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수련》
하룬은 이튿날 직접 기지 밖을 둘러보기로 했다.
“일단 강렬한 햇빛에 적응해야 해요.”
아즈만은 햇빛 노출 시간을 늘리며 피부 변화를 측정하자고 제안했다.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부터 파악하는 것이다.
“보통 배리어 거주민들의 경우 30분 정도가 그 한계에요. 그 이상 햇빛에 노출되면 피부 조직이 파괴되면서 과사가 진행되고 결국은 급성 피부암이 발병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죠. 하지만 마스터의 경우는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요.”
“달라?”
“네. 마스터의 유전자 정보와 피부 조직을 비롯한 모든 육체 세포에 대한 정보를 분석해 봤어요.”
그건 또 언제 했을까? 일전에 벨이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스캔해 보겠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아즈만이 따로 그에게 뭘 요구한 적은 없었기에 하룬은 의아했다.
“벨의 내부에서 게임하는 마스터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세밀하게 분석해 봤어요. 벨의 능력이 많이 상향되어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아졌거든요.”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떤데?”
“일단 마스터의 피부 조직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세포 수가 더 많을 뿐 아니라 강하게 활성화된 상태에요. 성인의 경우 두께가 보통 2~3밀리미터 정도인데 마스터는 5~6밀리미터 안팎으로 두 배가량 두꺼워요. 또한 보통인 경우 6.5제곱센티미터의 피부는 육백오십 개의 땀샘과 이십 개의 혈관과 육만 개의 멜라닌 세포와 천 개가 넘는 신경 말단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마스터는 그 배가 넘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어요. 마스터의 경우 피부와 가죽의 중간 형태를 가진 거지요. 저는 마스터의 피부 조직이 자연스럽게 신체가 강화된 아우터들 중 일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즈만의 설명을 들으면서 하룬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특별하다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거나 판정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자라면서 수시로 육체 테스트를 해 왔고, 전기 자극이나 물리 자극 등 많은 실험을 당해 왔는데 그럴 리가.’
능력자를 선별하는 과정은 매년 두 번씩 있었다. 그 과정동안 하룬은 단 한 번도 특이 능력을 가졌다고 판정받은 적이 없었다. 때문에 믿기 힘든 말이지만 그렇다고 아즈만의 말이 거짓일 리도 만무하다.
그녀는 바이오칩으로 만들어진 데다 인간형으로 변환이 가능할 정도의 완벽한 슈퍼 인공지능체인 것이다.
“벨이 가진 자료와 비교해 보면 현재 마스터의 피부 조직은 각성한 상태에요.”
“각성했다고?”
“네. 어떤 일을 계기로 마스터의 피부 조직이 변이를 일으킨 거지요. 상황에 맞추어 진화되도록 유전자 속에 변이 조건이 걸려 있었는데 어떤 상황이 닥치자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들을수록 이해하기 힘든 소리였다.
“그렇다면 원래 내 유전자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건가?”
“네. 98%의 정확도가 있는 판단입니다.”
“그럼 내 유전 정보는…….”
아즈만에게 뭔가 물으려던 하룬은 이내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인공수정체라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인공수정체가 뭔가? 부모의 인지도 없는 상태에서 불법적으로 정자와 난자 혹은 체세포나 생식세포를 추출해서 인공으로 수정시킨 인간들이다. 시험관 출생과 다른 점은 부모 쪽도 그렇고 태어난 인공수정체들도 부모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점은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럼 혹시 내 부모가 아우터?”
“그럴 수도 있어요. 제가 가능성을 둔 것은 아우터들의 생식세포를 이용했거나 혹은 유전자 조작이 가해졌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유전자 조작은 또 뭐야?”
“종말 시대 말에 유행했던 유전공한 기법 중 하나에요. 열성인자들이 발현되지 않고 우성인자만 발현되도록 유전 정보를 조작하는 것을 말하죠. 그 시대의 많은 식물들과 동물들이 그 기법으로 탄생했고,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유행이 되었어요. 의학과 농업의 혁명이었죠. 하지만 종말 시대의 혼란한 상황에 창궐한 각종 종교 단체들은 그 행위가 신의 영역이라면서 반발했고, 일부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축산물에서 인간들에게 치명적인 결함을 야기하는 영향력이 보고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유전공한 기법은 배척당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날로 심해져 가는 환경오염은 물론 우주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면서 과학자들과 손을 잡은 몇몇 강대국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나약한 신체 조직을 강인하게 바꾸려는 연구를 계속해 왔어요. 제 예측이긴 하지만 하르크와 오르그도 그 실험 과정에서 탄생한 변종 인간일 가능성이 아주 높죠.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몇 가지 차이점, 즉 높은 인지 능력과 사고 능력, 후대에 언어와 글로 문화를 전달하는 행위, 불을 사용하고 항상 섹스가 가능한 점, 대면 자세로 섹스를 즐기는 점 등은 그들도 동이랗게 가지고 있죠. 다만 하르크의 경우는 지능 수준이 상당히 낮긴 하지만요.”
“젠장!”
만약 아즈만의 말이 사실이라면 종말 시대를 살았던 인류는 자신의 멸망을 가져올 씨앗을 스스로 뿌린 셈이다. 오르그들과 하르크들은 무서운 속도로 세상을 잠식하고 있었다. 배리어 밖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들 세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나저나 자신의 유전자 안에 그런 정보가 들어 있엇다는 말은 믿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휴먼 시대. 종말 시대의 지식과 기술의 상당 부분이 유실된 상태이고 복원은 어림도 없었다. 원래 과학이란 충분한 기초가 쌓여야 하는 학문이고, 다양한 실험과 실패를 통해 성과를 낼 수 있기에 유니온은 그 정도를 투자할 자금력이나 의욕이 없었다.
과학자들과 기업가들이 손을 잡고 만든 유니온 정부는 어느새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해서 잠재적이나마 위험 세력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기존에 있는 과학 지식과 기술 이외에는 그 관리를 엄격하게 통제했고, 필요 이상으로 그 지식을 연구하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
과학자들이 지배층이 된 유니온이 과학 기술의 퇴보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건 그렇고,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 유니온들의 발표대로 인구가 부족해질까 봐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것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현재 유니온들은 하층민들의 직업이라든가 복지 때문에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어 인구 부족이란 말은 설득력이 약했던 것이다.
“아즈만, 혹시 모르니까 인공수정체들에 관한 자료를 좀 모아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저와 벨이 동행할게요.”
“괜찮아. 요 근처인데, 뭘. 둘은 아직 전투 기술도 습득하지 못했잖아.”
“아니요. 최근 벨이 완성한 파동 건이라면 어지간한 위험 요소들은 미연에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어째 벨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다양한 연구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이참에 벨에게 바깥세상을 구경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같이 나가자고.”
“네. 곧 준비할게요.”
모든 준비가 끝나자 하룬은 우주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벨과 아즈만의 안내를 받아 집 밖으로 나왔다.
“흐음, 멋지군.”
밖에 나오니 한쪽에 꽤 큰 호수가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엇다. 잔물결이 파랑을 일으키며 호숫가에 부딪치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게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쪽은 거친 황무지와 중간 중간에 작은 숲들이 보였다.
“제한 시간은 일단 30분이에요. 그 정도가 배리어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한계 시간이니 그때 몸 상태를 체크할게요.”
아즈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룬은 일단 메신저 워킹을 수련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 몸을 푸는 예비 과정은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데브론으로부터 자세한 설명과 시범을 통해 배운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절과 근육을 섬세하게 푸는 이 체조는 스킬을 본격적으로 수련하기 위한 예비 과정이었다. 체조를 통해 몸과 마음은 적당한 긴장 상태와 강한 활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메신저 워킹!’
의식을 발바닥으로 돌리자 익숙한 기운이 그곳을 통해 몸 안으로 물밀 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서 체내로 들어온 기운을 종아리와 허벅지를 거쳐 마나 오션으로 인도했다.
마나 오션은 호두 알처럼 커져 있었다. 그 속에 자리를 잡은 마나는 액체로 느꼈는데 새로 들어온 마나에 자극을 받아 급속하게 활성화되었고, 이내 하룬의 의지대로 익숙한 마나 로드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굳이 의식을 발바닥으로 돌리지 않아도 마나는 규칙적인 걸음을 통해 체내로 유입되었다. 그 마나들은 마나 오션을 거쳐 꼬리를 물고 앞서 흐르는 마나를 따라 마나 로드를 순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나 플로를 돌리며 메신저 워킹을 수련하는 하룬의 곁에는 우주인 복장을 한 채 길고 짧은 총신을 가진 건을 든 벨과 아즈만이 약간 떨어진 곳의 좌우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들의 존재가 느껴져 방해가 되었지만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터는 의식할 수 없었다. 그의 의식은 온전히 마나 로드를 순행하는 마나와 일체화되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마나 오션에 다시 들어오는 마나들은 조금씩 그 덩치를 키워 갔고, 마나 로드들은 조금씩 더 넓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수련했을까?
“마스터, 30분이 지났어요.”
아즈만의 외침에 걷는 것을 멈추었다. 순간 순행하던 마나들이 빛의 속도로 마나 오션으로 돌아오며 마나 플로가 끝났다.
“휴우.”
길게 숨을 내쉰 하룬은 몸 전체에서 강한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피부 전체가 호흡하듯 대기의 감각마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고, 뼈와 근육에는 강한 힘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나 오션에 자리를 잡은 마나의 밀도가 더욱 높아진 것도 알 수 있었다. 고작 30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현실의 수련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그 효과는 게임 속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마스터, 그럼 몸의 변화를 체크할게요.”
“오빠, 움직이지 마요.”
벨과 아즈만은 하룬의 전신을 여러 차례 쏘아보았다. 보통 때의 눈빛과는 달리 강한 어떤 것이 쏘아지는 것처럼 그의 몸을 투과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들의 눈빛 속에는 그의 몸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어떤 광선이 섞여 있을 터였다.
‘확실히 감각이 더 민감해졌어.’
하룬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들의 말을 기다렸다.
“역시!”
벨이 탄성을 질렀다. 아즈만 역시 놀란 눈으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뭐야?”
“몸 상태가 더욱 활성화되었어요. 마스터의 피부 조직 역시 활발한 생명 활동이 보이고 있고, 방사능과 햇빛에 가장 민감한 눈 같은 기관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아즈만의 말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제가 가진 자료와는 너무 상이한 반응이라서 호기심이 생길 정도예요. 그게 방금 마스터가 수련한 어떤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어떤 것? 혹시 마나 플로를 말하는 거야?”
“마나 플로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외관상으로는 알 수 없는 기이한 에너지가 마스터의 몸에서 일정한 경로를 타고 이동하는 것과 종국에는 하복부 깊숙한 곳에 집적되는 것을 확인했어요.”
“나도 이상한 걸 발견했어, 오빠. 안개처럼 희미하긴 하지만 보통의 혈액이나 세포 단위가 아닌 뭔가가 오빠 몸 전체에 퍼져 있어.”
아즈만과 벨의 눈은 어느새 강한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혹시 마나 혹은 기는 느낄 수 없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나 벨의 반응으로 보아 기가 존재하는 것은 알아냈지만 그 실체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럼 아무튼 더 수련을 해도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거지?”
“네, 마스터. 하지만 이번에도 30분 후에는 몸 상태를 체크해야 해요.”
“오빠, 이번에도 걸으면서 수련할 거야?”
“아니, 검술 수련을 할 거야.”
데브론에게 검술 고유의 마나 플로를 전수받았으니 이젠 검술을 수련할 생각이었다.
“그럼 우리가 오빠 몸을 스캔해 봐도 돼?”
방금 전 그녀들이 자신의 몸을 스캔했을 때를 떠올린 하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이상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마워, 오빠.”
“감사합니다, 마스터.”
하룬은 둘이 왜 이런 일에 감사해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검술을 수련할 준비를 했다. 벨이 들고 온 검을 받아 든 하룬은 호흡 조절부터 했다.
‘먼저 넷을 세는 동안 숨을 내쉬어 탁기를 내보내고 다섯을 세는 동안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다음 두 손에 잡은 검을 우측으로 반의반 분량의 호흡 길이에 맞추어 움직이다가…….’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은 호흡에 맞춘 수련 검식이었다.
세 단계의 메신저 검술은 각 단계마다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호흡의 길이와 세기를 검의 방위와 궤적 그리고 속도를 맞추는 수련 검식이고, 다른 하나는 마나 플로를 돌리며 검을 움직이는 것으로, 걸음의 방위와 속도 그리고 호흡의 길이와 세기를 맞춘 실전 검식이었다.
이제까지 하룬이 메신저 검술을 익히지 못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검의 갈 길, 즉 검의 술과 형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완성시켰는지 모르지만 검과 호흡 그리고 메신저 워킹 스킬을 완벽하게 일치시키지 못하면 단순히 휘두르고 베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현실의 수련은 하룬에게 많은 것들을 얻게 해주었다. 그중 가장 고무적인 것은 검술 수련을 통한 자신감 증대와 마나량의 증가였다.
벨과 아즈만의 정밀한 체크를 통해 한 시간 휴식으로 세 시간 정도는 밖에서 지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하룬은 메신저 검술 수련에 매진했다.
메신저 워킹과 마찬가지로 메신저 소드 역시 수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나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효율이 정좌한 자세로 호흡을 통해 집적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던 것이다.
아직 검에 기를 주입시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력을 다하면 한순간 정도는 검날에 기를 두를 수는 있다. 물론 비욘드에서처럼 나나 로드, 즉 기혈을 타통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그 존재나 질량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를 집적하게 된 것은 이번 현실 수련에서 가장 큰 결과물이었다.
메신저 검술의 형과 식은 완전하게 펼칠 수 있었지만 호흡과 일치시키는 것은 아직도 무리였다. 이 상태로는 실전을 치르면 호흡이 완전히 흐트러져 메신저 검술 본연의 위력은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겨우 며칠만 수련한 거 가지고 불평할 수는 없지. 던전 일만 마무리되면 비욘드도 그만해야겠다. 이젠 현실에서 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해.’
하룬은 좁고 오염이 심한 배리어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메신저 검술과 비도지존의 암기술을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익혀야 했다.
하룬이 잠시 동안 해산을 지시한 후 헤니는 한동안 비욘드에 접속하지 못했다. 방송사와 던전에 대한 정보를 거래해야 했고, 더불어 친구 셋과 함께 시작한 야심찬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벌써 회원이 이백 명에 육박하고 있어.”
다호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이제 네 사람은 헤니의 집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일전에 하룬 때문에 방송국에서 받은 돈으로 친구들과 함께 살며 사무실로도 쓸 수 있는 제법 넓은 집을 구한 것이다.
“후후후, 돈의 위력이 굉장하군. 너희 대장에게 우리가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고 꼭 말해줘. 이번에도 그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까지 주었으니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보라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에 거래했던 버추얼 비전으로부터 이번 던전에 대한 정보 건으로 받은 돈은 지난번보다는 적었지만 그래도 몇억은 가뿐하게 넘었다.
다른 방송사에서도 유사한 기사가 전해졌기에 가격이 내려진 것이지 시청률은 제대로 나왔다. 이번 일로 인해 혜련은 버추얼 비전으로부터 정식으로 기자 제의를 받았다. 그녀의 정보는 정말 특급이었던 것이다.
고대 제국에 존재하던 시험 장소로 알려진 던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이미 방송을 통해 유저들에게 알려졌고, 수많은 유저들이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세력들과 연줄을 대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다섯 단계 중 한 단계만 통과해도 수준급의 스킬서나 마법서를 얻을 수 있으며 그 명예는 적지 않을 터여서 유저라면 누구나 던전에 들어갈 기회를 잡기를 희망했다.
NPC 세력을 제외한 이방인들이 혹시 들어갈 자격을 받는다면 아마도 당장 비욘드 최대의 길드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던전에 대한 관심이 날이 갈수록 폭증했고, 덕분에 혜련은 아레스 못지않은 원고료를 챙길 수 있었다. 아레스의 호울사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긴 하지만 거의 동시에 동일한 기사를 내보낸 버추얼사의 시청률도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안 그래도 말했어.”
“근데 그 사람 어때?”
“뭐가?”
혜련은 회원 가입을 요청하는 인공수정체들의 프로필을 정리하다가 보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돈도 엄청 버는 사람이니까 잘 꾸미고 다니겠지? NPC만 아니면 내가 한번 대시해 볼 텐데.”
일전에 혜련에게 하룬에 대해 대충 들은 적이 있는 보라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준 하룬에게 각별한 호의와 함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호호호. 우리 대장은 여자에게 눈길 한번 안 주는 사람이야. 유일한 여자 친구도 용병인게 길고 굵은 검상이 턱에서 목까지 난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졌다고.”
“그래? 용병들이라면 여자 무지 좋아하지 않나? 워낙 위험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 돈 벌면 술 마시고 여자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라던데.”
“호호. 우리 대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시간 나면 수련을 하거나 아니면 정보를 입수하러 은밀하게 돌아다니지. 부대장인 티노도 그렇고 귀족이면서도 가입한 딜런 경도 일반적인 용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때문에 우리 용병대는 일반적인 용병들과는 많이 달라.”
“그래? 뜻밖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통 용병들이랑은 생각하는 것이나 그 스케일이 엄청 다르더라고. 돈 개념도 그렇고, 우리 세계에 대해서 무리 없이 잘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그래.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었겠지.”
혜련은 무심한 하룬의 얼굴을 생각하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하룬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정보를 넘긴 것은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내 몸매와 얼굴에 무슨!’
이 세계나 비욘드나 남자들의 여자 보는 눈은 거의 비슷하다. 굴곡이 뚜렷한 몸매에 아름다운 미모,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자들이 인기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런 기준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예쁘지도 밉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도 그렇고, 학업과 연구로 인해 오래 앉아 있어서 다리는 굵고 허리도 가늘지 않다.
“빨리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
“후후후. 보면 실망할걸. 본래 꾸미는 것에도 관심 없고, 여자들에게도 무심하거든.”
“얘는, 능력 없는 남자가 시크하면 재수 없지만 능력 있는 남자가 시크하면 여자들은 끌리는 법이야.”
어쩌면 보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신 역시 간혹 하룬을 보고 얼굴을 붉힐 때가 있으니 말이다. 생긴 것은 자신만큼이나 평범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남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일단 우리 코원 유니온에 거주하는 친구들부터 만나보자.”
“그래. 다들 기대하고 있어. 회원으로 가입한 면면을 보면 너도 아마 놀랄걸. 다들 비욘드에서 한가락씩 하는 친구들이야.”
“그래?”
“이상하지. 현실에서는 별로 튀는 것 같지 않은데 게임에서는 대단한 능력자들이라니까.”
“능력이 좋으면 우리 백사회야 나쁠 일이 없지. 한 형제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다른 형제들을 끌어주면 되니까. 아무튼 이번 오프라인 모임이 기대된다.”
“나도. 내일모레쯤으로 공지할게.”
“만나서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도울 수 있는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 우린 단순한 친목 모임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한 형제로서 가족이 되려는 것이니까.”
“알았어.”
보라와 다호는 헤니의 말대로 코원 유니온에 거주하는 팔십칠 명의 인공수정체 친구들에게 모임에 대한 공지를 보냈다.
장소 섭외를 비롯해서 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때 혜련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 황 박사님!”
“잘 있었나?”
“네, 덕분에요.”
“여전히 비욘드를 하는 거야?”
“네. 게임에서 좋은 NPC를 만나 유명한 용병대에 들어갔어요. 지금 게임의 중심 스토리에 있어요.”
“허허허! 그런가? 그런데 어쩌면 그 NPC는 인공지능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황 박사의 말에 깜짝 놀란 혜련은 무심코 회원들의 프로필을 입력하던 것을 멈추고 화상을 켰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홀로그램 영상 화면도 켜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일단 우리 집으로 오게. 할 말이 있으니까. 어딘지는 알지?”
“그럼요. 세 번이나 방문했는데 모를 리가요.”
혜련은 황 박사가 자신을 딸처럼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사랑에 실패한 후로는 자신의 연구에 평생을 바친 황 박사라서 그녀는 같이 근무하는 동안 몇 번 그의 집에 들러 간단한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곤 했었다.
“오늘 저녁이나 같이하지.”
“네, 알겠어요.”
연결을 끊은 후 혜련은 멍한 얼굴로 이제는 사라진 황 박사의 영상이 있던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하룬 대장이 NPC가 아닐 수도 있다니. 그럼 박사님이 의심하셨던 대로 비욘드는 다른 차원이거나 혹은 다른 행성의 문명일 수도 있다는 건가?’
아무리 종말 시대에 극도로 발전한 과학 문명의 총아였던 마더컴이라 해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가 봐야겠어!’
헤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들을 위한 일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황 박사를 만나는 일이 지금은 더 중요했다.
“너 어디 가려고?”
먼지바람을 피할 긴 외투를 걸치는 혜련을 본 보라가 물었지만 그녀는 급한 볼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허허허, 그새 저녁까지 준비했군.”
황 박사는 퇴근하고 들어와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이가 들면 욕심이 없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맛있는 음식에 욕심이 난단 말이야.”
“호호호. 많이 드세요.”
혜련은 퇴사한 이후 못 본 새 많이 늙어 보이는 황 박사가 안타까웠다. 의지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안 보이던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어 있었다.
비록 간편 음식을 조리한 것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혼자 조리했던 혜련의 음식 솜씨는 쓸 만한 것이어서 황 박하는 그녀가 요리한 음식을 즐겼다.
“같이 먹지.”
“네.”
두 사람은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오랜만의 해후를 즐겼다. 비밀 연구소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 근황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사이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워낙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그런지 황 박사는 보기보다는 꽤 대화를 즐기는 편이었다.
혜련이 차를 준비해서 내오는 사이 황 박사는 낡은 서류가방에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뭐예요?”
“이게 내가 이제껏 한 연구 결과네.”
그렇게 서류철을 혜련에게 내미는 황 박사의 얼굴에는 강한 자긍심이 엿보였다.
“엄청난 것을 발견하신 얼굴인데요?”
“허허허! 내 얼굴에 그게 보이던가?”
그 말은 혜련의 추측이 맞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혜련은 굳이 서류를 들춰 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황 박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설명해 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용이 뭔지 맞혀 보게.”
“음, 뭘까요? 박사님이 연구하시던 것은 비욘드의 세계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파악하는 일이니 당연히 비욘드에 관한 것일 테고.”
잠시 말을 멈춘 혜련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주시하는 황 박사에게 미소를 보냈다.
“아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알려진 대로 비욘드의 세상이 인공지능을 가진 마더컴들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슈퍼컴들이 구현한 세상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혜련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황 박사를 응시했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말이다. 황 박사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역시 혜련이답군.”
황 박사의 수긍에 놀란 것은 정작 그런 추론을 내놓은 혜련이었다. 그녀의 눈은 주체할 수 없는 놀람과 충격으로 휘둥그레졌다.
“그, 그럼 정말……인가요?”
“맞아.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그거라네. 비욘드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라는 거지. 우리가 NPC라고 생각했던 비욘드의 주민들이 실은 우리와 똑같은 지적 생명체였어.”
“그……건?”
너무 놀란 나머지 혜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의심해 본 적은 있지만 사실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양한 자료들을 모았네. 다들 쓸모없다고 여겼지만 난 비욘드의 기상부터 시작해 천체와 그들의 문명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모으고 분류해서 현실과 비교해 보았지. 그 결과가 바로 이거야.”
그가 편 쪽은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비욘드는 인간과 유사하면서도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그들 고유의 문명과 생활상 그리고 독특한 문명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언어 체계, 주거와 음식 문화 등을 연구한 결과는 놀랍게도 그들이 단순히 프로그래밍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 휴먼들을 어떤 면에서는 능가하는 높은 지적 생명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비욘드의 독특한 기상 상황이나 천체의 운항 등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은 지구와는 다른 행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 역시 우리 휴먼처럼 다양한 문명을 거친 존재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더컴들이 어떤 방법을 통해 이 존재들이 사는 세상과 우리 세상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마더컴들이 비욘드 세상의 신神에 갈음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 세계의 신들이 휴먼들과 교감하지 않는 것과 달리 마더컴은 그들 비욘드의 주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세상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믿을 수 없어요!”
“나도 그렇네. 하지만 내 연구 자료가 그런 결과를 도출해내더군. 물론 그 때문에 회사에 이 결과물을 제출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혜련은 한동안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갖가지 가능성이 스쳐 가고 있었다.
‘다른 차원? 아니면 다른 태양계나 우주의 어떤 특정한 장소?그도 아니면 뭘까?’
“또 하나 놀라운 점이 있네.”
혜련은 말 대신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어쩌면 마더컴을 비롯한 슈퍼컴들의 존재들은 종말 시대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네.”
“네에?”
이번에는 더 놀라운 사실이 황 박사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가상현실 게임 분야 말고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네, 역사학 분야잖아요. 제게도 가르쳐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최근에 입수한 자료가 몇 개 있네. 방위군에 아는 장성이 있어 개인적으로 선물 받은 자료들인데 종말 시대에도 희귀했던 자료라네. 그 연대가 무려 6천~7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서들이었지.”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혜련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가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는 전공 분야였던 것이다.
“난 그 책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네. 흔히 역사학에서 그때는 신석기나 철기시대로 정의하고 있는 고대 인도나 메소포타미아 혹은 이집트의 문명은 종말 시대 초중반에 해당하는 고도의 문명을 가졌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적시되어 있었네.”
“어, 어떻게 그, 그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6천~7천 년이라면 인간들은 혈거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 생활을 시작하는 시기였고, 아직 문자도 없었으며 부족 사회도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당시 고도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자, 이 책을 보게. 이건 고대 인도의 설화들을 정리한 것이네. 여길 보면 기원전 3천 년에 기록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바라타족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서사시)가 있네. 내용을 한번 볼까? 이 안에는 영웅 아스와토만이 적에게 발사한 ‘신까지도 저항하기 어려운 아그네아의 무기’에 대한 서술이 있네. 이거야.”
혜련의 눈이 향한 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태양이 흔들렸다. 우주는 불타 버렸으며 이상한 열을 발하고 있었다. 코끼리들은 그 무기의 에너지에 불타면서 불꽃을 피할 길이 없어 공포로 헐떡이며 뛰어다녔다. 물은 증발했으며, 그 안에 살아 있는 생물은 모두 타 버렸다.
모든 각도에서 불타고 있는 화살의 비가 격렬한 바람과 함께 퍼부어졌다. 벼락보다 격렬하게 폭발한 이 무기로 적의 전사들은 사나운 불에 타 버린 나무처럼 쓰러졌다. 이 무기에 불탄 거대한 코끼리들이 주위에 쓰러져 무섭게 울부짖었다. 화상을 입은 다른 코끼리들도 공포에 휩싸여 미친 것처럼 물을 찾아 주위를 빙빙 돌며 달렸다.》
“이 전투의 시기를 전대 문명의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030년에서 기원전 1930년으로 추정하며 이는 결국 탄소 14의 분석 결과로도 확인되었지. 또한 모헨조다로라는 지역의 유물에서는 텍타이트 혹은 트리니타이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핵폭탄이 폭발했을 때 생성되는 알루미늄 26과 헬륨 10의 방사성 동위 원소가 분석 추출되었네. 우리 유니온을 조금만 벗어나면 볼 수 있는 것들이지. 이건 당시 핵무기 혹은 핵무기에 갈음하는 무기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걸 제조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네.”
“그럼 정말 초고대 문명이 있었다는 건가요?”
“난 그렇게 확신하고 있네. 다른 곳에서 신석기 혹은 철기 문화를 막 꽃피우는 시기에 어느 곳에서는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고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지.”
“하지만 그건 전승 설화에 불과하잖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인간들은 보통 자신의 지적 상상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가공된 전설로 치부하지만 그 전설들 중 사실로 판명 난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이전 문명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지. 서사 시인으로 유명한 호머가 쓴 서사시 ‘일리아드’도 오랜 시간 동안 신화로만 여겼다네. 하지만 슐레이만이란 기업가가 그 시에서 나온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고 에반스라는 이가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의 유물인 찬란한 색채의 벽화 및 미로를 발견해서 실존하는 이야기로 밝혀졌다네.”
혜련 역시 이런 비사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지만 무심코 넘겨 버렸었다.
“이 책의 내용도 보게. 바벨탑에 대한 것을 정리한 종말 시대 말의 논문이야.”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신에 필적하는 지식을 손에 넣은 인간들이 오만해져서 하늘 끝까지 닿는 탑을 쌓았고, 신들이 인간을 징치하기 위해 그 탑을 무너뜨렸다고 했다. 그 결과 이제까지와는 달리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인간들은 각지로 흩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바벨탑이 실은 고대 문명인들이 이룩한 고도의 과학 문명이 만들어 낸 총아라는 주장이 있었네. 우리가 흔히 통신 탑을 세워 전파를 중계하는 것처럼 바벨탑의 수많은 기능 중 하나가 광역 통역 시스템이 완비된 초지능 시설이라는 주장이지. 당시 문명이 만들어 낸 이 탑으로 인해 인간들은 종족이나 부족에 상관없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문명을 나눌 수 있었는데 천재지변으로 이 탑이 파괴되고, 많은 학자들이 그 탑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면서 인간은 그 찬란했던 문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주장이야.”
“설마?”
“후후후. 그야말로 미스터리에 해당하는 이야기지. 하지만 난 이 이론에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있네. 전혀 연관이 없을 것처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동일한 유적이 발견된다거나 혹은 비슷한 설화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거든. 예컨대 전 문명에서 강력한 종교 중 하나였던 기독교의 경전에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홍수 설화는 바빌로니아의 유명한 ‘길가메시’ 대서사시를 차용한 것으로, 이 서사시는 무려 3,000행에 이르며 수메르 왕명표에 의하면 길가메시는 홍수 후에 수메르를 통치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 성서에 등장하는 유대인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던 민족 중 하나였으니 말이야. 그런데 홍수 설화는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네. 아메리카 원주민을 비롯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도처에서도 그런 설화나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네.”
혜련은 머릿속이 더욱 헝클어졌다. 너무 충격적인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또한 은밀하게 전승되는 문명의 존재는 더욱 충격적이지. 예를 들어 전기의 경우 볼타가 처음 그 존재를 알아냈다고 하네.”
“네, 맞아요. 고대 그리스 과학자 탈레스는 BC 600년경 호박琥珀을 모피에 문지르면 전하를 띠게 되어 가벼운 물체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고 최초로 전기현상을 발견했고, 16세기 말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와 1752년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이 벼락의 전기적 성질을 증명했어요. 프랑스의 토목 공학자 쿨롱은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전기력에 관한 쿨롱의 법칙을 발견했고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볼타는 볼타전지라 불리는 화학전지를 발명했지요.”
그 정도의 지식은 박사 학위를 가진 혜련에게는 상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물 중에는 화학 전지들이 발견되었네. 1936년 바그다드 근처에서 독일의 고고학자 뫼니하는 전지가 틀림없는 유물을 발견하고 실험을 통해 전지라는 사실을 증명했지. 그 유물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의 파르티아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어.”
과학계에 그런 비사가 있는 줄은 몰랐다. 황 박사의 말을 듣는 혜련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만이 아니야. 중국에서도 전기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지. 중국의 명장인 주저(263~316년)의 묘에서 특이한 장식물이 나왔는데 그것을 스펙트럼 분석으로 조사해 보니 이 장식품은 구리 10%, 마그네슘 5%, 알루미늄 85%의 합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결과가 나왔네. 당시 과학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 알루미늄이 처음으로 추출된 시기는 과학사에서 보면 전기 분해법이 도입된 1808년이기 때문이었지. 더구나 알루미늄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땅속에서 보크사이트를 채굴해 정련한 다음 전기분해를 거쳐야 하지. 마찬가지로 전등의 사용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도처에 남아 있네. 고대 문명의 꽃이라 무르는 피라미드 안에서는 그 어떤 불도 사용한 흔적이 없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전등을 이용했을 거라고 믿고 있네.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크의 기록에 의하면 테베에 있는 아몬 신전의 입구에서 불타고 있는 램프를 보았는데 신관들은 그것이 몇백 년이나 꺼지지 않고 내려왔다고 주장했다네.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에 램프가 있었는데 바람과 물로도 끄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기록했다네.”
혜련은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순간 뒷머리가 뻣뻣해진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런 사실로 추정해 보면 종말 시대의 인간들은 볼타의 전지 개발보다 적어도 4,500년 전부터 전기를 사용해 왔다네. 나는 그것들을 초고대 문명의 유물이나 지식이 전수된 것으로 보네. 그런 지식들은 일종의 마법으로 여겨져 비밀리에 소수에게 전수되는 형태를 취했다가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그런 기술들이 실전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네.”
황 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들은 문명의 단절 현상을 수차례나 겪으며 많은 시행착오들을 해 온 것이다. 종말 시대와 지금의 과학계가 다른 점은 당시의 모든 지식이 거의 공유할 수 있도록 공개되었다면 지금은 특정한 소수의 과학자들에게만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그 소수의 과학자들이 사라지면 바로 과학의 단절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유니온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휴먼들은 자신들이 타고 다니는 마그네틱 카나 흔히 일상생활에서 이용하는 전자기기들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존재하고 있고, 사용 방법을 알고 있으니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이 책들 중 흥미로운 내용은 바로 지구 공동설이네. 지구 안에 거대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종말 시대에도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당시 초강대국들의 일관된 부정과 연구 활동 방해로 결국 그 실체가 밝혀진 바는 없네. 하지만 난 비욘드의 기상 환경이나 단조로운 천체의 움직임 그리고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비욘드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네.”
황 박사의 결로에 혜련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였던 것이다.
“난 인간들의 조상들 중 한 무리가 극지방에 존재하며 주정기적으로 열린다는 거대한 구멍을 통해 지구 내부로 이주했다고 생각하네. 그곳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하고 멸망하면서 우리와는 다른 문명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고 있네. 마더컴들과 슈퍼컴들은 그곳에서 신의 존재로 받아들여지며 우리와 그 세계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방법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지.”
그녀가 오랫동안 존경해 왔던 황 박사가 한 말만 아니었다면 당장 귀를 막아버리거나 그 입에 주먹을 갈겼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비약이 심해 황당하게만 여겨지는 공상 같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역사를 연구하며 많은 의문들을 품은 적이 있었다.
오파츠OOPARTS(Out Of Place Artifacts)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인공물이란 뜻으로, 발견한 지층이나 지역에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인공적인 출토물을 일컫는 것이다.
1844년 6월 22일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토메드 강 근처인 라자포드 밀즈에서 돌을 자르던 석공이 깊이 2.4미터의 돌 속에 놓여 있는 금실을 발견했다. 이 돌의 연대는 약 6천만 년 전으로, 금실은 그 당시에 떨어진 후 화석이 된 것이다.
1952년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어티픽 아메리칸’은 바위 속에서 나온 금속제의 용기를 설명했는데 그 종 모양의 금속 용기들이 나온 바위는 수백만 년 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또한 1961년 워렌 A. 레인 외 두 명은 캘리포니아 주 동부의 오랑카의 코소 산지에서 한 정동석을 수집했다. 그런데 그 정동석 안에서는 발화 플러그를 연상케 하는 금속성의 물체가 발견되었다.
그 금속은 자기 성질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석을 가까이하자 반응이 있었고 자른 단면도 5년이나 되었는데 녹이 슬지 않았다. 생성 연대는 적어도 50만 년 전으로 감정되었다. 이 물건은 1963년에 사우스 이스트 캘리포니아 박물관에서 3개월 동안 전시되었으며 1969년 봄에 ‘INFO 저널’에 사진이 게재되었다.
시대와는 맞지 않는 유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종말 시대의 자료들 중에는 심지어 인간들과 공룡들이 한 시대에 존재했음을 밝혀 주는 발자국 유물들도 있고, 샌들로 추정되는 신발의 흔적도 있었다.
그중 미국의 사우스타코타 주의 세이얀 강의 언덕 경사 부분에서 1억 년 전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모카신식 발자국이 발견된 것은 혜련도 흥미롭게 공부한 적이 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그 발자국이 성인 여자의 것으로, 뒷발 자국이 더 깊게 파인 것으로 보아 뛰고 있었다고 추측했다. 발자국의 깊이는 1.2센티~2.5센티였다.
혜련이 혼란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황 박사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마더컴이라는 존재들은 곧 배리어를 상실한 운명에 놓인 인간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힘. 그것은 기 또는 염력과 같은 초능력을 가르쳐주기 위해 등장했는지도 몰라.”
한순간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사실이기에 혜련은 여전히 입을 벌린 상태로 말을 잊었다.
“비욘드의 세상에서 말하는 마나, 즉 우리가 기氣라고 부르는 힘을 현실에서 얻고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으니 내 가정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네.”
황 박사의 노안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이론에 확신을 가진 학자의 신념은 의심과 당혹스러운 감정으로 가득 찬 혜련에게 믿음을 주고 있었다.
“빨리 자료를 정리하자!”
“알았어. 이런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양 갈래 머리를 땋고 어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세리의 손가락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터치 보드를 두들겨 댔다.
오프라인 모임을 가진 후 혜련의 집에는 한 명이 더 늘었다. 세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열두엇으로 보일 정도로 왜소한 몸집에 겁이 너무 많아 무능력자로 최종 판정을 받은 그녀였다. 부양 가정에서 독립을 한 후 무능력자라는 딱지와 그 왜소한 외모와 성격 때문에 직장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세리는 F구역의 닭장 아파트에서도 쫓겨나 캡슐 방에서 알바를 하며 캡슐 안에서 자는 생활을 한다고 했다.
불쌍한 마음에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 혜련은 세리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그녀는 비욘드에 관한 한 굉장한 능력자였던 것이다.
레벨 94의 프리스트인 세리는 하이 랭커였다. 하루에 8시간밖에 플레이하지 못하는 일반 캡슐을 사용하면서도 그런 레벨을 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집중력과 컴퓨터에 관련된 놀라운 작업 능력은 단순 작업에서 빛이 났다.
정보를 입력하거나 분류하는 단순 작업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작업 능력이나 효율은 혜련과 세 친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보라의 말대로 모임에 나온 인공수정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레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보라나 나투처럼 무능력자로 판정받아 현실에서는 최하층의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비욘드에서는 각 분야에서 상당한 강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역시 뭔가 있어!’
혜련은 다른 친구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인공수정체들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처럼 어린 나이에 특별한 능력자로 공인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랑과 정이 결핍된 부양 생활의 결과로 무능력자로 판정받은 인공수정체들이다.
그런 그들이 비욘드라는 게임에서는 하나같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우연한 결과는 아니었다. 나름 열악한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생각에 게임에 전념한 결과겠지만 현실에서 무능력자로 판정이 난 그들이 캡슐 등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게임에서는 랭커가 된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혜련은 이번 던전 건만 마무리되면 자신을 포함한 인공수정체들의 비밀에 대해 전력을 다해 알아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중에야 부족할지 모르지만 하룬으로 인해 연속해서 두 번이나 거금을 벌어들인 터라 자금력도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인공 수정체들을 많이 모아 지금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비밀을 캘 생각이었다.
혜련은 이번에 만난 인공수정체 친구들 중 컴퓨터와 글로벌 네트워킹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이미 섭외해 놓은 상태였다.
‘걔들과 같이 정보를 파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연거푸 놀랄 만한 일을 겪은 터라 혜련은 원고료를 가져다주기 위해 박살 대장간에 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더불어 하룬의 비밀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 역시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