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드워프 마을 (93/278)

《드워프 마을》

 결국 출발했을 때는 스무 명도 넘는 대인원이 되고 말았다. 여덟 팀이 두 명씩의 동행을 보낸 것이다. 원로원과 최고 귀족 회의는 물론이고 골든 배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세력들은 모두 참여한 것이다.

 그중에는 자신은 꼭 따라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엘저도 끼어 있었다. 그녀야 남이 아니니 동행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출발하기 전 동행한 사람들은 마나의 맹세를 해야만 했다. 약속을 어기는 순간 마나가 역류해 삽시간에 온몸이 터져 버리는 죽음의 맹서였다.

 “드워프들은 인간들에게 거주지를 알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인간과 지속적인 거래는 원하지만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것이지요. 왜 그런지는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때문에 드워프들의 거주지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하룬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 그게 조건이기도 했지만 그의 말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순순히 란트렐이 집전한 마나의 맹세 의식을 받아들였다.

 엘저는 며칠 동안 돌풍 용병대와 함께하는 사이 헤니와 꽤 많이 친해졌다. 두 사람이 친해진 데는 같은 또래인지라 통하는 것이 있는 데다 헤니가 엘저의 흉측한 흉터에 거의 위협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원인도 컸다.

 “캬하하하! 말이 되니? 저 녀석이 그렇게 골골했다는 것이 말이야.”

 엘저는 헤니에게 처음 만났을 때의 하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러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데.”

 헤니는 하룬이 불과 얼마 전까지 허약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지내본 결과 엘저는 호탕하고 솔직한 성품이라 거짓말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믿기질 않아.’

 일행을 끌고 선두에서 힘차게 걸어가는 하룬의 그 어디에도 엘저가 말한 첫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엘저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으니 정말 기이한 일이다.

 “거기다 용병 아카데미를 수료한 날은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거짓말까지 하더라니까.”

 “대장이 이방인이라고 했다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응. 아마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능력이 너무 많이 발휘된 것에 부담감을 느꼈나 봐. 이방인들은 처음 우리 세계에 오면 일정 기간 동안은 엄청난 속도로 능력이 올라가잖아. 아빠와 난 하룬이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말한 것을 그런 이유라고 추측했지. 말이 되니? 너와 같은 이방인들은 적어도 며칠에 한 번씩은 반드시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며?”

 “그, 그거야 그렇지.”

 엘저의 말이 맞다. 헤니 자신도 비욘드의 플레이에 전념하기 위해 최상급 캡슐로 바꾸었지만 그래도 게임 시간으로 엿새에 한 번은 굳은 몸을 풀어주기 위해 로그아웃해야만 한다. 그런 제약 때문에 이 고요의 땅으로 오는 여정 동안 유저들은 하룬의 배려를 받아 정기적으로 현실에 다녀오곤 했고, 그래서 이곳 주민들보다 훨씬 더 힘든 고행을 해야만 했다.

 헤니는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녀가 파악한 하룬 역시 거짓말을 거의 모르는 사내였던 것이다. 그런 말을 했다면 이유가 있었을 텐데 엘저의 말로는 해명이 되질 않았다.

 ‘대장이 유저? 아무리 봐도 유저는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닌데.’

 그간 동행하면서 그의 생활상을 잘 아는 헤니는 하룬이 자신과 같은 유저라는 사실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레스와 매그럼 일행을 통해 현실과 접촉하는 것도 그렇고, 유저들의 곤란한 점을 꿰뚫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그럼 다시 만났을 때 대장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물어봤어?”

 “아니. 그런 말을 뭐하러 물어보니. 우리 용병들의 불문율이 뭔지 알아?”

 “뭔데?”

 “조직과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당사자가 한 말을 존중해 주는 거야. 설령 그 말이 거짓말 같다고 해도 면전에서 파헤치는 일은 없지.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대로 그냥 대해 주면 되는 거지. 또한 그 비밀을 묻지 않는 것이 용병들의 불문율이야. 목숨을 내놓고 사는 사람들치고 사연이 없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말이야.”

 ‘정말 이상해!’

 엘저나 그녀의 아빠는 태생적으로 용병 기질이 뼛속 깇이 새겨져 그렇게 쉽게 이해하는지 몰라도 헤니는 그렇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인이랑 만났을 때?’

 분명히 대장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보인 반응은 단순히 게임에서 알았다는 것과는 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삐 나오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 이상했다.

 ‘나중에 시간 나면 그 대장간에 한번 들러야겠어.’

 헤니는 뭔지 모를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하룬 같은 사람이 금전 감각이 없어 일개 대원, 그것도 가입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에게 엄청난 거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도 선뜻 호의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였다.

 ‘분명히 대장에겐 뭔가 있어.’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비밀일 것이다.

 단지 산을 넘는 것에 불과했지만 마법사들도 끼어 있고, 자세한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빙빙 돈 탓에 오후 늦게야 도착한 드워프들의 임시 거주지를 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드워프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드워프들은 하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비록 안면이 없는 인간들도 끼어 있었지만 꺼리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돌풍 용병대를 단단히 믿고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이종족인 드워프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던 일행은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커다란 석실로 안내받은 후 부족장 타루가와 원로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하룬 일행이 선물로 가져온 식량들과 음식 재료 그리고 술을 보고 입이 귀까지 걸린 얼굴이었다.

 란트렐을 비롯해서 드워프 종족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그들을 주시했다.

 하룬은 타루가를 비롯한 드워프 원로들과 의례적인 덕담을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사실 제가 다른 인간들과 이곳에 방문한 것은 붉은 모루 부족의 정착 축제를 같이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만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다른 목적이라면?”

 “엘프들과 접촉을 하고 싶습니다.”

 “엘프족과 말인가?”

 “네.”

 하룬은 지금 트레저 분지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 붖고 역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들과 엘프들의 분쟁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평화적인 해결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프어를 아는 인간들이 거의 없어 우리 용병대가 나서게 되었죠.”

 “그렇군. 자네들 돌풍이 협상의 중개인으로 나선 것이군. 그래, 자네들이라면 그들과 의사소통이 될 수도 있겠지.”

 하룬이 어떻게 이종족의 언어를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용병이니 어쩌면 엘프들과도 의사소통이 될지도 모른다. 일개 용병으로는 과분한 능력을 가진 친구였다.

 “안 그래도 이제 막 우리 마을이 자리를 잡은 터라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네. 같이 가는 것으로 하지.”

 타루가는 원로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선선히 허락해 주었다.

 아직 몇 가지 불안 요소들이 산대해 있기는 하지만 엘프들과 하룬 일행 덕분에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인사를 겸해 선물을 좀 싸 가지고 엘프들을 방문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돌풍 용병대에 도움을 받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다른 인간들과 달리 자신들과도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통하는 하룬에게 그는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첫 단추부터 잘 채운 셈이라 마음이 놓였다. 타루가가 중개하지 않는다면 엘프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때를 잘 맞추었다.

 상황이 이래서 타루가의 붉은 모루 부족이 엘프들에게 굽히고 들어갔지만 평소 드워프들과 엘프들은 왕래가 잦거나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 고요의 땅에 거주하는 엘프들은 다크 엘프로 알려진 호전적이고 배타적인 종족이다.

 “그럼 동행했던 인간들도 같이 가겠네?”

 “네. 이들이 트레저 분지에 모인 인간들의 대표입니다.”

 “그렇군. 내일 출발할 테니 오늘은 일단 즐기게나. 아직 미흡한 것이 많아 정식으로 격식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축제인 만큼 즐겁게 보내자고. 핀, 자네가 쉴 곳을 안내해주게.”

 “네. 날 따라오게.”

 전대 전사장이었던 원로 핀의 안내를 받아 동굴의 입구 쪽에 만들어진 광장으로 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굉장해서 벌써 동굴 곳곳에 이와 같은 생활공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장,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대충 듣기는 했지만 반밖에 알아듣질 못해서 자세하게는 모르겠네요. 부족장의 얼굴을 보아서는 일이 잘된 것 같은데.”

 비록 타루가의 드워프어는 몰라도 하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터라 대충은 짐작했지만, 그래도 반쪽에 불과한 터라 상세한 대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궁금한 얼굴로 하룬을 주시했다.

 “오늘 저녁은 축제를 즐기고 내일 엘프들을 방문하기로 했어. 준비가 되는 대로 부를 테니 그때까지는 편하게 쉬면 돼.”

 “휴우, 다행이네요.”

 사실 헤니는 조금 걱정을 했었다. 이종족들의 배타성은 전설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 배타성은 인간들 때문에 생겼다.

 “별다른 위험은 없을까요?”

 란트렐은 엘프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메롤라스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드워프들의 보증도 있고, 이번 협상 건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절이나 마찬가지이니 특별히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조심할 것은 여러분이 트레저 분지에서 그들과 대립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돌풍 용병대원의 자격으로 동행하는 것이란 점입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하룬의 경고를 그들은 잘 알아들었다. 사실 개별 행동을 하려고 해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문젯거리는 만들지 말아야 했다.

 헤니는 자신의 지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 중 일부와 이종족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시도했고, 그들은 이종족 마을에 와서 돌아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라 심심했던 탓에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나름 이 세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헤니인 만큼 금방 대화의 수준이 높아졌고,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어 별생각없이 그녀의 물음에 답하던 사람들도 대화에 빠져들었다.

 헤니의 사고방식은 이곳 테론 제국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신선한 면이 많아 대화의 열기는 점차 더 많은 참가자를 불렀고, 대화의 질은 높아졌다.

 란트렐, 메롤라스, 셀렌과 같은 마법사들은 모두 각 세력에서 참모의 역할을 하는 고위 마법사이자 현자들이었으니 죽이 잘 맞았다.

 한참 토론을 한 사람들은 이번 참에 이종족에 대한 상식을 높이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하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돌풍 용병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드워프를 보거나 만난 적이 없던 터라 드워프들의 생활상이나 작업에 굉장한 호기심을 보였던 것이다.

 전사들 중 한 명을 통해 부족장 타루가의 허락을 받은 하룬은 헤니와 도네이스에게 그들의 안내를 맡겼다. 기사들은 그래도 덜했지만 마법사들은 타고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두 사람과 대륙 공용어를 아는 드워프의 안내를 받아 드워프들의 거주지나 공방, 대장간 같은 시설들을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룬은 그런 사람들을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트레저 분지에 모인 인간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이 동굴 안에서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된 드워프들이지만 새로 거주지를 마련하고 채취할 광맥을 확보한 때문인지 지나는 드워프들의 얼굴은 활기에 차 있었다.

 하룬 일행에게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받았고, 그들 때문에 욕심 많은 인간들의 관심에서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드워프들은 지나칠 때 알은체를 하거나 눈짓으로 인사하며 호감을 드러냈다.

 하룬은 모처럼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드워프의 임시 거처를 구경하고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돌풍 놈들을 제거해야겠습니다.”

 포의 말에 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미 그런 생각을 굳혔던 것이다.

 “짧은 시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가 너무 높이 부상했습니다. 더구나 이번 엘프들과의 협상 건도 그렇고 우리가 맡아야 할 것을 그들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포가 과도하게 돌풍을 의식하는 것은 이해가 갔다. 자신만 해도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니 말이다.

 “엘프어를 아는 자는 아직 구하지 못했느냐?”

 “찾았습니다. 브로스 마탑의 전대 마탑주가 엘프어를 안다더군요. 지금 비밀리에 이곳으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의중은?”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브로스 마탑의 10년 예산을 제공해주기로 했습니다.”

 대답하는 포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지는 것을 보니 협상 과정에서 꽤 골치를 썩은 것 같다.

 “잘했다. 한번 위치를 놓치면 다음에도 놓치는 것이 바로 우리 정보를 다루는 자들의 운명이다. 지금 상황에서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돌풍 때문에 황자들은 물론이고 최고 귀족 회의까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원로원도 흔들리는 눈치입니다.”

 포의 말에 텐의 눈에서 강한 살기가 번뜩였지만 이내 사라졌다.

 “세상 이치가 그런 법이지. 아직 돌풍 용병대에 대한 정보를 다 알아낸 상황이 아니라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번에 그 대장이라는 놈과 트레저 분지에 온 놈들만은 없애야 한다.”

 “준비하겠습니다.”

 언제나 차가웠던 포의 목소리에서 묘한 흔들림을 느낀 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긴 경쟁심을 느낄 만도 하지.’

 존재를 드러낸 지 채 1년도 안 되었는데 벌써 제국 핵심 인사들의 관심은 물론 연수까지 이루어 낸 돌풍 용병대의 등장은 제국 정보 길드에는 막강한 위협이었다.

 “어쌔신은 안 된다.”

 “네?”

 내심 길드의 최후 전력 중 하나인 다크블랙을 동원할 생각을 하던 포가 놀라 텐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쌔신을 동원했다가는 우리 짓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 된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위상이 너무 커졌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제국의 모든 이권에 관여하는 그들이지만 그 기반은 제국의 귀족들과 평민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암습이나 하는 무리로 간주된다면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처리를 해야 해. 그런 기회가 날 것이다. 일이 여의치 않으면 던전에서 처리할 생각까지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느 세력을 준비시킬까요?”

 “최소한 소드 마스터는 준비해라.”

 “그, 그건…….”

 포의 눈이 다시 또 커졌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녀의 의중에 있는 전력으로도 충분하지 싶었기에 텐의 말은 의외였다.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하물며 단 네 놈이 사백을 죽였다. 제라츠의 정예들이 빠진 예비 전력이라고는 하나 그놈들이 그 당시 최선을 다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타혼마저도 그 대장 놈과는 자신이 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양부의 말이 맞을지도.’

 자신도 직접 보았지만 그들의 무력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젊은 대장의 정령 마법은 두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놈은 그 먼 거리에서도 자신들의 기척을 읽었다. 지금도 식은땀이 날 정도로 살벌했던 그 살기와 투기를 생각하면 텐의 말이 맞았다.

 “알겠습니다. 다만 알랭 후작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아까워서 망설였을 뿐입니다.

 “나도 그 점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확실하게 놈들을 없애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이 건으로 인해 우리의 비밀 무력인 마스론 후작은 물론이고 알랭 후작의 정체까지 노출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와 7서클 마스터의 암격이라면 놈들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겠지.

 과하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그 둘이라도 돌풍 용병대가 한 것처럼 소드 유저 상급 이상의 실력자 사백을 그렇게 쉽게 도륙하지는 못한다. 다만 암격을 생각한다면 필승이겠지만.

 “만약 그 두 사람이 우리의 숨겨진 길드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우리 길드의 숨겨진 무력은 다 드러나는 셈이니 앞으로는 이전과는 달리 힘을 줄여야 할 것이다. 무기는 비밀이 드러났을 때는 그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법이니까.”

 “비밀 수련장을 개방하면 어떻겠습니까?”

 포의 제안에 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지. 다만 그들은 우리가 가진 최후의 힘이나 다름없으니 그 사용은 최대로 자제해야 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잠시 돌풍에 빼앗겼던 정국의 주재권을 우리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리 공작을 해두는 것을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은밀한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드워프들의 축제는 며칠 밤낮을 새워 가며 춤추고 노래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임시 주거지와 공방을 겨우 완성했고, 필요한 광맥을 찾은 것에 불과하니 그렇게까지 할 수 없어 맛있는 음식과 술로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을 축하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음식도 귀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하룬은 이번에 오면서 각 세력으로부터 돼지나 소와 같은 가축들과 술을 포함한 많은 음식 재료들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헤니가 말을 꺼낸 것이다.

 ‘헤니 말을 들은 게 정말 다행이네.’

 그의 눈에 보이는 음식들은 그들이 가져온 것들밖에 없었다. 통돼지 바비큐를 비롯한 음식들은 물론 술들도 모두. 아마 그들이 음식 재료를 넘칠 정도로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축제라는 이름이 무색한 자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드워프들의 성정은 장인들답게 고지식하고 고집이 강하지만 술이 들어가자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바뀌었다. 평소에는 말도 거의 없었던 그들이 일단 술이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스럽게 변했던 것이다.

 “캬아!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맥주냐?”

 “떠나기 전에 마셨으니 거의 두 달은 된 거 같네. 건배하세!”

 “건배!”

 “건배!”

 여기저기에서 술잔을 맞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때는 덜 자란 드워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해서 술을 즐기기 때문에 곧 넓은 동굴 안은 왁자지껄해졌다.

 이미 안면이 있는 딜런과 티노, 도네이스 그리고 헤니는 연방 드워프에게 둘러싸여 건배를 제의받았고, 원로들과 어울리는 란트렐을 비롯한 손님들에게도 잔을 권했다. 술을 즐기는 드워프들에게 권주를 사양하는 것은 크나큰 실례라는 것을 이미 타루가를 통해 알려졌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헤니의 경우는 일찌감치 상태 이상으로 경고음이 들렸지만 무시한 탓에 벌써 강제 로그아웃된 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티노와 도네이스는 한 무리의 젊은 드워프들과 함께 더 축제를 즐기겠다며 깊은 동굴 속으로 갔고, 딜런과 란트렐을 비롯한 동행인들은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자 각별한 맛과 향취를 지닌 맥주에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룬은 별로 취하지 않았다. 원래 술이 센 편은 아니다. 사실 방황했을 때 거리를 떠돌며 술을 마셔 본 적은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 싫어 술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즐거운 기분으로 마셔서 그런지 꽤 많이 마셨는데도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았다. 어쩌면 게임을 한 후 몸 상태가 급격하게 좋아진 것이 그 원인일 수도 있고, 기분이 좋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다 화장실을 몇 번 다녀오니 동굴 안의 광장에는 쓰러진 사람들과 드워프들이 가득했다. 드워프들 역시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고 거주지를 완성했다는 기쁨 때문에 긴장감이 풀어져서 그런지 더 쉽게 취한 듯했다.

 하지만 부족장인 타루가는 얼굴만 빨갛게 달아올랐을 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왔는가?”

 “네.”

 “자네도 꽤 술이 세군. 우리 일족이 만든 맥주는 도수가 높은 편인데.”

 “그런가요?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술이 취하질 않는군요.”

 “하하하! 맞아. 나도 그러네. 사실 이곳으로 이주를 결정하면서 왜 내가 이런 때에 부족장이 되었는지 스스로 원망도 많이 했다네. 우리는 변화를 싫어하는 천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든 자리를 잡으면 거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든. 그런 부족민들을 설득해서 먼 곳에 이주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는데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산 너머의 트레저 분지 때문에 위험한 상황까지 내몰리게 되어 얼마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웠는지 아는가?”

 자신도 대장이라는 직위에 있다 보니 그의 심정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하하! 그래서 자네와 돌풍 용병대에 더더욱 고마운 것일세.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당분간 버틸 식량은 물론이고 인간들에게 치여서 있는 물건들은 다 빼앗기고 일족이 전멸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타루가의 얼굴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이만저만한 은혜가 아닐세. 당분간 인간들 때문에 식량을 구입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인데 이번에 자네가 가져온 식량 때문에 올겨울까지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부족장인 나로서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네. 어제 식량을 받은 후 원로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흐뭇했다. 비록 같은 인간도 아니고 게임에 존재하는 인공지능체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생하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전해지니 애쓴 것에 보답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어제 원로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네. 자네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자고 말이야.”

 “아, 아닙니다. 엘프들과의 자리를 주선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돌풍 용병대와 대장에게 입은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어. 아무 말 하지 말고 날 따라오게.”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타루가는 짧은 팔다리를 크게 휘저어 가며 앞장섰다.

 하룬은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타루가의 뒤를 따랐다. 아직 술을 즐기던 몇 원로가 의미 있는 눈길로 타루가와 하룬을 흘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루가는 하룬을 끌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동행한 전사장 출신의 원로들이 아주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어딥니까?”

 “후훗. 임시로 마련한 우리 부족의 보물 창고라네. 선조님들이 만드신 명품들과 우리 세대가 만든 역작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지. 나중에 따로 은밀한 장소를 마련하고 엘프들의 도움을 받을 때까지는 보존 마법이나 청결 마법도 펼쳐지지 않은 이곳에 둘 수밖에 없다네.”

 보물 창고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실내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타루가의 말을 들어서인지 모두 심상치 않은 기품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여기는 왜?”

 하룬을 바라보는 타루가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자네들 덕분에 큰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네. 사실 몇 명은 자네가 말한 위협을 과소평가하기도 했는데 막상 최근까지 새로 낸 길을 지나가는 인간들의 숫자나 그 실력을 지켜보니 그들의 이목에 걸렸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두려울 정도였네. 때문에 원로회의에서 자네에게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이곳으로 안내한 걸세.”

 드워프들은 쉽사리 은혜를 잊는 인간들과는 달랐다. 비록 의뢰로 한 일이고 이미 대가도 치렀지만 돌풍 용병대가 한 일이 그 대가 이상의 일이라는 결론이 나자 추가적인 선물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 아닙니다. 대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굳이 준다는데 거부할 필요는 없었지만 새로이 부탁하는 입장이라 일단은 마다하는 하룬이었다. 한데 그 태도가 보기 좋았는지 타루가와 원로들은 더욱 만족스러운 얼굴로 변해갔다.

 “이곳에서 한 가지를 고르게. 내용이나 정보는 알려줄 수 없으니 자네 혼자 찾아야 하네. 시간은 이 향초가 다 탈 때까지 부지런히 골라보게. 이곳에 있는 어떤 물품도 자네가 사는 인간 세상에서는 극히 희귀한 명품일 테니 행운을 비네.”

 타루가와 원로들은 그 말을 끝으로 불이 켜진 향초와 하룬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허 참, 좋은 일이긴 한데 너무 뜬금없네. 뭐, 준다면 받아야지. 근데 나중에 따로 부탁을 하려면 다른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내심 그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번 기회에 하려고 했는데 일이 좀 우습게 되어 버렸다.

 ‘일단 어떤 것들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보물에 마음이 동한 하룬은 천천히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벽에 박혀 있는 희미한 발광석의 빛을 통해 드러난 물건들은 무기류와 공예품 그리고 각종 조상彫像과 생활 용품이었다. 그 재질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런 예술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눈이 없는 하룬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기품과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귀족들이 좋아하는 예술품을 골라야 했지만 하룬의 시선은 언제부터인가 무기류가 있는 곳에 쏠려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어구였다. 쇠나 강철로 주조한 사실로 만든 체인 메일, 비늘 메일 그리고 마법진을 새긴 플레이트 메일에 이르기까지 금속 재료의 방어구들과 각종 몬스터 가죽에 희귀한 마법 재료를 첨가해서 만든 다양한 하드 레더들이 있었다. 그 모두가 외관으로만 보아도 명품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기는 더했다. 순수한 쇠로 만들어진 무기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강철이나 합금을 재료로 한 도검류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재료를 첨가하고 마법까지 인챈트한 마법 검들은 하룬의 시선을 뜨겁게 자극했다.

 그가 현재 쓰는 무기는 본 소드로, 유니크에 근접하는 레어 아이템이다. 현실을 생각해서 한동안 검에 신경을 썼지만 현재는 그의 장기인 암기술과 정령술에 관심을 기울이는 터라 검이나 도는 별로 욕심이 나질 않았다.

 “호오, 여기 멋진 친구들이 있구나.”

 한쪽 구석에 각종 암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단검과 비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를 들어 손에 쥐고는 정보를 검색했다.

『세이런의 단검 세트

등급: 유니크

내구력: 500

붉은 모루 부족이 자랑하는 명장 세이런이 한 덩어리의 운석에 자신의 모든 기량을 쏟아 부어 완성한 단검 세트다. 원소석을 갈아 넣은 덕분에 힘을 주면 오러에 갈음하는 절삭력을 가진 것에 더해 빙계 마법이 추가되어 있어 상대의 피를 보지 않아도 된다.

옵션: 민첩 +5, 집중 +5, 목표물의 생명력을 초당 100씩 하락

제한: 붉은 모루 부족장의 인정을 받은 자』

 ‘훗, 대단하네. 이것들이 다 이 정도의 퀄리티를 가졌단 말이지.’

 다른 암기들을 몇 개 집어 정보를 검색해 보니 거의 다 유니크 등급의 명품들이었다.

 저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할 수만 있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암기들을 다 아공간에 쓸어 담고 싶을 정도였다.

 ‘아서라! 마나를 사용할 수 없을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굳이 이런 명품들이 아니라도 별 상관없지.’

 마나뿐 아니라 싸가지를 소환해서 암기들을 조종하거나 합체할 수 있는 마당에 굳이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요동치던 욕심이 사라졌다.

 능력이 일천할 때야 좋은 아이템이 필요했지만 능력이 올라가니 아이템보다는 능력의 상승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일정 경지가 넘어서면 굳이 무기의 질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보다.

 ‘엇, 이건 뭐지?’

 발광석의 흐릿한 빛이 무색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명품 무기들이 그득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비수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50센티 정도의 길이에 가운데는 기하학적 문양과 함께 혈조가 파여 있고, 검신과 일체형으로 이루어진 손잡이 부분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그림이 새겨진 단검이었다.

 녹이 슨 것은 아니지만 광택이나 빛이 나지 않는 다소 어두운 기운을 풍기는 단검은 한번 보기 시작하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왠지 친근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어둠이 가진 원초적인 힘과 공포의 기운이 은은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세상을 독보하는 고독함과 당당함을 가진 단검은 빛을 내며,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많은 다른 무기들의 기운을 단숨에 느끼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로 하자.’

 다른 것을 더 둘러볼 시간적인 여유는 있겠지만 한번 마음을 빼앗긴 이상 여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필이 꽂혔으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하룬은 그 비수를 집어 들고 정보를 확인했다.

『어둠의 학살자

등급: 미정

내용: 어둠의 힘을 봉인한 비수다.

옵션: 마나 사용자』

 ‘흠, 맘에 드는군.“

 마치 잃었던 친인을 찾은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마음에 쏙 드는 아이템이었다. 비도지존이 남긴 비수들처럼 등급이나 내용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점도 나름 마음에 들었따.

 ‘이 아이템도 일정 조건을 채우면 그 자세한 내용이 자동으로 밝혀지겠지? 더구나 암습용으로 알려진 비수임에도 그 주인이 마나를 쓸 수 있는 자로 한정된단 말이지. 뭔가 있어.’

 비수를 들고 밖으로 나오니 타루가와 원로들이 놀랐다.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성격 한번 화끈해서 좋군. 우리 드워프들도 그곳에 들어가면 치밀어 오르는 욕망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데. 자네는 역시 아주 특별한 인간이야. 그래, 뭘 가지고 나왔나?”

 “이겁니다.”

 하룬이 비수를 보여주자 그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왜 하필 이 물건인가?”

 타루가는 의혹 어린 눈길로 하룬과 비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냥 마음에 들더군요. 일단 손에 쥐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잘 고르긴 했는데…….”

 타루가는 말을 흐렸다.

 “왜요?”

 “이 아이템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네. 아니, 말을 정정하지. 기록에 있는 조상들이 만든 아이템은 아니네.”

 “그럼요?”

 “연대를 알 수 없는 물건으로, 아주 오랜 옛날 우리 조상이 만든 것으로 추정될 뿐 그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는 물건이라네.”

 부족장마저 그 내용과 유래를 알 수 없는 물건이라고 하니 더 마음에 들었다.

 “그건 천여 년 전 우리 부족에 구함 받은 한 인간이 은혜에 감사하다며 주고 간 것이네. 티넌 호숫가에서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발견된 그 인간은 1년 이상 우리의 보살핌을 받아 겨우 몸을 회복하고 떠났는데 그때 우리 선조에게 그것을 선물로 주고 갔네. 자신의 후인이 찾아와 반드시 은혜를 갚을 거라고 말했다는군.”

 ‘누굴까?’

 어둠의 힘이 봉인된 비수를 쓰는 자? 천여 년 전?

 하룬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한 인물이 떠올랐다. 비수로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고 인간들을 괴롭히는 괴수들을 처단하는 영웅의 고독하고 외로운 여정.

 “비도지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드워프들은 그 이름을 몰랐다. 그 이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보아선 그들은 비도지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겠지? 비도지존이 남긴 비수라면 신호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비도지존이 남긴 비수가 아니더라도 사정없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을 보면 보통 물건은 아니다.

 “아무튼 자네가 우리 일족의 명인들이 만든 명품을 고르길 희망했지만 그걸 골라 가지고 나왔으니 그것도 인연이라면 깊은 인연이겠지.”

 타루가가 안타까운 눈길을 주었지만 당사자인 하룬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세상에 다시없는 보물을 찾은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본 타루가는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룬은 일찍 눈을 떴다. 밖으로 나오니 미명이 어둠을 몰아내는 중이라 아직 어슴푸레했다. 미리 보아둔 곳으로 간 그는 맨손체조를 시작했다. 마나 플로를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드워프들이 저착한 이래 ‘바람산’이라고 부르는 이 산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하기는 하지만 근처 지하에 풍부한 각종 광물질 때문인지 마나가 무척 충만한 곳이었다.

 하룬은 밤새 굳은 몸을 맨손체조로 풀고 자리에 앉아 서서히 호흡을 조절했다. 먼저 내쉬는 것부터 천천히 정성을 기울여 탁기를 빼낸 다음 신선한 공기를 긴 시간 동안 가득 흡입했다. 인위적으로 코를 통해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뱃가죽을 움직여 하는 깊은 호흡이었다.

 호흡이 일정 길이와 패턴으로 안정되자 이번에는 의식을 몸 내부로 돌렸다.

 의식을 마나 오션에 집중하고 단단하게 뭉친 마나를 자극하자 서서히 마나가 기체처럼 풀어져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두 개의 큰 마나 로드를 순행하는 ‘스몰 서클 마나 플로’를 돌렸다. 그렇게 서너 번 돌리자 뭉쳐 있던 마나들이 강한 활력과 힘으로 만나 마나 로드를 빠른 속도로 순행했다.

 이번에는 두 개의 큰 마나 로드와 열두 개의 작은 마나 로드를 모두 아우르는 마나 플로, 즉 스스로 ‘빅 서클 마나 플로’라고 이름 붙인 마나 로드를 돌렸다. 메신저 워킹으로 이미 넓게 뚫린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열 개의 마나 로드들은 길이 좁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모든 마나 로드를 다 돌고 마나 오션에 돌아온 마나의 성질은 좀 더 순수하고 유순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다음은 좁은 마나 로드를 인위적으로 뚫을 차례였다. 그동안 몇 번의 시도로 어깨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마나 로드의 마나 포인트들은 다 뚫린 상태였지만 손바닥까지는 아직도 좁기만 했다.

 팍! 팍!

 마치 석수가 돌을 깨듯 막힌 벽에 쉴 새 없이 마나를 충돌시키는 과정은 강한 인내심이 없으면 자칫 그 고통에 입을 벌려 충격을 받은 마나가 몸 밖으로 나갈 위험이 있었지만 하룬은 인내심이 강했다.

 퍽! 퍼억!

 고무적이었다. 소리가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나 로드를 막고 있는 벽의 균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하룬은 비록 마음은 급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이전과 같은 속도와 힘으로 그 벽을 마나로 깨부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노력의 성과는 있었다.

 퍼억! 푹!

 한순간 마나 로드를 막고 있던 단단한 벽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마나 포인트에 해당하는 곳에는 이처럼 살면서 쌓인 탁기로 단단하게 굳은 벽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번 벽이 무너지자 마나가 맹렬한 기세로 손목까지 돌진했다. 무서운 기세로 무너진 벽을 통과한 하룬의 마나는 몇 개인가 벽을 더 뚫었지만 다시 멈추고 말았다. 또 다른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 벽은 가느다란 구멍이 나 있긴 했지만 이전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그래도 일단 결과를 본 이상 희망은 있었다. 하룬은 그 벽을 뚫기 위해 다시 마나에 의지를 담았다.

 쿵! 쿵!

 마나가 벽에 충돌할 때마다 그의 몸이 흔들렸다. 고통을 참느라 저도 모르게 악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의 의식은 자신의 마나와 그 벽에 집중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푸욱!

 드디어 그 벽이 뚫리고 말았다. 한량없는 시간과 노력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손바닥의 중간, 즉 장심掌心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마나 포인트까지 파죽지세로 나머지 벽들을 뚫어버린 것이다.

 결국 어깨에서 장심에 이르는 모든 벽이 다 뚫리고 아직 잔해들과 부속물들은 남았지만 넓은 마나 로드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마치 다른 차량이 거의 없는 자장 도로를 달리는 기분처럼 시원하고 통쾌한 감각이 그에게 축하를 보냈다.

 이제까지 마나 오션의 마나를 손바닥까지 보내는 시간이 열이었다면 이젠 셋이면 되었고, 그 양이 열이었다면 이제 백은 단숨에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마나 운용의 효율은 이전과 비교하면 적어도 열 배는 더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기쁘다고 마무리를 짓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기에 하룬은 무너지고 깨진 벽 주위의 잔해를 말끔하게 치우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하룬은 다시 마나 플로를 돌렸다.

 ‘이제 셋을 뚫었구나.’

 열두 개의 작은 마나 로드 중 세 개가 뚫렸을 뿐이다. 그것도 대로가 아니라 소로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나머지 마나 로드를 뚫는 것과 이미 뚫은 그 마나 로드를 넓히는 일만 남았다.

 모든 마나 로드를 경유하고 이전처럼 순수하고 농밀한 상태로 마나 오션으로 돌아온 마나를 확인하고 눈을 뜬 하룬은 자신을 지켜보는 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놀람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하하! 대장, 축하하네.”

 딜런의 말에 하룬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살다가 이런 기이한 일은 처음이네. 무슨 마나 플로인지 몰라도 앉아서 하는 것도 신기한데 인위적으로 마나 포인트를 뚫는 건 또 처음 보네.”

 그렇다면 딜런의 경우는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마나 플로를 운행하는지 궁금했기에 그걸 묻고 싶었지만 나머지 대원들 때문에 미뤄야 했다.

 “어마, 세상에! 뭘 했기에 손바닥에서 오러가 솟구친 거죠?”

 “그건 체내에 모조으이 비전으로 쌓은 마나를 몸 밖으로 표출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야. 예전에 모셨던 분에게도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어.”

 헤니의 의문에 티노가 대답을 해 주었다.

 “역시 우리 대장은 평범한 용병이 아니었어. 마나 플로라니! 그것도 앉아서 하는 마나 플로에 무기도 아니고 직접 손바닥으로 오러를 내뿜을 정도인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하룬이 마나 플로를 운용하는 것을 처음 본 대원들의 충격과 놀람 그리고 기쁨은 컸다. 자신들의 대장이 기사들이나 익힌다는 마나 플로를 익히고 있다는 사실과,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마나가 체외로 발현되는 오러를 손바닥으로 내뿜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경외심과 아울러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하하! 언제 한번 제대로 붙어 보세, 대장. 그 정도 경지라면 나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테니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대장 의외로 음흉한 구석이 있었군. 그 정도라면 검술 실력도 엄청날 텐데 암기술과 정령술로 감추고 있었다니 말이야. 하긴 이 정도는 숨겨야 험한 용병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지. 아무튼 놀랐네, 대장.”

 “호호호. 돌풍에 들어오길 잘했네요. 이렇게 강한 대장하고 같이 다니면 적어도 억울하게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에요.”

 “커험. 그걸 말이라고 하나.”

 대원이 된 후 부쩍 행동거지나 말씨가 부드러워지고 예의를 갖추게 된 도네이스의 말에 티노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쨌거나 이런 대장을 모시게 된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은 창피해진 하룬은 어느 새 해가 높이 떠오른 것을 보고 시간이 꽤 많이 지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대원들은 그를 찾아 한참 돌아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이래서는 정말 곤란한데.’

 또 이렇게 아무 데서나 집중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을 자책했다. 집중하는 것은 좋은데 이러다가 누가 나쁜 맘이라도 먹는다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룬은 알지 못했다. 하룬이 마나 플로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침 수련을 나왔던 딜런이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그의 운공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누군가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면 그의 운공은 자연스럽게 멈추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 대장아 강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이제 식사하러 가죠. 난 구경하다가 뱃가죽이 등에 붙었어요.”

 헤니가 부러 배고픈 얼굴로 딜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고. 어제 늦게까지 안 들어왔던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잠을 설쳤더니 더 배가 고프네.”

 딜런의 말에 갑자기 티노와 도네이스의 얼굴이 불이 난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헤니의 눈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에엥? 그게 무슨 소리예요, 딜런 아저씨? 누가 늦게까지 안 들어왔어요?”

 “그게 말이야, 내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아, 그런데 어제 술을 먹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은 매콤한 국물이 있는 고기 스튜가 먹고 싶은데…….”

 그 순간 붉어진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도네이스가 황급히 달려와 딜런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스튜를 끓일게요. 마침 재료도 있으니까요.”

 “커험. 그,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도네이스의 스튜 솜씨는 일품이니까. 나도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스튜가 먹고 싶어.”

 티노의 말에 도네이스는 황급히 숙소로 달려갔다.

 “언니, 같이 가요.”

 헤니가 불렀지만 그녀는 쏜살같이 숙소로 달려갈 뿐이었다. 묘한 감정을 담은 눈으로 티노를 보던 헤니가 물었다.

 “부대장, 오늘 언니 많이 이상하지 않아요? 저건 대장이 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하지만 그녀의 질문을 받은 티노 역시 도네이스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 그게…… 난 그냥 좋아서 그런 거 같아. 생각해 봐. 용병들 중에 우리 대장 정도의 실력을 가진 것은 스무 명 남짓밖에 없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헤니는 여전히 시뻘겋게 물든 티노의 얼굴을 의혹이 담긴 눈길로 보며 말을 흐렸다.

 “나, 난 도니를 도우러 가야겠다.”

 티노는 그 말을 남기고는 도네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숙소로 달려갔다.

 “도니? 부대장이 언제부터 도네이스 언니를 애칭으로 부른 거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하하하.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보급 드워프들에게 가서 맥주나 좀 받아와. 대장이랑 같이 해장술이나 한잔하게.”

 “칫! 술고래! 알았어요.”

 헤니는 투덜거리며 어제 2차를 위해 세 사람이 갔었던 보급 담당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멀리 떨어지자 마무리 운동을 끝낸 하룬이 놀란 얼굴로 딜런에게 물었다.

 “딜런 경,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겁니까?”

 “흐흐흐. 남녀 사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오? 내 보기에는 보통은 남자가 덮치지만 저들은 그 반대라는 것이 좀 다른 뿐. 에고, 좋을 때다.”

 딜런은 음충맞은 웃음을 흘리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티노가 도네이스와? 호오, 정말 놀랄 일이군. 매일 툭탁거리며 싸운다고 생각한 것이 그럼 서로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거였었나?’

 남녀 관계에 무지한 하룬으로서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덩치만 보아도 과장 조금 더하면 도네이스가  티노의 두 배는 되었고, 얼굴에서 드러나는 나이는 티노가 도네이스의 두 배는 되었다.

 “하하하!”

 아무튼 축하할 일이다. 티노의 행동에서 절대 싫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좋은 일이 틀림없었다. 평생 외롭게 산 티노가 이제야 제 짝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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