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드는 사람들》
타앙!
무지막지한 주먹질에 급조해서 만든 나무 탁자가 부서져 나갔다.
“감히 우리를 건드려!”
제라츠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다른 일 때문에 이곳에 늦게 도착한 그는 부단장 이하 412명이 돌풍 용병대에 몰살당했다는 참혹한 보고를 듣고 광분하고 있었다.
“어디 있냐?”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제라츠의 눈길을 접한 조장 하나가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엄청난 살기가 그의 심혼을 부셔 버릴 듯 방사되었던 것이다.
“그, 그게…….”
“이 쓸모없는 새끼들!”
제라츠는 자신의 살기에 눌려 제대로 입도 열지 못하는 조장을 발로 차 버렸다. 옆구리를 제대로 맞은 조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막사 끝까지 날아가는 바람에 막사가 출렁거렸다.
“쯔쯧! 단장이란 사람이 마음 하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야.”
제라츠의 살기 어린 눈은 막사의 문을 젖히고 들어오는 인물에게 잠깐 꽂히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양처럼 순하게 바뀌었다.
“길드장님!”
그의 눈이 향한 곳에는 황금색 튜닉을 걸친 풍채 좋은 노인이 있었다. 노인의 뒤로 차가운 얼굴의 미인 한명과 바위처럼 단단한 기세를 가진 중년의 검사가 따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미 와 계신다는 보고는 들었습니다. 그간 보고만 받고 곧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운지 노인과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맡긴 일은 제대로 처리했는가?”
“네. 이중으로 작업해 놓았으니 제국 남부의 상계는 한동안 시끄러울 겁니다.”
이곳의 일 말고 무언가 다른 일을 획책하고 있는 게 있다는 소리였다.
“수고했네. 자, 자리에 앉지. 이런, 탁자도 그렇고 의자도 엉망이군.”
노인의 말에 제라츠는 기절한 상태로 날아간 조장을 끌고 와 그 몸을 무릎 꿇은 자세로 접었다.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기절한 조장의 등을 깔고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오?”
제라츠의 눈은 노인을 수행해 온 여인에게 향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가진 여자의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그따위 쓰레기 같은 단원들을 믿고 큰소리친 거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고저 없는 목소리와 달리 여인의 눈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빛이 향하자 제라츠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제라츠를 둘러싼 공간이 그를 강하게 압박하는가 싶더니 몸을 굳게 만들었던 것이다.
‘허! 정보 분석이나 하는 머리 좋은 계집인 줄 알았더니 현자의 법을 써? 무서운 년이었구나!’
하지만 그도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발을 걸친 인물. 마나를 전신을 통해 방사하자 굳었던 몸이 풀렸다. 하지만 관절 부위들은 여전히 불편한 것이 여간 강한 현자의 법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소. 난 그저 수하의 보고가 미진해서 국장에게 상세한 설명을 부탁했던 것에 불과하오.”
제라츠의 사과에도 여인의 차가운 얼굴은 미세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유리알처럼 투명해지기를 반복하는 눈만이 그녀의 감정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미진한 것이 아니라 그게 전부다.”
대답은 노인의 입에서 나왔다.
“네에?”
제라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곳에 파견한 부단장 이하 단원들 대부분은 죄를 지어 장기 투옥이 결정된 기사 출신의 죄수들이었다.
돌풍 용병대에 관한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이란 것은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고 그들의 숫자 역시 적다고 알고 있던 제라츠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네 놈이서 무려 사백이 넘는 단원들을 몰살시켰다.”
이어진 노인의 설명에도 한번 커진 눈과 벌어진 입은 제자리로 돌아가질 못했다.
“무서운 실력을 가진 놈들이다. 개개인이 익스퍼트 최상급에 해당하는 실력을 갖추었고, 특히 정령사의 경우는 세 속성의 중급 정령을 부릴 정도였다.”
“그, 그럼 그것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제라츠는 자신이 바보라도 된 느낌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묻고 있질 않은가? 그것도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작자에게 말이다.
“우리가 직접 목격했다.”
노인의 말에 제라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신이 수십 년간 온갖 욕을 먹어가며 양성했던 실력자들 중 4분의 1이 한 방에 날아갔으니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놈들이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포! 그들에 대한 정보는 입수했나?”
“네. 말씀드릴까요?”
“아니다. 그런 자료는 조용한 자리에서 보는 것이 낫겠지.”
“서류로 준비하겠습니다.”
노인은 거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표정한 얼굴의 검사에게 눈을 맞추었다.
“타혼, 그자들을 상대할 수 있겠나?”
“아마도.”
타혼이라고 불린 검사는 주저 없이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포라는 여인처럼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그럼 시간은?”
“궁사와 독침술을 쓰는 자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몇 합이면 됩니다. 딜런은 비기를 써야 하고 반시간 안에는 해치울 수 있습니다. 정령사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노인의 눈에는 강한 호기심이, 차가운 얼굴의 여인과 제라츠는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소드 마스터인 타혼이 모르겠다고 대답한 것은 처음이었다. 길드의 검으로 어쌔신들과는 달리 정면 승부로 적을 처치해 온 타혼의 대답은 너무 뜻밖이었다.
“위험한 자로군. 명목상의 대장인 줄 알았더니 실제 대장일 수도 있겠어. 그런데 어찌 그런 놈이 4급 용병이란 말이냐?”
노인의 말에 여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까지 정보를 잘못 분석했던 것이다.
“어지간한 세력이 뒤에 있지 않고서는 그런 인물들이 하늘에서 뚝딱 떨어질 일은 절대 없겠지. 포! S급 정보망 사용을 허가한다. 놈들의 배후를 캐내지 않고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길드에 크나큰 화를 가져올 수 있다.”
“알겠습니다.”
내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던 여인은 물론이고 나머지 두 사람의 눈에 강한 놀람의 빛이 일렁였다. S급 정보망을 가동하는 경우에는 대를 이어 제국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정보활동을 하던 길드 조직원들이 노출될 염려가 있었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많이 놀라신 거로군.’
여인의 눈에 차가운 빛이 일렁였지만 이내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여졌다. 그녀가 직접 본 돌풍 용병대의 실력은 단순히 익스퍼트 급이니 하는 등급이나 레벨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굉장한 것이었다.
그런 실력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자신들과 비견되는 정보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길드장이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 길드의 천적일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놔두면 그렇게 되겠지. 자고로 정보를 쥔 자는 정보를 쥔 자에게 망한다고 했다. 뿌리까지 뽑아 없애려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할 거야.”
“네!”
포는 처음으로 감정이 실린 짧은 대답으로 각오를 드러냈다.
“놈들이 숨지 않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믿는 바가 있을 것이다.”
“다카린 용병단과 어비스 용병대가 그들의 숙영지를 암중에 감싸고 있습니다. 또한 대원들끼리 상당한 교분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포의 보고에 노인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드러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암중에 숨어 있는 창이 무서운 것이지.”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늘 그들이 해 온 역할이 그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드러나고 돌풍은 숨은 것과 다름없다.
세 사람이 나름 생각이란 것을 하고 있을 때 노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 대장이란 젊은 놈이 이종족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정보가 있다. 아마 힘을 합할 수도 없고, 단독으로는 엘프들을 상대할 수 없는 황자들이나 다른 세력들이 그들에게 접근할 것이다.”
포의 뇌세포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이종족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노인의 입에서 나왔으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라인 말고도 은밀한 정보를 입수하는 라인을 더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엘프들과 협상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게 최선이니까. 우리도 그 움직임에 끼어들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노인은 믿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제라츠에게 눈을 돌렸다.
“단주는 나머지 용병들을 불러들여 세를 정비해라. 어쌔신들과 용병들을 묶어 할 일이 있으니까.”
“서두르겠습니다.”
“타혼은 길드의 숨겨진 검들을 소집해라. 곧 쓸 일이 있을 것이다.”
“복명!”
한쪽 무릎을 꿇고 접은 왼팔을 들어 올리는 타혼을 바라보는 포와 제라츠의 눈빛이 기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이냐?”
1황자는 격노했다. 던전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많아지는데 아직도 엘프들을 몰아내고 던전을 차지하거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세력들을 결집하는 것도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회의장은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1황자의 격노에도 사실 지금 상황은 어느 한 세력이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앉아 있는 모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입구 근처에 서 있던 힐튼 자작이 주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1황자의 노여운 눈길이 그에게 닿더니 기세가 좀 누그러들었다. 그는 그가 존경하는 황사의 조카였고 이번 황자들의 모임을 기획하고 치러 낸 인재였다.
“힐튼 자작, 말해 보라.”
황자의 말을 들은 힐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영지도 없이 작위만 있는 그로서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발언을 신청할 계제는 아니었지만 용기를 내었다.
“전하, 써 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1황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황사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조카를 지켜보았다.
“제가 아는 이방인 중 한 명이 돌풍 용병대장과 가볍지 않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돌풍 용병대의 존재야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일당백의 무력을 가진 소수 정예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의뢰를 처리하는 그들의 능력은 용병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기사들도 어느 정도 인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이방인으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게 뭔가?”
“돌풍의 대장이 엘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할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뭐라? 그럼 그 용병이 엘프어를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놀라운 일이다. 엘프들이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천 년이 흘렀다. 세 제국의 태동기에 인간들에게 밀려 험준한 산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엘프어를 아는 인간은 극히 드물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런 자를 수소문하는 것도 힘들었다.
7서클 마법인 통역 마법의 경우 대륙 공용어가 완전하게 자리를 잡고, 드워프나 엘프들과 같은 이종족들이 세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자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어져 어느 순간 그 맥이 끊겨버렸다. 이제 마법사들조차 그 마법을 아는 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장은 심지어 드워프들과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호오!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자로군. 정령을 부리는 그 능력이 놀랍다는 이야기는 들었짐나 아무리 그래도 일개 용병이 어떻게?”
힐튼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어라는 것, 특히 단순한 알파벳이나 단어 그리고 문장 배열의 차이가 아니라 성조가 다른 이종족의 언어는 그들이 인간들과 어울려 살았던 시절에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극히 적을 정도로 배우기 어려웠다.
그런데 일개 용병이 드워프어와 엘프어를 사용할 수 있다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카의 말을 들은 황사가 눈을 빛냈다.
“그는 뛰어난 정령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 정령 마법이 엘프들에게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 엘프들과 인연을 맺은 자라면 그 불가사의한 능력의 배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겠지. 그런데 자작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닐 텐데?”
“네, 전하. 최악의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그 돌풍 용병대에 의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의뢰라?”
1황자의 눈빛이 강해졌다.
“엘프들이 던전은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엘프들은 던전의 보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이런 오지로 쫓아낸 인간들을 향한 증오와 적개심 그리고 이곳을 먼저 발견한 이방인들과 메스 기사단이 벌인 일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장소로 짐작되는 던전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됩니다.”
그의 의견은 이미 이곳에 도착한 많은 세력들이 짐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싸우지 않고 엘프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책이 될 것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진영만 은밀하게 던전에 입장할 수 있도록 협상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의 눈빛이 번득였다. 힐튼 자작의 의견은 성사만 된다면 모두가 경쟁자이며 적인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비책이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인데 황사와 같은 핏줄이라서 그런지 뛰어난 비책을 생각해 낸 힐튼 자작에게 감탄의 시선이 모였다.
황자의 기대 어린 시선, 감탄과 질시가 섞인 중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힐튼은 더 이상 움츠린 태도가 아니라 침착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이방인과 돌풍 용병대의 전력을 보면 그 대장은 대단한 능력을 지닌 자가 확실합니다. 여러 사안으로 볼 때 제국 정보 길드에 버금가는 정보 라일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며, 의뢰를 받으면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해서 자신 없으면 아예 의뢰를 받지도 않는다고 하니 일단 의뢰라도 해 보심이 어떨는지요?”
차분하고 힘 있는 그의 말은 묘한 설득력이 담겨 있어 듣는 이들, 특히 1황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현재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자작?”
“네. 제라츠 용병단과 한번 큰 싸움을 벌인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자네와…… 음, 황사가 직접 그들을 만나 의뢰하고 조건을 들어 보시오. 나도 그들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믿을 수 있는지 그 능력은 어떤지 확인해 보고 터무니없는 조건만 아니라면 의뢰를 넣는 것으로 합시다.”
1황자의 결정에 황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정보 길드의 쥐새끼들과 원로원의 이리들이 야합하는 정황이 포착되었고, 최고 귀족 회의의 여우들도 온 마당이니 그들 중에도 머리가 있다면 돌풍 용병대의 존재를 간과할 리가 없소.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네, 전하!”
황사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자신의 조카인 힐튼 자작을 향해 흐뭇한 눈빛을 보냈다.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1황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낸 황사와 힐튼 자작은 여섯 명의 기사와 함께 뫼비우스의 행방을 수배했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간에 그의 안내를 받아 이방인들과 용병들이 머무는 지역으로 들어섰다.
하룬 일행의 막사는 산기슭에 있어서 1황자 진영과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평소 운동량이 많지 않았던 탓에 막사 앞에 도착한 황사와 힐튼은 벌써 숨을 헐떡거렸다. 두 개의 막사 앞에서는 딜런이 명상을 하고 있었다.
“누구냐?”
이제 완전히 정상을 회복한 딜런은 기사들의 접근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인물들인데 상당한 실력자가 여섯이나 포함되어 저도 모르게 기세를 뿜어냈다.
그의 십 보 앞에 멈춘 황사 일행은 가공할 수준의 예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전진하다가는 죽을 것 같은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역시!’
검을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6서클 마법사인 황사는 비록 검도 뽑지 않고 단순히 앉아 있지만 그 자체로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검사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뒤로 빠져있던 뫼비우스가 앞으로 나오며 소리를 쳤다.
“딜런 경, 뫼비우스입니다. 대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들은 누구냐?”
알은척을 했지만 딜런의 눈초리는 잘 벼린 검날처럼 살벌한 예기가 흘렀다. 뫼비우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설명했다.
“제가 소개해서 의뢰를 위해 찾아온 분들입니다. 신분은 확실한 분들입니다.”
딜런은 조용히 곁에 놓인 검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느릿한 동작에서도 숨 쉬기 어려울 정도의 강력한 기세가 흘러나와 기사들은 검 자루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긴장해야만 했다.
“란트렐인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자 황사는 눈을 크게 떴다. 모닥불에 비친 중년의 검사는 그를 알아보는 듯했다. 더구나 그의 어조에는 희미하게 친근감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사는 몇 번을 보았지만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인했다. 하지만 곧 뫼비우스가 부른 이름을 떠올리니 오래전 추억으로 묻어 놓았던 어떤 영상이 떠올라 그의 얼굴과 매치되었다.
“디, 딜런?”
“오랜만이네. 그동안 많이 늙었군.”
“이 친구야, 자네가 왜 여기에 있어?”
황사는 반가움과 의아함이 범벅된 얼굴로 딜런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딜런과 란트렐이 힘차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포옹을 푼 두 사람은 모닥불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는 주먹을 마주 대고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30년 만인가?”
“정확히 34년 만이네. 그해 여름 자네가 부상을 핑계로 근위 기사단을 나가 영지로 간 이후 처음이네.”
“오랜 시간이 흘렀군. 황도의 마담들을 환장하게 만들었던 그 미안의 마법사는 어디 가고 이런 쭈그렁바가지가 내 앞에 나타나다니. 정녕 무상한 세월이군.”
“예끼, 이 친구! 툭하면 날 꼬여 내 술값이나 치르게 만들던 악한이 조카 앞에서 그 무슨 망발인가? 뭐, 미안도 맞고 마담들이 내게 푹 빠졌던 것도 맞지만 말이야.”
“하하하! 입담은 여전하군.”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몰라볼 뻔했네. 어째 자네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구먼. 부러우이.”
딜런은 란트렐의 쓸쓸한 목소리와 주름살 가득한 노안을 보며 그의 어깨를 힘차게 내리쳤다.
“나야 자네처럼 머리 쓸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안해서 그렇다네. 영지야 아들 녀석이 잘 관리하고 있고, 잔소리할 마누라와 떨어져 여행이나 하니 세상 속 편하게 살고 있지.”
“혹시 자네도 돌풍 용병대원인가?”
“맞네.”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수긍하는 딜런의 응답에 란트렐은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허어! 명색이 전승 귀족에 황실 근위 기사단 조장까지 맡았던 자네가 일개 용병대원이란 말인가? 그럼 자네가 바로 얼음 검사라고 불리는?”
“아마 맞을 걸세.”
딜런도 새로 생긴 자신의 별명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별명은 아니라서 금방 화제를 돌렸다.
“우리 대장을 만나러 왔나?”
“그래. 난 1황자 전하를 모시고 있네.”
“출세했군. 그 잔머리를 어찌 믿고 1황자께서 자네를 신임했을꼬.”
“에이, 이 친구!”
딜런은 란트렐과 농담을 나누며 하룬이 있는 막사로 갔다.
“딜런입니다, 대장.”
“들어오세요.”
하룬의 승낙을 받은 딜런은 다섯 기사를 막사 앞에 세우고는 두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뫼비우스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아레스 일행의 숙영지로 향했다.
란트렐은 용병계의 돌풍으로 등장한 유명한 인물이자 친우이자 자존심이 강한 딜런이 대장으로 받아들인 신비의 인물이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물론 실력도 딜런을 능가할 것이 분명했다. 검에 미쳐 근위 기사단도 뛰쳐나간 딜런이 고개를 숙였다면 당연한 일이다.
“흐읍!”
하룬을 보는 순간 란트렐은 자신도 모르게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저, 저 친구가 대……장?’
얼굴까지 덮은 긴 머리와 수염 때문에 나이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맑은 정광이 흐르는 안광과 목소리 그리고 전체적인 외모로 봐선 아무리 많이 보아 주어도 삼십 대 초반이다. 아니, 이십 대 후반도 되지 않은 것 같다.
‘영웅이다!’
비록 나이는 젊으나 보는 순간 절로 외경심이 들 정도로 부드럽지만 자연스럽게 위엄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아 절대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압도하는 그런 기도는 그가 오랫동안 주군으로 모셔 왔던 1황자와는 어느 면에서는 비슷했다.
“대장, 란트렐이라고 예전 아카데미를 다닐 때 사귀었던 친굽니다. 조카와 함께 의논할 것이 있어 왔다는군요.”
이전까지는 편하게 말했던 딜런이었지만 제라츠와 혈전을 벌인 후에는 제대로 군기가 들어 타인 앞에서는 하룬이 난감해할 정도로 예의를 갖추었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딜런과 아는 사이라니 반가웠다.
“명성이 자자한 돌풍 용병대장을 만나 기쁩니다. 란트렐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내 조카 힐튼 자작입니다.”
친우가 존칭을 쓰는 상사이니 자신도 귀족의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어 말이 조심스럽다. 란트렐은 당황스러웠던 마음을 추스르고 힐튼과 함께 하룬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바닥에 깔린 것이 무슨 가죽인지 몰라도 푹신하고 부드러운 것이 무척 편하고 안락해서 마음에 들었다.
딜런과 친구라기에 기사인 줄 알았지만 깊고 강렬한 눈빛을 가진 현자나 마법사였다. 그와 함께 온 힐튼 자작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마침 차를 마시려고 딜런 경을 부를 참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하! 저 친구가 먹을 복은 있군요. 찻잔은 제가 준비하지요.”
딜런은 기대 어린 얼굴로 서둘러 막사 한쪽에 준비된 찻잔을 가져왔다.
‘허어. 정말 놀랄 일이군. 저 친구, 그동안 너무 많이 변했군. 격식을 따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저런 하찮은 일까지 직접 하다니.’
란트렐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변화된 모습이 적응되질 않았다. 남작에 영지까지 있는 세습 귀족, 그것도 재능과 그 실력을 인정받아 황제로부터 직접 근위 기사로 서임까지 받은 친구가 한참 젊은 친구를 대장으로 모시질 않나, 저런 하찮은 일까지 손수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하룬은 숯불 위에서 끓고 있던 주전자의 물에 오미차를 넣고 조금 더 끓였다. 금방 오미차 특유의 다섯 가지 향이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황실에서 생활하며 온갖 종류의 차를 다 마셔봤을 뿐 아니라 그 직업상 차를 즐기는 란트렐과 힐튼의 코가 몇 번 벌름거리더니 눈이 커졌다.
“호오, 이건 무슨 차인가?”
란트렐이 딜런에게 물었다.
“하하하. 오미차라네. 아주 특별한 약초들로 만든 차지. 난 본래 차를 즐기지 않는데 이 차만은 예외라네. 향과 맛 그리고 깊고 오묘한 풍미는 차를 통해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네.”
코끝에 감도는 오묘하고 깊은 차향은 절로 란트렐과 힐튼의 눈을 감게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 향을 확실하게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흐음, 정녕 최상품이군.”
쪼르륵!
하룬은 드워프들에게 부탁해서 가져온, 도기로 빚은 찻잔에 오미차를 따랐다.
그 소리에 눈을 뜬 란트렐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차를 따르는 청아한 소리와 짙게 퍼지는 차향,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 그리고 꼭 만나보고 싶었던 영웅이 모두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정말 꿈처럼 몽환적이다.
힐튼 역시 마찬가지인 듯 환하게 웃었는데 조카의 그 모습을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 얼굴에도 저런 미소가 피어나 있을까?’
지혜를 구하는 자들의 숙명인지 마법사들은 언제가 쫓기며 살아간다. 마법의 세계는 끝이 없다. 언제나 새로운, 더 높은 경지의 마법을 향한 갈망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낙천적이었던 란트렐도 웃음을 잃어버리고 다른 모든 마법사들이 그러하듯 마법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비록 황자의 부탁으로 골든 배틀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7서클의 벽을 깨지 못하고 10년째 정체를 겪고 있는 상황을 타개해 볼 생각에서 나온 결정이지, 진심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차의 향기만으로 이렇게 만족스럽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란트렐이다. 그래서인지 이 자리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동안 그를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단단하던 7서클의 벽이 왠지 한결 얇아진 느낌이었다.
잠시 차향을 음미하던 사람들이 조금씩 차를 마셨다.
‘하아! 정말 환상적이군.’
혀끝에서 느껴지는 단맛, 그 뒤를 이어 짠맛과 신맛이 연거푸 느껴지더니 매운맛까지 났고, 급기야는 쓴맛까지 느껴졌다. 이런 오묘한 맛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맛이 절묘하게 섞인 차는 처음이다.
다섯 가지 맛이 연속으로 혹은 두세 가지가 동시에 느껴지는 기분이란 정말 마법의 새로운 진경을 보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혀와 입안으로 차의 오묘한 맛을 충분히 즐긴 다음 목으로 넘기고 나니 입안에는 상큼하고 개운한 느낌이 남았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향긋한 차향과 그 남은 맛이란 정녕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의 다름 아니었다.
딜런은 이 오미차를 마실 때면 언제나 그렇듯 두 눈을 감고 온몸의 긴장을 남김없이 풀고 차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온몸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오미차에 반응하여 감동으로, 환희로 곤두서고 떨리는 그 감각이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검로를 찾은 것과 비슷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막사 안에는 한동안 향기로운 침묵이 흘렀다. 막사 밖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안으로 들어갈 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탄식이 흘러나왔다.
“허어! 벌써 다 마셨다니.”
딜런은 아쉬운 표정으로 텅 빈 찻잔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의 코와 입 그리고 머릿속에 오미차의 향과 풍미가 진하게 남아 있었지만 눈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었다.
“차를 다 마시고 이렇게 아쉽고 안타깝기는 처음이군.”
란트렐은 친구의 그 마음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돌아보니 힐튼 역시 마찬가지인 듯 입안에 머금은 찻물을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귀한 차를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란트렐은 진심을 담아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녕 이렇게 훌륭한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차를 즐기는 분과 함께 이 오미차를 마시게 되어 저 역시 만족스럽습니다.”
단지 차 한 잔을 같이 마신 것에 불과하지만 막사 안은 어느새 훈훈한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오미차 한 잔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강한 유대감을 형성해 준 것이다.
“그래, 어떤 말씀을 하려고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셨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네, 말씀드리지요. 사실 저는 1황자 전하를 모시고 있습니다.”
란트렐은 자신의 현재 위치부터 시작해 1황자의 의뢰까지 내처 한꺼번에 이야기했다. 그 와중에 황자들의 관계라든가 또 다른 제국의 주인인 원로원과 최고 귀족 회의에 대한 언급까지 곁들여 가며 자세하게 배경까지 설명해 주었기에 하룬은 많은 사실들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흐음, 사정은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하룬의 말을 들은 란트렐과 힐튼은 그가 이 의뢰를 맡으면 반드시 완수할 수 있다는 강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의견을 낸 힐튼이나 동조한 란트렐은 이 의뢰가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오히려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용병이라지만 과연 용병이 현자들이나 고위 마도사들도 알지 못하는 엘프어를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엘프들과 협상해서 던전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하께서는 무리한 조건이 아니라면 대장이 원하는 그 어떤 조건이라도 들어주실 의향을 가지고 계십니다.”
“일단 엘프들과 만나서 이야기는 해 보지요. 성공 보수는 그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가능할 것도 같은데 이야기를 해 보기 전에는 모르니까요.”
뜻밖이다. 용병대장이 저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그것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딜런 경, 준비하세요. 당장에 드워프들을 만나러 가시죠. 마침 정착 파티를 한다는 날도 가까워졌으니 가서 축제도 즐기고 엘프들과의 자리를 주선하는 것도 부탁해 보지요.”
“네, 대장. 우리 둘만 갑니까?”
다른 대원들의 동행 여부를 물어보는 것이다.
“같이 가지요. 그동안 친해진 드워프들뿐 아니라 엘프들을 만나는 자리에까지 빼놓았다가는 그 등쌀에 나나 딜런 경이 제명에 못 살 테니까요.”
“껄껄껄!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럼 말해 놓겠습니다.”
딜런은 가가대소를 터트리며 옆 막사로 건너갔다.
“당장 가실 요량입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응ㄹ 하는지 모르겠다. 엘프들이 아니라 드워프들과도 자유로이 왕래하는 존재가 세상에 있을 줄은 생각도 해 보지 않은 란트렐이었다. 하룬이 하는 말로 보건대 드워프 종족의 원로들과도 가볍지 않은 관계를 맺은 듯했다.
“네. 일단 가서 엘프들과의 자리부터 주선을 부탁해 봐야겠습니다.”
“그, 그럼 저도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네?”
뜬금없는 부탁에 하룬이 의아해하자 란트렐의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사실 저 역시 드워프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말까지는 몰라도 가까이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면 제 안계가 넓어질 겁니다.”
하룬은 빙긋 미소 지었다. 사실 그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리지는 못해도 헤니나 지적 호기심이 강한 마법사의 생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시지요. 드워프들과는 어느 정도 왕래가 있어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그들은 인간에게 거부감이 심하니 기사들은 동행할 수 없습니다. 대신 안전은 우리가 보장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란트렐은 들뜬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옆에서 자꾸 힐튼이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지만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황자에게 보고할 사람은 있어야 했다.
‘제가 이 의견을 제시했단 말입니다!’
힐튼의 부릅뜬 눈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란트렐은 가볍게 무시했다. 녀석이야 아직 젊은 만큼 나중에 이런 기회를 가지면 되지만 그는 아니다. 이때가 아니면 전설로 남아 있는 이종족들을 언제 만나 본단 말인가?
“힐튼, 넌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가 전하께 이 모든 상황을 보고드려라. 상황이 많이 궁금하실 테니 지체 없이 일어서라.”
“네……에!”
힐튼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란트렐을 바라보며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기사들과 함께 1황자 진영으로 돌아갔다.
세 대원을 데리고 막사로 온 딜런이 달랑 로브만 걸친 란트렐을 보더니 하룬에게 말했다.
“대장, 방어구 좀 이 친구에게 빌려주면 안 될까요? 마법사라 혹시 모르니 말입니다.”
“안 될 건 없지요.”
하룬은 선선히 럼프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내주었다.
란트렐은 조금 황당한 얼굴로 딜런을 보았지만 그가 눈짓으로 재촉하자 할 수 없이 방어구를 착용했다. 방어구를 입고 몇 번 몸을 움직여 본 란트렐의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을 본 딜런이 웃으며 당부했다.
“이 방어구는 돌풍 용병대원만 입는 것이라네. 이 방어구를 입고 있는 동안은 우리 돌풍 용병대라는 생각으로 처신해야 하네. 알았나?”
“아…… 응, 알았네. 그런데 이런 방어구를 어떻게?”
돌풍 용병대 전용 방어구는 재질이 무엇인지 몰라도 입지 않은 듯 가볍고 착용감이 좋았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마치 30년은 젊어진 듯 강한 활력을 느낄 수 있었고, 힘과 근력이 넘쳤다. 이십 대로 돌아간 듯 육체가 젊어지고 강해진 것 같았다.
1황자의 측근인 그였지만 하드 레더로 이런 옵션을 가진 방어구는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방어구를 대량으로 갖출 수 있다면 전력은 일시에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다. 기사단의 보급에 이르기까지 관여하는 그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온 것이다.
며칠 전에 만났던 피엘과 엘저가 몇 명을 대동하고 그들을 찾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마침 있었군. 내 자네와 급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찾아왔네.”
“무슨 그런 말씀ㅇ르 하십니까. 친구와 아버님이 절 보러 오시는데 무슨 시간이 필요합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네.”
피엘은 하룬의 말이 마음에 드는 듯 살짝 미소 지었지만 얼굴 전체는 조금 심각해 보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막 여행 준비를 하는 대원들을 보았다.
“어딜 가나?”
“드워프들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볼일도 있고 의뢰 건도 있어서요.”
“그래?”
하룬의 대답에 피엘과 그를 뒤따라온 사람들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사이 딜런의 시선은 피엘의 뒤에 서 있는 인물들 중 한 명에게 꽂혀 있었는데 그의 시선을 받은 상대방 역시 딜런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호승심과 투기가 화염처럼 일렁이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시선의 교환뿐이었지만 곧 두 사람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오더니 좁은 막사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피부가 따끔해지는 것과 함께 온몸을 휘감아오는 강렬한 투기에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빈 찻잔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막사가 세찬 바람을 맞은 것처럼 펄럭였다. 두 사람의 기세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났다.
쩌저저정!
어느새 상대방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검대에 손을 얹은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공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상대방을 제외한 모든 것이 지워지고 있었다. 비슷한 경지의 두 검사는 시선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알아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나를 유형화시키는 경지의 두 사람은 검이 아니라 전신으로 마나를 상대방에게 방사하기 시작했고, 중간에서 충돌한 마나의 폭발력은 강력해서 주위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압박을 받았던 것이다.
‘참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군.’
하룬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해독약을 꺼내 삼키고는 칸젠의 소굴에서 얻은 비수를 꺼내 들었다. 더 이상은 자신도 견디기 힘들었다. 벌써 헤니 같은 경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싸가지, 준비해!
-알았어, 주인. 도대체가 개념이 없는 인간들이라니까.
싸가지는 투덜거렸지만 하룬의 소환에 응해 비수에 합체되었다.
“그만!”
하룬은 벼락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로 비수를 던졌다.
쩌엉!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지만 비수가 그 공간을 가르는 순간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후욱!”
“흐읍!”
그와 함께 막강한 기세를 뿜어내던 두 사람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두 사람은 다소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비틀거리다가 이내 균형을 잡았다. 그들의 시선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마나를 두 쪽으로 가르고 천천히 하룬에게 돌아가는 비수에 쏠려 있었다.
‘역시 대장이군.’
딜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사하던 기세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역시! 익스퍼트 최상급인 우리 두 사람의 엉켜있는 마나를 한 방에 가르다니. 소문이 과소평가되었군. 일개 용병이 소드 마스터 혹은 그 정도에 근접하는 경지라니. 기이한 일이군.’
딜런과 상대하던 검사의 눈은 놀람과 함께 순수한 경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것이 정령의 힘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보다 더 놀란 것은 피엘과 엘저였다. 특히 피엘은 두 사람보다는 아직 부족하지만 이미 익스퍼트 상급에 발을 내디딘 상태였기에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비리비리했던 애가 저렇게 괴물이 되어 버린 거야?’
‘혹시 무슨 목적이 있어 우리 엘저에게 접근했던 건가? 이건 아무리 정령의 힘이라도 말이 안 돼!’
다른 사람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대원들도 놀라는 상황이었으니 손님들은 말 다했다.
“나갈 거 아니면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헤니, 찻물을 좀 부탁해.”
“알았어요, 대장.”
아직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헤니는 후다닥 막사를 나가 미리 길어 둔 물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그사이 막사 안에 둥글게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놀람의 여운을 만끽하고 있었다.
대화는 헤니가 모두의 앞에 오미차를 내놓은 후에야 시작되었다. 피엘이 양쪽을 소개했다.
“인사하시오. 이쪽은 돌풍 용병대를 이끄는 하룬이오. 그리고 이쪽은 내 손님들로 온 1황녀 전하의 측근들이오.”
1황녀라는 말에 돌풍 용병대운들은 물론 란트렐까지 깜짝 놀랐다.
“반갑습니다. 돌풍 용병대를 이끄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우리 역시 용병계의 영웅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난 1황녀 전하의 수족인 메롤라스 백작이오.”
메롤라스 백작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절반쯤 하얗게 세어버린 반백의 귀족으로, 깊고 강렬한 눈빛으로 보아 뛰어난 지모를 가진 인물인 듯했다.
“뜻밖의 장소에서 개안開眼을 했소이다. 초면에 결례를 해서 사과드리오. 난 기사 아인델프요.”
그는 정중하게 사과하면서도 시선은 하룬과 딜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일렁였다. 어쩔 수 없는 기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쪽은 우리 대원들이오. 궁금한 점도 많지만 인사는 나중에 개별적으로 하도록 하고 일단 용건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막 움직이려던 참이라 말입니다.”
“그런 것 같군요.”
메롤라스 백작은 짐을 정리하던 상황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1황녀 전하께서 돌풍 용병대에 은밀히 의뢰할 일이 있어 수소문하다가 여기 있는 피엘 경이 돌풍과 잘 아는 사이라고해서 소개를 받아 왔소이다.”
잠시 말을 멈추고 주의를 환기시킨 그가 한층 은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설될 일이 없을 거라 보고 의뢰 내용을 말하지요. 돌풍 용병대장이 이종족의 언어를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아직 엘프들과 말을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가능할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이 능력을 어떻게 얻은 것인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1황녀 전하께서는 엘프들과의 협상을 통해 은밀하게 던전에 먼저 들어가시길 원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원하는 그 무엇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생각하던 그대로였다. 1황자 측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왜 다른 진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는가. 황제의 자리를 위해 수십 년을 준비해 온 세력이라면 제대로 머리가 있는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룬은 대답 대신 란트렐을 돌아보았다. 아직 의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그가 먼저 의뢰해 왔기에 우선권은 그에게 있었다. 하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던 1황녀 진영의 한 인물이 이제야 란트렐을 알아보고는 경악해서 소리를 질렀다.
“화, 황사께서?”
그제야 란트렐을 알아본 1황녀 측근들의 눈이 커졌다. 황사가 돌풍 용병대의 방어구를 입고 있고, 초면에 하룬과 딜런의 기도와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에게까지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허허허! 오랜만이오, 백작.”
“황사께서 이 자리엔 웬일이십니까? 혹시?”
메롤라스 백작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안 그래도 커진 눈이 찢어질 것처럼 변했다.
“백작이 생각하는 대로요. 아마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해낸 것 같소. 그래도 다행한 것은 우리가 먼저 돌풍 용병대에 의뢰했다는 것이오.”
란트렐의 대답을 들은 메롤라스 백작과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황사가 돌풍 용병대원들이 입는 방어구를 입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황이 어그러져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막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이 향할 곳이 어딘지도 알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다른 방도를 찾아야할 것 같소이다, 백작.”
대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입장이고 이번에는 다행히 선기를 놓치지 않은 황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메롤라스 백작과 아인델프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다급한 눈빛이 되었다.
사실 이 방안은 1황녀 진영의 참모부가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마련한 것이다. 그간 몇 번의 의뢰를 통해 안면이 있는 피엘에게 신비의 용병대인 돌풍의 대장이 이종족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을 전해 듣지 못했다면 아예 생각해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란트렐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1황녀의 측근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패배감 그리고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있을 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니지요. 아직 결정된 것은 없어요.”
“무, 무슨 소리지, 그게?”
아인델프의 옆에 앉아 있던 면사를 쓴 여인이 방금 말한 헤니를 보며 물었다. 뭔가 강하게 열망하는 뜨거운 눈길을 보내면서 말이다.
“말 그대롭니다. 아직 의뢰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용병대와 안면이 있는 드워프들이 자리를 주선할 수 있는지, 그들과 만나 가능한지 여부도 모르는 상태이니 제의야 누구든 받아도 되는 거지요.”
헤니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급변하고 있었다. 란트렐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아인델프를 비롯한 1황녀 진영의 사람들은 활짝 얼굴을 폈다.
란트렐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또 다른 방문객이 등장했다.
“하룬 대장! 티노 부대장! 안에 있는가?”
밖에서 나는 소리에 티노의 눈이 커졌다. 그가 평생 들어온 목소리였다. 바로 데브론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티노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과연 데브론이 기사 한 명과 함께 서 있었다.
“데브론 님!”
“허허허, 제대로 찾아왔군.”
데브론이 티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여긴 어떻게?”
“후훗, 이 트레저 분지에 도착하자마자 짱짱하게 울리는 돌풍 용병대의 이름을 듣고 반가워서 찾아왔지.”
티노는 헤어질 때보다 수척해진 데브론의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지금은 예전의 티노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주군이나 다름없는 데브론이기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가 더 입을 열기도 전에 하룬이 황급히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데브론 님!”
“허허, 장하이!”
뭐가 장하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룬의 눈에는 티노가 그랬듯 수척해지고 늘어난 주름살만이 들어왔다. 스승이나 다름없는 데브론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하룬은 말없이 데브론의 손을 잡고 온기를 전했다.
하룬의 뒤를 따라 나온 사람들은 돌풍 용병대의 대장과 부대장이 그렇게까지 반기는 데브론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더 나타난 것이다.
“대장, 오랜만이오.”
아반이었다.
“하하, 나도 왔습니다.”
발트랑과 사예까지 나타났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인물들과 함께 왔는데 한 무리는 아니었다. 따로 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손님들이 많이 올 것 같군.”
“무슨 소리에요, 딜런 경?”
굳이 딜런 자신의 입으로 헤니의 물음에 대답해줄 필요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몇 팀이 그들의 막사를 향해 경쟁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To Be Continued