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귀환 (95/278)

《귀환》

 트레저 분지로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엘프들이 장악했던 던전 지대를 가로질러 통과한 것이다. 하룬 일행이 엘프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던전의 옆을 지나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지만 그들을 주시하는 은밀한 시선은 어디에나 있었다.

 힘든 여정이었기에 다들 쉬고 싶었지만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들을 쉬게 두지 않았다. 날이 밝는 대로 엘프들과의 협상 내용을 밝히겠다고 이미 말했음에도 부지런한 자들은 날갯짓을 거두지 않았다.

 역시 가장 기민한 움직임을 보인 곳은 1황자 측이었다.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던 란트렐은 1황자와 라인트 공작을 직접 동행하고 한밤중에 돌풍 용병대가 묵는 막사를 찾아온 것이다.

 “황자 저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룬의 간결한 인사에 수행 기사들과 귀족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지만 1황자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팔뚝을 들어올리는 하룬의 용병식 인사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진심이 담긴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의 대장이 이리 젊은 친구라는 것을 누가 믿을까? 나도 허례허식은 반기지 않네. 반갑네.”

 1황자는 호탕한 성격을 가진 사내였다. 그는 자신을 보고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하룬이 무척 신기한 듯 호기심 가득한 눈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1황자가 온다는 것은 듣지 못했기에 란트렐을 쳐다보았지만 그 역시 황망한 얼굴이었다. 1황자가 고집을 피워 이곳까지 온 것이 틀림없었다.

 “호오, 이것은 무슨 가죽인가?”

 1황자는 급조해서 만든 의자에 앉으며 의자에 씌워진 가죽에 관심을 가졌다.

 “럼프 오크의 가죽입니다.”

 하룬은 불과 10여 분 전에야 1황자의 방문을 통보받고 부랴부랴 카림이 방어구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로 이어 붙인 럼프 가죽을 의자들 위에 씌웠던 것이다.

 “이게 악마 오크로 소문난 그 럼프 오크의 가죽이군. 허어! 내가 쓰는 사벨 타이거 가죽보다 더 낫군.”

 가죽이 무려 일곱 겹이나 되어 푹신한 데다 가볍고 착용감이 좋은 부드러운 럼프 오크의 가죽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말 그렇군요, 전하. 제가 나중에 꼭 구해 드리겠습니다.”

 1황자와 동행한 라인트 공작 역시 엉덩이에 닿는 가죽의 감촉이 마음에 꼭 드는 듯했다. 하룬의 인사 때문에 일그러졌던 공작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장소가 협소하니 몇 분은 밖에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행 기사가 열두 명이나 들어오니 막사 안이 꽉 찼다. 그들은 앉으려야 앉을 공간도 없었다. 대원들은 아예 옆 막사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티노와 도네이스는 간담이 떨려서 감당할 수 없다며 옆 막사로 도망가 버렸고, 헤니는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딜런은 예의를 차리기엔 너무 오래 은둔생활을 해서 다 잊었다면서 굳이 밖에서 들어오질 않았다.

 “황사와 공작을 제외하곤 다 나가 있게.”

 “전하!”

 기사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불렀지만 황자의 눈은 이미 하룬에게 꽂혀 있었다. 그들은 기사장의 눈짓을 받고 막사 밖으로 향했다.

 1황자와 라인트 공작은 마치 탐색을 하듯 하룬을 요모조모 살폈다. 그 바람에 막사 안에는 잠시 침문이 흘렀지만 헤니가 곧 오미차를 준비해서 가지고 들어왔다. 마침 붉은 모루 부족이 준 자질구레한 선물 중에 찻잔 세트가 있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주석 잔이나 투박한 토기 잔에 차를 낼 뻔했다.

 1황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터라 자리에 남은 시종장, 게로스가 시음을 위해 한 모금 찻물을 마시더니 눈이 동그래지며 얼굴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것을 본 1황자가 마치 빼앗듯 찻잔을 받아 들었다.

 “저, 전하!”

 “괜찮다. 이런 자리에서 누가 내게 하독을 하겠느냐?”

 강력한 카리스마와 자신을 향한 믿음이 우러나오는 황자의 말에 라인트 공작 역시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오미차라고 합니다. 일전에 한 잔 마셔 보았는데 그 맛과 향이 일품이었습니다.”

 황사 란트렐의 말에 1황자는 잠시 찻잔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그 향을 맡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으음.”

 황자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입안에 퍼지는 오미차의 향과 맛을 음미했다. 다섯 가지 향과 맛이 연속으로 혹은 섞여서 혀와 입안을 가득 채우고는 안타까움과 함께 목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오묘한 여운이 입 안 가득 남아 있었다.

 “호오! 이런 차가 다 있다니. 정말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맛이며 향이군.”

 황자의 탄성에 라인트 공작과 란트렐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벌써 한 번 마신 경험이 있던 란트렐은 흐뭇한 얼굴로 눈을 감고 차를 즐겼고, 라인트 공작은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풀어지고 있었다.

 “이런 좋은 차를 혼자만 즐기고 있다니 무엄한 일이군.”

 1황자는 하룬을 보면서 짐짓 화를 냈다. 온갖 음식을 다 먹어본 1황자도 처음 맛보는 차였다.

 “우연히 인연이 있어 한 약초꾼 마을의 촌장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나중에 가실 때 챙겨 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래야지. 한동안 입이 심심하지 않겠군. 그동안 입이 깔깔했는데 위안거리가 생겨 다행이군.”

 하기야 황궁이나 라인트 공작성에서 지낼 때와는 먹는 음식이 다를 것이다. 제대로 된 조리 시설도 없고, 식자재의 공급도 원활하지 않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차라도 있으면 음식의 질이 떨어진다 해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

 황족들이나 귀족들에게 좋은 차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기호식품이다. 차나무를 재배하는 기술이 없는 터라 차는 모두 야생 차나무에서 따서 만들기 때문에 귀하기도 엄청나게 귀했다.

 분위기가 한 잔의 차로 단숨에 살아났다. 굳었던 공작의 얼굴이 풀리자 란트렐도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 순간 밖에서 딜런의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손님입니다.”

 일부러 마나를 담은 저음으로 말했기에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공작의 눈이 뜨거워졌다. 목소리에 마나를 담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딜런에게 강한 호기심이 생겨난 것이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하룬은 양해를 구하고는 막사 밖으로 향했다.

 아무리 NPC라지만 이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자에 속하는 1황자가 방문 중이니 내방을 거절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딜런이 직접 말한 것으로 보아 그거 꺼리거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일 테니 자신이 직접 나서야 했다.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 기사 하나가 황급한 얼굴로 들어와 하룬을 지나쳐 안쪽으로 향했다.

 ‘누구지?’

 밖에 나가 보니 이미 안면이 있는 1황녀 측이 도착해 있었다. 지난번에 방문했던 인원 구성 그대로였다.

 “오셨습니까?”

 “갔던 일이 궁금해서 이렇게 왔소이다. 불청객이라고 너무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메롤라스 백작이 넉살좋게 다가왔다. 그와 뒤에 있던 인원들이 막사로 가까이 오자 1황자의 수행 기사들의 손이 검 자루로 향했다. 순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살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적대감이 실린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그 순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딜런의 입에서 저음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돌풍 용병대의 땅이며 이분들은 우리 대장을 찾아온 손님들이니 자중하시오.”

 부르르.

 장내의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딜런의 막강한 기세와 마나가 담긴 목소리는 상대에 대해 적의 어린 시선을 던지며 기세를 올리던 양측 기사들의 투기를 한순간에 제압했다.

 목소리만으로 기세가 제압된 양측의 기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딜런을 쳐다보았다. 임시로 만든 문가를 지키고 있어 허접스러운 용병으로 생각했던 그들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호호호, 과연 돌풍 용병대군요. 저분이 바로 얼음의 검사로군요.”

 지난번에도 왔었지만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면사를 쓴 여인이 입을 열었다. 봄날 오후의 나른함과 가을 오후에 부는 쌀쌀한 바람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음성이었다. 그러면서도 호탕함과 위엄이 깃든 1황자와 비견될 정도의 묘한 위엄까지 느껴졌다.

 “1황녀 전하?”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호호. 과연 돌풍 용병대의 대장답군요. 날 전혀 모를 텐데 목소리만 듣고 추측해 내다니.”

 1황녀가 맞았다. 1황자와 함께 골든 배틀의 막강한 후보이자 5서클 마법사이기도 한 1황녀 아그리아 폰 테론이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마법을 익히느라 결혼도 마다하고 마탑에 칩거했다가 언젠가부터 존재감을 드러낸 1황녀는 마법사들을 중심으로 엄청난 세를 모으고 있었다.

 “1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하룬은 1황자에게 한 것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용병식 인사를 올렸다.

 “하룬 대장을 두 번씩이나 보게 되는군요. 지난번에는 그대가 궁금해서 일부러 신분을 감추었으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요.”

 “아닙니다.”

 “그대의 정령 마법이 궁금해서 마법을 토론할 시간을 갖고자 했으나 너무 바쁜 것 같아 이렇게 한가한 시간에 찾아왔건만 오라버니가 벌써 와 있었네요.”

 하룬은 1황녀의 말을 들으며 막사 쪽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하하하. 돌풍 용병대가 대단하긴 하군. 이렇게 황위 서열 1, 2위인 우리가 은밀하게 방문하게 만들다니 말이야. 그동안 잘 있었느냐, 아그리아?”

 “잘 지냈습니다, 오라버니. 하룬 대장은 굉장하지요. 홀로 독자적인 체계를 가진 정령 마법을 익혀 냈으며 제국의 암적인 존재인 정보 장사꾼들을 멋지게 골탕 먹인 것만으로도 같은 길을 걷는 자이며 황실의 식구인 제게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골든 배틀을 치르는 사이라 무척 적대적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두 남매의 대화와 서로를 보는 눈길은 정감이 넘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대감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맞아. 나도 그 소리를 듣고는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갔으니까. 황실을 우습게 아는 쓰레기보다는 확실히 존중받을 자격이 있지.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막 도착해서 뛰어난 맛과 향을 가진 차를 마시고 있었느니라.”

 “풋! 오미차 말이군요. 저도 지난번에 와서 마셔 보고는 그 맛이 혀끝에서 계속 떠나질 않더군요.”

 “허허! 벌써 다녀갔느냐? 하긴 네 성품이 궁금한 것은 죽어도 참지 못하니. 부황이 쓰러지신 직후에 보고 처음이니까 우리가 만난 지도 한 3년 만인가?”

 “그렇게 되었네요. 그간 적조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나 나나 따르는 사람들 입장이 있고, 이룰 목표가 있으니 바쁜 것은 물론이고 일부러 만날 일은 만들지 않는 것이 낫겠지. 하지만 이렇게 편안한 장소에서 만났으니 오랜만에 정담이라도 나누자. 안으로 들어라.”

 “네, 오라버니.”

 졸지에 용병대 막사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을 지닌 두 사람이 머물게 되었다. 최측근 수행원들도 막사 밖으로 내보내고 좁고 허름한 막사 안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강력한 경쟁자들이지만 차를 마시는 지금만큼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1황녀는 이제 면사를 걷었는데 마흔이 넘었을 테지만 외견상으로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맑고 정갈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마나의 길을 걸어서 그런지 가는 눈매 속에 자리한 눈은 맑고 깊었으며 동작에는 범접하기 힘든 기품이 어려 있었다.

 차를 마시며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하룬은 엘프들과 만났던 일을 꺼냈다. 인간들이 던전으로 알고 있는 ‘황제의 계단’에 얽힌 라 제국의 비사부터 시작해 그들의 조건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다만 던전의 원 이름이 황제의 계단이라는 사실만은 말하지 않았다. 미리 이야기한 것도 있었고, 왠지 그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허어! 그럼 그동안 원인 미상의 실종 사건은 바로 볼카웜이란 몬스터들이 한 짓이로군.”

 “그런 거 같네요, 오라버니.”

 두 사람이 하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볼카웜이었다. 하룬은 몰랐지만 그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종 사건들 때문에 분지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볼카웜에게 향했던 그들의 관심은 곧 던전으로 쏠렸다. 이곳에 온 목적이 바로 그 던전 때문이 아닌가.

 “흐음. 단순한 던전으로 알고 있었던 곳이 다른 목적을 위해 고도의 마법과 기술을 통해 지어졌으며, 그런 엄청난 비사가 있었다니 정말 놀랍군.”

 “이 장소는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네요.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면 골든 배틀 따위는 치를 필요도 없겠어요.”

 “그렇지. 참으로 절묘한 일이군. 어찌 우리 대에 와서 이런 곳이 출현했지?”

 1황자와 1황녀는 하룬의 설명을 듣고 무척 놀라워했다. 수행한 최측근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고대 유물이 묻힌 던전이라고 생각했던 이 장소에 그런 비사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던전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도 놀라워.”

 “어쩌면 높은 수준의 환영 마법이 펼쳐져 있는 것 같네요. 걸어간 곳에 알맞은 일정한 표식을 주어 워프 마법진을 통해 던전 밖으로 내보내는 것 같고요.”

 “그건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참으로 신묘한 건물이 아닐 수 없구나.”

 “진작 이 던전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렇게 몇십 년에 한 번씩 수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정말 아쉽네요.”

 두 사람은 던전의 비사를 듣고 놀라는 한편 라 제국의 높은 문화에 감탄하고 있었다. 테론 제국에서도 진작 이런 식으로 황제를 가렸다면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생명의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참!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그 안에 있다는 유물들이나 마법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인가?”

 1황자는 너무 놀라 그간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이 바로 마법서들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일정한 단계를 넘은 자들은 던전 안에 있는 마법서를 포함해서 다른 서적들을 열람할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지혜의 파편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호오, 그건 다행이군.”

 “아까 한 말 중에 던전을 모두 통과한 자는 최소 100년에 한 번 나올 정도로 희귀하다고 했는데 그런 경우 라 제국 시대에는 어떻게 했다고 하던가?”

 1황자의 질문에 하룬은 로드에게 들은 대로 대답했다.

 “당시 라 제국은 각 종족을 대표하는 집정관 체제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집정관은 일정 자격 이상의 자들로 구성된 선거인들의 선거로 뽑았으며 5년 임기로 세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그들 집정관들이 각 종족의 자치구에서 행정, 사법, 임법을 맡아 처리했으며 그들의 하부에는 현재의 영지를 가진 귀족 체제와는 다른 관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오! 집정관 체제라? 그럼 그 당시에는 귀족들이 없었단 말인가요?”

 “그건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대를 이어 힘과 세력을 가진 존재란 늘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귀족이라 해도 시험을 통해 임용되며 제국에서 급여를 받는 관료가 아니면 별다른 힘을 가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룬이 들은 바로는 그랬다.

 “허어 참, 그런 정치체제라니. 어쩌면 실효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황자의 권위는 당연히 없었겠지?”

 “네. 황제의 자리는 던전을 끝까지 통과한 자가 등극했으니까요. 세습은 없었답니다.”

 그 말에 두 황녀의 얼굴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이내 관심을 버렸다. 하늘이 내린 자신들의 피를 중요시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들로서는 신경 쓸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던전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을 터인데 당시의 입장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도 들었는가?”

 “네. 당시 던전에 입장할 수 있었던 자는 각 종족의 집정관들이 추천한 자들과 제국의 상층부 그리고 던전을 지키는 엘프들의 인정을 받은 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을 테고, 실패한 자들은 다시 들어가고자 했을 텐데.”

 “다시 도전하는 것은 가능했답니다. 엘프들의 인정을 받으면 몇 번이라도 도전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다만 강제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황제의 계단을 수호하는 엘프들의 능력이 제국의 그 어느 무력 집단보다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황제의 계단 자체를 폭파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엘프들은 무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도록 말이지요.”

 “대단하군!”

 “그러게요.”

 두 황위 계승권자들은 하룬의 말에 연방 감탄했다. 이제 던전에 대한 궁금증은 거의 풀렸지만 새로운 문제가 있었다. 던전에서 무엇을 시험할지, 어떤 방식으로 시험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나 그 수행원들은 생각이 많은 듯 침묵이 오래 지속되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이 일에 대해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한참 후에야 1황자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제 의견 말입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엘프들에게 던전에 입장할 스무 개 팀을 선정하는 막대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니 자네 의견이 중요하지 않겠나?”

 뜬금없이 의견을 물어 오는 1황자의 말에 하룬은 잠시 당황했다.

 애초에는 엘프들과의 협상을 통해 막대한 재화를 얻을 생각이었지만 막상 던전의 비밀을 알게 되자 마음이 바뀌었다. 일반인들이 들어갈 그런 던전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스무 개 팀을 선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정한 하룬은 황자들이 이 문제를 주재해서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면에 나서는 것은 성격상 사양이다. 유명해지는 것도 싫지만 무엇보다 귀찮은 것이 싫었다.

 두 사람은 눈을 빛내며 하룬을 주시했다. 아마 이번처럼 일개 용병의 위상이 커진 것은 제국사에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주시하는 하룬은 정말 풍운의 핵심이나 다름없었다.

 껄끄러운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하룬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의견을 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세력의 대표자들을 망라하는 대회의를 개최하여 이 일을 알리고, 엘프들이 내건 조건에 대한 설명과 함께 던전에 입장할 세력을 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너도 나도 던전에 들어가려 할 텐데 자격 선정은 어찌하고 그 순서는 어찌할 텐가?”

 하룬은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비록 엘프들과 협상을 한 것은 돌풍 용병대지만 그 책임까지 맡을 수는 없었다.

 던전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안다면 골든 배틀을 치르는 황자들만이 그 자격이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무력 단체들이 집결한 상태였다.

 설사 엘프들에게 들은 그대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이 순순히 던전을 포기할 리가 없다.

 “돌풍 용병대는 엘프들과의 협상에 대해 적당한 보상을 받고 이쯤에서 빠질까 합니다. 대신 전하들께서 그 역할을 맡아 주십시오. 이제 두 분이 던전에 관한 사항을 주재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하룬의 제안에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서는 바라던 바이다. 정국을 주재할 수 있는 자리를 스스로 내놓은 하룬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좋네!”

 “나도 받아들이지요.”

 1황자와 1황녀는 하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으로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제의를 거절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는 진한 신뢰와 감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 제국 정보 길드가 하룬의 입장이었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 엄청난 돈과 이권을 챙겼으리라.

 ‘이 친구가 엘프들과 협상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야.’

 ‘용병 같지가 않아. 욕심도 별로 없고. 믿을 만한 사람이네.’

 두 사람은 자꾸 하룬이 욕심났다. 하룬과 같은 능력자가 곁에 있다면 골든 배틀에서 승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이런 대사를 아무리 능력 있고 유명한 용병대라고 해도 용병이 나서 도맡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아마 엄청난 혼란이 일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은 막대한 이권이 걸린 일이다. 일단 던전 입장이 가능한 세력들은 동행을 조건으로 막대한 자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제국 정보 길드였다면 이 기회에 제국을 통째로 살 수 있는 엄청난 조건을 붙여 입장 권한을 팔았을 것이 분명했다.

 “다만 직접 협상을 한 당사자이며 용병으로서 부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뭔가?”

 “말을 해 보세요.”

 두 사람은 이제 하룬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태세로 그를 응시했다.

 “먼저 제게 협상을 의뢰한 총 여덟 곳은 우선권을 주어야 합니다. 비록 의뢰금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의뢰는 분명하니까요.”

 두 사람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으로서는 다른 세력들보다 자신들에게 많은 권한을 양보한 돌풍 용병대의 체면을 보아줄 의무가 있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비록 일개 용병에 불과한 평민이지만 그동안 골든 배틀로 인해 제국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골든 배틀을 이 던전에서 결정했으면 합니다.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그 능력을 제대로 검증받을 수 있으니 협의만 잘된다면 이번 참에 골든 배틀을 끝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룬의 이야기에는 진정이 가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황자들 역시 형제간에 매번 피를 흘리는 골든 배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다.

 “난 찬성이다. 더 이상 이따위 짓으로 황실과 외척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이름에 불과한 황제의 자리에 앉고 싶지는 않으니까.”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상처투성이로 황제 위에 앉는다고 해도 원로원과 최고 귀족 회의와 권력을 나누고 싶진 않아요.”

 다행이다. 두 사람은 선선히 하룬의 말을 받아들였고, 막사 안에 있는 최측근들 역시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은혜를 입은 데브론의 부탁을 100% 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곳 던전에서 골든 배틀을 치르면 세력이 달리는 그들에게는 불리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럼 하룬 대장의 말대로 황자들 간에 협의를 해야겠다. 그 결과를 제국민들에게 발표해서 못을 박으면 되겠군. 아마 거부할 녀석들은 없을 것이다.”

 동일한 조건으로 경쟁을 하느니만큼 거부할 황자들은 없을 것이다. 물론 다른 생각을 하는 황자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나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조건이 아닌가.

 “하지만 먼저 엘프들이 내건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메스 기사단의 처리는 대회의에서 원로원에게 압박을 가하면 어렵지 않을 테지만 볼카웜이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는구나.”

 “맞아요. 분명 쉬운 상대는 아닐 테니까요. 다들 최고의 실력자들을 내놓아야 할 거예요.”

 두 사람은 양측의 군사에 해당하는 황사 란트렐과 메롤라스 백작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하룬과 함께 엘프들의 조건을 성사시킬 방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우리 대장, 엄청난 사람이야.’

 슬며시 막사를 빠져나가던 헤니는 하룬에게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테론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을 가진 두 사람과 의견을 나누는 하룬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도 자신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위세를 가진 황자와 황녀에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의 압박을 느꼈지만 하룬의 태도는 별반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풍운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돌풍 용병대의 박사의 불은 밤이 이슥해지도록 꺼지지 않았다.

 존귀한 두 사람이 수행원들과 함께 돌아가자 같이 밤을 새운 대원들이 모여들었다. 어느덧 미명이 스며드는 시간이지만 대원들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대장, 어떻게 됐습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것은 티노뿐이 아니었다. 모두 하룬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일단 이곳에 온 각 세력들을 망라한 대규모 회의가 1황자의 제안으로 개최될 겁니다. 적어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세력들이 초대되겠지요. 그곳에서 메스 기사단의 처리나 던전에 입장할 자격이나 순서 등이 논의될 거고요.”

 “우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린 회의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네? 왜요?”

 다른 대원들이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용병대의 위상을 한껏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어차피 엘프들과의 협상을 주재한 것은 하룬이 아닌가? 하지만 하룬은 생각이 달랐다.

 “우린 이제 전면에서 빠지려고 합니다. 우리 인원으로 이곳에 모인 인간들을 제대로 상대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이 우리 같은 용병에게 휘둘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고귀한 자들이기에 나서는 것은 더욱 피해야 하고요.”

 “그건 그렇죠. 안 그래도 우리 용병대를 시기하는 자들이 많은데.”

 대원들은 하룬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너무 과도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을 그들도 아는 것이다. 그런 관심은 좋은 경우도 있지만 그들의 신분이나 세력으로 보아 불편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우리가 나선다 해도 황실이나 제국의 실세들이 가만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하룬의 말을 들은 대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동의했다. 권력자들의 생리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용병들이 황실이나 제국의 실세들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굳이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골든 배틀을 치르는 황자들보다 더 관심을 끌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우리에게 몇 번이나 당해 앙심을 품고 있을 제국 정보 길드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나면 볼카웜을 잡으러 가야겠지요.”

 대원들은 말없이 하룬의 말을 들었다. 이제 그의 결정을 수긍한 것이다.

 “대신 우리는 던전에 입장할 자격을 가지는 세력들로부터 팀당 5만 골드를 보상으로 받기로 했습니다. 던전에 들어갈 한 팀을 꾸릴 수 있는 권한과 함께 말이지요. 이런 권리는 엘프들과의 협상에 대한 보상이며 던전에 대한 주재 권한을 1황자와 1황녀에게 넘긴 보상이기도 합니다.”

 “우와!”

 “5만 골드요?”

 대원들의 눈이 한순간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열아홉 개 팀에서 그 돈들을 받는다면 무려 95만 골드가 되는 것이다. 하룬이 이루어 낸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대원들이 새삼 느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일단 반은 먼저 받게 될 겁니다. 볼카웜이란 몬스터를 해치우고 던전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면 그 팀들로부터 나머지를 받기로 했습니다.”

 “호호. 이 일을 알면 제국 정보 길드 놈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겠군요.”

 “그렇겠지. 그놈들이라면 협상 결과만 가지고 일부 세력들을 대상으로 엄청난 돈을 받았을 테니까. 하하핫! 놈들은 아마 이를 갈게 될 거야.”

 대원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은 물론 자신들을 적대하는 제국 정보 길드의 반응이 눈에 선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룬은 그런 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그동안 우린 귀찮음을 피해 종적을 감추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다들 이해하고 있었다.

 “티노는 도네이스와 함께 다카린 용병단의 심처에서 지내세요. 이제 살림 준비도 하고 장인에게 제대로 대우도 받고 말입니다.”

 “대장님! 어찌 그런…….”

 얼굴이 벌겋게 변한 티노가 뭐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옆에 앉은 도네이스가 환한 얼굴로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티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오만상을 쓰고만 있었다. 하지만 찡그린 얼굴과 함께 비친 눈빛은 기쁨으로 일렁였다.

 두 사람은 이제 대원들은 물론 아레스와 같은 지인들에게도 커플로 인정받고 있었다.

 “알았어요, 대장. 그렇게 할게요.”

 도네이스의 태도를 보니 이번 드워프 마을에서 제대로 인연을 맺긴 한 것 같다. 외견상으로 보면 도네이스가 티노를 휘어잡은 것 같지만 티노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니 잘 살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대장. 이곳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 돌풍을 건드릴 수 있는 용병은 없습니다. 수련에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겨우 고개를 든 티노의 붉은 얼굴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행복감이 감돌고 있었다.

 ‘늦게 찾은 행복 잘 지키세요.’

 하룬은 아직 사랑이 뭐지 잘 모르지만 힘겨운 삶을 살아왔던 티노가 저렇게 밝은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사랑이란 주변 사람들까지 따듯하게 해 주는 강렬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하룬의 눈길이 딜런에게 향했다.

 “난 은밀한 곳에서 수련을 할 생각이오, 대장.”

 “그러시겠습니까?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딜런도 하룬처럼 지난번 제라츠 용병단과 상대하면서 얻은 것을 확실하게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전 현실, 아니 우리 세계엘 좀 다녀올게요.”

 친구들에게 맡겨 둔 백사회 활동이 많이 궁금한 헤니였다.

 “그래. 그럼 모든 것이 정해지려면 보름 정도는 지나야 하니 이 주일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짧은 회의를 마친 하룬은 근처에 자리를 잡은 아레스와 매그럼 일행을 불러들였따.

 “엘프들을 만나고 왔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아레스는 그동안 각 황자 진영을 비롯해 이곳에 결집한 세력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기사를 쓰느라 바빴다고 했다. 호울 방송사의 다른 기자들과 함께 이 일을 겨우 끝낸 아레스는 밤새 잠도 못 자고 하룬이 불러 주기만 기다렸다. 사정은 매그럼과 초른도 마찬가지였다.

 하룬은 그들에게 엘프들과의 협상 과정과 던전에 대해 가공한 정보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을 두고 황자들과 의논한 일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하하. 대장이 한 건 제대로 할 줄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대장. 위에서 무척 좋아할 겁니다.”

 세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원고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로그아웃을 했다. 곧 알려질 사실이지만 그래도 몇 시간이라도 먼저 정보를 따내는 것은 기자들이나 정보를 다루는 자들의 능력이다.

 비록 황자들이 대회의를 개최한다고 해도 이곳 트레저 분지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참석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많은 유저들은 방송을 통해 정보를 듣고 보기를 원할 것이다. 어느 방송사든 이 정보를 방송한다면 대박은 몰라도 중박은 터트릴 것이다. 이 정보는 그들이 힘겹게 잡은 위치를 공고하게 해주는 보험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하룬은 내친김에 헤니와 뫼비우스에게도 같은 정보를 넘겼다. 요령껏 이용하라는 말과 함께. 이 정보에 대한 보상은 예전과 마찬가지 조건이었다.

 두 사람은 아레스와 매그럼 일행이 그랬듯 펄쩍 뛰고 좋아하며 로그아웃을 서둘렀따.

 하룬은 티노에게 자신을 보고 모인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했다. 다들 하룬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부르기도 전에 근처에 모여 있었다.

 그가 찾는다는 소리에 반색하며 막사로 들어온 사람들은 꽤 많았다. 아레스처럼 그와 오래 동행했던 이들은 물론 세류를 비롯해 아반 부녀와 발트랑 일행 그리고 어비스 용병단과 다카린 용병단의 수뇌부들이 모였다.

 하룬은 이미 논의한 대로 황제의 계단을 시험의 장소로 바꾸어 설명하고는 협상의 결과를 전했다.

 “그럼 돌풍은 어떻게 할 셈이요?”

 다카린 용병단의 단장이자 도네이스의 부친인 프레스가 물었다. 피엘과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고, 도네이스와 티노가 맺어지는 바람에 이제 한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라 하룬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척 부드러웠다.

 “당연히 던전에 들어가야죠. 협상한 대가로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엘프들이 한 팀에 삼백 명으로 입장 인원을 정했으니 여기 모인 분들과 같이 갈 생각입니다.”

 하룬의 말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돌풍과 친하다는 이유로 던전에 들어갈 기회를 잡았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아마 이곳에 모인 무리 중 자신들만큼 쉽게 기회를 잡은 이들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맙소, 하룬 대장.”

 “저희도 고마워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별다른 조건 없이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는 것이다.

 “흐흠. 들어 보니 볼카웜이란 몬스터가 예사로운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소?”

 아무래도 엘프들이 조건으로 내건 볼카웜이란 괴물이 마음에 걸렸다.

 “일단 부딪쳐 봐야죠.”

 의뭉스럽게 대답한 하룬을 보는 프레스의 얼굴이 심각하다. 이제까지 별말 없던 피엘 역시 심각한 얼굴이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기사들보다는 용병인 자신들이 더 낫다고 자부하는 그들이지만 설명처럼 마나가 깃든 검을 막아 내는 이빨을 가진 놈이라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프레스는 마음을 정했는지 눈을 빛내며 하룬에게 제안했다.

 “이제는 남도 아닌데 우리 이번 기회에 아예 연합합시다.”

 이번 던전 건에 한하는 단순한 연수가 아니라 이후로도 쭉 이어지는 동맹 관계를 맺자는 말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카린은 용병 수만도 무려 오천이 넘는 제국 10대 용병단 중 하나가 아닌가.

 “하하! 그렇군요. 우리 부대장이 다카린 용병단주의 사위이니 이젠 남이 아니군요. 좋습니다.”

 “돌풍 용병대가 가세한다면 우리도 기사단에 밀리지 않을 거요. 용병이라고 깔보는 놈들에게 용병들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보여 줍시다.”

 “우리도 같이합시다.”

 프레스의 말에 피엘 역시 연수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이제 시작이라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자신이 용병 생활을 하며 인연을 맺었던 최고의 용병들로 구성된 어비스의 힘이라면 동맹 관계를 맺더라도 꿀릴 것이 없었다.

 “어차피 아버님은 저와 같이 움직일 거 아니었습니까?”

 하룬의 말에 피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버님이란 말이 묘하게 가슴을 움직인 것이다.

 “하하하, 그럴 생각이었지. 자네와 엘저가 둘도 없는 친구이니 돌풍과 어비스는 이미 한 몸이나 마찬가지지.”

 피엘은 간밤에 엘저로부터 티노가 도네이스와 맺어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안 그래도 제국 10대 용병단으로 자리매김하는 다카린 용병단이 돌풍이라는 또 다른 날개를 단 것 같아 내심 배가 아팠던 그는 하룬의 아버님 소리에 더없이 기뻤다.

 ‘허허! 우리 엘저가 사내를 보는 눈은 정말 확실하다니까. 이제 제대로 작업만 하면 우리 어비스가 제국 제일의 용병단이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니지. 도네이스가 돌풍 부대장에게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덮친 기회를 만들어 줘야겠군.’

 하룬을 보는 그의 눈매가 요상하게 변했지만 정작 하룬은 그런 음흉한 시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저희 코엠 길드도 연합에 끼고 싶습니다.”

 “부활이 가능한 이방인들이라면 할 일이 많을 것이오.”

 세류 일행이 하룬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흔쾌하게 합류를 받아들였다.

 “저희 아반가르드 길드 역시 연합에 가입하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낄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아반 역시 세류의 뒤를 따랐다. 아직도 명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그가 거느린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묘와 같은 실력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 온 숫자만도 오백 명이 넘어간다.

 “저희 아리수 길드도 거기에 끼면 안 될까요?”

 발트랑까지 끼어들었다. 어차피 던전에 같이 들어갈 동료들이고 나름 이곳 비욘드의 형세를 파악한 그는 돌풍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런 참에 이런 기회가 주어지니 놓칠 수 없었다.

 “좋습니다. 강력한 세 용병단과 세 이방인 길드의 연합은 좋은 관계는 물론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하룬은 굳이 반대할 의사가 엿보이지 않는 프레스와 피엘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합류를 받아들였다.

 “그럼 우리 세 용병단과 세 이방인 길드가 주축이 되어 시험의 장소인지 던전인지 하는 곳을 제대로 깨 봅시다. 정예들을 추린다면 우리 전력도 기사단 정도는 우습게 상대할 수 있으니 말이오.”

 “내 생각도 그렇소, 프레스 단장. 한번 신화를 만들어 봅시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우리 용병들과 이방인의 결합 세력이 클리어한다면 제국은 뒤집어지겠지. 실패한다고 해도 마법서만 얻을 수 있다면 우리야 밑질 것이 없지요.”

 이제 한 세력이 된 사람들은 술 대신 차를 마시며 구체적인 연합 방식과 내용을 의논하면서 던전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데브론과 브리엘라 황녀에게도 사정을 알려야 했다. 두 사람은 내심 마음을 졸인 듯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룬의 설명을 들은 데브론과 브리엘라 황녀의 얼굴이 비로소 활짝 펴졌다.

 세력이 너무 약해 자칫 던전을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너무나 다행이었다. 거기에 더해 동일한 조건으로 경쟁을 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감격한 브리엘라의 말에 하룬은 그저 웃었다. 하지만 내심 딴생각을 했다.

 ‘행여 다음에도 내 사람을 빼 가는 일이 생긴다면 황녀고 뭐고 다 아작을 내고 말 거요.’

 생각보다 재수 4인방의 배신이 마음에 새긴 상처는 큰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믿었던 홀의 배신이 더 마음 아팠는지 모른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어쩔 뻔했는지 모르겠네.”

 데브론은 하룬의 손을 붙잡고 몇 번이나 그 소리를 했다. 황녀와 함께 세력을 일으키기 위해 무진 고생을 자초했던 그로서는 그 모든 노력의 성과보다 우연히 인연을 맺은 하룬이 해준 일이 더 컸으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시간 좀 내게.”

 영문을 모르는 하룬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하룬을 억지로 잡아끌고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둘 다 경지에 이른 메신저 스킬을 펼치고 한참을 달린 후에야 데브론의 발이 멈추었다.

 평평하지만 바위와 나무들로 인해 어느 곳에서도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 은밀한 곳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 일전에 자네에게 메신저 검술을 보여 준 적이 있었지?”

 “네.”

 “아마 제대로 수련을 할 수 없었을 거야. 맞나?”

 “네. 형과 식은 그런대로 하겠는데 상리에 맞지 않는 동작들이 연결되는 것도 그렇고…….”

 사실 몇 번이나 시도했었다. 하지만 처음 전수받았을 때는 혼자서도 충분히 수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막상 해보니 동작은 이어지지 않고, 호흡도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었다.

 “메신저 검술은 메신저 워킹이 3단계에 이르는 것은 물론 마나를 느끼고 사용할 수 있는 자만이 입문할 수 있는 고급 검술이라네. 죽을 것을 각오했기에 전하긴 했지만 시간저긴 여유도 없었기에 당시에는 완벽한 검술을 전수할 수 없었어. 그때 자네의 실력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내 생각으론 몇 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메신저 소드를 수련할 자격이 생길 거라고 여겼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못 본 사이 자네는 벌써 입문할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네.”

 ‘그랬었구나!’

 데브론의 설명을 듣자 비로소 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데브론이 알맹이가 빠진 검술을 전수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모든 것을 전수하려고 하네. 다만 이 메신저 검술을 자네에게 전하는 것은 이번 던전 때문이 아니란 것만 알아두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따. 데브론은 하룬에게 메신저 워킹 스킬을 전수한 이래 그를 제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두고 그에게 차근차근 자신이 익힌 비기를 전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데브론의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바람에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물기를 머금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내가 더 감사하지. 메신저 기사단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지워진 지금의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인을 만나는 것은 하늘이 내린 인연이 아니면 안 되는 걸세. 몇 명에게 이걸 전수하려고 했다가 모두 실패하고 말았네. 강한 의지와 인내심이 없으면 이 검술은 절대로 익힐 수 없더군.”

 체계적으로 기초를 잡아주고 지도해 줄 시간이나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시연해주고 설명해주는 것만으로 무려 천 년이 넘는 유구한 세월을 통해 완성된 이 검술을 익히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하룬은 특출 난 존재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확인한 하룬의 메신저 워킹 스킬만 보아도 자신이 30년을 고련한 결과에 버금갔다. 하룬을 바라보는 데브론의 눈길에 따스함이 실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먼저 설명부터 하지. 원래 메신저 검술의 요체는 호흡으로 받아들인 자연의 마나를 인위적으로 쌓으려 하는 대신에 근육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검을 통해 외계로 내보내는 것이네. 그 과정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마나는 자연스럽게 특별한 마나 플로를 통해 마나 오션에 축적되는 거지. 그래서 호흡의 길이와 근육의 움직임과 진로를 정확하게 일치시켜야 하네. 더구나 그 과정에는 메신저 워킹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상대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신묘한 움직임이 가능해지는 거지.”

 하룬은 그제야 자신이 그동안 몇 번을 시도했어도 메신저 검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멍청한 자신이 정말 한심했다. 아무리 해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던 동작들은 메신저 워킹 스킬과 함께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것만 알았더라도 이 검술을 어느 정도는 익혔을 것이다.

 하룬은 데브론의 상세한 설명과 시연 그리고 지도를 받아 메신저 검술을 익혔다. 기억하기에도 바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항상 아쉬워했던 검술이기에 메신저 검술을 익히는 하룬의 눈은 그 빛이 더해갔다. 그 깊이를 알면 알수록 더욱 신이 났던 것이다.

 데브론은 검술을 익히며 맞닥뜨릴 여러 가지 의문점이나 벽은 물론 그 해결 방안까지 전수해 주었다. 하룬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의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겼고, 데브론 역시 흥이 난 듯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기억을 짜냈다.

 그렇게 두 노소는 두 달이 떠오른 밤이 지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무렵까지 사이좋게 검술을 전수하고 익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