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사람들》
돌풍 용병대가 머무는 막사는 졸지에 사람으로 넘쳐 났다.
7황자와4황녀 그리고 11황자가 보낸 무리들이 뒤를 이었던 것이다.
하룬은 그들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지금은 의뢰를 받을 상황이 아닙니다. 저희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찾아 주신다면 성심껏 의뢰에 응하겠습니다."
황자들이 보낸 귀족들은 일개 용병 따위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
에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그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자신들도 예법에 어긋난 것이다. 현실적으로 엘프들
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하룬은 이제 일개 용병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무게감
이 엄청나게 무거워진 것이다.
"알겠소.그럼 내일 일찍 다시 방문하겠소."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실례에도 불구하고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주신 점은
각별히 생각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다들 조금은 풀어지 얼굴로 돌아갈 수밖
에 없었다.
하룬은 아반 부녀와 발트랑 일행과도 인사를 나눈 다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방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그들은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지만 하룬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자 데브론과 제대로 해후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껄껄,돌풍 용병대에 들어가더니 이 친구 얼굴이 훤해졌구만."
"어떻게 되신 겁니까? 왜 이렇게 얼굴이 상하섰습니까?"
데브론은 벌써 눈가가 촉촉해진 티노의 손을 잡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 비해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주름은 더 많아지고 눈도 더 깊어졌다. 그는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는 티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두 사람의 재회를 바라보는 하룬의 눈에 습막이 번졌다. 자신은 경험한 적이 없는
깊은 정을 나누는 두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했다.
"이런,모르는 분들이 많군. 하룬 대장이 좀 소개시켜 주지 않겠소?"
"당연히 그래야지요. 일단 불가에 앉으세요."
눈치 빠른 헤니는 벌써 따듯한 찬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변 끓었던 찻물이라 금방 오묘한 맛과 향을 가진 오미차가 준비되었다.
하룬은 차를 권하며 먼저 데브론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게는 스승과도 같은 분이고 부대장님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그 말에 대원들의 자세가 달라졌다. 데브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본인들이 나름
인정하고 탄복하는 하룬이 스스로 스승이라고 일컫는 이였다. 당연히 마음 자세가 달라
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간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기에 웬만한 인물은 이제 대원들의 시선에도 차지 않았
다. 그 보기 힘들다는 귀족들이며 기사단장들 그리고 고위 급 마법사들도 그들의 막사를 방
문했다.
그런 대원들의 진정을 느낀 데브론은 따듯한 미소를 머금고 인사했다.
"반갑소. 난 브리엘라 황녀를 모시고 있는 데브론이라고하오."
평범한 인사였지만 대원들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하룬의 스승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말
한마디 , 손짓 하나도 쉬이 보이지 않는 데브론이었다.
"그래,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대원들을 간단하게 소개한 다음 하룬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껄껄. 잘 지냈네. 광산을 찾느라 분주하게 다녔지. 몇 개를 찾아내긴 했는 데......"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별 성과가 없었나 보다. 그래서 얼굴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아낸 광산 기술자들과 함께 여기 고요의 땅에 들어온 지 벌써 몇 달이 지
났네. 그동안은 북서쪽의 스카이루프 산맥과 인접한 지역을 주로 돌아다녔네. 이곳의 동쪽은 엘
프들의 영역이라 감히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했지. 하도 외진 곳에 있었고, 이곳 고요의 땅은
마볍 통신을 거의 할 수 없는 불완정한 마나의 땅이라 이곳에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최근
에야 들을 수 있었네. 부랴부랴 달려오긴 했지만 휘하 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라 황녀도 무척 난
감해하고 있네."
상황이 대충 이해가 갔다. 후크란 기사단이 왜 아직 이곳에 오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었다.
“그럼 황녀님은 어디에 계신 겁니까?”
“친위 기사들과 함께 이 뒤에 계시네.”
“아직 자리를 못 잡으신 겁니까?”
“그게…….”
데브론은 잠시 눈썹을 꿈틀했다. 이미 기사단들을 끌고 온 다른 황자들은 던전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브리엘라 황녀는 소수의 기사들만 이끌고 황급하게 온 터라 그 사이에 끼기는 힘들었다.
“그럼 일단 저희 용병대 옆에 막사를 치면 되겠군요. 방금 전에 도착하셨다니 상황을 잘 모르실 겁니다. 지금은 엘프들 때문에 던전을 전혀 공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굳이 던전 주변에 자리를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내심 세력에서 많이 밀리는 터라 걱정했는데.”
하룬의 배려에 데브론이 고맙다는 시선을 던졌다.
“물품과 장비는 충분하십니까?”
“그게…….”
데브론은 또다시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현재 입고 있는 망토도 그렇고 그 안에 입은 방어구도 먼지와 때로 지저분해진 것을 보니 대충 상황을 알만했다. 모든 것이 부족할 것이다.
“티노, 가서 황녀님께 인사드리고 각종 물품들을 전해 드리세요. 같이 가야 하는데 알다시피 손님들이 있으니…… 아! 막사도 쳐야 하니 대원들도 함께 가세요.”
이 세계의 귀족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헤니의 호기심을 이참에 채워 줄 셈이었다. 황녀를 지근거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브리엘라를 볼 생각에 들뜬 티노가 힘차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네이스와 헤니가 그를 따라 일어났다. 다른 용병단들이 안면을 트기 위해 선물로 들고 온 물품들이 막사 안에 꽤 많이 쌓여 있었다.
“대장, 난 밖에 있겠습니다.”
“네. 수고해 주세요, 딜런 경.”
데브론이 들어왔을 때 인사를 나누느라 안에 있었던 딜런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비스 용병대가 돌풍의 영역까지 돌봐 주고는 있지만 누군가 한 명은 막사 앞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대원들이 뛰어나군. 좋은 사람들을 얻었어.”
딜런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그 뒤를 좇던 데브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실력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좋은 분들입니다.”
“자네가 인덕이 있는 게지. 이 나이까지 살아 보니 사람이란 것이 일부러 부른다고 모이는 게 아니더군.”
어딘지 쓸쓸하게 들리는 데브론의 말을 통해 하룬은 그간 그와 황녀 일행이 겪었을 고난을 짐작했다. 사람이 가장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곳에 도착해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찾다 보니 자네의 돌풍 용병대가 엄청난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얼마 전에는 제라츠 용병단의 도발을 말끔하게 박살냈다고?”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알고 보니 선발 세력이라 실력자들이 몇 없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더해 그들이 우리 숫자와 실력에 방심한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겸손해하지 않아도 되네. 원래 검을 잡은 자들은 그 실력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걸세. 그런데 제국 정보 길드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데브론은 제라츠 용병단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하룬은 던전 때문에 생긴 제국 정보 길드와의 악연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미친 것들이군. 제대로 잘 손을 봐 주었네. 하지만 그들의 저력을 무시하지는 말게. 그들의 손과 발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은밀하게 많은 힘을 비축해 놓고 있는 놈들이니 말이야.”
데브론은 진심으로 하룬과 돌풍 용병대를 우려하여 충고를 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어비스 용병대와 다카린 용병단이 돌풍 용병대 주변을 둘러싸듯 포진한 이런 상황이라면 쉽게 도발을 하진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밖에서 보니 몇몇 세력에서 자네들을 찾는 것 같더군.”
아마 오늘 저녁 방문했던 손님들의 정체를 알아본 것 같았다.
하룬은 현재 이곳 상황과 엘프들 그리고던전에 대한 각 세력의 전략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막 이곳에 도착한 데브론으로서는 하룬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그 설명만으로 벌써 오래전에 이곳에 도착한 다른 세력들만큼 정보를 쥐게 되었으니 말이다.
“흠. 돌풍의 유명세가 괜히 생긴 것은 아니군. 어떻게 이종족의 언어를 배운 건가?”
그 역시 신기한 것 같지만 하룬은 그 질문에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니 말이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알아만 듣는 것이지 말은 할 수 없으니 그나마도 반쪽짜리입니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다들 엘프들과는 대화조차 시도하질 못하는 상황이니 생각 있는 작자들이 자네들을 찾는 것이 이해가 가는군.”
두 사람이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티노가 돌아왔다.
“대장, 막사 다 쳤습니다.”
“보급은 충분하게 챙겨 드렸습니까?”
“네. 모포와 의복 그리고 식량까지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데브론과 각별한 인연이 있으니 당연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에게도 따로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난 손님들과 마저 이야기를 하고 올 테니 티노는 데브론 님과 회포를 풀고 있어요.”
하룬은 고마워하는 티노의 눈빛을 받으며 막사를 나섰다.
밖으로 나와 보니 돌풍 용병대의 옆쪽에 이제까지 없었던 막사가 세 동이나 새로 생겼다. 대형 막사 하나와 5인용 막사 두 개였는데 한창 불을 피우고 있는지 천을 통해 불빛이 흔들렸다.
브리엘라 황녀에게야 특별한 느낌은 없었지만 스승으로 생각하는 데브론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동안 귀찮기만 했던 용병대장 자리도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흐뭇한 시선으로 새로운 막사들을 바라본 하룬은 그제야 손님들이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주인이 없는 자리여서 그런지 어색하고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를 보고 반색했다.
“미안합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이 오셔서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우린 괜찮소.”
랄트렐이 손님들을 대표해서 말했다. 그들 역시 하룬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을 막사 안에서 모두 들었던 것이다.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지금은 정식으로 의뢰를 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엘프들과 말이 통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난 통할 거라고 믿고 있소.”
“우리도 그렇소.”
드워프어와 엘프어가 완전히 다른데 뭘 믿는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하룬이 엘프들과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난국을 헤치기 힘들 거란 사실을 고려한 강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엘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지금 오신 측에는 기득권을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말입니다.”
하룬이 현재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아직 기본 전제사항도 확인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의 없소.”
“우리 역시.”
“일단 세부 사항은 정해지는 대로 사람을 보내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사항들은 엘프들을 만나고 와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하룬은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난 모레 새벽까지는 오겠소.”
“우리 역시 그때까지는 오리다.”
란트렐과 메롤라스 백작이 막사를 나갔다. 란트렐은 입고 있던 럼프 오크의 방어구를 벗지 않은 상태였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듯했다.
하룬은 입구까지 손님들을 배웅했다. 란트렐과 가볍게 작별 인사를 나눈 딜런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키운 모닥불가에 정좌했다. 그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귀족이 한낱 용병이 된 것도 믿기 힘든데 일부러 용병대의 수문장을 자처하는 딜런에게 하룬은 진심으로 존경심이 들었다.
비록 세상 경험이 일천한 하룬이지만 이러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데브론이 정신적인 스승이라면 딜런은 실질적으로 의지가 되는 귀중한 존재였다.
하룬이 막사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 옆에 털썩 앉는 것을 본 딜런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데브론과 티노가 있는 막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막내 황녀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나 보군.”
“네.”
하룬은 브리엘라와 맺은 인연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대단한 은혜를 입었군, 막내 황녀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덕분에 전 비전 스킬을 얻었으니까요.”
딜런은 굳이 그 비전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달리 비전이 아니니 말이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정체가 뭔가?”
아마 데브론이 궁금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항은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하룬이 말할 것은 못 되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혈육 관계라는 정도만 알 뿐이지요.”
그 설명만으로도 딜런은 충분히 수긍한 듯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검술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천생 검호劍豪다운 태도였다.
“그나저나 언제 갈 건가?”
“이틀 후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투문 데이에 새 거주지를 얻은 기념으로 작은 축제를 한다고 들었거든요.”
내일 하루는 오늘 미처 다 만나지 못한 세력들을 만나야 했다. 엘프들과 의사소통이 확실히 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의뢰를 받기는 그랬지만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의뢰를 받을 생각이었다.
“이번 의뢰가 성공하면 꽤 짭짤할 거 같군.”
“그러게요. 엘프들과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제대로 벗겨 먹을 작정입니다. 특히 제국 정보 길드는요.”
그렇게 말한 하룬이 싱긋 웃자 딜런 역시 진한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용병이 되었고 골든 배틀에서 한 세력을 밀지 않기로 작정한 마당이니 챙길 때 제대로 챙겨야 한다.
“그런데 드워프들이 좋아할지 모르겠군. 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그게 좀 걱정입니다.”
붉은 모루 부족은 거래 때문에 인간들과 교류가 있어 반감이나 텃세가 심한 편은 아니지만 멀지 않은 곳에 막강한 세력을 가진 인간들 때문에 걱정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했다지만 많은 인간들을 손님으로 받는 것은 불편한 일일 것이다.
“할 수 없지요. 비록 말은 알아들을 수 없겠지만 눈치로라도 확인하고 싶다니까요.”
“하긴.”
딜런도 상황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전 데브론 님과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
자리에서 일어난 하룬은 이제는 회포가 어느 정도 풀렸을 막사로 향했다.
막사로 들어오는 하룬을 보는 티노의 얼굴이 젖어있는 것을 보니 좀 과하게 회포를 푼 것 같았다.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닦은 티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부대장님, 딜런 경과 교대해 주세요. 밤이 늦긴 했지만 올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티노가 소매로 눈가를 훔친 후 막사를 나가자 하룬은 데브론과 함께 새로 친 막사로 향했다. 그곳에는 브리엘라 황녀가 헤니, 도네이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녀답지 않게 수수한 복장을 한 브리엘라를 보자 왠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제국의 황녀가 이런 꼴이라니. 제대로 된 시녀들도 없이 고린내 나는 사내들과 광산을 찾아 헤매는 것이 불쌍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 어서 오세요, 하룬 대장. 그동안 늘 궁금했어요.”
브리엘라가 반가운 얼굴로 하룬을 맞았다. 그동안 황녀 역시 고생이 많았는지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이었지만 한창 성장기여서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많이 성숙해졌고, 몸집도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는 사이 헤니와 도네이스가 목례와 함께 조용히 막사를 빠져나갔다.
몇 차례 더 이야기가 오간 끝에 정색을 한 데브론이 하룬에게 사과를 했다.
“대원들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티노로부터 이미 사정을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다른 경로를 통해 연락을 받았거나 말이다.
하룬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들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그게 우리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네가 그 일로 용병대를 키우는 일을 접었다고 들었네. 휴우. 자네 정도의 능력이었으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을. 아이들 생각이 너무 짧았네. 아니, 내가 실수했어. 서신에 그런 내용을 자세히 전했으면 그들이 그런 경솔한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오지에 갇혀 수련만 하던 이들이라 생각이 짧았던 게야. 자네들에게 많은 목숨까지 빚졌으면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브리엘라 황녀도 면목이 없는 얼굴이었다. 수하의 실수나 잘못은 주군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는 것이 이곳 세상이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키도 한 뼘이나 자라 제법 성숙해진 브리엘라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너무 괘념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나름 생각이 있어 벌인 일이고 그 결과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너무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야 고맙지. 아무튼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데브론이 그렇게까지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이 세계의 귀족들은 현실의 노블들보다 권위 의식이 강하고, 말도 안 되는 이론으로 무장된 경우가 흔했던 것이다.
“그래, 곧 드워프 마을에 간다고?”
“네. 의뢰가 가능한지 일단 확인하려고요. 미리 드워프들의 초대를 받았거든요. 그들을 통해 엘프들과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협상이 잘되면 굳이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던전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하룬의 대답에도 잠시 침묵을 지키던 데브론은 몇 번이나 브리엘라의 눈짓을 받은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이야기가 잘되면 던전에 들어갈 때 우리도 좀 끼워주면 안 되겠나?”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후크란 기사단은 물론이고 다른 귀족가의 기사단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변변한 세력도 없이 수행 기사 열이 고작인 그들로서는 현재 기댈 곳이 하룬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맙네.”
데브론은 큰 짐을 던 얼굴로 몇 번이나 감사를 표시했다. 물론 곁에서 마음 졸이던 브리엘라 황녀 역시 환한 얼굴로 목례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지금은 이렇지만 곧 광산 지역에 주둔한 기사단들과 병사들 그리고 다른 기사단들이 오면 상황이 조금은 나아질 걸세. 우리가 벽지에 있어 소식이 늦은 터라 명령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지만 이젠 제대로 될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럼 피곤할 텐데 이만 쉬게나.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지.”
그러고 보니 브리엘라 황녀의 얼굴에 진한 피로감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던전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꽤나 강행군을 한 것 같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막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찍부터 나간 뫼비우스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끌고 왔다.
그는 최근 돌풍 용병대를 끼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이 일로 그가 챙긴 소개료는 그것이 금전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든 아마도 엄청날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같은 인공수정체라면 더욱 말이다.
“대장, 바얀 후작이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누구지?”
이 비욘드의 귀족들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 하룬이다.
“최고 귀족 회의에 속하는 세력입니다. 바얀 후작은 다르안 공작의 동생으로, 이곳에서 최고 귀족 회의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뫼비우스는 벌써 이 세계 귀족들의 이름과 그 소속 그리고 파벌을 줄줄 꿰고 있었다.
“역시 같은 용건인가?”
하룬의 질문에 뫼비우스는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만나 보지.”
하룬은 뫼비우스와 함께 옆의 막사로 자리를 옮겼다. 안에는 티노의 안내를 받아 오크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하룬이 뫼비우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이 일어났다.
“돌풍 용병대의 하룬입니다.”
“반갑소. 난 바약 후작가의 알퐁스 백작이오. 이쪽은 셀렌 마법사이고, 이쪽은 보고트랑 백작이오.”
알퐁스 백작은 꽤 젊었다. 이제 갓 서른이나 되었을 정도였지만 깊고 날카로운 눈빛은 그의 심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셀렌이라는 마법사는 주름살이 하나도 없는 팽팽한 피부를 가진 미모의 중년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만만치 않은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보고트랑은 그들의 호위 기사로 보였는데 나이도, 그 경지도 헤아리기 힘든 기이한 인물이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딜런이 하룬의 옆에 서서 그를 뜨거운 눈길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번밖에 본 적이 없는 시선으로, 딜런이 굉장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딜런 경이 호승심을? 뭔가 있는 인물이군.’
“셀렌이라고 해요. 유명한 영웅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젊군요. 감탄했어요.”
“보고트랑일세. 역시 유명세가 과장된 것은 아니었군.”
셀렌의 눈길은 하룬에게, 보고트랑의 눈길은 딜런에게 꽂혀 있었다. 셀렌이야 마법사이니 아무래도 정령사로 소문난 하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보고트랑은 막강한 기세를 흘리는 딜런에게 관심을 가졌을 터였다.
“일단 앉지요. 헤니.”
“네. 차 준비됐어요.”
눈치 빠른 헤니는 벌써 오미차는 준비해서 내오고 있었다. 차를 마신 알퐁소 백작의 눈이 커진다.
후르릅.
“허어, 정말 특이한 맛과 향을 가진 차군.”
돌풍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반응에 하룬이 미소 지었다.
“다섯 가지 향과 맛을 지닌 오미차라고 합니다.”
“좋은 차군. 좋은 만남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드오.”
그렇게 오미차를 주제로 처음의 어색함을 녹여 버리자 바로 본론이 이어졌다.
“그간 몇 명이 돌풍을 찾았다고 들었소. 아마 엘프들과 협상을 위한 것일 테지요?”
“사실입니다. 그래서 조만간 엘프들과 자리를 주선할 수 있는 드워프 종족을 만나러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도 한자리 끼고 싶소. 어차피 독점 계약은 불가능하니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겠소?”
“조건만 맞는다면 못 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다만 제국 정보 길드에서 우리에게 억하심정을 가지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최고 귀족 회의는 원로원과 심각한 갈등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제국 정보 길드였다. 최고 귀족 회의 역시 원로원만큼은 아니지만 제국 정보 길드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그곳 길드원 신분을 가진 뫼비우스의 정보이니 믿을 만할 것이다.
“여기는 황도가 아니오. 더구나 이미 돌풍은 그들에게 힘을 과시했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소. 비록 오랜 거래 관계가 있다고 하나 그들이 우리를 탓할 입장은 아니오.”
그의 말은 확고했다. 하긴 다른 세력들은 하룬을 통해 엘프들과 접촉하는데 그들이 제국 정보 길드 때문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일단 엘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라 구체적인 의뢰는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양해해 주십시오. 혹시 우리와 같이 가실 분이 있으시다면 두 분만 모레 새벽에 이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좋소. 우리는 셀렌 마법사와 보고트랑 경이 동행할 거요.”
셀렌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하룬을 응시했다. 아마도 여정 동안 정령 마법에 대해 그에게 뭔가 알아낼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보고트랑의 눈빛은 막사를 들어온 이래로 딜런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좋은 차 잘 마셨소. 그럼.”
세 사람은 풀어진 얼굴로 막사를 나섰다. 정식 의뢰를 할 상황이 아닌지라 밀고 당길 필요가 없어 비록 나이는 젊지만 심기가 깊고 노회한 알퐁스 백작이 굳이 나설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한번 부딪쳐 보고 싶은 상대였네.”
딜런이 돌아가는 보고트랑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소드 마스터?”
“어쩌면. 적어도 내 경지를 넘어선 자라는 느낌이네. 하지만 전투란 부딪쳐 봐야 아는 법이니…….”
딜런은 보고트랑이 자신보다 윗줄이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투기와 호승심을 꺾지 않았다. 세상의 강자들과 겨루기 위해 용병이 되는 것도 감수한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룬도 보고트랑이 강자라는 것은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 역시 딜런보다는 일천하지만 익스퍼트의 경지였다. 하지만 그의 눈으로도 아무런 기세를 느낄 수 없는 인물이라면 강자일 것이다.
“이번 여행은 재미있겠군.”
“하하! 그럴 거 같네요.”
이후로 어제 방문했던 세 황자 세력이 재차 방문했다. 물론 용건은 똑같았다. 하룬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아 그들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 가능성을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기에 의뢰금은 추후에 정하기로 했다.
돌풍과 계약한 세력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마법사 한 명과 기사 한 명을 동행하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 동행인들의 실력은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강자를 좋아하는 딜런이 반가워할 만도 했다.
아반 일행과 발트랑 일행의 의도도 같았다. 하룬은 다른 세력들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터라 그들에겐 따로 의뢰금을 청구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별다른 방안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오후 늦게 예상치 않았던 손님이 방문했다. 그것은 바로 세류 일행이었다.
“대장!”
세류는 하룬을 보자 뭔가 울컥한 표정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친구나 가족을 대하는 듯 진득한 감회가 어린 얼굴이었다. 그의 품에 뛰어들 것 같은 표정으로 달려온 세류지만 막상 그를 보자 멈칫하며 정감 어린 목소리로 부를 뿐이었다.
“건강했군요.”
그녀의 얼굴은 건강해 보였다.
“네. 사실 그동안은 이 세계에 많이 오지 못했어요. 별로 재미가 없어서…….”
그녀의 말에 하룬은 빙긋 웃었다. 왜 재미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분명히 자신보다 꽤 연상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잘해야 그와 비슷한 또래의 여인으로 보였다.
‘흡!’
같이했던 시기에는 많이 보지 못했던 하룬의 미소에 세류는 가슴이 진탕되었다. 사실 깊고 강렬한 눈빛 말고는 특별히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하룬의 인상은 강하고 믿을 수 있는 사내였다.
전에 보았을 때는 무표정하고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지금 보니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대장이 뫼비우스를 통해 챙겨 준 덕분에 늦게 출발한 것에 비하면 빨리 왔어요.”
“다행이네요.”
세류는 짧게 자신의 말을 받는 하룬이 왠지 서운했다.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 그녀가 마음속에 쌓고 떠올렸던 이미지와 현실의 하룬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더 유명해졌더군요.”
그 말에도 빙긋 미소만 짓는 하룬이지만 세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분명히 NPC일 텐데 왜 이렇게 마음이 그에게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를 보며 웃는 눈에 왜 이렇게 설레는지, 그의 미소에 몸이 저리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칫! 정말 하룬 대장이 유저라면 좋았을 텐데.’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맏딸로,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그녀지만 이상하게 하룬만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였다. 그래 봐야 태생적인 한계가 있는 터라 그 마지막은 늘 쓸쓸하고 슬프기만 했지만 그래도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그래, 이곳 사정은 들었소?”
“네. 아는 사람들이 이곳에 먼저 도착했거든요. 제가 사는 세상에서 이미 들었답니다.”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뒤를 보았다. 그녀와 동행한 비류는 목례를 하기 무섭게 옆 막사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곳에는 뫼비우스가 머무르고 있었다. 세류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가 인사를 하기 위해 잠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됐군. 애증인가?’
사랑이 뭔지, 정이 뭔지 모르겠지만 비류의 태도를 보건대 아직 뫼비우스를 향한 마음은 이전과 별다른 바가 없는 듯했다. 배신 아닌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그를 마음에 둔 것을 보니 가슴이 짠했다.
“역시 마법서가 필요한 거지요?”
“네, 그래요.”
하룬의 물음에 세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켜 주는 광역 배리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배리어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발전 시설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런 귀중한 것들이 사라진지 오래됐지요. 때문에 우리는 차선책으로 배리어 밖에서도 변종 생물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힘이 필요해요. 앞으로 우리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새로운 힘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절대적이에요.”
물론 그런 사실은 하룬도 잘 알고 있다.
상급 이상의 캡슐을 사용하면 이 비욘드에서 익힌 패시브 스킬을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사용이 가능하다. 두뇌는 물론 신경과 근육 세포들에 아로새겨진 스킬들을 현실에서 다시 수련하면 변종 생물들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곳 던전에 있는 마법서들 중에는 배리어 밖의 오염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신체로 강화시켜 주는 마법서와, 현실에서 사이킥 에너지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서가 있다.
“도와주실 거죠?”
그를 바라보는 세류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왜 그에게 이렇게 대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저들이 이 세계에 현신할 때 가지는 아바타는 성기性器가 없는 몸이다. 때문에 성관계가 불가능했고 다른 NPC들이 일종의 프로그램체라는 것을 알기에 세류처럼 NPC를 대하는 것은 무척 희귀한 경우다.
물론 그 희귀한 경우 중에는 하룬도 포함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 역시 홀에게 연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아즈만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 하룬이야말로 희한한 존재이긴 했다.
“일단 엘프들을 만나 보려고 하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라 아직 뭐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오.”
“고마워요.”
세류는 하룬이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을 승낙으로 받아들인 듯 기쁘게 웃었다.
“혹시라도 던전에 들어가게 되어 마법서를 얻으면 반드시 저에게도 내용을 알려주세요. 대가는 무엇이라도 들어 드릴게요. 그것이 무엇이라도요.”
대가를 굳이 강조하는 태도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하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용건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으니 우리는 물러날게요. 호숫가 근처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니 시간이 나면 꼭 들러주세요.”
“알았소.”
세류는 하룬을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신경이 쓰이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 막사에 주의를 기울이던 비류가 흠칫 놀라 그녀를 보았다. 하룬에게 고개를 숙이며 반달눈으로 웃는 세류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싱그러운 단내를 풍기고 있었다.
밤이 늦었을 때는 마지막으로 원로원에서 보낸 자들이 왔다. 제국 정보 길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들의 방문은 정말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내칠 수는 없었다.
이미 제국 정보 길드와는 척진 것을 알면서도 찾아온 것을 보면 그들로서도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그들이 찾아온 것은 어떻게 보면 제국 정보 길드의 영향력 약화를 본 것 같아 그들의 의뢰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