘프들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돌풍 용병대라면 이 무시무시한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군을 비롯한 수뇌부가 일개 용병에게 너무 과도한 찬사를 한다고 생각했던 다프와 아인델프 일행은 절망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잡고서야 겨우 힘을 낼 수 있었다.

 “서둘러라! 놈은 진동으로 기척을 느끼는 것 같으니 최대한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해.”

 격돌한 시간은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사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아인델프 조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은밀하게 지하 광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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