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새로운 현실 (96/278)

《새로운 현실》

 날이 밝기도 전에 1황자와 1황녀의 이름으로 대규모 회의의 초청장이 발부되었다. 초청 내용은 던전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하룬이 이끄는 돌풍 용병대는 몇 세력의 의뢰를 받아 엘프들과 던전에 대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다고 했다.

 “이제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렇지. 협상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분위기는 좋은 것 같아.”

 “빨리 협상 결과나 발표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게.”

 트레저 분지에 모인 사람들의 이목은 던전 바로 앞에 자리를 잡은 두 황자 진영에 쏠렸다. 이틀 후로 예정된 대회의는 벌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온갖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제 던전에 대한 전권은 완전히 그들에게 넘어갔다. 엘프들과 협상을 맡은 돌풍 용병대에 쏠렸던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새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두 진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들에게 던전에 관한 모든 사항을 맡긴 하룬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름여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황자들을 설득하는 것과 나머지 자리를 두고 합의를 이끌어 내려면 그 정도의 여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비욘드에서 귀족들의 행사란 늘 이렇게 신중하고 느리기만 했다.

 이제 트레저 분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1황자와 1황녀의 진영으로 쏠렸다. 개중에는 협상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어 하룬을 비롯한 돌풍 용병대를 은밀하게 찾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돌풍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룬은 새벽까지 메신저 검술을 전수받은 후 데브론이 떠나자 그 자리에서 접속을 해제했다.

 “이참에 현실에서 메신저 스킬들이나 익히자.”

 안 그래도 이사한 후 벨과 아즈만이 주변 정찰을 비롯해 배리어 밖 환경에 적응할 시간을 내라고 조언했었다. 어차피 그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라 현실이다. 벨의 능력이 아무리 캡슐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해도 현실에서 그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오빠!”

 “마스터!”

 현실로 돌아오니 벨과 아즈만이 하룬을 반겼다.

 ‘후후. 이제야 나도 가정이 생긴 것 같네.’

 물론 그동안에도 벨이 자신을 반겼지만 하나와 둘은 또 달랐다. 아즈만이 가정의 안방마님처럼 푸근한 미소로 반기는 모습에 하룬은 벌써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나온 거야?”

 벨이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응. 자세한 설명을 하기는 그렇고, 한 닷새 정도 시간이 날 것 같아. 그동안 새로운 검술도 좀 수련하고 주변 정찰도 하려고.”

 “히히, 잘됐다. 나랑 놀아줘. 내가 만든 것도 좀 봐주고.”

 그새 뭘 만들었는지 칭찬받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하룬을 바라보는 벨이었다.

 “알았어.”

 하룬은 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런 하룬의 옆에서 아즈만이 팔짱을 끼고 속삭였다.

 “마스터, 저도 볼일이 있는데요.”

 “뭔데?”

 “앞으로 제작할 사이보그에 관해 의논드릴 일이 있어요.”

 “그래? 알았어. 일단 씻고 나올 테니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하룬은 두 여자를 부드럽게 뿌리치고는 욕실로 향했다. 이제 완전히 여동생으로 생각하는 벨이 달라붙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즈만이 가까이 오는 건 곤란했다.

 간단히 몸을 씻고 나오니 벨이 입을 옷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벨에게 받은 평상복은 튜닉 비슷한 옷으로, 통기성이나 착용감이 뛰어나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때, 오빠?”

 “좋은데. 어디서 구한 거야?”

 “헤헤. 언니가 오빠 준다고 만든 거야. 물론 디자인은 내가 자료를 보고 정했고.”

 “실력 좋은데. 착용감도 그렇고 색상이나 디자인도 무척 마음에 들어.”

 “헤헤헤.”

 벨이 칭찬받은 것이 기쁜 듯 연방 방긋거리며 그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는 아즈만이 벌써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흐읍. 이 냄새는 뭐지?”

 매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건 언니가 제일 잘한다는 음식이래. 김치찌개라든가?”

 “호오. 찌개라고? 그것도 김치찌개?”

 하룬의 눈이 커졌다. 그의 걸음이 절로 아즈만의 곁으로 향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붉은색 고기와 야채 그리고 국물이었다. 이 시대의 음식은 거의 가공식품으로, 싱싱한 야채를 비롯한 생음식은 여간 잘살지 않고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비쌌다.

 하룬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냄비에 바짝 다가섰다. 그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것은 그가 거의 먹어 보지 못했던, 아니 현재의 유니온 주민들은 구경도 하기 힘든 종말 시대의 대표적인 음식 ‘김치찌개’였다.

 “아즈만은 어떻게 이런 음식을 다 만드는 거지? 재료는 어디에서 구했어?”

 하룬이 묻자 아즈만은 예의 그 고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재료는 1층 온실에서 키운 배추예요. 예전 종말 시대 말에는 오염 문제가 심각해서 집집마다 베란다에 작은 온실을 만들어 이렇게 채소를 재배해서 먹곤 했거든요. 그 전통은 휴먼 시대 초기까지 계속 내려왔어요. 그리고 김치찌개는 휴먼 시대 초기까지도 코원 유니온 주민들이 많이 먹던 음식이에요. 당시만 해도 하르크와 같은 변종 생물들의 개체 수가 많지 않아 아우터들과의 거래가 꽤 활발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왜 아우터들은 배리어 밖을 고수한 거지?”

 “몇 가지 원인이 있어요. 먼저 일부 아우터들은 종말 시대에서 휴먼 시대가 오기까지의 암흑기를 보내면서 비록 오염되고 혹독한 자연환경이지만 살아남으며 어느 정도는 적응한 상태였고, 나름 기반을 만들어 놓은 상태여서 굳이 배리어 안으로 들어올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요. 그런 이들의 대표적인 것이 사이언스 마을이나 용광로 마을 혹은 다양한 광산 마을들이에요. 이미 주인이 정해진 땅으로 들어가 좁은 곳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는 것을 꺼린 거지요.”

 하긴 하룬 자신 같아도 밖에서 충분히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 이미 신분 사회가 형성되어 버린 곳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무리는 유니온에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부류에요. 과학자들과 기업인 출신이 주축이 된 유니온 지배 세력에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자들이지요. 높은 과학 지식이나 기술 혹은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지만 종말 시대 초중기에 유행했던 민주주의라는 사상에 길들여진 그들은 단지 능력으로 신분이 정해지는 유니온 체제를 타파하려는 계몽 활동을 벌이기 일쑤였거든요.”

 흔히 유니온에서 말하던 정치범들의 실체가 바로 이런 부류일 것이다. 그들은 엄격하게 관리되거나 혹은 배리어 밖으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세 번째는 인간들과 유전자 결합이 가능한 일부 변종 생물, 즉 오르그와의 혼혈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원인으로 변종 유전자를 가지게 된 자들이죠. 한번 변이를 일으킨 유전자는 원래의 형질보다 우성을 가지게 되어 변성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게 되는 만큼 유니온 통치자들은 이들을 배리어 밖으로 내쫓아 안으로 들이지 않게 되었어요.”

 아즈만의 설명에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콤한 찌개 국물을 한 숟가락 먹었다.

 “흐음, 맛있는데.”

 이런 맛은처음이었다. 진한 고기와 야채의 향과 맛이 입 안을 자극했고, 매콤하고 알싸한 느낌이 목구멍을 통해 느껴졌다.

 “어서 드세요. 드시는 동안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아즈만의 권유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찌개를 먹어 보았다. 예전 휴먼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이렇게 식사하곤 했다고 했다. 지금의 즉석식품들과는 맛과 풍미는 물론이고 그 향까지 전혀 달랐다.

 한번 먹기 시작하자 아까와 달리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감탄성과 함께 먹는 데에만 집중하는 하룬을 보며 벨과 아즈만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밥과 김치찌개를 다 먹고 난 하룬은 배를 두드리며 차를 한 잔 마셨다.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네. 단순히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꽉 차서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이런 것을 단순히 포만감이라고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행복감 내지 만족감이라고나 할까. 그랬다. 이제까지 먹는 것이나 입는 것 혹은 자는 것에 크게 욕심을 부리거나 아쉬움을 느껴 본 적이 없는 하룬으로서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것에 더해 벨이 타 주는 차를 한 잔 마시자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 사람들이 먹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그러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암시장을 가나 보다. 배리어 밖에서 재배된 채소나 식품류를 사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벨의 채근에 하룬은 미처 차를 다 마시지도 못하고 그녀의 작업실로 내려갔다. 작업실에는 무균 시설이 몇 개 있고, 그 시설 안에는 마치 살덩이로 보이는 것들이 여러 개 배양되고 있었다.

 “이게 뭐니?”

 “응, 바이오칩을 이용한 일종의 생체 컴퓨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럴 때는 배움이 짧은 것이 후회된다. 그의 기색을 알아챈 벨이 활기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보통 컴퓨터는 실리콘을 이용한 반도체 소자가 주요 부품이야.”

 “그건 나도 알아.”

 “종말 시대 초기에 유전공학을 응용한 새로운 컴퓨터 소재가 개발되었어. 단백질로 기판을 만든 뒤, 그 위에 유전공학을 응용해 유기 분자를 입히고, 다시 아미노산 결합물로 회로를 구성하는 한편 스위치 회로에는 효소를 사용하는 거지.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조직들도 이런 기술로 만든 거야.”

 “꼭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어차피 그 재료가 무엇이든 인간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벨의 설명을 들으니 바이오컴퓨터가 어떤 것인지 대충 이해가 되었다.

 “인간의 육체 조직과 똑같은 조직을 바이오칩을 이용해 만들려는 시도는 종말 시대 내내 연구되어 왔어. 특히 인간이나 동물의 뇌에서 행해지는 패턴 인식?학습?기억?추리?판단 등 고도의 정보처리 기능을 컴퓨터에도 적용하려는 거지. 이 바이오칩은 집적 밀도를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어서 초소형?초고밀도?초고속 컴퓨터의 실현이 가능해졌어. 현재도 이런 지식과 기술이 전해지긴 하지만 제조 조건이나 외부 제어계와 연동 등의 연구 자료나 기술은 실전되어 만들 수 없는 거지.”

 “그럼 너는 만들 수 있단 말이야?”

 “호호! 당연하지, 오빠. 내가 누군데. 전에는 불가능했지만 아즈만 언니가 보유한 자료들과 기술로 복원할 수 있었어.”

 벨의 설명은 장황했지만 하룬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일부분이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뇌 부분의 경우도 바이오칩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벨이 이번에 만들어낸 것은 생물의 뇌와 신경계를 모방한 바이오 회로 소자를 조립해서 만든 바이오 뉴로Neuro 컴퓨터였다.

 그것은 뇌의 신경세포인 뉴런Neuron을 모방한 처리 요소Cell를 뇌세포의 연접부인 시냅스Synapse를 모방한 입출력 배선으로 결합하여 만든 것으로 패턴인식, 음성 분석, 언어 해석, 자기 학습 등의 인공지능 분야에 활용된다고 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어쩌면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어느 고등 생물이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예전 종말 시대에는 인간의 기원을 두고 종교계와 과학계에서 몇 개의 학설이 대립했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외계인이 인간을 만들어 냈다는 이론도 있었다.

 “아무튼 우리 벨 대단하네.”

 “푸훗! 그렇지? 아마 곧 나도 오빠와 똑같은 육체를 가질 수 있을 거야.”

 “그럼 좋겠다. 같이 게임도 하고, 바깥에도 나가고 말이야.”

 “그러려고 열심히 연구하고 작업하고 있어. 오빠랑 같이 보고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벨이 캡슐체인 본체와는 격리된 또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싶어 하는 목적은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하룬과 같이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럼 아즈만도 바이오컴퓨터인 거야?”

 “응. 언니는 프로토 타입이라 약 90%는 바이오칩으로 그리고 나머지 10%는 나노반도체 소재로 만들어졌대. 하지만 나와 달리 외형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 물론 나처럼 본체 이외의 육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룬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을 들어봐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저 벨을 따라다니며 그녀가 만든 바이오컴퓨터를 구경하고 그 기능과 앞으로의 역할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벨은 하룬에게 자신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바이오컴퓨터 부품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있었다. 그 부품들로 인간과 거의 동일한 육체를 만들어 그와 함께 바깥세상을 구경할 생각에 활기차게 움직였다.

 벨에게 끌려 다니며 그녀의 연구 결과를 구경한 하룬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위층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물론 하룬의 격려에 고무된 벨은 다시 연구실로 향했다.

 “호호. 벨에게 많이 시달린 모양이네요, 마스터?”

 그의 얼굴을 본 아즈만이 미소 지었다.

 “시달린 건 아닌데 내 지적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더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아.”

 “호호호. 언젠가 마스터가 배우실 내용이니 지금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나중엔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가상현실 게임에서 마스터가 이루려고 하는 목표를 달성하고 난 후에는 뭘 하실 생각이에요? 뭔가 현실에서 하실 게 있을 거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셔야 해요.”

 하룬은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그저 머리만 흔들었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공부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수시로 바뀌는 양육 가정 때문에 공부를 등한시했지만 이제 와서 다시 공부할 생각을 하니 아득했던 것이다.

 물론 비욘드에서 생활하면서 또는 벨이나 아즈만과 지내면서 공부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놓쳤던 공부를 할 생각이 있었지만 당장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알았어요, 마스터. 그런데 마스터가 전에 지시한 사항에 대한 몇 가지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들이시겠어요?”

 “뭐? 내가 뭘 지시했지?”

 묻고 보니 생각이 났다. 무주공산이 된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코원 유니온이나 지구 전체에 대한 정찰을 통해 아우터 마을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기氣라는 힘에 대해서도 실례가 있는지 조사를 부탁했었다.

 “마스터가 지시한 사항은…….”

 “아! 생각났어. 그래, 어느 정도 조사가 된 거야?”

 “제 연구실로 가세요. 보여 드릴 영상물들이 있어요.”

 “그러지.”

 하룬은 아즈만의 뒤를 따라 지하 4층에 있는 그녀의 연구실로 내려갔다. 그녀의 연구실은 엄청난 부피의 전자기기들이 사면은 물론 그 중간에까지 세워져 있었다. 지나가며 손으로 만져 보니 어떤 부분은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즈만, 이것들도 바이오칩으로 만든 게 있나 보네?”

 “맞아요, 마스터. 100%는 아니지만 바이오칩 기술이 상당 부분 적용된 컴퓨터들이에요. 물론 저처럼 인공지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슈퍼컴을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들을 가지고 있지요.”

 넓은 실내를 가득 메운 전자기기들은 현재도 작동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음향이나 발광을 주기적으로 하는 것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컴퓨터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긴 탁자와 몇 개의 안락의자가 보였다.

 “마스터, 저 의자에 앉아세요.”

 “이 의자?”

 아즈만이 가리킨 것은 발까지 뻗을 수 있는 긴 안락의자였다. 재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앉자 자동으로 척추에 가장 무리가 없는 각도로 움직인 안락의자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이제 눈을 감으시고 절 떠올리세요. 그럼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스터는 절 느끼고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하룬은 아즈만의 말대로 눈을 감고 아즈만을 떠올렸다.

 ‘호오!’

 신기하게도 마치 눈을 뜬 상태처럼 그녀의 화사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눈을 뜨거나 감는 것은 이제 상관없어요. 마스터는 의자형 컴퓨터를 통해 뇌파로 저와 연결되었어요. 굳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청각이나 시각에 의존하는 의사 전달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마스터가 알고자 하는 것들을 전해 드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룬은 눈을 떴다. 그러자 아즈만이 보였는데 그 거리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의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녀가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아즈만에 대한 생각을 얼마만큼 강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위성을 통한 정찰 결과를 영상으로 보여드릴게요. 마스터가 계신 곳은 코원 유니온으로,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요. 전 세계에는 약 삼백팔십 개의 유니온이있으며 그 위치는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어요.”

 하룬은 아즈만이 보여주는 영상을 통해 현재 자신이 있는 위치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같은 내용이지만 훨씬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반도에는 코원 유니온과 코투 유니온이 존재하고 있어요. 나머지 지역에는 아우터 마을이 약 팔백 개 정도 되고요. 산지에 약 육백 개, 평지에는 약 이백 개의 마을이 있는데 평지 마을의 경우 종말 시대가 휴먼 시대 초기에 건설된 지하시설이라는 게 특징이에요. 각 마을의 크기는 오백에서 만 명 규모로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는 약 이천삼백 명 정도의 휴먼들이 거주하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아우터 마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코원 유니온을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 안에만 해도 약 서른 개의 마을이 존재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정말 궁금했다.

 “굉장히 많군!”

 하룬의 감탄에 아즈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마스터가 잘못 아신 거예요. 예전에는 더 많았어요.”

 “그래?”

 “네. 100여 년 전만 해도 유니온들이 부족한 식량이나 각종 자원들 때문에 아우터 마을들과 거래하고 있었기에 그 숫자는 더 많았지요. 하지만 변종 생물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아우터 마을의 경우 약 3분의 1이 사라졌어요.”

 붉은 점으로 표시된 아우터 마을들은 대부분 산을 끼고 있거나 강 상류 쪽에 위치해 있었다. 변종 생물들의 위협이 얼마나 큰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도시를 형성할 수는 없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재주나 기술을 가진 인간들이 도시를 건설하면 변종 생물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몇 번 그런 시도가 있었어요. 하지만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한 유니온들의 견제와 환경적인 요인 그리고 수백 년 동안 격리되어 생활하면서 달라진 문화적 차이들에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런 시도는 실패로 끝났어요.”

 아쉬웠다. 배리어 밖 상황이 나아진다면 배리어 안에서 무능력자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하층민들은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니온을 이루는 거의 가치 없는 볼트나 너트와 같은 삶 대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변종 생물들의 위협은 어느 정도지?”

 “상당해요. 변종 생물들이 집단을 이루고 한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한 이래로 아우터들의 숫자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어요. 오르그나 하르크는 인간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식량으로 인식하고 있거든요.”

 “빌어먹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불쾌했다. 인간을 식량으로 삼는 놈들이라니.

 “다행한 것은 최근에는 변종 생물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는 거지요. 30년 전부터 아우터들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

 반가운 소리였지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아즈만은 그런 하룬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이유를 말해주었다.

 “종말 전쟁 후 달라진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출현한 변종 생물들은 몇 겹의 피부 조직이나 놀라운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 기존의 화약 무기나 에너지 무기로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양자포라든가 파동포 같은 무기의 효과는 아직도 절대적이지만 그것들은 아우터들이 가질 수 있는 무기들이 아닌 데다 그 에너지라든가 제조 기법은 이미 실전된 상태라 유니온들도 쉽게 사용할 수 없지요.”

 “그렇지.”

 그건 하룬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10미터 이내가 아니면 탄환이 놈들의 가죽을 제대로 뚫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놈들의 이동, 도약과 같은 능력이 인간들의 안력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빠르고 폭발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들은 새로운 무기들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 덕분에 아우터들의 숫자가 조금씩이지만 늘어나고 있고요.”

 “무기?”

 “네. 그것은 인간들이 흔히 염력念力이라든가 혹은 기氣라고 부르는 힘이지요. 한반도는 물론이고 인접한 대륙에 산재하는 아우터들은 언제부턴가 그동안 신비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되었어요.”

 “염력과 기라.”

 염력을 사용하는 것은 본 적이 있었다. 나인이 하르크를 상대할 때 염력을 발휘해서 놈의 공격을 일순간 멈추게 한 것을 보았다. 게다가 하룬 자신만 해도 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다 가상현실 게임 비욘드 덕분이다. 게임에서 메신저 스킬을 배우며 부가적으로 그곳에서는 마나, 여기서는 기라고 불리는 힘을 얻는 방법과 몸에 축적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아우터들은 어떻게 그 힘을 얻었을까?

 “그런데 이 염력과 기를 사용하는 인간들은 이미 오래 전 종말 시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어요.”

 “정말?”

 “네. 분명히 종말 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초능력이라고 부르던 염력이나 기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있었어요. 요기라고 부르는 정신 수련자들이나 평생 무술에 전념한 무술가들은 그런 종류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어요. 다만 그 힘의 정도가 신기함에 그칠 정도로 약했을 뿐이죠.”

 아즈만의 말을 듣는 순간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대로부터 그런 힘이 존재했었다면 왜 지금까지는 위력이 약했는데 갑자기 강해진 걸까? 또 그런 능력은 어떻게 전수되는 것일까?

 머릿속이 풀어진 수초처럼 혼란스러웠다.

 아우터들이야 그렇다 쳐도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의 인구를 가진 유니온들은 왜 그런 힘을 개발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했을까?

 배리어로 보호되는 공간을 벗어나지 못해 거대하고 긴 지하도를 뚫어야 하는 대신 그 힘을 사용해 변종 생물을 상대하면 되지 않았을까?

 제대로 된 기계문명이 사라진 현실에서 엄청난 인력과 재화를 투입해 지하도를 건설하는 것보다 기를 사용하는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 더 편하고 쉽지 않았을까?

 하룬의 그런 생각을 읽은 듯 아즈만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 조사에 의하면 배리어 안에는 그런 새로운 힘을 가진 인간들이 별로 없어요. 달라진 환경에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강인하게 맞서 온 아우터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거죠. 기뿐 아니라 염력을 사용하거나 신체가 강화된 인간들이 배리어 밖에서 계속 나오고 있었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나인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과학적인 자료로는 분석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지만 종말 전쟁 후 일정 기간이 지나고 이 세상은 갖가지 에너지가 가득 차게 되었어요. 물론 그 에너지의 존재 형태나 양식은 과학 기술로 알아낼 수 없지만 마치 종말 시대에 유행했던 소설들에서 나오는 사람들처럼 갖가지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아우터들 중에는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어요.”

 “확실한 거야?”

 “네, 마스터! 제 추측으로는 달라진 대기 성분이나 종말 전쟁의 여파로 수백 배나 증가한 에너지 때문에 그런 강력한 힘을 쓸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마스터의 지원으로 제가 얼마 전 만들어 한반도 전역에 띄운 독수리 형의 사이보그들 중 하나가 잡은 근접 촬영 영상을 보여 드릴게요.”

 아즈만은 두껍고 까만 가림 막으로 창과 유리 천장을 가려 실내의 조도를 최저로 낮춘 후 한쪽 벽에 홀로그램 영상을 띄웠다.

 높은 산들이 중첩해서 이어진 고지였다. 비욘드의 엘프 마을에서 본 것과 비슷한 거대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숲을 이룬 곳이었다. 그 숲의 중앙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한 인간이 화살을 잰 활을 들고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까? 짐승 가죽으로 만든 조잡한 바지와 조끼를 입은 남자는 사슴을 노리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풀 속에 몸을 낮추고 기다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숲에서 들소만큼이나 단단한 근육과 물소의 뿔보다 더 날카로운 뿔을 가진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슈욱!

 기다리던 사내가 화살을 쏘아 내자 파공성이 일었다. 비록 진짜 소리까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단한 팔 근육을 가진 사내의 화살에는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푸욱!

 거대한 사슴이 작살을 맞은 듯 공중으로 펄쩍 뛰었다가 땅으로 떨어진 후 몇 번 바동거리더니 결국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 사슴의 목덜미에서는 반 이상 뚫고 들어간 화살대를 따라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살을 쏜 사내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다른 화살을 시위에 걸고 동정을 지켜보았다. 뭔가 다른 위험이라도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슴에 거의 도달한 사내가 갑자기 숲을 주시하며 몸을 바짝 낮추고는 풀로 자신을 가렸다. 잠시 후 숲에서 불청객 셋이 나오고 있었다.

 매끄러워 빛이 나는 갈색 피부, 털 하나 없는 머리통에 눌리고 큰 코, 크고 붉은 눈, 고르지 못한 이빨과 튀어나온 턱 때문에 입을 다물 수 없는 괴물들은 근육이 튀어나올 것처럼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나무로 보이는 재질의 창과 쇠로 만든 도끼 그리고 대검과 작은 방패를 든 세 괴물들은 하체의 중요 부위만 가리고 있었는데 키는 2미터가 넘어서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 정도로 강인함과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그?”

 “맞아요.”

 “하지만 오르그는 키가 저렇게 크지 않은데.”

 “오르그의 변종으로 보여요. 종말 전쟁 후에 대기 성분의 변화가 일어난 이후부터 모든 생물의 진화가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지요. 물론 그 진화는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현상이고요.”

 아즈만이 설명하는 사이 세 오르그는 사슴의 목에 꽂힌 화살을 가리키며 마치 의논이라도 하듯 떠들더니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가장 앞에 서 있던 오르그의 가슴에 화살이 꽂혔다.

 팅!

 아마 그런 소리가 났을 거 같다. 화살은 촉 부분이 약간 꽂혔을 뿐 이내 튕겨 나가고 말았다. 재질이 무엇인지 영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거무튀튀한 촉 부분의 색깔을 보면 쇠로 만든 것 같았는데 오르그의 가죽을 뚫지 못했다.

 세 오르그는 괴성을 지르며 화살을 날린 인간을 공격했다. 화살을 날린 직후 날렵한 몸놀림으로 도망치던 인간은 허벅지에 창을 맞고 몇 번을 구른 후에 쓰러지고 말았다. 영상이라 자세한 거리는 측정할 수 없지만 제법 먼 거리까지 도망쳤던 인간이지만 오르그의 힘은 대단했다.

 인간은 창에 꿰뚫린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도주를 감행했지만 그 속도를 기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 오르그는 방만한 몸짓으로 뭐라고 웃고 떠들며 인간에게 접근했다. 창을 던진 오르그가 가장 앞서 인간을 따라잡았다.

 음부를 가린 가죽 천을 고정시키는 허리띠에서 잘 벼린 단검을 꺼내는 놈의 얼굴에 떠오른 진한 살기가 영상을 통해서도 전해져 왔다.

 하룬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비록 일면식도, 아는 바도 전혀 없는 인간이지만 같은 종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의 가슴 저 밑바닥에 내재되어있던 동정이 머리를 치켜든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는 하룬이다.

 산발이 된 머리와 수염 때문에 성년은 넘겼으리라 짐작했던 인간의 얼굴이 드러났다. 완전히 하늘을 보고 누운 것이다. 눈빛이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이제 갓 성년이 되었거나 그보다 어린 것 같았다.

 그는 오르그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로 뭐라 저주를 퍼붓는 것 같았다. 오르그들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단검을 든 오르그가 이를 드러냈는데 시뻘건 잇몸에 뾰족한 이빨들이 무질서하게 난 것이 더욱 흉악해 보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인간의 뒤에 있던 숲에서 세 명의 인간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모두 처음의 인간과 비슷한 복장이었지만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검이었다.

 세 오르그는 멈칫했지만 이내 흉성이 터진 듯 인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 인간 역시 팔 길이 정도의 검을 휘두르며 오르그에게 육박해 갔다.

 채앵!

 창!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도끼를 든 오르그와, 검과 방패를 든 오르그는 두 인간의 검에 맞서 무기를 휘둘렀고 강한 충격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뒤로 튕겨 났다.

 하지만 창을 들었던 오르그는 손에 든 단검으로 인간의 검을 막다가 단검이 부서지고 앞가슴에 긴 자상을 입었다. 쇠로 만든 화살촉에도 뚫리지 않았던 놈의 가죽에 긴 자상이 난 것이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인간들의 검날에는 희미하게나마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러 소드?”

 “맞아요. 기가 주입된 상태지요. 아직 그 경지가 일천해서 극히 적은 양이지만 잘 정련된 검 때문에 그 효과가 극대화되고 있어요.”

 하룬이 아즈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인간들의 추가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앞가슴에 상처를 입은 오르그가 베인 가슴을 보며 한눈판 사이 인간이 높이 도약해서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쇄액!

 파악!

 오르그의 목이 3분의 1 정도 베였다. 무기가 없는 상태인지라 무조건 뒤로 도망쳤어야 하는데 상처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실수를 한 탓에 오르그는 덜렁거리는 목에서 분수처럼 피를 쏟아내며 동료들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따. 그 모습이 너무나 괴기했다.

 두 오르그는 입을 벌리고 뭐라 소리를 지르며 두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도끼가 검과 부딪쳤다.

 까앙! 챙!

 양쪽에서 가장 강인한 육체를 지닌 오르그와 인간은 나란하 두 발씩 뒤로 물러났다가 이내 다시 상대를 향해 도끼와 검을 휘둘렀다. 이후 몇 번이나 동일한 패턴의 격돌이 반복되었다. 기교를 배제한 힘 대 힘의 박력 있는 대결이었다.

 싸움은 오르그가 유리했다. 작은 방패로 인간의 검을 박으며 두 손으로 잡아야 할 정도의 대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오르그의 공세에 인간은 연방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인간이 힘에서 밀리고, 기교나 병기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한 명이 더 있었다. 오르그 하나를 해치운 인간이 싸움에 가세하자 방패를 쓰던 오르그는 더 이상 병기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연방 뒤로 밀렸다.

 대검을 휘두를 공간조차 확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주지 않고 양쪽에서 달려드는 인간들의 검을 검과 방패로 쳐내면서 정신없이 뒤로 밀리던 오르그가 갑자기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사슴의 시체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당황한 오르그의 눈에 다급한 빛이 떠오를 때 푸른빛이 일렁이는 두 검이 나란히 가슴과 배를 꿰뚫었다.

 푸악!

 오르그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두 인간의 검이 깊이 박힌 탓에 몇 번 꿈틀거리다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하나 남은 오르그도 두 동료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다. 오르그가 쥔 도끼가 어느새 부서져 버렸던 것이다. 두 동료가 당한 것을 보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오르그가 자루만 남은 도끼를 인간에게 던지고 몸을 돌린 것이 실수였다.

 이제까지 기교 없이 도끼를 향해 정직한 검을 날렸던 인간은 오르그가 등을 돌리자 주저하지 않고 검을 던졌다. 워낙 가까웠던 탓에 설령 오르그가 정면이었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쾌속한 투검投劍이었다.

 푸욱!

 푸른빛이 일렁이는 검첨이 오르그의 목을 뚫고 앞으로 나왔다. 오르그는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검을 잡았지만 이내 상황을 알아차린 듯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말았다.

 세 인간은 지쳤는지 손으로 무릎을 짚고 한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심호흡하고 숨을 고르더니 쓰러진 인간에게 다가갔다. 가장 잘 발달된 육체를 가진 인간이 푸른빛이 일렁이는 검을 내리치자 허벅지를 관동한 창이 반으로 잘렸다.

 가죽 옷 속에서 뭔가를 꺼내, 창대를 빼고는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상처 부위에 뿌렸다. 그러자 쓰러진 인간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마도 고통이 심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 인간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아마 기절한 것이리라.

 두 인간은 익숙한 솜씨로 나뭇가지를 베고 다듬은 다음 한 장의 가죽을 허리춤에서 꺼내 엉성하지만 들것을 만들어 기절한 인간을 실었다. 나머지 한 인간은 오르그들의 무기를 옆구리에 주렁주렁 매달고는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큰 사슴의 사체를 들어 어깨에 메고 그 뒤를 따랐다.

 영상은 숲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휴우.”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긴장했었는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기를 무기에 주입한 것을 마스터도 보셨죠?”

 “응, 맞아.”

 하룬은 자신 역시 경험이 있기에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스터리였다. 제대로 된 옷도 못 입을 정도로 옹색한 차림을 한 인간들이 비욘드의 세계에서도 강자로 대접받는 익스퍼트의 경지라니!

 비록 검의 일부에만 기를 주입했지만 그 정도의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비욘드 세상의 기준으로도 재능이 있는 자가 어릴 때부터 시작해 20년 정도의 긴 세월을 일심으로 수련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확히 얼굴을 잡지 못했고, 자신처럼 수염이 가득한 얼굴이라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룬이 마나 플로라 부르는 나름대로의 기 수련법을 익히고 있을 터였다.

 “저들은 어떻게 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까?”

 허름한 옷차림이나 사냥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몇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첫 번째는 종말 시대를 포함한 선대로부터 기록이나 구전을 통해 물려받는 경우죠.”

 그녀의 말에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굳이 종말 시대에 무협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들이 유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관심이 있어 벨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중에는 종말 시대에도 기를 사용하여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 정도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로 급격하게 변질되거나 아니면 사이비 종교화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자연 발생적인 진화를 통해 저런 능력을 습득하게 된 거지요.”

 어쩌면 이 경우가 가능성이 더 높았다.

 “종말 전쟁의 오염되고 황폐화된 환경은 이전 인류들이 생존하기엔 너무나 혹독했지만 다른 생물종이 그렇듯 인간들 역시 강한 생존력과 적응력으로 살아났어요. 비록 종말 시대 초에 모든 유전자 지도가 그려졌지만 각 유전자의 역할과 기능이 밝혀진 것은 70%도 되지 않아요. 우리는 그 나머지 30%의 유전자들에 이렇게 멸종 위기가 도래했을 때 발현되도록 설정된 잠재력 혹은 강한 적응력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하룬은 아즈만이 ‘우리’라는 호칭을 쓰는 것에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벨이 위성과 접속해서 새로이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아우터들 중에는 인간이긴 하지만 다른 종으로 분류될 정도로 심하게 변이를 일으킨 변종 인간들이 꽤 있다고 했어요. 그중에는 피부 조직이 가죽으로 불릴 정도로 변이를 일으켰거나 보통 인간들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괴력을 가져 오르그들도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인간들도 있다더군요.”

 놀라운 일이다. 인간은 다른 포유류에 비해 나약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대신 높은 지능으로 무기를 만들어 그들을 상대했는데 강인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니.

 “어쩌면 종말 전쟁의 여파로 급격하게 변화된 환경 때문일 수도 있어요. 종말 전쟁 동안 수없이 많은 핵무기들이 터지고 대지와 바다는 요동을 쳤지요. 지구 행성의 에너지들이 넘치다 못해 터질 지경이 되었어요. 그때는 당장 행성 자체가 파괴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살아있는 지구는 조금씩 균형을 찾으려고 애썼어요.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태지요. 대기의 구성은 미세하지만 바뀌었고, 에너지는 넘치고 있어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새로운 동식물이 출현했고, 그들의 식생이나 능력은 전과는 다르지요. 곧 소멸될 배리어를 벗어날 인간들에게는 강력한 경쟁자들이나 협력자들이 널려있는 세상이에요. 인간은 이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해요.”

 아즈만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이런 상황은 인간들이 만들었으니 인간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제길!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고.’

 물론 이렇게 불평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먼 과거의 우매한 인간들이 서로 싸우다가 이렇게 만든 것이지만 그 인과의 고리가 자신들 세대까지 단단하게 얽매고 있다는 것이 짜증날 뿐이다.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각종 이능력자들이 속출하는 거로군. 변종 생물들도 그렇고.”

 “맞아요, 마스터! 과학적으로 정확히 수식을 써 가며 설명하기가 애매하지만 기본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해요. 이전 인류의 역사를 보아도 인간들이 신봉하던 철학자들이나 종교의 대상들도 모두 이렇게 에너지가 넘쳐흐르던 시대에 탄생했으니까요.”

 그거야 오래전의 역사이니 알 도리가 없는 노릇이지만 각종 능력자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인만 해도 강력한 초능력자였고, 자신도 벨의 존재가 매개되어 있지만 비욘드라는 게임에서 익힌 스킬을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사용할 수 있었다.

 “세 번째 가능성은 어떤 다른 존재들에게 그런 능력을 학습했을 수 있어요.”

 “다른 존재라면?”

 “흔히 외계인이라고 불리던 존재지요. 종말 시대 말에는 그들 중 일부와 접촉해서 선진 문명을 받아들인 강대국들이 존재했었지요. 흔히 지구와 광년 단위로 수만 년에서 수언 년 떨어진 외계에서 온 존재들이라고 알려졌지만 우리는 그들이 지구에서 오래전에 문명을 이룩했던 존재들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룬의 눈이 밝게 빛났다. 이건 흥미로운 생각이었다.

 “그들은 지구 혹은 화성에서 문명을 일으켰고,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지구를 떠났거나 지하 깊숙한 곳으로 피신해서 살아왔다고 추정돼요. 종말 시대 말에는 달과 화성의 지하와 표면에서 그들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어요.”

 처음 듣는 말이라 뭐라고 물을 것도 없이 그냥 아즈만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들 중 일부는 그 육체가 공개되기도 했어요. 털이 없는 매끈한 피부와 긴 팔다리, 불균형할 정도로 큰 머리에 큰 눈. 거기에 내장 기관이 단순하고 생식기가 퇴화된 모습이었죠. 일부는 인간의 세 배가 넘을 정도의 거구들이 있는가 하면 손바닥 길이의 작은 외계인도 발견되었어요. 물론 당시 그런 존재들에 대한 정보는 모두 각국 수뇌부가 조작하거나 루머로 치부되어 흐지부지 넘어갔지만요.”

 하룬은 아즈만이 말하는 외계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만 구체화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대단한 과학 문명을 지녀 인간들에게 그 지식을 전수하기도 했는데 미국이나 러시아라고 불렸던 종말 시대 초의 몇몇 나라들은 그 정보를 독점하여 초강대국으로 성장했어요. 과학자들 중 일부는 그런 정보를 알아내고 그들 나라를 성토하며 비밀을 공개하라고 압박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죠.”

 정보를 손에 쥔 자들이 그것을 다른 자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 것은 현생인류인 휴먼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각 유니온들이 자신들의 과학자들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그것들은 전부 정보를 독점하기 위한 비행들이었다.

 “당시 UFO 연구가들은 그들이 주로 화성의 자하나 달의 지하에 거주한다고 주장했어요.”

 하룬은 입을 벌리긴 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외계인들이 그렇게 가깝게 거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종말 시대 말에는 화성과 목성의 한 위성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프로젝트까지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점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진짜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아니라 지구인들의 선조 혹은 이전의 인류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이건 정말 흥미 있는 주제다.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는 아즈만에게 물었다.

 “내가 알기론 화석이라든가 여러 가지 유물을 통해 50만 년에서 수억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지구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왜 그런 존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거지?”

 하룬의 질문에 아즈만이 미소 지었다.

 “그건 당연한 의문이에요. 하지만 화석이란 신뢰할 수 있는 증거이긴 해도 그것이 남겨질 가능성은 수십만 분의 일도 안 돼요. 더구나 그들의 문명이 인간들과 다른 종류, 즉 금속을 사용한 문명이 아니라 저처럼 바이오칩을 이용해 짧은 시간에 파괴되고 그 흔적이 남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다. 아즈만이 파괴된다면 그녀의 몸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90% 유기물이기 때문에 불과 몇 년 안에 10%의 금속 재질을 제외하고는 흔적도 없이 썩고 만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은 금세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찰 사이보그들을 가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자료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힘과 민첩성이 떨어지는 인간들이 마냥 밀리기만 하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일부 아우터들이 오르그나 하르크를 상대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종말 시대에 유럽과 아메리카라고 불렸던 땅에는 수많은 오르그들이 부족 단위를 넘어 이제 국가 단위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상태지만 마스터가 살고 있는 이 반도半島와 인접한 대륙은 사정이 달라지고 있어요. 오르그보다 훨씬 능력이 강한 변종 오르그들도 제 영역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정도로 아우터라 불리는 인간들의 능력이 대단했어요.”

 고무적인 일이다. 하룬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제는 사라진 영상이 있던 공간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래, 그래야지! 인간이라면 당연히 저런 변종 생물에게 밀려서는 안 되는 거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쳐 박살을 내야 하고말고.’

 하룬은 처음으로 가상현실 게임 세상인 비욘드보다 배리어 밖에 더 궁금해졌다. 자신이 꿈꾸는 힘을 가진 아우터들이 사는 세상. 그곳은 어떤 세상이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던전 일만 마무리하면 게임을 접자. 어차피 내가 그렇게 염원했던 메신저 검술과 마나 플로까지 얻었으니 이젠 제대로 검술을 수련할 수 있잖아. 검술과 암기술을 수련해서 힘을 가진 다음 저 세상으로 나가보자.’

 하룬의 주먹이 벌벌 떨렸다.

 똑똑한 인물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때론 귀찮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지적 호기심을 마음껏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지만 일단 주제가 나오고 예시를 듣기 시작하자 호기심과 흥미가 무럭무럭 일어났다.

 아즈만에게 질문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하룬의 지적 욕구는 다 채워지지 않았다. 원래 과거의 일이란 것이 많은 가식과 거짓이 의도적으로 섞여 정확한 진실을 아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아즈만의 설명으로도 해명되지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과연 인간들은 멸망을 위해 달리는 오작동 마그네틱 카인가?’

 인간들이라고 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폭력은 폭력을 낳고 끝없는 복수를 야기하는 나쁜 행위지만 종말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 종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참혹한 비극이 생겨난 것도 부지기수지만 긍정적인 역할 또한 그 못지않게 컸을 것이다. 그런 긍정적인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 이들이 멸망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은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종교란 수많은 나라에 걸쳐 존재하는 만큼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기 때문에 종교가 앞장선다면 분란들의 상당 부분은 해결했을 소지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룬 자신이 인간의 후예인 휴먼이기 때문에 그런 믿음은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인공지능체들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고도의 과학 문명을 가진 그 똑똑한 인간들이 나쁜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멸망을 향해 폭주했을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외계인의 진실은 과연 뭘까?’

 외계인들이 머나먼 행성에서 온 다른 생명체가 아니라 지구에 살았던 선대의 지적 생명체라는 아즈만의 추측은 일면타당성도 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들도 많았다.

 그들 또한 멸망했거나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려 화성이나 달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 정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면 자신들의 후예나 마찬가지인 인간들이 그렇게 파괴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을 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아무래도 관여를 했을 것 같다. 어느 정도 마음을 주었다가 배신당하긴 했지만 재수 4인방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비록 미운 녀석들이긴 하지만 그들이 서로 물고 뜯어 모두 죽음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말렸을 것이다. 그 정도의 힘과 영향력은 있으니까.

 만약 외계인들이 지구를 기반으로 문명을 꽃피웠던 생명체들이라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관여했을 거라고 하룬은 확신했다. 그래서 아즈만의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벨과 아즈만 같은 존재들이 얼마나 되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 문제 역시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오랫동안 품어 온 의문이었다.

 넥컴월은 비욘드를 출시하면서 짧게 대답했다. 에인션트 컴퓨터들과 사막에서 찾아낸 수백 대의 슈퍼컴들의 능력을 이용해 이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었노라고.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이 말을 믿을 수 없어!’

 아무리 전쟁 때문이라곤느 해도 수백 대의 슈퍼컴퓨터들이 수백 년이나 지났는데 그렇게 멀쩡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한 배리어를 가동하는 태양 발전소의 설비가 극도로 노후화되어 곧 소멸할 운명에 처한 것을 아는 유니온들이 그 슈퍼컴들을 얌전히 전지구위원회에 양도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다. 그 컴퓨터들을 민간 기업인 넥컴월이 가상현실 게임의 세계를 구현하도록 사용 허가를 했다는 것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유니온들로서는 제일 시금한 문제인 태양 발전 시설과 에너지 막의 보수라든가 그도 아니라면 단절되어 버린 과학 지식이나 기술의 복원 혹은 변해 버린 외계 상황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자료 수집이나 대책 수립에 이르기까지 그 효용가치는 너무나 컸다.

 ‘이런 상황에서 슈퍼컴들을 양보했다고? 하르크가 풀 뜯어먹는 소리지!“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이야 제대로 배우질 못해 과학 지식이나 기술이 거의 없는 상황이고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프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지만 사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기계에 불과한 아즈만이 인간형으로 변신하거나, 인간형 분체를 가지게 된 벨의 존재는 불가사의했다.

 도대체 자신이 뭐기에, 자신에게 무엇이 있기에 이런 존재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한 것일까?

 성년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무능력자로 거듭 평가받은 자신이야말로 평범함을 한참 밑도는 수준이 아닌가. 왜 자신에게 이런 존재들이 주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룬은 언젠가부터 양부가 유언으로 벨을 전했다는 것은 사실 믿지 않았다.

 그는 이미 완전하게 잊어버린 양부로부터 선물이라며 전해져 온 벨의 존재. 양부와 그녀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소원하던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증거가 남아 있는 사이언스 마을까지 찾아갔어도 그의 마음 한편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가 느낀 단상斷想이긴 해도 양부는 과학자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인간적인 면모가 상당히 부족한 인물이었다. 연구 외에는 가정도, 출세도, 돈이나 명예도 별 가치가 되지 못하는 양부가 죽기 직전에 그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껴 평생의 역작인 벨과 같은 존재를 보냈다는 것은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뭔가 다른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다.

 아즈만을 만나게 된 계기도 마찬가지다. 비록 나인이 관여한 일이었지만 의심이 들었다. 나인의 아버지는 영흥 마을의 전사장이다. 그 정도의 인물이 단순히 건물의 지저분한 외관 때문에 지하에 있는 시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비욘드는 정말 가상현실일까?’

 그것도 의문이다. 다른 유저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의 경우 안내음이나 상태 창 혹은 각종 게임의 부가적인 지원 체제를 거의 이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게임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로 느껴졌다.

 많은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에인션트 급과 슈퍼 급 컴퓨터들이 운영한다고 해도 가상현실은 현실과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촉각을 비롯한 오감에서부터 아바타의 동화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버그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욘드는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뼈대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어설픈 과학 문명이 아닌가.

 NPC들과 유일한 차이는 그들과 성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몬스터를 사냥할 때 가죽을 비롯한 부산물 외에 일정 확률로 아이템을 받는 것 정도밖에는 없었다. 물론 유저 전용의 사냥터라든가 하는 것은 게임의 전형적인 것이었지만 다른 것은 거의 현실과 차이가 없었다.

 ‘누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까?’

 아즈만 때문에 많은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었지만 목마름은 타는 것처럼 더 심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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